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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를 위하는 게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다
- 필자가 잘하면 세상살이가 다 잘될 줄 알았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필자가 모범을 보이고 반듯하게 살아가면 저절로 식구들이 따라오고 가정은 화목하고 만사는 형통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필자가 정한 룰(rule)대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니 필자만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입을 닫아버린 아내와 반항하는 아이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젊었을 때는 몰랐다. 그러던 중 필자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후배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되었다. 건설회사에 다니던 후배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다가 큰 결심을 하고 야간 대학원에 진학했다.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도 받고 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전직하면서 안정적인 직장도 얻었다. 야간에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로도 뛰었다. 후배이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진정 존경스러웠다. 당연히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멋진 남편이자 자랑스러운 아빠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아빠를 보고 자라는 자식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 또한 상위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후배 부인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풀이 죽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이들은 눈만 뜨면 공부만 하는 아버지 모습에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내도 남편이 가족들과 외식 한 번 하지 않고 놀러가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공부하는 모습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했다. 남편이 존경스럽다가도 어느 날은 답답해서 책을 불살라버리고 싶은 충동도 든다고 했다. 뛰어난 선수는 훌륭한 코치가 되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나는 해냈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하고 선수를 질책해서 선수들이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본받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다그치기만 했다. 결국 아이들은 밖으로 나돌았고 아내는 중간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늘 노심초사했다. 후배는 공부에 흥미가 없는 자식의 마음을 못 읽었고 아내의 마음도 얻지 못했다. 결국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는 데는 실패한 가장이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해도 즐겁지 않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가장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짐승들의 수컷은 씨만 뿌리지 새끼는 돌보지 않는다. 원래 좋은 아버지란 없다. 좋은 남편이 좋은 아버지다. 자식에게 잘하려 하지 말고 아내에게 잘하라는 말이 있다. 아내도 따지고 보면 남이다. 남에게 존경받으려면 남을 섬겨야 한다. ‘크려거든 남을 섬겨라(慾爲大者 當爲人役)’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아내로부터 존경받고 대접받으려면 아내를 먼저 섬겨야 한다. 필자는 아내를 섬기기 위해 세 가지에 주안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다. 이것이 가정의 화목은 물론 필자도 돌보고 있다. 첫째, 아내를 항시 앞에 내세운다.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 해도 식성은 각자 다르다. 필자와 딸은 바닷고기인 회를 좋아하지만 아내와 아들은 소고기 같은 육지 고기를 좋아한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또 달라진다. 외식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메뉴를 통일하기가 어렵다. 이럴 때 필자가 가장이고 돈을 내니까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필자는 무조건 아내를 앞세운다. 아버지의 권위로 자식들에게 한마디 한다. “너희들은 젊다. 앞으로 좋은 것 먹을 기회는 많다.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것으로 음식을 정하자.” 필자를 따르라고 했으면 독재 운운하며 뒷말이 나왔을 테지만 아내를 앞세우니 뒷말이 없다. 그러면 아내는 미소 지으며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택한다. 명분과 권위는 아내가 가졌지만 실리는 필자가 챙기는 것이다. 이렇게 아내의 권위를 세워주면 아내는 필자의 배려에 화답하듯 “아버지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하자”며 이번에는 필자의 권위를 세워주려고 애쓴다. 둘째, 아내의 돈 씀씀이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아내는 집에 새 그릇이 넘치는데도 백화점 쇼핑 중에 예쁜 그릇을 발견하면 사고 싶어 안달한다. 예전 같으면 ‘NO'라고 단호하게 말했겠지만 지금은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이왕에 샀다면 잘 샀다고 오히려 칭찬을 해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선물로 주라고 조언만 한다. 좋은 물건을 갖고 싶어 하고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여자들의 본능이다. 아내는 쇼핑 중독자는 아니다.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소비라고 생각하고 구입하는 것인 만큼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고 상책이다. 필자가 못 사게 한다면 아내는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남편에게 들키고 야단맞을까봐 숨기고 가계부를 조작할지도 모른다. 가족 구성원이 비밀이 많으면 가정은 불안해진다. 지키는 사람 열 명이 도둑 하나 못 막는다는 옛말이 있다. 이럴 바에야 아내에게 사고 싶으면 사라고 한다. 셋째, 아내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 부부간의 충돌은 대부분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말하고 싶은 여자와 듣지 않는 남자가 있다. “여보 이 옷 입고 갈까, 저 옷 입고 갈까?” 아내는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하고서도 필자의 의견을 묻는다. 이럴 때는 눈치를 봐가며 맞장구만 쳐주면 된다. 솔직히 내 눈에는 그 옷이 그 옷이다. 학교 동창회 다녀와서는 필자가 모르는 친구들 이야기를 재잘거린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을 왜 필자에게 하는지 짜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참고 들어준다. 아내가 하는 말 중간 중간에 추임새만 넣어주면 만사 오케이다. 아내가 콧노래를 부르고 말이 많아진 날은 기분이 좋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나이 들어 두 식구만 사는 집에 한 사람이 기분 좋으면 나머지 사람의 기분도 따라서 좋아진다.
