지구 끝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고 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막상 가보면 그리 멀기만 한 곳도 아니다. 남극 바로위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친 일부지역을 칭하는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등산복 브랜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남반구에 위치하여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은 연중 기온이 낮아 11월에서 3월이 여행적기이며, 이때 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토레스 델파이네의 바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자연은 냉혹하여 불평을 허락하지 않는다던가? 절대적 힘 앞에서 작은 불평 따위는 내동댕이쳐버리게 되는 곳이 파타고니아가 주는 힐링의 힘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라면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바람을 기꺼이 마주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 쪽이 낫다. 사람은 40m/s를 넘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는데, 이곳은 최대 풍속이 60m/s를 넘는 일도 많아서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Eric Shipton)은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다는 곳.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혹독한 곳에 가려하는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결행
1989년 1월, 48세로 요절한 브루스 채트윈은 의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93세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녀가 그린 파타고니아 지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아일란은 자신은 이미 늙어 갈 수 없다며 브루스 채트윈이 대신 그곳에 가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 브루스는 다니던 신문사에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한 을 남긴 채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쓴 책 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였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일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밤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거기에 살면서 저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문명의 이기는 거리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린 이제 단 두 시간에 비행기로 목적지에 갈수도 있고, 수 십 시간을 버스를 달려 육로를 통해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사이에서. 속도와 비속도 사이에서.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우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행기로 단 두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로 온종일 달려서 간다. 느린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30시간의 버스여행이 쉽지 않다. 그래도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파타고니아 땅만은 꼭 육로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도로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0시간을 달려도 피곤함보다는 오랜 상상이 실현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창밖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 길이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땅덩어리. 사막에서 툰드라로, 와이너리가 펼쳐진 녹색의 땅으로, 그리고 바다와 산맥, 파타고니아 빙하에 이르기까지.
이름 모를 도시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내리고 또 타고 손님을 끝없이 바꾸며 TUR 버스는 달려간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직진으로 난 길. 고속도로 휴게소엔 먹을게 별로 없고, 떡복이와 오뎅, 우동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저 커피한잔과 웨하스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간간이 노점상이 차에 오르기도 하는데 먹을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파타고니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다섯배 크기. 우리나라 북쪽끝에서 남쪽 끝까지 달려봐야 고작 5시간인 곳에 살던 나는 그저 한도시에서 옆 도시로 가는데 30시간이 걸리는 이 나라에 와서야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한다.
파타고니아의 비경을 잇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루트 40!
이곳에 오면 마음을 방해하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을 명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정직한 선.
가다가 얽히거나 꼬임이 없이 그저 올곧게 이어지는 선을 보며 굽혀진 마음을 조금은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 무엇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 왠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지만 땅보다 더 큰 면적으로 다가오는 광활한 하늘은 늘 빌딩에 가려져 그 모양을 알 수 없었던 구름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과 페리토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곳을 꼽는다면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의 페리토모레노를 비롯한 약 50개의 빙하국립공원이다. 3개의 화강암 봉우리를 비롯해 해발 2천5백미터의 설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토레스델파이네는 남미 최고의 풍광으로 눈이 닿는 곳마다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봉우리를 지나 길고긴 잿빛 모래를 한참을 걸어가서야 만난 그레이 빙하(Grey glacier)는 이름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마주보며 다가가는 길, 어디선가 우루루쾅쾅 땅이 갈라지는 듯한 들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 한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지구의 한끝이 닳아 없어지는 듯 가슴속이 철렁해져 온다.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북쪽 입구라 할 수 있는 엘찰텐에서는 모든 등반가들의 꿈이라 일컬어지는 피츠로이산(3,405미터)을 등반할 수도 있다. 모레노빙하의 관문이라할 수 있는 엘칼라파테 마을은 가장 번화한 곳으로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헨티나산 말벡 와인한잔에 스테이크의 호사를 누리며 쌓인 피로를 씻어보는 것도 좋다. 30킬로미터 길이에 5킬로미터의 폭, 60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 펠리토모레노 빙하는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수천년된 빙하위에서 빙하조각을 넣은 위스키한잔을 마셔보자!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빙하를 보는 또 다른 방법중 하나는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으로 웁살라(Upsala)빙하크루즈는 세계최대의 빙하와 수많은 빙산을 크루즈로 돌아볼 수 있다. 빙하라고 하면 무척 추울 것 같지만 맑은 날씨엔 후드티 하나만으로 충분할만큼 그곳 여름의 날씨는 그리 춥진 않다.
파타고니아엔 크고 작은 빙하가 50개 이상이 있으며, 남극과 그랜란드 다음으로 양이 많다.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많은 비가 빙하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난빙하에 속하는 이 지역의 빙하는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름과 겨울의 이동 속도는 다르지만, 연간 평균 100m에서 200m 사이의 속도로 움직여서 육안으로도 빙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크루즈나 트레킹 중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빙하붕괴현상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있다.
지구 최남단마을, 우수아이아(Ushuaia)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몇 번씩 오가는 여행이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 엘칼라파테, 모레노빙하를 만나고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을 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고, 마젤란 해협을 웅장한 크기의 배, 파타고니아호를 타고 건넜다. 심한 바람엔 장사 없는 듯 그 큰 배도 휘청대고 약간의 배 멀미도 났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바다건너서 도착한 우수아이아. 우수에 찬 듯 보이던 그 곳. 사람들이 왜 이곳을 지구의 끝. 핀 델 문도(FIN DEL MUNDO)라 했는지 몸으로 와 닿는다.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최남단 마을인 우수아이아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아래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마을이다. 먼옛날 대항해시대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고 전해지는 곳.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상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떨어진 곳. 핀델문도(땅끝)박물관에는 찰스다윈이 비글 해협을 항해할 때의 항해일지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까지 온 수고로움을 치하해주듯 여권에 스탬프도 찍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엽서를 보낼 수 있는 파란 우체통도 마련되어 있다. 장거리버스와 배 멀미로 지쳐있던 나는 한글로 주소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고 말았는데,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엽서를 친구가 받았단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자가 왔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Travel tip
◆가는 법: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방법은 항공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란항공(http://www.lan.com)과 버스를 타고 육로나 배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시간과 체력을 절약하고자 한다면 항공이 좋겠지만 남미의 어마어마한 대지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2층침대 버스가 의외로 편리하므로 육로이동도 고려해볼만 하다.
◆꼭 방문해야할 주요도시 및 장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엘칼라파데. 엘찰텐, 피츠로이, 페리토모레노빙하, 마젤란해협. 우수아이아, 핀델문도박물관. 칠레 산티아고,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
◆여행적기 및 기온: 파타고니아는 우리와 정반대로 우리가 겨울일때가 그곳의 여름이다. 2월에 방문하면 그곳의 여름에 해당하지만 빙하라고 해서 생각한만큼 춥진 않고 18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바람이 부는 토레스델파이네는 파카가 필요할만큼 춥기 때문에 사계절 옷이 다 필요하다.
