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1999년. 필리핀에서 가장 덥다는 3월의 어느 바닷가 마을, 그곳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이끌고 온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였다. 많은 미국인이 참여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온 학생 단체도 있었다. 그 많은 외국인 사이에서 땀 흘리는 한 중년 한국인 남성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가 한국에서 특별히 휴가를 내고 참여한 대형 금융회사의 대표라고 생각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후에 한국해비타트의 이사장이 된다. 바로 이창식(李昌植·71) 이사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신태현 기자 holjjak@etoday.co.kr
한국해비타트 이창식 이사장은 한국해비타트 초창기부터 성장을 함께해오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국내 금융업계의 발전을 지켜본 산증인 중 한 명이다. 이창식 이사장은 1968년 국민은행에 입사해, 1976년 삼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증권맨으로 변신했다. 정적인 분위기가 싫어 은행을 박차고 나와,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부증권 부사장을 거쳐, 국민투자신탁증권 대표와 푸르덴셜투자증권 부회장까지 지낸, 은행과 증권, 보험을 두루 거친 금융맨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격동의 시기에 동서증권 영업부장을 하고 있었어요. 검증은 안 해봤지만, 마치 시장은 나라의 큰 사건을 예견하고, 반영하고 있지 않았나 느껴질 만큼 혼란의 시기였죠. 제가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어요. 굉장한 변화의 기운이 느껴졌고, 한국사회의 흐름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 누가 권유도 안 했는데 내 발로 교회를 찾아갔죠.”
이끄는 이 하나 없었는데 스스로 종교를 선택해 찾아갔다니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변화에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몸도 별로 좋지 않았고요. 힘든 시기에 스트레스로 부대낄 때였어요. 그래서 더 찾게 됐던 것 같아요. 교회를 나가고 나서 이런 세계가 있구나! 세삼 깨닫게 됐고,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종교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자각하게 됐죠.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된 것이죠. 대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고뇌와 갈등적 요소들에 대한 해답도 얻게 된 것 같아요. 그간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종교활동이 계기가 됐다.
한국해비타트는 1995년 9월 13일 건설교통부 산하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등록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해비타트 활동은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서 진행됐다. 1976년 미국에서 시작된 해비타트 운동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인이면서 성공회 수도원 예수원 원장으로 활동한 대천덕(미국명 Ruben Archer Torrey) 신부가 신앙계 칼럼을 통해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이후 기독교계에서 펼쳐지다가 1995년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에 합류한 것도 이때쯤이다. 그리고 1997년 감사직으로 이 단체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대천덕 신부님은 한국사회의 성인 같은 분이시죠. 해비타트는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토지 공개념으로 토지 투기를 막아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되었죠. 당시 국내 운동가들도 이러한 뜻에 동의하면서 한국해비타트의 시초가 됐어요.”
1997년이면 동부증권 부사장을 지내다 국민투자신탁증권의 대표를 맡았던 시기다. 금융인으로서 최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때라 할 수 있는, 가장 바쁜 시기에 단체에 참여한 셈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NPO(비영리민간단체) 활동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관심과 애정이 중요하죠. 꼭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끼지 않고 애정을 갖고 좋아하는 일이라 느낀다면 시간은 어떻게든 나게 되어 있어요. 기업에 있으면서 돈이나 출세 욕심이 많지 않아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덕분에 지금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요.(웃음)”
국내에 수많은 NPO가 있고, 남을 도울 방법도 많은데 해비타트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해 이 이사장은 한마디로 “멋있어서”라고 답했다.
“해비타트의 운영방식(Operation Model)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해비타트는 자립(Self Support)을 돕는 것이 목표예요. 집을 지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서 가지라는 것이죠. 원래는 혜택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급하도록 해요.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도움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동료(Partner)나 구매자(Buyer) 혹은 집주인(Owner)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상환하는 자금을 다시 다른 이를 위해 집을 짓는 예산으로 쓰이는 구조도 멋있죠. 집이 있고 없고는 단지 거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건강, 장래까지 좌우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바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관한 부분이다. 최근 일부 NPO들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받는 사람의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일부 구호단체나 매체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의 불행과 재난을 부각해 상업적 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생성된 사진이나 영상물을 일부에선 ‘빈곤의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고 부른다. 자금 확보라는 근시안적 이득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과 지역 주민들의 자존감과 같은 장기적인 목표를 희생시킨 셈이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기본적으로 국내 NPO들은 아무래도 국외에서 시작된 단체들도 많아 외국 단체로부터 배우고 있는 편이죠. NPO들을 감시하는 NPO들도 존재하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비참한 광경을 자극적으로 부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구호 활동은 양적 성장만큼이나 그 과정에서의 진정성과 도덕성도 중요합니다.”
