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018년 1월 18일 인천공항 제2청사가 공식적으로 개통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제1터미널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진 제2터미널은 평창 동계 올림픽을 3주가량 앞둔 시점에 공식 개장하는데 동계올림픽 선수촌 오픈 1월 30일과 현지 적응을 위해 조기 입국하는 선수 및 대회 관계자에게 더욱 쾌적한 서비스 제공을 할 수 있도록 평창 동계올림픽 전에 개장하게 되었다.
공항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애틋한 이별과 반가운 만남을 동시에 떠오르게 해 준다.
특별히 내가 공항에서 슬픈 이별을 해 본 적이 없는데도 그런 느낌인 건 아마 사랑하는 어린 조카가 유학길에 오를 때 배웅 나가서 무사히 공부 마치기를 바라며 보낸 그 날이 생각나기 때문인 것 같다.
애틋한 이별만이 아니라 따뜻한 만남도 생각나는데 미국에 사는 시누이가 귀국했을 때나 지인의 한국방문에 마중 나가서 기뻤던 마음이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할 때 공항에 가면 즐거운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공항은 우리에게 축제처럼 들뜬 기분 좋은 설렘을 주는 곳이다.
필자는 지난달 아직 마무리 공사 중인 제2터미널에 미리 가보았다.
동북아의 허브로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은 꾸준히 성장해 12년 연속 세계 공항 평가에서 1위를 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많은 승객을 수용하고 주변 공항과의 허브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천공항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추어 200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제2터미널이 개장하게 된 것이다.
제2청사가 개장되면 연간 1800만 명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고 9만 명의 고용창출이 될 것이라 한다.
제2청사의 주제는 Green과 Eco로 자연과 건축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자연채광과 지열 시스템, 태양광발전, 자연 환기 시스템 등을 이용하여 친환경 공항을 모토로 하고 있어 이를 통해 저에너지공항, 탄소 저감, 신재생에너지 확대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인천공항 3단계 건설 상황실의 홍보전시실을 방문했다.
90년대 초반 인천공항을 건설하면서 트럭 100만대 분량의 흙을 퍼부어 물막이 공사를 했다는 홍보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이제 제2청사까지 개장하게 되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우리나라 국제공항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절로 펴지는 듯했다.
이번에 완공되는 제2 여객터미널은 인천공항 3단계 건설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1, 2단계 사업으로 완공된 제1 여객터미널과 탑승동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터미널이고, 이번 3단계 사업으로 제2터미널이 완공된다. 곧이어 4단계 사업도 시작될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1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대형공항이 될 것이라 한다.제2 터미널에는 4개 항공사가 이용하게 된다는데 대한항공과 에어프랑스, 델타항공, KLM 항공사 등 스카이팀 항공사이다.
제1터미널은 아시아나와 저가항공사가 운항한다.
이제 우리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 어떤 항공기를 탈지에 따라 제1터미널, 제2터미널로 가야 한다.
제2터미널은 버스와 지하철, 철도 등의 대중교통을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해 놓아서 교통 센터 지하 1층에 버스와 철도대합실이 한곳에 있고 터미널이 실내에 있어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쾌적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한, 제2터미널은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특징이 있다. 기존의 제1터미널은 외국회사가 디자인한 것을 바탕으로 했지만, 제2터미널은 우리나라 기술로 디자인했다는 점이 뿌듯하고 감동적이다.
아직 마무리가 안 된 전망대를 둘러보았는데 유리창 너머 광활한 활주로에 앞으로는 우리 국적기인 대한항공을 비롯해 여러 SKY팀 항공사의 비행기가 가득 찰 것이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공항이 명실상부 동북아의 허브공항으로 자리매김하고 세계적인 대표 공항으로 도약하려 한다.
제2터미널 개장으로 전 세계인 누구나 만족하고 좋아하는 자랑스러운 인천 국제공항이 되기를 바란다.
