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잘 모르는 중년의 퇴직자가 우연히 소셜네트워크(SNS)를 배웠다. 페이스북, 구글문서, 개인 홈페이지를 차근차근 익혀 나갔다. 그러던 중 평소 취미로 즐겨 그리던 그림을 태블릿PC로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만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 묘미에 푹 빠졌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자신을 한국 최초의 ‘태블릿 화가’라고 부른다. 단순한 취미가 첨단의 정보통신과 결합해 새로운 일거리가 탄생한 셈이다. 최근 어느 불고깃집에서 10장이나 되는 그림을 주문해 사갔다고 한다. 이 태블릿 화가는 다른 은퇴자들을 교육하고, SNS를 사업에 활용하도록 컨설팅하는 일을 가미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중장년들은 노후에 빈곤한 삶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빈곤은 재정적 어려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봉사, 사회교류, 자아실현, 취미여가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풍요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노후 빈곤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은퇴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중장년들을 만나 보면 은퇴 후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경향이 강한데, 일을 계속한다고 해서 멋진 노후생활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중장년들에게 은퇴 후 취약한 분야가 여가활동이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쉴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은퇴후에도 계속 일하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외국의 중장년들은 퇴직 후에는 다양한 여가활동을 마음껏 즐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가활동에서 일자리도 발견하고 창업을 하기도 한다. 우리도 이제 여가활동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여가는 가벼운 여가와 진지한 여가로 나뉜다. 가벼운 여가(casual leisure)는 등산, 여행, 산책, 운동과 같은 단순하게 즐기는 활동을 말한다. 이 경우 여가를 즐기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비교적 단순하며, 즐거움조차도 짧게 느끼게 되는 한계가 있다.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란 배우고 활용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드는 높은 수준의 여가활동을 말한다. 즉 그림, 음악, 목공예, 원예, SNS, 운동 등을 프로 수준으로 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과 난관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장시간 지속하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여가로 사회에 봉사하거나 사업으로 연결될 정도로 확장될 수도 있다.
은퇴 후 적절한 수준으로 가벼운 여가를 즐기면서, 하나 이상의 진지한 여가를 깊이 있고, 만족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진지한 여가일수록 삶의 질이 높아지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행복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재 우리나라 중장년층이 즐기는 여가활동은 너무 가볍다. 게다가 사진, 여행, 등산과 같이 특정 분야에 쏠려 있다. 이미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된 유럽과 북미에선 은퇴자들은 진지한 여가활동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학습하거나 배워서 관련 자격증을 딴다든지,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거나 코치하는 등 자기계발과 사회참여를 가미하는 활동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 고령사회를 맞이해 좀더 진지한 취미 여가 위주로 은퇴생활의 질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부터라도 은퇴 후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여가 계획(leisure planning)을 세워야 한다. 진지한 여가는 영혼을 자극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며, 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일거리로 삶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다.
나영석 PD가 ‘꽃할배들’의 스페인 편 관전 포인트 세 가지를 공개했다.
tvN 배낭여행 프로젝트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의 연출을 맡은 나영석 PD가 5일 서울 마포 노고산동 토즈 비즈센터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날 나영석 PD는 열흘 간 떠난 스페인 여행의 관전 포인트에 대해 첫 번째로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펼쳐내는 풍광을 언급했다. 그는 “우선 여행지가 달라졌다. 스페인의 풍경이 포인트가 될 것”이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는 “바르셀로나는 천재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도시기 때문에 안방에서 시청자들이 그 모습을 보실 수 있고, 멋진 광경을 보고 놀라는 ‘꽃할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영석 PD는 두 번째 관전 포인트로 ‘중급 배낭여행’이라는 콘셉트를 이야기 했다. 나영석 PD는 “더욱 빠듯해진 스케줄 속에서 리더로 나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투정을 부리는 사람, 적응하는 사람들이 각기 있었다. 또, 그 안에서 다투고 화해하는 등 깊어진 감정선과 상황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감정선이 드러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울러 나영석 PD는 마지막 관전 포인트로 “‘꽃보다 할배’ 제작진과 이서진의 ‘밀고 당기기(밀당)을 넘어선 모든 걸 내려 놓은 아귀다툼”이라고 밝혔다. 나 PD는 “서로 체면이나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고, 이서진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들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제작진에게 뭐든 빼앗으려고 했다. 우리는 방송의 규칙이 있기에 이서진의 전략을 지켜보려고 했다. 제작진과 이서진의 대결이 난투극 수준이었고, 분량도 예상 외로 많이 나올 것이다”고 짚었다.
7일 첫 방송될 ‘꽃보다 할배’는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짐꾼 이서진이 스페인으로 떠난 배낭여행기를 담아낸다.
세탁기를 돌리며
희망을 빤다. 내 더러운
욕망에 더렵혀진 꿈을
풀어 추억을 돌린다.
전자동이기에 빨
필요없다고 믿는 자존심
마저 돌고 있다.
기억까지 빨 수 있다면
알뜰 코스로 내 현재를
헹굼으로 내 과거를
탈수로 내 미래를
세탁만이 희망이다.
빨래로 구겨진 순결을
다릴 필요가 있을까
오늘은 볕이 좋다
바람마저 불고 있다
빨래하는 날
빨래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날
빨래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날
빨래에 말린 빨래 개는 것으로 지날 날
이런 날이 왜 사랑보다 더 안타까울까
내 사랑에 전원을 넣어 육체와 영혼,
게다가 내장까지 꺼내 빨래하고 싶어진다.