도보여행은 조금 특별해야 한다. 많은 곳을 바쁘게 보는 것보다는 좀 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 사람이 무조건 많은 관광지보다는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 단순히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보다는 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시니어 전문 테마여행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링켄리브와 함께 준비했다. 천천히 길 위를 걸으며 문화와 예술,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일곱 색깔의 여행지, 시니어가 걷기 좋은 길이다.
스톡홀름 감라스탄 옛길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의 감라스탄 지역은 약 800년 전에 조성된 거리로 중세의 건축물과 왕실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느린 걸음으로 천년 세월을 견딘 돌길을 걷고 있으면 북유럽 고유의 정경이 그림 같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이라는 명성답게 감라스탄 주변으로 헬게안스홀멘 등 작은 섬들이 물 위에 떠 있다.
3대 피오르 트레킹
수만 년 동안 빙하가 조각한 장엄한 협곡을 ‘피오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가 많기로 유명한데, 이 중 대표적인 3대 피오르(시에라볼텐, 프레이케스톨렌, 트롤퉁가)를 등산하는 트레킹 코스는 살면서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걸음마다 진귀한 꽃이 꼬리를 물고, 등반 끝에는 마치 지구가 아닌 것 같은 피오르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코펜하겐 아트 스트리트
감라스탄이 북유럽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길이라면 코펜하겐 도심의 예술 거리는 북유럽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소박하지만 값진 행복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는 바쁘게 살아온 한국의 시니어에게 삶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코펜하겐의 디자인센터, 세계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의 공방, 가구 갤러리를 걷다 보면 북유럽 문화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의 정경
프로방스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곳이라면 전 세계 문인과 작가들이 찬사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다. 태양의 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따뜻한 햇살이 막힘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른 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잘 익은 와인과 한없이 넓은 와이너리, 풍성한 올리브나무가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남부 절경의 해안마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소렌토, 아말피, 포시타노)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절경을 선물한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절벽과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은 마을들을 반나절씩 걷고 나면 카프리 해의 맑은 바람이 다정하게 땀을 식혀준다.
프로방스 작은 예술마을 길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파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수많은 예술가와 명사가 사랑하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지역은 따로 있다. 프랑스의 찬란하고 눈부신 남쪽 땅 프로방스. 고흐부터 피카소, 샤갈, 마티스, 세잔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감을 얻고 말년에 정착했던 곳이다. 아를, 액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그라스 등 작고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따뜻한 남프랑스의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삶의 영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기적의 알펜루트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는 봄가을에 각기 다른 정경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오죽하면 기적의 알펜루트라 불릴까. 봄에는 자그마치 높이 22m의 설벽이 30km에 걸쳐 펼쳐지고, 가을에는 온갖 단풍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다. 잠시이지만 이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펜루트를 잊지 못해 다시 방문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걷기좋은길 #해외 #여행
도보여행은 조금 특별해야 한다. 많은 곳을 바쁘게 보는 것보다는 좀 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 사람이 무조건 많은 관광지보다는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 단순히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보다는 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시니어 전문 테마여행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링켄리브와 함께 준비했다. 천천히 길 위를 걸으며 문화와 예술,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일곱 색깔의 여행지, 시니어가 걷기 좋은 길이다.
북유럽
Sweden
스톡홀름 감라스탄 옛길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의 감라스탄 지역은 약 800년 전에 조성된 거리로 중세의 건축물과 왕실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느린 걸음으로 천년 세월을 견딘 돌길을 걷고 있으면 북유럽 고유의 정경이 그림 같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이라는 명성답게 감라스탄 주변으로 헬게안스홀멘 등 작은 섬들이 물 위에 떠 있다.
Norway
3대 피오르 트레킹
수만 년 동안 빙하가 조각한 장엄한 협곡을 ‘피오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가 많기로 유명한데, 이 중 대표적인 3대 피오르(시에라볼텐, 프레이케스톨렌, 트롤퉁가)를 등산하는 트레킹 코스는 살면서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걸음마다 진귀한 꽃이 꼬리를 물고, 등반 끝에는 마치 지구가 아닌 것 같은 피오르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Denmark
코펜하겐 아트 스트리트
감라스탄이 북유럽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길이라면 코펜하겐 도심의 예술 거리는 북유럽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소박하지만 값진 행복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는 바쁘게 살아온 한국의 시니어에게 삶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코펜하겐의 디자인센터, 세계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의 공방, 가구 갤러리를 걷다 보면 북유럽 문화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서유럽
Italy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의 정경
프로방스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곳이라면 전 세계 문인과 작가들이 찬사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다. 태양의 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따뜻한 햇살이 막힘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른 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잘 익은 와인과 한없이 넓은 와이너리, 풍성한 올리브나무가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남부 절경의 해안마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소렌토, 아말피, 포시타노)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절경을 선물한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절벽과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은 마을들을 반나절씩 걷고 나면 카프리 해의 맑은 바람이 다정하게 땀을 식혀준다.
France
프로방스 작은 예술마을 길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파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수많은 예술가와 명사가 사랑하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지역은 따로 있다. 프랑스의 찬란하고 눈부신 남쪽 땅 프로방스. 고흐부터 피카소, 샤갈, 마티스, 세잔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감을 얻고 말년에 정착했던 곳이다. 아를, 액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그라스 등 작고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따뜻한 남프랑스의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삶의 영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아시아
Japan
기적의 알펜루트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는 봄가을에 각기 다른 정경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오죽하면 기적의 알펜루트라 불릴까. 봄에는 자그마치 높이 22m의 설벽이 30km에 걸쳐 펼쳐지고, 가을에는 온갖 단풍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다. 잠시이지만 이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펜루트를 잊지 못해 다시 방문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시니어를 위한 테마여행사 ‘링켄리브’
느림의 미학이 있는 여행, 삶의 여유와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지향하는 국내의 대표적인 테마여행사 링켄리브는 시니어를 위한 다양한 여행을 기획, 진행하고 있으며 그동안 아무나 쉽게 떠날 수 없었던 여행들을 선보이고 있다. 시니어가 걷기 좋은 도보여행,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여행,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있는 테마여행, 유명 작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등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가끔 내리는 비가 성급하게 여름으로 치달으려는 대지를 달래주는 덕에 봄 날씨가 겨우 연명하고 있다. 화사한 꽃이 만발한 따뜻한 봄날에 걸맞은 싱그러운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프랑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다. 원제는 ‘Back to Burgundy’로 그저 와인의 명산지인 부르고뉴로 돌아왔다는 말인데 영화 수입사가 설명적인 제목을 덧붙이는 바람에 멋이 사라졌다.