KCOC는 세계에서 활동 중인 국내의 국제개발 NGO(비정부기구)의 협의체로 이창식 이사장은 2011년부터 올해 4월까지 회장을 맡아 굵직한 업무들을 해결해왔다.
국제기구들 사이에선 그간 구호활동을 위해 많은 돈이 제3세계로 넘어갔지만,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고 빈곤과 착취가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받는 사람의 준비가 안 됐다거나 주는 사람의 일방적인 지급을 문제 삼는 일도 있었다고.
“그래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밀레니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예요. 2000년에 유엔이 밀레니엄 정상회의(Millenium Summit)에서 빈곤자 수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실행해 나갈 8가지 목표를 정했죠. 2011년엔 그 목표들이 잘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 세계 대표들과 NGO들이 부산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가 KCOC도 참석한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인류사회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는 점이에요. 불과 수십년 만에 각국 정부나 국민, 민간단체의 태도가 너무 달라졌어요. 인류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되요.”
이 이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호단체의 한 축은 바로 은퇴자들이다. 그는 1999년 필리핀과 2009년 메콩강 일대의 4개 국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주최하는 국제 해비타트 봉사 프로그램, ‘지미&로절린 카터 워크 프로젝트(Jimmy & Rosalynn Carter Work Project)’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카터 전 대통령과 동행해서 일하는 70세가 넘은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보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해비타트에서 은퇴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은퇴한 남편을 추천하는 아내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아마 한국의 은퇴한 남자들은 가장 낯가림이 심한 존재들 일 거예요. 여성들은 반대고요.(웃음)”
재정적 여건이 넉넉지 않은 NPO 입장에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많은 돈이 들지 않는 노동력인 은퇴자들은 분명히 매력적인 존재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세대 간 갈등이 컸어요. 은퇴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갖고 의미 있고, 드러나는 일들만 하려 하는 경향이 있고, 젊은 직원들의 지시나 의견은 따르지 않으려고 했어요. 조직 내 담당자들은 그런 은퇴자들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거추장스럽다고 여겼죠. 그래서 제가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주었죠. 그들이 갖는 불만을 발산하지 못한다면 폭발했을 테니까요. 완충 역할을 한 것이지요.”
노력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은퇴자들은 젊은이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젊은 담당자들은 은퇴자들을 전문가로 바라봤다. 그 가운데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은퇴자들의 태도 변화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몸을 낮춰야 해요.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은퇴자들까지 전부 다. 특히 은퇴자들은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요. 결국, NPO에서 필요한 일손과 역할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누구나 전문적인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부가가치 높은 일 하고 싶어도, 조직에서 필요한 일은 단순한 허드렛일이 먼저니까요. 직원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신입사원처럼 마음을 다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이 이사장은 어땠 을까? 국내에서 가장 고도화되어 있다는 금융권 조직 곳곳을 누빈 그다. 체계화된 기관에서 근무하다 뜨거운 선의와 열정과 비교하면 체계가 부족한 NPO 조직이 마뜩잖을 수 있었을 터.
“그간 기업 내에서 해결사나 중재자(troubleshooter) 역할을 많이 했었으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어려운 기업들을 살린 경험이 있고요. 워낙에 보수적이기보다는 개혁성 성향을 갖고 있어요. 조직을 고쳐가면서 이끌어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이런 성향 탓에 회사에선 ‘호기심 천국’이라고 불렸었어요. 아내는 분잡스러운 부분이 닭과 닮았다고 하고요.(웃음)”
그 수많은 봉사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으로 ‘2006년 수해지역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꼽았다. 강원도 평창 일대의 물난리로 거처를 잃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13일간 연인원 3600여 명이 참여한 큰 행사였다.
“박홍수 당시 농림부 장관이 석 달쯤 걸릴 예산 집행을 신속하게 해 줘서 늦지 않게 수재민들을 도울 수 있었죠. 컨테이너만 한 집을 40채 만들어서 20채씩 두 번에 나눠 옮겼어요. 그 집들이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총 길이만 2㎞ 정도 됐는데, 아주 장관이었죠. 한여름 뜨거운 땡볕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나서 감동적이었습니다. 막내 녀석도 당시 2주간 교육받고 현장에서 크루 리더로 함께 참여했었죠.”