- 2016-11-2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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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스타들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 2016-11-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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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곁살이를 통한 ‘나 가꿈 나무’
- 필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지만 8세부터는 경기도 수원에서…” 자랐다.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대답이 나와버린다. 그럼 한결같이 “수원이 제2의 고향이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필자는 그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낯선 서울생활에 조금씩 적응했고 직장생활과 결혼생활도 서울에서 시작했다. 작은아이를 결혼시키고 나서 단출한 필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홀가분함이란! 몇 달을 편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다 보니, 수원에 혼자 계시는 친정어머니가 자꾸 눈에 밟혀오기 시작했다. 더하기 빼기 열심히 해가며 고민을 했다. 팔십 중반이 넘으셨으니 혼자 생활을 하실 수 있는 기운이 있으셔도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한 연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필자를 괴롭혔다. 조심스럽게 옆에서 살겠다는 얘기를 꺼내자 예상했던 대로 절대 걱정 말라 하신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자꾸 넘어지고 다치셔서 필자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감기도 자주 들고 고혈압도 염려가 되었다. 어느 여름, 며칠을 누워 일어나지 못하며 지내시는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의논을 했고 드디어 어머니 곁살이를 하기 위해 수원으로 이사했다. 모녀 관계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보다 더 어렵다는 주위의 말들을 무시하고 약간의 짐을 싸서 이사했다. 친정어머니 곁살이를 시작하면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 다짐한 것들을 되새겼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필자의 마음 판에 적어놓고 되풀이해서 읽으며 수양하듯 지냈다. 어머니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서로 익숙하고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지만 필자가 결혼해서 따로 떨어져 사는 동안 몸에 밴 또 다른 가족문화가 있었다. 그걸 서로가 배려하고 이해해가며 극복해야 했다. 그래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집과 고집의 범벅은 정말 맛이 없었다. 내 맛과 네 맛의 상이한 맛들이 늘 독이었다. 툭하면 입을 닫아버리는 어머니의 고집에 필자는 모든 것을 어머니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생각을 바꿨다. 이제부터 무조건 웃는 거다! 그리고 잘 관찰하는 거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필자가 보였다. 거기에는 어머니처럼 나이 들어가고 있는 필자가 있었다. 멋진 발견이었다. 필자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근사한 필자만의 브라보 시니어로서의 발돋움을 위해, 친정어머니를 아주 좋은 모델로 삼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저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이렇게 실천하면 이웃들이 즐거워하겠네, 이런 말투와 행동은 버리자 등등.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연습을 했다. 어머니와 갈등이 있어도 고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또 서로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친정어머니를 내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웃 어르신 대하듯 행동했다. 모녀지간이라는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에서 벗어나 조금은 감정을 덜어내고 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머니 곁살이를 통해 일반적인 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자 아름다운 시니어가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고 행복이 오리라는 확신도 섰다. 그러다 보니 비로소 필자 스스로를 돌아보는 여유도 생겨났다. 이제 필자는 모든 면에서 골고루 멋지게 커져가는 가꿈 나무를 심게 되었다. 어머니의 곁살이는 ‘나 가꿈 나무’의 영양분으로 최고다!
