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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미술 쉽게 즐기는 공간 조성에 주력”
- “일종의 장난기로 미술관을 구상했다. 무슨 거창한 뜻을 가지고 설립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사람들이 미술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이왕 미술관을 만들 거면 제대로 해보자는 작정이었지. 회사를 운영하며 얻은 경영 감각이 약간은 있어 자신감을 갖기도 했다.” 이수문(74) 화이트블럭 대표는 중견 기업인 출신이다. 경영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 처음엔 그저 기분에 이끌려 미술관을 착상했다고 하지만 야무진 복안을 가지고 일을 밀어붙였을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는 화이트블럭을 헤이리의 랜드마크로 키우고자 진력했다. 화이트블럭의 행진 방향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대중이 쉽게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 조성에 주력했다. 전시 작품도 유명 작가의 대단한 작품보다 대중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골라 기획했다. 한마디로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싶었던 거다.” 레지던시 운영에도 주력했더라. “신진작가 지원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림을 팔아 제대로 밥을 버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나. 그들은 예상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미술관 운영자라면 신진을 지원하는 게 마땅하다. 개인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전시 기회를 부여하는 일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형편이 어렵기는 사립미술관들도 마찬가지다. “사립미술관이 수익을 내기는 기본적으로 어렵다. 운영자들 대부분이 고생하고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길 거듭하다 마침내 영양실조에 걸리는 형국이지. 화이트블럭만 하더라도 연평균 3억 원 정도의 적자가 발생한다.” 대단한 재력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지속할 수 없는 게 사립미술관이다. 그런데 그는 매년 3억의 적자를 보면서도 용케 화이트블럭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저력을 알 만하다. 사립미술관의 생존 대안은 무엇인가? “내 경우에는 대형화로 길을 모색한다. 현재 내년 개관을 목표로 천안에 미술관을 새로 만드는 중이다. 화이트블럭보다 훨씬 규모가 큰 복합미술관이다. 천안의 핫플레이스로 만들자는 게 목표다. 사람들이 찾아와 서너 시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화이트블럭의 운영 경험을 살려 제대로 해볼 참이다.” 젊어서부터 예술 분야와 인연이 많았다지?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의 산파역도 했고. “극단에 섞여 연극을 하거나 나팔을 불며 음악을 배웠다. 그러나 그저 엉뚱한 여기(餘技)에 불과했다. 예술 분야가 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딴엔 조금 돕기는 했으나 대단할 게 없다. 아마추어 조기 축구회에서 선수로는 뛰지 못하고 그저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역할 정도의 일을 했을 뿐.” 예술인들과 많은 교분이 있다지? 특히 화가들의 삶과 생리에 밝을 텐데, 어떤 유형의 작가를 좋아하나?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게 무슨 견해가 있겠나? 다만 이건 안다. 이름난 화가의 작품이 반드시 훌륭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현재 유명한 작가가 10년, 100년 후에도 명망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난 남들보다 뒤처져 있을망정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가는 작가에게 신뢰를 느낀다.”
- 2022-06-2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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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미술관이라고 깔보지 마소!
- 자본주의의 서사는 부를 통한 욕망의 충족을 축으로 한다. 그러나 돈만으로 욕망과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던가. 의식주의 흐뭇한 향유에서 나아가 내면의 허기까지 채우고서야 삶이 즐거워진다. 이 점에서 미술은, 또는 미술관은 꽤 쓸모 있는 방편이다. 그러나 흔히 미술관을 따분한 장소로 여긴다. 문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쉽고 만만해 보이는 미술관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여기에선 미술과 일상의 간극이 좁아진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은 생활밀착형 미술관이다. 가볍게 커피 한잔 마시러 갔다가 예술을 덤으로 포식할 수 있는 곳이니까. 화이트블럭은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에 있다. 헤이리는 문화예술마을이다. 세상의 관습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버릇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뭉쳐 조성한 이색 마을로 파주의 대표적 문화 브랜드다. 이곳의 길들은 구불구불 연신 휘어진다. 속도와 직진을 숭상하는 풍속에 한 방 먹이는 형국이다. 