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세월

기사입력 2017-06-21 15:07 기사수정 2017-06-21 15:07

사방이 끝도 보이지 않는 황톳물이었다.

홍수가 나서 영등포 일대가 물로 뒤덮였다. 커다란 가로수 밑둥도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길인지 논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 길을 아저씨들을 따라서 철길을 건너던 필자가 그만 웅덩이에 풍덩 빠져서 가라앉을 찰나였다.

“동생 묻으러 가다가 니가 먼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구나.” 하시며 내 왼쪽 팔을 잡아서 건져낸 아저씨는 동생 연숙이를 묻어주러 가던 이웃집 아저씨였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꽃무늬원피스에서 온통 뻘건 황톳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철의 장진주사 가사처럼 지게 우에 거적 덮여 동생 연숙이가 북망산을 넘어가던 날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언니와 세살 터울인 필자가 이웃집 아저씨들 뒤를 타박타박 따라가던 중이었다.

귀엽고 예쁘게 생긴 셋째 동생 연숙이는 언니들이 자기 국수를 빼앗아 먹는 시늉을 하면 앉은자리에서 국수가 담긴 양은양재기를 들고서 뱅글뱅글 돌던 앙증맞은 아이였다.

잘 먹고 기운차게 놀던 세 살배기 연숙이가 별안간 병이 났는데 돈이 없던 엄마는 병원 문턱 한 번 넘어 보지 못하고. “어떡하니 연숙아, 어떡하니 아가야.” 안타깝게 소리쳤다, 보리차도 먹여 보고 미음도 쑤어 주는 등 경황없는 눈빛과 타는 입술의 엄마는 온종일을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던 엄마가 지쳐서 깜박 잠이 든 새 연숙이는 영원히 고통이 없는 나라로 가 버렸다.

얼핏 잠이 깨자마자 소스라쳐 놀라서 연숙이를 살피던 엄마 입에서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가! 연숙아! 눈 좀 떠 봐라. 얘, 아가.”

애타게 울부짖는 엄마에게 이미 하늘나라 천사가 된 연숙이는 끝내 ‘엄마’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죽음이 뭔지 이별이 뭔지 알 만한 나이가 안 되었던지 필자가 운 기억은 별로 없는 듯하다.

다만 아저씨를 따라가서 어디다 묻었는지 잘 알아 가지고 오라고 이르던 엄마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엄마의 비통하고도 초췌한 모습과 함께.

한번 나간 남편은 어느 때는 보름 만에 한 번, 한 달 만에 한 번 들어왔다 나가면 끝이었고 어디 계신지 연락처도 모르던 엄마였다.

당시에 필자는 아버지들은 으레 그렇게 집에 오랜 만에 들어오시는 건 줄 알고 있었다.

부모 가슴에 묻히는 것이 자식이라는데 엄연히 남편이 살아 있건만 혼자서 아이의 죽음을 감당하고 그 아이를 땅에 묻어야 했던 엄마의 가슴에 쌓인 한은 도대체 어느 만큼의 두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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