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한여름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캘리포니아의 반쪽 모습만 알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와인의 90% 이상을 생산하고 있는 와인 주산지다. 북가주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를 비롯해 중가주 파소 로블스와 샌타바버라, 그리고 남가주의 테메큘라 밸리까지,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이 중 테메큘라 밸리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욱 호젓한 멋과 낭만이 있다. 10월, 캘리포니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포도 향 가득한 테메큘라 밸리 와이너리를 목록에 넣어두자. 포도 수확이 시작되는 지금이야말로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빈야드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함께 와인잔을 기울일 오랜 친구가 동행한다면 더없이 좋겠다.
“어디? 드라큘라?”
테메큘라를 처음 듣는 사람은 독특한 이름 탓에 십중팔구는 이렇게 되묻는다. 이번 취재에 동행한 이들도 그랬다. 카메라와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나를 대신해 와인 테이스팅에 참여해줄 두 친구였다. 다행히 나보다 주량도 세고 와인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니 이보다 좋은 길동무가 있을까.
LA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곳,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테메큘라는 해발 1500피트의 낮은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테메큘라라는 이름은 인디언 원주민어인데 ‘물안개 속의 햇빛(Sunshine through mist)’이라는 근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침이면 바다에서 불어온 물안개가 온 땅을 덮었다가 낮이 되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테메큘라의 독특한 날씨를 의미한다. 포도 산지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조건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곳, 테메큘라 밸리
10월의 테메큘라 밸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남가주에서 가장 큰 규모인 3만3000에이커(약 4000만 평)에 달하는 포도재배구역(Temecula Valley American Viticultural Area) 은 농업 보존구역에 포함되어 있어 목가적인 정취를 더한다.
테메큘라 올드타운을 지나 동쪽으로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지면서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드는데, 바로 여기서부터가 ‘테메큘라 밸리 와인 컨트리’다. 현재 테메큘라에는 40여 개의 와이너리가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조합(Temecula Valley Winegrowers Association)을 만들어 각종 이벤트와 투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남가주 최고의 와인 산지이지만 사실 테메큘라 와인의 역사는 불과 40여 년에 불과하다.
1969년에 지어진 캘러웨이(Callaway)를 제외하고는 거의 80년대에 생겨난 젊은(?) 와이너리들이다.
이곳의 매력은 각각의 와이너리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와인 맛도 다르다는 것이다.
시골 마을 소박한 농가 같은 와이너리가 있는가 하면 최고급 리조트까지 완비한 곳도 있다.
대부분의 와이너리에서는 평소 10~20달러(약 2만원)에 와인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데 작은 와이너리에서는 인심 좋은 주인이 무료 와인을 대접하기도 해 깜짝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이날 우리가 선택한 곳은 테메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캘러웨이’와 신흥 주자로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몬테 데 오로’였다.
테메큘라의 자부심, 캘러웨이
캘러웨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테메큘라 대표 와인이다.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고 브랜드 파워도 갖추었다. 골프 산업의 황제 엘리 캘러웨이가 설립, 유명한 양조 장인(匠人) 로버트 페피가 합세해 유럽의 와인 명가에 맞설 만한 명성을 만들어냈다. 캘러웨이 와인은 한국에도 지난 2012년 진출한 바 있다.
유럽의 와인에 비해 미국의 와인은 실용적이고 대중적이다. 때문에 이지와인, 골프와인 등으로 불리는데 이 또한 캘러웨이의 공이 크다.
1976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에딘버러 공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공식 만찬에 등장한 것이 캘러웨이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도네이였고 이후 여왕과 공작이 골프 라운딩을 마칠 때마다 캘러웨이 샤도네이를 마셔 골프와인으로 불려졌다는 일화가 있다.
여왕이 즐겨 마신 화이트 와인이라니…. 41℃에 육박하는 더위에 전열을 가다듬고 샤도네이를 맛보기 위해 캘러웨이 와이너리로 향했다.
테메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는 캘러웨이 와이너리는 과연 명성대로 우아한 자태다. 현대적인 양조기술, 능숙한 매니지먼트 등 모든 것이 똑 떨어지는 느낌이다.
중국인 매니저 ‘킴’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와인 저장소.
수백 개의 와인 배럴이 있는 거대한 창고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얼음창고 같은 시원함이었다(기억해달라. 바깥 기온은 41℃였다).