바닥재로 쓰인 도로의 벽돌 틈새로 돋아난 풀들은 이 공동체 마을 주민들이 생태 환경 유지에도 신경을 썼음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다른 형상과 개성으로 도드라진다. 이 역시 의도된 구성이다. 모든 도시에 만연한 구조의 획일성에 반기를 든 셈이다. 헤이리는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으며, 느낄 것 많은 문화예술지구다. 미술관, 박물관, 작가들의 작업실, 공연장, 서점, 아트숍, 카페,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상업 거리로 변질됐다’고 읽는 눈들도 있지만 사람들 북적이는 곳의 상행위야 필연이며, 그 행태는 어디서나 요란한 법이다. 미감을 돋우는 디자인을 입힌 건물들에 들어앉은 영업집들이 그다지 거슬릴 게 없더라는 얘기다. 사실 헤이리의 명물은 건축물인데 몇 가지 수칙에 따라 조성됐다. 건물 높이는 3층 이하로, 건축 재료는 콘크리트와 목재와 철 등으로 제한했다. 외부 도색도 배제 사항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화이트블럭은 다소 일탈을 감행해 지어진 집이다. 헤이리의 개성 넘치는 건물 대부분이 노출콘크리트 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이 미술관은 유리를 주조로 외부를 마감한 게 아닌가. 화이트블럭은 2011년에 개관했다. 사각형 박스 형상의 지상 3층 건물 외관은 매우 수려해 돋보인다. 외벽 일부엔 하얀 알루미늄 하니컴 판넬을 붙였지만 대부분 커튼월 유리창으로 치장해 유려하다. 벽이되 투명 벽이니 내부가 밖으로 훤히 드러난다. 건물 안에 배치된 사물의 모습과 앉았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향이 내비친다. 통째 외부로 열린 집이다. 내부와 외부가 소통하는 개방적 공간이다. 이런 소통을 사람에 적용하면? 숨긴 속셈으로서가 아니라 탁 터놓은 마음과 마음의 교류? 무릇 밖으로 환하게 열린 모든 것들은 당당해서 아름답다. 초록나무들 무성한 실외 공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낭만적인 카페 풍경이 좍 펼쳐진다. 하늘과 수목이 들이치는 통유리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은 이 순간 평온하리라. 가슴 기슭에 슬픔을 지녔거나 기쁨을 가졌거나, 향기로운 차 앞에서는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곳이 미술관 카페임을 알게 해주는 조형물이 놓인 실내는 세련미가 넘쳐 감성을 일깨운다. 온통 하얀 칠을 입힌 내벽과 기둥으로 이미 밝은 공간이지만, 바깥에서 범람처럼 들이치는 빛의 행렬로 더 밝다. 그러라고 유리 커튼월로 외벽을 채웠다. 자연 채광의 볼륨과 묘미를, 시시각각 달라지는 광량에 따라 변하는 공간의 생기를 만끽할 수 있는 거다. 화이트블럭은 미국건축가협회(AIA)가 주관하는 ‘건축디자인상’을 받은 바 있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진희와 홍존. 그렇다면 설립자는? 기업인 출신의 예술 애호가 이수문(화이트블럭 대표)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국내 사립미술관치고 적자에 허덕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투자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이수문 대표는 무모한 도전임을 뻔히 알면서 미술관을 설립한 셈이다. 아마도 미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광이 그를 추동한 것 같다. 번듯하게 키워낸 회사를 인생 황혼기에 정리해 마련한 자금으로 화이트블럭을 꾸렸으며, 요즘은 화이트블럭보다 한결 규모가 큰 대형 미술관을 천안에 조성하고 있다. 그는 화이트블럭을 추진하며 설계자에게 ‘멋을 추구하기보다 재미와 편리를 담은 건물’을 지어달라 했다. ‘화가들이 전시회를 하고 싶어 할 미술관’을 주문하기도. 전시실은 2, 3층에 있다. 현재 이종무 화백(1916~2003)의 ‘산에서 산산이’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종무라는 이름이 생소한 이들도 많겠다. 이는 작품성은 빼어났으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한 이종무의 처신에서 기인한 현상일 수 있다. 그는 올곧은 수준에서 나아가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명망을 쟁취하기 위한 화단 일각의 아귀다툼에도 초연했으니, 그가 관심을 가진 건 다만 작품의 됨됨이 그 자체였을 테다. 이렇게 되면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의 작품이 성찰과 관조의 수단이었음에 경의를 느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이처럼 개결한 풍모로 일관한 이종무의 만년 작품 다수를 내걸었다. 온통 산을 주제로 한 풍경화들이다. 말 없는 말로 생의 비의(秘義)를 전하는 산. 희로애락으로 점철되는 인생 레이스의 막다른 골목 끝에 우뚝 서서 사람을 보듬어주는 산. 이종무는 화구를 챙겨 들고 무시로 산을 찾았다. 산의 음성을 듣거나 산을 닮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한평생에 걸쳐 모은 생각들을 산의 뜻에 견주어 캔버스에 풀어놓았으리라. 덤덤하나 깊고, 군더더기 없으나 겹겹의 상념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을 두고 미술평론가 이경모는 이렇게 썼다. ‘시점의 다양화, 색과 빛의 우아한 조화, 구상성과 추상성의 융합, 현실 공간과 이상 공간의 어울림은 매우 실험적인 접근 방식이며, 이건 이종무 그림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화이트블럭은 초록나무들 무성한 실외 공간까지 거느려 한결 호감을 준다. 건물의 인공미와 정원의 자연미를 연결해 조화로운 풍경을 빚어낸 미술관이다. 노랑꽃창포와 희거나 붉은 수련이 흐드러진 연못, 그리고 저 너머의 푸른 숲까지. 눈으로 쓸어 담을 수 있는 자연이 숱하다. 다시 말해 예술과 자연을 반죽해 순수하고 담백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술관이다. 작다고 깔보지 마소! 화이트블럭이 하는 말이 그렇다.
