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일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ʼ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항목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서베이를 통해 시니어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여행, 취미, 관계·가족, 일·성취, 보람, 도전 등 총 7가지 주제로 나눠 알아봤다.
서베이 대상 브라보 동년기자단,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수강생, 낭랑18세 시니어 치어리더팀 등 50세 이상 남녀 140명(50대 61명, 60대 53명, 70대 이상 26명)
서베이 방법 주제별 버킷리스트 예시 항목 15가지 중 선택(중복 선택 가능) 및 그 외 항목이 있는 경우 별도로 작성
◇브라보 버킷리스트 상위 20위 목록
7가지 주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여행’이다. 상당수 시니어가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제주 올레길 투어’ 등 제주 여행과 관련한 버킷리스트를 희망하고 있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니까”, “외국어 부담 없이 여행하고 싶어서”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밖에 혼자 여행 떠나기(27),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25), 캠핑카/크루즈 여행하기(18),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9) 등
운동이나 레포츠 등 몸을 쓰고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배움, 글쓰기, 책 읽기, 전시회 관람 등 문화적, 정서적 활동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특별한 취미를 찾지 못해 ‘새로운 취미 갖기’(24)를 버킷리스트로 선택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텃밭 가꾸기(21), 그림 관련 취미 갖기(19), 수영 배우기(16), 취미 동호회 가입(14), 수화 배우기(6)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애인 같은 친구를 만드는 등 새로운 관계 확장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번호를 정리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는 등 관계 정리에 관한 항목들도 눈에 띈다.
그밖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21), 7명 용서하기(17), 휴대전화번호부 정리하기(15), 첫사랑에게 편지 쓰기(7) 등
제2직업을 향한 욕구와 더불어 전문 분야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포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고, 강연, 전시회를 여는 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이다.
그밖에 귀농하기(15), 창업하기(12), 10년 후부터는 일 안 하고 놀기(8), 자격증 10개 따기(8) 등
버킷리스트 서베이 전체 항목 중에서 ‘재능기부’가 1위에 올랐다. 단순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살린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그밖에 장기기증 신청하기(16), 아프리카 봉사활동 가기(15), 봉사활동 1000시간 채우기(13), 유기견 돌보기(6) 등
건강하고 즐거운 일상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을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등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유언장 작성 등 웰다잉 관련 항목이 상위권에 올랐다.
그밖에 드레스 입고 파티하기(17), 세컨드하우스 짓기(14), 레스토랑에서 고급 코스요리 먹기(13), 주식·펀드 투자하기(12)
아직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실행하고 이룰 수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버킷리스트 만들기’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한 가지 항목은 해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공모전 참가하기(14), 파격적으로 염색하기(13), 무인도에서 살아보기(7), 타투(문신) 해보기(6)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7가지 방법
도움말 박창수 작가
하나,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목표는 유럽 배낭여행부터 서울 나들이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정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경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면 그만큼의 비용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행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든다거나 평소 걷기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등의 세부적인 목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귀농이나 창업 등 오래 준비해야 할 목록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실천할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리스트를 차례로 적어나가자.
둘, 작은 목표는 매년 갱신하라 큰 목표가 담긴 버킷리스트와 작은 목표를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따로 마련하고, 작은 목표 리스트는 매년 갱신한다. 원대한 목표만 적어놓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욕도 저하되고, 실천 의지도 약해진다. 한 해, 한 달 정도 투자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작성하자.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나가며 얻은 자신감은 큰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셋,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목표나 유행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진정 나만을 위한 목록들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 남의 눈치 보지 마라 돈이 많이 든다거나 스스로 주책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족이나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또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남에게 보였을 때 더 그럴싸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적곤 한다. 이른바 체면치레 때문에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여행, 공부, 취미, 봉사 등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목표이지만, 그중에 한두 가지만이라도 나만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면 어떨까?
다섯, 크게 쓰고 소문을 내라 자기 꿈을 소문내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혼자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분 좋은 속박(?)을 느끼는 편이 낫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선언을 하거나 큰 종이에 적어 서재나 화장대 등에 붙여 자주 인식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진다.
여섯, 1+1을 생각하라 나를 위한 버킷리스트이지만, 그것이 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예를 들어, ‘외국어 배우기’와 같은 단순한 목표를 뛰어넘어 ‘외국어를 배워 어려운 아이들에게 방과 후 재능기부하기’ 등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뜻깊은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일곱, 버킷리스트에는 점수가 없다 목표로 정한 버킷리스트를 꼭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물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숙제나 시험처럼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인 만큼 부담 갖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길 바란다. 무엇을 이뤘느냐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발걸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독자제보 브라보 버킷리스트 랭킹 20위 안에 해당하는 버킷리스트에 도전해 이뤄내신 분들을 찾습니다. 제보할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bravo@etoday.co.kr로 접수 부탁드립니다.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녀가 털어놓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던 삶을 뒤돌아보며 젊은 날의 봄을 맞이하듯 김부자와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12가지 달의 모습을 묘사한 민요풍의 노래 ‘달타령’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듣게 되는 ‘달타령’은 1972년에 발표된 이래 수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와 수많은 인용으로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국민적 아우라의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김부자. 1965년에 아마추어 여고생 가수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들어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한 가수 김부자. 반세기를 돌아 지금은 비록 혼자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며 이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펼치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단다.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꿈같은 세월 보내다
“동아방송의 ‘가요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1968년에 ‘팔도 기생’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김부자가 프로 가수로서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느새 칠순. 그러나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칠순이라고 할까.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달러 박스’ 김부자의 시대
트로트, 신민요 등등 전성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부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통 가요의 세계를 추구했다. 또 한 명의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세레나와는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
“요즘도 사람들이 제가 지나가는 걸 보면 김세레나로 헷갈려 해요.(웃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김세레나와는 친하죠. 조민희, 김세레나, 김아정 등 돼지클럽 모임이 있어요. 돼지해이던 1971년에 클럽을 만들어서 ‘돼지클럽’이라 부르죠.”
