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어떠세요?
어여쁜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죠?
바로 그거예요.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은 샤넬의 재킷보다 디올의 구두보다 당신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헤어스타일이 환상적으로 아름답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행위이거든요.
이왕에 입는 거 예쁘게.
여성이 아름다우면 남성이 행복하고 남성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애란씨를 첫눈에 보고 어떻게 저런 미인이 내 주변에 계시나 황홀했는데 장미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서초문화원에서 같이 수필공부를 하고 있는 남자 회원의 카톡문자다. 필자가 황홀할 정도의 미인? 천만의 말씀이다. 필자는 결코 선천적 미인은 아니다(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들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의 절세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자신에게 잘 맞게 연출을 할 뿐이다.
부모에게서 듣는 칭찬은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애란이는 코가 잘생겼어.” 10대 중반의 필자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세 살 위인 언니는 필자보다 예쁘고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았다. 여러모로 우월한 언니를 유독 사랑하던 아버지였다. 열여섯 살 무렵 어느 날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필자 뒤통수에 대고 동네 총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영 껄렁껄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감히 나를 넘봐? 필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마침 마당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 저 사람이 글쎄 나한테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아유! 자존심 상해!" 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대전시장이 대전 제일의 미인이라고 한 네 작은고모도 너처럼 그러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인물이 시원찮은 둘째 딸이 잘난 척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편을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 말이 서운했던 필자는 속상해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예쁘다고 다는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탤런트 뺨치는 미남미녀였다. 아버지는 외탁을 한 필자를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코만'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필자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다. 오늘의 필자는 그 결과다.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일까 궁리하며 입었다. 그러므로 수필반 남자 회원은 말하자면 필자 옷발에 넘어간 것이다. 필자는 옷을 입을 때 잘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고민하며 입는다. 또 체형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은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중과 체지방량부터 체크한다.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고 뱃살도 확인한다. 사이즈가 66이 넘지 않도록 긴장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백화점의 영 캐릭터 브랜드 옷들이 66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학교에 재직할 때는 환상의 55사이즈였다. 그러다가 체중이 57kg까지 늘어나면서 옷맵시가 나지 않았을 때는 외출하기도 싫었고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이러면 안 돼지. 그때부터 다이어트가 일상이 되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채식과 현미밥 위주로 먹었다. 설거지할 때는 까치발로 서서 하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왈츠, 모델워킹, 탁구 등 운동도 한다.
"얘들아 너희들 좋은 남자 만나고 싶지? 그러면 내가 좋은 여자가 돼야 해. 이제 거울은 그만 보고 독서로 내면을 채워야 해. 몇 번 만나다 보면 얄팍한 지식이 드러나거든. 그럼 그 남자가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학교에서 열여덟 살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공짜인 삶은 없다. 지속적으로 탐구해 내면을 꽉 채우고 겉모습도 멋진 여성이 되고자 필자는 오늘도 노력한다. 사람은 몇 살이 되든 자신의 마음밭과 겉모습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 여기저기에 공작 털을 듬성듬성 꽂은 까마귀는 아닐까?’ 한껏 치장을 하고 나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작새로 위장한 까마귀면 어떠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작가! 멋있게 들린다. 아름다운 물체나 풍경을 향하여 진지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그들이 만들어 낸 사진에 몰입하기도 한다. 사진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사진작가가 되어 나름의 멋진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근래엔 이름만 거명하여도 잘 알 수 있는 명성을 얻었던 사람들이 사진취미에 흠뻑 빠지거나 사진작가가 되어 그들이 만든 작품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참 멋있게 은퇴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한번 도전해 봄도 좋지 싶다.