- 2022-06-1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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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오늘날의 유튜브를 예상했다”
-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향연처럼 즐길 수 있는 명소다. 물론 일부 다른 미술관들도 백남준의 작품을 여러 점, 또는 한두 점 소장하고 있다. 백남준 애호가들이 꽤 많은 것을 아는 미술관 운영자들은 백남준 특별관을 만드는 식으로 그의 작품을 예우한다.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생각하는 백남준은 어떤 인물일까?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부른다. 이는 어쩌면 좁은 범위의 관점이다. 그는 비디오아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탐구했던 작가다. 예술가이자 엔지니어에 그치지 않았다. 이미 생시에 철학자이자 사상가라는 평을 들었으니까. 그의 모토는 ‘예술가는 미래를 사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신념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광활한 다재와 박학다식으로 미래를 읽어 비디오아트를 선구적으로 창작, 시대의 전위에 섰던 셈이다.” 백남준의 작품을 한결 옹골차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약 백남준이 아직 살아 있다면 오늘날의 미디어, 가령 유튜브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는 아무래도 더 재미있게, 더 기발하게 매체를 운영했을 테니까.” 1974년에 그는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일찌감치 인터넷 세상이 도래할 걸 예견했던 걸까? 그렇다면 놀라운 예지력이다. “이미 1960년대 말에 ‘모두가 아마추어 방송국을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오늘날의 유튜브를 미리 예상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백남준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 “세상과 사람을 무척 사랑했다. 특히 사람들에게 다정한 면모를 수시로 드러냈다. 그의 작업 특성상 협업이 필요했는데, 협업자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전시 작품 가운데 단 한 점을 꼽아 관람을 권유한다면? “굳이 꼽자면 ‘TV정원’이다. 자연에 예술을 접목한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이 지구의 생태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공정원에 배치된 비디오아트로 인해 식물들은 더 생기를 띤다. 나무들의 초록 입자들이 비디오아트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마저 주는 게 아닌가. 이 작품을 외국에서는 화분 위에 배치했다. 정원 형태의 화단을 조성한 건 우리 미술관이 유일하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무슨 의미였을까? “액면 그대로 예술이 사기라고 생각했을 리가.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촌철살인의 발언으로 해석하고 싶다. 백남준이 기상천외한 유머를 즐겨 구사했음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발언을 두고 해석이 실로 분분했다. 그런데 그 발언 15년 뒤 백남준은 이렇게 밝혔다. “나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눈속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한 사기라는 건 에고의 예술을 말한다. 나는 폼 잡는 예술은 하고 싶지 않다.” 결국 ‘예술은 사기’라는 극언은 치열한 자기검열의 언어였던 셈이다.
- 2022-05-3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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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백남준의 예술 전당
-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처럼 위력적이어야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전율을 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습과 관점을 타격하려는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이 선명하기로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발하고 기이한 작품 행위를 통해 대중의 굳은 의식을 비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그것도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럭비공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타성을 가격한 백남준의 작품은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에서 창조의 원본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한때 그의 작품에 어지러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채는 뜨거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예술혼의 작품 다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도시 외곽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유리로 외부를 두른 3층 규모의 대형 단독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꾸렸다. 첫눈에 감흥을 맛보기는 다소 어려운 형상이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건물 뒤편 곡면이 매우 유려하지만 미감을 자극할 만한 디테일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설계를 주도한 이는 독일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비치. 그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며,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들어 안과 밖이 연결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었다는 점은 이 건물이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건물의 형상은 동서 방향으로 눕혀진 ‘P’자를 닮았다.