역시 문화 장사꾼인 프랑스인답게 자신들의 장기인 와인과 아름다운 자연을 버무려 멋진 안구 정화 장면을 선사한다. 스토리도 일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를 결합해 매우 건전하다. 요즘 소재결핍에 시달려 만화에 의지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에 지친 전통적인 영화팬들에겐 이런 진부한 듯 보이는 소재가 오히려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프랑스 영화다운 자부심일 터이다.
자줏빛을 띤 붉은색을 뜻하는 영어 ‘버건디(burgundy)’는 부르고뉴 지역에서 나는 와인을 통칭하는데 이 지역은 가족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그중 한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자상하지만 고집스러운 아버지 밑에 삼 남매가 등장한다. 큰아들 장(피오 마르마이)은 10년 전 세계 일주를 핑계로 집을 나갔다. 둘째인 딸 줄리엣(아나 지라르도)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고 있고 막내 제레미(프랑수아 시빌)는 결혼 후 처가 월드에 시달린다.
이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건 아버지의 죽음이다. 세 남매는 그사이 폭등한 땅값으로 엄청난 상속세가 나오는 데 반해 정작 와이너리의 수익성은 1% 내외로 쪼그라들어 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상처를 간직한 세 남매는 눈앞에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뜻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와인 만들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흔하다.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살리는 힘은 디테일에 있다. 이 영화는 7년의 제작 기간과 1년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만큼 프랑스 시골 마을의 사계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영화는 인간관계와 와인의 숙성과정을 병행시키며 사랑과 갈등을 밀도 있게 그린다. 이런 사실성이 설득력을 만들어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와인은 인생의 은유이다. 땅을 팔 것인가 말 것인가 옥신각신하면서도 세 남매는 누가 서툴게 잔가지를 쳐내는 꼴을 못 본다. 인간의 DNA는 이처럼 무섭다. 그저 포도알을 터뜨려 만든 술인데도 와인마다 향이 다르다. 셋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러나 숙성이 오랠수록 향이 진하듯 그들도 서로의 다름을 사랑으로 성숙시킨다. 장의 혼잣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와인처럼 사랑도 시간이 필요하더라. 시간이 흐른다고 상하는 건 아니었어.”
우리말에 ‘삭다’와 ‘썩다’가 있다. 두 단어는 같은 뿌리이면서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와인은 오랜 시간 두어도 썩지 않고 삭아 뛰어난 향과 맛을 만든다. 사랑도 썩지 않고 곰삭아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려면 발효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발효가 일어나려면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와인에서 배운 사랑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사회로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 관객들 반응이 대단하다. 어벤저스 류에 지친 관객들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인의 얼룩은 천연섬유에 묻었을 때 유난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의 가족애가 가슴에 오래 남을 듯하다.
충북 영동 심천면. 물이 깊다[深川]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 뿌리 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50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새 둥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술 익는 내음. 이 고즈넉한 풍경과 꼭 닮은 ‘시나브로 와이너리’ 소믈리에 가족을 만나봤다.
“아가, 와인 한 모금 마셔볼래?”
이른 아침, 시아버지 이근용(60) 씨가 며느리 박영광(28) 씨에게 와인을 건넨다. 그러곤 와인의 향과 풍미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구부간(舅婦間) 모습에 시어머니 이성옥(58)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평범하지 않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일상은 이들 모두가 소믈리에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여기에 한 명 더, 아들 이병욱(33) 씨 역시 소믈리에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로 가족 모두가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이들의 와인사랑은 2007년, 이근용 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부터 숙성되기 시작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덜컥 회사를 그만뒀어요. 어느 날 영동에 땅을 사더니 이름도 ‘불휘농장’이라 지었더라고요. 불휘가 ‘뿌리’의 고어인데, 자기 이름에 ‘근(根)’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지었다나.(웃음) 그렇게 한동안은 대전 집과 영동을 오가면서 농사를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집터에 정착했어요. 그때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가 참 마음에 들었죠. 이웃 어르신 권유로 포도를 재배했는데, 수확물은 품질이 괜찮았어요. 근데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죠. 그러던 차에 영동군에서 와인산업 특구 조성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는지 이번엔 남편이 와인 양조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레드 와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반면, 청포도로 화이트와인을 선보인 것이 차별화가 됐던 것. 천천히 음미하고, 서서히 와인에 빠져든다는 의미로 ‘시나브로’라는 브랜드네임을 달았다. 또 보금자리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의 모습을 본따 와인 레이블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불휘농장표 시나브로 와인은 각종 와인 품평회에서 대상, 금상의 영예를 안으며 토종 와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나브로 새댁, 토종 와인 전도사 되다
한창 와인 사업에 물이 오를 무렵, 아들 병욱 씨는 당시 여자 친구였던 영광 씨를 와이너리에 초대했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근용 씨 내외와 영광 씨는 그 이듬해 가족이 됐다. ‘시나브로’라는 와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뤄진 셈. 결혼과 더불어 아들 내외는 부모님의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겠다는 결심도 들려줬다. 와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던 두 사람, 특히 서울 토박이였던 영광 씨가 귀농을 결심한 까닭이 궁금했다.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당시에 한창 사업이 바빴는데 시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시기에 버거우실 것 같더라고요. 가업도 돕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경험해보고 싶어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가업에 뛰어들며 영광 씨와 남편 병욱 씨는 소믈리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아버지 근용 씨, 2016년 어머니 성옥 씨에 이어 2017년 아들 내외까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 이로써 소믈리에 패밀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온 가족이 영동 유원대학교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가업과 학업을 위해 서울과 영동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에 신혼인데도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아들 부부. 인터뷰를 당일에도 가능한 한 네 사람이 모이길 바랐으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쉽게도 아들 병욱 씨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업이니 늘 가족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포도 농사부터 와인 판매까지 일련의 과정을 단 네 사람이 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아버님은 포도 재배와 양조, 어머님은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판매, 저와 남편은 와이너리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가족끼리 하는 사업이다 보니 선 긋듯 일하기보다는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전에 직장에 다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일을 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그런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임원, 회의는 식사시간에
가족이 사업을 함께하면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 장점이 크지만 자칫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며 차츰차츰 균형을 잡아나갈 계획이라고. 서로 일적으로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바로 호칭 아닐까? 각자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남편이 대표, 아들은 실장, 며느리는 이사예요. 저는 작년까지 홍보 팀장이었는데 애들이 오고 나서 홍보이사로 승진했어요.(웃음) 기업으로 따지면 가족 모두가 임원인 셈이죠.”