2017년 7월, 그라피티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영국인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을 모은 전이었다. ‘길거리 낙서’, ‘불법 행위’로 보는 시선이 있어 쉽지 않았을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열린 전도 흥행에 성공하며 그라피티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줬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분사되는 스프레이를 통해 자유를 표출하며 때론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학적 그림으로 표현해 지적한다. 깡통 스프레이는 회색빛의 거리를 화려하게 변신시키고 흥미로운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전철이나 건축물의 벽면,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인 그라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 갱단에서 자신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후 뉴욕으로 퍼져 이름을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남겨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거리에서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원색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뱅크시(Banksy), 키스 해링(Keith Haring),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등 유명 작가도 배출됐다.
하지만 그라피티의 성지인 뉴욕에서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불법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지하철역 환기구를 통해 침입해 전동차에 낙서한 외국인 4명에 대해 수배가 내려져 전파를 탄 사건이 있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서의 그라피티는 재물손괴죄, 건조물침입죄를 적용해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처럼 그라피티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그림이 도시를 밝힌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라피티는 종종 특정한 장소에서 작업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홍대 주위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새로 찾은 곳이 한강과 압구정을 이어주는 압구정나들목이다. 그라피티 작가들 사이에서 ‘토끼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곳은 한강사업본부가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공간이다. 단 작업은 밤 10시 이후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선정적 이미지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늦은 밤이 되면 그라피티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벽 앞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뒤죽박죽 얽혀 알아보기 힘든 글자체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옆에 이미지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살표, 따옴표, 비눗방울 등의 이미지는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밑그림 위로 뿌려진 스프레이는 하나의 근사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압구정나들목을 자주 지나가는 박모(55)씨는 작업 중인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예전에는 색감도 어둡고 뾰족한 이미지만 있어서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화려한 색상에 재미있는 캐릭터도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죠. 그저 삭막하기만 했던 벽에 정기적으로 그림이 바뀌니 신선하고 좋았어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 아닌데 어떻게 완성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했는데 오늘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네요(하하).”
알록달록하게 그라피티로 꾸며진 이곳은 자전거 동호회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김모(25)씨는 벽에 그려진 작품들을 훑어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셔터를 누른다.
“여기서 자주 자전거 동호회 회원끼리 사진을 찍어요. 그라피티의 색감과 자유로운 느낌이 자전거와 잘 어울려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죠. 집주인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노후 주택이나 운영하지 않는 건물을 방치하지 말고 그라피티로 꾸민다면 이곳처럼 주목받을 수 있는 장소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SITCH라는 익명으로 활동 중인 한 작가는 “그라피티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욕도 먹는다. 그 와중에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경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생각했던 것을 스프레이로 뿌려 표출할 수 있고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그라피티 작가 위제트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신선한 디자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 뜻밖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전시회라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다가가지만 그라피티 같은 거리의 예술은 뜻밖의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라피티 작품 앞에서 만난 김모(51)씨는 “표지판이나 벽, 길거리에 뿌려진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들은 공공시설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분위기와 더해져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며 그라피티를 공공시설을 해치는 길거리 낙서라고 표현했다. SITCH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가끔 작업을 하다 보면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냄새 난다’, ‘보기 좋지 않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등 다양한 이유로 말이죠. 우리나라에 허용된 공간이 별로 없는데 허용된 공간에서만큼은 우리의 작업을 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업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도 있는 그라피티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예술의 세계를 전달한다. 최근에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비주류 문화로 인식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피티 작가들은 부정적인 인식과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개성이 숨 쉬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는 거리를 걸을 때 잘 살펴보자. 어쩌면 오늘 밤 남몰래 그라피티로 꽃단장을 마치고 다음 날 새로운 모습으로 반길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exhibition
王이 사랑한 보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그가 수집한 예술품 중 130점을 총 3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제1부에선 아우구스투스의 군복과 태양 가면, 사냥 도구 등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를 소개하는 제2부에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동원해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각종 보물이 사용된 작품을 통해 화려한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선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수출 도자기와 초기 마이센 자기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전시장 내부를 확대사진 기술을 사용해 드레스덴 궁전 내부와 비슷하게 연출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 in 강남
일정 11월 19일까지 장소 강남미술관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이해 동양화작가 곽수연, 사진작가 김현욱, 입체작가 빅터조, 업사이클링작가 엄아롱, 일러스트레이터 이연경, 도예작가 틸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가 모였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회화, 설치, 사진, 조형 등으로 표현된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강남미술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애견기저귀를 착용할 경우 반려동물도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함께 관람해도 좋다. 다양한 작품 외에도 유기견을 입양한 견주들이 보내준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 또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등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시장 건물 옥상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반려동물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book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민음사)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 작품 속의 ‘오늘’인 그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다. 가족 간의 쉽지 않은 소통과 그럼에도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여정으로 그려내며 아스라한 동경과 영원한 그리움의 상대는 가족임을 들려준다.