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를 배려하 는 한편, 가용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귀결된 형상이 그렇다. 이 ‘P’자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피아노를 퍼포먼스 오브제로 즐겨 동원했던 백남준의 경향을 이미지화한 건물 형상이라 유추하는 이들이 많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건축에 담은 백남준의 상징물은 외벽 유리 커튼월에 즐비한 가로줄이다. 이는 백남준이 구사한 작업의 핵심 매개체인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거 흑백 TV의 화면 조정 시간 때 지지직거리며 출렁거리는 줄무늬에서 착안한 것. 재미있게 음미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담은 그릇치고는 평범하고 소박하다. 실험과 도발을 일삼았던 백남준을 닮았더라면, 건물을 척 보는 순간 감동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솟을 텐데.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에 담아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준봉 이 미술관은 백남준의 작품 130여 점을 소장했다. 해마다 두어 차례 펼쳐지는 백남준 상설전에 소장품 일부를 번갈아 전시한다. 현재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다. 1층 전시장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TV정원’이다. 열대성 식물로 채운 인공 정원에 경쾌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들을 배치한 이색으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다. 식물과 기계, 또는 자연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조물주의 작품이라 할 만한 식물을 오브제로 끌어들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 언뜻 대수롭지 않은 조합처럼 보이지만 백남준의 작품이라 뭔가 대수로운 걸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게 예술의 소구력이자 백남준의 힘이다. 평범하거나 따분한 세상과 사물을 한 걸음 더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달아주는 게 그의 예술이지 않던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은 전위음악으로 시작됐다. 19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공연하면서 피아노를 박살내고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청중을 경악시켰다. 그건 예상을 초월한 급진적 퍼포먼스였다. 텔레비전을 오브제로 동원, 비디오아트의 신호탄을 쏜 건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엔 잘린 소머리까지 진열했다. 틀에 갇힌 예술 관행을 질타하고, 위선의 이웃사촌인 엄숙주의를 조롱했던 거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백남준을 알아보는 눈은 많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자체가 드물었다. 기사를 쓰더라도 백남준의 작업이 희한하지만 그게 과연 예술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문을 제기하는 글에 그쳤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나체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외신을 가십으로 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백남준이 비로소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계기로 해서였다. 전시장에선 백남준의 출세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볼 수 있다. 1984년 새해 벽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중계로 한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생방송된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사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기계문명의 폐단을 암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패러디,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을 뒤엎었다.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개진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은 드디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시실의 백남준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태풍처럼 휩쓴 거장의 작품들이니 반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복권’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탄 20세기 칭기즈 칸 로봇이 등장한다. 자전거의 짐받이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왜 칭기즈 칸인가? 백남준은 자신의 진취적 성향의 출처를 ‘몽골 유전자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로 세상의 모든 예술을 압도하겠다는 야심의 표명? 그는 다만 머리와 기교로 예술을 성취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의 기찬 상상력, 어마어마한 독서량, 정밀한 철학적 논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벼린 통찰력…. 그의 예술은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하나의 준봉이었을지도. 2층 전시실에 있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뉴욕 소호에 있었던 백남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재현한 공간이다. 백남준의 숨결이 선연히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억에 남겠다. 작품 관람을 마친 뒤엔 건물 뒤편을 굽이치는 산책로를 즐길 일이다. 돌을 바닥에 깔고 경사지의 곡면을 채웠으니 돌의 성채다. 구간은 짧지만 매우 아름다워 강렬하다.