- 2016-11-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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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인생] ‘산에서 살으리랏다’ 귀산촌을 아시나요?
- “산에 들어가 살아야지.” 중년이라면 한 번쯤 무심코 내뱉어봤음직한 말이다. 산속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면 멋진 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새벽의 신선한 찬 공기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볕. 통나무집 식탁 위에 차려진 신선한 음식.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현장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귀산촌은 냉정한 현실이라고. 영화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산촌이 갖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제대로 알고 도전한다면 귀농보다 더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살 수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귀산촌을 알기 위해서는 개념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귀산촌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이 사유림을 구매하거나, 갖고 있던 사유림을 활용해 임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귀산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사유, 즉 내 산(山)이다. 기존에 임업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귀산촌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산주가 되는 것뿐이다.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생각해보자. 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 움막이나 텐트를 짓고, 수렵이나 채집을 하며 원시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산에서 생활하며 올릴 수 있는 소득과 내가 살 집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행히 이런 고민, 특히 소득과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있다. 바로 산림조합이다. 농촌에 농협이 있고, 어촌에 수협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산림조합이 있다. 한때는 임업협동조합, 임협으로 불렸던 기관이다. 산림경영계획과 정부의 다양한 지원책 임업 분야에선 산을 활용해 수익을 내는 행위를 ‘산림경영’이라고 말한다. 내 땅을 어떻게 가꾸고, 어떤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어떤 시설을 지을지는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땅의 종류에 따라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비닐하우스와 같은 생산 시설도 허가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또 국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지원을 받으려면 산림경영계획이 필요하다. 또 전문가도 아니면서 계획 없이 무턱대고 덤비다가는 수익은커녕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귀산촌을 위해 땅을 사기 전에 미리 임업 전문가와 산을 둘러보고,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사업이 적합한지 조언을 받으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산림조합중앙회 선도산림경영지도 팀의 민도홍 팀장은 귀산촌에 필요한 준비 과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그것을 산림경영계획이라고 불러요. 10년 단위로 수립한 산림경영계획을 산림청에서 인가받게 되면 산립사업비 보조나 융자를 지원받고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재산세 등을 감면받을 수 있어요. 숲을 사업적으로 가치있게 만드려면 솎아베기와 같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산림경영계획을 인가받으면 정부와 지자체 지원만으로 할 수 있게 돼요. 이 밖에도 다양한 지원책들이 있는데, 결국 혜택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려면 산림경영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좋습니다.” 임업을 통해 수익을 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나무를 심은 뒤 목재가 될 만큼 자라면 벌목해 판매하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관련 법규상 벌목할 수 있는 시기는 수종에 따라 30년에서 40년이 걸린다. 게다가 수익도 그리 크지 않아, 1ha당 200만~300만원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부수익’이라 말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버섯이나 나물 등 단기 소득 작물을 키워 판매하는 것이다. 산지축산이나 양계도 수익 방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정부와 산림조합에서는 농·임업인들의 소득 확대를 위해 6차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임산물이 생산되면 이것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가 생겨날 수 있도록 가공하고, 그 과정을 체험관광 형태로 관광객들에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체험형 농장이나 숲해설 프로그램, 숙박을 결합한 레저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땅을 살 때 고민해야 하는 것들 내게 어떤 임산업이 맞는지,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를 충분히 고민했다면 땅을 알아볼 차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임지를 구매할 때 ‘경매’를 통한다. 경매 물건을 둘러보다가 괜찮은 땅이 나오면 누가 먼저 가져갈까봐 급한 마음에 덜컥 구매 결정을 내려버리기도 한다. 파주시 산림조합의 백철종 팀장은 가격만 보고 땅을 결정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간혹 어떤 땅인지, 거기서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고민도 없이 땅을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평당 몇 만원이라면 공짜나 다름없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땅을 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맹지(길이 없는 땅), 골짜기 같은 땅이었다며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죠. 반대로 잘 알아보고 산다면 지적도 상에는 길이 없지만 실제로는 이전할 일이 없는 군부대가 사용하는 길이 있어 사실상 활용에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죠. 