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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란 자신을 찾아가는 천직 여행”
- 인생을 2모작도 아닌 5모작까지 치르고 지금은 6모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람, ‘N잡러’ 장필규 행복 제1연구소 소장은 1955년생으로 정확히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100% 베이비부머다. 그는 요즘 프리워커로서 고용노동부 내공강사, 노사발전재단 전문강사, 경기도 6차산업 현장 코칭 컨설턴트, 인천농촌융복합 현장코칭 전문위원 등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년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는 셈. 장차 6모작을 넘어 9모작까지 완성하는 게 꿈이라는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삶과 잡(job)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제 인생의 4모작은 50플러스재단 컨설턴트였고, 5모작은 N잡러로 활동하는 지금이죠. 이제 6모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니어에게 일은 새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여행하듯이 즐거움을 찾는 거지요.” ‘N잡러’ 장필규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지방자치단체의 컨설턴트와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9모작을 최종 목표를 두고 6모작을 준비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어 케어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네요.(웃음)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대에도 취약 계층이 있을 거예요. 제 연배의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예전에 거창에서 일할 때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같은 입장이 될 텐데 이야기 들어주고 도와주니 즐겁더라고요.” 퇴직 없는 삶 위한 평생현역 꿈꿨으나… 그의 이름에는 베풀 장(張), 도울 필(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줄 때 베풀고 도와주라는 의미로 새긴 게 아닐까. 현재 그의 모습은 이미 숙명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1년 두산그룹 계열사인 배합사료 회사 두산곡산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펼쳐지던 시기였고 그의 삶 또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그도 사회적 환경에 따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에게 던져진 자리는 두산종합식품 식품사업 부문의 김치공장 관리부장.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공장으로 간 그는 관리부장, 공장장을 거치며 10여 년간 김치 제조의 일선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두산이 식품사업 부문 전체가 대상에 매각될 때 그는 6년 후배가 상사로 승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대상 소속으로 2년 정도를 더 지내다 2008년 4월에 퇴직한다. 끊임없는 도전, N잡러로 거듭나다 54세의 나이, 인생 1막이었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27년은 끝이 났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치주염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는 수술 후 재취업을 도와주는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법, 면접 스킬 등을 교육받은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농업 최고경영자 경영대학원 과정에 합격한 뒤 몇 번의 테스트까지 통과하며 마침내 울진농수산물유통농업회사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올라간 자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결국 대표 자리를 그만둔 그는 마침 일본 회사와 울진군의 합작 회사인 울진로하스코리아에서 대표 제안을 해와 CEO로서 3년을 지냈다. “인생 2막의 과정은 지방에서 CEO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재무 문제도 해결되고 가족관계는 물론 건강도 좋아졌죠.” 울진로하스코리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2년 말부터 일자리희망센터를 찾고 취업박람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진흥청에서 마케팅 전문위원으로 인생 3막을 펼쳤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하며 농가 500곳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어 서울시 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고용노동부 등지에서 강사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4막의 장을 펼쳤고 진정한 N잡러가 되었다. 수입 적더라도 즐거움 주는 천직 찾아야 “이제 베이비부머들은 잡(job)이 아니라 워크(work)를 해야 해요. 워크는 천직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시니어 구직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제2인생에서는 일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일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수입은 적더라도 길게 오래할 수 있는 천직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직업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세 개 내지 다섯 개는 가지고 있어야 과거 연봉의 절반 정도가 되죠. 특히 시니어는 공부를 위한 비용이나 손주들 용돈, 네트워크 유지비 등 지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관계의 유연성이다. “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제 주위를 보면 어떤 사람과는 케미가 맞지 않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건 취향이기에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순 없죠. 다만 기왕이면 유연성을 갖고 적을 만들지 말아야 평화롭고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 유연함으로 세상 대하기 그런데 삶의 부침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유연성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어느 접점에 있든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많아져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그는 도전적이라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해온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도 그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사학위를 가진 시니어도 일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인은 디테일에 약해요. 그래서 매뉴얼이 있어도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써먹지 못합니다. 습관화가 안 된 게 문제입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계속 반복하고 고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구직을 하려면 ‘어떻게’에 관한 디테일한 액션 플랜을 짜서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테스트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이기에 신뢰가 갔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천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는 그도 구직자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구직자들을 상담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양쪽을 다 경험해본 그에게 두 입장에 대해 물어봤다. “구직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게 세분화, 효율화되고 향상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시도가 진행되다가도 중간중간 끊기더라고요. 그게 아쉽죠. 