사진의 전성시대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취미로 사진을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전문적인 작가로의 인정을 받는 것도 여가 생활이나 은퇴 후의 시간을 보다 보람 있고 재미있게 끌어갈 수 있는 자기계발의 하나다. 사진작가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도약 점이 될 수 있고 사진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본적 소양과 지식을 갖추는 단계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진작가가 됨으로써 사진 촬영DMF 신중하게 된다.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자신의 또 다른 경력이 되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는 가르침의 기회도 얻을 수 있고 재능기부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성 들여 만든 작품은 자기의 분신이 되어 세상에 남겨질 수도 있고 작품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한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사진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다 사진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시를 지으면 소설가나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특정의 절차에 따른 문단의 등단으로 작가의 이름을 얻는다. 사진작가도 일정의 절차가 있다.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사)한국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됨으로써 사진작가의 이름을 얻는 방법이다. 소정의 입회 자격 요건을 갖추어 이 협회에 등록을 신청하면 일정의 심의를 거쳐 입회를 허락하고 사진작가 이름을 붙여준다. 협회가 인정하는 사진강좌 3회 수료가 필수이고 공모전(촬영대회 3회 이상 필수)에 출품하여 입선(1회 2점)이나 입상을 하여 얻은 점수나 기타 공모전이나 개인 사진전시회 개최 등으로 인정하는 점수가 제시하는 점수에 다다르면 된다. 자세한 내용은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사한 기관으로 한국디지털사진가협회도 있고 이곳에서도 사진가 명함을 달 수 있는 길이 있다. 취미 생활에서 그런 제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어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듯이 남과 차별화하거나 전문가 자격을 갖추는 일은 곧 자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일이다. 요즘은 자격과 인증의 시대다. 자격증과 인증서를 갖는 것도 자신의 경력을 쌓는 중요한 일이고 자기의 쓰임새를 키우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카메라 장비도 예전과 달리 싸면서도 편리하게 만들어져 사용하기가 편해졌다. 사진작가 도전이 어렵지 않다. 사진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주변에 많다. 후반생의 새로운 여가활동으로 한번 도전해 봄도 좋지 싶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진정성을 헤아리기보다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남의 집 창문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러나 야학 시절 우리 가족을 가장 살뜰히 사랑해주셨기에 지금도 필자에게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긴 청춘의 빛깔 고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본다.
“얘 네가 뭐 잘난 게 있다고 J선생님께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니?”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그것도 모르고….”
요즘 만나는 야학 동급생들은 우연히 화제에 오른 J선생님 얘기를 하다가 필자를 무차별 공격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지 않는가.
라는 책 제목처럼 필자도 연애감정의 알파와 오메가를 10대인 야학 시절에 이미 다 터득했다. 순수한 선생님으로서 보여준 사랑이었는지, 약간은 감정이 있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당시 필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J선생님께 차갑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를 J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가난 때문에 다니게 된 야학교였지만 필자는 그 시절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선을 만났고 그 감동은 단지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필자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이 돼줬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든 것에 우선한 아름다움이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라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야학 시절 그런 분들을 알았기에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한두 분도 아니고 몇십 분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달빛이 교교한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길섶 댑싸리에 내려앉은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달콤 상큼했다. 그날은 야학 수업이 끝난 뒤 J선생님이 필자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지만 당시 서울대 농대생들은 날이 선선해지면 감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슴에는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다들 어려운 때라서 사복 입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들어가기 힘든 서울대 교복이었으므로 상당한 애착 내지는 긍지도 있었을 듯싶다.
우리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J선생님은 교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필자에게 내미셨다.
“애란아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너 가져라.”
“싫어요.”
그 시절 겨우 연필 아니면 볼펜 정도나 쓸 수 있었던 필자로서는 쉽게 갖기 힘든 필기구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라.”
“싫어요.”
“제발 받아라.”
싫다는데 계속 받으라고 하자 짜증이 나버린 필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다니까요.”
몇 번 그렇게 거절하자 J선생님은 그만 땅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바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만년필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던 교교한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맙소사!’
순간 필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송해서 얼른 두 손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제자인 필자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온 뒤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달빛이 노니는 마루 끝에 앉아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었다.
‘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황홀한 밤이었어!’
