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필자는 그저 구엘공원을 가는 이 생소한 골목길이 좋았다.
그리고 공원에 도착하도록 그 길고도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보는 것으로 끝내도 상관없다. 스페인의 한 도시에 내가 와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가능하면 한 점 디테일도 놓치지 않아야 하고 느껴야만 하는 생각은 발걸음을 가볍지 않게 할 수 있다. 그저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을 여유롭게 누리고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여행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일지. 함께하는 남편의 철저함은 가끔씩 불편하거나 고맙거나 한다. 하긴 동행자의 그런 치밀함 덕분에 편한 여행을 하는 것을 모르진 않다.
암튼 숙소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발카르카역에서 내렸다.
반가운 쌍용자동차 전시장을 지나고 스페인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골목을 한참 걸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엘공원에 올랐다. 갈수록 오르막 길은 반갑지 않은데 그 길을 오르지 않으면 가우디의 구엘공원을 느낄 수 없으니 열심히 걸어야 했다.
그 언덕에 오르니 한눈에 바르셀로나가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거기 오른 뿌듯함과 즐거움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환호에 찬 몸짓과 예술적 건축물을 향한 시선만으로도 숨차게 구엘공원에 오른 보람을 갖게 한다. 시내 한 복판으로는 아직도 공사 중인 파밀리에 성당이 눈에 들어오고 흐린 날이었지만 멀리 지중해가 아득하다.
구엘 백작의 믿음과 재력을 바탕으로 가우디의 독창성과 예술혼이 담긴 구엘공원이 만들어졌고 오늘날 전 세계인이 찾아가는 건축물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에게 축적된 재산이 일가족에게만 분배하기에 급급한 부자들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다가 이런 부질없는 비교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i)에게 능력껏 재능 꺼 마음껏 만들어보라고 하는 멋진 후원자 구엘 남작(Eusebi Guel)이 있었기에 14년간의 작업이 이루어졌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바르셀로나 시에서 사들여 구엘과 가우디의 뜻을 이어 멋진 행정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예술혼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산 위에 올라 높은 전망대에서 바르셀로나의 파노라마를 즐겨본다.
그리고 그 언덕을 내려오면서 동화 속 보물섬처럼 만들어진 가우디의 건축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가우디의 기념관을 살피고 지나니 놀라운 디자인의 건축물이 눈앞에 이어진다. 가우디 건축은 자연을 모티브로 했기에 자연스러운 곡선미는 단연 압도적인 볼거리다. 순수를 추구하는 자연인다운 독창성이다.
모자이크 타일로 뒤덮인 특이한 외관의 독창성은 너무나 독특해서 얼핏 보기엔 이게 과연 칭송받아 마땅한 건축인가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만으로 만 그칠 수 있는 동화적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가우디의 천재성을 믿어준 구엘의 절대적인 신임과 무조건적인 투자가 부럽고 멋지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의 집을 도입하고 파도와 도마뱀 등의 자연을 그대로 끌어들인 가우디의 작품 속으로 수많은 여행객들이 빠져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시민들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흐린 날의 저녁노을을 기다리며 걸터앉아 있고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탄성을 지르고 연인들이 입맞춤을 하고 있다. 가우디의 예술을 공유하는 이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의미 있다. 이 또한 가우디가 바라보던 자연의 일부가 아닐지.
"나는 꽃,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곤충들의 날개소리를 들으며 프라데스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 - Antoni Gaudi
우리가 흔히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터키였지만 솔직히 필자에겐 그런 감흥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십몇 년 전에 터키를 가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언젠가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다가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와 바로 주문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책 내용이 단순히 터키 여행이 꿈이었다거나 너무도 멋진 풍광의 나라였기 때문인 제목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제목에서 지칭되었던 터키가 한동안 필자의 뇌리에 박혀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의 소개 글에서 말하기를,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빌어먹을, 벌써 쉰이네!' 하는 생각이 들 때 집어 들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했다. 또 저자는 폐경기를 이기고 삶의 열정을 새롭게 지피기 위해서 늘어진 유방과 얼굴의 주름과 잡티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단순히 중년의 미국 아줌마들의 인생 수다판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쑥쑥 읽기엔 던져주는 화두와 해법이 명쾌해서 빳빳해지는 긴장감과 함께 활기를 주기도 했었다.