그녀는 대략 2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레코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음반 취입을 했다. ‘김부자가 부르면 팔린다’, ‘달러 박스가 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자상서’, ‘당신은 철새’, ‘카츄샤’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고 ‘사랑은 이제 그만’은 발매 3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공, 그녀를 사로잡은 오만과 독선
김부자 하면 무조건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에게선 이상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통금이 12시였고 극장식 캬바레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내가 얼마를 불렀지?’ 계산하면 50곡을 부르고 그랬어요. 목이 아프고 잠긴 상태에서 또 나가야 했고…. 이게 즐거운 생활만은 아니고, 뭔가에 매달린 느낌이었죠. 내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분명 스타가 됐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칭찬 세례들도 그녀의 마음을 둔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시작했다.
“후회되는 일이 많죠. 철모르게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나를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이 정도면 최고지’라는 자만심이 생겼죠. 그때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때 남들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김부자는 자신의 오만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인기와 대중의 관심에 매달려 살아가는 연예인에게 그런 오만은 어떤 종류의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부자는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도 좌초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고통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한때 전성기를 누려본 사람으로서 바닥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절박하고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내면의 힘은 자신과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믿었던 지인에게 30억 원을 사기당하다
“어찌 보면 인기도 다 헛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때는 사랑을 받는 줄만 알았지 줄 줄 몰랐어요. 이제야 나눠주면서 행복을 느껴요.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지금 삶이 더 행복해요.”
어떻게 김부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의 삶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인생을 격변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제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 그걸 20년 가까이 하니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가 1990년대 초반, 1992년이네요. 심적으로 버거울 때였는데, 이혼한 뒤 주위 사람을 잘못 만나 큰돈을 잃었지요.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까지 내려갔어요. 그때 당시 돈 30억 원이면 굉장히 큰 거죠? 지인이라 믿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죠.”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다
믿었던 사람 때문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느낀 좌절의 깊이는 그만한 돈의 액수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금액인데 1990년대 초에 30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 액수였다. 김부자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돈을 탕진했고, 한 달에 이자만 400만~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말도 안 나오는 불운과 배신감과 고통에 그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이 내려왔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교회를 가게 됐어요. 저희 아들과 딸이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꾸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에 다니도록 했는데 정작 저는 안 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어요. 거기에 감동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됐죠. 그리고 신앙을 만나면서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죠. 살면서 내 딴에는 잘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싶은 것이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꽃이 봄에 저절로 피듯 절망 끝에 부활하다
김부자는 신앙을 갖고,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그때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면서 어려웠던 것도 해결되고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울면서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그녀의 생활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고, 철저한 건강관리도 뒷받침되고 있는 삶이다.
“운동은 유산소, 스트레칭, 걷기를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생활에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참 좋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약은 전혀 먹지 않고 강화에서 보내주는 홍삼 원액만을 먹고 있다는 그녀는 몸이 쑤시거나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쳤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것이리라.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내 나이에 뭘… 하다가도 이거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게 있죠.”
작년부터 지나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김부자는 그동안 꾸준히 쉬지 않고 디너쇼 중심의 공연을 해왔다. 올해는 50주년 공연을 5월로 계획하고 있고 외국 초청 공연도 있다. LA와 뉴욕 쪽에서 연락이 온 상태다. 작사가 겸 작곡가 조운파 선생과도 협의 중이다.
“새로운 음반에는, 지금까지 여러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재밌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싣고 싶어요. ‘달타령’보다 좀 더 신나면서 현실적인 풍자가 있는 그런 인생 노래를 하고 싶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복을 입고 불렀는데, 이제는 좀 망가지는(웃음)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예전보다 좀 더 진한 정서가 있는 그런 노래를요.”
‘노래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며 나의 생명이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의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진 가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말한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여전히 펄펄 뛸 수 있는 가수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그래도 팬들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잘하고 싶죠. 그리고 옛날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잘해주고 싶어요. ‘잘 보이고 싶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새록새록 드는 거 보면 내가 나이 들면서 철이 드나 싶기도 하고.(웃음)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왜 여행하느냐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정의와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 묻혀버린 꿈과 환상을 충전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이라고 일갈했듯이,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럴 땐 다시 한 번 꿈을 충전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 사이의 바다, 인도양에 유유히 떠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는 실제로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의 고장이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목적한 나라의 비행기를 타는 경우 여행 기분은 배가된다. 마다가스카르항공은 프랑스 것이라더니 모든 안내방송이 프랑스어가 먼저 나온다. 그다음이 영어, 그다음이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 공용어) 순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의 인상은 바로 승무원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다가스카르에는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고, 외모 또한 아시아인에서 아프리카인까지 다양하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2000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80%의 국민이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며, 우리처럼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세끼 흰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모론다바!