시를 세탁할 수 있다면
시인을 빨래할 수 있다면
기억보다 더 선명한
추억보다 더 애틋한
욕망보다 더 강렬한
희망보다 더 설레는
시를 입을 수 있을 텐데
삐이익 삑삑 삐이익
내 손을 떠난 세탁물이 돌아온다.
탈수증에 걸린 시에 햇볕을 부어
넣는다. 빨래의 원시적 축제가 시작된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
추억을, 희망을, 생명을 유혹하는
빨래에 대한 예의이다.
1999년 데뷔 작품
△이태문
1965년 서울 구로동 출생. 동구로 초등학교, 구로중학교, 관악고등학교 졸업
1999년 와 2000년 으로 데뷔. 에도 작품활동
연세대 국문과 졸.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일본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1997년 도일
도쿄외국어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동대학원 외국인연구자, 일본여행문화연구소 공동연구원을 거쳐 게이오대학, 와세다대학, 니혼대학, 무사시노대학, 오츠마여자대학 등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 강의
번역서는 '백화점' '박람회' '운동회' 등
----------------------------------------------------------------------------------
댓글: 이불 호청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다가 아침나절 시니어 미디어 지에서 본
이태문 시인의 '세탁기를 돌리며'라는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시인의 감성은 역시 다르다.
느꽃지기는 세탁기를 쓸 때마다 별 생각없이 그저 이렇게 세탁기 뚜껑을 벌컥 열고
무심히 더러운 빨래 던져놓고 세제 쏟아붓고 버튼 삑삑 누르고 휘익 돌아서기 마련이었는데,
시인은 그 세탁기를 돌리며 이렇게 삶의 철학이 깃든 멋진 시를 쏟아냈다.
세탁기를 돌리며
이태문
희망을 빤다. 내 더러운
욕망에 더렵혀진 꿈을
풀어 추억을 돌린다.
전자동이기에 빨
필요없다고 믿는 자존심
마저 돌고 있다.
기억까지 빨 수 있다면
알뜰 코스로 내 현재를
헹굼으로 내 과거를
탈수로 내 미래를
세탁만이 희망이다.
빨래로 구겨진 순결을
다릴 필요가 있을까
오늘은 볕이 좋다
바람마저 불고 있다
빨래하는 날
빨래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날
빨래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날
빨래에 말린 빨래 개는 것으로 지날 날
이런 날이 왜 사랑보다 더 안타까울까
내 사랑에 전원을 넣어 육체와 영혼,
게다가 내장까지 꺼내 빨래하고 싶어진다.
시를 세탁할 수 있다면
시인을 빨래할 수 있다면
기억보다 더 선명한
추억보다 더 애틋한
욕망보다 더 강렬한
희망보다 더 설레는
시를 입을 수 있을 텐데
삐이익 삑삑 삐이익
내 손을 떠난 세탁물이 돌아온다.
탈수증에 걸린 시에 햇볕을 부어
넣는다. 빨래의 원시적 축제가 시작된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
추억을, 희망을, 생명을 유혹하는
빨래에 대한 예의이다.
-1999년 데뷔 작품-
'세탁'이라는 의미..
남긴 오점이며 소소한 미련이며 잘못된 흔적일랑 빡빡 지우고 씻어내버리고
완전한 깨끗함으로, 완벽한 무결점으로, 말끔한 새로움으로, 훌훌 털어내버린 후련함으로
마음이 흐뭇하고 편안해지는 것.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세탁'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어째 구린 냄새가 난다.
세상이 올곧고 투명할수록, 뒤가 구린 권력자가 아무리 뭔가를 덮고 감추고 지워버리고
말짱하고 보송보송한 원시의 순수함마저 강조하며 시치미를 떼지만,
그 누구라도 은밀하게 위장된 그 '세탁'이라는 용어 뒤에 숨은 거짓과 일그러진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반면, 시인에게 있어 '세탁'은 그야말로 마음의 결을 다듬는 과정이다.
시인의 맑은 영혼에 담긴 깨끗한 시들은 읽는 이의 꽉 막힌 감성을 뚫어주고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같은 신비한 치유의 능력이 담겨 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한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시인이 거치는 마음의 '세탁'을 들여다보았다.
'혁신은 1000번을 '아니오'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던가.
관행과 구태의연함과 뻔한 답습이 가져오는 게으른 반복이 아닌 신선하고 정갈함을 갖춘 시들은 감동을 준다.
끊임없이 맑고 새로운 샘물을 길어올리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여 찌들고 때묻고 더럽혀진 찌꺼기들을
버블버블 비누거품에 녹이고 휘휘 돌려 모두 날려버린 다음, 깨끗하고 순수한 고갱이만을 짜내어
내놓는 시인들의 세탁기라..
이를 통과해서 나오는 시는 그야말로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시를 세탁할 수 있다면
시인을 빨래할 수 있다면
기억보다 더 선명한
추억보다 더 애틋한
욕망보다 더 강렬한
희망보다 더 설레는
시를 입을 수 있을 텐데
남다른 감성으로 걸러진 깨끗한 시어들이 따스한 햇살의 기운까지 머금어
시인이 마지막으로 내어놓는 따스하고 기분좋은 보송보송한 시는
시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삐이익 삑삑 삐이익
내 손을 떠난 세탁물이 돌아온다.