40대, 50대... 90대 여자들의 소중한 삶의 경험만이 아닌 기다리고 있는 삶에게 외치는 모습이 유쾌했다. 그녀들은 외친다.
"연령차별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빈둥대며 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충고하는 90대의 할머니(아니, 여성!!)
"난 이제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아요." 주름 수술할 돈으로 터키와 그리스로 여행 다녀왔어요"
"나이를 빨간 스카프처럼 목에 감고 꼿꼿이 대로를 활보하자”
6.25 참전국이었거나 월드컵 축구 때문이기보다는 별 의미도 아닌 이런 즉흥적이고 단순한 의미에서 터키 여행은 어이없겠지만 그 정도가 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그조차 이미 생각나지 않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터키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고 저녁시간이어서인지 북적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국심사 행렬에서 뒤죽박죽 엉킨 채 터키인 인듯한(모습이나 말소리로 보아서) 일행들끼리 길을 막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편인 필자는 긴 비행시간으로 이미 고단한데 점점 더 지친다. 더구나 지하철을 타려고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충전하는 과정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다. 마침 옆에 서있던 한국 학생이 “여기 원래 자주 그래요” 한다. 이래저래 피곤해 진다.
지하철과 트램을 연결 이용해서 시내인 술탄 역(Sultanahmet)까지 나오니 저녁 바람이 쌀쌀하다. 이스탄불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데 유명한 사원이나 궁전,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구도시인 이곳 슐탄 역 부근에 많이 있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도 이곳이어서 시내 구경도 할 겸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밤거리를 걸어갔다. 짙은 눈썹과 검고 큰 눈망울의 터키인들이 활보를 한다. 머리에 히잡(Hijab)을 두른 여성들도 흔하게 보인다. 이스탄불이다.
참 곱다. 다시 보아도 예쁘다. 눈을 크게 뜨고 요목조목 들여다보아도 신비스럽기도 하다. 겨울이 오는 문턱에서 가을을 노래하던, 여리고 작은 풀잎에 차가움이 서릿발 되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마치 영롱한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네를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변화 속에 신비스럽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형상에 사진작가인 필자는 늘 매료된다. 그 시간은 마냥 행복하다. 소소한 일상과 작은 피사체를 렌즈로 즐기는 나만의 시간에 흠뻑 빠져들어서다.
온 산에 단풍이 가을을 수놓더니 채도가 낮아진 낙엽 되어 바람에 흩날려 길바닥에 구른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한 겹의 나이테를 또 그려간다. 지난밤 추위에 잎새 끝자락에 무서리가 날을 세웠다. 추수가 끝난 들녘 논에 줄지어 서 있는 벼 이삭을 베어낸 한 뼘 벼 포기에도 내려앉았다. 성큼 다가선 겨울이 보인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선 손끝이 차갑다. 겨울이 소매 끝을 타고 스며든다. 이맘때면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 이슬이 하얀 서리 되어 대지 위에, 풀잎 위에, 나뭇가지에 자리를 틀었다. 바람에 구르는 낙엽 위에도,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 꽃송이 위에도 내렸다. 마치 섬세하게 빚은 보석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다.
계절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 한 편의 이야기를 쓴다. 세월의 흔적을 기록한다. 간단없이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연말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필자는 사시사철, 아침저녁 구분 없이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 아침도 여전히 작은 풍광에, 일반인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작은 피사체에 몰입하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들과 다른 시각에서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서다. 자신만의 즐거움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여러 모습이 카메라를 잡은 손을 분주히 움직이게 한다.
대지 위에 구르던 노란 은행잎에도 겨울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서릿발이 보석처럼 장식되었다. 눈이 부시다. 밤새 바람과 이슬이 빚은 고운 조각품이다. 영롱한 빛과 선 그리고 형상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자연의 조화다. 동산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자취를 감출 이런 모습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았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를 사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숨죽여 셔터를 누른다.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겨울을 좋아한다던 그녀에게 띄우는 겨울엽서가 만들어졌다. 소슬한 바람에 실려 보낸다.