일과 관련한 회의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주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 부모 자식 간 일상 대화에서도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사업을 함께하는 네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근용 씨다.
“나랑 아내는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뭔가 변화를 주더라도 천천히 했으면 하는데, 애들은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신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거를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해요. 멀리서 보면 별일 아닌데도, 가족이니까 더 가감 없이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다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갈등이죠. 그래도 역시 가족이다 보니 금세 마음 풀고 웃게 돼요.”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음은 필수. 가족 구성원이 60대, 50대, 30대, 20대인 덕분에 각자 세대의 대표주자가 되어 의견을 나누고 대중적인 와인 맛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근용 씨가 영광 씨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와인 맛을 조절한 덕분에 이전보다 젊은 여성 고객의 주문도 늘어났다고. 일 때문에 와인을 달고 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 와인을 즐기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이들이다.
글로리아 와인, 그 이후
인터뷰 당시, 시나브로 와인들 좀 자랑해주시라 했더니 근용 씨 내외는 너 나 할 거 없이 ‘글로리아’ 와인을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핑크빛이 도는 레드 와인인데, 캠벨과 아로니아로 맛을 냈다. 그런데 시나브로 특유의 느티나무 레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와인 잔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 성옥 씨는 와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며느리 자랑으로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탄생시킨 와인이에요. 우리 며느리 이름(영광)을 따서 ‘글로리아’라고 지었어요. 이 로고 디자인은 며늘아기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창가에 있는 보자기 상자들 보이죠? 다 며느리가 배워서 꾸며놓은 것들이에요.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창가마다 줄줄이 전통 보자기로 감싼 상자들이 진열돼 있었다. 토종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인 만큼 제품 포장도 한국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란다. 아직 해외 와인에 비해 국내 와인이 저평가받는 것이 안타깝다며 적극 토종 와인 홍보에 나서겠다는 영광 씨. 열정적인 며느리의 모습에 반한 근용 씨 내외는 장차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막중한 임무라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 패기 넘치는 새댁은 글로리아 와인처럼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도, 변화시킬 것도 많죠. 뭔가를 시도해보고,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멀리 보고 하나하나 시나브로 정착해나가야죠. 아마 저와 남편이 시부모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시나브로 와인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시나브로 브랜드 와인 중 가족 이름을 담은 와인은 ‘글로리아’가 처음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시며 후손들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하자, 맞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피는 세 사람. ‘소원 나무’라 별칭을 붙인 정원의 느티나무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수기업으로 이름 남길 소망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포르투갈.
영토는 한반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서유럽에서는 최고로 가난하다. 그런데 포르투갈 여행을 하다 보면 왠지 친밀하다. 일찍이 해양 진출을 통해 동양 마카오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고 가난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겹고 사랑스러운 나라. 그라피티가 난무하는 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이 있는 빈민촌 같은 골목에서 은근슬쩍 비춰주던 강변의 아름다운 전경. 지는 햇살에 한껏 색깔을 내주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소도시 포르투 여행은 그냥 행복하다.
도우루 강변의 항구도시, 2000년 역사지구
도우루(Douro) 강변 도시 포르투(porto) 시내에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상 밖으로 앤티크한 웅장한 건물들이 온 도심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벤투 역,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 포함된 도우루 강 어귀의 포르투 역사지구(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2000년 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시대별 건축물들이 있다.
포르투의 중심지인 자유(리베르다지, liberdade) 광장 위쪽, 포르투 시청사 주변에는 상벤투 역, 포르투 대성당, 76m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클레리구스(Clerigos) 성당과 종탑, 카르무(Carmo) 성당,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볼사궁전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건축물 중에는 파란 타일을 이어 그림을 그려놓은 아줄레주(Azulejo, 주석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포르투갈 특유의 푸른 빛 타일)가 특징적이다. 또 포르투는 를 쓴 조앤 롤링(Joan Rowling, 1965~)과도 연관 깊은 도시다. 조앤은 1991년 11월부터 이곳 인카운터 영어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1992년 10월에는 현지 방송사 기자인 3세 연하의 조르즈 아란테스(Jorge Arantes)와 결혼해 1993년 7월에 딸을 낳았지만 그해 이혼하고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 명작을 남겼다. 그녀가 이 도시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렐루 서점(Livraria Lello),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 1921년 오픈)는 이제 명소가 되었다.
포르투를 여행하는 재미는 따로 있다. 이런 역사적인 건축물도 좋지만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 여행이 특별하다. 강변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난한 건축물들과 그라피티가 난무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도우루 강변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작은 박물관, 오래된 개인 저택, 공원 등도 흥미롭고 현지인들의 친절도 정겹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도와줄까?”를 묻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포르투다.
도우루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와이너리
포르투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도우루 강변을 잇는 카이스 다 히베이라(Cais da Ribeira, 강변의 부두라는 뜻) 거리다. 도우루 강변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도심의 집들이 이어지고 동(쪽) 루이스 1세 다리까지 와인 판매장, 노천 바들이 이어진다. 도우루 강변을 걸치고 있는 172m의 길이에 아치형의 루이스 1세 다리는 포르투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이 다리는 에펠탑으로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eophile Seyrig)가 설계해 1886년에 완공했다.
1층에는 자동차가, 2층에는 트램이 다닌다. 1, 2층 모두 보행자 도로가 있어서 걸어 다니며 강변 풍치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와 강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다.
강을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지역의 강변길에는 샌드맨(Sandman), 테일러(Taylor), 그라함(Graham), 카렘(Calem), 오플리(Offley), 크로프트(Croft), 도우(Dow), 라모스 핀토(Ramos Pinto) 등 유명 와이너리가 줄지어 있다. 입장료만 내면 와이너리의 역사, 특징, 재배 및 제조과정, 저장 중인 와인 종류와 특징 등을 알아보는 투어를 할 수 있다. 또 강변을 따라 ‘도우루 아줄(Douro Azul)’ 유람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치는 훨씬 입체적이다. 도우루 강변에 있는 6개 다리(동 루이스 1세, 마리아 피아, 인판테, 상주앙, 프레이소, 아라비다)도 볼 수 있다.
