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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를 넣고 붓을 내밀다
- 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국 미술, 서양 미술을 아우르기도 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듯한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맑게 정제되어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자신의 기준들이었다. 이상용 작가가 만나고 만든 운명들에 대해 들어봤다. 충남 공주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은 평택에 위치해 있다. 누나가 사는 곳을 지나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순박한 농부 같은 모습이 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생산에 있어서만큼은 금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1만2000여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은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숫자는 그가 평택의 외진 곳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명적으로 만난 작품 소재들 “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덮치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인은 등대지기와 같죠. 바쁘게 새로운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발맞춰가는 시대에 느림 속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소중하고 깊은 운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품을 시작했어요.”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면회화 드로잉 작품 이외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폐철제로 만든 페달 작품이었다. 왜 폐철제를 소재로 삼은 걸까? “사용하다 버려진 물건들,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쇠. 쓰다 버린 물건이든 새로운 물건이든 저와 찰나의 운명적 만남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쇠는 좀 무겁고 아파 보인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작가의 대답은 간단했다. “철제의 묵직한 무게와 차가운 성질이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날마다 달라지는 운명과 기억, 그 내밀함이 어떠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죠.” 이상용 작가는 소위 ‘예술가다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뭔가 흐트러지고 난삽하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일할 것 같은 도취된 작가의 이미지가 없다. 작품이 보관된 창고는 그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작품에 먼지가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추구한다. 작업실이 곧 집인 이곳에 보관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술은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작가의 모습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에게서 맑은 영혼을 느꼈다. 오롯이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벼루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람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그가 그토록 사람을 자신의 작품 속에 자주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한탄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빨리빨리’가 입에 배고 생활에 밴 한국인은 세상의 속도를 더욱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에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가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잊혀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물질적인 것은 빨라도, 마음은 천천히 이상용 작가는 소재를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고 순리적으로 발견한다. 그가 벼루(inkstone)를 소재로 쓰고자 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일환이었다. 벼루는 단단한 물건이다. 백 년 전, 사백 년 전에 벼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쓰이고 시간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결국 한 작가의 손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서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면 버려졌을 수도 있는 벼루는 그의 손에서 다시 생명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쓰다 만 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벼루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버려진 골동품 같은 한국 전통의 얼이 담긴 것들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소재들이 운명과도 같다. 그렇게 만난 작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참 곤란해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부속품들조차도 운명이고 만남이므로 어떤 게 의미가 크다 작다 논할 수가 없단다. 이러한 일관된 그의 작품세계조차도, 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통일감이 생겨 그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제도권 내에서 학습된 예술적 역량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발판 삼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실험작가답다. 39세 나이에 떠난 뉴욕 이상용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뉴욕에서 6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뉴욕. 그곳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였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을 터. 그런데도 그가 뉴욕이라는 새로운 출발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삶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국의 입시 교육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입시학원 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술학원 일은 제법 잘돼서 대전에서 큰 학원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맡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져서 계속해야 했던 학원이었다. 그러나 입시에 대한 혐오가 강했던 만큼, 아이들을 그 틀에 맞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틀을 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최대한 독특하게, 똑같이 하지 않고 개성 있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라는 그의 자조 섞인 한마디에서 많은 좌절과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열두 시에 학원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작업하고 잠깐 자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했다. 그의 방대한 작업량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뉴욕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르칠 나이에 대학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하게 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다 이상용 작가는 뉴욕에 처음 갔을 때 3년 내내 매일매일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보고 또 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본 그림들과 자신의 작품을 접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흐름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후 3년 동안 외부 출입 안 하고 작업만 계속했다. 옆에서 보면 무언가 홀린 듯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는 그의 지론이 있다. 바로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보고 하는 것은 안 좋아했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하는 그의 작업관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매번 자신이 ‘원시시대에 태어난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말한다. 