결국 본인이 현장을 충분히 확인하고, 그 땅을 사서 무엇을 할 것인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는 귀산촌을 위해 땅을 알아보고 있다면 여러 후보지를 놓고, 그 지역 산림조합을 찾아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내려오는 경우는 농가주택과 주차장 부지도 함께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평균 경사도 18° 미만의 준보전임지가 좋고,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농지가 붙어 있는 임지가 적절하다고 말했다. 도시생활 방식 답습하면 실패 정착도 문제가 된다. 귀산촌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속에 나 홀로 사는 삶이 아니다. 결국 기존의 거주민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느냐가 귀산촌의 성패를 가름한다. 거주민과의 불화는 전문가들이 꼽는 귀산촌 첫 번째 실패 이유다. 백철종 팀장은 거주민과의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마을과 붙어 있는 산은 그 마을의 공동 소유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산을 샀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측량이에요. 여기까지가 내 땅임을 확실히 구분하고 싶으니까요. 그러고는 울타리를 세우고 CCTV까지 달아요. 그러니 곱게 보기 어렵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들이 울타리가 되고, CCTV가 되어줍니다. 임산물로 소득을 올리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합 작목반에서 공동으로 활동하면 국가의 생산지원 예산배정 순위가 빨라지고 판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활동하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해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죠.” 표고버섯 농사를 예로 들면 경작을 위한 원목부터, 비닐하우스 시설, 포장디자인 지원, 차량 구매, 건조시설과 저장창고까지 국고 지원과 융자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배정된 예산이 한정되어 있고 우선순위가 있어 지역 내에서의 활동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수익은 어떨까? 민도홍 팀장은 산으로 얻는 수익은 유·무형의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떼돈을 벌 목적이라면 귀산촌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도 가능하고 실제로 고소득을 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은퇴자들 입장에선 등산이나 휴양을 즐길 수 있는 환경적 요인, 나무와 같은 후대에 산을 활용할 수 있는 가치, 산림을 개발해나가는 보람 등을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 2016-11-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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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최 부잣집 가훈
-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주를 한 번쯤은 가봤을 것이다. 필자도 30대에 경주를 가봤다. 잘 보존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각종 유물과 시가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왕릉은 신기함을 넘어 필자를 무아지경으로 몰고 갔다. 시니어가 되고 나서도 1년에 한 번쯤은 찾아가고 있지만 웅장함과 신비스러움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경주에서 지진이 난 후에 찾아간 유적지는 매스컴에서 방송되는 사실들과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일부 흙담이 진동으로 갈라지거나 떨어진 곳도 있었고 오래된 건물 지붕의 기와도 흘러내린 곳이 있었으나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해마다 가을 단풍이 물들 때면 경주 시내와 유적지는 밀려드는 차량과 여행객들로 혼잡했고 식당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 여파인지 이번에는 문화 유적지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해설사의 열띤 언변에 도취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보문단지를 지나 교리 한옥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도보로 교촌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서도 문화해설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교리 김밥집도 여행객이 없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21세기의 최 부자로 살아가기’라는 스토리가 있어 최 부잣집을 둘러보았더니 최 부잣집의 가훈이 눈에 들어온다. 1.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 흉년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부자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부를 축적하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인 것 같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반드시 끝이 있다. 그러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다 같이 행복한 아름다운 사회가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 시니어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시대에는 과객(나그네)이 부잣집에 들르면 며칠씩 혹은 몇 주일씩 묵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운송수단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과객을 통해 전국의 중요한 정보도 얻고 또 전국의 여러 곳에 그들의 인심을 전달해 중요한 일이 발생했을 때 좋은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단다. 최 부잣집에서도 1년에 소비하는 쌀이 3000석 정도였는데 그중 1000석은 과객을 대접하기 위한 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듣기도 하고 글을 통해 보기도 했을 텐데 베풀기에도 인색한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좀 묻고 싶다. 