포트와인 이야기
포르투 와인을 ‘포트와인(Port Wine)’이라 부른다. 이곳이 포도 산지로 유명해진 시기는 17세기. 100년 전쟁으로 오랜 견원지간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냉전에 들어갔다. 단단히 토라진 프랑스는 영국에 와인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와인의 공급지를 새로 구해야 했던 영국 상인들은 빌라 노바 드 가이아로 이주해 자국으로 수출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한 달이 걸렸고, 그 사이 와인은 식초가 되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숙성시킨 포르투 와인이었다. 알코올 도수는 더 높아지고, 당분 발효가 중단되어 더 달콤한 맛을 냈는데, 이것이 큰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 후 포르투갈은 발달된 항해술로 일찍이 신대륙과 아시아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한 서양 와인도 바로 ‘포트(Port)’다. 아직도 와인은 달고 은근히 취하는 술이라 여기고, 오래될수록 좋은 와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 ‘포트’ 때문이다. 포르투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와인에 포트와인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포트와인은 알코올 함량(18~20%)이 높아 취하기 십상이다. 잘 구운 닭 요리에 도수 높은 포도주 알코올에 취하는 포르투는 영원히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직항은 없다. 먼저 마드리드, 파리,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서 포르투갈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면 한국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가는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마드리드에서 저가 항공을 이용하거나 차마르틴 역에서 야간열차를 이용해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10시간 30분 소요)까지 가면 된다. 마드리드-리스본행도 운행되고 있다.
현지 교통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포르투까지 버스로 약 3시간 30분, 기차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리스본 공항역에서 출발하는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오리엔테 역(약 10분 소요)으로 가면 기차나 버스(Renex)를 이용할 수 있다. 기차는 포르투 캄파냐 역에서 환승해 지하철로 포르투의 중심지인 상 벤투 역에 하차하면 된다. 버스는 환승이 필요 없다.
맛집 정보 포르투갈은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프란세지냐(Francesinha)가 있다. 양이 어마어마해 ‘내장파괴버거’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또 그릴에 구워주는 닭고기 요리가 맛있다. 청과물 시장에서 파는 과일들도 맛이 좋다.
숙박 정보 포르투의 베스트 호텔은 도우루 강을 전망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이트맨(Yeatman) 호텔이다. 야외에서 레드와인 목욕을 즐기거나 와인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소니(Nicolau Nasoni)가 설계한 페스타나 팔라시오 도 프레익소(Pestana Pala′cio do Freixo)는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포르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호텔의 프랑스풍 정원 앞으로 푸른 도우루 강이 펼쳐진다. 이 외 18세기 궁전을 개조해 만든 최고급 호텔인 인터컨티넨탈 포르투(Intercontinental Porto)와 2개의 실내 수영장, 터키식 목욕탕, 사우나, 스쿼시 코트 등을 갖춘 포르투 팔라시오 콩그레스 호텔 앤 스파(Porto Pala′cio Congress Hotel & Spa) 등 꽤 많다. 고급 숙소는 100만원이 넘지만 4~5만 정도로도 2인용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
물가 정보 포르투갈의 통화는 ‘유로화’다. 유럽에서는 물가가 낮은 편이어서 큰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날씨와 옷차림 유럽의 11월(가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다. 평균 최저기온은 영상 11.2℃, 평균 최고기온은 영상 17.8℃로 선선한 가을 날씨를 생각하면 된다. 한 달에 2주 정도 비가 내리는데 적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우산을 지참해야 한다. 또 낮에는 선선하지만 밤에는 쌀쌀하니 긴소매 옷들과 두께가 있는 외투와 점퍼를 함께 준비하면 좋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포르투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이 넘치는 도시다. 세계 베스트 관광지에서 항상 최고 순위를 차지하는 곳이지만 물가가 그다지 비싸지 않고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다. 강변에서 여유롭게 낚시도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포도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와인 투어는 필수다. 나라가 크지 않으니 수도 리스본과 주변의 소도시 여행을 연계하면 된다.
‘캘리포니아’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한여름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캘리포니아의 반쪽 모습만 알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와인의 90% 이상을 생산하고 있는 와인 주산지다. 북가주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를 비롯해 중가주 파소 로블스와 샌타바버라, 그리고 남가주의 테메큘라 밸리까지,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이 중 테메큘라 밸리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욱 호젓한 멋과 낭만이 있다. 10월, 캘리포니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포도 향 가득한 테메큘라 밸리 와이너리를 목록에 넣어두자. 포도 수확이 시작되는 지금이야말로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빈야드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함께 와인잔을 기울일 오랜 친구가 동행한다면 더없이 좋겠다.
“어디? 드라큘라?”
테메큘라를 처음 듣는 사람은 독특한 이름 탓에 십중팔구는 이렇게 되묻는다. 이번 취재에 동행한 이들도 그랬다. 카메라와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나를 대신해 와인 테이스팅에 참여해줄 두 친구였다. 다행히 나보다 주량도 세고 와인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니 이보다 좋은 길동무가 있을까.
LA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곳,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테메큘라는 해발 1500피트의 낮은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테메큘라라는 이름은 인디언 원주민어인데 ‘물안개 속의 햇빛(Sunshine through mist)’이라는 근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침이면 바다에서 불어온 물안개가 온 땅을 덮었다가 낮이 되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테메큘라의 독특한 날씨를 의미한다. 포도 산지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조건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곳, 테메큘라 밸리
10월의 테메큘라 밸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남가주에서 가장 큰 규모인 3만3000에이커(약 4000만 평)에 달하는 포도재배구역(Temecula Valley American Viticultural Area) 은 농업 보존구역에 포함되어 있어 목가적인 정취를 더한다.
테메큘라 올드타운을 지나 동쪽으로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지면서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드는데, 바로 여기서부터가 ‘테메큘라 밸리 와인 컨트리’다. 현재 테메큘라에는 40여 개의 와이너리가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조합(Temecula Valley Winegrowers Association)을 만들어 각종 이벤트와 투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남가주 최고의 와인 산지이지만 사실 테메큘라 와인의 역사는 불과 40여 년에 불과하다.
1969년에 지어진 캘러웨이(Callaway)를 제외하고는 거의 80년대에 생겨난 젊은(?) 와이너리들이다.
이곳의 매력은 각각의 와이너리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와인 맛도 다르다는 것이다.
시골 마을 소박한 농가 같은 와이너리가 있는가 하면 최고급 리조트까지 완비한 곳도 있다.
대부분의 와이너리에서는 평소 10~20달러(약 2만원)에 와인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데 작은 와이너리에서는 인심 좋은 주인이 무료 와인을 대접하기도 해 깜짝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이날 우리가 선택한 곳은 테메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캘러웨이’와 신흥 주자로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몬테 데 오로’였다.
테메큘라의 자부심, 캘러웨이
캘러웨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테메큘라 대표 와인이다.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고 브랜드 파워도 갖추었다. 골프 산업의 황제 엘리 캘러웨이가 설립, 유명한 양조 장인(匠人) 로버트 페피가 합세해 유럽의 와인 명가에 맞설 만한 명성을 만들어냈다. 캘러웨이 와인은 한국에도 지난 2012년 진출한 바 있다.
유럽의 와인에 비해 미국의 와인은 실용적이고 대중적이다. 때문에 이지와인, 골프와인 등으로 불리는데 이 또한 캘러웨이의 공이 크다.