향기 탐색 (셀리아 리틀런 저·뮤진트리)
고고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저자 셀리아 리틀턴의 향기 탐색서다. 냄새로 기억되는 곳들을 추억하며 향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회고한다. 각 나라 특유의 향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향의 기초적인 원료와 재배법, 향수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movie
유리정원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소재와 독창적인 스토리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속에 감춰진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10월 22일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상상력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며 초록 피가 흐르는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이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봉 10월 25일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신수원 출연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임정운 등
리빙보이 인 뉴욕
이후 , 시리즈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이 다시 한 번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도시 뉴욕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 웹 감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인 뉴욕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맨해튼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선 로 얼굴을 알린 칼럼 터너가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 역을 맡았다.
개봉 11월 9일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크 웹 출연 칼럼 터너, 케이트 베킨세일 등
◇stage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항상 사랑받기를 꿈꾸며 살았던 여인 마츠코의 기구한 삶을 감성적인 연출과 음악으로 그려내며 진정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운 삶이었는지 되묻는다.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일정 10월 27일~2018년 1월 7일 연출 김민정 출연 박혜나, 아이비, 강정우 등
도둑맞은 책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영화대상 시상식 날 납치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 그리고 그를 납치한 보조작가 조영락. 두 사람을 통해 연극 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일정 10월 13일~12월 3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현철, 이갑선 등
에어포트 베이비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가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입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백하고 재치 있는 대사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8년 동안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친 작품으로 현실적 소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일정 10월 17일~12월 31일 연출 박칼린 출연 최재림, 유제윤, 강윤석 등
오펀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공연계의 독보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김태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중년의 부유한 갱스터 해롤드.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을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9월 19일~11월 26일 연출 김태형 출연 박지일, 손병호, 장우진 등
가수 진미령은 한 설문조사에서 재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도 소녀 같은 진미령이 내 나이와 비슷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섹시한 스타는 가요계 통틀어서도 드물다. 아직도 잘록한 허리에 조막만 한 얼굴과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소녀와 마주하고 가을 냄새를 느꼈다.
가수는 “히트곡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때문일까? 불행하게도 요절가수들의 히트곡은 대부분 엄청 슬프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 ‘마지막 잎새’를 부른 배호, ‘슬픈 노래’와 ‘안녕 친구여’를 부른 김광석, ‘슬퍼하지 말아요’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김현식 등 요절가수 대부분의 노래 가사가 슬프다. 그에 반해 진미령은 ‘소녀와 가로등’으로 히트를 쳐서 그런지 아직도 청순한 소녀 같다. 5년 전에 발표한 ‘미운 사랑’이 중장년층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그 가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의 인생과 닮아 있다.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저 멀리 둘걸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올까봐 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 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난 운명인 거야
-‘미운사랑’ 1절 가사
진미령이 가사를 직접 쓴 이 노래가 실제로 전유성과의 이별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는 아픈 이혼의 경험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듯하다. 진미령은 전유성과의 이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나와 술 마시다가 불쑥 뱉어낸 적이 있다. 냉면을 먹다가 이혼을 결정했다는 것.
