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게 요즘처럼 소란스러웠을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방송마다 먹방이 지천이고 숱한 맛집 정보와 요리 프로그램이 판을 친다. 셰프들이 방송 채널만 돌리면 나타난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니 요리 얘기가 더욱 늘어난다. 지난 가을 코엑스몰 메가박스에서 봤던 세계적인 셰프의 영화가 떠올랐다.
... ‘알랭 뒤 카스: 위대한 여정’ ....
이 영화의 주인공 알랭 뒤 카스는 프랑스의 셰프다. 요리 프로그램으로 많이 알려진 박준우 셰프의 말을 빌리자면 “프랑스와 양식 문화를 얘기할 때 ‘알랭 뒤 카스’를 빼놓고는 진행할 수 없는 큰 존재”란다.
‘최연소 미슐랭 3스타 획득’, ‘최초 트리플 3스타 달성’ 등 화려한 미슐랭 스타 이력만 보아도 호기심이 당겨지는 인물이다.
최정상에 올라서도 요리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세상의 모든 맛을 보려는 집착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 남부 농가에서 태어난 알랭 뒤카스는 요리 재료 본연의 맛, 자연주의를 지향한다.
최고의 요리를 시식한 후 그는 말한다.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을 넘어서는 맛을 내야만 한다... 맛의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하다. 디테일이 모여 전부가 된다" 라고 촌철살인의 평가를 한다. 최고는 완벽함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완벽을 뛰어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만족하지 못하는 장인 정신이 깃든 그의 선구자적 집념은 날마다 고군분투하며 산다.
2015년 9월 프랑스 정부가 베르사유 궁전을 두고 호텔 사업자 공모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내외에서 20여 개 업체가 참여했고 호텔 레스토랑 운영권은 ‘알랭 뒤카스’에게 돌아갔다. 셰프 필생의 프로젝트를 맡게 된 알랭 뒤카스는 2년간의 준비에 돌입한다.
자연 가까이에서 구한 로컬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그는 영화 속에서 최고의 재료로 맛있는 추억을 선사하는 ‘파인 다이닝’을 선보이고자 미식 로드 트립을 떠난다.
런던, 홍콩, 베이징, 도쿄, 마닐라, 파리, 뉴욕, 리오, 몽골 등 미식 여행의 행보가 다양하다. 그 여정 중에 그의 철학과 예술적 표현, 미식 탐험의 집념을 보여주는 요리 천재의 면모를 보게 된다.
텃밭에서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제철 식재료를 즉시 냄새를 맡고 질감을 느끼고 날 것을 그대로 씹어먹어 보며 세상의 모든 맛을 본다. 더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자연 풍경이 힐링 미식 여행으로 데려가 주는 볼거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직접 경험을 통해 가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요리의 거장답게 세계적인 수뇌부들과 함께 있어도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아우라가 있다. 대통령과 함께 있어도 밀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 멋지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프로페셔널은 거장이라는 호칭이 잘 맞는다
날카로운 칼로 철갑상어의 배를 가르며 복권을 긁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요리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또한, 누구도 감히 가 볼 수 없는 세계 최고 식당의 건축현장을 보는 건 마치 궁전을 짓든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다.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 알랭 뒤 카스의 사생활을 가려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셰프의 이야기인 만큼 요리와 요리하는 모습과 맛있게 먹는 화면이 적어서 조금 아쉬웠다. 기대한 것이 많아서인지 80분은 너무 짧았다.
그런 아쉬움이 있어도 여전히 그 화면들이 내내 떠오른다. 여운이 긴 영화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긴 시간 야외 사진 촬영할 때가 있다. 설경과 상고대 촬영을 위해서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겨울철 장시간 바깥에서 촬영을 위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전문 작가든 일반 사진가든 알아두어야 할 유의점 두 가지.
첫째, 카메라에 장착된 배터리 외에 여분 배터리를 준비해야 한다. 배터리는 추위에 아주 약해 전기가 생각보다 빨리 닳기 때문이다. 카메라용 배터리는 일반 마켓에서 살 수가 없다. 충전기도 함께 챙겨둘 필요가 있다. 또한, 배터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쉬는 시간에는 카메라에서 빼내어 호주머니 같은 따뜻한 곳에 보관하는 것도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배터리도 같아서 추위에 약하기는 마찬가지. 추운 날 야외에서 촬영하다 보면 전기가 빨리 소진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충전용 보조 배터리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용량이 큰 것이 좋고 급속충전용이 유용하다. 스마트폰 자체가 추위에 노출되어 극도로 차가워지면 보조 배터리를 장착해도 충전이 되지 않는 상황도 발생한다. 촬영 중간마다 스마트폰을 따뜻하게 해두면 훨씬 낫다.