1976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에딘버러 공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공식 만찬에 등장한 것이 캘러웨이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도네이였고 이후 여왕과 공작이 골프 라운딩을 마칠 때마다 캘러웨이 샤도네이를 마셔 골프와인으로 불려졌다는 일화가 있다.
여왕이 즐겨 마신 화이트 와인이라니…. 41℃에 육박하는 더위에 전열을 가다듬고 샤도네이를 맛보기 위해 캘러웨이 와이너리로 향했다.
테메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는 캘러웨이 와이너리는 과연 명성대로 우아한 자태다. 현대적인 양조기술, 능숙한 매니지먼트 등 모든 것이 똑 떨어지는 느낌이다.
중국인 매니저 ‘킴’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와인 저장소.
수백 개의 와인 배럴이 있는 거대한 창고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얼음창고 같은 시원함이었다(기억해달라. 바깥 기온은 41℃였다).
발효 탱크에서 발효를 마친 와인들은 오크(참나무) 배럴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곳에서 숙성 과정을 마쳐야 진정한 와인으로 거듭난다. 팀의 설명에 따르면 배럴은 온도보다는 숙성 과정에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주 조그마한 것 하나가 와인의 맛과 향, 색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와인은 정말 신비하다. 포도의 종류뿐 아니라 포도나무의 나이, 오크의 종류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포도나무에서는 과일 향이 강하고 나이가 많은 포도나무일수록 흙냄새와 같은 깊고 묵직한 맛이 난다. 또 아메리칸 오크에서 숙성시키면 카라멜 향이, 프렌지 오크에서 숙성시키면 바닐라 향이 배어난다.”
배럴 창고에서 나오려는데 유난히 로맨틱하게 보이는 촛불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온다. 알고 보니 이 창고는 와이너리 결혼식의 피로연 장소로도 쓰인다고 한다. 수백 개의 오크 배럴이 있는 와인 창고에서의 결혼 피로연이라니…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 다음 결혼은 꼭 여기서 하자는 실없는 농을 주고받아본다. 드디어 여왕의 와인, 샤도네이를 맛볼 시간. 캘러웨이 메인 테이스팅 룸에는 패션모델 같은 금발 미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즐기고 있다.
옅은 황금 색상의 2013 스페셜 셀렉션 샤도네이는 알콜도수 13도로 레몬, 파인애플, 배, 사과 및 바닐라 향이 나며 입안을 감도는 활발한 긴 여운이 일품이다. 단연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이 팀의 설명. 평소 와인 애호가인 친구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많은 분들이 가장 좋은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사실 가장 좋은 와인은 개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좋은 와인은 유명한 와인도, 비싼 와인도 아닌 나에게 맞는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죠.”
신흥명가, 몬테 데 오로
와인 밸리 초입에 있는 캘러웨이를 나와 다시 동쪽으로 달리면 밸리 끄트머리에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와이너리가 나온다. 지난 2009년 오픈하고 이듬해 첫 수확을 낸 후발주자이지만 최근 월드 와인 챔피언십을 비롯한 유수의 와인 어워즈에서 1등 상을 휩쓸고 있는 ‘몬테 데 오로’ 와이너리다. 사람 좋아 보이는 매니저 제리는 반갑게도 한국어로 제작된 안내서를 가지고 우리를 맞이했다.
최근 한국인 방문객이 늘어나 아예 한국어로 제작을 했다는 것이다.
몬테 데 오로의 주 종목은 레드와인이다. 카르베네 소비뇽, 템프라니요, 시라 등 10여 개의 레드와인을 선보이고 있는데 100% 이곳 빈야드에서 수확하는 포도만으로 제조하고 있다.
제리를 따라 검붉은 포도송이들이 달려 있는 빈야드로 나갔다. 검푸른 빛의 자그마한 포도 알맹이들이 탐스럽다. 한 송이를 따 입에 넣으니 꿀송이를 넣은 듯 달콤하다. 강한 태양빛에 자연적으로 건포도가 된 것들도 있다. 자연 건포도를 따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도가 높은 포도가 좋은 와인이 된다. 당분이 이스트에 의해 발효되면서 열이 나고 알코올도 변하기 때문이다. 발효 시초에는 산도(pH)를 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계속해서 적정 산도를 조정하고 있다. 그게 우리만의 양조기술이다.”
프랜치 오크 배럴에서 최대 28개월 동안 숙성된 레드와인은 보틀링(bottling, 병에 담는 과정) 후 다시 4~6개월 숙성한 뒤에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다.
몬테 데 오로는 메인 테이스팅 룸을 비롯해 다양한 사이즈의 프라이빗 룸을 보유하고 있어 소규모 모임부터 단체 워크숍까지 맞춤 이벤트를 제공한다. 빈야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딸린 프라이빗 룸에서 점심을 겸한 와인 테이스팅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근사했다.
치즈와 과일 플레이트와 토마토 소스 미트볼과 함께 우리가 이날 선택한 와인은 2013년산 시라와 2012년산 시라. 제리가 강추한 와인들이다. 와인잔을 바닥에 놓은 채 원을 그리듯 흔들어 공기와 접촉시킨 후, 먼저 향을 맡고 입안에 조금 머금었다가 삼켜야 한다고 알려주는 친절한 제리씨. 이에 화답하듯 친구의 즉석 품평이 이어진다. 맛이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떫은 맛이 강하지 않고 과실 특유의 향이 혀끝을 감도는 맛이 아주 훌륭하다는, 결론은 ‘그레잇’이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시장기 때문이었을까. 매혹적인 레드와인과 함께 입안에서 녹아 없어지는 블루 치즈가 지친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고, 곧 사진기를 내려놓고 친구들과 둘러앉아버렸다. 깊어가는 테메큘라의 가을, 향 좋은 와인이 있고 더 좋은 친구가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와인은 역사상 인류가 가장 오래 즐긴 술로 꼽힌다. 최근에는 미국의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연구팀이 학술지를 통해 시칠리아 동굴에서 6000년 된 와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기존 가설보다 3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와인과 접해왔다. 사료에는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사위로 삼은 고려 충렬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본격적으로 국내에 와인이 소개된 것은 조선 후기 선교사들을 통해서다. 그런데 오랜 인연에 반해 실생활 속에서 왜 우리 와인은 찾아보기 어려울까. 충북 영동의 한 와이너리를 찾아 우리 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재 국산 와인은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곳 이외에 전북 무주와 경기 포천에도 많은 와이너리가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와이너리는 150여 곳 이상 될 것이라고 업계에선 추산하고 있다.