그 후 필자는 두고두고 그날 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17세 때였고 어느덧 3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달빛이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운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추억이여!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만 시퍼렇게 돋아 있는 제자의 속내를 최대한 배려해주신 J선생님. 현실 속에서는 비록 비참한 신분일망정 상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고한 공주였던 필자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날 기꺼이 최초의 기사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며, 필자만큼 환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공은 단연 J선생님이다. 이 로맨틱한 멋진 기사님(?)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난 6월 22일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는 계간 문학잡지 제 13회 신인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의 회원인 손웅익씨가 수필가로 등단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한마디로 겉모습도 속마음도 잘난 남자들을 좋아한다. 지휘자 중 가장 좋아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외모 자체가 명품이다. 이에 버금가는 손 수필가님도 외모가 근사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올린 그의 글들이 정말 훌륭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학자인듯 싶은데 예술가이고 사색가인 듯싶은데 수필가이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깊이가 있고 예술가의 향기가 배어있다. 내 평생의 변함없는 친구는 문학과 클래식음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문장들, 글들을 접해봤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수필가님의 글은 애저녁에 기성 수필가의 필력이었다. 문학지 어디에 실려도 모자람이 없는 빼어난 문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완전 반전이었다. 그의 글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고생하고는 거리가 먼 귀공자같은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가 청소년기에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혹독한 IMF시절을 겪어낸 과정을 읽는 중에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지고지순한 사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사모님께 ‘깨갱’ 꼬리 내리고 살아야만 한다.
여차하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겨우 살려 놓으니까 은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할 것이다.
인재는 키우는 것이다. 봄날에 손 수필가님께 구체적으로 심사방법을 알려드리고 작품을 출품하실 것을 권유 드렸다. 이쁜 남자는 이쁜짓만 골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작품을 내었고 일사천리로 작품심사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리풀 문학회는 서초문화원에서 신길우 교수님께 수필지도를 받고 있는 문하생들의 모임이다. 그 문하생들도 수강한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직 등단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의 심사에 통과된 것은 엄청난 실력자인 손수필가님이 일궈낸 쾌거였다. 그가 수필심사에 통과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이 연상되는 건 뭐지? 에디뜨 삐아프는 어렸을 때의 극심한 영양실조로 실명할뻔 했고 키가 142센치밖에 안된다. 불우한 환경 속에 내팽개쳐졌던 에디뜨 삐아프는 갖은 고생 끝에 가수로 성공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삐아프가 뼈아프게 키워낸 남자들은 성공한 후에는 하나같이 그녀 곁을 떠나갔다. ‘내가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ㅋㅋ’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의 관계는 애정이고 손 수필가님과 애란이는 우정이다.
등단 후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얘기에 나는 속으로 ‘앗싸라비아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필자는 그가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다.’ 큰의미를 두지 않는줄 알았던 것이다.
시상식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참석했고 ‘세컨드 같은 퍼스트’인 손 수필가의 애잔하고 어여쁜 사모님이 동석하였다. 맞다! 유유상종이다. 미남미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잘생긴 장남도 함께 하였다.
그의 수상작 과 은 사랑스러운 사모님과 얼마나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러사람에게 입이 아프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부정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겉모습도 영혼도 아름다운 손 수필가님의 곁에는 늘 행복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달아나다가도 멋진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지난 3개월 동안 흥미진진한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제 그 막을 내리면서 ‘워너 원’이라는 남자 아이돌그룹이 만들어졌다.
매주 금요일 밤 11시에 시작하여 거의 새벽 1시경까지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 시니어에는 관심 밖의 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매우 늦은 시간임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석 달 동안 이 프로그램을 챙겨 본 이유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꼭 재미있었다기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꿈을 이루려는 청소년들의 일상과 땀과 노력을 보면서 때론 가슴 아프게 때론 흐뭇한 애틋함을 느꼈다.
작년에는 ‘시즌 1’ 으로 여자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져 호평을 받으며 활동 중이다.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중 소 연예기획사에서 연습생이라는 이름으로 열정을 쏟는 아이들 101명을 참가시켜 그들의 합숙하는 일상과 부여된 주제에 맞추어 안무를 짜고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을 시청자에게 보여준다.
101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에서 마지막에 단 11명만이 살아남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1명을 뽑는 방식은 국민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시청자의 몫이다.
시청자가 TV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연습생에게 전화로 문자 투표를 하고 높은 득표대로 순위가 매겨지는 방식이다.
매번 순위가 바뀌는 이변도 일어나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투표를 받지 못해 초조해하거나 낙담하는 어린 소년들을 볼 때마다 필자는 실눈을 떴다. 안타까워서 바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로는 15살이 있었고 보통 17세에서 20대, 몇 명은 20대 후반까지 참가한 연습생은 다양했다.