우리 시니어들은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여생 동안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봉사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으로 생활한다면 좀 더 멋진 노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2016-11-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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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나를 돌보기 PART1] 자기다운 삶은 '비교급'이 아닌 '절대급'으로 사는 것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욘사마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시청 앞 광장과 남대문시장 그리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걷다 보면 배낭을 메고 지하철 지도를 손에 든 채 어설픈 한국어로 길을 묻는 중년의 일본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도 아니고 40대를 훌쩍 넘은 중년 여성들이 왜 욘사마를 찾아 한국까지 왔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교수 덕분에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야말로 한때는 입시지옥 아래 자식교육에 올인하기도 했고, 이젠 거품으로 끝나버린 부동산 버블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저속 성장과 끝 모를 불황의 늪에 빠지자 ‘자식도 아니고 돈(부동산으로 대변되는)도 아니더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 중년 여성이 ‘욘사마 열풍’을 주도하면서 의 자취를 찾아 한국 땅을 밟는 것이라는데, 정작 이들이 찾아 나선 건 욘사마가 아니라 를 보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에 가슴 설레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자식 뒷바라지 하랴, 빠듯한 남편 월급으로 살림하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자신을 뒤늦게나마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들의 절실함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언젠가 고령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부부 나이를 합해 100세가 되면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준비하라. 결코 빠르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호기심도 떨어지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도 감퇴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50대가 시작되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책 쓴 이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던 차에 정말 우연치 않게 주말이면 초보 농사꾼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오래전 세종시 인근에 땅을 사두셨던 이모님께서 은퇴 후 이모부와 사별하고 귀농을 결심하시면서 ‘가족농장’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쉰둘이었는데, 어느 새 햇수론 7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농사라곤 대학교 1, 2학년 때 소양강 근처의 부귀리란 마을로 농촌 봉사활동 가서 콩밭의 풀 뽑았던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겁도 없이 농사에 살짝 한 발을 걸쳐보았는데, 의외로 농사일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살아 있는 생명을 다루는 데서 오는 기쁨이 남다른 것 같다. 농사 첫해엔 소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나무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던 마을 이장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말 못하는 나무도 사람의 손길을 이토록 탄다는데, 하물며 사람 하나를 키우는 데는 얼마나 깊은 사랑과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것인지…. 소나무 키우기의 묘미는 가지치기라는 주변 이야기가 아니어도, 해마다 쳐내야 하는 잔가지와 굵은 가지들이 초보자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전문가들이라면 수년 후의 나무 모양까지 정확히 머릿속에 그리며 과감히 가지치기를 하겠지만, 초보자 눈엔 어느 가지를 쳐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망설일 때가 잦다. 우리네 삶도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크고 굵은 가지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갈 수 있으련만, 과한 욕심에 필요 없는 가지를 늘어뜨리고 이것도 저것도 포기 못 한 채 초라한 삶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쓰잘데없는 상념도 잠시, 소나무 밭에 앉아 가지치기를 하고 있노라면, 잡념도 없어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농사 두 번째 해엔 2년생 블루베리를 심었다. 어릴 때는 생김새가 비슷해 품종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생종 패트리어트는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엉덩이 부분이 익었는지 판별이 어렵고 열매의 신맛이 강한 대신, 가을 단풍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빨강 빛으로 물이 든다. 중만생종인 토로는 넓적한 이파리에 가지 또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데 열매의 끝 맛에 달달함이 오래도록 남는 것이 일품이다. 만생종 넬슨은 유선형의 날렵한 잎에 큰 키를 자랑하는데 시큰한 맛과 달콤한 맛의 조화가 매력적이고 탱탱한 식감도 훌륭하다. 예전에 대학 은사님께서는 “인생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다. 비교급으로 살지 말고 절대급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노라면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몰아가기도 한다. 꽃이든 열매이든 자연 속에선 아무도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데 말이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어쩌다 농사가 잘되면 3년을 고생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면 3년이 편안하다’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신다. 왜 농사를 망쳤을까. 두루두루 이유를 찾다 보면 배수도 챙기고 거름도 제때 주고 풀 관리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연한 행운보다는 노력이 더욱 값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주옥같은 말씀이다. 얼마 전 카톡방에 유튜브 동영상이 전달되었다. 열어보니 미국의 대학 강의실인 듯했는데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리병을 채우는 실험이었는데 먼저 조약돌로 유리병을 가득 채우도록 했다. 다음은 작은 자갈을 가득 넣도록 했다. 그다음엔 모래를 살살 뿌려 유리병을 채우도록 했다. 마지막엔 물을 가득 붓도록 했다. 실험을 끝내며 교수님 왈, “여러분, 만일 순서를 바꾸어 물부터 부으면 유리병 속에 모래와 자갈과 조약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조약돌과 자갈 그리고 모래와 물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조약돌이야말로 평소엔 잊고 사는 삶의 의미, 삶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가치 등이 아닐까.