그리고 구직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래도 구직을 위해 오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거예요. 흔히 퇴직하면 ‘또 직장생활을 해야 해?’, ‘날 찾아주는 데는 없어’ 하며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죠.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퇴직하는 순간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무책임한 거죠. 그런 심리를 어떻게 끌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그는 은퇴자 혹은 퇴직자들이 자기진단을 해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적합한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자신을 파악하고 일을 찾다 보면 현실의 갭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걸 인내하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인 중에 20년 동안 독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결론은 나를 찾게 되더라’ 하더군요.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준비하면 일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욕심의 분모 줄이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이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 더욱 의욕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0세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것’이라고 한 말을 다시 전한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어요. ‘60~65세가 자신의 황금기였다’는 김형석 교수님 말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N잡러 장필규 소장은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소욕지족(少欲知足)에 비유했다. 행복해지려면 욕심의 분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의 분모를 자꾸 키우면 내려놓기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100분의 60과 60분의 60을 비교해보세요. 후자는 60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죠. 이렇듯 분모를 줄이면 60분의 60이 1이 되듯 가벼워집니다. ‘1’과 ‘일’처럼 디테일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 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결국 ‘1’과 ‘일’처럼 은퇴 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죠.”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많고 적음을 떠나 돈과 건강, 관계, 여가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강조하는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고 여행하듯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담대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 2019-08-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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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발전재단ㆍ한국고용정보원, 신중년 고용촉진 위해 협력
- 노사발전재단과 한국고용정보원은 지난 3일 노사발전재단 회의실에서 ‘신중년 고용촉진 방안 마련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간담회는 신중년을 대상으로 생애경력설계 및 전직지원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노사발전재단과 국가고용정보망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한고원이 일자리 알선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 기관의 기관장, 실무자 등 14명이 참석한 이 날 간담회에서는 한고원에서 운영 중인 ‘일자리포털’과 직업훈련포털인 ‘HRD-Net’을 시연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또한, 두 기관의 신중년 대상 사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사발전재단 이정식 사무총장은 “일자리에 대한 다양한 수요를 가진 신중년 재직자와 구직자들에게 현장과 정책이 접목된 양질의 고용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책임감을 느끼고 두 기관이 협력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한고원 이재흥 원장은 “두 기관이 협력을 통해 일을 원하는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수요자 중심의 고용 노동 전문기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 2019-07-0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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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부도의 날’ 무너진 금융맨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지난해 말 개봉돼 흥행가도를 달렸던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증권회사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직감한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여기서 궁금한 것 한 가지. 느닷없이 회사를 떠나는 윤정학을 바라보던 나머지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평범했던 그 금융권 회사원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의와는 달리 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와야 했다. 제주에서 만난, 현재 제주햇살담음에서 행정 및 연구실장으로 지내는 최종보(崔鍾甫·61) 씨도 그랬다. “아내가 그 영화를 보고 그러더군요. 고구마를 스무 박스 먹은 기분이라고요. 저 역시 먹먹했습니다.” IMF는 국내 금융시장에 거대한 생채기를 남겼다. ‘5대 은행’으로 손꼽히던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중 원래의 사명(社名)을 유지한 곳은 SC제일은행이 유일할 정도다. 대부분 둘이 하나가 되거나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외에 많은 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용돌이 속에 최 씨도 있었다. “저 역시 당시 번듯한 은행에 다니고 있었죠. 1983년에 입사해 지점에서 8년 현장 경력을 쌓은 후 본사 인사부에서 일했어요. 당시 제 관심사는 해외 점포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것이었어요. 주재원 자격도 얻어 관례상 발령이 눈앞에 있었고, 이를 위해 입사 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했죠. 저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 점포 근무를 꿈꾸면서요. 하지만 34개나 되던 해외 점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더군요. 회사의 존립마저도 걱정해야 하는 위기가 불어 닥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둘 중 한 명 나가라 강요하던 ‘지옥’ 이후 회사에서 벌어진 장면들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1만 명 가까이 되던 직원 중 절반은 명예퇴직 대상이 됐다. 인사부 담당자 5명이 5000명에게 대상자임을 전화로 알렸다. 저승사자 역할을 한 사람 중에는 최 씨도 있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눈물 젖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선배이자 동기이자 후배였다. 형편없는 음질의 구식 전화였지만 감정은 여과 없이 전달됐다. “못할 짓이었죠. 딱 5일째 되던 날 저도 사표를 썼어요. 통보를 받은 어느 누구도 저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더라고요. 직전까지 실적이 좋았던 우수사원들도 거래처가 줄도산한 탓에 저평가자가 되면서 가차 없이 잘려나갔어요. 해외 점포들도 모두 폐쇄되면서 제 꿈도 함께 날아갔죠.” 불과 며칠 전까지 9시 뉴스는 우리 경제의 건실함을 알렸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외환위기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최 씨는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증언한다. “번듯한 명함을 들고 참석하던 동창회 참석 인원은 10분의 1로 줄었죠. 