둘째, 안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길이나 언덕, 바위 등 서 있게 될 곳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끄러움이 있다. 얼어있는 길 위에 떨어진 낙엽도 그렇다. 더 나은 구도를 잡기 위해 뷰파인더나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위치를 앞뒤 또는 좌우로 움직일 때가 많아 발아래 쪽을 잘 살필 수 없어 위험에 빠질 때가 많다. 미끄럽지 않은 시기에도 난간 끝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큰 변을 겪는 사례도 더러 있다. 겨울철엔 미끄러움이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겨울철에만 찍을 수 있는 멋진 풍광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나 취재 등 특별한 목적을 띈 사진 촬영 여행이 좋은 결과를 얻도록 미리 준비하고 예방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꿈이 유예되는 날들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부부는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아파트를 팔아 한적한 시골마을로 들어가 난생처음 지은 집은 2층짜리 컨테이너 하우스. 1만여 장의 LP 음반이 놓인 공간은 자연스럽게 ‘음악 카페’가 됐다. 어느 볕 좋은 날, 정성 들여 쓴 ‘프럼나드’ 간판을 걸고 김기호(金基鎬·74) 씨는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인 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었다. 아내 양정필(楊汀畢·64) 씨는 커피를 내리고 달콤한 과자를 구워냈다. 해가 지면 파주 탄현면 만우리의 노을이 부부의 마음을 자주 물들인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차로 10여 분간 더 달리니 시골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른 논밭의 곡식들이 땀 흘리며 받아내는 가을볕은 꽤나 뜨거웠다. 고운 마을길에 끌려 차바퀴는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고 하마터면 목적지를 지나칠 뻔했다. 김기호, 양정필 부부가 사는 컨테이너 하우스는 마을 안쪽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이어져 있고, 아래쪽으로는 옹기종기 민가가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부부의 철학이 담긴 집
부부가 이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2016년. 무역업을 하던 남편이 도시에서의 삶은 그만 정리하고 시골에 가서 살자는 제의를 했다.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내는 정년이 아직 몇 년 더 남아 있었지만 그 뜻을 따랐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소망해온 삶이었기에 도시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땅을 사고 집 짓는 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래 고민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희도 맘에 드는 땅을 구하기 위해 김포, 강화, 양평, 가평, 춘천 등지로 많이 돌아다녔지요. 그러다가 문득, 너무 먼 곳에 살면 자식들이나 친구들이 만나러 올 때 사방 막히는 길에서 시간을 다 허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이 아플 때를 대비해 병원과의 접근성도 고려해야 했고요. 파주가 그런 기준들에 가장 적합했어요.”
땅을 매입한 뒤에는 컨테이너 하우스 견적 상담을 받았다. 서울을 떠나면 절대로 집을 마련하는 데 큰돈을 쓰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텐데 시골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며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조언을 했지만 계획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 집 짓다가 10년은 폭삭 늙어버렸다는 얘기도 많이 들려왔고, 무엇보다 20여 년 전 외국에서 본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다.
“사업 차 덴마크에 갔을 때 바이어가 자기네 집에서 자라며 데리고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동이 가능한 컨테이너 집이더라고요. 일반 주택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건물이었어요. 감탄했지요.”
대지 137평에 지은 부부의 컨테이너 하우스는 토목공사비 7000여 만 원, 총 55평의 건축비 1억5000여 만 원이 들었다. 땅값까지 다 합쳐봐야 4억 원도 안 되는 비용에 2층짜리 집을 번듯하게 세운 것이다. 공사기간도 단축했다. 주방 설치 등의 내부 공사와 함께 상하수도 연결, 마무리 페인트칠까지 2개월여 만에 끝냈다. 아파트 살림에 비하면 관리비도 절반밖에 안 됐다.
“비용이 많이 절약됐어요. 나이 들어 큰 집에 살면 관리하기만 힘들지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우리가 죽은 뒤에는 자식들이 들어와 살 거 아니면 이 집은 고철로 팔아버리면 돼요. 일반 주택은 철거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컨테이너 하우스는 그런 면에서 친환경 건축이라 할 수 있지요. 폐기비용도 거의 안 들고 재활용도 가능하니까요.”