냉면 먹다가 이혼을 결심했다
진미령은 “냉면이 먹고 싶어 전유성과 단골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착해보니 전유성은 이미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였다”며 “자신이 냉면을 먹는 동안 함께 있어주겠다고 한 전유성이 갑자기 지루한지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는 것. 당시 서운한 감정을 떠올리며 “냉면을 먹는 이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남자인데 앞으로 함께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전유성과 헤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또 다른 사랑이 있었나?” 물었더니 먼저 한숨부터 튀어나오더니 “남자들이 입이 가벼워 그들의 무용담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기 싫어서”라며 말문을 막는다. 급히 화제를 돌리려 하기에 이에 질세라 나도 물고 늘어졌다.
“그동안 육체적 욕망은 어떻게 참을 수가 있었나?” 도발했더니,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성적인 충동을 잘 조절할 수 있고 혼자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르면 성적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각종 행사 등 바쁘게 가수 활동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아서 나름 행복하고 또 요즘은 골프 삼매경에 빠져 시간 날 때마다 골프를 치니 외로움 따위는 없단다.
자유로운 사랑이 좋아
“앞으로 남은 평생을 이렇게 계속 혼자 살 작정인가?”라며 또 파고들었다. 그녀는 “좋은 남자 생기면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따로 살면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보고 싶을 때만 만나 데이트하면서 살고 싶다”며 한술 더 뜬다. 보통 우리네 평범한 여인네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과 철학을 엿보는 듯했다.
진미령은 사실 전유성과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계약결혼 비슷하게 살았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전유성의 전처 밑으로 호적이 올라가는 게 싫어서”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작고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남자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심이 강하고 사랑도 주체적으로 끌고 가려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진미령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내 아내의 엉뚱함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내 아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의 전처를 ‘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가끔 나를 놀리곤 한다. 내 아내의 그런 놀림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유머 코드로 치부하고 넘어가곤 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진미령과의 인터뷰에 탄력을 붙였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나?”라는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아침에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서 화장하고 싶지 않아서 연하는 곤란하고, 그렇다고 다섯 살 이상 많은 할아버지랑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내 나이와 시추에이션이 난처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나이가 비슷하고 친구였던 사람이면 좋겠다는 뜻이다. 맥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탈 주연의 영화 의 주인공 커플처럼 되고 싶다는 고백으로 이해했다.
故 김동석 영웅의 딸
화제는 진미령의 아버님 얘기로 이어졌다. 사실 진미령과 내가 알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아버님 때문이었다. 진미령의 아버지 김동석 대령은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측의 맥아더 장군과 리즈웨이 장군, 그리고 한국 측의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이 그들이다. 의정부 미2사단 전쟁박물관 내에 마련된 김동석 영웅실에는 훈장을 비롯한 유품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미국도 김동석 대령을 영웅으로 선정해 극진히 대접하는데 모국인 대한민국이 그를 푸대접하는 것이 안타까워 내가 방송에서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다. 그때 진미령이 내 전화번호를 방송국에서 수배해 연락을 해왔다. “아버님을 제대로 평가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울먹이며 통화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나이도 비슷해서 가끔 만나 술도 한잔하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키기도 했고 맨몸으로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서 적진에 침투해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김동석 사진을 가리키며 ‘This man!’이 준 첩보는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사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도 크고 여러 가지 여건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했지만 김동석의 결정적인 첩보가 맥아더 장군의 선택에 용기를 부여했던 것이다. 김동석 대령은 이때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This man’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을 무서워했던 진미령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기야 목숨을 내놓고 북파 공작원으로 살았기에 보통 사람의 눈매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는 칠십이 넘어 눈이 부드러워졌고 그때부터 아버지가 좋아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어눌한 말투의 부드러운 눈매를 지닌 전유성과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요리도,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가수
진미령은 요리 프로그램 진행을 맡을 정도로 요리를 잘한다. 프랑스의 유명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정식 디그리(degree) 과정을 마쳤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요리와 관련해 가장 많은 섭외를 받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도 능통하다.