친구 부인들은 마트 계산원 같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자리를 찾아 나섰어요.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어 망한 친구도 많았고요. 은행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던 청원 경찰은 300만 원 가까이 되던 월급이 3분의 1로 줄었고, 신분도 계약직으로 전환됐죠.” 퇴사 이후의 삶은 ‘실패 사례집’ 당시 41세였던 최 씨. 이후 이 가장의 인생 여정은 ‘외환위기의 세대’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실패 사례를 보여주는 듯했다. 은행에서 나와 입사한 외국계 보험회사에선 입사 초반 억대 연봉의 ‘꽃길’을 걷는 듯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해외 발령을 위해 준비했던 영어 실력으로 차린 입시학원도 초창기엔 잘됐지만 건물주와의 분쟁으로 보증금을 손해보고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특허기술을 바탕으로 새집증후군 제거 회사를 차렸지만, 후발 업체의 덤핑 경쟁으로 쓴맛을 봤고, 청소 프랜차이즈에 가입했다 본사의 부도로 가맹비만 날렸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많은 가장처럼 그 역시 많은 것을 잃었다. 우울증을 겪었고, 술에 의존하는 시간도 늘었다. 대출을 주선했던 은행 선배를 다시 볼 면목도 없어졌고, 피해의식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나락으로 떨어졌을 땐 친구가 며칠에 한 번 보내주는 막걸리 값에 의존해 살았을 정도였어요. 아내가 융통한 생활비로 겨우 살아갔죠. 집과 차는 이미 제 것이 아니었고요. 나에 대한 원망이 계속됐죠. 그래도 그 과정에서 날 버티게 해준 것은 공부였어요. 책과 강연을 읽고 들으며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어요. 결국 외환위기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고 자책을 멈췄어요.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죠.” 새로운 직장에서의 성공적 출발 그리고 2015년, 그는 제주행을 선택한다. 서울에서 갑들에게 매몰되는 직장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들면 서울을 벗어나 살고 싶은 소망도 있었고, 당시 제주엔 중년도 할 만한 일거리가 있을 거라는 추천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59년간의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렌터카 회사와 주유소에서도 일했고, 호텔에선 프런트부터 시설관리, 청소까지 했어요. 하지만 한 번도 나를 낮게 보거나 일을 얕잡아본 적은 없습니다. 세간이 주는 가치관에 연연하지 않고,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죠. ‘러브 유어셀프’를 들으며 방탄소년단의 팬이 된 것도 이 즈음이죠.(웃음)” 그러다 우연히 제주도청에서 노사발전재단의 지원 책자를 본 것이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됐다. 제주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소개로 2018년 4월 19일, 그의 전공과 다양한 사회 경험을 인정받아 화장품 회사인 제주햇살담음의 행정 및 연구실장으로 입사한다. 실로 오랜만에, 사무실 책상 앞자리로 복귀한 것이다. 제주햇살담음은 제주에서 자란 건강한 재료를 바탕으로 유기농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다. 온라인 쇼핑몰과 소셜커머스를 통해 전국에 제품을 판매 중인데 입소문을 타고 늘어난 충성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보다 두 배 늘어난 매출 달성도 눈앞에 두고 있다. “직원 7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이다 보니 연구개발에서 제품 영문번역, 세무·회계 관련 업무까지 맡고 있어요. 회사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각종 지원제도에 도전해 중장년·청년 지원제도 등의 지원금도 확보했죠. 회사 자금이나 매출에 기여할 수 있어서 보람이 커요.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 젊은 직원을 선호하는데 마케팅이나 경영, 금융, 행정 등 다양한 분야의 경험자들은 중장년임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는 비슷한 아픔을 겪어온 또래의 동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놓는 것이 필요해요.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일자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일자리에 대한 기준이 낮아져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감은 잃지 말기를 당부드려요.”
- 2019-06-1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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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업 컨설턴트가 말하는 중장년 재취업 5가지 원칙
- “국내 중장년 취업에 대한 지침의 상당수는 가짜 뉴스 수준입니다.” 2005년부터 한국과 미국계 전직지원(轉職支援) 회사를 통해 중장년 재취업과 인생 2막 설계 컨설팅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돈·일·꿈 연구소 간호재(簡鎬宰·49) 소장의 일갈이다. 현재 인력수급기업 ㈜에이치알맨파워그룹에서 4050 재취업컨설팅 사업부에 소속돼 활동 중인 그는 40~50대의 재취업을 위한 제도가 빈약하고, 지나치게 단기적 성과를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중장년들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서 ‘4050 재취업 성공의 비밀’을 통해 중장년 재취업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제시한 그를 만나 40~50대가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5가지 원칙에 대해 들어봤다.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라 간 소장은 우선 퇴직 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랜 직장생활로 굳어진 몸과 마음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조직생활은 사람을 경직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어요. 특히 공기업, 대기업 출신이 더 심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직장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또 원하는 직장과 새로 진출하고 싶은 분야가 있으면 스스로 알아보고 기본 조사활동 등을 해야 하는데 수동적인 태도가 발을 떼기 어렵게 만듭니다. 퇴직자들이 일자리 관련 기관에서 무턱대고 좋은 직장을 소개해 달라고 하거나, 프랜차이즈 사업에 현혹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현장에서 구직자들을 만나보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뿐, 대다수가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간 소장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라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거나 관심 분야에 대한 시장조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게 돼요. 그동안 쌓아온 인맥도 도움이 되고요. 하지만 방 안에서 인터넷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넷 정보는 한계가 있다 간 소장은 “갈 곳이 없다며 푸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정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구직자들을 만나 구직활동에 하루 몇 시간 투자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2시간도 채 안 돼요. 중장년 구직자, 특히 공기업·대기업 출신자들은 그렇게 해선 원하는 직장을 찾기 어려워요. 그 나이의 재취업은 부장급 이상을 바랄 텐데, 중견기업도 그 정도 직급은 채용공고를 통해 선발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까요.” 그가 권하는 방식은 “나를 마케팅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일을 잘할 수 있을 만한 기업을 골라 해당 기업의 임원이나 대표에게 직접 접근해보라는 얘기다. “수십 년간 직장생활을 해왔으니, 자신이 조직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 점을 기업이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부장급 이상 직원 채용에 관여할 만한 임원이나 회사 대표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회사에 어떤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제안서’를 보내보라는 겁니다. 