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초반 정년퇴직과 함께 몸 좀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가끔 타고 다니던 자전거로 장거리 라이딩이란 황당한 도전에 처음 나선 것은 지난해 가을.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 고성군 금강산콘도에서 강릉시 정동진까지 2박 3일간의 해안선 라이딩에 나선 것이다. 심장이 방망이질 쳐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정동진까지의 라이딩에 성공했다. 비록 작디작은 성공이지만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던 필자는 올해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영원한 꿈인 낙동강 700리 길(3박 4일) 라디딩에 도전하기로 했다. 거리가 멀다 보니 혼자 달리는 것은 너무 외롭고 위험할 것 같아 필자가 속해 있는 자전거 동아리 SD21 회원 5명도 당돌한 도전에 동참하라고 사주했고 회원들도 흔쾌히 동의해줬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작은 도전기를 5회로 연재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출발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자동차에 자전거와 먹을 것을 싣고 경북 안동댐으로 향했다. 쾌청한 날씨는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고 우리의 도전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안동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쯤이었다.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더들이 도장 받는 안동보인증센터 주차장에서 모두 라이딩 복장으로 갈아입고 라이딩의 첫발을 뗐다. 오늘의 목표는 안동보에서 상주보까지다.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 있어 바람막이 옷을 입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전거길 중간마다 나타나는 업힐을 오를 때는 숨이 막혀 오뉴월 개처럼 헐떡거렸다.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낙동강 700리 길의 첫 도입부는 무르익어가는 봄으로 상큼했다. 둑길에 가지런히 피어 있는 라일락 꽃의 향기가 코끝을 야릇하게 자극하고 서울에서는 아직은 철 이른 아카시아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달콤한 향기와 백색의 우아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5월의 아카시아 꽃잎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꽃잎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낙동강 물줄기는 광활한 평야의 젖줄처럼 유유히 흐르고 물줄기가 휘돌아 치는 모퉁이마다 기암괴석과 수목이 어우러져 참으로 멋진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멋진 풍경 속으로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가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몇 개의 고개를 넘은 뒤 굽이굽이 강줄기를 따라 페달을 밟으니 어느덧 안동시 하회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른 뒤 다시 달려 예천군으로 접어들 무렵 온몸이 묵직하고 다리가 뻐근해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길가의 어떤 상점 앞에 멈춰 목을 축이는 동안에 우연히 해맑은 표정의 두 젊은이를 만났다. 그곳에서 만난 그들의 자전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숙식에 필요한 텐트와 일체의 장비를 갖추고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 ‘청춘은 꽃’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들은 부산까지 자전거로 이동한 다음 전남 목포시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점프해 목포에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간다고 했다. 환상의 제주도 자전거 일주도로를 정복한 다음 서울로 돌아가는 방법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누구나 젊다고 해서 다 이런 도전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격려를 나눈 뒤 다시 출발해 달리는 내내 그들의 젊고, 건강한 향내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 노인일쾌사에서 우리는 조상들 역시 구강 질환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여섯 가지 즐거움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시에서, 그는 노인의 또 다른 즐거움은 치아가 없는 것(齒豁抑其次)이라면서, 치통이 없어 이제는 잠을 편안히 잔다(穩帖終宵睡)고 적었다.
하지만 다산(茶山)이 미처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그를 괴롭혔던 치통과 이가 빠져버리게 된 원인이 바로 그가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잇몸 때문이었다는 것 말이다.
흔히 우리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물론 은유적인 속뜻도 있겠지만, 그만큼 잇몸은 꽤 튼튼해서 치아만큼 버텨 줄 것이라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과의사들은 그 믿음을 헛된 믿음이라고 단언한다.
치과질환 잇몸관련이 압도적
의료현장에서 치과의사들은 특히 중년으로 접어들수록 치주질환과 관련한 치료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13년 건강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단일상병으로는 치은염과 치주질환이 8번째로 진료비가 많았으며, 치과 질환 중에서는 유일하게 발표한 순위 20위 안에 포함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잇몸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잇몸을 구성하는 두 가지 조직 중 어느 곳에 발병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잇몸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이 잇몸에 염증을 일으키게 되면 ‘치은염’이라 부르는데, 치은염은 제때 치료만 이뤄진다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치주염은 상황이 다르다. 잇몸의 염증이 잇몸뼈까지 전이된 상태를 치주염이라 부르는데, 치주염으로 잇몸뼈를 잃게 되면 회복은 쉽지 않다.