- 2016-11-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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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본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 영화로 보는 오페라가 있다. 처음엔 실제 무대에서만 보았던 오페라를 영화 화면으로 본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몇 번의 큰 무대 오페라 작품을 보았던지라 그 생생함을 어떻게 화면으로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영화로 보는 오페라 두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가진 후 그런 기우는 말끔히 사라졌다. 와 를 보았는데 두 작품 다 아는 내용이었고 실제로 보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오페라 실황을 그대로 촬영한 거라 느끼는 감동은 같았다. 오히려 인터미션(중간 휴식시간) 부분에선 좀 전까지 연기하던 배우를 인터뷰하는 장면과 작품 소개 등 더 세세한 작품 배경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방금 죽을 듯 연기하던 배우가 인터미션에 웃으며 인터뷰하는 모습이 다소 생소했지만 흥미로웠다. 잠시 후 이 배우는 다시 진지한 연기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영화는 센트럴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데 이 극장에선 미리 신청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좌석에 작은 테이블이 있어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이번엔 케이크 한 조각과 보온병에 커피를 준비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우아하게 즐겼다. 오늘 작품은 다. 오페라에서 나 , 등은 잘 알려진 작품인데 는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관람하게 되어 더욱 몰입해야만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이야기로 나이 어린 애인을 향한 질투와 애증이 적나라하다. 늙은 여왕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나이가 20세나 어린 로베르토 데브뢰 에식스 경이다. 그러나 데브뢰에게는 사랑하는 공작부인 ‘사라’가 있었다. ‘사라’는 데브뢰의 친구 노팅엄 경의 부인이다. 여왕은 그에게 반역의 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신하는 꼴은 못 본다며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그를 질시한 귀족들이 반역죄로 몰아 데브뢰는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늙은 여왕과 연적인 젊고 아름다운 공작부인 ‘사라’) 여왕은 마지막 사인을 하지 못하며 그를 용서하려 하는데 공작부인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증거가 나오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 데브뢰를 구하려던 사라의 남편 노팅엄 경도 배신감에 분노한다. 이들의 사각 관계가 가슴이 아프다.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얽히고설키는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후 천일 만에 참수형을 맞은 앤 볼린의 딸이다. 이 이야기는 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튜더 왕가 헨리 8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버림받았고 자신의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앤’은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금도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처형당하고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뒤돌아서던 어린 엘리자베스. 그렇게 애처롭던 아이는 여왕이 되어 영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년에 나이 어린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런 고통을 받았는지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프라노와 테너인 주인공들은 3시간여 동안 계속 노래를 불렀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들 목소리의 여운은 귓가에서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는 역사적 사실에서 사랑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춰 각색한 작품으로 네 명의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과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아리아로 가득 채웠다. 빗나간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저리다. 깊어가는 가을, 참으로 멋진 오페라 한 편을 영화로 보았다.