물론 정성을 들여 작성해야겠지요. 특히 우편을 통해 전달된 서류는 의사결정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결원이 생겼을 때 자연스레 후보 대상이 될 수 있지요.” 임원 채용 시에도 자소서를 본다 그는 재취업 과정에서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수십 년 전 입사해 지금까지 일만 해온 분들이라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또 성장 과정 등을 작성할 때 빈칸 채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기업에서도 임원 채용을 할 때 자소서를 봅니다.” 간 소장은 입사하고 싶은 기업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할 때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했다. 바로 회사 입장을 생각하면서 쓰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작성하고 마는 것이죠. 하지만 서류에 들어갈 내용은 회사가 듣기 원하는 것들이어야 해요. 자신이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태도와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줘야 해요. 그러려면 성장 과정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기업에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에요.” 눈높이 낮출 필요 없다 중장년 취업과 관련된 기관이나 전문가들은 구직자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한다. 부족한 일자리에 경쟁도 심하니 설령 낙오되더라도 좌절감에 빠지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 확보부터 하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간 소장은 반기를 든다. “그동안 전문성을 갖고 기업이나 기관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왔던 40~50대라면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춘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최저임금 정도로 급여 수준이 낮다면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까요? 또 연봉을 낮춘다고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연봉을 얼마나 낮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재취업할 기업을 위해 어떻게 이바지할까를 고민하는 게 훨씬 합리적입니다.” 그는 만약 연봉을 낮춰야 한다면 그 마지노선을 전 직장의 70%로 잡으라고 조언하면서 100일 안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계획을 잡고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발적인 준비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할 경우 취업 요령이 생겨 원하는 시점에 회사를 옮길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의 기틀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간 소장은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때 “돈부터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돈부터 쓸 생각 버려라 “창업 업계에서 공무원, 군인, 교사 등의 퇴직자는 주요 고객입니다. 금전적 여유도 있고 돈으로 투자하는 결정을 쉽게 내리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지요. 퇴직 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6개월 정도는 무작정 쉬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여행도 하고 취미활동을 하며 시간을 잘 보내다가 어느 날부터 주변 눈치를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무턱대고 자격증부터 따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겪게 되는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체면을 세우기 위해, 창업이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돈부터 쓸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잘못된 결정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을 입으면 남은 삶을 포기할 수도 있어요.” 창업을 하고 싶다면 자산 규모에 맞춰 실패를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고려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가 기술·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40~50대가 여생을 설계할 때는 일보다 삶을 우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지금의 중장년들은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요. 조직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은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고 온전한 독립을 이뤄내야 하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책임이 끝날 때는 완전한 해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 이 시점에 이루고 싶었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도 고려 사항이 되는 것이죠. 일이 인생을 결정했던 평생직장 시대와 달리 지금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나서 그에 맞춰 직업을 고민해야 합니다. 충분한 사유를 통해 인생 2막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 2019-05-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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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한반도면 산골에 귀촌한 사진기자 고명진 씨
-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4-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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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발전재단 울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확장 이전
- 노사발전재단 울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확장 이전했다. 노사발전재단은 14일(목) 송철호 울산광역시장, 김종철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장, 황세영 울산광역시 시의회의장 등 내외빈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울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이전 개소식을 개최했다.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근로자종합복지회관 2층에 자리 잡은 울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는 울산지역 40세 이상 중장년을 대상으로 생애경력설계프로그램과 전직스쿨, 구인구직서비스, 재취업 교육 등 중장년층에 특화된 고용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인생 2․3모작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단계별․유형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생 후반기 계획 수립 및 경력관리․능력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 서비스를 무료로 지원한다. 노사발전재단 이정식 사무총장은 “울산센터가 울산의 중심지인 삼산동으로 확장 이전함으로써 고객들의 접근성 및 편리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라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울산 중장년층이 계속 우리 사회의 중요 구성원으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노사발전재단은 울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비롯한 전국 12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및 금융특화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울산지역에서 다양한 전직지원서비스를 받기 희망하는 중장년 구직자와 기업은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또는 울산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 2019-03-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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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아의 직급 없는 호칭과 유니폼, 이제는 행복한 노후 상징됐어요”