탈수증에 걸린 시에 햇볕을 부어
넣는다. 빨래의 원시적 축제가 시작된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
추억을, 희망을, 생명을 유혹하는
빨래에 대한 예의이다.
40대 이상 중장년들을 위한 시니어전문 미디어 잡지 ..
요즘 세상의 중심인 중년들의 소소한 활동이 실린 이 잡지에 눈이 가서 클릭해서 들여다보곤 한다.
바로 우리네 중년들의 이야기가 실리니 눈여겨보게 되고 다양한 내용이 실려 읽는 재미가 난다.
오늘 아침 여기서 마주친 이태문시인의 시 한편이 흐뭇한 수확이다.
여기저기 능력있는 느꽃지기의 중년의 이웃님들도 품고 있는 좋은 작품들 이 잡지에 기고해보시라 권해본다.
첫 인상부터 강렬했다. 빳빳한 가죽재킷에 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선글라스, 그리고 재킷과 말구두까지. 68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박력 있는 패션 감각이었다.
바이크 동호회에서 쓰는 별명인 ‘종로신사’보다 ‘종로 터프가이’가 어울리는 그였다. 그렇다. 68세의 김홍선 씨는 커다란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을 즐기는 바이커(Biker)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젊은 열정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김 씨의 첫 번째 도전은 바로 ‘할리 데이비슨’이었다.
서울 종로에 터를 잡고 산악회 세 개를 운영할 만큼 김 씨는 등산을 즐겼다. 그러나 너무 잦은 산행이 고행이 됐던 것일까. 무릎 이상 증세 탓에 한동안 외출도 할 수 없었던 상태가 된 적이 있다. 힘든 나날들이었다. 사람과의 만남을 즐기고 활동적이었던 그가 꼼짝달싹 할 수 없으니 마침내 우울증 초기 증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취미 생활을 만들어 즐거운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이 많아졌다.
“여보, 바이크 한 번 타보는 것은 어때요? 당신 바이크 타고 싶어 하셨잖아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아내 김남연(63)씨가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여느 60대의 아내였으면 바지자락을 붙잡으며 말렸겠지만, 사진 찍기를 취미로 했던 그의 아내는 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와 같은 색다른 취미가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그러나 김 씨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젊은 시절 바이크가 동경의 대상이긴 했지만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자 망설여졌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울증이 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울증 극복. 그것을 위해 김 씨는 결국 바이크라는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 무미건조함에서 뜨거운 희열로
“바이크를 시작한 것을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요. 바이크를 시작한 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삶으로 변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이크를 즐기다 보니 배려와 협동심도 생기더라고요.”
무미건조했던 삶이 촉촉해졌다. 바이크 덕분이었다. 도전을 망설였던 김 씨는 하절기 주 2~3회, 동절기 월 1회 바이크를 즐길 정도로 바이크 마니아가 됐다. 이제는 바이크 동호회의 멤버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많은 인맥도 형성됐다. 60대 바이커는 아마 전국에 10명도 안될 것이라며 김 씨는 자신의 멋있는 취미 생활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 빠져 나올 수 없는 바이크의 매력
“바이크 특유의 폭발음과 함께 들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그것과 어우러진 자연의 경관을 보면 벅찹니다.”
김 씨는 기자에게 자신이 투어(Tour)했던 곳의 사진을 소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개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로 가득했고, 표정에는 강한 자부심이 배여 있었다. 김 씨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소양강 옛길이었다. 강을 끼고 즐기는 약 50km의 도로가 그렇게 눈이 부셨다고.
김 씨는 바이크가 매력적인 이유를 한 가지 더 설명했다. 바로 튜닝(Tuning)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바이크에 빠져있는 사람들 중 튜닝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이와 함께 어울리는 복장을 하나씩 하나씩 갖추어가는 것도 색다른 재미라고 했다. 큼지막함을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협감까지 느끼게 하는 바이크보다 오히려 복장의 가격이 비싼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김 씨는 그것을 즐긴다. 현재 안정적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금전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색다른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과 이를 공감하는 것. 그것이 바이크의 매력인 것이다.
# 68세,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바이크뿐만 아니고 음악에 도전할거에요. 기타, 플롯, 색소폰과 같은 악기를 배우려고 해요. 곧 시작할 계획입니다.”
바이크를 시작으로 김 씨의 도전은 탄력이 붙었다. 바이크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감성적인 사람이 많다고 했다. 자신도 그렇다고. 그래서 김 씨는 바이크와 음악을 접목 시키려고 한다. 바이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60대 우울증 초기 증상에 힘들어 하던 중년 남성 김 씨가 새로운 도전을 망설여하는 신중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가지십시오. 취미가 있어야 노후가 즐거운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얼마나 살지 모르고 체력적으로 점점 벅차고. 때문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기자단 1기로 선발된 강애수님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두 남매를 둔 강애수님은 목원대 기악과 출신으로, 결혼하기 전부터 음악학원을 5년 정도 운영했는데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바람에 학원운영을 접어야만 했던 경력단절 여성중 한 분이십니다. 큰 딸은 카드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중이고 둘째 아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첫 취업에 실패의 고배를 마신 터라 보듬으며 다음을 위해 힘찬 파이팅을 보내고 있다고 하십니다.