한 명 한 명 모두 필자 눈에는 훌륭한 가수가 될 소질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기도 하고 같은 팀으로 묶여 협동해야 하는 과정을 통해 우정과 기쁨 실망을 맛보고 있다.
경쟁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니 연습생들의 모습은 희망적이고 예쁘기만 하다.
첫 번째 평가에서 101명 중 31명이 탈락하고 70명의 아이가 남았다.
두 번째 평가에서는 35등까지만 살아남았다.
세 번째에서 20명의 아이돌 후보가 가려지고 마지막에 단 11명만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보이는 가족과의 이야기 각자의 꿈과 포부 등은 필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정도로 애틋한 감동이었다.
평가를 받을 때 단상과 단하로 나뉘어 호명되는 아이들만 단상의 의자에 앉게 된다. 그때마다 그 아이들과 아무 연고도 없지만, 필자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움에 탄식이 났다.
호명되어 기쁘게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볼 땐 미소가 떠오르지만, 호명을 받지 못하고 단하에 남은 아이들을 볼 때 눈물이 났다.
그 아이들이 한 사람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얼마나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를 간절히 원할까를 생각하면 필자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듯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인생은 경쟁이다. 그 소년들도 잘 알 것이다. 그들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잔인하고 살벌한 오디션장에 나섰고 여기에서 실패해도 다시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 오디션, 20명에서 11명만이 남는 시간이 왔다.
국민 프로듀서라 불리는 시청자의 전화 문자투표수가 천만을 넘는다고 한다. 정말 많은 사람이 자신이 선호하는 소년에게 투표했다.
필자도 연필과 종이를 준비해 20명 중 11명이 누가 될지 미리 적어보았다.
아슬아슬한 진행으로 순위가 발표되었는데 내가 점찍은 11명 중 9명이 최종 아이돌그룹으로 선택받았고 꼭 선택받을 줄 알았던 연습생 세 명이 탈락했다.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게 된 소년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탈락해 아쉬운 연습생 모습이 교차하며 비치니 그 또한 필자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린 나이에 쓴 좌절을 느꼈을 어린 소년들에게 이것이 끝이 아니니 더욱 노력해 너희의 꿈을 이루라고 격려를 보내고 싶다.
건강하고 풋풋한 소년 11명이 ‘워너 원’이라는 이름으로 활약을 하게 되었다.
데뷔의 꿈을 이룬 소년들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탈락한 소년들에겐 응원을 보낸다.
멋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참 예쁜 대한민국 소년들이다.
‘애란이도 이젠 시집가야지’
그날 3학년 교실에서 목에 힘을 주시며 필자에게 이 말을 하신 분은 열일곱 살인 필자보다 한 살 더 많은 조봉환 선생님이었다. 순간 나는 속이 상해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필자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선생님의 잔인함이 미워서였다.
훤칠한 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용모, 목소리까지 좋았던 조 선생님. 싱긋 웃으며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농담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필자가 상처를 받은 것은 선생님에 대한 필자의 심상치 않은 감정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 도중 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더니 옆에 계신 아줌마가 조심조심 물으셨다.
“얘 너 왜 우니?”
대답을 하지 않자 또 다른 아줌마가 말했다.
“아마 설교 말씀에 감동해서겠지 뭐”
천만에 말씀. 그날 내가 운 것은 동생 연희 때문이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동생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가 언니 편지에서 우표를 떼었어, 우표 수집하려고.”
“말도 안 돼. 내 편지에 손을 대다니!”
선생님들의 편지를 보물처럼 아끼던 필자였다. 더군다나 조 선생님의 편지를?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분명히 필자의 가슴 한 자락을 차지하고 계셨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조 선생님은 그해 어느 날 어머니께 매를 맞았는데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어라.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어머니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매를 맞다 견디지 못하고 기절까지 하셨다는, 필자 못지않은 고집쟁이 선생님이었다.
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아리랑’의 가사를 이렇게 풀이해주셨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서 나한테 다시 돌아와라’가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 리도 못 가서 죽어버려라’라고 해야 한다.”
내게서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하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미가 여리고 정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라서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필자도 모르는 사이 그 말씀이 점점 와 닿았다.