LP 음악 들으며 떠나는 시간 여행
그렇게 부부의 철학이 녹아든 집은 독특한 외관으로 방송과 신문에 종종 소개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LP 음반 위에서 바늘이 치직거리며 불러오는 노래가 좋아 음악 카페에 찾아오는 단골도 생겼다. 대부분 지긋한 나이에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만나면 자기 사연 하나씩은 있는 음악 감상도 하고 레코드 너머로 먼지 쌓인 추억담도 나눈다. 김기호 씨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1만여 장의 LP 음반. 다양한 장르의 명작 DVD도 4000여 장이나 된다. 이 보물들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방법을 찾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사시는 할머니가 방송을 보고 가족과 함께 여길 찾아왔어요. 나이 드신 분이 오셨으니 이미자 노래를 선곡해 들려드리려 했더니 ‘노’ 하시면서 레이 찰스의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를 틀어달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젊은 시절 팝송깨나 들으신 분 같았어요. 어느 날은 한 분이 조안 바에즈 앨범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첫 월급 타서 그 판을 샀다가 엄마한테 제정신이냐며 등짝을 맞았대요. 노래를 듣다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 거죠.”
프럼나드에 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파트에 살 때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실컷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김기호 씨는 요즘 그 바람을 제대로 성취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골에 가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겠다”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일개미로 표현할 정도로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1년 정도는 게으름을 좀 피우며 지낼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손들고 말았다.
“매일 하는 일 없이 노니까 죽을 날 받아놓고 기다리는 것 같더래요. 어느 날 학교에 김치배달해주는 일을 구하더니 새벽 4시에 일어나 나가더군요.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는데 그 힘든 일을 1년 넘게 하더라고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나이 먹어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대요. 요즘은 남편이 사업할 때 하청을 주던 회사에 일자리 하나 만들어 달래서 거길 다녀요. 최근에 연봉을 더 올려줬다는 걸 보니 일을 잘하긴 하나봐요.(웃음) 무리하면 걱정이 되지만 적당히 일하니까 건강해 보이고 좋아요.”
김기호 씨는 은퇴 후에도 체력 유지를 위해서 일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 시간이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질 수 있고, 경제적 활동을 하면 집 안의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퇴직한 지 6개월 된 지인이 얼마 전에 저희 집엘 왔어요. 퇴직금 등 가진 돈이 좀 있기는 하지만 일자리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찾아보면 일거리 많다. 공장이라도 다녀라. 그동안 해온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노동은 다 똑같다’라고요.”
기호 씨와 정필 씨가 사랑하는 법
아내 양정필 씨는 남편이 출근하면 그제야 느긋하게 카페 문 열 준비를 한다.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이 많아도 반갑지 않다. 매일 한두 팀 정도만 와서 즐겁게 잘 놀다가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끔 들르는 손님들도 전직 교장선생님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이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라며 편안해한다.
“문은 오전 10시쯤 여는데, 일찍 오는 손님들은 없어서 상황 되는 대로 올라와요. 저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커피 한 잔 내려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읽고 있거나 자연과 눈 맞추고 있으면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학생, 선생, 학부모밖에 없었잖아요. 여기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사회 경험을 새로 하는 느낌이에요. 전혀 몰랐던 세계도 알게 되고요. 우리 사회를 그동안 이끌어온 사람들이 이분들이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김기호 씨는 배우자와 뜻을 같이하면서 해로하면 그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면 다툴 일이 많을 거라고 했지만 아내가 커피도 내려주고 쿠키도 구워주고 또 음식을 이렇게 잘할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면서 “마치 새 여자하고 사는 것 같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아내는 제가 외출할 때면 ‘지갑 좀 검사하겠습니다’ 하고 10만 원씩 넣어줍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렇게 존중해주니까 저도 아내를 받들어 모시게 됩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아내 입에 먼저 넣어줍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받는 느낌이 들겠어요.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한 달씩 혹은 보름씩 여행을 간다 하면 ‘당신은 선생이니까 많이 알아야 해, 잘 다녀와’ 하고 응원해줬어요. 황혼 이전에는 그렇게 살다가 여기 와서 또 아내를 겪어보니 제가 알던 마누라가 아니더라고요. 음식도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새롭고 예뻐요. 다시 신혼을 사는 기분입니다.”