바오바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 끝에 있는 모론다바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모론다바로 가는 비행기는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로, 손님의 숫자에 따라 제멋대로 항공시간을 변경해버리기도 해서 고객을 당황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탑승수속 땐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도 잰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 무게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오지를 가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천천히, 천천히”와 “문제없다”는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로는 “모라모라”, “짜마니노나”라 한다. 황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모라모라”, “짜마니노나” 하며 활짝 웃는다. 오지 여행에서는 아무리 서둘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니 느긋한 마음을 먹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다가스카르의 최대 볼거리로 꼽히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국립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모론다바는 ‘긴 해안’이라는 뜻으로 바닷가에 면해 있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갗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도 개도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휴양 모드의 유럽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소녀들은 그늘에 앉아 머리를 땋으며 놀기도 하고, 소년들은 타는 듯한 태양 볕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천 년의 지혜가 들려주는 말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 바오바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오바브나무 군락지! 그것은 목이 꺾어질 듯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도 장대했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라는 나무가 저만큼의 크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정말이지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보고 간다 해도 마다가스카르 여행은 충분할 것 같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1종은 호주에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하늘을 향해 길쭉길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감탄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혹성 B612를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무서운 식물이 있다”며 바오바브나무를 안 좋게(?) 묘사하고 있지만, 난 천 년이나 되었다는 신비한 바오바브나무를 보면서 식물이야말로 신의 안장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바오바브나무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벌레라기엔 좀 크다 싶은 그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였다. 아이는 바오바브나무와 인간을 대조해서 보여주려는 듯 나무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천 년이나 된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 마치 “문명국가에서 온 너희들이 좀 산다고 오만해봤자 천 년 된 바오바브나무 앞에선 모두 다 ‘고작 요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도, 끝없이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가라고….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러운 바오바브
두 번째 날엔 바오바브 애버뉴를 조금 벗어나 독특한 바오바브나무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러브 바오바브(love baobab)’와 ‘성스러운 바오바브(holy baobab)’다. ‘러브 바오바브’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 달리 두 개의 줄기가 엉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혼여행객이나 연인이 많이 찾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신성한 바오바브’는 성황당처럼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마을 주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몹시 영험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가 소원을 빈다.
그렇게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런 바오바브를 거쳐 이윽고 다시 돌아온 ‘바오바브 애비뉴’. 역시 마다가스카르는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실컷 봐도 그만인 곳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그래도 묘사할 게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온종일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끝내주는 바게트 맛이라든지 수도 안타나나리보 재래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칭기국립공원의 찌를 듯한 암석들까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군락에서 떨어져 혼자임을 즐기는 바오바브나무들이 양손을 펼쳐 바이바이를 한다.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며 바오바브나무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발레리나 바오바브나무, 고독한 바오바브나무, 체조하는 바오바브나무….
천 개의 느낌표가 가슴에 와 박힌다.
travel tip
★찾아가기인천에서 방콕까지 타이항공(5시간소요), 방콕-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마다가스카르 항공(9시간 소요).
★기본여행정보한달간 무비자국가로 오랫동안 프랑스식민지였던 관계로 현재까지도 불어가 널리 통용되며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가 공용어다. 화폐단위는 아리아리(Ariary)로, 1000원=2000아리아리 정도. 커피와 사탕수수, 쌀이 주농작물이다.
★지도 & 추천여행루트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시내관광, 재래시장, 유적지를 본후 국내선으로 모른다바로 이동해서 바오밥 군락지, 그랑칭기국립공원을 보는 것이 핵심코스.
★준비물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리므로 앉아있기 편안한 차림을 하는게 좋으며, 오지마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필이나 공책, 천으로 된 가방, 의류, 풍선, 사탕 등 준비해가면 현지인들을 위한 소중한 나눔이 될 수 있다.
★여행경비350만원 내외
천운을 타고나 이룰 것 다 이뤘는데도 탁구 천재 현정화의 눈매는 아직도 살아 있고 견고한 에너지를 방출 중이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의 강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서브를 넣어도 그녀의 핑퐁 토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레전드와의 만남이었다.
용인시에 있는 ‘현정화 탁구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분명 얼굴은 현정화가 맞는데 마치 고등학교 탁구선수가 훈련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짧은 머리가 영락없는 고교생 이미지였다.
6~7명의 중·고생 탁구 유망주들이 그곳에서 현정화의 지도를 받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보니 나이 오십인 현정화도 그 학생들과 또래처럼 보였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이리 말랐나?” 하고 물었더니 “나태한 걸 싫어한다. 많이 일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살찔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킨다.