산책은 이어진다. 논두렁 사이 웅덩이 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정겨운 가을 이야기를 나누는 이끼 같은 작은 이름 모를 풀 위에도 초겨울이 왔다. 촘촘히 얼음 꽃송이를 만들었다. 눈이 내리는 한 겨울 고산 지대의 나뭇가지에 피는 상고대를 닮았다. 곱디고운 형상에 가슴이 뛴다. 누구 한 사람 눈 여겨 보지 않던 풀 포기가 보석상 진열대에 놓인 사파이어를 상상하게 한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카메라로 소소한 모습들을 즐겨 찍었지만, 이런 신비스러운 광경은 오늘 처음 만났다. 혼자 보고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모습이다. 서둘러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췄다. 또 한 장의 그림엽서를 다시 카메라로 그렸다. 겨울철이면 산속 멋진 상고대 촬영을 특히 좋아하던 친구에게 띄우리라. 친구의 미소가 떠오른다. 자연의 변화를 기다리며 조각품처럼 빚어진 피사체에 빠져드는 필자는 속일 수 없는 사진작가인가 보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길이 더 행복해진다. 환갑의 나이에 뒤늦게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여가활동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근간이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아이디어 닥터, 트렌드 몬스터, 강연여행가, 브랜드 전문가…. 이장우 브랜드 마케팅 그룹 회장(62)의 여러 별칭이다.
이 별칭들엔 이장우 회장의 개인 브랜드 혁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현재 전통제조업에서 IT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기업 7곳에서 고정·비고정의 급여를 받는다. 1년에 최소한 5~6회는 미래 유망 트렌드를 찾아보고자 해외 아이디어 탐방 여행을 가 브랜드의 촉과 감을 갈고 온다. 삶 자체가 ‘살아 있는 브랜드’로 부단한 자기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 햇빛이 투명한 어느 멋진 날,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화려한 컬러의 통 좁은 바지에 선글라스, 중절모는 물론 반지와 팔찌 등 액세서리 일습을 갖춘 그는 말 그대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인터뷰 다음 날, 그는 인도로 3주간 홀로 명상연수를 떠날 예정이라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 곳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좌불안석입니다. 무려 일곱 군데에서 급여를 받으신다니 부럽습니다(웃음). 퇴직 후 급여가 오히려 더 많아졌겠습니다.
“돈의 재미를 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현재 다섯 군데가 고정급여이고 두 군데는 비고정급여인데 늘었다가 줄었다가 합니다(웃음). 솔직히 퇴직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최고경영자들이 퇴직 즈음해선 쪼잔한 상념이 많아지거든요. 부러진 날개 신세에서 영웅담을 생각한다는 것은 뻥이에요. 하다못해 국민연금, 4대보험 문제는 어떻게 하나, 별 게 다 걱정이 됐어요.”
퇴직 후 바로 이장우 브랜드 컨설팅 그룹을 만드셨지요. 직원 한 명을 둔 미니 지식기업을 창직(創職)하셨습니다. 퇴직 후, 현직 때 마지막 연봉의 두세 배를 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실정과 저의 현실을 냉정하게 본 것입니다.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리지 않은 것이지요. 퇴직 후 회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조직을 키우기보다 개인으로서 나, 이장우를 키우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규모의 경제에서 제가 대기업, 다국적 컨설팅 그룹과 경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 기업들의 CEO와 경쟁한다면 승부수를 던질 만하지요. 개인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직 후 공황을 겪는 것은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려서입니다.”
퇴직 CEO들이 과거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러 인생 2막 설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더군요.
“강의, 컨설팅 모두 부단한 콘텐츠 개발 싸움입니다. 대중의 열광, 과거의 영광 모두 거품이고 잠깐이에요. 길어야 1~2년 가기도 힘들고 곧 고갈되지요. 강의는 말이 아니라 콘텐츠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해도 콘텐츠 있으면 오래 갈 수 있어요.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돼 있지요. 멀리 보고 깊이 보려면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지요. 저는 책 공부보다 여행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스몰데이터, 감(感)이 브랜드 차별성이에요. ○○에서 들었다, 읽었다는 개인의 스몰데이터가 기업의 빅데이터를 이기기 힘들어요. ‘내가 직접 해봤다, 가봤다, 느껴봤다’를 이야기해야 먹히지요.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나만의 느낌에서 옵니다.”