양정필 씨는 그동안 나이 드는 걸 완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환갑이 넘으면서부터는 주변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끔은 서글픈 마음도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건강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는 거니까요. 저는 ‘남편 바보’이기도 하지만 나이 드니까 배우자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래서 사랑보다는 존경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인터뷰하기 전에 남편에게 ‘당신 삶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예요?’ 하고 물었더니 ‘지금까지 당신이 날 존중해줬으니 당연히 브라보 마이 라이프지’ 하더라고요.(웃음)”
인생 후반전. 더 반짝이는 사랑을 시작한 부부는 요즘 마음의 표현도 자주 한다. 상대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도둑 심보라는 것.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고백하듯 아낌없이 말한다.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카자흐스탄 역시 먼 듯하면서도 가깝고, 낯선 것 같으면서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국영 항공 에어아스타나를 타고 6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알마티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경제문화관광 중심지다. 오랜 기간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카자흐스탄어 외에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13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를 믿지만 종교적 색채는 비교적 옅다. 음식과 풍경,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변국의 장점을 관대하게 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한국인에겐 의병 홍범도 장군이 생애를 마친 곳이자 10만 고려인이 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대자연과 유럽풍 시티라이프 체험
이륙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창밖을 보니 하얗게 이어진 선이 보인다. 구름인 줄 알았더니 길이가 무려 2000km에 달한다는 톈산 산맥이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4개국에 걸쳐 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병풍처럼 둘러싸인 만년설산 아래 녹색의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포근히 안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알마티에서의 시간은 차분하면서도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알마티(Almaty)라는 지명은 사과를 뜻하는 ‘알마’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아타’가 합쳐진 알마아타(Alma-Ata)에서 유래됐다. 그만큼 사과가 유명하다. 알마티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트 거리는 세련된 노천 카페들과 ‘스타벅스’, ‘망고’ 같은 글로벌 체인점들로 가득하다. 벤치와 분수대 주변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 대통령공원, 판필로프의 28인 기념비,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 젤료니 바자르 재래시장, 알마티의 남산타워 콕토베 케이블카도 있다. 이들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은 역사에 비해 너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87년과 1911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어 재건축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린 협곡’과 위구르족 마을
이튿날, 3시간여 차를 달려 차린 협곡으로 갔다. 도심을 벗어나자 차도 건물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 양쪽으로는 끝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양떼와 말들만 가끔 보이는 황량한 거리였다. 살짝 지루해질 무렵 점심을 먹을 겸 위구르족 마을에서 내렸다. 언젠가 가봤던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마을 모습과 닮아 있다. 세계는 이토록 신기하다. 어느 국경이든 그곳에는 교집합의 삶이 있고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여행자는 마치 깨달음의 퍼즐을 푸는 듯한 신기함을 느낀다.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서는 하미과(노란색 껍질의 멜론)를 비롯한 과일과 빵을 팔고 있다. 골목 안은 양꼬치 샤슬릭 굽는 연기로 가득했다. 샤슬릭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중국 신장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챙이’를 뜻하는 투르크어 ‘쉬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두툼하게 썬 양고기에 소금과 후추, 각종 향신료로 간을 한 후, 꼬치에 꽂아 숯불로 훈연한다. 특유의 풍미와 함께 씹을 때 느껴지는 풍부한 육즙이 일품이다. 다른 음식들도 대부분 맛있다. 우리나라 만두국과 비슷한 ‘펠메니’와 카자흐스탄의 대표 면 요리인 ‘라그만’으로 행복한 식사를 하고 난 뒤 보니 그제야 식당 안의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혼자 식사를 하는 촌로와 막걸리처럼 보이는 차를 마시는 호탕한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현지인의 얼굴엔 그 나라의 역사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차린 협곡. 15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겨난 계곡이다. 지질학적·생태학적 보호를 위해 200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 도착하니 몸을 날려버릴 듯한 세찬 바람이 격한 환영을 한다. 협곡 아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약 2km 트레킹을 했다. 황톳빛 기암괴석들과 ‘낙타가시’로 불리는 수풀 사이를 지났다. 닳고 닳은 관광지였다면 바위마다 이름을 붙이고도 남았을 터. 웨딩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핸드폰으로 추억을 담느라 바쁜 젊은이들의 모습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싱그럽게 다가왔다. 작심한 듯 트레킹 복장을 갖춘 유러피언들도 눈에 띄었다.