그림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마음가짐과 노력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의 동력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과 같은 끌어당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그토록 운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억지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있는 소재에 맞춰 작품을 만들 뿐이다. 그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회화, 조각, 설치, 그림, 시까지 아우르다 젊을 때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용 작가의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이제 그는 조용히,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미술관들과 단원미술관, 관훈갤러리, 간송미술관 등에 걸렸고 코오롱그룹과 한국문화원,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은둔 고수의 아우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양도 많지만 분야 또한 방대하다. 회화, 조각, 설치, 그림과 같은 미술 작품 외에 시와 사진까지 아우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가 얽혀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라고 말한다. 소위 ‘권위’를 위해 한쪽으로 장르를 정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사람이 맨날 한 가지만 먹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시는 그의 미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6000편 정도 썼고, 2000편 정도를 공개한 상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들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부터 땅바닥에 그린 그림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소나무로는 목상을 만들고 빨래비누로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잡동사니로 척척 만들어낸 작품들이 쌓여 그의 집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고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은 시적 감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린 시절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감성들과 연결된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 말했듯 말라가는 잎을 파랗게 유지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은 내면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흐트러지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시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가 중심을 잡아준다. 흐려지거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 다시 본질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할 작품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품 소재는 상여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상여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상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면 왕과 못지않은 마지막 길을 서민들에게도 제공해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샤머니즘 관점에서 상여를 소재로 한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현대적으로 해석된 이상용 작가식의 상여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어렸을 때 상엿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무섭잖아요.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이게 아름다운 상여 문화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인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상여라는 게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편하게 봤음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스튜디오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러한 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연결해주는 그런 작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작품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고 베끼며 영향을 받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작가의 모습이란 인연과 이어지는 것이고, 그 인연은 다소 희미한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운명의 길과도 같은 무언가다. 그의 마음을 읽는 사람은 그의 인연이 되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작가의 맑게 정제된 사상과 순박한 마음이 간결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살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산다는 이상용 작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자의 심정을 그의 작품에 공감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기자로서는 이상용 작가의 운명 같은 작품이 세상 밖에서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짐짓 이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 2018-02-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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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대표 여성 작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려냈을까? 한국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전시회는 이렇듯 가벼운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한다. 전시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듯 초기작을 접하고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감상하니 점점 그 이름이 각인된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화가, 사랑에 기뻐하고 아파한 여인의 대서사시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을 통해 펼쳐진다. 마리 로랑생에 대해…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우선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보기에 앞서 그의 인생 이야기와 연애담을 조금이라도 알면 좋겠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이자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마리 로랑생 감정 변화는 깊이가 더해지며 다양한 색채로 화폭에 담겨갔다. 1·2차 세계대전 시대를 산 인물로서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아왔던 예술가,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100여 년 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교육받았다. 입체파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화가가 된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업실이자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에 다니며 활동했고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이곳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5년 여 뜨거운 열애를 나눴던 이들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연루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인 남작과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가다 이혼한다. 이후 마리 로랑생은 색채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의상과 무대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56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됐다. 