그는 최근 진짜 은퇴를 위해 사회적 활동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착지가 될 단체는 ‘좋은의자’라는 NPO다.
“올해 시작된 정서적 심리적 약자를 돕는 단체예요. 이화여대 간호대 학장,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수지 박사가 ‘사람 돌봄 이론’을 바탕으로 창립하셨죠. 구호단체 경험이 많다 보니 도움 요청이 왔는데,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 합류하게 됐죠. 그러다 박사님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어쩔 수 없이 상근직을 맡게 됐어요. 계급상으로는 상근이사로 강등된 셈이죠.(웃음) 이 단체가 자리 잡을 때까지 당분간 도우면서, 내년까지 해비타트 활동도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즐겨보고 싶어요.”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은 인생 2막 설계에 관한 관심이 높다. 그런 요구에 맞춰 각 대학은 발 빠르게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신중년세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전 국민의 고등교육화를 꿈꿨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프라임칼리지를 개설해 신중년들의 미래 인생설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젊은 은퇴로 고민에 빠진 신중년들에게 한국폴리텍대학은 펜 대신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쥐어 주며 실전 학습을 가르치기에 나섰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방송대 대항마로 떠오른 사이버대학교는 이상 실현과 재교육을 토대로 시니어들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이다. 미래 설계가 아직 좀 미흡한 신중년들이 있다면 주목하라. 더욱 나은 제2의 인생으로 인도할지니.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40·50세대를 위한 제2 인생설계·준비과정
원격대학의 원조,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안에는 또 하나의 대학이 있다. 바로 프라임칼리지다. 1997년부터 운영돼 온 방송대의 평생교육원이 2012년 프라임칼리지로 개명한 것.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기존 평생교육원의 틀을 깨고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학습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프라임 칼리지는 평생학습시대, 국민의 생애주기와 학습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다.
특히 40·50대 신중년들을 위한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은 중·장년층의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더 나아가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 2012년 제2 인생설계과정 32개 신규 교과목으로 총 2660명 수강에 이어, 2014년에는 총 1만284명이 프라임칼리지를 이용할 정도 관심이 뜨겁다.
프라임칼리지 교육과정은 제2 인생대학, 인문교양·시민문해, 귀농·귀촌, 창업, 사회적 경제, 국제개발협력 사회봉사, 전문자격, 명장교수, 평생교육 등 10가지 대분류 아래 각각에 부합한 과목을 배치했다. 영미영작 단편선, 문해 교육 이론 등은 물론, 집짓기, 창업, 다양한 국가의 어학학습 등 프라임칼리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을 개설해 놓았다. 방송대 학생은 프라임칼리지에서 강의를 들으면 졸업학점으로 최대 12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배울 강좌가 아니라면 꼭 한번쯤 프라임칼리지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외에 20·30세대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학위과정과 재직자 기초과정도 주목받고 있다.
인터뷰Ⅰ 박찬영 블루베리-연금나무, 게으름의 농장 수강 (서울, 방송대 농학과 15학번, 54)
귀농·귀촌을 꿈꾸는 신중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강좌를 기웃거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에 작년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 교수이신 문원 교수님이 블루베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셔서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했더니 프라임칼리지 강좌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귀농·귀촌할 생각만 있었지 어디로 갈지 또 어떤 작물을 키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한 관심이 한창일 때 들었던 프라임칼리지 강좌는 꽤 도움이 되더군요. 적어도 블루베리가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쉽고 수익성 좋은 작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농업에 관련한 일을 알아 가는 데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라임칼리지뿐만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요. 귀농·귀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방송대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프라임칼리지를 먼저 알았더라면 이쪽 강의를 먼저 들었겠죠. 프라임칼리지에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학교 입학하고 난 후에 알았거든요(웃음). 프라임칼리지도 새로운 인생 2막의 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선 농학과 공부에 집중한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라임칼리지를 좀 더 이용할 계획입니다.
인터뷰Ⅱ 양봉선 제2 인생대학 마스터클래스- 마음 외 5과목 수강 (전주, 방송대 국문학과, 58)
프라임칼리지는 마력이다
동화를 쓰고 창작을 하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방송대에 편입학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고장이 단단히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동화 작가. 직장인, 주부, 엄마, 방송대 학생으로 숨 쉴 틈 없이 살아온 탓일까요. 1~2년 전 9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오가다 우연히 프라임칼리지의 제2 인생설계 광고를 보게 됐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는데 평소 관심 있던 과목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삶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과목도 있고요. 두 과목만 수강할까 하다 프라임칼리지에서 수업을 들으면 방송대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기에 욕심을 좀 더 냈죠(웃음). 강좌를 선택하다 보니 6개가 되더라고요. 제2 인생 설계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중년의 삶,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삶 등을 공부했습니다.