훗날 조 선생님은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도록 그렇게 강인한 의지 내지는 투지를 의도적으로 심어주려고 그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의 의도대로 필자는 강인함을 잘 키워나갔던 것 같다.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조 선생님이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등을 낭송하실 때면 그멋진 모습에 푹 빠져들곤 했다. 금상첨화라고 조 선생님은 잘생긴 용모에 목소리도 일류 성우 못지않았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킹카였다.
필자는 혼자서 가슴을 태웠다. 그런데 어쩌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고 필자는 정규 중학교도 못 가서 야학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녀였으니…. 필자가 만들어낸 동화에서는 필자가 공주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필자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필자는 그때부터 아성을 굳게 쌓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자존심을 부르짖으며 상처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야학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 각별한 만큼 우리들 가슴속에 피어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도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불운했던 10대에 야학 선생님들과의 신분상 장벽은 필자의 삶에서 결정적인 아픔이었고 상처까지 됐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근무하고 있던 평택여고 교무실에 학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한 총각 선생님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얼굴이 울퉁불퉁 민주적으로 생겼거나 키 작은 분이라도 총각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껌뻑 죽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필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필자의 야학 선생님들처럼 맑은 눈망울, 해맑은 표정의 선생님이 오신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그 상상만으로도 혼자 즐거울 때가 있다. 아마도 몇 명쯤은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속없이 외모만 잘난 남자처럼 경멸스러운 대상이 또 어디 있을까? 개성도 없고 평범한 용모의 필자는 순수하고 인품이 있으면서도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B선생님과 조 선생님은 야학 선생님들 중에서도 용모가 영화배우급으로 수려했으며 키도 훤칠했던 멋진 분들이었다. 또한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인품이 단연 돋보였다.
당시에는 신분상의 갭을 느끼며 가슴 아파했는데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필자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커버해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만 가슴속에 넣어두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없었던 필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 동경의 대상으로 모셔놓고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은 후 슬픔에 빠져 있기를 즐겼던 것이다. 그렇게 흠모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필자에게 품고 있는 고운 감정에는 아예 장님이 되어 깨닫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까지 주곤 했다.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 또한 소중한 것을 몰랐던 시절이다. 정신적 미숙아였던 것이다.
1993년 1월, 여의도에 있는 주택은행 본점을 찾았다. 조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야학 시절에는 몸이 마르신 편이었는데 적당히 살이 붙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25년 만에 뵙는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도 필자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다. 단 1년 동안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절을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선생님 가슴속에 꼭 간직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필자가 10대에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맺힌 한이 너무 많다고 하니까 “가난한 것이 그렇게 불편한 거였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당신도 가난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을 몰랐다며, 당시 야학 선생님들도 대부분 어려운 처지였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은 당시의 야학활동이 ‘베풀고, 나누고, 사회에 동참한다’는 의미였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홀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하시며 사셨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중․고교 때의 교복도 늘 남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기 때문에 옷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교복 모자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오면 먼지를 ‘툭툭’ 털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이렇게 오랜만에 뵙기 전까지는 선생님 댁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인 줄 알았다가 새삼 당신도 그렇게 어려운 처지였음에 놀랐고 그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셨다는 데 대해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은 그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고통을 많이 겪으신 선생님의 원숙함과 철학의 깊이에 필자의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 조 선생님은 졸업식 날 집까지 데려다준 우리들이 다시 야학에 와서 선생님들을 붙잡고 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셨다.
슬픔마저도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
서로가 애틋했던 시절의 소중하신 우리들의 선생님이시여.
발트 3국을 가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에서 12시간 비행하여 이스탄불에 도착한 후 환승하여 다시 3시간 반을 더 가서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작은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과 6시간 늦은 시차라서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못 잔 사람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출입국 심사는 좁은 대합실에 승객들을 몰아넣고 한 시간이나 걸렸다. 자동입출국 시스템이 있는 인천공항에 비해 한참 후진국 형 시스템이라며 투덜댔다. 인천에서 밤 12시에 출발한 비행기였으므로 빌뉴스에 도착하니 아침 시간이라 호텔 체크인도 못하고 막 바로 관광에 들어갔다.