강애수님은 작은아이 대학입학과 동시에 컴퓨터를 배운 후 우연한 기회에 이마트모니터와 자문위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를 하며 글을 쓰고 모니터링을 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글을 쓴다거나 감성적인 모습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감을 얻었고 활동범위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넓혀 갈수록 나약하기만 했던 제가 얼마나 성숙했고 생각의 폭도 넓어졌는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현재 고양시 여성-복지참여위원, 양성평등교육진흥원통신원, 서울톡톡기자, 금융감독원 이용자 리포터,안행부 생활공감모니터, 경기도 민원모니터 등 너무나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 활동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저는 왕 언니로 통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들딸과 같은 청소년들과 활동하는 곳이 많다보니 성실함과 책임감은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기자단 모집 사고가 나간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고 응모 지원서를 보내올 정도로 열정이 뜨거우신 분입니다.
본인 소개서 중 한 문장을 소개해드립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해 왔고 자칭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테일한 기사도 쓰고 싶고 시니어로서 더 큰 도약을 하고 싶습니다."
---------------------------------------------------------------------------------
우리의 뇌는 희로애락을 기억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들이 점차 흐려졌지만 달콤한 커피향이 그리울 때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습니다.
변함없이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들 중 한 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젊은이 들이 읽는다면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불가한 이야기지만 아련한 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에는 남학생은 보병 기초교육 여학생은 의무병 교육을 교련이라는 과목으로 수업을 받았습니다.
저희 학교는 여고이고 시골이다 보니 교련복은 따로 없었고 체육복으로 대신했고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구급약 가방은 사선으로 길게 메고 다녔습니다. 화생방 훈련 때는 방독면 대신 비닐포대를 뒤집어썼지요.
도시 학교와 쫌~~~수준 차이를 느꼈지만, 공부는 꽤 잘하는 학교였답니다.
간호대 출신의 교련교사에게서 주로 응급처치, 화생방 대치법, 심폐소생술, 들것에 환자 싣고 달리기 등 구급요령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장교출신의 남자 선생님한테는 제식훈련을 받았습니다.
교련검열이라고 큰 행사 때에는 지글지글 타는 태양 아래에서 운동장을 돌고 또 돌고 몇 시간씩 연습을 하며 줄 맞추느라 옆 눈질 하며 너무 긴장하여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습니다. 받들어 총! 충성! 구호소리 뒤에는 맞추는 소리가 척척 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으로 재 점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식훈련은 오와 열이 생명이었죠.
하나! 하나! 왼발! 왼발!
둘! 둘! 오른발! 오른발!
똑바로 맞춰 소리와 동시에 공식대로 왼발을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로봇처럼 같이 오른손과 오른발을 움직이는 아이가 꼭 있어 기합받기를 수없이 반복했지요. 저녁에 부모님께 기합 받아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일러도 전시상황 대비 실전훈련 미리 하는 것인데 당연한 것 아니냐고... 그 시절엔 교권에 대항 자체가 불가했지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요즘은 예전과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게 된다면 아마도 부모님이나 학생들 동영상 찍어서 교육청에 신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힘든 훈련을 감내 할 수 있었던 것은 반쪽인 내 나라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지요.
그뿐인가요. 사열을 받기 위한 제식훈련 시간에 우로~봐! 충성! 고개 돌리고 소리 지르느라고 목이 터질 것 같았지요.
실지로 성대가 파열된 아이도 있었는데 칭찬을 얼마나 하던지 칭찬의 효과는 만점이었지요.
그 후 구령 소리는 군대 연병장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구령 소리 질러대고도 수다는 또 얼마나 떨었는지 그 시절 돌아보면 수다 A++ 받아도 부족 할 것 같아요.
앵무새처럼 똑 같은 예기를 반복(누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사랑의 멜로디가 어쩌구 저쩌구...유치하다는 등) 웃고 또 웃고 소통이 얼마나 잘 되었던지요. 울고 있어도 웃음이 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소통이 찐하게 무르익어 갈 때쯤 되면 교련선생님은 찬물을 짝 끼언지며 집합하라고 하고 기합 들어갑니다.
하지만~~~
저는 교련시간이 좋았죠.
왜?
죽어도 하기 싫은 수학과 과학수업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나름대로 저와 같은 학생들에게는 인기 과목이었지요.
저는 교련 실기대회 선수로 출전하기 위해 교련시간은 집중모드로 바뀌며 공식을 달달달 외웠지요.
교련도 공식이 다 있거든요. 삼각건 매듭 공식대로 묶지 않으면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붕대 감기는 더 어렵습니다. 다친 사람 생각해서 우아하게 감으면 통째로 벗겨져 버리고 말지요.
저는 붕대 감기 연습을 카레를 좋아하는 남동생을 이용했답니다. 농사지은 감자와 양파를 쑥쑥 썰어 기름에 볶다가 카레가루를 넣어 국처럼 끓여주었지요. 용돈으로 카레가루를 사기에 버거워 국처럼 끓여주는데도 동생은 밥을 듬뿍 말아 마당을 돌아다녀 소화시켜가며 먹고는 머리를 내밀었답니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눈 감고 감아도 주위에 탄성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봐도 작품이었었죠. 그 작품이 저에게 1등이라는 큰 선물을 안겨 주었었고 꿈꾸던 점수 만점을 난생처음 받아보았습니다. 그 때 정말 많은 칭찬을 받았고 보답으로 담임선생님이 반 전체 친구들에게 크림빵까지 제공했답니다, 정말 제가 잘 하긴 했지요. 그 때 그 인기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답니다. 제가 고교 시절에 누렸던 최고의 특권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요즘도 실생활에 요긴하게 사용하구요.