- 2022-05-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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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꾸리가 가져온 성공 귀촌 "늘 웃고 살아"
- 삶을 괴롭히는 요인이 한둘일까. 분명한 건 무슨 마귀가 우리를 함정에 밀어 넣는 건 아닐 거라는 점이다. 알고 보면 다 ‘내 탓’이지 않던가. 나를 밝은 쪽으로 데려가면 밝은 길이 열린다. 올해로 귀농 7년 차 농부인 임채성(53, ‘순정씨네농장’ 대표)의 행장을 보면 ‘밝은 마음’이야말로 예찬할 만한 기풍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다소 기이한 종족이다. 농사로는 죽을 쑨 경험이 즐비하지만, 그의 영혼은 말짱해 방금 전 엄청 좋은 일이 생긴 사람처럼 웃고 사는 게 아닌가. 농사 실적으로 보자면 고뇌로 찌든 표정이 고여야 마땅할 안면에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는 투의 웃음기가 정착해 차라리 신비할 지경이다. 임채성은 서울에서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남원시 보절면 시골로 내려갔다. 귀농 제안에 반기를 든 동갑내기 아내 경순정을 어렵사리 회유해 대동하고서였다. 귀농 이유는 서울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서였다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봉제공장을 다니며 밥벌이를 시작한 이래 갖가지 애환을 섭렵했던 게 아닌가. ‘아이고, 더 늦기 전에 서울을 떠나자! 한적한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즐겨보자!’ 시골살이에 대한 오랜 동경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서울 생활을 청산했던 거다. 여기 남원의 농촌을 귀농지로 선택한 건 일찍 작고한 형의 유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즉 귀농의 꿈도 이루고, 아울러 형수와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일에서도 성과를 거두어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 그는 후자의 목적만큼은 마침내 달성했다. 하지만 농사는 애석하게도 갈팡질팡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농사라는 게 실로 어렵더라. 뭐 하나 똑떨어지게 되는 게 없었다. 지난 7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꼴이다.(웃음)” 농사처럼 힘겨운 직업이 드물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7년이 통째 허송세월이었다? 아예 손을 놓고 지냈다는 얘기인가? “해볼 건 다 해봤다. 7년간 매달렸던 작물의 종류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거든. 오디 농사를 필두로 상추, 양파, 감자, 참깨, 포도 등등 갖가지 작물들을 차례로 편력했지만 수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귀농 첫해에 매입한 600평 규모의 하우스 오디농장에서 나온 연매출 1200만 원이 그간의 유일한 수입다운 수입이었다.(웃음) 그 오디 농사마저 바로 접은 건 연중 생산이 가능한 작목으로 활로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더라고.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했으나 기술력, 마케팅 능력, 판로 등에 한계가 있어 자립하기 힘들더라. 나는 귀농 전에 별다른 준비나 구체적인 구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시골에 뛰어들었다. 이런 내게 돌아오는 건 매번 형태가 다른 난관이었을 뿐이다.” 준비 없는 귀농은 필패의 필살기가 아닌가? 농사 준비는 없었을망정 뭔가 믿었던 건 있었겠지? “시골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내겐 그런 게 충만해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건 일단 내려가서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귀농이었다. 물론 귀농 이후엔 최선을 다했다. 귀농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농가들 견학을 했으며, 내 농사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니까.” 농사 또는 귀농 생활을 환상적으로 판단하진 않았을 테지만, 농업을 만만하게 봤던 건 아닌지? “뭘 모르면 더 용감하다지 않던가?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농사 물정에 어두운 채 무작정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대차게 덤벼들었으니까. 고백하자면 난 꽤나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산에도 놀러 가고, 호박전을 부쳐 이웃들과 나무 그늘에 앉아 술을 즐기고,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농사를 짓는 나날을 머리에 밑그림으로 그려뒀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특히 내가 아무리 땀을 쏟아도 마땅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게 농사더라.” 텃세에 마을을 떠날 생각도 했지만 임채성은 농사와 더불어 인생의 오후를 유쾌하게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예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농업은 더구나 용을 쓰고 진을 빼야만 지속이 가능한 직종이다. 그는 귀농 이후 상당한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농업의 실상을 인식하고 정신을 번쩍 차렸던 것 같다. 그러나 성과가 돌아오지 않기는 매한가지. 뭐랄까, 터무니없을 지경의 근면과 노동을 퍼부어도 농사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기차게 뚫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자 생계 문제가 화급해졌다. 이쯤에서 그는 농외소득 획득을 위해 뭐든 돈 될 만한 일을 찾아 밖으로 내달렸다.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라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노가다’를 뛰어 일당을 받았고, 양계장 일용직이나 산불감시원, 환경미화작업원 등으로 참여해 수입을 얻었다. 