절벽 아랫길은 물론 윗길로도 트레킹이 가능하다니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장소임에 틀림없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엔 방갈로와 유르트(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쓰는 이동 가능한 주거 형태)가 갖춰진 에코파크리조트(Eco Park Resort)가 있어 숙식이 가능하다.
유르트에 머물면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도 보고 동틀 무렵의 협곡도 산책하며 하루쯤 문명과 동떨어져 쉬어가고픈 곳이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와 빅알마티 호수
알마티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는 사시사철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메데우 아이스링크를 지나 3단계에 걸쳐 케이블카를 나눠 타고 해발 3200m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구간 사이의 휴게소에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커피가 마련돼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독수리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다양한 즐거움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곧 맞이할 겨울 시즌을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정상에 올라 바에서 마신 맥주 한 잔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문득 스키를 좋아해서 세계의 스키장을 찾아다니는 친구가 떠올랐다. 사진을 찍어 보내주니 당장 올겨울 스키 여행지로 찜했다는 답신이 온다. 11월에부터 4월까지 스키를 탈 수 있어 겨울이 짧은 스키 마니아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과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로 선정될 만큼 자연설이 좋고, 별장부터 유르트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도 갖춰져 있다. 스키나 보드 장비 대여도 가능하다. 스키를 즐긴 후 근처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면 이보다 좋은 휴식이 없을 것 같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빅알마티 호수. 가는 길은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했지만 눈부신 에메랄드 호수를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은 달력 속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도 정겹다.
탐험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탐험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알마티 외 다른 도시들도 탐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의재 (四宜齎)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죽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늘이 되어주시던 주상이 승하하시고 나니 이 한 몸 간수할 곳이 없구나. 주상이야말로 나에겐 꽃이셨네. 꽃 잎인 한 분 형님은 순교하시고, 다른 한 분 형님은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유배되고...... 견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의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신유사옥(1801년) 때 유배를 당한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유배가 그렇듯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나이 40세.
그는 길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닌 마음의 길, 인생의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가 선택한 것은 미친 듯이 걷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라는 상실감이기도 했고, 끝나버린 인연의 아픔을 곱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치밀하게 준비했던 인생 계획표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진에 온 정약용의 초기 생활을 지켜보던 주막의 나이 든 주모가 어느 날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살려고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그는 변했다. 스스로 생활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사소한 기대를 통해 우선 현실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의미 부여와 노력을 통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태도를 바꾼 순간 다산은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4년 동안 그는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찾은 다산에게 이 시기는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묵묵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해서 본인이 묵은 방을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은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본래 경세제민을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이때의 시간이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구상하는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유배를 와서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를 복원하여 한옥 체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사의재가 있는 위치가 강진읍의 중심지여서 걸어서 ‘영랑 생가’와 ‘세계 모란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함과 함께 마루 턱에 앉아 고즈넉한 가을밤 달구경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가 울려오는 밤이 된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어머니가 문인인 윤선도의 딸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왔지만, 외가인 해남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다산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남의 외가에는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보관해 놓는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배기간에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는 외가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에서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나는 1818년까지 지냈다.
다산은 유배를 온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목민심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 실학과 조선 유학, 법의학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썼다. 그의 생애 업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게 학문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기본이 유학자이다 보니 먼저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의 기준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실학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을 메꿔준 이는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인 ‘혜장선사’였다. 그들은 대화하고 공감하며 화합하기 위해 초당 뒤 만덕산 백련사 가는 오솔길을 무수히 걸었다. 제한된 세상과의 통로였지만 소나무 숲길, 동백꽃 길, 차 밭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으며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두어진 하루하루는 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물리적 장치다. 하지만 다산은 초당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번뇌를 멈추고, 약천(藥泉)에 달인 차로 속기(세속의 기운)를 씻으며 스스로 인생의 격조를 올렸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한 것을 1957년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소나무 숲 ‘뿌리의 길’을 800m 정도 올라가면 고적한 유배 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ㆍ 차 달이는 부뚜막)’ 등을 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초당으로 가는 숲속 길에서부터 절제되고 제어된 기운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다산 학문의 핵심과 통하는 것이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아마, 동백꽃 핀 다산초당 숲길을 걷고 싶어서 그런지 모른다.