특히 이로 인해 잇몸뼈의 높이가 낮아지게 되면 치아가 벌어지고, 음식물이 끼면서, 다시 염증의 원인이 되고 결국 악순환을 반복시킨다. 또 노안(老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여기서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치근우식. 치근우식은 말 그대로 치아의 뿌리가 썩는 것을 이야기 한다. 잇몸으로 보호되고 있던 뿌리 부분이 점차 노출되면서 충치균에 감염되면 발생한다.
치근우식이 무서운 것은 진행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것. 일반적으로 치아를 보호하고 있는 법랑질은 성인이 되면 잘 썩지 않고, 설사 충치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 진행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하지만 치아 뿌리 쪽에 충치가 생기면 속도가 빠르고 치명적이다.
특히 이 치아우식은 지독한 입냄새의 원인이 되므로, 새로운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중년들에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치주질환으로 치아 흔들리면 ‘사망선고’
치주질환에서 최악의 상황은 치아가 견디지 못하고 빠져 버리는 상황이다. 치주질환은 상태가 악화가 되어서야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치아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면 이미 살리기 어려운 상황인 경우가 많다.
구로이즈치과의원 채규창 원장은 “치은염은 염증을 긁어주는 치주소파술 정도로 치료하면 되지만, 치주염까지 진행되면 잇몸을 일부 잘라내는 등의 수술이 필요하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치주질환을 예방하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원인이 되는 치태를 없앨 수 있도록 스케일링을 통해 치석을 제거하고, 치실이나 고압 구강세정기 등으로 치아관리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영양상태 역시 잇몸건강에 영향을 주니 이 점도 신경 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치석제거를 위한 스케일링은 국민건강보험 적용대상이므로 낮은 본인부담금(1만3000원)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잇몸약에 대해서 치과의사들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대부분의 잇몸약이 비타민과 칼슘이 주성분인 영양제에 지혈제와 부종완화제를 더한 것이어서,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것이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치주질환이 전신질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나오기도 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이효정 교수는 최근 발표를 통해 대만 의료진의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연구진이 10년간 71만 9426건의 치료 사례를 연구한 결과, 치주질환을 방치한 환자의 경우가 치료한 환자에 비해 뇌졸중 발병이 37%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발병 후에는 반드시 치료를 받기를 주문했다.
조부모가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이 부모만큼 많아진 사회상을 반영해 건강과 관련한 습관에 대해서도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강릉원주치과대학 박덕영 교수는 “결국 건강한 잇몸은 본인 스스로가 평소에 어떤 습관을 갖고 관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올바른 관리방법과 습관을 익히고, 손자, 손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육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여자는 등 뒤에서 두 손을 나의 양 어깨에 얹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 포즈.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어럽쇼,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우는 소리인 줄 몰랐다. 어떤 여자가 안마를 하려다 말고 흐느끼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여자가 등 뒤에서 말이다. 기분이 좀 ‘야시꾸리’해지는 사이에 흐느낌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뒤늦게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미 꽐라(술에 만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 상태였으므로 사태를 파악할 힘이 없었지만 기분은 한껏 ‘야시꾸리’해졌다.
글·사진 윤동혁 PD
인사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한정식 술집에서 그 여자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마담 언니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안마로 지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고 마담이 말했다. 혈관에 피를 잘 통하게 해주고 있노라면 안마 받고 있는 사람의 전 생애가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길 가다가 빨간 깃발, 흰 깃발이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똥개나 참새처럼 조급해지는 내가 아닌가. 아니 나의 추억이 엑스레이에 비친 내장처럼 훤히 보인다는데, 그냥 고맙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서럽게, 격렬하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쌍한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이런 슬픔의 덩어리들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느냐.”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불쌍하다고? 슬픔의 덩어리?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하고 바뀌었나. 혹시 슬픈 일들이 많았는데 워낙 인생의 깊이에 관해서는 멍청한지라 슬렁슬렁 흘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애써서 나의 지난날들 중에 정말 슬픈 요소들이 있었는지 치약 짜듯 과거를 저 밑에서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 아린 일들이 줄줄이 엮이는 것이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서 나는 정자, 난자의 도킹에 성공했으나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로 주거지가 이동되었다. 절반은 목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주에서 기다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나의 사주에 낙인으로 찍혀 있는 ‘천고역마(天孤驛馬)’의 시작이다. 형을 형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그 누구처럼 나는 제주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 다섯 살 때 제주도를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산 게 아니라) 살아졌지만 나의 몸에는 제주 4·3사건의 피비린내와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불안, 그리고 고부(시어머니-며느리) 전쟁의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 버린 모양이다.