이런 생활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농사와 부업을 병행하는 거다. 사실상 농사보다 부업으로 올리는 수입이 더 많다. 아내는 요양보호사 일로 힘을 보태고 있고.”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무난한가? 흔히 텃세에 고심하던데. “농촌의 보수성은 보편적인 것이겠지만 이 지역은 좀 유난한 편이다. 동네 사람이 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더라. 이 마을엔 젊은이는 물론 귀농인도 드물다. 때문에 어르신들 중심의 폐쇄적 풍토가 한결 단단하게 고착, 유지되고 있다. 텃세를 일부러 부릴 리야 없겠지. 다만 일부 노인들께선 외지인에게 본능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느끼는 것 같더군. 나에게 대놓고 ‘당신은 아직 동네 사람이 아니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웃음)” 원주민의 불합리한 태도를 일단 너그럽게 포용하는 게 소통의 지름길이려나? 마을에 귀농인 하나가 등장하면 원주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를 주시하듯 은근히 면밀하게 지켜보게 마련이다. 저 외지인이 혹시 마을에 피해를 입히는 건 아닐까 염려하며. 실제로 귀농인의 모난 처신이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난 서울에서 수십 년간 자영업을 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엔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지. 그러나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일부 주민들 앞에선 대책이 안 서더라. 오죽하면 동네를 떠날 생각까지 했겠나?” 결과적으로 그냥 눌러앉은 이유는 무엇인가? “마을 이장님이 극구 붙잡아서였다. 사실 일부 주민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과 돈독한 사이로 지낸다. 여하튼 텃세 문제는 만만한 게 아니다. 충분히 마음을 다해도, 충분히 베풀어도 냉대를 당할 수 있으니까. 귀농을 하고자 하는 이라면 이 대목을 가장 심각하게 고려하라 말하고 싶다. 덜커덕 경솔하게 귀농 지역을 정하는 건 위험하다. 사전에 마을의 풍토를 제대로 파악해두는 게 좋겠다.” 미꾸리 양식으로 마침내 활로를 찾았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꾸리 사업 역시 만만치 않아 홍역을 치렀다. 양식 개시 후 2년간은 매출이 거의 없었으니까.” 저런! 어쩌다 그런 일이? “대부분 폐사하고 말았다. 전문 농가에 문의했더니 미꾸리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결국 양식 기술이 미숙했던 셈이지. 수질과 수온을 노련하게 관리하며 미꾸리들의 건강을 보살펴야 하는데 그게 부실했다.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기술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결국 귀농 7년간 제대로 풀려나간 농사가 하나도 없었구나. 그럼에도 당신의 분위기는 밝고 의기양양하다. 수심이 깊어야 정상 아닌가?(웃음) “하하하! 이거 아시나? 농사 성적은 초라해 7년을 허송세월한 꼴이지만 나에게 농사 자체는 매우 재미있는걸. 작물을 심어 성장하고 결실 맺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참으로 즐겁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직업이 농사라는 생각을 할 때에도 만족을 느낀다. 서울에서 장사할 때는 못 느꼈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도 한다. 허리병도 생기고, 돈에 쩔쩔맬망정 농사가 재미있지 않을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낙천성이라는 정신적 체력 임채성의 농사 실적은 시원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암담할 지경으로 바닥에서 맴돌고 있다. 농땡이를 부리는 법 없이 노동력을 쏟고 공을 들였으나 현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는 주눅 들기는커녕 그늘 없이 밝고 어디까지나 유유하다. 농사일이 노는 일보다 재미가 있다 하니 진정한 농사의 달인? 예사롭지 않은 개성의 소유자다. 농사 대신 일용직 근로로 생활비를 벌어 가족을 먹여살려 왔다는 점에서는 투철한 책임감을 장착한 인물이다. 단연 특별한 그의 미덕은 가혹한 세속 사회에서 보기 드문 도도한 낙천성에 있다. “‘당신은 도대체 왜 맨날 웃으며 살지? 그토록 밝은 에너지를 가졌으면서 농사는 왜 이렇게 부진하지?’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그렇다. 아내의 불안감을 이해하지만 난처한 상황에 처해도 내겐 별 괴로움이 없다. 긍정과 낙관으로 넘어서면 그만이라 생각하거든. 인생사 뭐든 이왕이면 즐기는 쪽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나?(웃음)” 지나친 낙관이 오히려 더 큰 난관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데? “준비가 없었던 데다 즉흥적으로 작목을 선정해 고난이 많았다. 그 모든 과정이 비싼 수업료를 치른 공부였다. 최근 나는 미꾸리를 비로소 본격 출하하기 시작했다. 곤달비를 넣은 미꾸리 추어탕 팩도 곧 시장에 나갈 것이고. 방향성이 잡힌 셈이다.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는 거!” 아내 경순정에 따르면, 임채성의 낙천성과 긍정의 기질은 귀농 이후 한결 성장해 요즘은 무한긍정으로 치닫는단다. 그건 농사의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희망을 발견한 조짐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임채성이 믿는 건 시퍼런 결기 같은 게 아니다. 낙천성이라는 정신적 체력이다. 이제 그는 마침내 어두운 터널의 끝에 이르렀다 자평하고 있다. 헛바퀴 돌던 날들과는 드디어 작별인가? 임채성 씨가 주는 귀농 Tip •귀농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자. 무작정 뛰어드는 건 그지없이 위험하다. 무엇보다 작물들에 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작목 선정에 실패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농사 수익은 단기간에 발생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말고 길게 보라. 귀농인의 몸이 농사 체질로 바뀌는 데에만 2, 3년이 걸린다. •귀농 지역을 신중을 기해 선정하자. 마을의 인심과 문화, 농업의 현황 등을 미리 파악하라. 가급적 잠시 살아보고 결정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농토를 매입할 때 토질과 지가 외에 주a변 변수까지 고려하라. 인근에 태양광단지 같은 게 조성될 수도 있으니까.