내 이름을 단 아동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 ‘작은집-싸게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즐겁게 들었습니다. ‘안전, 웰빙, 스마트 여행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른 나라 예절, 선물로 현지인들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배웠습니다. 듣다 보니 3개월 단위로 끊어지는 강좌를 6개월이나 들었더라고요. 지금도 듣고 싶은 과목은 한없이 많아요. 프라임칼리지 너무 좋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것들, 살면서 배우지 못한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령화시대에 남다른 감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펜 놓고 손에 기름 묻히길 원하는 자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라!
한국폴리텍대학(이하 폴리텍대학)은 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추구한다.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학습한다. 1968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으로 시작해 2006년 24개의 기능대학과 19개의 직업전문학교가 합쳐져 지금의 폴리텍대학이 됐다. 폴리텍대학은 해마다 8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보인다. 땀의 결실을 보게 해주는 알찬 대학으로 세대와 학벌 위주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배우고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평생직업교육대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이 시니어들의 재취업과 제2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학사과정 외 시니어들을 위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은 3개월 단기과정으로 만 45세 이상 만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기업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된다. 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 이 과정은 올해 전국 31개 캠퍼스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2012년 333명의 수료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1868명이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수료했다. 놀라운 사실! 3개월 교육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뤄지며 수료생에게는 별도의 지원금도 지급된다.
인터뷰 송재구 (청주,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 2015년 8월 수료, 59)
노래하는 만학도에게 새 삶을 준 베이비부머 훈련과정
지난해 8월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 이상 의류업과 요식업을 하면서 살았 습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성장했을 무렵 늦바람이 불었는지 48세에 대학수학시험을 봐서 2013년 새내기 대학생이 됐습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2014년 말에 음식점 문을 닫았어요. 예전부터 전기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충주지역 폴리텍대학 광고를 보고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을 알게 돼 훈련과정에 들어왔습니다. 기초부터 전기 에너지, 설비, 이론 등 다 가르쳐주더라고요. 일단 배우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배워서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활력이 됐습니다. 과정 수료하고 바로 아파트의 시설관리기사로 취업했습니다. 아무래도 폴리텍대학에서 훈련과정을 수료한 것이 합격에 도움이 됐습니다. 내 나이에도 그런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이력서를 내니 업체에서도 좋아하더군요. 전기 설비에 관한 한 내 손으로 다 고치고 만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나이에 기술 없으면 딱히 취업할 곳이 없어요.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저는 얻은 거죠.
지금 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전기기능사 시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은 꼭 하나 더 따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목표지만 나보다 힘들고 직업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로 그분들을 도와가면서 사는 게 목표 중 하나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80세, 그 이후까지도 사회에서 일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도시의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빠르고 지나는 차들도 빠르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추월해가는 사람을 붙들고 “뭐가 그리 바쁘세요?”라고 물으면 “무엇이든 빠르게 일하고, 빠르게 말하는 것이 도시에서의 예의범절이라우”라는 젊은이들의 차가운 훈계가 대답으로 돌아온다. 숨 막히는 도심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만석꾼 청송 심씨 고택은 느릿느릿 걸어가려고 길손을 여유롭게 맞아주는 곳이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veritas11@empas.com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덕천마을을 지키고 있는 청송 심씨의 송소고택. 거창하게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으뜸가는 만석꾼인 청송 심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세도가로 이름을 날렸다는 청송 심씨. 누대의 세도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다. ‘삐거덕’ 하고 조심스럽게 솟을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길손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삽살개 검둥이다.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어미만한 풍채로 엉금엉금 걸어와 꼬리를 흔들며 길손을 반기는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것 같다. 저만치서 인기척을 듣고 찰방공파 11대손이자 송소고택의 주인장 심재오 씨가 마중을 나온다.
“주말에 주왕산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 올 10월까지는 주말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하지만 주중에는 한산하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 받지 않은 자영업이나 전문직 손님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시거나 혼자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로 가득 차 왁자지껄한 고택의 모습은 왠지 상상하기 싫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애써 찾아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고 싶은 여행객들이라면 반드시 주말을 피해 이곳을 찾는 것이 좋다. 손님 하나 없는 넓은 고택에서 주인 행세도 해보고 귀여운 검둥이의 애교를 혼자서 독차지하려면 한산한 주중이 제격이다.