- 2016-11-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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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한 듯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다
- 정년퇴직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직장에서 정년퇴직 때까지 롱런하는 사람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보통 사람입니다. 너무 똑똑한 사람 중에는 회사의 기술이나 영업 비법을 빨리 터득하고 뛰쳐나가 자기 사업을 해보려다 의욕이 너무 앞서 실패를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특출한 공도 세우지 못하지만 눈에 띄게 잘못도 하지 않습니다. 상사는 자기보다 더 똑똑한 부하를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속마음은 눈엣가시처럼 생각합니다. 자칫 범을 키우는 우를 범할지 모르고 언제 자기 어깨 위로 올라설지 몰라 의심 반 두려움 반의 사시 눈을 하고 봅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롱런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석축을 쌓아 올릴 때 튀어나온 돌은 정으로 깨트려 배열을 맞춥니다. 입바른 소리하고 정의감으로 상대의 실수를 눈감아주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들은 적을 많이 만들어 도중하차하거나 승진을 해도 부장급 이상 오르기가 어렵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둘이 가면 멀리 갑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전후좌우를 살펴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할 때도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여야지 남들보다 동작이 빠르거나 늦어도 지적을 받습니다. 내가 살아보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무리와 잘 섞여 더불어 사는 것이 편합니다. 피위지재(皮爲之災)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죽 때문에 화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강한 표범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결국 그 가죽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장자(莊子)에 있습니다. 그래서 표범은 멋진 가죽 때문에 맹수의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며 씨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표범의 가죽이 소가죽과 비슷했다면 인간의 공격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을 겁니다. 사람도 갖고 있는 재주가 너무 특출하면 그 재주 때문에 남들의 시기나 모함을 받아 수명이 단축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너무 똑똑한 사람은 그 재주로 인해 단명했습니다. 삼국시대 때 조조와 유비가 한판 붙을 때입니다. 불리함을 느낀 조조가 이 전쟁에서 이겨도 별 이득이 없으면서 버리기도 아까운 닭의 갈비 같다는 ‘계륵’을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수라는 부하 장수가 철군 보따리를 쌌습니다. 자기 마음을 읽힌 조조는 양수를 시기한 나머지 죽여버립니다. 양수의 비상한 머리가 결국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용도가 많아 잘려나갑니다. 결국 선산을 오래 지키는 소나무는 굽은 나무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서 그 돈으로 재주넘기를 해서 돈을 불리거나 명예를 얻으려고 한 사람들은 대부분 망했습니다. 오히려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농사만 지은 사람이 지금은 더 잘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고 보니 부부간에도 모자란 듯 지고 살면 가정이 편안합니다. 내 주장을 하다 보니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나친 욕심은 탐욕이 되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부족한 듯 내 탓으로 여기고 져주면서 살아온 것이 지나고 보니 잘 산 것이었습니다.
- 2016-11-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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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 2016-10-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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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한 집 한 그림 걸기