몸매도 몸매이지만 눈매도 아직 배고픈 선수처럼 살아 있었다. 탁구선수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부러울 것 없는 탁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짐 없이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이 같은 눈매와 자세가 그녀를 만리장성의 벽을 깨고 세계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룰 거 다 이루고 나이도 오십쯤 되었으니 이젠 느슨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녀는 견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기러기 엄마, 독수리 엄마
현정화의 강직한 힘을 빼기 위해 한량 이봉규가 슬쩍 찔러봤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실력이나 외모 등 지금의 김연아급 인기를 끌었는데 실감했나?”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게 살았다. 탁구만 쳤다. 운동 잘하는 선수로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현정화의 대답에 다시 꼬리를 물었다. “예쁜 얼굴에 인기 절정의 현정화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나?” 급작스런 질문에 현정화는 몇 초간의 인터벌을 갖더니 “당시 선수촌에서 남자 상비군인 연습 파트너와 짜릿한 비밀 데이트를 했다”고 털어놨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이봉규를 달래기라도 하듯 곧바로 “그 남자와 10년 후 결혼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아마 다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현정화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녀는 “그래봤자 탁구 잘 치면 그만이다”라며 당당한 표정이다.
중2 딸과 고2 아들을 둔 지금에 와서야 편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현정화가 선수촌에서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007작전을 방불케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애가 결실을 맺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두 아이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명문 학군인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인 셈이다.
현정화 본인은 ‘독수리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수 있기 때문에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해명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탁구 레슨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현정화 감독도 시합이 끝나면 무조건 미국으로 달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가족들과 함께한다. 다행히 딸이 미국의 대입시험인 SAT 1600점 만점에 1500점이라는 높을 점수를 얻어 스탠포드대학교나 존스홉킨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운동선수 출신인데 왜 운동을 안 시켰나?” 하고 따지듯 물었더니, “일부러 운동을 안 시켰다.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꼬리를 힘없이 흩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중간만 하고 살면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 즉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본인이 훈련에 힘들었고 온 국민의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현정화는 “육체적 훈련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
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북 단일팀 이야기로 넘어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해 현정화는 결과적으로 단일팀은 선수들에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일생의 큰 경험과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단일팀을 경험해 본 선배로서 의견을 비췄다. 그런데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설명했다. 참가규정 인원이 5명인데 당시에는 이번 여자 하키 단일팀과 달리 국가별 참가 선수 인원을 늘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단일팀을 꾸리지 않았다면 “다른 남한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을 테고 설령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있어야 선수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강조한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고 부연 설명도 한다. 당시 같이 출전 못한 국가대표팀 동료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국가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대표선수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어쨌든 당시 현정화는 북한의 리분희와 함께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복 받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나는 정말 운을 타고난 운동선수”라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천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수
현정화의 타고난 운은 사실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때 탁구 종목이 처음으로 채택됐는데 그 대회를 위해 국가는 수년 전부터 어린 꿈나무를 육성시켰다. 그 선수들 중 한 명이 현정화였다. 당시 현정화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도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때 그녀는 복식에서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우리는 금메달 딸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해서, 단식을 접고 복식 연습을 3년간 하루에 서너 시간씩 했다. 나중에는 눈만 쳐다봐도 언니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완벽하게 호흡이 잘 맞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창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화제가 되었다. 단일팀의 원조격인 현정화에게 탁구 남북 단일팀 결정으로 인한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사실 진짜 제 속마음은 ‘이거 왜 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만들어져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빨리 우리가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도 성적을 잘 내는 걸 원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합심해서 성적을 잘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우리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보름을 같이 시합해서 45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양영자 선배랑 복식 3년을 준비한 것처럼 준비를 해도 메달을 딸까 말까였는데, 남북 단일팀이 한 달 만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들었다. 그냥 결승만 올라가도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시합을 했다. 북한의 에이스가 리분희이니까, 그 선수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 대한민국의 에이스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과 리분희에 대한 추억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 선수가 간염으로 아팠다. 그래서 훈련을 제대로 소화 못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계속 리그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왔다. 북한 선수가 한 명 나가고 내가 나가서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경기여서 정말 부담스러웠다.” 현정화로서는 리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나쁜 걸 아니까 그래서 더 파이팅을 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만리장성의 벽을 남북 단일팀으로 넘을 수 있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울올림픽 때 만나서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한 번 보고, 그 후로 25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이번 평창 패럴림픽 때 리분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에 관해 현정화는 “얼마 전에 리분희가 인터뷰한 걸 봤는데, 현정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해서 사실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그 표정을 보니 온 마음을 다해 리분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이 3월 9일인데 이 잡지가 나간 후 아마 둘이서 만나는 장면이 각 언론사 톱뉴스로 실릴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의 현정화와 리분희가 다시 만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또 어떤 옷을 입고 TV 화면에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천운을 타고난 현정화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60년 만에 돌아온 무술년, 환갑을 맞이한 ‘58개띠’ 이재무(李載武·60) 시인. 음악다방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듣고 군대에 다녀온 뒤 청년 이재무가 만난 시는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 존재였다. 자신의 20대를 무모한 소비이자 아름다운 열정의 시간이라 말하는 그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얼른 노인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순에 이른 그는 시를 통해 자아를 비춰보고, 지난날을 낭비케 했던 집착과 울컥으로부터의 도피를 바라고 있다.
