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뚜껑이 덮일 때

기사입력 2020-07-15 09:56 기사수정 2020-07-15 10:44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화향(花香)백리!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주향(酒香)천리!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인향(人香)만리!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송년회나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로 더러 쓰는 말이다. 덕과 인품을 갖춘 사람은 꽃보다 더 향기로우며 다른 이들의 모범과 사표로 길이 기억된다. “아름다운 향기는 백년을 가지만 악취는 만년을 간다[流芳百世 遺臭萬年].” 그러니 훌륭한 인격을 갖추도록 늘 자신을 성찰하고 검속(鈐束)하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인향만리라는 말을 뜻밖의 경우에 듣고 보니 착잡해진다. 지금 인터넷에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고소장이라는 글이 떠다니고 있다. 그 문건에서 고소자는 박 시장에게 인향만리라는 말을 하며 성추행을 모면하려 애쓰고 있다. 정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거짓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피해 여성의 대리인은 그 고소장이 수사기관에 제출한 문건이 아니라며 유포자를 처벌해달라고 고소장을 낸 상태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이지만, 실은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행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전과 후가 한결같은 삶을 일구고 가꾸어 그 결실까지 거두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천수를 다한 백선엽 장군과, 스스로 생을 버린 박원순 시장의 삶과 그 마지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7월 12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 제공 이투데이 DB)
▲7월 12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 제공 이투데이 DB)

두 사람의 죽음은 애도와 장례 형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을 낳았다. 백 장군의 경우는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안장을 반대해온 게 오래됐지만, 갑작스러운 박 시장의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사회 분열을 결정적으로 키웠다. 더욱이 죽음을 택한 이유가 성추행 의혹이었으니 오랫동안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해온 그의 생애가 송두리째 부정당할 판이다. 그야말로 그동안 쌓은 공이 아까운,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한 일이다.

게다가 박 시장은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면서 정작 피해 여성에게는 한마디 사과도 없는 유서를 남기고 떠나갔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라는 말이 요즘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 경우에 그 말을 액면대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절규하는 피해 여성의 글을 읽으면 자살의 공격성을 잘 알게 된다.

▲7월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 제공 이투데이DB)
▲7월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 제공 이투데이DB)

백 장군과 박 시장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미 60년 전에 시인 조지훈이 쓴 ‘지조론’(<새벽> 1960년 3월호)에서 판단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두 대목을 인용한다.

-일제 때의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마지막의 행적과 죽음의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개관사정(蓋棺事定), 시신을 관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에야 일을 결정할 수 있다. 즉 사람은 죽고 난 뒤에라야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이 말은 두보(杜甫)가 깊은 산골에 떨어져 살 때 이곳에 유배를 온 친구의 아들에게 써준 시에 나온다. 두보의 취지는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니 실망하지 말라는 응원과 격려였다. 그런 점에서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의미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삶의 완성이든 종결이든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므로 그때에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한 인물인지 또는 어떤 해악을 끼친 인물인지 평가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평가를 할 때는 그의 후반, 최종적인 모습을 보라, 그러니 누구든 후반을 조심하라,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박 시장의 죽음을 보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린 텅 빈 허무와 외로움, 아무도 모르지만 늘 입 벌리고 있는 그 어둠을 생각하게 된다. 원래 공인의 죽음은 사회의 공공재산이며 후세에 전해지는 문화유산의 한 가지여야 한다. 아름답고 좋은 죽음은 길이 향기롭게 기억되고, 성숙하고 완성된 죽음은 사회통합에 기여한다. 두 죽음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행을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든, 공인이라면 더욱,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좋은 죽음을 완성해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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