단지 다섯 해를 살고 태어난 곳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대양이나 다름없는 두 바다를 건넜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흔들리고 가서 하루인가 이틀 쉬고 또 배를 탔다. 포항까지 가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배를 타고 총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울릉도.
그때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울릉도엔 ‘바퀴’가 없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리어카나 자전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징어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팔 물건이어서 감시가 심했다. 집집마다 오징어를 쌓아둔 채 군대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육지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는 커다란 유리병 속에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오직 오징어, 그중에서도 다리밖에 없었다. 스무 마리를 한 축으로 정확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한 마리를 통째로 훔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다리를 한 개씩 뽑아 먹었는데 영민한 부모들은 산만큼 쌓아놓은 오징어 다발들 속에서 단 한 개의 다리가 사라진 오징어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그날 죽는 날이었다. “육지에 나가서 제값 못 받는다”고, “이 오징어 잘 팔려야 느이 형 포항으로 학교 보낼 수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매를 맞거나 했다.
그런데 오징어 다리는 우리 몸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 부모들은 오징어 다발을 낱낱이 조사하지 않고도 ‘흠, 이 녀석이 또 훔쳐 먹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부스럼인데 오징어만 먹으면 팔뚝에 둥근 원이 몇 개씩 그려지는 부스럼병을 우리 모두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 살면서 오징어를 다리 말고 몸통까지 먹는 게 우리들의 꿈이었다.
우산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무선전신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강릉으로 발령 받았다. 두 번째로 포항 땅을 밟았는데 이때부터 컬처 쇼크(문화충격)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퀴’들을 만났고 바퀴 수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합승이라고 쓴 차를 ‘합승’이라고 읽어야 할지 ‘승합’이라고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바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릉국민학교 2학년 몇 반에 전입한 나는 첫날부터 스스로 맴을 돌아야 하는 바퀴가 되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 전쟁고아들이 반마다 몇 명씩 있었고 그들은 나로 인하여 색다른 기쁨을 얻었다.
“야, 너 일어나서 책 읽어!”
쉬는 시간에 그들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나 울릉도에서나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는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표준어로 읽으면 나를 괴롭혔다.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울릉도 말로 읽으란 말이다. 갱상도 말로.”
나는 맞는 것이 무섭고 싫었지만 그 보다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가슴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서 이 불합리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당시 강릉은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공을 찬다고 할 만큼 축구 붐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공을 찼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고아원에서 도시락을 안 싸주니까) 공놀이를 했는데 밥도 굶는 녀석들이 변변한 축구공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꽤 훔쳤다. ‘정식’ 축구공을 사서 영웅들에게 주었다. 그날 그리고 며칠간은 내가 감히 센터포워드를 맡아서 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또 돈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 전쟁은 이제 파편이 튀는 단계를 지나 집이 불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낀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서 매일 술을 마시고 통금 사이렌과 함께 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여자(나는 그 여자가 우리 엄마보다 더 좋았다)까지 나타나자 어머니는 짐을 싸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사는 전라남도 송정리로 이사해 버렸고, 그 짐 보따리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첫 번째 땅 송정리. 그곳에서 나는 토끼를 키웠다. 열심히 전라도 말을 익혀서 금방 네이티브 발음이 되었기 때문에 매를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많이 나아서 금방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필통이며 연필을 샀다. 여름엔 토끼풀을 뜯다가 괜스레 지나가는 뱀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보리가 한창 영글 땐 보리밭 속을 파고들어가 보리피리도 불었다. 가장 좋았던, 평화로웠던 그 세월은 단 1년 만에 끝나고 인천 송도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그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보천치’여서 ‘와이로(뇌물)’를 먹이면 될 것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고생을 시킨다고 눈에 날을 세웠다.
1962년께 송도는 그냥 황무지 갯벌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인가 뭔가를 열심히 외우며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 뒷동산엔 야생 부추(그땐 전부 야생이었지 뭐)가 풀처럼 자라고 있어서 부추조갯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엔 낡은 권투 장갑이 두 짝 있었고 어른들이 심심하면 우리들을 풀밭 링에 올려서 ‘싸움질’을 시켰는데 그때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경험을 많이 했다.