- “계상 씨 이것 좀 도와주세요.” 22세 여직원이 건네는 말에 그는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리지 않은가. 평생을 이사, 상무라는 호칭 속에 살던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동료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낯선 환경이 그는 괴롭지 않았다. 마치 새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케아에서 변화된 삶을 즐기고 있는 이계상(李桂相·63) 씨 이야기다. 이계상 씨가 근무하던 곳은 영등포에서 실크로 유명했던 섬유회사. 지금은 역사 속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종사자가 4000명이 넘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3만 평 부지가 공장 시설로 차 있었고, 근로자를 위한 사내 학교까지 운영됐었다. 중국이 국제시장에 경쟁자로 등장했을 때 사업다각화를 하지 못한 것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 결정타를 맞았다. “회사가 쓰러진 후에도 창업주 곁에 남아 재건을 도모했죠. 나중에는 자동차 관련 생산업체가 설립돼 그곳에서 상무이사로 정년을 맞이했어요. 새로 설립한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섬유회사가 쓰러진 직후의 삶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죠. 회사를 지키지 못한 것이 낙인처럼 느껴져서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했으니까요. 외환위기 직후에는 월급이 나오지 않아 아내가 칼국수집을 해야 했어요.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 작은 가게였는데, 재건 작업 후 퇴근하면 가게로 출근해 아내를 돕곤 했죠.” 그가 창업주 곁을 떠나지 않고 35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1979년 2월 입사해 시작한 회사생활을 2014년 2월에 마감했다. ‘국가부도의 날’도 이후 찾아온 금융위기도 멈추지 못한 직장인으로의 삶이 정리되는 날이었다. 귀농 후 투자한 오미자 농사 실패 사실 그는 퇴직 후에 농부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충주의 논밭을 다시 가꾸겠다는 다짐이었다. 비어 있는 집도 아직 쓸 만했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었다. “퇴직 전 농협대학교 주말 귀농·귀촌대학을 이수했어요. 퇴직 후에는 중장비를 동원해 묵은 밭도 갈고, 집도 수리해 본격적인 귀농생활을 시작했죠. 농업기술센터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정보도 얻으면서 이대로 고향에 정착할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회사생활처럼 우직하게 해나가면 다 순조로울 것이라 믿었는데, 초보 농부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주변에서 오미자 농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추천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엔 효소 열풍이 불어 오미자 수요가 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에서 시설지원까지 받아가며 1000평이 넘는 땅에 오미자를 가득 심었죠. 오미자는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수익성이 좋아지는데, 심자마자 오미자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효소가 설탕뿐인 허상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오미자로 손에 쥔 돈은 단돈 300만 원이 전부였고, 두 집 생활비와 교통비를 퇴직금으로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2017년, 고민에 휩싸여 있던 귀농 2년 차에 친구의 조언을 듣고 그는 농사를 포기한다. 본전 생각으로 투자금에 미련을 뒀다가는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의 삶은 주변의 중장년 구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워크넷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매일같이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뿌렸다. 하지만 고령자인 그의 손을 잡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많은 회사에 건넸던 말이다. 이력서 내는 것쯤은 자유일 텐데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는 눈치를 봤다. “안 된다는 곳이 많았죠. 어떤 곳은 단순 안내직이었는데, 나이가 많으면 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니 이력서 낼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아직까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사는 일산 근처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 그곳에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이케아 광명점에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계십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는 또 물었다. “사무직 출신이라 접객 경력이 없는데 괜찮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채용 후 교육을 받으면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입사지원과 면접을 거쳐 합격 전화를 받게 됐고, 여전히 아내 앞에서 자랑스러운 남편일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수평적 기업문화에 감탄 한국의 경제성장 초창기를 장식했던 섬유산업의 전통적인 기업문화 속에서 평생을 일해온 그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그것도 외국계 기업 소속으로 해내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이 씨는 “유니폼이 가장 어색했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확실히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거의 모든 것이 달랐어요. 전통적인 연공서열 조직문화에서 간부들은 뒷짐지고 도장만 찍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파트너십으로 연결된 수평적 구조예요. 주변 부서가 손이 모자라면 다 같이 가서 도와요. 직급의 상하 여부 상관없이 말이죠.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호칭이에요. 이곳에서는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20대 어린 친구들에게도 저는 ‘계상 씨’예요. 상무님, 이사님으로 불리다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웃음)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퇴근 후 젊은 직원들과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가 놀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원들에게 자기계발을 늘 독려하는 회사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사내채용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모습은 한국 기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근무처인 고객지원센터에 장애인 직원이 배치된 것도 그에겐 생경하게 보였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반복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몫을 당당히 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실 한국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애인 직원을, 그것도 기업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고객 대면 부서에 배치할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이케아 인사 담당자는 “고객 대면 부서에서도 근무 방식이 다양해 장애인 직원도 충분히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케아에서 ‘다양성과 포용’은 사내 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별, 나이, 배경, 장애 유무 등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며, 동네 지인을 마주쳐도 유니폼 차림의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기업문화도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 노사분규 협상장에서 사측 자리에 앉은 그의 어깨를 눌러대던 부담감도 이제 없다. “경제적 이득보다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행복이 커요. 