충북 영동의 대표적 와이너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컨츄리와인은 3대째 와인을 만들어오고 있는 와이너리다. 컨츄리와인의 시작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컨츄리와인의 대표 김덕현(金德賢·34)씨의 할아버지인 김문환(金文煥)씨는 일제강점기 미크로네시아로 강제 징용을 떠나게 된다. 한때 스페인의 영토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그곳에서 김문환씨는 스페인 병사와 친분을 쌓게 되고 포도와 와인의 매력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해방 이후 고향인 영동으로 돌아와 포도농사와 포도로 가양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65년이다.
그리고 그 뜻을 2대 김마정(金摩廷·63)씨가 이어받아 2010년 개인농가로는 최초로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해 본격적인 와인 생산에 나서게 된다. 현재는 3대인 김덕현씨가 생산과 판매 모두를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와이너리가 살아가는 법
2대 김마정씨가 혼자 공부해 와인 제조에 뛰어든 독학파라면 3대 김덕현 대표는 정통 학구파라 할 수 있다. 미대를 졸업하고 업계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였던 김 대표는 2009년 직장을 그만두고 와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와인스쿨을 통해 기초를 닦은 후 대학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서 다시 공부했다. 소믈리에 자격증도 받았다. 이후 프랑스 보르도부터 LA 나파 밸리, 호주 바로사 밸리 등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 국가들 중 컨츄리와인은 어디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까. 의외의 답이 나온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와인시장의 80% 정도는 자국산 와인이에요. 그만큼 와인의 품질도 높고, 소비자들도 일본 와인을 인정해주죠. 자국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또 스시와 같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본 음식의 파트너로 세계시장에 많이 소개되어서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에 반해 우리는 와인시장의 95% 이상이 수입 와인이에요. 국산 와인에 대한 평가도 아직은 낮은 편이고요.”
국산 와인이 외산과 경쟁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높은 주세(酒稅)에 있다. 수입 와인은 FTA로 인해 관세가 사라져 저가로 유통이 가능하지만, 국산 와인의 경우 ‘전통주’에 속해 높은 주세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반면에 전통주의 범주에 속한 만큼 갖게 되는 장점이 있다. 바로 온라인 판매의 허용이다. 그동안 전통주는 우체국 등 제한된 곳에서만 온라인 판매가 가능했다. 하지만 국세청 고시 및 주세사무처리규정 개정안이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온라인 판매가 허용됐다. 실제로 컨츄리와인 역시 포털 쇼핑몰을 통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서 우리 와인의 주 고객층이 많이 낮아졌어요. 그간 와서 사가시거나 주문해주시는 분들의 연령은 40~50대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온라인 판매가 시작되면서 20~30대 고객이 늘었어요. 입소문을 타서인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 홍대나 강남에서 저희 와인이 식당을 통해 소개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산 와인 깔끔한 과일 향이 특징
김 대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특징을 깔끔한 과일 향으로 정의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포도 품종으로는 캠벨 얼리(Cambel Early)가 있어요. 가장 재배가 많이 되는 품종인데, 과일 향이 무척 강해요. 가볍지만 깔끔한 맛이라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어요. 가벼운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죠.”
국내 대표 품종인 캠벨 얼리는 수입 와인과 국산 와인 맛의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요소로 지목된다. 수입 와인에서 많이 쓰이는 품종은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피노 누아(Pinot Noir), 시라(Syrah), 메를로(Merlot) 등이 있는데 캠벨보다 타닌 성분이 많아 무겁고 떫은 느낌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오히려 이런 맛의 와인 재료로는 국내에서는 포도(캠벨)보다는 산머루가 꼽힌다.
“캠벨과 산머루 와인 모두 또 하나의 특징을 갖는데 바로 단기숙성에 적합하다는 것이에요. 수입 와인에 비교하자면 갓 만들어진 와인을 즐기는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에 가깝죠. 우리 와인으로 장기숙성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봤는데, 여러 소믈리에분들이나 와인 애호가분들과 평가를 한 결과 장기숙성엔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컨츄리와인이 1년산과 2년산만 판매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김 대표는 수입 와인에 비해 갖고 있는 경쟁력으로 안전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꼽았다. 와인 역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인 만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와이너리의 경우 첨가물에 대단히 관대한 편이에요. 특히 저가 와인일수록 그렇습니다.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화방지제나 보존제를 많이 쓰죠. 우리 와인의 경우 이런 첨가물을 넣지 않으려고 멸균 작업을 별도로 진행합니다. 파스퇴르 살균법이라고도 불리는 저온 살균법으로 변질을 막고 있어요. 또 포도를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선별하고요. 최종적으로 병입될 때까지 산소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다 보니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어요. 대량생산 방식과는 거리가 있죠. 그래도 우리의 고집을 알아주시는 애호가들이 꾸준히 찾아주셔서 자긍심을 갖고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산 와인의 역사는?▲▲
우리가 직접 와인을 만든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포도를 으깨어 설탕과 소주를 부어 가양주(家釀酒)로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공식적인 최초 와인의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포도가 아니라 사과였다. 1967년에 파라다이스 주식회사가 출시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그것. 사과의 고장 대구에 공장을 차려놓고 12도의 사과주를 생산한 것이 시작이다.
포도주로는 1968년 주식회사 한국 산토리가 생산한 선리프트 와인·로제 와인·팸포트 와인이 꼽힌다. 이후 한국 산토리는 해태주조로 매각됐다. 1977년에는 토종 기술과 포도로 만든 ‘마주앙’(구 동양맥주·현 롯데주류)이 나오면서 한국 와인 역사에 새 장이 열린다. 1970년대에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곡주보다는 과일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한때 와인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수입 와인이 소개되면서 국내 와인의 위세는 갈수록 떨어졌다.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트레비네는 조용한 강변 마을이다. 레오타르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트레비슈니차 강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소도시. 오스만 시대의 아치형 다리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마을을 잇는다. 고요한 소읍은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든다. 강물 속으로 마을 풍치가 풍덩 빠져 반영되어 흔들거리면 긴 여행자의 묵은 시름이 사르르 치유된다.
모스타르에서 트레비네까지 첩첩산중 길고 긴 여행
한여름, 크로아티아는 지긋지긋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도망쳤고 이내 트레비네(Trebinje)로 떠난다. 필자가 예약한 숙소는 개울 옆, 아름다운 전원 카페 분위기가 나는 그런 곳이다. 새로 신축한 듯 모텔은 깔끔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촉수 낮은 불빛의 어둠침침한 야외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숙소 사람들일까?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다. 맑은 개울물을 담아낸 작은 연못 속에는 송어가 살아 움직인다. 모텔 직원은 자기네 음식이 최고라고 했지만 모험은 하기 싫어 야채샐러드와 바다 생물인 오징어 요리를 시킨다.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메인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질 좋은 지역 와인 한 잔을 더 시켜 홀짝홀짝 마실 즈음에야 요리가 상차림된다. 작은 삶은 오징어와 삶은 감자, 삶은 근대가 올려져 있다. ‘음식을 참 맛있게 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준급이다. 어디를 가든 음식 잘하는 곳엔 손님이 많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다가 한 아주머니랑 스치듯 대화를 나눈다. 스위스에서 살다가 이제는 고향으로 내려왔단다. 그러면서 내일 올드타운을 가면 자기 남편이 안내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낯선 누군가에게 여행 안내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녀는 가족이 있는 테이블로 날 끌어당긴다. 그녀가 이끈 테이블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무척 깐깐해 보이는 남편 말고도 여러 명이 함께 앉아 있다. 남편은 내일 집으로 찾아오라면서 아주 꼼꼼하게 이름, 주소, 전화번호, 약도를 그려준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이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진다.