아~~~벌써 30년이 흘렀네요. 멋진 하모니를 이루던 함성!!! 그 함성을 사랑합니다.
교련수업 새삼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알립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단’ 모집
-다시 뛰는 인생2막 ‘나도 기자다’
프리미엄경제신문 이투데이의 자회사인 이투데이 PNC(Passion & Creative)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시니어 기자단’을 모집합니다.
시니어 기자단은 액티브 시니어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 소식과 함께 인생2막-자기계발 성공 스토리, 애환과 고통, 기쁨 등을 취재하게 됩니다.
선정된 기자단은 소정의 교육을 거쳐 2014년 2월부터 시니어 모니터링 업무와 현장 취재기사를 작성하게 되고, 작성된 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사이트에 게재됩니다.
50대 이상 신장년층들은 우리 사회의 주춧돌이자 근간이며 버팀목입니다. 하지만 직장-자녀문제-부모-집안 대소사-건강-대인관계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습니다. 단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신장년층은 명분과 격식, 보수적인 사회적 가치에만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온갖 혼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투데이 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당당한 시니어들의 고품격 Life 정보 웹진으로 ‘2막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e-시니어’ ‘‘Dynamic Senior’의 신나는 놀이터’‘시니어들의 애환과 고통을 나누는 사랑방’을 지향합니다.
참여를 희망하는 시니어들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많은 성원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 songbird@etoday.co.kr. (02)799-6712
"해 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 뒤엔, 서툴게 살아 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노래의 첫 구절이다. 멋스러우면서도 세련되지 않지만 구구절절 소소한 일상들을 그대로 반영한 노랫말들. 잔잔한 감동이 배어 나온다.
해 저문 어느 오후 압구정의 한 LP바.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어느 덧 50대로 접어든 그들 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찾기 힘들만큼 멋진 감각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LP바의 희미한 백열등 불빛은 그들의 목소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그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53)ㆍ전태관(53)씨의 인생,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하나가 만들어지고 그 제목을 딴 영화, 라디오 그리고 잡지까지 만들어 진다는 것. 그것은 뮤지션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인 것 같아요.”
김종진의 말처럼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그들의 대표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제목이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잡지에까지 사용될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로만 평가 하려고 한다면 섭섭한 일이다. 1986년 데뷔 이후 ‘쓸쓸한 오후’, ‘어떤 이의 꿈’,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곡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대중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음에도 그들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구태의연한 음악을 하려고 한 적이 없어요”
뮤지션으로서 단 한번이라도 느슨하게 음악을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저희는 매일이 슬럼프에요. 흔히들 목표한 바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뜻대로 나아가지지 않을 때 슬럼프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저희는 늘 목표한 것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 더딥니다. 더 많은 음악활동을 하고 싶고, 더 많은 곡들을 발표하고 싶고, 더 매일 연주하고 싶은데 항상 꿈에 못 미칩니다.“
항상 새로운 음악활동을 갈구하는 그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욕심은 끝이 없었다. 화기애애한 인터뷰 분위기였지만 음악 이야기만 나오면 이야기가 더 깊어졌다. 두 사람 이외에 친한 친구를 알려달라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들은 뮤지션 친구들만 열거 할 만큼 그들에게 있어 음악은 삶의 전부였다.
그들은 친구들과 만나면 ‘물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소유욕.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 그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친구들과 만나면 역시 음악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니면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 그 소유욕. 너무 가지고 싶은 것이 많거든요.”
“그것이 무엇인가요?”
“무엇이겠어요. 악기지. 끊임없는 이 물욕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음악가의 길은 안 걸었으면요? 아마 음악 감상가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 같아요. 이곳 LP바 사장님처럼 음악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꿈이거든요. 사실은 지금도 음악을 연주하는 것 보다 음악을 듣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김종진)
“저는 어린 시절 사업가가 꿈이었어요. 무작정 돈 좀 벌어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악기를 배우고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음악이라는 깊은 물에 빠져들게 됐습니다.”(전태관)
기자는 음악에 대한 길이 아닌 다른 길에 대한 대답을 기대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그런 기대치는 점점 낮아졌다. 기자는 ‘혹시나’하며 넌지시 질문을 꺼냈지만 김종진은 ‘역시나’로 응수했다. 음악이 좋아서 선택한 길. 그러나 막상 일이 되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악 때문에 스트레스는 쌓여갔고, 좌절감이 커질 때도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 그 둘은 심적 소모가 덜한 음악을 듣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이 좌절감을 느끼면서 무대에 서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행복감을 전달하는 것. 좋은 음악으로 대중들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종진과는 달리 전태관은 사업가를 꿈꿨었다. 무작정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 서강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전태관은 “별다른 꿈보다 그냥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고민 없이 경영학과를 입학하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음악가의 천성은 버릴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접한 엘튼 존(Elton John)의 ‘돈 고 브레이킹 마이 허트(Don’t Go Breaking My Heart)’는 그를 음악에 길로 인도했다.