삶의 활력도 얻고 건강관리도 돼요. 체력적으로 괜찮다면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어요. 다른 중장년 구직자들에게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꼭 나타나니까, 과거 경력에 매이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자리를 찾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 2019-03-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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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관리직으로 변신한 전자전 장비 전문가 강석진 씨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그는 매일 듣던 라디오도 꺼버린 채 적막만이 가득한 시간을 달렸다. 유일하게 작은 소음을 내는 것은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쉬세요”라는 말과 함께 갑작스레 받게 된 퇴직 권고의 결과물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더 잘 보여야 했나?’, ‘누구 탓이지?’ 온갖 질문을 해댔지만 속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강석진(姜錫珍·63) 씨 이야기다. “안 타본 해군함정이 거의 없어요.” 전직을 이야기하다 군함 이야기가 나오니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우리나라 해군의 주력 구축함인 충무공이순신함부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독도함, 안타깝게 뭍으로 올라오게 된 천안함까지 우리 해군의 함정 중 상당수는 그의 손을 거쳤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방위산업체인 LIG넥스원에서 주로 해군함정의 레이더 관련 장비 개발을 담당했었다. 1980년 금성정밀공업(LIG넥스원의 전신)에 입사해서 2014년 정년퇴임했다. 이후 관계사로 이직했다가 2017년 말 퇴직권고를 받으면서 방산 장비와 작별을 고했다. “적이 우리 함정을 추적하거나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전자전 장비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장비 개발뿐만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하고 점검해야 했기 때문에 해군과의 협업이 필수였죠. 덕분에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어요. 이제는 멀리서 안테나 모양만 봐도 어떤 배인지 맞힐 수 있는 정도가 됐죠. 한번은 첫 번째로 실전 배치된 장비 운용을 돕기 위해 함정에 올랐다가 ‘실전 상황’이 벌어져 혼비백산한 적도 있어요. 다행히 별일 아니었지만 완전무장한 군인 사이에서 사복 차림으로 난감했습니다.” “일하는 것만으로 애국심이 생겼다” 방위산업체에서의 직장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일하다 보면 애국심이 절로 생긴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도 무슨 일을 하는지 말도 못했어요. 보안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불편함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약이 많고, 특별한 혜택은 없어도 국력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를 갖고 평생을 살았어요. 개발을 위해 몇 주간 밤을 새기도 하고, 외국인 박사들과 머리를 맞대기도 했죠. 덕분에 우리 국방 기술은 이제 세계 수준에 올랐어요. 회사생활 마지막에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개발했던 육군의 디지털 통신망 관련 기술은 미군에도 없는 수준입니다. 우리 전투력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정년은 정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개발에 매달리던 삶이었다. 프로젝트 완성을 위해 이례적으로 정년이 연장되기까지 했다. 때문에 남들처럼 느긋하게 정년 준비를 할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이후 협력사에서의 갑작스런 퇴직 권고와 함께 그에게 독이 됐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알게 됐고,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전기기술에 도전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보통의 퇴직자에게는 전기기능사 자격 취득을 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평생을 전자회로와 씨름했던 그였기에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수원직업전문학교에서 전기기능사 수업을 듣고 나서 교실에 남아 상위 자격인 전기산업기사와 전기기사 준비를 독학으로 했다. 전기산업기사 이상의 자격을 취득하면 전기안전관리자로 공동주택, 즉 아파트 관리실에 취업할 길이 열리기 때문. 담당 강사도 강의실을 비워주고 책까지 빌려주며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전기산업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전기기사는 필기는 붙었지만 실기에서 떨어졌다. 그는 “전기기사 실기는 문제 파악도 제대로 안 되더라”고 말했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젊은이들도 어려워하는 전기산업기사 자격을 취득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전기산업기사 응시자 2만9428명 중 실기까지 합격한 인원은 14.7%인 4334명에 불과했다. 일반 회사와 다른 아파트 관리 문화 자격증이 그의 취업에 전가의 보도 역할을 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아파트 관리 업계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아파트 관리 분야는 일반 직장과는 다른 진입장벽이 있어요. 경력자를 우선 채용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때문에 신입은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처음에 운이 좋았어요. 경력자만 뽑는다는데 무작정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 때 저를 잘 봐주신 소장님 때문에 직장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첫 아파트에서는 격일로 24시간 근무하는 것이 적응이 안 돼서 퇴사했고, 두 번째 아파트를 거쳐 지금 직장은 세 번째 아파트입니다. 이제는 이 일이 적응이 돼서 격일 근무도 문제없어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파트 관리는 크게 3개 직군으로 나뉜다. 관리, 경비, 청소가 그것. 아무래도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관리 직군이 대우도 가장 좋다. 관리 분야는 소방, 전기, 난방 3개 분야를 중심으로 모집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에는 세대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장, 과장, 대리, 반장 등의 직급이 존재하고, 관리 분야 외에 회계 등 행정직 근무자도 있다. 업무 체계는 일반 회사와 비슷하지만 정체된 조직이다 보니 승진 기회가 많지 않다. 때문에 경력을 쌓아 이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파트 관리 업계의 승진 문화가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력서에 잦은 이직 기록이 있는 경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반 업계와 달리 아파트 관리 분야에서는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아파트마다 주민 요구 경향 달라 아파트라는 직장의 소비자는 주민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주민 갑질 논란’의 대상은 주로 경비직이지만 관리직 역시 자유롭진 않다. 전구를 갈아달라는 요구부터 설비 수리까지 다양한 요구사항이 발생한다. “몇 군데의 아파트를 경험해보니까 주민이 젊고 평수가 작을수록 요구사항이 많고, 높은 서비스 수준을 요구해요. 또 인터넷 카페를 통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신경이 쓰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고급 아파트 주민은 아파트 관리 인력보다 상대적으로 기술 수준이 높은 전문가를 선호해요. 