발효 탱크에서 발효를 마친 와인들은 오크(참나무) 배럴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곳에서 숙성 과정을 마쳐야 진정한 와인으로 거듭난다. 팀의 설명에 따르면 배럴은 온도보다는 숙성 과정에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주 조그마한 것 하나가 와인의 맛과 향, 색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와인은 정말 신비하다. 포도의 종류뿐 아니라 포도나무의 나이, 오크의 종류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포도나무에서는 과일 향이 강하고 나이가 많은 포도나무일수록 흙냄새와 같은 깊고 묵직한 맛이 난다. 또 아메리칸 오크에서 숙성시키면 카라멜 향이, 프렌지 오크에서 숙성시키면 바닐라 향이 배어난다.”
배럴 창고에서 나오려는데 유난히 로맨틱하게 보이는 촛불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온다. 알고 보니 이 창고는 와이너리 결혼식의 피로연 장소로도 쓰인다고 한다. 수백 개의 오크 배럴이 있는 와인 창고에서의 결혼 피로연이라니…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 다음 결혼은 꼭 여기서 하자는 실없는 농을 주고받아본다. 드디어 여왕의 와인, 샤도네이를 맛볼 시간. 캘러웨이 메인 테이스팅 룸에는 패션모델 같은 금발 미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즐기고 있다.
옅은 황금 색상의 2013 스페셜 셀렉션 샤도네이는 알콜도수 13도로 레몬, 파인애플, 배, 사과 및 바닐라 향이 나며 입안을 감도는 활발한 긴 여운이 일품이다. 단연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이 팀의 설명. 평소 와인 애호가인 친구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많은 분들이 가장 좋은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사실 가장 좋은 와인은 개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좋은 와인은 유명한 와인도, 비싼 와인도 아닌 나에게 맞는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죠.”
신흥명가, 몬테 데 오로
와인 밸리 초입에 있는 캘러웨이를 나와 다시 동쪽으로 달리면 밸리 끄트머리에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와이너리가 나온다. 지난 2009년 오픈하고 이듬해 첫 수확을 낸 후발주자이지만 최근 월드 와인 챔피언십을 비롯한 유수의 와인 어워즈에서 1등 상을 휩쓸고 있는 ‘몬테 데 오로’ 와이너리다. 사람 좋아 보이는 매니저 제리는 반갑게도 한국어로 제작된 안내서를 가지고 우리를 맞이했다.
최근 한국인 방문객이 늘어나 아예 한국어로 제작을 했다는 것이다.
몬테 데 오로의 주 종목은 레드와인이다. 카르베네 소비뇽, 템프라니요, 시라 등 10여 개의 레드와인을 선보이고 있는데 100% 이곳 빈야드에서 수확하는 포도만으로 제조하고 있다.
제리를 따라 검붉은 포도송이들이 달려 있는 빈야드로 나갔다. 검푸른 빛의 자그마한 포도 알맹이들이 탐스럽다. 한 송이를 따 입에 넣으니 꿀송이를 넣은 듯 달콤하다. 강한 태양빛에 자연적으로 건포도가 된 것들도 있다. 자연 건포도를 따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도가 높은 포도가 좋은 와인이 된다. 당분이 이스트에 의해 발효되면서 열이 나고 알코올도 변하기 때문이다. 발효 시초에는 산도(pH)를 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계속해서 적정 산도를 조정하고 있다. 그게 우리만의 양조기술이다.”
프랜치 오크 배럴에서 최대 28개월 동안 숙성된 레드와인은 보틀링(bottling, 병에 담는 과정) 후 다시 4~6개월 숙성한 뒤에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다.
몬테 데 오로는 메인 테이스팅 룸을 비롯해 다양한 사이즈의 프라이빗 룸을 보유하고 있어 소규모 모임부터 단체 워크숍까지 맞춤 이벤트를 제공한다. 빈야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딸린 프라이빗 룸에서 점심을 겸한 와인 테이스팅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근사했다.
치즈와 과일 플레이트와 토마토 소스 미트볼과 함께 우리가 이날 선택한 와인은 2013년산 시라와 2012년산 시라. 제리가 강추한 와인들이다. 와인잔을 바닥에 놓은 채 원을 그리듯 흔들어 공기와 접촉시킨 후, 먼저 향을 맡고 입안에 조금 머금었다가 삼켜야 한다고 알려주는 친절한 제리씨. 이에 화답하듯 친구의 즉석 품평이 이어진다. 맛이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떫은 맛이 강하지 않고 과실 특유의 향이 혀끝을 감도는 맛이 아주 훌륭하다는, 결론은 ‘그레잇’이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시장기 때문이었을까. 매혹적인 레드와인과 함께 입안에서 녹아 없어지는 블루 치즈가 지친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고, 곧 사진기를 내려놓고 친구들과 둘러앉아버렸다. 깊어가는 테메큘라의 가을, 향 좋은 와인이 있고 더 좋은 친구가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