백운동 원림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의 감옥과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Notes from a dead house)”이라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감옥과 유배 생활을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집’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유배의 시간은 고통이고 지옥 같은 생활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본인 문학의 화두로 삼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유배 생활을 통해 무엇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고립이고 대립이며, 증오와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유배지의 폐쇄적 환경인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산이 선택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으로 나뉜다. 유배지에서 다산의 실천적 사랑은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다. 공상적 사랑은 초의선사, 이시헌 등과의 교류와 월출산 줄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과의 만남이었다.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강진의 자연을 만난 곳이 백운동 원림(園林)이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이담로가 조성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균형 잡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집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마당의 상지와 하지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화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다산은 그림을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스스로는 12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송하는 시를 읊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12곳이 ‘백운동 12 승경’이다. 1경: 옥판봉 (절경의 월출산 산봉우리) 2경: 산다경 (원림입구 동백나무 숲길) 3경: 백매오 (집 주변 언덕의 매화나무) 4경: 홍옥포 (대문 앞 단풍나무와 작은 폭포) 5경: 유상곡수 (마당의 여섯 굽이 물굽이) 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푸른빛 석벽) 7경: 정유강 (언덕 위, 용 비늘처럼 생긴 소나무) 8경: 모란체 (본채 아래 3단의 화단) 9경: 취미선방 (고즈넉한 세 칸의 초가 사랑채) 10경: 풍단 (창하벽 위 단풍나무) 11경: 정선대 (창하벽 위 정자) 12경: 운당원 (왕대나무 숲)
강진의 자연을 정원에 담은 이곳에서 다산은 견뎌냈다. 유배지에서의 견뎌냄은 사랑의 힘이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 원림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늘 그렇듯이 숲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온몸을 깨운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가을 햇살이 눈 부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문 앞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서려 있는 녹색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다. 낮은 담벽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은 수줍은 듯 여행자를 훔쳐본다.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청정한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앞마당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싶다. 다산처럼 건너편 차 밭에서 실려 오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자연과 통(通)하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불청객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암 극복 의지를 돕는 힐링의 장이 열린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암병원장 윤승규 소화기내과 교수)은 11월 4일부터 3일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소재 본관 지하 1층 대강당에서 2019 암 바로알기 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암 환자와 가족들의 암 극복의지를 돕기 위해 서울성모병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올해로 8번째다. 이 행사는 오전 9시30분부터 10개 암종에 대한 명의들의 강좌와 여성 암 환우 뷰티 강좌, 여행으로 푸는 인문학, 퓨전국악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었다.
첫째 날 대장암(이인규 교수), 유방암(윤창익 교수), 부인암(이근호 교수)과 둘째 날, 위암(김인호 교수), 폐암(김경수 교수), 갑상선암(배자성 교수), 마지막 날, 간암(장정원 교수), 췌담도암(홍태호 교수), 비뇨기암(하유신 교수), 골연부종양 · 전이암(정양국 교수) 관련 강연이 진행된다.
특강으로는 첫째 날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여성암 환우 뷰티 강좌), 둘째 날 정민아 여행작가의 ‘여행으로 푸는 인문학: 나를 만나는 시간, 여행’이 준비되어 있다. 셋째 날 이요셉하하TV대표 이요셉 소장의 웃음치료와 케이페라 린의 퓨전국악공연 등이 열린다.
행사장 주변에서는 환우ㆍ가족 수기 나눔, 환자치료사례 배너, 암병원 교원 칭찬 사연 보드 전시, 포토존, 희망 우체통이 마련되어 있다.
윤승규 암병원장은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의 우수한 의료진들과 다학제 협진 진료 시스템을 알리고 암 환우들을 위한 힐링의 장을 마련하여 참석하시는 모든 분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캠핑카 혹은 카라반을 직접 끌면서 여행하는 것이 당장 어렵다면 편안하게 카라반 캠핑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캠핑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훌쩍 떠난 곳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여주 카라반’. 그런데 하필 비올 확률이 100%.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였으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라반에 들어가 체험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기에. 때론 100% 비 소식에도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진미. 하늘의 이치인 듯 상황에 적응하며 즐겨봤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카라반이나 캠핑카 등 바퀴 달린 것을 가지고 하는 캠핑을 알빙(RVing)이라고 부른다.‘카라반’은 주거시설을 갖춘 컨테이너를 차에 견인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고, ‘캠핑카’는 자동차 안에 캠핑을 할 수 있게 꾸민 것. 정식 명칭은 모터홈(Motorhome)이다.