집을 아끼려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그래도 저희가 처리한 업무에 대해 감사인사도 건네고 잘 대해주셔서 지금 근무하는 아파트에서는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있어요. 처음엔 친구들에게 아파트에서 일한다고 말하기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해요. 되레 놀고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일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예요.” 그는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업계를 접하면서 눈이 트인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였다. 경력을 쌓고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해 시설관리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제 업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초짜’인 그에게 쉬운 목표는 아니다. “제 나이쯤 되면 목표가 있다는 것 이 중요해요. 그래야 공부도 하고, 체력 보충을 위해 운동도 하고, 달성을 위한 다양한 일도 하게 되니까요. 제 목표가 언제 이뤄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2019-03-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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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성공 취업을 위한 5계명
- 평생 현역시대다. 이런 경향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10월 고용동향 발표를 살펴보면,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2017년 같은 달에 비해 24만3000명이 늘었다. 중장년의 ‘일자리 찾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퇴 후 새 일자리를 찾는 ‘베이비붐 세대’의 진입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장년은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임선화 소장을 통해 그 방법을 알아봤다. 1 진짜 원하는 것이 뭘까? ‘나를 알아야’ 일자리 지원 기관의 실무자들은 “상당수 구직자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의 분야를 명확히 말하는 구직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심지어는 “그냥 좋은 곳으로 하나 소개해 달라”며 떼를 쓰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일자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임선화 소장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아무데나 괜찮은 자리로 취업시켜 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직무 경력을 상세히 설명하고 지원 가능한 일자리를 소개받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물론 원하는 일자리의 이상향을 구체화하는 것도 좋다. 업무 분야나 지역, 근무시간 등도 미리 생각해야 구직에 유리하고, 원하는 급여 수준도 어느 정도 정해놓아야 한다. 생계유지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된다면 봉사활동이나 재능기부 형태의 일자리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2 취업시장에 경로우대는 없다 ‘나를 가꿔라’ “면접 보는 날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시는 분도 적지 않아요.” 일자리 지원 기관 실무자들이 꼽는 가장 난감한 경우 중 대표적 사례다. 애써 면접까지 성사시켜놨더니 최소한의 예의도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구직 행위는 기업에 나를 선보이는 일이다.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다. 중장년 구직자 중 상당수가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기업의 구직자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이 종이 몇 장에 의해 판가름난다. 내가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자신 없다면 관련 기관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것도 좋다.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전직지원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재취업 상담을 통해 작성을 도와주기도 하고, 구직서류클리닉에선 작성된 서류를 점검한 후 모의면접을 통해 면접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 3 나를 위한 ‘꿀’직장은 없다 ‘눈높이를 낮춰라’ 중장년 구직자 선호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재취업 시장에서는 잘나가는 대기업 출신 퇴직자가 ‘기피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의외로 크다는 것이다. 의외다. 가장 체계적이고 선진화한 시스템의 첨병에 있던 인재라면 사람을 취업시켜야 하는 입장에선 가장 좋은 상품 아닐까? 하지만 전 직장보다 주먹구구식인 시스템에 불만만 쌓일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 출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장년을 받아주는 일자리는 대부분 척박하다. ‘왕년에’ 근무했던 일자리와도 대부분 거리가 멀다. 통계청이 지난 10월 발표한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취업자의 산업 및 직업별 특성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취업한 50세 이상 취업자 고용 분야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은 농축산 숙련직이 차지했다. 청소 및 경비 관련 단순 노무직이 뒤를 이었다. 이와 비슷한 통계가 있다. 바로 교육 정도별 취업자 통계다. 중졸 이하 취업자의 분야별 규모 역시 1, 2위가 농축산, 청소 및 경비 관련 순이다. 50세 이상 취업자 통계와 같다. 이는 결국 50세 이상이 얻은 일자리가 흔히 말하는 ‘양질의 일자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눈높이를 낮춰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 유리하다. 4 퇴직 후는 늦다 ‘경력 관리는 미리 준비하라’ 정년퇴직 후 인생 2모작을 준비하는 중장년 중 상당수는 자격증을 돌파구로 삼는다. 퇴직 후 자격증 획득, 그리고 취업의 순서를 꿈꾼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퇴직 후 준비는 늦다”고 입을 모은다. 퇴직 후 자격증 취득 등을 위한 구직 준비기간이 길어지면 이력서를 받아보는 기업 입장에선 경력 공백이 길어진 이유를 의심하기 쉽다는 것. 또 자격증 취득 후 해당 분야로 취직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준비기간은 말 그대로 허송세월이 될 뿐이다. 자격증이 들이대면 구직 문제가 술술 풀리는 ‘마패’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 현장 전문가들이 “자격증 장사에 현혹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 소장은 “퇴직 전 본인의 평판이나 경력, 인맥 등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생애경력설계서비스 등을 통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취득하고자 하는 자격증의 전망 등 정보가 궁금하다면 중장년 취업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같은 기관을 통해 정보를 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5 선입견은 금물 ‘공공기관의 구직지원 서비스를 이용하라’ 정부부처 산하의 기관이나 지차체 등에서 다양한 구직지원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구직 경험자들이 꼽는 공공기관 구직지원 서비스의 장점은 크게 3가지다. 우선 대부분 별도의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사설기관에선 교재나 경력설계, 자격증 취득 등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별된 구직정보도 장점이다. 물론 공공기관이라고 모든 일자리에 대한 검증을 진행하진 않지만, 문제가 될 만한 다단계 등 불량 기업은 어느 정도 선별된다. 마지막으로는 기관의 네트워킹에 있다. 중장년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관기관과 연계하여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형식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이용해보기를 권한다.