파리지엥 작가의 인생 궤적을 쫓다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은 마리 로랑생의 20대 무명 시절부터 73세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작품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다섯 개의 섹션이 친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하게 구성돼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 로랑생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옛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사진 19점이 전시 돼 있다.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니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화상과 피카소의 초상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열애시대’로 구별한 2부. 입체파와 야수파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마리 로랑생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난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3부 ‘망명시대’는 마리 로랑생 인생 중 역경의 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 신혼생활을 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난 시기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있을 수 없어 택한 망명길이었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을 자신만의 색깔로 더욱 강하게 작품 안에 표현했다. 4부 ‘열정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시기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 유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공연 영상과 의상 도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5부 ‘콜라보레이션’에는 작가 앙드레 지드의 ‘사랑의 시도’, 오페라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잡지 ‘보그’ 등 마리 로랑생이 북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할 때 발표된 작품 38점이 전시돼 있다. 이밖에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과 마리 로랑생의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있고, 그의 시를 직접 필사해보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 정보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관람시간 2월 오전 11시~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 3월 오전 11시~오후 8시 (입장 마감: 오후 7시) 입장권 성인 1만 3000원 / 청소년 1만 원 / 어린이 8000원
- 2018-02-0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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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한옥마을 탐방기
- 필자는 어릴 때 한옥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대문 앞에 있던 한 그루 대추나무 때문에 대추나무집이라 불렸던 아현동 집과 반듯한 서까래가 아름다웠던 돈암동 집 등 한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늘 넘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북촌 탐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날씨. 이런 날은 여행이나 산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안국역 3번 출구로 갔다. 필자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 번째로 도착했는데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필자 앞에서 외국인 여자 한 사람이 큰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끙끙대고 있어서 서툰 영어이지만 방향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can I help you?"라고 말을 걸었다. 여자는 매우 기뻐하며 동대문 마켓을 가려 한다고 했다. ‘역시 한국에 여행 왔으면 동대문시장은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미소가 일었다. 교통편보다는 걸어가고 싶다 해서 방향을 알려주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더니 두바이에서 왔다고 한다. 필자는 여자 혼자 그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준 것이 고마운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를 방문해줘서 감사하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오늘따라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필자의 영어 실력은 기초 회화를 할 정도임). 그녀는 옥토퍼스(octopus) 푸드를 먹었는데 무척 스파이시(spicy)했다는 말을 했는데 아마도 매운 낙지볶음을 먹었나보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추천하고 싶은 다양한 한식이 있다며 몇 가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한국이 참 아름답다며 가방을 뒤적여 봉지를 꺼내더니 다 식은 국화빵을 두 개 필자에게 건넸다. 그 마음이 예뻐서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감사하다며 떠나는 그녀를 보며 필자로 인해 우리나라가 친절한 나라로 인식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문화해설사와 일행 8명이 도착해서 북촌 탐방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돈암동에서 3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북촌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북촌에 8경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 그중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한옥마을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곳은 왕가 사람들이나 권문세가, 양반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경에서 8경까지 탐방을 하기로 했다. 1경은 창덕궁 담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담 옆을 끼고 왼쪽으로 가면 북촌 문화센터가 있다. 이 집은 조선시대에 재무관을 지낸 양반집을 창덕궁 연경당을 모델로 복원해 사람들에게 북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우수상’을 받은 곳이라 한다.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사랑방도 개방해놓았고 정자에도 앉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우리 일행도 툇마루에 앉아 인증사진을 찍었다. 2경은 원서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가옥에서 시작되었다. 참으로 아담하고 예쁜 정취가 느껴지는 한옥이었다. 그러나 한때 친일파였다는 일로 폐가가 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어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서화전도 열리고 있다 한다. 이곳에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세 명의 친구의 글, 그림,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한삼우란 각자의 분야에서 민족계몽과 근대화를 이끈 춘곡 고희동, 육당 최남선, 위창 오세창 세 분을 말한다.
- 2018-02-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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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위로의 손