6학년은 인천 시내 학교(인천에서는 변두리)로 옮겨 공부를 좀 하다가 일류 중학교라고 하는 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학교와 학교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정은 끝이 났다.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인천이 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명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놀고 오겠다고 말하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느린 뱀처럼 밤새 꿈틀꿈틀 기어간 기차가 송정리역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역에서 외삼촌 집까지 걸어갈 때 여명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단은 이때 났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 외사촌 누나가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그 화살은 나를 사랑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이제껏 방황하던 나의 영혼이 전심전력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어찌하여 외사촌 누나를… 누가 듣기만 해도 해괴하고 망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냥 마셨다. 막걸리, 소주 안 가리고 마셨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엄마가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치려 할 때도 얼른 손을 빼서 달아났고 또 마셨다. 예비고사 1기생인 나는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생누룩’ 막걸리 석 되를 마시고 한겨울 논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오로지 막걸리 원 없이 마시려는 욕망 하나로) 고려대에 들어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마셔도 사내답게 막걸리만 마신다’라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지만 나는 마셔도 빚을 내서 마셨고, 전날 실수로 얼굴이 화끈거리면 그 창피를 덮기 위해 또 마셨다.
대충 여기까지 추억의 치약을 짜고 나니까 또 술발이 당기는구나.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이런 생의 이력을 보고서도 눈물이 솟구쳤다는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이념을 위해서 또는 노동자, 빈민을 위해서 나의 시간을 내거나 술잔을 든 적이 없다. 그냥 소소한 개인사, 남자들의 자잘한 일상사에 온몸 바쳐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어깨를 만지며 등 뒤에서 흐느꼈던 여인이여. 그대가 맥을 잘못 짚었던 게 틀림없소. 아니면 내가 꽐라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거나.
△ 윤동혁(尹東赫) PD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도 절도 없으므로) 프리랜서PD로 일하고 있다. 로 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다. 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경로우대증’을 받는 내년 1월을 계기로 ‘나홀로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 “불효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효에 관한 정서는 동·서양이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효야말로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로 언론인 권혁승(權赫昇·83)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 발상의 원대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효 문화의 세계적 전파를 위해,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분주해지고 있는 그의 발걸음 속에 담긴 효의 가치를 추적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국의 효 사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중국의 유교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중국의 학계에서조차도 유교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었을 정도다. 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효 사상 또한 한국에서 특히나 강렬하게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한류로 대변되는 케이팝이나 김치로 대변되는 식문화처럼, 효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널리 전파될 수 있다.’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그리고 현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한 추진력을 달아 효 사상의 세계 전파를 위해 야심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어머니를 기리는 사모정 공원을 만들다
어머니를 향한 권 회장의 그리움과 감사의 표현은 어언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 출신인 그는 고향인 경포동 지변 저수지 아래 핸다리마을에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공원을 조성한다. 이름하여 ‘사모정(思母亭)’ 공원. 이곳은 권 회장이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그의 생가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인 효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안에는 정자를 비롯해 3개의 시비(詩碑)와 강릉 출신 예술인 신봉승 시인, 권순형 도예가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냥 보통의 정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만들어진 전통 문화재에 진배없는 정자를 짓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장을 지낸 김진무 씨와 2년 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제가 원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자의 제작자를 만나 제작에 들어갔죠.”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사모정 공원은 자연스럽게 효에 대한 권 회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준공식 날 이 공원을 동네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강릉에 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친문학의 본산, 백교문학회의 시작
그런데 사모정 공원을 만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그에게 문인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역 규모의 공원을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것도 좋으나, 보다 큰 범주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들이었다. 문인들에게서 나온 발상인 만큼 문학상을 활용하는 방법이 추천됐다. 그리하여 백교문학회가 설립되었다. 백교(白橋)는 ‘하얀 다리’라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핸다리’가 바로 백교의 강릉 사투리다. 권 회장은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백교문학상은 우리나라에 사친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사친(思親)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 문신 겸 시인인 박인로가 ‘사친’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어 문집 에 실은 바가 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교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글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시와 수필만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권 회장 말마따나 사친문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2010년 제정된 백교문학상은 2014년에 5회째를 맞이했다. 제5회 백교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항아리’를 쓴 정재돈 작가.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백교문학상이 강원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안으셨다. (하략)
한국의 효 사상이 세계의 효 사상이 되어야
최근 권 회장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명희 강릉 시장이 어느 잡지에 수필을 쓴 걸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길, 효 사상의 정서와 일치하는 내용이었어요.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고향이 바로 강릉 오죽헌이란 것을 설명하면서 강원도의 효 사상을 2018평창 동계올림픽 때 보다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하여 강원도를 국제적인 효의 중심 도시로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제가 해야 할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 회장은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효 사상이 날로 꺼져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 잃어가는 효심을 적극적으로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화하여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워 한국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자, 그러면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남을 것 아니겠습니까?”