리투아니아의 첫 인상은 다른 유럽국가와 별 차이는 없었다. 현재 수도인 빌뉴스, 그전 수도였던 트라카이,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카우나스를 둘러보면서 세 도시 공통점이 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은 역시 돌로 만든 석조건물들이 많아, 오래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구 시가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입구에 ‘새벽의 문’이 있다. 빌뉴스의 구 시가지는 서울 성곽 같은 성곽이었는데 서울의 숭례문처럼 여기만 남아 있다고 했다. 성 오나 성당, 버나딘 성당, 빌뉴스 대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등 성당이 많이 남아 있다. 카우나스에는 독일군 침공을 막기 위해 축조한 카우나스 성, 중세에 지어진 구 시청사, 그 외 고딕양식의 집들이 볼만 했다. 트라카이에서는 호수 가운데 위치한 고성이 볼만했다.
가장 인상적인 관광지는 라트비아와 국경 지역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이었다.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나지막한 언덕에 놓여 있다. 5만개라는 설도 있고, 10만개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온통 십자가이다.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므로 희생자도 많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글자가 써져 있는 걸 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다. 무덤이 따로 없고 십자가만 그렇게 모여 있다.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그랬지만, 산이 없다. 한참을 가도 양쪽으로는 자작나무와 키가 큰 리기다소나무가 줄지어 있고 길가에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도로도 고속도로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그래도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으니 이동시간은 도시간 거리가 길어야 약 2시간 정도 걸렸다.
유럽 관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다. 가끔 무료 화장실도 있지만, 대부분 유료 화장실이다. 30센트에서 50센트 종전을 따로 준비해 가야 한다. 단체 버스로 가면 한꺼번에 내리므로 여성들은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매우 불편하다.
발트 3국의 특징에 대해 이미 갔다 온 사람들 얘기가 멋진 남자와 여자들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보니 피가 많이 섞여서 그렇다는 해석이다. 과연 좋은 체형에 옷도 깨끗하게 입으니 볼만했다. 다만 인구가 적다 보니 그곳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침 백야의 시즌이라 낮이 길다. 밤 9시면 해가 아직 서쪽하늘에 떠 있고 밤 12시가 넘어도 해가 어스름할 정도라서 관광에는 좋았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분위기가 있다.
안개처럼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주어 아득한 바다가 마음을 더 흔든다. 그리고 빗방울 송골송골 맺힌 초록의 만좌모 벌판이 눈에 가득 들어와서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바다까지 보여주니 더 말해 무엇하리.
눈 앞의 바다에선 유유자적 뱃놀이도 한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멋진 리조트에서 쉬며 제대로 휴식하면 더 좋겠다. 그 드넓은 바닷가 들판에 들꽃과 기암괴석도 함께 한다. 필자의 만좌모 여행은 여기까지가 좋았다.
이런 절벽의 바위 하나 보러 무더위에 예까지 올 일인가 싶었다. 물론 기나긴 세월 속에 침식된 코끼리 형상은 볼만하지만 엄지 척 올려주고 희귀한 비경에 탄성을 지르며 강추할만한 곳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그대로 만좌모답게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일본 오키나와현. 코끼리의 코 모양으로 침식된 류큐 석회암의 단애와 그 위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 류큐왕 쇼케이가 '만 명이 앉아도 충분한 벌판'이라고 하여 만좌모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오키나와의 나하공항에서 만좌모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여 걸리는 거리다. 나하의 버스터미널에서 운행되는 버스로는 약 1시간 반정도 걸린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풍경에 신나기도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전환도 하면서 가끔 느끼는게 있다. 어딘가 느낌이 비슷하게 연상되고 비교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좌모의 코끼리 바위를 보면서 몇 년 전 에서 보았던 절벽이 생각났다. 마치 빠삐용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탈출을 꿈꾸던 곳일 것 같은 절해고도의 그곳. 그곳에서 남태평양을 경관을 바라볼 수 있고 오랜 침식과 퇴적으로 겹겹이 형성된 틈이 많이 생겨서 갭(gap) 바위라고도 한다는 곳. 그 두 곳이 겹쳐져서 생각나는 바위였다.