- 미술품 구입하기 문체부는 1995년을 ‘미술의 해’로 정하고, 미술 관계 문화 단체를 통해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을 전개했다. 국민의 보편적 경제 능력은 향상되었는데 문화의 수준은 거기 못 미쳐서, 우선 여러 장르의 미술품 중 그림을 사다 걸자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그 후 해마다 5월이면 이 행사를 민간화랑 주도로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당시 국민총생산이 1만 달러를 넘으며 문화의 욕구도 상승되고 있어 중산층 국민들에게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은 동기 부여가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자가용 승용차 구입하기, 레저 스포츠 즐기기와 더불어 비싸기만 한 줄 알았던 미술품도 잘 선택하면 한두 점 소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나 화랑들도 거품을 빼고 통상 거래 가격에 30%정도를 할인하여 특수층이 아닌 일반 중산층 소비자를 적극 공략하였다. 미술품 유통은 화랑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1996년 , 1998년 , 2005년 이 설립되어 미술품 판매에 새 시대를 열어왔다. 이후 , , , , 등의 경매회사가 미술품 판매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화랑을 통해 은밀히(?) 거래되던 미술품들이 도록과 전시를 통해 모두에게 공개되고 가격도 떳떳하게 노출되었다. 경매회사별로 미술품 감정단을 두어 작품의 진위와 적정 가격을 산정하여 미술품 가치의 객관화에 기여하였다. 미술품 가격이란 것이 작가와 화랑 사이에서 내밀하게 형성되었고 같은 작가의 작품도 화랑별, 지역별로 각기 그 편차가 심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전시장이나 화랑에서도 가격을 표시하지 않아 도대체 작품을 팔기는 하는 것인지, 가격은 얼마인지를 몰라 묻기도 겸연쩍어 돌아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경매회사에 회원 가입(연 회비 10만~20만원)하면 연간 경매도록도 받아보고, 인터넷으로 경매 미술품을 검색하여 작가와 가격이 합당하면, 전시 기간에 직접 실물을 확인하고 큐레이터에게 세세히 자문하며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온라인으로도 경매를 진행하고 있어 집에 앉아서도 다양하게(회비 납부 안 하는 준회원 가입으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다. 경매는 항상 최고가를 입찰한 사람에게 낙찰되며, 실수로 낙찰을 받더라도 취소가 안 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낙찰이 되면 수수료로 작품가와 16.5%의 수수료(부가세 포함)를 지불하고 작품을 인수하면 경매 과정은 종료된다. 그러나 초보자에겐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렵기만 할 것이다. 우선, 주변의 화랑이나 전시장을 찾아 미술품을 자주 보며 안목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 미술품은 시각예술이므로 긴 시간 바라보다 보면 마음의 감흥이 오고 그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래도 미술품은 금전적 가치가 수반되는 동산(動産)이므로 장르별, 작가별 가격 추이도 잘 살펴보고 수집하길 권한다. 미술품 보관하기 경매에서 낙찰받거나 화랑에서 구입할 때에는 반드시 영수증과 관련 도록(해당 미술품의 도록이 없으면 작가의 다른 도록이나 전시 인쇄물) 그리고 작품보증서를 꼭 받아서 함께 보관한다. 그림의 경우 대부분 유리 액자에 표구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화나 서예 등은 굵게 말아서 신문지로 싸둬도 무난하나 유화나 드로잉 판화 등은 반드시 유리액자에 표구하고 뒷면이 통풍되게 걸어두면 된다. 미술품 팔기 최근 미술품 경매회사들의 소위 블루칩(blue chip) 작가(지명도 있고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는)들의 작품 가격은 연평균 23% 이상의 수익률을 가져온다고 분석한 자료도 있다. 영구히 작품을 소장한다면 모르나, 여윳돈으로 한두 점 수집했다가 경매시장이나 화랑을 통해 판매할 때에는 계산을 꼼꼼히 해야 한다. 100만원이 작품가일 때는(낙찰가) 연회비, 수수료 등 부대비용이 37만원 가까이 되므로 그 작품가 137만원과 판매위탁 수수료 11%(부가세 포함)를 더하여 150만원 이상을 받아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단기매매는 금해야 한다. 이제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미술품 시장도 꾸준히 성장할 뿐 아니라 경매회사의 낙찰률도 70%를 상회해 금년 상반기 경매시장에서 960억원이나 유입되었다. 여유자금만 있다면 노후를 대비, 긴 안목의 투자도 가능하다고 본다.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는 작고(作故)작가이고 작품가가 6000만원 이상일 때 발생하게 되는데(세율 20%) 작품 소장자에게 80%의 기본 공제가 허용되어 우려할 바는 아니다. 6000만원에 구입, 1억원에 양도하면 차익 4000만원 중 3200만원이 공제, 800만원의 20%인 160만원만 세금이 발생하므로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사석원(史奭源, 1960~ )화가는 촉망 받는 인기 화가로 여기 소개한 작품 는 삼베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고 액자까지 손수 짠 멋진 그림이다. 인사동에서 ‘한 집 한 그림 걸기’ 행사할 때 아주 싸게 구입한 작품이다. 1984년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는 수집가들이 손꼽는 이 시대 걸출한 화가다. 유년기 포천의 외가에서 지내며, 숱한 동물들(염소, 당나귀, 올빼미 등)과 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방한 성품과, 두 권의 수상집(隨想集), 두 권의 기행록(紀行錄)을 펴낸 뛰어난 문장력은 만날 때마다 경외심(敬畏心)을 갖게 한다. 대작할 수 없는 나의 주량(酒量)이 야속할 따름이다. 이종구(李鍾九, 1955~ ) 화가는 정부미 쌀 포대에 농민의 실경(實景)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다.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후학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도 이 화가의 작품이다. 위의 그림 는 평소 이 화가의 소재인 농민, 소, 농기구(낫 삽 곡괭이)가 아닌, 북두칠성 아래 한 사발의 물을 그린 깊은 명상의 산물이다. 화랑 주인은 쌀 포대에 그린 시퍼렇게 날이 선 낫 그림을 권유했으나, 망설이다 이 그림을 택했다. 서재에 놓고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심상(心象)이 결곡해지기를 기원한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 2016-10-27 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