권 회장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것은 효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효의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효가 전세계 도서관에 꽂힌다
권 회장은 문학계,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예상보다 험난했던, 제작 시간이 무려 3년 이상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들로부터 원고, 프로필, 사진을 받고, 원고 교정 교열을 하고 감수도 받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야말로 책의 목적답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롯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 최명희 강릉시장, 이희종 강원일보 사장 등 사회 각계지도층 저명인사 문인 63명의 작품 71편이 실렸다.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국내 국립·대학도서관 190곳과 해외 60개국 국립·대학도서관 110곳에 기증됐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할 80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4명에게도 이 책을 줄 예정이다.
어머니, 신의 다른 이름
2남 2녀의 차남인 권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죽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권 회장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20여 년 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면 그래요, 대관령만 넘어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사모정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읽어보게 되고….”
권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어머니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 ‘오 마이 갓’ 하고 죽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엄마야’ 하고 죽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신과 같은 거죠.”
어머니를 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 권 회장이 품고 있는 효 사상이 일종의 신앙이자 율법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권 회장의 말에서 사모정 공원의 시비들 중 신봉승이 쓴 시 ‘어머니’의 한 구절이 보였다.
촛불이 심지를 태우듯
어둠을 밝혀 주시고
손 시린 겨울밤은 화로가 되시네.
아름다워라
형극의 가시만 골라서 지은
거친 옷, 새 옷처럼 입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
산림조합중앙회(회장 장일환) 임산물유통센터에서는 송이·능이버섯 채취시기를 맞아 사전 예약접수(1544-7671)를 진행 중이다.
버섯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리는 송이버섯은 금년에는 9월 초쯤부터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며 항암효과, 성인병 예방, 다이어트 등에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산 송이의 경우는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영덕, 봉화, 청송, 포항 등지 자라고 매년 총 생산량은 약 50톤에서 400톤까지 날씨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한다. 가격 또한 생산량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독특한 향기를 내 ‘향 버섯’으로 불리는 능이버섯은 혈중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주고, 암세포 특히 위암세포를 억제하는 효능이 지닌다. 특히 능이버섯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양양군산림조합에서 공판이 진행되며, 9월말쯤 채취가 시작되어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전 예약 접수를 한 경우에는 상품 판매 시점에 사전예약접수자에게 우선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가격은 그 해당 일자의 시가로 적용되어 판매할 예정이다.
문의: 산림조합중앙회 임산물유통센터(☎ 1544-7671)
은퇴 이후 여가는 늘어났고 수시로 가까운 곳 혹은 먼 곳을 다녀와 보지만 굳이 휴가라는 느낌 없이 여행이라는 느낌이었으나 이번 여름 휴가는 특별하게 휴가 같은 휴가로 느껴졌다.
6박7일의 휴가는 과거 현역시절 꿈꾸던 여름 휴가기간이었다. 그때는 그것도 쉽지않고 회사의 눈치를 보아아 하던 때였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자유 의지로 설정한 휴가였으니 그것부터 달랐다.
강릉에 있는 처가에 가기로 했다. 처남이 과거 아내가 어린시절 살았던 옛 집터에 콘테이너를 들여와 욕실까지 갖춘 농막을 지었고 텃밭에다 감자며 옥수수 등 농작물을 심었는데 일손이 없어 방치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 1달이 다 지나도 짬을 못 내다가 드디어 시간이 난 것이다. 마침 딸과 사위의 휴가기간과도 맞았다.
목요일 오후에 8살짜리 초등학교 1년생 준이와 3살박이 철수만 데리고 출발했다. 딸과 사위는 주말에 합류하기로 했다. 실상 딸과 사위는 휴가를 가는 양태가 우리와는 다르다. 세대 차이런가 혹은 성향 차이일지 모르지만 이들은 콘도에서 워터파크 등 주변 여러 가지 인공시설을 즐기는 것으로 해마다 휴가를 보내서 우리와는 달랐다. 하루만 강릉에서 머물고 바로 비발디로 떠난다고 해서 아이들만 우리가 데리고 떠났다. 이름하여 어린이 농촌체험 휴가였다.