만좌모를 떠나 아메리칸 빌리지로 가는 길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파인애플도 먹고, 파인애플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이것저것 둘러보며 느릿느릿 놀다 쉬다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하에서 직접 아메리칸 빌리지로 가려면 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는데 40분 정도 걸린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80년대 초 까지 미군시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이런 특성을 살려 면세점 등의 상권이 형성된 곳이어서 지갑 두둑하신 분이라며 여행가방에 담아올 만한 것들이 좀 있다. 누구라도 눈에 들어오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상징인 대관람차는 일본 영화에 나와서 유명세를 탔고 멋진 저녁노을을 볼수도 있어서 인기다. 그 옆으로 있는 선셋 해변을 즐길 수도 있고 쇼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곳에서 다리를 쉬면서 저녁을 먹었다.
예쁜 집들도 많고 미군들이 주둔했던 곳이어서인지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아 나는 vegetable curry를 먹었다. 구운 가지와 채소가 듬뿍 들어있어서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고 맛도 good~. 파스타에도 아낌없이 해산물이 올라있어서 이 또한 좋았다.
내내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했던 여행자의 하루가 간다. 점점 검푸른 밤이 내린다.
머릿속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놀았던 하루. 여행이 주는 효과가 이런 게 아닌가.
뒤엉킨 머리를 말끔하게 헹구어서 돌아오는 것.
다리(橋)로 유명한 곳은 많다.
건축공법이나 조형미로, 또는 긴 길이로, 휘황한 조명으로, 전통미나 주변의 멋진 풍광으로, 전설 또는 유명한 사연이 있거나 하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 오키나와 북부의 고요한 섬에 바다색이 이쁘고 길고 긴 다리로 알려진 코우리 대교 (古宇利大橋)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내가 보았던 고우리 대교는 1960m의 기다란 길이가 여행자들을 달려보고 싶게 한다.
그런데 코우리지 섬과 본 섬을 잇는 중요 역할도 있었고, 오르막 내리막의 언덕이 있는 약 2Km의 다리여서 시원하고 멋진 풍경을 바라보기에 최상이라는 면도 많이 어필된 것이다. 게다가 근래에는 공효진과 조인성의 드라마에서 멋진 드라이브 씬으로 유명해져서 한국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리 아래 펼쳐진 양쪽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마치 남태평야 어딘가를 연상하게 한다.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서 푸르른 하늘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는 청정한 색감의 여름바다였다.
이제는 다리(橋)가 예전의 강 건너 저 편으로 건너는 수단에서 보고 즐기는 감성의 역할도 포함된 지 오래다. 코우리 대교도 그런 이유로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교량의 미적 감각과 현대인들의 심리를 어루만지는 스피드나 풍광이 빠질 수 없는 중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 남부에 숙소를 두고 북부로 두 시간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남국의 어느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자동차로 달리면 2분 정도의 거리인 코우리 대교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 속 깊은 곳의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듯하다. 야자수 나무가 가로수길이기도 하고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과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햇빛 느낌도 우리의 여름과는 다른 뜨거움이 있다.
다리를 건너 차에서 내려보니 해변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그 바닷가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어딜 가나 셀카놀이도 흔하게 본다. 젊은 청춘들의 발랄한 모습들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덥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간간히 바닷바람이 분다. 아직은 조용한 바닷가, 연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 좋은 곳이다.
근처엔 파인애플이나 곡류, 비치웨어 등을 파는 가게도 있고 푸드트럭엔 먹음직한 시푸드들이 군침 돌게 한다. 약 1000엔 조금 넘는 새우요리가 유명하다고 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근처의 풀빌라나 전망 좋은 숙소에서 며칠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을 힐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거길 나오며 천천히 돌아보고 나오니 길고 긴 다리는 막 시작된 여름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쭉 뻗은 다리 위를 달리며 양쪽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언제든 다시 한번 달려보고 싶은 고우리 대교다.
코우리 섬 古宇利島(고우리도)는?
일본 오키나와현 나키진 무라[今歸仁村]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3.12㎢다
일본 오키나와 섬의 북부, 모토부 반도[本部半島] 동안(東岸)에 있는 운텐항[運天港]에서 연락선으로 약 10분이 소요되는 시오야만 [塩屋灣] 입구에 위치한 섬이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