다재다능한 재주를 지녔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나?”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골프를 아주 잘 치는 가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가수가 천직이라는 말.
솔직히 말해 한량 이봉규도 다시 태어나면 평론가보다는 가수가 되고 싶다. 그만큼 가수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가수로서 진미령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한다. 그런 점에서는 참으로 복 받은 여인이다. 하느님은 공평해서 모든 걸 다 주지 않는가보다. 본인은 그 나이에 혼자 살아도 행복하다고 주장하지만(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부부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봉규가 보기에는 진미령이 다소 외롭게 보인다. 다재다능한 재주에 가수로서도 성공해 만족스러운데 거기에 완벽한 부부생활까지 누린다면 시샘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진미령에게 사랑의 여백만은 남겨두신 걸까? 아니면 조만간 그 여백을 채워주실까? 누군가 어렵다면 주머니 털어서 다 주고 재능기부를 하도 많이 해서 ‘진 봉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이기에 후자에 기대를 걸어본다.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아내는 새로 이사 갈 집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뷰(view),
둘째: 좋은 전망,
셋째: 뷰!
집에 대한 아내의 이러한 확고한 생각이 여기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갖게 했다. 이사를 결단하게 된 이유는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몽골까지 산 넘고 바다 건너온 거리가 얼마인데 그 짐을 다시 싸야 하다니…. 나보다 아내의 부담이 훨씬 클 것이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약한 곳을 건드린다. 게다가 계약할 때마다 매번 세를 올린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렇지 않아도 낯선 외국생활 채 익기도 전에 좌초되겠다 싶어 ‘다시는 이사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잡고 결단했다. 더구나 서울과 비교해 몽골 생활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멋진 풍광!
셋집이 아니라 아예 새로 분양하는 전망 좋은 곳을 큰맘 먹고 먼저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소위 말하는 로열층! 그런데 이게 무슨 계산법인가? 모든 층이 방향과 관계없이 오직 면적에 의해서만 단가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 몽골은 참 이상한 나라다. 그렇게 우린 아내의 바람대로 전망 좋은 집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멋진 산을 배경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구름! 시시각각 넓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빛의 향연에 감동하고 있다. 그렇게 창문 넘어 변하는 풍광에 얼마 전 홍콩 출장에서 촬영한 사진이 겹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잠든 시간. 홍콩 타이쿠싱 뒷산 마운틴 버틀러에 제자들과 함께 올랐다. 산이 높아지고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건물들이 깊은 어둠 속에 쭈삣 드러났다. 인공 불빛의 디테일이 선명하다. 산을 오르는 목적 자체가 사진 촬영을 위한 것이다 보니, 보이는 것들을 사진기의 눈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들이 마치 거대한 사진기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춰 먼 야경을 맨눈으로 내려다보니 얼마 전 문체·외통·지경부와 중앙일보 주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초대전을 준비할 때, 전시할 공간을 의논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만났을 때와 흡사하다. 박물관 직원이 컨트롤 타워와 워키토키로 교신을 하며 예정된 전시장 문의 암호와 스위치를 조작하니 둔탁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랗고 두꺼운 쇠문이 서서히 올라가며 공간이 열렸다. 바로 그때 지금과 같이 우리들이 커다란 사진기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등을 켜기 전 가물한 전시장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막상 문턱을 넘어 들어서니, 조금 전에 커다랗고 육중하게 보이던 문과 사람들이 갑자기 작게 느껴졌다. 방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사각형 공간이 더욱 사진기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가 거인국의 사진기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고 있는 듯하다’라는 신드바드의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그때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게 된 아내는 전시장 입구를 바늘구멍으로, 작품 설치를 맺힌 상으로, 전시장 밖에서 우리가 촬영해온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풍광을 서브제로 구성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홍콩의 야경이 그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걸린 작품의 오브제 같았고, 산을 오를수록 작품 앞에서 눈을 떼지 않고 뒤로 물러서며 원근감의 각도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사진은 그렇게 빈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 어둠상자에 만들어진 빛의 통로를 이용해 원하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도록 거리를 맞추고 또한 빛의 양을 조절한다. 그리고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값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섞이고 호환된다. 그런 이론의 변수를 잠시 내려놓으면 사진의 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휘된다. 사실 사진기라고 불리는 ‘카메라’의 어원은 ‘비어 있는 방’이다.