- 사진 촬영을 명령받을 때가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 아니라,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다녀와야 하는 지역과 대상이 정해질 때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길이 주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유엔 요원들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나를 떠나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멈추면 절대 안 됩니다. 만약 보트 엔진이 꺼지면 침입자로 오인받아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나를 태운 보트는 두 대의 엔진을 가동하면서 만약을 위해 중간중간 연료를 채워 넣어야 했다. 막무가내인 엔진 소음도 투명한 긴장을 깨진 못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얕아지더니 구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한 진동이 일었다. 프놈펜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다. 보트가 바닥을 긁고 있었다. 좁고 얕아진 물길에서 배의 프로펠러는 물이 아니라 모래를 밀어내며 탱크처럼 움직였다. 한동안을 그렇게 가면서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제야 유엔 요원이 들려준 주의사항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가 엔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엔진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야 했다.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자 거대한 호수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목적지에 닿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톤네샵 호수는 장관이었다.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음으로 피곤해진 귀가 놀랐다. 고요함. 너무 조용해도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귀도 상대적인 감각기관인가보다. 어디 귀뿐인가. 눈과 코가 열렸다. 피부도 긴장해 소름이 돋았다. 호수의 엄청난 크기와 고요 앞에서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내가 느낀 긴장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극적인 반전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오감을 되찾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은 나에게 주어진 다큐멘터리 취재 사진이 아니다. 거기 살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을 감싸고 안아주는 구름과 하늘빛이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긴박한 현장 고발 사진보다 더 강했다.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난 거기서 알았다. 눈에 보이는 평화와 낭만과는 다른 현실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바람과 물 그리고 구름들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호수 위로 바람이 불자 새들이 날았고, 사람들은 곧 있을 비바람에 대처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여자아이 둘이 아버지를 따라 지붕에 올라가 노는 모습이 뷰파인더에 잡혔다. 아이들은 지는 해를 배경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아이들의 겨드랑이 사이로 조금 더 빨라진 호수의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과 노는 아이들. 이들이 과연 어른들의 싸움에 휘둘리는 아이들인가? 불안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누가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쳤을까? 비 내린 다음 날 하늘은 맑았고 호수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다시 무더운 오후가 되자 그 얕은 평화 위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서너 명의 아이들은 벌써 연잎 하나를 꺾어 머리 위에 썼다. 물에 들락거리느라 벌거벗은 아이들은, 젖는다는 기준으로 보면 연잎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것은 아이들의 유희다. 세상의 아이콘이다. 자연과 함께 노는 아이들의 방식이다. 톤네샵이 준 선물. 사진을 찍을수록 나의 카메라가 그 선물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아이들에게서 바람과 비와 나무의 소리를 빼앗고 그 대용물로 장난감과 전자게임기를 건네준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아이들의 웃음과 울음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웃는 웃음 지키기와 빼앗긴 웃음 뒤에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몇 배의 돈이 드는지 나는 사진으로 전해야 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난감해 있는 내게, 연어 빛으로 물들어가는 톤네샵 구름이 보이지 않는 위로의 손이 되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
- 2018-02-0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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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치의 힘
-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인물도, ‘힙’이 터지는 젊은 패셔니스타도 브로치에 자신을 투영한다.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하고, 어떤 액세서리보다 의미 있는 브로치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주얼리의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남편이 처음으로 사줬던 목걸이, 아들이 선물한 귀고리, 시어머님이 물려주신 브로치 등등 이야기가 담긴 주얼리는 패션의 영역을 넘어 주술과 같은 의미로 우리와 함께하게 된다. 그중 목걸이와 반지처럼 옷 속에 감춰지는 은밀한 주얼리와 달리 대놓고 자신의 존재감을 풍기는 브로치가 다시 트렌드의 쳇바퀴를 돌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어느 때보다 젊어진 모습으로 말이다. 브로치가 말하는 것들 패션 디자이너 서정기는 한 인터뷰에서 브로치에 대해 정의하길, “브로치는 옷 위에서 ‘나를 봐주세요!’,‘나는 이런 취향을 가졌어요!’라고 외치죠. 고상하게도, 천박하게도, 화려하게도, 얌전하게도, 크게도, 작게도, 엄청 비싸게도, 싸게도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브로치 입니다. 브로치는 개성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죠”라고 했다. 브로치는 자신이 어떤 취향의 사람인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때때로 말보다 더 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까만 드레스 위로 ‘Time’s Up’이란 브로치를 단 여배우들이 등장했다. 이 브로치는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타임스 업(Time’s Up)’ 캠페인을 의미한다. 또 여성 정치인이 입은 옷은 정치적 성명 발표와 같다는 말처럼 종종 정치인들은 브로치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암시적으로 전달한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퇴임 후 ‘내 브로치를 읽어보세요’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까지 열 정도로 브로치 정치의 대가였다. 그녀를 비롯해 IMF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힐러리 클린턴 등 브로치를 패션 그 이상의 의미로 이용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타일의 방점, 브로치 최근 하이 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앤아펠은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보그의 전설적인 에디터이자,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뮤즈인 카린 로이펠드와 함께 브로치 스타일링법을 소개하는 ‘브로치 더 서브젝트(Brooch The Subject)’를 기획한 것. 몇 개의 하우투(How to) 영상과 사진으로 이뤄진 이 기획은 브로치에 대한 생각의 틀을 넓혀준다. 브로치의 자리를 으레 가슴쪽이나 스카프 위라고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카린 로이펠드는 클래식한 반클리프앤아펠의 브로치를 평범한 블라우스의 깃(칼라의 뾰족한 부분)이나 스커트 벨트 라인, 원피스의 어깨 부분에 살포시 얹었다. 아무것도 아닌 옷을 일순 특별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화장대 구석에 방치해둔 오래된 브로치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스타일링법은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느냐가 더 중요한 요즘 시대에 딱 알맞다. 특히 옷장을 열면 한숨만 나오는 이들에게 옷에 대한 스타일링의 영역을 우주만큼 확장해준다. 브로치를 고리타분한 액세서리의 자리에서 ‘힙’, ‘핫’ 같은 요즘식 형용사를 붙이게 만드는 것은 비단 이 프로젝트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고전으로 불리는 버버리 프로섬 역시 이번 시즌에 얼굴만 한 사이즈의 브로치를 선보였다. 어떤 주얼리보다 화려한 버버리 프로섬의 ‘왕’ 브로치는 스트리트 감성이 풍만한 젊은 세대들을 동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액세서리 리스트에 브로치 영역을 추가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젊어진 브로치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패션을 신선하게 만들어준다. 다가올 설, 철 지난 한복이 촌스럽게 느껴진다면 브로치의 힘을 빌려보자. 하나도 좋지만 여러 개의 브로치를 레이어드하면 또 다른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이때 유색과 무색의 조합을 적절히 이용하면 촌스럽던 한복도 한결 세련돼 보일 것이다. 또한 브로치를 옷이 아니라 진주목걸이 위에 연결해 펜던트로도 활용해보자. 심플한 니트에 브로치를 더한 진주목걸이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다가올 봄,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는 패션을 위해 브로치 처방을 내려보면 어떨까. 그것도 당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브로치라면 금상첨화겠다.