햇수 나이로 60세에 펴낸 이재무의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에는 나이 듦에 대한 시인의 단상을 드러낸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시인의 회한은 시 ‘나는 벌써’에 잘 드러난다.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강렬한 시의 마지막 구절, 한탄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젊은 시절의 로망과 희망을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자조적인 시인데 공감하는 이가 많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유보하거나 죽이는 삶을 살아왔어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도 참고 다음에 더 여유가 생기면 먹자, 어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지금은 갈 형편이 아니니 나중에 가자. 내일, 다음에, 미래에… 그렇게 자꾸 현재의 삶을 미뤄왔죠. 지금 보면 오늘 행복한 사람이 그냥 행복한 사람인 거예요. 내일은 또 내일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되고요. 행복한 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가 되는 건데,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 삶은 결국 행복하지 않은데 말이죠.”
쌀 한 포대 비우듯 나이를 먹다
시인답게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다채로운 비유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인생을 두꺼운 책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기보다는 매일 그날의 행복을 만끽하며 삶의 페이지를 늘려가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충실히 더해왔음에도 쪽수(나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책의 두께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그다.
“쌀 한 포대 사면 ‘이걸 언제 다 먹지?’ 하잖아요. 의식하지 않고 먹다 보면 어느새 동이 나죠. 나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새삼 인식하고 나면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구나’ 하니까요. 하루하루는 마디게 가지만 한 달, 1년은 뭉텅뭉텅 빠지는 느낌이 들어요. 숫자를 의식하고 사는 편이 아닌데 올해가 환갑이라고 하니 나이가 실감이 나네요.”
나이 듦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만 보면 그에게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점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계단이 내 무릎을 연주하는 기분이에요. 관절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몸의 이음새가 녹슬어 계단을 오르면 소리가 나죠. 몸무게는 자꾸 늘고, 숙면을 하기도 힘들고, 새벽잠도 줄었어요. 집에서 주도권을 빼앗겨 요새는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데, 아내 목소리는 커지고 내 목소리는 작아지고. 아, 이게 늙는 건가 싶어요.”
이재무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불현듯 ‘늙는다는 건 슬픈 건가?’라는 물음이 생겨났다. 질문을 하면서도 ‘슬프지 않다’라는 답변을 슬쩍 기대했는데,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솔직한 심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요. 그게 슬프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고 초조하긴 해요. 내가 언제까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크게 이룬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는구나. 요즘은 내 아들이 부러울 정도예요. 돈이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여유롭게 즐기며 잘 살더라고요.”
건강하고 순수한 사유를 위한 움직임
그는 에세이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에 50대 이후 집착과 울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음공부에 전력을 다하리라는 글을 썼다. 60대를 사는 현재, 여전히 내면의 적들과 완벽히 헤어지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집착과 울컥이 내 안에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말과 글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의식하면서 살기 때문에 조금은 진일보했겠지만, 죽을 때까지 과제로 남을 것 같아요.”
쉽지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걷기를 통해 내면을 다스리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요히 명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묻자 오히려 몸을 가혹하게 해야 정신이 순수해진다고 대답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은 부패합니다. 몸이 한가할 때 충동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이 들어와 타락하기 쉽거든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호미가 밭에서 놀아야 하는데 허청에 오래 걸려 있으면 녹슬어요. 선박도 항해를 해야 아름답지 항구에만 묶여 있으면 밑창이 썩고 구멍이 나죠. 또 가만히 있는다고 고요한 게 아니에요. 묵언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속은 시끄러울 수 있잖아요. 고요는 내면까지 침묵하는 겁니다. 그게 꼭 몸의 정지를 뜻하지는 않아요. 걸으면서도 충분히 고요할 수 있죠. 방 안에 웅크리고 얻는 사유보다 움직이며 얻는 사유가 더 건강하게 빛난다고 생각해요.”
욕망하는 노인이 아름답다
이재무 시인은 무던히 걸으며 울컥과 집착을 비워내면서도 욕망의 고갈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자는 나이 들수록 욕망은 추한 것이라 폄하하지만 그는 욕망을 갖고 사는 노인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격려한다.
“나무가 늙었다고 피우는 꽃도 나이 든 건 아니잖아요. 고목이 만드는 그늘은 언제나 풋풋하고 피우는 꽃도 늘 싱싱해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인간에게 꽃은 욕망이라 생각해요. 주름 많은 몸이라고 해서 왜 욕망이 없겠어요. 태풍에 나무가 쓰러져도 살아 있는 한은 새 이파리를 피우죠. 사람도 죽을 때까지 욕망을 내려놓기 힘들어요. 욕망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욕망이 긍정적일 때 삶이 발전되고, 일상의 에너지로 작용하죠. 노인의 욕망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해요.”