- 2019-02-1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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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현대맨’이 찾은 희망퇴직 후 제2인생 해법
- 정년퇴직을 1년 남긴 시점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희망퇴직 공고. 평생을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기쁨으로 알고 일해온 홍노희(洪魯憙·59) 씨는 고민에 휩싸였다. 정년을 채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떠나주는 것이 사랑하는 회사를 돕는 길일까. 37년을 상용차 제조 현장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해온 그의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결같았던 이른 새벽 출근길 떠오른 확신은 결심으로 변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2018년 2월의 일이다.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1981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아이콘 청계고가 위를 포니가 신나게 달리던 시절. 당시 현대자동차는 북미 수출의 꿈을 안고 포니2의 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홍노희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갓 입사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시절의 현대자동차를 이렇게 회고했다. “포니가 인기를 얻으면서 공장은 활기로 넘쳤죠. 저는 특장차 조립 일을 했는데, 건설 붐을 타고 수요가 폭발했던 레미콘 같은 차량을 담당했죠. 컨베이어벨트에서 맡은 부분만 조립하는 소형차와 달리 대형 상용차들은 몇 명이 달라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품을 조립해 완성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내가 만든 차’라는 자부심이 컸고, 소소한 부분까지 공을 들였죠.” 32년간 품질관리 매달려 그런 노력이 회사의 눈에 들었는지, 품질관리라는 개념이 생산현장에 도입되면서 담당자로 발탁된다. 입사 5년 차에 시작한 품질관리 업무는 그렇게 32년간 평생 직업이 됐다. 회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실력을 발휘해 2004년과 2006년에는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우수분임조 은상을, 2010년에는 금상을 받았다. “사실 품질관리라는 분야는 시어머니 같은 역할입니다. 협력업체에서 부품이 제대로 만들어져 왔는지, 그 부품들을 제대로 조립했는지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모든 수치를 암기하고 있어야 했죠. 검사할 때마다 자료를 찾아볼 순 없으니까요. 또 간혹 조립 담당자와 갈등도 있습니다. 조립자들은 할당된 생산량을 맞춰야 하는데, 품질관리자가 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스펙에 미달하는 것을 용인할 순 없었죠.” 퇴직 후 예상과 다른 현실에 당황 그의 퇴직 스토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의 반응이었다. 만류는 없었을까? “아내도 이제 쉴 때가 됐다며 응원해줬어요. 몇 년만 잘 버티면 연금도 나오니까 일찍 노년의 삶을 준비할 기회가 될 거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회사 후배들이 말렸지만 저는 퇴직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덜컥 퇴직하고 나서 당황했다. 그는 “생각과는 달랐다”고 고백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었다. “텃밭에서 과실수를 관리하고 닭 모이를 챙기는 것이 평생 생산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일다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돈 걱정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끊기니 심리적 압박도 있었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취업.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관련 교육도 받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 도움도 받았다. 그런 와중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퇴직 소식을 들은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품질관리를 맡아 개선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것. 그리고 국내 주요 자동차 기업의 우수 협력사로 꼽히는 중견기업 평안정공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자동차 산업에 도움될 수 있어 보람 “긴 공백기 없이 일을 계속할 수 있어서, 특히 제가 그동안 해왔던 품질관리 일을 할 수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또 고향 같은 전 직장에도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더 즐겁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모도 문화도 다른 조직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는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부품을 갖고 조립만 하다가, 직접 쇠를 깎고 다듬는 과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상용차 후륜의 구동부(rear axle housing assembly)를 만들고 조립해 납품하는 일을 합니다. 100분의 1mm만 틀어져도 조립이 되지 않거나, 윤활유가 새어 나오기 때문에 높은 정밀도를 요구해요. 매일 생산되는 약 1000대분의 부품에 문제가 없게 하려면 품질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출근 초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불량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그는 “몽롱했다”고 표현했다. 사람 손에서 나는 오류는 확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공정에서 다시 점검하는 ‘키퍼(keeper) 제도’를 도입하는 등 품질관리 과정을 보강하고, 경영진을 설득해 장비도 새로 들였다. 2억 원이 넘는 투자는 곧 품질로 나타났다. 입사 초기보다 10분의 1 이하로 불량이 줄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제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 너무 즐겁습니다. 저를 믿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경영진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제겐 행운이죠. 평생의 보람이라 생각하는 이 일을 회사에 보탬이 되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
- 2019-02-11 0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