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자신을 가꾸고 사랑하는 법을 발견한다.” 책을 보다 이 구절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서리 맞은 호박잎이 살아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이 삶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런가? 아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성장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필자는 이 신조만큼은 확실히 믿으며 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첼리스트인 9
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뒤늦게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었다. 의대 입학을 준비하던 사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의대에 진학한다 해도 6년이란 시간이 지나야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하루는 남자가 한 친구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6년 후면 난 마흔네 살이 돼! 너무 늦지 않을까?”
“늦는다고? 의대를 다니지 않는다 해도 6년이 지나면 자넨 결국 마흔네 살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스크루지 영감이 떠오른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좀 구두쇠이기 때문에 더 공감이 간다. 그래서 반성도 하며 교훈을 얻어 지침으로 삼는다. “그 친구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처진 어깨 다독여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거였어.” 특히 이 구절을 늘 가슴에 품고 지낸다.
아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통금이 해제된 크리스마스는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통금해제 크리스마스이브 인파에 밀리고 진눈개비에 눌려 아내에게 선물할 우산은 이미 부서져버렸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었다.
야간통행금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민심회유책으로 해제할 때까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위반자는 파출소에 연행되어
“다시, 다시, 다시!”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야. 해남아, 해남아. 연주하다가 틀리잖아? 그럼 다시 해야지 고쳐져. 그냥 지나가면 안 돼!”
학예회(?)를 일주일 앞둔 아현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연습실은 시끌벅적했다. 기타와 바이올린, 하모니카 소리와 노래 소리, 키득키득 웃는 소리, 와글와글 수다 떠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이들 행동과 말투 그리고 동심
필자가 잘하면 세상살이가 다 잘될 줄 알았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필자가 모범을 보이고 반듯하게 살아가면 저절로 식구들이 따라오고 가정은 화목하고 만사는 형통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필자가 정한 룰(rule)대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니 필자만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입을 닫아버린 아내와 반항하는 아이들에게 배신감을 느
불현듯 헤이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여럿이 어울려 스치듯 지나쳤는데 그때는 아직 건물들이 제대로 들어차지 않았을 때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여러 번 듣게 되어 다시 한 번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움츠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합정역 1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가 파주까지 가는데 헤이리를 경유한다. 편도 2,500
아들이 뉴욕 변두리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지 10년 되었다. 이 동네는 단독주택 주거지로 중산층 마을이다. 1950년대에 조성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두 블록만 건너가면 맑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지금 그 개울은 오버브룩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웃들은 새집을 지어 입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아들딸
지난날 폭압정치를 경험한 세대들은 좀처럼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살았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190만 명 이상이 운집한 최대 집회’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예를 훼손하는 루머’는 어느새 ‘합리적 의심’으로 변했다. 이제 그것은 장막을 걷고 있다.
겨울의 문턱에 다다른 11월 마지막 휴일, 오랜 친구 몇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