때때로 자신의 세대를 향해 ‘노인’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아직은 입에 붙지 않는 듯 어색함이 묻어났다. 이른바 100세 시대, 예순에 노인이라는 말은 이르게 느껴지는 요즘 세상. 그는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지나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58개띠 세대가 경계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58개띠 친구들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상징적으로 우리를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모두 들어 있는 세대라 말하고 싶어요.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기차를 타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KTX를 타고 있잖아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는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숨차도록 열심히 달려왔어요.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끼인 세대로 지내는 게 안타깝죠. 오늘도 각자 현장에서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가교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을 58개띠의 무궁한 삶을 기원합니다. 2018년 힘내세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흔히 투우와 집시의 정열적인 플라멩코 정도로 알기 십상이던 스페인이 황영조라는 우리의 마라톤 영웅 덕분에 바르셀로나가 내게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어쩐지 친근한 도시로 여겨졌고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 도시의 몬주익 언덕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새벽에 이스탄불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반 정도 날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만 보아왔던 스페인의 하늘에선 뜨거운 태양이 쏟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는 간단히 무너진다. 구름이 가득 얹힌 하늘 아래 잠시 서서 스페인의 공기 속에 묻혀본다.
카탈루니아 광장 부근의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이 내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그 거리를 오가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높은 콧날의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내가 왔음을 실감시켜 준다. 일단 예약해 두었던 호텔에 짐을 부려놓고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가 볼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있지만 우선 카탈루나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사람 반 비둘기 반이라고 할 만큼 사람과 비둘기가 바글바글하다.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둘기가 훨씬 많아서 수백 마리가 날개를 펴고 한꺼번에 날게 되면 여행자들에게 카탈루냐 광장의 추억을 단숨에 만들어주는 듯 한 풍경을 연출한다. 광장 옆 도로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마치 단체 여행객들을 쏟아놓은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이어서 놀랐다.
광장 지하의 여행자 정보센터에 가서 투어 브로슈어를 몇 가지 챙겼다. 긴 날짜가 확보된 여행이 아니긴 했지만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트램, 푸니쿨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하철 역에서 판매되는 교통권은 1회권이나 1일권이 있고 10회권, 50회권이 있기 때문에 계획된 동선이나 머무는 날에 맞게 구입하면 유용할 수 있다.
일단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라든지 2주 3주씩 머물 만큼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다 보니 우린 짧은 날 동안이나마 바르셀로나를 충분히 느끼기 위한 마음을 활짝 열어둔다. 그리고 카탈루냐 광장을 벗어나 가우디의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시작했다.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인 페트로바츠(Petrovac)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구석은 없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 신선한 공기, 푸르고 맑은 물빛, 모래와 조약돌이 어우러진 해변, 16세기에 만들어진 요새, 바다 앞쪽의 작은 섬 두 개가 전부인 해안 마을이지만 동유럽의 부유층들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다.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긴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매우 편하게 해준다. 낚싯대와 책 한 권이 꼭 필요한 곳이다.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
발칸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는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크로아티아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해안으로부터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풍경의 장관을 보여주는 나라다. 풍치는 빼어나고 음식은 이탈리아 버금갈 정도로 맛있고 물가도 싼 나라인데도 크로아티아 뒷전인 것은 순전히 매스컴 영향 탓이다. 무분별하게 보여주는 영상매체를 스스로 걸러낼 수 있어야 수준 있는 사람이다. 몬테네그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크기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다. 좁은 땅에 로브첸(1749m), 오르엔(1894m), 두르미토르(2522m) 등의 고산이 90%나 차지하고 있어 매우 척박하다. 현지민들은 살기가 힘들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최상의 여행지다. 고산을 지붕 삼고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몬테네그로를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표현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Podgorica)는 전쟁으로 온 도시가 폭격을 당했지만 아드리아 해안선은 완전히 다르다. 코토르 만을 따라 이어지는 293.5km 해안선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와 경계에 있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시작으로 페라스트(Perast), 티바트(Tivat), 리산(Risan), 코토르(Kotor)까지 그림 같은 해안 도시가 이어진다.
부드바와 바르 중간쯤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
그러나 아름다운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치에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때때로 지나친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 번잡한 관광지다.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때 찾았던 곳이 페트로바츠다. 페트로바츠는 수도 포드고리차의 식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곳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몬테네그로로 입성해 터미널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메인 요리를 두 개나 시켜 먹고 나서 영어를 잘하는 스태프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도시를 추천해줄래?”라고 묻자 그는 메모지에 페트로바츠라는 지명을 써주었다. 지역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토르를 도망치듯 떠나 ‘부드바(Budva)’에 점을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르(Bar)’까지 가버렸다. 버스의 남자 안내원이 인파에 밀려 동양인 여자가 목적지를 꼭 알려 달라 했던 지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르에 도착한 버스의 여자 운전자는 말 안 해준 안내원보다 더 안달이 났다. 그녀는 페트로바츠까지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 편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공짜표는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너네 잘못이니 표 값 돌려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로마 때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도시
페트로바츠는 부드바(17km)와 바르(21km) 중간 즈음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대던 인근 해안 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 도시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서인 듀클랴(Duklja) 공국의 성직자 연대기(年代記, 연대순으로 역사적인 사상을 열거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 로마시대 때 한 부부가 이곳의 크라스 메딘스키(Krsˇ Medinski)에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을 욕조로 한 모자이크 조각이 세인트 일리야(Prophet Elijah) 교회 뒤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지명은 라스트바(Lastva)였다가 20세기, 세르비아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Petar Karađorđevic´, 1844~1921) 왕조 때부터 페트로바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600m 해안선을 가진 루치차 해변이 있다. 작아서 한눈에도 해안 주변은 다 보인다. 해안선 북쪽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듯한 작은 요새가 있다. 반대편 해안에는 자그마한 소나무 산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가옥 몇 채가 있을 뿐, 해안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바다 앞쪽으로는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바위 섬 위에는 마치 ‘인형 집’ 같은 작은 교회가 있다.