심 씨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고?
“고을의 부자는 대개 천석꾼입니다. 옛날 청송 심씨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황해도와 개성까지 전부 청송 심씨 땅이었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심 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죠.”
집안의 위세를 설명하는 심재오 선생의 어조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옛날 경주의 최부자는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원칙을 세우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으니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청송 심씨 역시 최부잣집에 밀리지 않는다.
“일제시대 의병 군자금이 죄다 청송 심씨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놓고 군자금을 줬다간 총독부로부터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 음성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가문은 송호택 증조부님께서 국채보상운동 청송지부장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시면서 일정시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래된 집, 오래된 탁자, 오래된 문갑. 송소고택이 박물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과 손님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저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던 길손을 송소고택 곳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운이 옛날로 끌고 들어간다.
“송소고택은 만석꾼 심처대 할아버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재산이 불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본래 선대가 터를 잡고 있던 지금의 성주봉 아래 덕천마을로 되돌아와 더 큰 집을 짓고 사신 거죠. 아들 넷을 둔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는 맏이네 99칸의 송소고택을 짓는 데 13년, 나머지 세 아들에게 각각 30칸 규모의 집 세 채를 짓는 데 7년이 걸렸어요. 여기에 첩의 아들이 분가해 살 수 있도록 25칸의 집을 짓기까지 모두 21년 동안 214칸의 집을 지어 물려주셨지요.”
송소고택은 4형제의 집 모두 대문채, 큰사랑채, 작은 사랑채, 인채, 별당과 조경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대궐이었다. 하지만 전란과 정치적 소요를 겪으며 송소고택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이 안타깝게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수백 년 전 선조들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투영된 전통가옥이기에 여관이나 모텔과 달리 불편한 점이 바로 화장실이다.
“전립선이나 요실금으로 고생하시는 중장년층 손님들을 위해 재미삼아 사용해보시라고 요강을 드려요. 송소고택을 찾아오시는 중·장년층은 평소 전통가옥에 관심이 있는경우 재래식 화장실 같은 불편함을 감수하시는 반면, 아무런 정보 없이 재미삼아 들르신 분들은 밤을 버티지 못하고 퇴실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저희 집이 체통을 심히 따지는 종택은 아니지만 나름 전통을 지닌 가옥이에요.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오시기 전 사료를 찾아 공부를 한 후 송소고택을 찾아주시면 한옥에서 하룻밤 묵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실 수 있습니다.”
새색시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송정고택
송소고택 주인장의 당부에 이곳을 찾아갈까, 말까 고민이 든다면 독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송정고택이다. 송소고택과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쪽문을 통해 왕래할 수 있는 송정고택은 심호택 선생이 차남 심상광 선생에게 지어준 것으로 현재 심재오 선생의 육촌 여동생 심증옥 여사와 남편 정진철씨 부부가 기거하며 손님들을 맞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결혼해 분가를 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4년 전에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와 은퇴생활을 하고 있어요. 거의 40년 동안 집이 비워져 있었던 터라 손볼 곳이 많았는데 말끔히 수리를 해서 예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어요.”
방 한쪽 벽면에는 의친왕의 친필이 새겨진 현판이 눈에 띈다. 마루 한편에 펴놓은 좌식상은 500년 된 나무로 만들었으며, 집 곳곳을 지키고 있는 두꺼비상은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더 이상 채굴이 금지된 귀한 꽃돌로 만들어졌다. 객실 벽면에 세워져 있는 화조도 병풍은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며, 재떨이와 곰방대 꽃병 등 선친들이 사용했을 법한 물건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주인장 부부가 도둑 걱정에 잠을 편히 잘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정고택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며칠 집을 비우느라 문을 잠가놓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곧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퇴 후 살 곳을 찾기 위해 춘천, 영월, 안성 등 전국을 돌아다녀봤지만 청송만큼 여유롭고 인심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혼자 여행하시는 저희 또래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여기 집을 내놓은 곳이 있나요?’ 하고 매번 물으실 정도니 처음 찾은 분들의 소감이 이곳에 정착해 사는 저희들의 느낌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혼자서 찾아온 여행길, 손님을 맞는 부부의 즐거운 모습에 울적했던 마음은 이내 사그라든다. 십수 년간 켜켜이 묵은 때마냥 쌓인 도시생활의 염증을 이곳에서 단번에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든지 혼자서 느릿느릿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알게 됐으니 행복의 단서 하나만은 제대로 주머니에 챙겨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