사진기에 맺히는 영상과 산 위에서 촬영한 홍콩의 야경, 지금 내 집의 창을 통해 보고 있는 구름, 그리고 용산전시장의 중앙아시아의 풍광들이 서로 엇갈려 겹쳐진다. 한쪽은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었고, 다른 편은 빛을 모으고 모아 작은 점을 통과시켜 얻은 좌우상하가 바뀐 이미지들이다. 하나는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 둘이 마치 같은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 소실점을 통과했나 안 했나의 차이가 엄연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밝은 곳의 축소된 세상이라면, 사진은 렌즈로 수렴시킨 점을 통과시켜 어두운 사진기 안에 거꾸로 맺힌 필름에 담아낸 상인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사 가는 것과 삶의 터전을 아예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트렁크에 짐을 꾸려 잠시 출장을 간다든가,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경우는 돌아올 집과 살림살이를 놔두고 그야말로 다녀온다는 의미이지만, 아내와 함께 전혀 생소한 이국땅으로의 이주는 확실히 다르다. 집도 가구도,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던 물건과 날마다 타고 다니던 자동차마저 정리한다는 뜻이다. 주위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나누어야 한다. 무엇보다 날마다 밟고 다니던 땅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던 하늘과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공기와 작별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살 깊게 몸을 의탁했던 집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가구와 컨테이너에 실어 보낼 살림살이를 구분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며 살기 위해 그나마 익숙해진 고국을 떠났다.
그렇게 고국을 떠나 몽골에서 몇 년을 지내며 나의 자세도 바뀌었다. 잠시 이국적인 환경을 겪다가 내 나라와 내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돌아가는 세상을 이방인으로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로 바뀌려는 움직임이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바뀌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생각과 몸도 적응해야 할 매체와 환경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부부에겐 하늘이고 빛인가보다.
요즘 잠에서 깨어나 무슨 생각이 들기 전,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빛으로 날마다 행복하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과 만나는 첫 충격이 빛이라 했던가? 그렇게 만난 빛으로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는 게 나의 일상이다. 하루의 모든 계획에 앞서 내 눈에 들어와 펼쳐지는 하늘에 감동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내도 그 하늘을 보고 있었다. 몽골에서 우리 부부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 침대에서 보이는 하늘 때문이다.
내친김에 더 추워지기 전 풍성한 몽골의 숲에 들어가자고 했다. 거기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빛과 공기에 흠뻑 젖고 싶었다. 개울 옆에 자리를 깔고 텐트도 쳤다. 그래봐야 집에서 15분 거리도 안 되는 마을 뒷산이다. 청명한 공기 속에 새소리와 개울 물소리가 구별 없이 어울리며 섞인다.
아내는 따뜻한 물과 좋아하는 작가 폴 오스터와 김연수의 책을 안고 왔다. 푹신하고 부드럽게 바닥에 깔아놓은 작은 텐트 안에서 그 책들을 아끼며 보고 또 보고 있다. 충분히 행복한 얼굴이다. 이럴 땐 방해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난 아내와 떨어져 낮은 구릉에 오른다. 아직 울창한 숲과 풀들 사이로 에델바이스가 지천이다. 돌바기 손녀 ‘셀라’를 얘기하기 좋은 꽃이다. 그 꽃에는 셀라의 웃음소리, 새근거리는 숨소리, 그럴 때마다 맡아지는 젖내와 말랑한 살이 연상되는 솜털이 소복하다. 그런데 작년에 비해 키가 작다. 에델바이스뿐 아니라 풀들이 모두 여위었다. 평년에 비해 비가 많이 왔는데도 초원이 풍성하지 않다. 몽골 초원의 풍성함은 전체 강수량보다 비가 온 시기에 좌우된다. 엄밀히 나담(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매년 7월에 열리는 몽골 최대의 민속 축제이자 스포츠 축제)을 기준으로 나뉜다. 즉 7월 전에 오는 비라야 몽골을 풍성하게 하고 그 후 8월과 9월의 비는 오히려 수확에 방해가 된다. 나담 후에는 촉촉한 초원에 해가 쨍쨍하게 비춰줘야 모든 곡물이 익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어그러져 강수량이 많았음에도 올해 밀 값이 벌써 올랐다.