- 2018-01-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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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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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에도 장미를… 향기로운 꽃의 궤적
-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 2018-01-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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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의 문화행사 한 눈에
-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빛나는 시작, 눈부신 기억 ‘라이프 사진전’ 일정 1월 1일~4월 8일 장소 부산문화회관 미국의 사진 저널, ‘라이프’ 지에 실렸던 사진들 중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억될 가치가 있는 사진작품 130여 점을 전시한다. 무하마드 알리, 마더 테레사, 존 레논, 찰리 채플린 등 시대를 상징하는 이들의 삶을 오리지널 필름으로 엿볼 수 있다. 한국과 관련된 사진도 눈에 띈다. 1960년대 미국에 진출했던 국내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날의 풍경 등도 관람 포인트다. 카라마조프 일정 1월 3~14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이정수, 조태일, 김히어라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러시아어로 ‘검은 얼룩’이라는 뜻을 지닌 이 작품은 친부 살인사건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들에 관한 법정 추리극이다. JTBC 예능프로그램 ‘팬텀싱어2’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은 이정수와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의 주인공 김히어라가 출연한다. 안나 카레니나 일정 1월 10일~2월 2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출연 옥주현, 정선아, 이지훈 등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풍속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당시의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 등 인류 보편의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클래식, 록, 팝, 크로스오버 등 40여 곡의 음악과 무대 전체를 아우르는 LED 스크린 영상으로 19세기의 러시아를 구현했다. 한국에서 초연을 선보이는 이번 뮤지컬은 러시아의 유명 뮤지컬 프로덕션인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세 번째 작품이다. 스타박’스 다방 개봉 1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상우 출연 백성현, 이상아, 서신애 등 ‘제17회 전주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바리스타의 꿈을 품고 강원도 삼척으로 내려가 카페를 차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만이 내 세상 개봉 1월 17일 장르 코미디 감독 최성현 출연 이병헌, 윤여정, 박정민 등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와 엄마만 믿고 살아온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난생처음 만나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동안 센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이병헌이 조하 역을 맡아 진중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함을 연기해 기대를 모은다. 인제빙어축제 기간 1월 27일~2월 4일 장소 강원도 인제군 남면 빙어호 일원 199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올해 22주년을 맞았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빙어를 잡으며 겨울철 소양강 최상류로 찾아드는 빙어 떼의 귀환을 볼 수 있다. 빙어열쇠고리 만들기, 텀블러 만들기 등의 체험활동과 전국얼음축구대회, 빙어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 2017-12-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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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허브, 미래의 중심 새만금