브랜드 전문가, 아이디어 닥터, 그리고 강연여행가로 별칭이 계속 진화하고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브랜드 연구는 제 평생의 업으로 한 일입니다. 여행은 콘텐츠 개발을 위해 하다 보니 어쩌다 본업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인문학 강의를 좋아하더라고요. 트렌드의 발상지, 원산지를 직접 방문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는데요. 요즘은 여행인문학으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저는 관심의 촉, 미래의 촉이 느껴지면 배울 만한 곳이 어디에 있나 찾아봐 세계 어디든 직접 가보려고 합니다. 가령 2009년 도쿄 책방을 갔을 때의 일인데요. 트위터에 관한 책이 한 코너를 다 차지하고 있더군요. SNS가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미국 뉴저지 스테이트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동양의 중년 남자가 그 먼 곳으로 한겨울에 SNS 공부를 하러 왔다니 학교에서 놀라더군요(웃음). 공부는 선(先)투자이자 선(善)투자예요. 공부하면서 계발하고, 계발하면서 공부해야지요.”
일반인이 ‘트위터’의 ‘트’란 말에도 익숙하지 않을 때 조기유학(?)을 한 덕분에 그는 SNS 브랜딩 홍보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 6만 명. 카카오스토리 5만 명, 인스타그램 1만 명의 팬을 확보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의 ‘본산지, 원산지 찾아 아이디어 탐방 삼만리’는 SNS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치즈학교, 미국 포틀랜드 커피 바리스타스쿨, 영국 수제맥주 학교, 이탈리아 전통 베네치아 파스타 학교 등 관심 분야도, 아이디어 탐방 지역도 무궁무진하다.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 도처를 누비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익혔다. 말 그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배웠노라’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부딪치는 소소한 사고와 우연한 사건들. 그것이 경험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느낌이 되어 그만의 브랜드로 승화된다.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먼저 걱정되는걸요. 항공비, 체재비, 게다가 연수비용까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버는 것의 20%는 자기계발에 투자한다는 주의입니다. 되도록 스폰서를 잡지 않고 제 돈으로 가는 게 원칙입니다. 후원을 받으면 여행 순서를 깨뜨리고 구속이 되거든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데 2000만~3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강연, 컨설팅 요청이 들어와 투자한 것의 10배 정도는 뽑게 되더군요.”
그는 처음인 일을 나만의 것으로 차별화하면 브랜드가 된다고 말했다. 가령 커피 바리스타 강의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커피와 맥주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브랜드 전문가는 흔치 않다.
흔히 “관광이 아닌 현지 체험, 풍경이 아닌 사람을 만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회장님처럼 여행을 즐기면서 아이디어 탐방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행은 필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세요. 너무 목적, 목적 하며 따지지 마세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에 갇히기 쉽습니다. 기회는 인과관계 밖에서 터져 나옵니다. 많이 가야 합니다. 삶은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여행은 꿈입니다. 꿈을 가져야 여행을 가게 되고, 여행을 가야 자꾸 꿈을 키울 수 있지요.”
이장우 회장은 “여행은 꿈이고 도전”이라며 “목적을 갖고 가지만, 가서 새로운 목적과 도전을 얻는 우연, 세렌디피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면 온갖 정보를 검색, 6개월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지만, 막상 가서는 널널하게 현지에서 자유여행을 즐긴다”고. 사전 계획 때는 채우고, 막상 가서는 비운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고의 과학적 플래닝과 동양적 사고의 인문학적 여백의 결합형이다. 이번에 가는 인도행은 이름하여 소울 트립(soul trip). 트렌드의 촉을 읽으면 정통 원산지를 찾아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다듬어 전달하고 퍼뜨린다. 그것이 바로 브랜딩 아니겠는가.