- 2022-05-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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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예술공원 “이곳은 자연 절반, 예술 절반”
- 안양시는 ‘공공예술의 도시’를 표방하며 개성과 위상을 돋우고 있다.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로 가꾼다는 의도를 가지고 지역 곳곳에 예술을 흩뿌렸다. 안양예술공원은 그 센터이자 견고한 플랫폼이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할 만한 이 산속의 예술공원은 사실상 국내 초유의 야외 공공미술 실험장으로 등장해 선구적인 성취를 거두었다. 마음을 훌훌 털어놓기에 적당한 숲길 산책과 미술품 감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명소다. 안양문화예술재단 김연수 공공예술부장에게 작품 소개와 관람 방법을 들어봤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관람 출발점인 알바루 시자의 ‘안양파빌리온’이다. 시자 특유의 미니멀리즘 건축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건축물은 직선이 거의 없는 유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 채광 효과에 의한 빛과 음영의 변화, 곡선으로 처리한 내부 벽면이 야기하는 안락하고 부드러운 느낌 등에서도 시자 작품의 디테일과 문맥을 읽을 수 있다.” 공원에 산재한 미술품을 구경하다가 작품 ‘전망대’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하더라. “네덜란드 작가 MVRDV의 설치 작품이다. 삼성산의 등고선을 기반으로 산의 구체적인 형태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예술에 자연을 극적으로 접목한 설치 작품이다.” 플라스틱 상자를 첩첩이 쌓아 만든 ‘안양 상자 집’은 어떤 의도로 만든 작품일까? 평범한 오브제로 독특한 대형 설치 작품을 조형했다는 점에선 기발했다. “불교적 상상력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원(寺院)을 형상화했다고 보면 되겠다. 겹쳐진 플라스틱 박스들의 틈새로 스며드는 빛의 효과를 통해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출했다. 밤에는 내부에 밝힌 불빛이 밖으로 흘러나가 신성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대량의 재활용 음료수 박스를 독일에서 직접 가져왔다. 한국의 박스는 빛의 투과율이 좋지 않아서다.” 순전한 예술로서의 작품 외에 실용성과 현장의 기능성을 추구한 작품들도 있어 이채롭다. 가령 앉아 쉴 수 있는 벤치 용도의 작품들이 그렇다. 이런 경향을 공공미술의 특징으로 보면 되나? “그렇다. 공공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공익성을 구현한 작품이 많다. 시민들이 산책하는 장소에 필요한 요소를 문제의식을 갖고 찾아내 보완하듯이 설치 작품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대형 작품 ‘나무 위의 선으로 된 집’ 역시 마찬가지 계열의 작품이다. 예술 작품이자 시민들의 통행로로 쓰이는 공간이니까.” 프랑스 작가의 작품 ‘발견’은 나무로 된 작고 허름한 원두막 형상이다. 이 작품은 시간 속에서 스러져 결국은 소멸할 것을 예감하고 만들었을까? “냇가 흙 속에 묻혀 있던 쉼터 용도의 원두막을 발굴, 약간의 구조 보강을 해 복원했다. 유원지였던 과거의 역사성을 담은 작품이며, 이런 경향 역시 공공미술의 특징이다. 공원의 작품들은 지속적으로 보수해 관리한다.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건 어쩔 수 없고.” 한결 효율적인 관람 방법이 있다면? “현재 코로나 상황이라 잠정 중단됐지만, 우리는 도슨트를 통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이 프로그램을 경험한 관람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로 감상의 재미와 즐거움이 커지니까.” 도슨트의 해설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라는 얘기다. 그러나 소나무와 하늘과 구름까지 만끽할 수 있는 산속 야외 미술관이니 혼자라도 충분히 즐겁다.
- 2022-04-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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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을 탈출한 미술품들의 향연
- 도시 인근에 꽃 피는 산과 맑은 냇물이 있으니 어련했으랴. 행락객들로 몹시 붐비는 곳이었다. 휴일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소풍을 즐겼다. 덩달아 주변 일대의 식당과 주점이 성황을 이루어 난장판처럼 어지러웠다. 경기도 안양시 삼성산 자락에 있었던 예전 안양유원지의 모습이 그랬다. 이 유원지는 결국 제풀에 지쳐 시들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이 극에 달한 데다 대홍수가 계곡을 휩쓸어서다. 이렇게 사필귀정처럼 붕괴한 유원지를 딛고 문화 공간의 신예로 데뷔한 게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시가 주관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Anyang Public Art Project)의 트리엔날레를 기반으로 2005년에 첫발을 내딛은 것. 지금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도한다. 안양예술공원 일대엔 조각과 설치 미술, 디자인 작품 60여 점이 산재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미술 작품으로 구성한 노천 미술관이다. 일명 ‘화이트 큐브’라 일컫는 기성 미술관들의 정형성에서 탈출, 거리와 산야로 원정을 나간 작품들의 집합장이다. 한편 이곳은 공공미술의 전당이다. 공공미술? 이건 재미있다. 소수 전문가 그룹이 마치 대중의 미의식을 대리하는 것처럼 독점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추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발생한 게 공공미술이다. 즉 미술관에 들어앉아 사람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미술이다. 작가의 주관적 세계관을 앞세우기보다 미술 행위를 펼치는 지역의 장소성, 역사성, 공공성을 중심에 두고 조형물을 생산, 제작 현장에 그대로 전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안양예술공원 관람 기점은 ‘안양파빌리온’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신사조를 주창한 알바루 시자(Alvero Siza, 포르투갈)의 작품이다. 