흐르는 개울물을 먹으려고 쌍봉낙타와 말이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마치 손녀의 사랑을 받으려는 우리 부부의 모습과 같다. 낙타와 말도 한껏 숲에 안긴다.
훌쩍! 놀란 새가 푸드덕 솟아오른다. 곧 닥칠 겨울을 준비하던 새는 혼자 놀라 부산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몇 번 더 와야겠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몽골국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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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나이가 들수록 조용한 여행이나 고요한 곳을 찾고 싶어진다. 요사이 조심스럽게 시도하는 것이 있다. ‘혼자 여행하며 얼마나 외로운지 반대로 얼마나 자유로운지 체험해보자’는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선망에도 불구하고 시도는 정말 쉽지 않다. 천성이 게을러서 일수도 있고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남들은 아무도 내게 관심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래서 연습할 겸해서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 강화도를 택했다. 외세에 항쟁으로 대적한 곳으로 마치 내가 지금 두려움과 싸우듯 그곳을 택했다.
이전에도 2번정도 강화도에 갔었으나 운전할 때는 내비게이션에 길을 맡기고 가느라 지리를 모르겠고, 얻어 타고 갈 때도 얘기하느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 자유로운 몸과 정신으로 떠나면 다르리라 기대한다.
관광안내소 지도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도착하니 바로 초지진 앞이었다.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인데 진에는 배 3척과 군관 11명 사병 98명과 돈군 18명이 배속되고 돈대 세 군데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돈대는 지금의 초소와 같이 감시와 공격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진 아래 돈대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의 격전지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파견한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초지진의 이끼 낀 성벽을 따라 걷고, 폭격을 몸으로 막아낸 노송의 상처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광성보로 향한다. 보 아래 진이 있고 진 아래 돈대가 있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이때 구식 무기를 갖고 최신 무기와 대적하느라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광성보에는 흰옷의 시신, 조선백성들이 거리에 뒹구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10명의 병사가 전사했으나 우리 군은 전원이 몰살할 정도로 포로가 되느니 죽기로 항쟁했고 그래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 전원이 순국하였다. 51인의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신미순의총’이라 하고 어 장군 형제의 ‘쌍총비각’을 세워 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가 약탈했다가 2007년 대여 형식으로 반환한 어재연 장군의 수帥 자기 및 각종 무기류가 전시된 강화 전쟁박물관에서 무기와 갑옷을 보며 속이 불편했다.
열악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오직 몸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방법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도망치지 않고 숨지 않고 비굴해지지도 않고 용감하게 싸운 그들이 애처로웠다.
이런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똑똑한 지도자를 보내주기를 지금의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싶다.
강화도의 치열했던 전투 현장에 서니 통치자를 잘 못 만나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던 백성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조용한 여행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행동이 자유롭다기 보다 마음이 자유롭다. 그래서 역사를 되짚어 보게 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우리나라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발(始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념의 이입(移入)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자’는 화풍은 특히 중국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그것에 비해 스케일이 적고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풍광을 소박한 그대로, 진솔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정지시켜야 하는 속성상, 실제의 입체 공간을 평면화하자면 화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평론가나 미술기자들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이래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해진 인상파풍의 과학적 특성을 철저히 연구, 우리나라 언덕길의 전형적 각도, 전형적 시야, 경상 지방의 낯익은 한국의 땅이 그 살가죽을 부끄럼 없이 다 드러내놓는 겨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로 이원희(李源熙, 1956~)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구도는 웅혼하여 일체의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거칠고 척박한 산비탈 뙈기밭을 그대로 그려낸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김매고, 물 주고 가꾼 농작물들이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농부의 손길로 추수되고 난, 빈 밭에 서리가 희끗하다. 이제 이 황토의 밭들은 겨우 내내 찬바람 눈서리에 뒤척이다, 다음 봄 새 씨앗을 심을 때까지 아픈 몸부림을 할 것이다.