외국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세계 도처 어디든 도전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하시지요. 최근에는 힌두어, 라틴어까지 공부하신다고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입니다. 언어를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여행한 곳을 더하면 새로운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요. 외국어 공부는 자기를 다른 세상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유체이탈 행위입니다. 리얼하지요. 비유하자면 번역이 사진 속 풍경이라면, 원어는 풍경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 즉시 통번역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외국어 공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얼한 것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속도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예요. 앞으로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필(feel)의 경쟁시대가 될 거예요. 지식과 상식은 보편화돼 검색하면 나오니까요. 느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아요. 새로운 아이디어 탐방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입니다. 기업 자문을 하실 때 신세대 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들이 어려워해 소통이 어렵진 않던가요.
“제가 얼마나 신세대랑 잘 노는데요(웃음). 저는 나이듦을 장점으로 활용해요. 바깥바람 막아주지, 아이디어 아낌없이 공유하지, 성과 올려주지, 이들의 입장에선 ‘성과와 실력은 향상시켜주면서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일은 쉽게 풀어가면서 어려운 책임은 상대가 가져가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신세대가 저처럼 나이 든 멘토와 일하는 장점이지요.”
그는 세대 간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매력 자원이라는 무기의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하는 것은 어렵거나 겁먹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다. 기성세대에게 배울 게, 물어볼 게, 아쉬울 게,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소통하려면 호통이나 비위 맞추기는 불필요하다. 그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재미와 의미를 갖고 일하지 않으면서 ‘나처럼 돼보라, 해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냐는 반문이다.
평생 재미와 의미로 점철된 흥미진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의 ‘그늘’이 궁금합니다.
“웬걸요. 제가 콤플렉스 투성이인걸요. 콤플렉스가 힘이 되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단점이 강점이 되고, 엎치락뒤치락이에요. 집은 가난했고, 머리는 나빠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어요. 다행인 것은 지식이 들어가기 힘든 대신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외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렸어요. 그게 외국어 공부의 동력이 되었지요. 또 집이 가난해 구멍가게를 했고, 상고에 진학해야 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 팔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일즈에 일찍 눈을 뜨게 됐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제 삶의 모토가 ‘긴 호흡으로 살자’입니다.”
이장우 회장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원고를 한 자 한 자 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블로그에 인도에서 쓴 따끈따끈한 새 포스트가 올라왔다. 아쉬탕가 요가의 요람인 인도 마이소르의 한 수도원에서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주황색 승려복을 걸친 모습이 얼핏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켰다.
“요가와 명상을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그 느낌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영혼이 춤추는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배움의 여정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by 이장우
어느 날 문득 그가 명상과 요가 브랜드 전도사로 새롭게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여행가 뒤에 붙을 그의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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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날씨도 매우 쾌청해서 여행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군산은 얼마 전 다녀온 곳이지만 두 번 세 번 가보아도 볼거리와 느낄 점이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군산의 밤을 체험하게 되어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찾아보기로 했다.
군산은 한편으로는 슬픈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비옥한 우리 땅에서 나는 곡물과 물자를 자기네 나라로 수탈해 가는 통로로 군산을 발전시켰고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일본의 가옥이나 문화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근대화의 아픈 역사를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하여 더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다짐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잔재인 세관이나 조선은행 등을 근대건축관이나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잊지 않는다는 취지를 가졌다니 멋진 도시이다.
2017년 10월 28일~29일은 군산의 축제로 근대역사박물관과 월명동 일원에 '가을밤, 근대문화유산은 잠들지 않는다' 는 슬로건으로 군산 야행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야밤에 본 문화유산의 모습들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곳곳에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밤 나들이 나온 군산시민의 모습이 매우 화목해 보였다.
여러 곳에서 음악콘서트의 흥겨운 노래가 들리고 광장에선 가족끼리의 투호 게임도 벌어지는 등 축제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근대역사박물관과 구 군산세관, 조선은행 군산지점, 근대미술관이 된 일본 은행 건물이 아름답게 조명되었다.
뒤쪽으로 군산항의 뜬다리 모습도 예쁜 불빛으로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와 친구들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쪽으로 따라서 길 건너 축제 장소로 이동했다.