- 뉴스를 보는데 새만금사업이 박차를 가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새만금은 원래 민간주도로 시작되었지만, 긴 시간이 지난 이번 문재인정부에서 공공주도로 진행하게 되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내부개발이 진행될 것이며 새만금개발공사를 만들어 전담추진체계를 마련해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6월 필자는 새만금 노마드 축제에 다녀왔다. 그날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달리면서 보았던 느낌은 참으로 벅찼는데 바다를 메워 우리의 국토를 이렇게 확장했다는데 감동적이었다. 얼마나 큰 산업 일꾼들의 노력이 있었을지 새만금 홍보관에서 사진으로 영상으로 지켜보며 숙연했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 바다와 호수의 물빛이 다른 점도 신기했다. 축제장의 광활한 대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면서 이곳이 일회성의 이벤트가 아닌 후손들에게 길이 남겨줄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기를 기대했다. 얼마 전에 종로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 20층 새만금개발청에서 새만금 토크콘서트가 있었다. 새만금투자전시관인 이곳은 투자유치 지원과 수도권 고객, 국내외 투자자들의 접근성과 편의성 제고, 서울에서 새만금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새만금홍보 등 대외 협력강화를 위해 개관했다. 일본기업대상 투자 설명회, 글로벌금융사와 개도국 공무원 초청행사, 중학생 진로체험프로그램, 일반 방문객 대상으로 새만금홍보를 했다. 새만금은 바다를 메워 서울의 3분의 2에 달하는 넓은 땅을 만들어 우리나라 지도의 모습을 바꾸었고 방조제는 33.9km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길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새만금 프로젝트를 산업프로젝트로만 생각하지 않고 문화적인 측면을 더하고자 했고 선진문화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까지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담당자의 인터뷰도 있었다. 새만금은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에서 한자씩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하신 사무관님의 말을 들어보니 새만금개발은 1991년에 시작되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보면 이곳은 303년 백제 시대 때부터 개발되었고 ‘벽골제’라는 길이 3km의 제방과 저수지가 있어 깊은 문화적 뿌리로, 개발될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가졌다고 한다. 조선왕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일대에서 나오는 곡식이었고 고군산군도는 모두 왕조의 터였다며 새만금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역사적 구조적으로 필연적이고 그래서 새만금지역이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견해를 들려주었다. 원래 새만금은 민간주도로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지만, 문재인정부에서 공공주도로 진행하게 되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내부개발이 진행될 것이며 새만금개발공사를 만들어 전담추진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2023년 열리는 세계 잼보리 대회를 이미 유치했고, 앞으로 세계 잼버리 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행사를 많이 유치하고 제3세계 국가를 방문해 대사관이나 민간단체를 이용 새만금을 홍보하며, 국내에서도 학교나 가족 단위로 야영을 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노마드축제 등 각종 축제를 개최하는 새만금을 개발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토크 콘서트에서 새만금 주제곡을 만든 작곡가 스티브 바라캇의 이 음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다. 스티븐 바라캇은 캐나다 출신 세계적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캘리포니아 바이브스(KTX 안내방송 배경음)과 럴러바이(유니세프 주제곡) 등을 작곡한 분으로 유니세프에서의 인연으로 새만금 주제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이 음악가가 얼마나 새만금 주제곡을 완성하기까지 애정을 가지고 열정을 다 해 만들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했고 큰 책임도 느꼈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 혹은 세계 최고의 시설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도시의 성공은 사람에 달려있다며 새만금 주제곡은 ‘사람‘ 에서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새만금 주제가 마지막 부분 우리 대금연주자의 피날레가 너무나 감동적이고 멋지게 들렸다. 아시아의 허브, 미래의 심장이라는 슬로건의 새만금이 큰 성공을 거두어 우리나라 발전에 한 획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토크 콘서트를 마쳤다. 무언가 기대한다는 건 가슴 벅차고 즐거운 일이다.