“엘튼 존의 노래는 저를 음악의 물로 살살 끌어들인 노래입니다. 이 즈음해서 드럼도 배우게됐죠. 단지 취미 생활로 치부하다가 대학 입학이후 많은 음악을 접하다 보니 ‘아! 이것이 더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이 세계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이 둘은 젊은 시절 음악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그것도 음악 교육의 요람이라고 하는 버클리 음대다.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김수철과 작은거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이런 굵직한 선배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시간들이 버클리 음대에 대한 동경을 상쇄시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 거친 파도를 즐기는 뱃사공들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30년의 세월을 바다의 파도에 비유했다. 현재도 그 거친 파도 위를 항해중이라고. 하지만 30년 이라는 세월. 그 세월의 풍파 속에서 모진 파도를 견뎠다. 또 그 험난했던 파도를 즐기며 음악계의 유능한 뱃사공으로 거듭났다.
“이런 파도가 잔잔한 수영장 보다 재미있잖아요.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고, 파도를 이겨내면 이겨냈다는 포만감도 생기고 말입니다. 3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많은 성격적ㆍ음악적ㆍ사업적 트러블이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생기기전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둘이 만나 한 팀을 이뤄 30년 동안 파도를 항해한다는 것. 그들의 순조로운 항해의 힘은 ‘배려’였다. 인터뷰 중간 마다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와 눈 맞춤에서 그들의 우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운명에 냉랭한 기운이 감돈 적이 있다. 무리 없이 항해하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배가 침몰할 뻔했다. 청천벽력 같은 전태관의 신장암 소식 때문이었다. 악성종양이었지만 초기에 발견한 덕분에 다행히 치료에 성공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던 삶. 그 삶에 제동을 걸었던 신장암이라는 병. 전태관은 신장암을 앓고 난 후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죠. 그래서 무엇보다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가족의 소중함도 느껴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가족이 제 든든한 버팀목이니까요. 또 이전에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몸이 망가졌던 것 같아서 되도록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 합니다.”
기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무명시절' 그 서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최고 약점이 한가지 있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고개가 갸우뚱졌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김종진의 어조는 담담하면서 자신감이 넘쳤다.
“잘난 척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저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설움의 시절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발표한대로 잘 돼서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김수철과 작은 거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 같이 굵직한 선배들과 함께해서 몰랐던 것이죠. 또 음악 발표를 하면 몇 십 만장이 판매됐기 때문에 안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최고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진짜 진국의 음악이 안 나올 수도 있는 기로에 늘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난 척이 아니었다. 좋은 선배들과 함께 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자, 선배들에게서 배운 것을 통해 소위 ‘뿅가는 음악’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의 30년은 신장암과 음악적ㆍ성격적ㆍ사업적 트러블이라는 파도기를 거쳤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음악에 대한 열정, 선배들에게서 배운 튼튼한 음악적 기반이 파도를 항해하는 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 고장난 시계
지난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봄여름가을겨울. 26주년을 맞는 올해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그동안 하지 않았던 후배가수 양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3월 27일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숲’으로 26주년 첫 공연에 나선다.
그들이 25주년을 맞이해 낸 곡. ‘고장난 시계’. 이미 그들 앞에서 세월은 ‘고장난 시계’였다. 50을 넘긴 나이.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은 30년 전 그대로다. 26주년을 맞은 지금. 봄여름가을겨울의 향후 25년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주상숙(66) 씨는 자체 개발한 스마트봉운동으로 예순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더 캐고 들어가면 그의 이력은 좀 별난 구석이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스마트봉운동을 개발한 데 이어 피부미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서다.
남자 피부미용사라고? 보통 ‘피부미용사’ 하면 금남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전직은 전혀 이쪽 분야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공무원이라니… 흥미진진할 것 같은 이 남자의 인생 스토리에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금남의 영역’이던 피부관리사에 도전
“퇴직할 무렵 몸이 안 좋았어요. 고혈압, 목 디스크, 퇴행성관절염에 소화불량, 이명, 비만도 있었고요. 그래서 은퇴 후 건강관리를 위해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발 관리, 경락 마사지, 스포츠 마사지, 쑥뜸, 척추 교정, 다이어트 식이요법 등 여러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피부미용사 국가 공인 자격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주 씨의 전직은 경북도청 공무원. 7급 주사보로 시작해 꼬박 30년을 채우고 6년 전, 정년퇴직을 했다. 나이 육십에 아무 준비 없이 나오고 보니 막막할 뿐이었는데 우연히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전까지 자유업에 속하던 피부 관리 분야가 2008년 국가 자격증이 신설되면서 전문직종이 된 거예요. 새로운 일을 하고 싶던 참에 바로 도전에 나섰죠. 그 길로 문제집을 사서 피부학, 화장품학, 피부관리기기학, 공중보건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필기시험을 쳤습니다.”
생소한 과목이긴 했으나 워낙 암기에 자신 있던 그는 한 번에 통과했다. 문제는 실기시험이었다. 혼자 공부하기엔 한계가 있어 피부미용학원에 등록했지만 젊은 여성 교육생들이 남자,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과 같이 실습하려 하지 않았다. 여성 마사지 모델을 구하기가 꽤 힘들었단다. “2시간에 2만원, 돈을 주면서까지 아르바이트 모델을 썼어요. 모델이 없을 때는 시중에서 구한 마네킹을 가지고 연습했습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 외에도 어려운 점은 또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목, 팔, 다리 마사지도 해야 하거든요. 거의 반라의 여성 모델을 처음엔 눈이 부셔 쳐다보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눈을 어디다 둘지 난감했죠, 솔직히….”