그쪽에는 잘 보존된 일본식 절인 동국사와 신흥동 일본식 가옥, 그리고 한석규와 심은하의 아름다운 동화 같았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인 초원 사진관도 찾아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골목마다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거리 축제가 진행되고 많은 관광객과 군산시민이 어울려 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긴 골목 끝까지 예전에 있던 학교나, 관공서, 병원, 정미소, 경찰서, 주막 등 여러 임시건물을 지어놓고 관광객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벤트도 하는 등 군산시에서 이번 축제에 매우 공들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에선 '소리나무'라는 연주 팀의 고운 선율이 우리를 붙잡아 한동안 몇 곡을 감상하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밤이다.
일본가옥에 도착하니 실내를 보려면 줄을 서야 했고 긴 줄에도 우리는 기다렸다가 일본가옥의 내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상당한 부잣집이었던 듯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일본인의 생활상도 엿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전 어렸을 때 우리 외갓집도 일본인의 적산가옥이었다. 패망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의 집을 외할아버지께서 매입하셨다는데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집안 구조도 재미있었지만, 앞쪽의 넓은 정원이 아름다웠다.
일본인 특유의 정원문화로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정도의 동산이 있고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도 있었다.
돌로 만든 거북도 있고 쭉쭉 늘씬하게 피어 있던 보랏빛 난초도 잊히지 않는다.
군산의 일본인 가옥을 보니 옛 외갓집과 많이 닮아 불현듯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군산 야행의 밤이 깊어갔다.
이런 축제로 인해 군산이라는 도시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 떠나기 좋은 가을이다. 모두들 문화가 있는 곳으로 한 번쯤 다녀오기를 권한다.
차갑고 각박한 세상에 따듯하고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다. 환갑을 맞이한 연극배우를 위해 젊은 연극인들이 뭉쳤단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평생을 오직 연극만 알고 살아온 극단 가교의 대표이자 배우 겸 연출가인 박종상의 특별한 환갑 헌정 공연 현장으로 들어가 봤다.
극단 가교를 지킨 바보 배우 이야기
박종상은 배우다.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속해 있는 극단은 가교. 예부터 최주봉, 윤문식 등 걸출한 배우가 몸담고 있던 60여 년 전통의 악극단이다. 워낙 대단한 배우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박종상은 자신에게 맞는 역 한 번 맡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톱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의의가 있었다. 어느 날 박종상과 띠동갑 정도 차이 나는 선배들이 극단을 더 이상 이끌어갈 수 없다고 해체 통보를 해왔다. 극단 가교가 아닌 곳에서 연극을 해본 적이 없던 박종상은 당황했다.
“제가 연극을 시작한 곳이 가교고 단 한 번도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1979년 말에 들어왔으니까 38년을 가교에 있었죠. 해체 얘기가 나왔을 때가 2011년이었는데 제 나이에 어딜 가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던 작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극단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해체 수순을 밟기를 원했던 선배들의 원성이 있었지만 마음만은 좋았습니다. 대신 극단을 완전히 쇄신하자며 나만의 극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남아 있던 후배들에게는 있을 거면 오디션을 보고 아니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뿔뿔이 흩어져서 나갔습니다.”
악극단 이미지를 벗고 젊은 연극인과 만나다
박종상 대표의 실험이 시작됐다. 극단에 새로운 기운을 만들기 위해 소극장으로 찾아들었다. 젊은 작가와 연출가들을 만나 함께 창작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만난 젊은 연극인이 변영후 연출가였다. 각각 다른 극단의 대표이지만 같이 편하게 어울리고 함께 연극 작업에 힘을 모은다.
“단순하게 극단 가교와 작업을 하자는 개념을 넘어서 환경이 여의치 않은 젊은 연극인들한테 연습실을 거의 무상으로 빌려주셨어요. 제작자로서 투자할 힘은 없으니 공간을 내주신 거죠.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본인도 어려우실 텐데 밥도 사주시고. 그래서 그런지 유독 젊은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분입니다. 연극 혹은 연기를 향한 성취나 유명세보다는 그냥 어두운 곳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을 긁어주는 분이십니다.”
서일대학교 연극반 출신이라는 박종상은 연극반 후배들을 위해 연출을 해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주위에 젊은 연극인들이 모여들고 꼰대(?)와는 먼 멋진 선배로 지금까지 함께 작업해오다가 헌정 기념공연에 이르렀다.
헌정 기념공연을 후배들에게 선물받다
“과연 될까? … 걱정됐습니다.”