영화 등 촬영지로 인기
우선 눈에 익은 듯한 북쪽 해안 끝 카스텔(Castel)로 다가선다. 작은 이 요새는 16세기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선원들의 작은 등대 역할을 했다. 요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와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하기 위한 작은 오벨리스크가 기둥처럼 솟아 있다. 요새 옆의 거대한 아트갤러리(Red Commune)는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창고 겸 검역소다. 와인 등의 제품들을 보관했고 전염병이 돌면 환자의 숙박시설, 검역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르코 그레고비치(Marko Gregovic)가 19세기 후반 개조해 오늘에 이른다. 이 건물에는 1만5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고 연중 많은 연극, 예술, 음악 이벤트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풍경이 낯익은 것은 영화 (레이첼 와이즈, 애드리언 브로디, 마크 버팔로 주연)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사기꾼 형제 중 동생(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을 이루는 엔딩 장면도 이 요새와 레드 코뮌을 뒷배경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카티치와 스베타 네제리아(Katicˇ and Sveta Neđelj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앙증맞은 이 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정보부가 유고슬로비아 게릴라와 연락 교신하기 위해 주둔했다. 난파선 선원의 귀환을 기원하는 성 일요일이라는 작은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의 종을 울리면 행운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지만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재도 외부 관광객보다는 현지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지노가 있는 멋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원 없이 휴양을 즐기면 좋을 곳. 아침 햇살을 맞으며 요새 근처의 바에 앉아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싶은 곳. 낚시를 즐긴다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힌다면 한국식으로 회를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Travel Data
항공편 직항은 없다. 동유럽, 서유럽, 터키 등지에서 항공편으로 몬테네그로로 진입한다. 포드고리차 티바트 공항은 도심과 50km 거리에 있다. 육로로는 주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현지 교통 기차보다는 버스가 편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로 이용할 경우, 헤르체그노비를 거쳐 3시간 만에 코토르에 도착한다. 코토르에서 페트로바츠까지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해상 편은 굉장히 불편하다. 인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등 형제 국가에서의 진입에도 엄격한 여권 검사 등 국경 통과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폐 공식 화폐는 ‘유로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해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언어문제 몬테네그로어와 라틴 문자,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관광지 대부분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없다.
먹거리 도시 안쪽이나 바닷가 쪽에 레스토랑, 바, 카페가 있다.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산물이 많다. 또 몬테네그로산 프로슈토 햄도 유명하다.
숙박정보 카지노가 있는 호텔 외에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있다. 카지노 호텔은 30만원선이고 게스트하우스나 아파트는 5~6만원선에 이용 가능하다. 저렴한 호스텔은 없다.
날씨정보와 옷차림 몬테네그로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이 길다. 9월은 물론 10월 낮에도 바닷가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없고 건조해서 여행하기 좋으나 낮에는 햇살이 따갑다. 10월의 평균온도는 20도 정도이니 가을 옷을 준비하면 된다. 겨울에는 9도 정도로 온도가 급강하한다.
치안정보 몬테네그로는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대부분 안전한 편이나 관광지에서는 바가지 상술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페트로바츠 관광 사이트 www.petrovac.org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한국인들은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을 선호하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의 풍경은 크로아티아 버금간다. 크로아티아 여행과 함께 몬테네그로 여행 계획도 세워보자. 그리고 페트로바츠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 배정을 잘해서 몬테네그로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해보자. 크로아티아부터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울치니(Ulcinj)를 벗어나 알바니아, 그리스까지 여행을 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렌트(www.montenegro-car-rent.com)를 하거나 유람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제 제 라이벌은 나훈아씨예요. 한동안은 라이벌이 없었어요. 없는 동안에 저 혼자서 누나들을 많이 행복하게 해줬는데, 이번에 새 노래가 나온답니다(웃음).” 자신의 팬층이 가수 나훈아와 완벽하게 겹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수’ 이동준은 원래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1979년부터 태권도 국가대표였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톱클래스였다. 그러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연기자였다. 30년의 2막을 내리고 이제 그가 선택한 인생 3막의 삶은 가수다. 지금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이동준(60)을 만나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이제는 배우 이동준보다는 가수 이동준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늦깎이 가수지만(웃음). 큰 꿈을 꿔야 중간 정도라도 가지 않겠어요?”
나훈아를 라이벌로 삼은 ‘가수’ 이동준은 사실 2000년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수와 배우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동준씨는 배우인데…’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 이동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생 3막의 무대에 올랐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수하길 잘했어요.”
노래 ‘누나야’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일까? ‘늦깎이 가수’의 얼굴은 밝았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심정마저 느껴진다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인한 남성상의 대표적 이미지로 활약하던 그가 갑자기 가수를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수를 해야 하는 속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노래는 나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다
“우선 제 아들이 연기자니까 연기자 아버지로선 한발 물러나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젊었을 때는 주인공을 했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주인공을 못하는 것도 있고. 드라마 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됐구나’ 싶었죠.”