20대 젊은 여성 지원자들 사이에서 주 씨는 실기시험에 당당히 한 번에 합격했고 2009년 5월 피부미용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동안 이 모든 일은 아내 모르게 저질렀다. 자격증을 내보이며 피부관리숍을 차리겠다고 하자, 아내가 펄쩍 뛰었단다. 남자로서 할 일이 못 된다는 거였다. 그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0만원을 투자해 20평짜리 피부관리숍을 창업했다.
◆‘100세 건강 스마트봉운동’ 직접 개발
그의 가게는 꽤 성업했다. “고객의 90%가 여성이라서 숍 운영이 쉽진 않죠. 창업 초창기엔 파리만 날렸어요. 주 고객층이 여성인데 나이 많은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얼굴과 몸의 마사지를 맡긴다는 게 어째 선뜻 내키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마사지가 고객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하며 호응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피부 관리뿐 아니라 경락마사지, 자세 교정, 식이요법 등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 해박한 지식으로 고객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 줬더니 1년쯤 지나자 입소문을 탄 가게에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주 씨의 인생 이모작은 피부미용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부관리숍을 운영하며 건강 관련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나름대로 건강 이치를 터득하게 됐어요. 나이가 들면 몸이 굳어지고 골격과 자세가 틀어져 몸이 아프며 여러 가지 질병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죠. 내 스스로 뭉친 근육을 풀고 골격을 바로잡는 운동 방법은 없을까 연구하게 됐습니다.”
그가 개발한 일명 ‘100세 건강 스마트봉운동’. 도구와 자기 체중을 이용해 주로 누워서 하는운동이다. PVC 파이프에 보온재를 덧대고 인조가죽을 감싸 만든 지름 9cm·길이 50cm의 작은 스마트봉에 그의 원대한 꿈이 걸려 있다.
“스마트봉 운동을 통해 굳은 근육은 풀리고 틀어진 목, 어깨, 등, 허리 골반 등의 골격이 바로 잡히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운동법으로 저부터 효과를 톡톡히 봤거든요. 우선 고혈압 약을 끊었고요. 고관절을 바로잡고 목 디스크도 해결했어요.”
가족, 친구들, 피부관리숍 고객에게도 권유해 봤더니 스마트봉운동 효과가 입증됐더란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특허 출원과 상표등록 출원을 신청했다. 또 운동법을 알리기 위해 문화센터 50곳에 강좌 개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이 운동법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한 문화센터에 요가선생 ‘대타’ 자리가 났고 회를 거듭할수록 운동 효과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전해지면서 그의 강좌 수강생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를 계기로 주 씨에게 여러 문화센터에서 스마트봉운동 강좌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주 씨의 향후 목표는 ‘강사 양성’이다. 스마트봉운동 강사를 배출해 더 많은 사람이 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보급하고 대중화를 이루겠다는 심산이다. 최종 목표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인근 농촌에 ‘자연건강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다.
춤을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 영화 ‘쉘 위 댄스’는 강신영(63) 씨의 두 번째 인생과 닮아 있는 듯하다. 지긋한 나이에 단단히 춤바람이 났으며, 그 춤이 남녀가 함께 추는 댄스스포츠라니… 게다가 순수한 열정으로 뒤늦게 춤을 배워 멋진 댄서로서의 꿈까지 이뤘으니 말이다.
“흥겹죠? 원래 인간은 ‘호모 루덴스’라고 하잖아요. 본능적으로 유희를 즐기는 동물이란 의미지요.”
건설자, 스포츠장갑 회사 공장장, 스포츠 브랜드 사장으로 이어지는 25년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마흔 여덟 나이에 시작한 제2의 인생. 강 씨는 댄스스포츠 지도자이자 댄스칼럼니스트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타고난 춤 달인 기질에 꿈틀거리는 열정
강씨가 춤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동네 ‘용산극장’에 가끔 쇼단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댄스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트위스트 김’ 쇼를 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였다. 학생 신분이라 입장 불가였던 그는 쇼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추는 춤을 흉내내며 따라하곤 했다. 그의 다져진 춤 실력은 경주 수학여행에서 위용을 뽐냈다.
“트위스트 음악이 나오자마자 총알같이 나가 춤을 췄더니 모두들 경탄하며 환호하던 걸요. 내성적이고 조용한 학생이던 저는 그 일을 계기로 확실히 ‘튀는 아이’가 됐습니다. 또 친구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지요.”
‘젊음의 행진’이라는 인기 쇼 프로 무대까지 나가 춤을 췄을 정도였으니 그는 학교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춤의 지존’으로 통했다.
“춤에 대한 열정은 이때부터 늘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른이 된 그는 좋아하는 춤을 계속 출 수 없었다. 학생 때는 춤을 추면 마치 불량학생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하고 성인이 배우는 사교댄스도 퇴폐문화로 보던 그 시절, 결혼을 약속한 애인의 심한 반대로 춤추기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그를 춤의 세계로 이끈 것은 독일에서 건설 해외지사 주재원으로 일할 때 본 로렐라이 마을축제의 춤이었다. 강씨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선율에 맞춰 밟는 스텝에 깊이 매료됐다.
“그들의 춤은 우리와 달리 매우 밝아 보였어요. 퇴폐적인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어울려 즐겁게 같이 출 수 있는 춤도 있구나.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춤은 댄스스포츠의 한 종목인 ‘자이브’였다. 저걸 꼭 배워야겠다고 그는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려웠다. 서른 세 살의 젊은 청년에겐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다.