고희(古稀)도 아니고 요즘 환갑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데 오채민 작가를 비롯해 젊은 친구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마다할 틈이 없었다.
“공연을 하려면 제작비용이 필요해요. 그래서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을 생각에 오채민 작가가 쓴 이번 작품을 ‘이인극 페스티벌’ 지원사업에 접수를 했는데 그만 떨어졌습니다. 공연은 틀렸구나 생각했는데 오채민 작가가 극장을 무료로 섭외해왔습니다. 힘을 많이 썼어요. 밀어붙이더라고요(웃음).”
헌정 연극 를 보고 나니 오채민 작가가 공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것 같다. 그가 배우 박종상에게 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은 몸에 딱 맞는 배역이었다.
“이번 역할은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 나한테 가장 잘 맞습니다. 내 옷처럼 맞는다. 이 정도? 배우가 자기 몸에 딱 맞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만큼 노력을 해서 거기에 끼어 들어가는 거죠.”
후배들이 준비해서 멋지게 환갑 헌정 기념공연이 막을 내렸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크다. 이번 공연을 본 많은 분들께서 칠순 공연 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네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딱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때까지 버텨야 된다는 건데. 지금까지도 진짜 힘들게 버텨왔는데. 나보고 10년을 더 버티란 말인 건가?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걸 또 힘으로 해서 가겠죠.”
환갑의 나이까지 오면서 굴곡 없이 연기 인생 살아온 것도 배우 박종상은 좋다고 했다. 후배들이 신경 써준 덕에 즐거웠다고.
“어쩌다 헌정 공연까지 하게 된 거고 거기에 대해서 사실 쑥스럽죠. 대단하게 해놓은 것도 아닌데 헌정을 한다니까. 사실은 행복한 거죠.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누가 해줄 것이며… 운이 좋다고 생각을 해요.”
아름답게 깊어가는 가을날, 필자로서는 좀 난해한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다. 바로 조지 오웰의 . 대학 시절에 과제 때문에 힘들게 억지로 읽었던 소설이다. 빅 브라더가 세상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킨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주제다. 이 작품이 쓰인 1948년에 오늘날의 CCTV와 같은 감시기인 텔레스크린을 상상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소설 속 배경은 빅 브라더가 감시하고 통제하는 세상이다.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방송을 내보내고 조작된 통계자료로 판단력을 흩트려놓는, 제거할 수도 없는 기계로 오늘날의 CCTV처럼 감시와 통제를 하고 당에 반항하는 행동을 하면 처벌을 받는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옛날에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상상 속 기계가 우리의 현실에서 CCTV로 존재한다는 점이 두렵기도 했고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해보였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 감시 시스템인 빅 브라더가 철저하게 자유를 통제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윈스턴은 조작된 기억에서 벗어나 그저 일기를 쓸 수 있는 소박한 꿈을 꾼다. 당은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끊임없이 국민을 감시한다. 외부 당원인 윈스턴은 당을 위해 과거 기록들을 삭제하거나 조작하는 임무를 갖고 있지만, 점점 당에 대한 불신이 커져 마음속에 담아둔 진실을 자신의 일기장에 하나씩 기록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일기장이 발각되어 윈스턴은 조사실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 고문자는 손가락 4개를 펴 보이며 몇 개냐고 묻고 윈스턴이 4개라고 답하면 무자비한 전기고문을 한다. 결국 그는 4개를 5개로 말하는 세뇌 상태에 이른다. 또 그에게는 사랑하는 줄리아가 있었는데 그녀도 같은 고문을 받는다. 고문이 심해지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배신한다.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고 파멸되어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비록 연극이었지만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받고 통제되는 사회가 두려웠다. 한편으로 무대 위의 노련한 배우들 연기에 흠뻑 빠질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명동의 예술극장에서 연극을 보게 되어 매우 기뻤다. 이곳은 필자가 여고 시절 연극배우를 꿈꾸며 자주 드나들었던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멋진 예술극장이 한동안 증권사 건물로 바뀐 적이 있었다. 경제학을 전공했던 필자가 교수님을 따라 견학을 와 보기도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는데 그 후 다시 문화공간으로 되돌아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묵직한 감동을 준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