그는 또한 워낙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난 연기자였다. 그 자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부산, 미사리, 남양주 등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노래를 한 지 벌써 24년이 넘었다. ‘누나야’를 설운도가 곡을 써서 준 것도 그의 그러한 실력과 인맥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는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가수는 내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어요. 콘서트를 열어도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도 많고. 연기는 단체활동이라 개인활동을 하기에는 제한적인 데다 제작기간이 6개월이면 6개월 동안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있었죠. 그런데 노래를 하면 피드백이 빨리 와요. 관객과의 스킨십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가수 이동준으로 자리매김할 터
연기는 연기의 역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 이동준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수 이동준은 이동준의 원래 모습 그대로다.
“가수들이 저를 보고는 저러다가 말겠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만둘 생각 안 했어요. 이제 연기는 접고 가수의 길만 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 내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잖아요? 노래를 하니 즐거워서 내 갈 길은 이거다 싶고, 연기할 때보다 가수로 전향해서 더 바빠요.”
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의 노래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성인 발라드 곡인 ‘미안해요’가 제 첫 번째 노래예요. ‘남행열차’를 만든 김진용씨가 작곡한 노래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미안해요’가 롱런을 위한 노래라면 설운도가 준 ‘누나야’는 ‘팍 뜰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줄게’ 해서 받은 것이죠. 또 김동찬 선생이 저에게 맞춰주신다고 해서 주신 곡이 ‘그날그날’이에요. 이 세 곡이 요즘 제가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들이죠. 부지런히 공연을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들이 들어오네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그는 요즘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한강 조망권을 갖춘 고급 빌리지 ‘카스텔로 씨마’가 그것이다. 단지는 A, B, C 3개동으로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의 12가구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관과 차별화된 공간·구조로 설계해 입주민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15분 걸리는 거리예요. 남한강 근교에 이런 풍광이 있는 곳은 없어요. 앞에 도로가 없어서 공기도 맑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작 중입니다.”
가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주택까지 짓는 중이라니,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시행착오 없게 하려고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와 관계된 후배, 친구, 선배들이 많아요. 다들 고맙잖아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이걸 지어서 자금이 모이면 베풀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내 장사를 하면서 베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이동준의 아들 이일민은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그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도 스물여덟 살이 돼서야 데뷔를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들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니까요.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죠.”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직이기에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되면 좋지만, 잘되기까지는 남모를 아픔과 시련이 많다.
“나는 그나마 순탄하게 연예인 삶을 살아온 케이스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생계형이 있어요. 종합예술인으로서 이 세계가 좋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아들에게 바라는 건 정말 정통 연기자로서 살아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해병대 갔다 오고 해서 스펙이 훌륭하죠, 기다려줘야죠. 그런데 아들에게 미안한 게, 제가 더 바쁘잖아요. 아들은 나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해요.”
대나무 매듭짓듯이 살다
어쩌면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열어가고 있기에 갖게 된 여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이 있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에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일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치 대나무 매듭을 짓듯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영화에서 망했고, 인터넷에는 똥꼬쇼를 했네 뭐네 하지만 저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한 게 없어요. 망하기 전에는 돈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힘들어졌을 때도 돈에 쫓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한 달 준비해서 부산에서 일하며 바로 수익 창출해서 나머지 빚을 갚았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제는 돈이야 뭐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해요. 노래 부르면 되는데(웃음).”
남자답게, 정의롭게 산다
“스케줄이 비면 주로 골프를 해요. 지방에 지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만나서 공 치고 노래하고. 운동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선수로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그는 젊은 시절 11대 1로 상대했다는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년 전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보다 29세나 어린 선수와 상대해 이긴 적도 있다.
“감량은 음식과 운동으로 해야지 먹을 거 다 먹으면 안 빠져요. 건강은 자신하기보다 지켜야 해요. 소금은 줄이고 야채나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탄수화물은 차단하고 단백질을 먹어주며 물을 많이 먹어야죠. 그러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초기당뇨’ 징후를 발견했어요. 당화혈색소 수치가 6.0% 이상 나온 뒤부터 집사람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부산, 대구, 수원, 순천 등 전국 공연을 마치고 10월 청주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전 이제 시작이에요. 3막이 시작됐으니까. 일단 내가 행복하고 상대가 행복해야죠.”
여백의 에너지가 넘치는 상남자
그에게 가수 이동준으로서의 미래를 물어봤다.
“토털 엔터테이너 이동준. 사실 제가 악기를 조금씩이지만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알아요. 그리고 ‘이동준’ 하면 라이브라고 각인이 됐어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거짓말 좀 보태자면 50만 명 정도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어딘가에 들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던 털털한 이미지처럼, 천생 남자인 그는 남자답게, 정의롭게 살자는 마음가짐만큼은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에서 욕 안 하고 선배들이 인정해주니까 고맙죠. 그렇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죠.”
이동준의 인간미는 호쾌하다. 그의 인생 3막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호쾌한 인간미가 전해주는 여백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믿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