카라반 파크와 카라반 체험장
외국의 경우 사막 혹은 너른 대지를 관통하는 도로 구간에 카라반 파크가 있다. 카라반, 캠핑카를 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장을 푸는 곳 말이다. 카라반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 그곳에 생활 터전을 잡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이들도 있다. 카라반에 관한 통상적인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많이 한다.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신 배경에 자주 카라반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초반 3~4개월 정도 카라반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농장이 많은 칠더스라는 곳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던 때 ‘슈가볼’이라는 카라반 파크에서 살았다. 구식이었지만 카라반에는 화장실 시설을 제외하고 소파와 주방, 개별적으로 분리된 침실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한국에서는 카라반 구경이 쉽지 않았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즐겨 보던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으니 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생활이었기에 그때의 카라반 생활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도 카라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여주 카라반은 외국의 사례처럼 오토캠핑족(차를 가지고 다니는 캠핑족)을 위한 장소는 아니고 말 그대로 카라반이 궁금한 이들에게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이색적인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체험 장소다. 4000여 평 규모의 대지에 평수와 형태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카라반이 초록빛 잔디와 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줄지어 서 있다. 나름 카라반 파크 현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재현해놓았으며 각각의 카라반에 개별적으로 데크와 어닝도 장착했다.
카라반을 이용해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도 가능하다고. 어쨌거나 카라반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마음 편하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험을 떠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중요 장소인 셈. 카라반을 엇비슷하게 본떠서 만든 카라반형 숙소 ‘아크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카라반이다.
여주 카라반은 미국의 포레스트리버 사의 카라반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들여왔다. 가장 큰 평수로 알려진 12평 규모의 ‘체로키 39KR’과 두 번째 규모인 ‘체로키 Q2’는 이곳이 아니면 체험하기 어렵다.
기자와 지인들이 묵었던 ‘체로키 Q2’에는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이 앞뒤로 두 개나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카라반 내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불편함은 없다. 뒤쪽 샤워장은 작게나마 욕실도 꾸며져 있지만 사우나를 즐길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대형 TV, 냉장고, 소파와 주방까지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간이 주거시설이라는 느낌을 넘어 가정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와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반 안에는 곳곳에 수납장이 마련돼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도로를 달릴 때 흔들림을 생각해 수납장 안에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 넣으면 떨어져 깨지거나 흩어질 일이 없다. 이곳 카라반의 수납장은 여닫이문을 달았지만 호주에서 이용했던 카라반 수납장 문은 미닫이였다. 차량 이동 시 충격에 의해 문이 열릴 수 있어 미닫이문으로 돼 있는 거라고 영국 친구가 설명해줬다. 체험장에 있는 시설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닫이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와 바비큐가 제법 잘 어울린 밤
주룩주룩 한없이 비가 내리던 그날, 카라반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짓고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바비큐는 실외에서 준비했다. 실내에서 연기를 피우면 경보장치가 울리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굽는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다행히 카라반 입구 앞 너른 공간을 어닝으로 가려줘 비를 피하면서 바비큐를 할 수 있었다.
카라반 체험을 함께한 지인이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등을 알뜰하게 준비해와 고마웠다. 곧 갖가지 채소와 구운 고기가 상 위에 올랐고, 우리는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각자의 새로운 관심사에 귀 기울였다. 공기 맑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10년 전에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지인은 “화장실 변기통을 비우고 물관, 전기 연결 등등 캠핑장에 도착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형 캠핑카로 변환한 점이 좋은 아이디어 같고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깔끔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피하지 않고 즐겼을 뿐인데 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비에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지만 카라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운치마저 느껴졌다. 태풍 걱정은 어느새 잊고 비의 낙차가 카라반 외벽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특별한 화음을 밤새 즐겼다.
카라반 생활 경험자가 본 여주 카라반
개인적으로 카라반은 내부 공간이 좁아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캠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집 밖을 나와 여행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는 자연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 눈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주에서 경험한 카라반은 호주에서 이용했던 것에 비하면 호화로웠다. 카라반 내부를 돌아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독거미, 운동화 속에 숨어 자는 생쥐가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국의 카라반 파크처럼 넓게 쓰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카라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돌아오던 날 아침, 100%의 비올 확률을 뚫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인 것을!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