- 2017-12-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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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한 여정을 예술로 밟아온 여성들
-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시인은 축시(祝詩)를 통해 여성 조각가 석주(石洲) 윤영자(尹英子, 1924~2016)를 이렇게 예찬했다. 당신 머리엔 조물주로부터 위탁받은 창조물로 가득하고 당신 손과 몸엔 그걸 뽑아내는 기술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평생을 세월 모르는 불멸의 생명으로 예술을 살아오며, 쉴 새 없이 조물주의 위탁을 만들어냈습니다 ― 조병화, ‘2001년 회고전에’ 중에서 1947~1949년 윤경렬(尹京烈, 1916~1999) 조각가와 윤효중(尹孝重, 1917~1967) 조각가를 사사하고, 1949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되던 해에 입학해 우리나라 여성 조각인 1호가 된 분이다. “출발점에서 영향을 끼친 ‘윤경렬’은 차분한 인간성을, ‘윤효중’은 힘찬 의욕과 조각가로서의 정열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평론가는 말한다. 1925년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이 땅에 돌아와 최초로 근대적 양식의 조각을 시도한 태동기부터 오직 조각예술에 헌신해온 일생이었다. 1953~1954년 국전에서 특선, 1955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조각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73~1989년에는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교수, 학장으로 봉직했다. 브론즈와 대리석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조각 속에는 언제나 모성의 따뜻한 혈류가 흐르는 듯하고, 부드러운 곡선미는 보는 이에게 안온함을 준다. ‘기다림’, ‘情’, ‘愛’, ‘律’, ‘靜’이라는 작품 타이틀이 말하듯 여인의 일상을 차가운 돌이나 쇠붙이 속에서 잔잔히 끄집어내어 형상화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동상(銅像) 등 여성의 몸으로 힘겨웠을 대형 조형물도 곳곳에 남아 조각예술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1989년에 제정된 ‘석주 미술상’은 금년 23회까지 꾸준히 후배 여성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愛’라는 제목이 붙은[사진1] 여인의 앉은 모습은 조형미가 빼어날 뿐 아니라, ‘오닉스’라 불리는 강도 높은 노란 대리석을 깎아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속기(俗氣)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정갈한 여인의 자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리석 작품 ‘가족’, ‘情’을 소장하고 있던 차에 인사동 화랑에서 마주한 이 작품도 기꺼이 소장하게 되었다. 거실 한편 가구 위에 놓고 그녀 어깨의 리듬까지 완상(玩賞)하고 있다. 그는 2010년의 전시도록 서문 ‘예술,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에서 “제 인생과 작품이 30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보존돼서, 아름다운 선율과 청아한 음을 내고 있는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한 예술의 역정을 한평생 밟아온 그에게 다함없는 존경의 염(念)을 올릴 뿐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들이라면 그 성스러움이 한층 더할 것이다. 고대 성당이나 교회 건물에는 예수, 제자들의 형상이 벽화, 조각상, 벽의 부조, 광창(光窓)을 영롱하게 장엄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는 고난의 순간, 죽음과 부활, 평화의 나팔 등을 작은 브론즈 촛대 네 면 가득 ‘돋을새김’으로 채운 이 촛대 한 쌍은[사진2] 예사롭지 않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10여 년 전 유명한 건축가 김원(金洹, 1943~) 선생의 대학로 사무실에서, 이 조각가 이춘만(李春滿, 1941~)의 작품들을 보고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기억이 새롭다. ‘광야의 예수’, ‘부처를 닮은 예수’, ‘십자가 예수’ 등 브론즈 작품들의 범상치 않은 형상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질박한 물성을 살린 그의 조형들은 금속을 헤집고 고뇌와 우수에 가득 찬, 그러나 경건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서울대 조소과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 여성 조각가는 “붓다상이 가지는 실루엣은 지극히 부드럽고 절제되어 금욕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함을 드러내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과 달리, 그리스도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 형태로 평화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형상이다. 나는 붓다와 그리스도가 드러내는 서로 이질적인 상징성을 작업에 함께 대입시켰다. 정지되어 있으나 끝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두 이질적인 상징성을 인체 안에 뚫어진, 혹은 인체를 감싸고 있는 ‘공간’과 만나도록 시도했다”고 작가일기에 썼다. 작품의 형태와 선의 단순성은 인체의 소멸성과 영원성, 망각과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긴장을 더욱 격렬하게 일으킨다고 평자는 말하고 있다. 천주교 박해의 현장, 한강변 절두산(切頭山)에서 이 작가가 조각 설치한 ‘절두산 순교 기념비’ 앞에 서면, 먹먹한 가슴 안으로 오열이 흐른다. 작품을 수집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김원 선생 사무실만 수시로 드나들곤 했다. 이 브론즈의 촛대 한 쌍은 잘 알고 지내는 미술품 수집가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인연으로 여기고 있다. 다행스럽게 그분은 작가의 이력을 잘 모르고 있기에 프랑스 촛대와 쉽게 교환되었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네 가족이 휴가차 오는 날 커다란 박달나무 탁자 위, 이 촛대에 황촉(黃燭)을 밝히고, 그림자에 묻혀 흔들리는 ‘천사의 평화의 나팔’을 바라보며, 고난을 이긴 환희의 순간을 느껴볼 것이다.
- 2017-12-18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