출발하니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잠들었고 도착지 임박해서 잠이 깨는 모범적인(?) 탑승자였다. 대관령을 넘어 터널이 많은 하강구간에서 동승했던 처조카가 아이들에게 “차가 터널을 지날 때 눈을 감고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대” 라고 하자 준이는 신이 났다. 터널길이가 긴 곳이어서 도저히 숨을 참지 못하다가 때마침 알맞은 길이의 터널을 지나자 참았던 숨을 내쉬며 준이가 말했다.
“ 아 소원을 빌었어, 이모” “ 응 그래 무슨 소원 빌었어?” “ 반에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어” 잠시 행복한 꿈을 꾸었나 보다.
도착해서 들어간 농막은 의외로 깨끗하게 잘 장단이 돼 있었고 세면장과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갖추고 있어서 며칠 지내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창고에서 호미 3자루를 꺼내 아내와 준이 각각 한 자루 씩 들고 감자밭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잘 적응할까 하는 우려는 바로 사라졌다. 비가 내려 약간 촉촉해 진 땅에 호미가 잘 들어갔고 호미질 한 번에 감자 몇 알이 모습을 드러내니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한 시간 이상을 감자 파내고, 주어 담고, 창고로 옮기는 작업에 열심히 동참했다. 태어나서 내 손으로 처음 농작물을 수확해 보는 재미에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문득 봄에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서 가족 외식을 하고, 쉬는 시간에 준이 하나만을 데리고 등산로 입구를 오른 기억이 생각났다. 45도 경사도에 내려쬐는 햇볕에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준이가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어른들은 이상해”“뭐가?”“ 응 있잖아. 이런 힘든 산에 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 않하고 있을까? 힘든데...” 과히 8살짜리 도회지 아이가 아니고서는 상상하지 못할 생각이다. 건강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이 길에 에스컬레이터라니.
그랬던 준이가 감자 운반 손수레를 손수 끌고 창고로 가겠다고 나서니 갑자기 15살은 된 소녀로 보였다. 때마침 할머니가 입혀준 농사용 모자랑 옷도 잘 어울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로 보였다.
이렇게 하루종일 보내며 수확한 감자 구워먹고 옥수수 삶아 먹다보니 서울에서 준비한 각종 먹거리는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있을 뿐 자연이 준 먹거리로 행복해했다.
아이들이 너무 잘 적응한다고 문자를 띄웠더니 딸과 사위가 일정을 하루 당겨 이튿날 내려왔다. 이튿날도 준이는 “할머니 심심한데 오늘 농사할 일은 없어?” 하고 텃밭으로 나가자고 조른다. 함께 또다시 감자 캐러 나갔으나 딸과 사위는 한 번도 밭에 나오지 않았다. 둘다 도회지에서 자랐고 아이들 같은 동심도 없으니 힘들고 흙덩이 밭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울까도 모르겠다.
저녁에 강릉 처가 가족들도 합류하여 저녁을 먹고 나자 자연스레 담소를 하게 되고, 아이들 재롱잔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딸이 9월 18일 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연습 중인 대금을 연주해 보겠노라고 하여 모두가 경청하게 되었다. 대금 연주를 연주홀이 아닌 시골마당에서 들으니 색다른 정감이 몰려 왔다. 주변 정경과 어울려 더욱 시골냄새와 정취를 더해 주었다. 한오백년과 강원도 아리랑을 다른 악기 협주나 반주 없이 독주로 들으니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
이에 질세라 대학교 1년생으로 홍대 입구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장래 래퍼 지망생 처 조카의 랩 송 3마디를 들었다. 대금 연주와는 또 다른 최 현대 음악이니 색다른 맛이었다. 이어서 준이의 ‘Let it go’ 등 노래가 뒤를 이었고 뒤 질세라 철수의 ‘반짝반짝 작은별’과 ‘로보캅폴리“도 무대를 장식하게 됬다. 10시가 훨씬 넘어 파한 가족 음악회에 모두 흥겨워했고 행복감에 빠졌다. 오늘의 이 일은 우리 아이들도 장차 어른이 되어서도 아련히 기억하겠지만 시니어인 우리 부부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밤일 것이다.
4박의 강릉 농막 생활을 즐겁게 마감하고 비발디 파크에 와서 하루종일 비오는 워터파크 물놀이를 했다. 준이가 그렇게 바라던 워터파크이니 6시간의 강행군도 부족한 듯 했다. 하지만 문득 강릉 송정 해변에서 준이와 철수가 동해안의 비교적 높은 파도와 놀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비싼 워터파크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자연과 잘 호흡하는데, 어른들의 시각은 워터파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산업은행
-한주통산 이사
-세종공업 상무(슬로바키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