이원희 화가는 경북 의성 안평리의, 궁벽한 마을 산비탈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가득 담는다. 야트막한 왼편 언덕을 따라 이어진 황톳길이 작은 밭을 나누어 가며 구릉을 지나 야산으로 이어진다. 계곡이 깊지 못하니 물이 흐를 리 없고 땅 모습이 평평하지 못하니 경사 따라 밭둑을 이루며 대여섯 곳의 밭 자리를 구분 짓는다. 길섶 소나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은 바람받이임에 틀림없다. 가시나무 떨기 몇 그루만 자라는 척박한 곳이지만 농부는 한 삽, 한 삽, 돌을 골라내고 풀뿌리도 솎아내며, 오랜 날들 뙈기밭을 일구었을 터다.
화가는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며 노상 접했던 풍경이기에 원숙한 필치로 이 현장을 실경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은 대표적 주제가 되었다.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되 데생 과정을 혹독하게 검증해 ‘계명대 출신은 스케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인물화도 마음까지 그려낸다는 중평이다. 섬세한 극사실의 화필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준 초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역대 대법원장 두 분, 국회의장 다섯 분의 초상화 또한 이 화백의 작품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밀려 있어, 내 아내의 초상을 그려주겠다는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려는지….
이 그림 는 최근 온라인 옥션에서 270만원을 주고 낙찰받았다. 고향의 선산(先山) 가는 길과 얼마나 흡사하던지, 거실 벽 중앙에 바다 그림과 바꾸어 걸고, 해지도록 뙈기밭에서 뛰놀던 유년을 회억하는 달콤한 향수에 젖는다.
김승연(金承淵, 1955~)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뉴욕 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석사학위 취득 후 모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서울의 야경’, ‘거리의 낮 풍경’을 리얼하게 판화로 표현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채색 판화에서 1990년 초부터는 흑색 단색의 동판화 , 시리즈를 제작 발표해왔다. 서울의 야경은 불빛에 갇힌 거리에, 건물들과 차량의 그림자들을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에게 블랙홀에 빠지는 듯, 꿈꾸는 듯, 환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1993년 ‘루블리아나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차석상’을 수상하고, 2011년 ‘국제메조틴트 페스티벌’에서도 ‘전통판화상’을 수상하면서 서울 야경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밤 풍경이 낮의 풍경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 느낌이 풍부하고, 불빛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아우성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고행(?)을 작가는 계속해오고 있다.
는 벌써 15년 전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판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품의 복제성 때문에 다른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작가는 한 작품당 대개 10~30여 점씩 판화로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도 판매되는 작품이 4~5점에 불과해 작품 구상에서 완성까지 두어 달, 틀과 유리를 맞추고 10여 점을 판매해도 500여 만원의 수입이 안 되니 허무한 일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작품들이 같은 것이란 사실이 발견되면, 예술성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예술 작품을 향한 환상 속에서 판화의 인식과 보편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란 작품은 뉴욕의 예스런 건물의 계단에서 기둥과 추녀, 그리고 건물 앞에 선 나무의 그림자까지 한낮의 풍경을 정밀하게 찍어내어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가는 우리 일상에 너무나 접하기 쉬운 풍경들을, 그러나 깊은 관찰과 섬세한 손길로 예술성 높은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하염없이 작품에 눈길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작가의 의식 너머 고요한 심연(深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준(李載俊) >>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