IMF 외환위기로 1999년 어려운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기까지 청춘을 불사르며 정말 열심히 달려왔더니 어느 덧 마흔 여덟.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던 춤에 대한 열정, 로렐라이 언덕에서의 다짐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때였다.
◆독일서 본 ‘자이브’에 매료돼 댄스스포츠 입문
“그 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부부 볼룸댄스’라는 이름으로 문화센터에서 댄스 스포츠의 붐이 일기 시작했어요. 춤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던 때라서 ‘부부’를 내세웠던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아내를 설득해 댄스스포츠 중에서도 자이브를 함께 배웠죠. 자이브는 재즈음악에 맞춰 추는 격렬한 춤이에요.”
이후 댄스에 더 열정적으로 빠져 들게 된 강 씨. 문화회관이든 댄스장이든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곳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 춤만 췄다. 춤을 추는 무리 가운데 남자는 그가 거의 유일했다. 청일점이라도 쑥스러워하거나 쭈뼛쭈뼛해하지 않았다. 언제나 용기백배 당당한 댄서의 모습이었다.
댄스스포츠 외에도 살사, 재즈댄스, 방송 댄스 등으로 장르를 확대했다. 댄스 동호회에도 나가고 경기 대회에 나가 챔피언의 영광도 안았다. 커플댄스로 댄스스포츠 10종목, 사교춤인 블루스 지터벅, 사교 라틴 살사, 메렝게, 바차타, 스윙, 맘보, 아르헨티나 탱고, 포크댄스까지. 자유자재로 출 수 있는 달인 경지에 올랐더니 가르침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번엔 ‘지도자’에 도전했다. 2003년 경기대 사회교육원에서 댄스스포츠 코칭 아카데미 1급 자격증을 1년 만에 땄다. 강 씨는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인 영국 유학도 계획했다. 2004년 여름,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은 돈으로 쉰 두 살에 영국 댄스스쿨 ‘셈리(Semley) 스튜디오’에서 두 달간 과정을 이수, 국제댄스스포츠지도자(IDTA) 자격증을 땄다.
“웬만한 실력자들도 3번 정도는 떨어지는 게 보통이라는데 나는 최우수 성적을 기록했다”는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항상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써왔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했단다.
귀국 후 그는 곧바로 ‘댄스앤조이’라는 댄스동호회를 만들고 댄스지도자 및 댄스칼럼니스트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댄스스포츠 전문 잡지의 기자로 일하며 댄스스포츠 관련 책도 4권이나 냈다.
“댄스 칼럼을 쓰면서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댄스스포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 주고 옳지 않은 부분은 밝혀내 정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 중에서도 댄스스포츠가 건강에 여러 가지로 좋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설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유산소 운동이라서 운동 효과가 크고 친목을 도모해 우울증 개선에도 좋다고 했다. 좋아하는 춤을 마음껏 추니 행복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저절로 젊어진다는 게 강 씨의 얘기다.
그는 춤 전도사를 자처한다. 댄스스포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보급을 위해서다. 요즘은 사교춤과 구분해 댄스스포츠를 건전한 체육행위로 보는 경향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단다. 그는 “앞으로 내게 남은 8만 시간을 오롯이 건전하고 아름다운 춤을 나누는 일에 쓰겠다”고 말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국 도성 성곽길이다. 성곽은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현장학습이다. 거기에 운동효과까지 얻을 수 있어 일석삼조다.
서울에도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성곽길이 많다. 그중 한양도성 성곽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서울 토박이라도 한양도성에 가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옛 서울 한양이 18.6㎞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현대화로 인해 잊혀진 유적지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양도성 성곽은 수도권 지하철을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트레킹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한양도성 성곽은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와 숭례문·흥인지문·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다. 북촌 전망소와 옛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북악산 정상 백악마루, ‘1·21 사태 소나무’ 등이 인기 코스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처음 차지했을 당시 쌓은 성으로 현재 몇 개의 보루(지금은 초소)만 남아 있다. 그러나 아차산성은 1보루 위에 오르면 한강을 비롯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요새다. 산성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천혜의 입지와 빼어난 자연경관 덕에 일출 명소로도 손꼽힌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물로 총 길이 5.7㎞다. 대부분의 성곽이 그대로 보존·복원돼 성곽을 따라 걷기만 하면 완벽한 트레킹 코스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으로 변화무쌍한 코스 덕에 지루함이 없다. 화서문 앞 이름 없는 주막과 먹자골목에서는 다양한 요리를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부산 금정구의 금정산성은 동서남북으로 총 4개의 문이 있다. 길이는 17.34㎞로 넓어 어떤 문으로 들어가 어떤 문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답사 코스가 달라진다. 게다가 산길 양쪽으로 음식점도 많아 식도락가 사이에 인기다. 산성막걸리와 흑염소불고기가 대표 먹을거리다.
충남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의 도읍 웅진(현 공주)을 수비하기 위해 축조된 성으로 총길이 2.6㎞의 포곡형이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금서루에서 왕궁추정지와 쌍수정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성벽 길을 따라 펼쳐진 멋진 풍광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공주를 관통해 흐르는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몰린다. 4~10월 매주 토·일요일 금서루에서는 웅진수문병교대식이 열리며, 백제 의상 체험, 활쏘기, 백제 왕관 만들기, 백제 탈 그리기 등 다양한 체험 코너도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