트레비슈니차 강과 아르슬라나기치 다리의 조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다음 날, 죽을 만큼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침 한 방울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아프고 온몸은 천근이다. 일단 메인 타운에 가서 약국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전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말도 해줘야 할 것 같다. 타운까지는 5km. 택시를 부르면 간단할 일을 또 걷고 있다. 땡볕이 강렬해 발걸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카메라를 꺼내든다. 나무가 거의 없어 흰 빛을 띠는 카르스트 지형의 레오타르 고산과 트레비슈니차 강이 휘도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트레비네의 대표 명소인 ‘아르슬라나기치’ 다리(길이 80m 높이 6m)는 무심한 시민들 때문에 위치를 놓치고 만다. 한참을 더 걸어서 메인 타운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야 먼발치의 다리를 보게 된다. 아치형의 다리와 트레비슈니차 강이 한데 어우러진 풍치가 멋지다. 트레비슈니차 강에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1574년) 오스만제국 시대다. 오스만제국 시절 트레비네는 두브로니크와 이스탄불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다리 이름은 당시 다리 통행료 징수권을 갖고 있었던 ‘아르슬란 아가(Arslan-aga)’라는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지도자인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pasa Sokolovic, 1506~1579) 명에 의해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1489~1588)이 건설을 맡았다. 그는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Visegrad)의 다리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말고도 대단한 작품이 아주 많은 건축가다. 원래는 훨씬 더 북쪽에 있었는데 트레비슈니차 강에 수력발전소가 생기면서 1972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 다리는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건축된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주 잠깐은 아픔도 잊는다.
보스니아의 오래된 도시에서 만난 ‘드라간’ 부부
도심 구경 대신 전날 밤 식당에서 약속한 집을 찾아 나선다. 긴가민가하면서 한 집을 기웃거리다가 전날 만난 남편 드라간을 만난다.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 외에 아들도 있다. 키가 2m나 되는 아들은 화가란다. 그는 트레비네 근처의 작은 마을에 작업실이 있고 가을에는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말한다. 작품을 팔아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쓸 정도라면 나름 유명한 화가일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주인아주머니는 소시지와 동유럽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고급 산양 치즈까지 내어준다. 이 집에는 송로버섯을 찾는 강아지도 있다. 이내 부부와 함께 시내로 나섰고 ‘드라간’은 자신이 태어난 이 도시에 대해 많이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
트레비네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스릅스카(Srpska) 공화국에 속해 있다. ‘태양과 플라타너스 나무들의 도시’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355년까지 세르비아 왕국에 속해 있다가 이후 보스니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오스만제국의 지배(1463~1878)를 받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향권(1878~1918년) 아래로 들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가 건축되고 광장, 공원, 학교, 공장 등이 들어서는 등 규모가 확대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던 1945~1990년에는 수력발전소와 댐, 인공호수, 터널 등이 건설되면서 급격히 발전했지만 보스니아 내전은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트레비네 메인 타운에는 오래된 유적지가 없고 묘지만 많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1908년에 설립된 세르비아 정교회를 찾는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보스니아이지만 그들은 그리스 정교회다. 트레비네는 10세기부터 가톨릭 교구가 생겼고 ‘가톨릭 10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도시다. 또 중심 광장인 ‘자유광장(Trg Slobode)’으로 가는 길목에도 19세기 말에 세워진 자그마한 성모 탄생 교회가 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자유공원 앞의 카페는 유명한 배우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라고 드라간은 말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공원 한쪽에 마련된 청과물 시장에서 복숭아를 사면서 요반 두치치(Jovan Ducic, 1871~1943) 동상을 발견한다. 요반 두치치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트레비네 도서관에는 두치치가 기증한 장서 수천 권이 전시되어 있다. 또 이 도시 언덕 위에는 2000년, 그를 기리기 위해 코소보의 그라차니차 수도원을 본떠 완공한 헤르체고바카 그라차니차 수도원이 있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체바피(Cevapi 혹은 체바치치(Cevapcici))’도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어릴 적 추억을 듣는다. 약 덕분에 목은 좀 나아졌고 여러 가지를 보여주려는 현지인에게 감동받아 한국식으로 몰래 밥값을 낸다. 그들은 한국식 ‘밥값 계산’에 감동했는지 기어코 차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까지 안내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고향 떠나 스위스에서 살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드라간.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이 든 그가 여행객과 대화를 할 정도의 영어구사를 하는 것도, 외국인을 안내해주겠다는 마인드도 스위스에서 얻은 지식일 것이다. 그는 내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리고 트레비네에 오면 ‘내 집’에서 언제든 ‘공짜’로 묵으라는 말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집에 다시 가서 정담을 실컷 나누고 싶다.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하지만 가는 곳마다 스토리는 달라진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들. 묘한 인연의 발자취를 트레비네에 남겼다. 인터넷을 못해 지속적인 연락은 못하지만, 내 가슴속에 영원한 추억을 남긴 드라간. 동양인이 그곳으로 여행을 온다면, 나와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분명히 반길 것이다.
>>Travel Data
가는 방법 한국에서 직항은 없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다.
현지 교통 사라예보를 기점으로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가 운행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택시밖에 없었다. 필자처럼 모스타르에서 접근하거나 몬테네그로의 포드고리차에서 이용하는 편이 낫다.
음식과 숙박 올드타운에 체바피를 잘하는 집이 있다. 또 모텔 스튜데낙(Motel Studenac)은 음식과 숙박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먹은 생선스프는 최고였다. 또 트레비네는 질 좋은 와인 산지다. 브라나츠 와인은 발칸의 희귀 품종으로 타닌과 산도가 높아 명성이 높다. 포드루미부코예 1982(Podrumi Vukoje 1982) 와이너리가 유명하다. 시내에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트레비네는 작은 도시다. 매일 산책하고 근교의 산을 다닌다 해도 한 달 머물기는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기점을 두고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를 연결하면 된다. 렌터카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