이는 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시자의 생산물이다. 그의 건축은 논리와 합리, 그리고 개념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 건축 경향과 달라 돌올하다.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하니까. 빛과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스트 시자를 ‘건축의 시인’이라 추켜세워도 과하지 않은 게 그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며, 지극히 관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저히 시각화된 여느 건축과 다르다. 간소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안양파빌리온의 건축적 성향을 보라. 튀지 않으며 모나지 않은 외관으로 주위의 경관과 조용히 조응하는 게 아닌가. 시자의 파빌리온이 어디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찾아지는 건 나직하고 수굿한 형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파빌리온의 내부를 볼까. 외관의 단순성과 백색 색조가 고스란히 내부로 흘러들어 간명하고 유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단순하기만 하다면 무슨 재미? 곡면의 연쇄로 이루어진 벽면은 부드러운 리듬감으로 생동한다. 사각형과 원형, 유선형 등 다양한 형태의 창들도 흥미를 돋운다. 거대한 둥근 천장 모서리 틈새로 들이치는 자연광은 은은하게 굴절하며 공간에 빛과 그림자를 배급해 슬쩍 유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공 조명보다 미묘하고 전위적인 저 빛살은 뭐랄까, 물이 흐르는 걸 바라볼 때처럼 상서로운 기분마저 야기한다. 태양이 쏴 보낸 광선으로 구조물에 자연을 입히는 방식은 시자의 오래된 건축적 관습이다. 빛의 유입과 변화에 관한 탐색과 성찰을 설계의 기저로 삼았다. 건축 행위를 통해 빛과 사물의 존재를 탐구한 철학자라 할 만하다. 이렇게 기똥차게 빼어난 고수의 작품을 눈요기할 수 있다는 건 흔한 행운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던지는 시대적 화두 이제 거리로 나서 냇물을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지나치는 길목마다 작품이 있다. 거리의 미술품들은 세상에 만연한 획일성과 권태를 누그러뜨린다. 삶이 우리를 녹초로 만들지만 예술 한 자락 걸친 감성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던가. 그래 미술품이 노상에 천변에 산야에 널려 있다는 건 황무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갑다. 봄날의 산은 화사해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낙원이다. 그럼에도 미술로 보탠 게 많으니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저 작품이 쓱 출연한다. 등산로를 따라 걷는 일 자체가 예술 향연에의 동참이다. 작품들 대부분은 까다롭지 않아 이해가 쉽다. 심지어 완구처럼 익살스런 소품들도 있으며, 걸터앉아 다리를 쉬게 만든 조형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후루룩 건성으로 지나칠 일은 아니다. 이름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도 많으니까. 물론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에 혹하는 건 우습지만, 농밀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간과한다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단무지만 질근거리다 나오는 것처럼 엉성하다. 저기 풀밭에 에페 하인(덴마크)의 ‘거울 미로’가 있다. 거울 기둥들로 원형의 미로를 만들었다. 미로란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순례자의 유랑을 상징한다. 거울 기둥 100여 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의 표식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불교를 융합한 조각인 셈이다. 작가가 굳이 불교를 동원한 건 안양예술공원이 있는 삼성산이 불교의 발흥지였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 지향하는 방법의 하나는 현장의 역사성을 작품에 담는 것인데, ‘거울 미로’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불교적 테마를 조형한 작품은 그밖에도 여러 점 더 있다. 인도네시아의 에코 프라워트는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수백 개의 대나무로 사원을 만들어 안양의 불교적 풍토를 기렸다. 공공미술은 지역의 풍속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중국 작가 왕두의 ‘신기루’는 그 본이다. 그는 이미 소실된 안양유원지 시절의 건물 형태를 대리석 조각으로 재현해 냇물에 담가두었다. 이건 공공미술의 본령이 지역의 사회사를 형상화하는 데에도 있음을 알게 한다. 공공미술은 현장의 환경 개선과 기능성 보강에도 신경을 쓴다. 작품이 통째 벤치가 되기도 하고, 어수선한 주차장을 설치 예술로 성형해 실용성과 미감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도 있다. 공공미술은 이렇게 명멸하는 세사와 역사, 바람에 실려 사라진 시간들의 사연을 예술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다. 무섭게 변하는 세상과, 더 무섭게 악화되는 환경의 문제를 가급적 예리한 갈고리로 찍어내 시대의 화두로 던진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와 표현 방식을 구사하지만 의도가 선명해 허영이 없다. 안양예술공원 관람의 종장에선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덤으로 등장한다. 한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할까. 김중업의 건축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고지식하게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건축에 반영했으니까. 김중업의 설계로 지어진 옛날 공장 건물을 손질해 설립한 김중업박물관에서는 그의 설계 도면, 설계 수첩, 사진, 문학적 기록 등을 볼 수 있다. 김중업은 알바루 시자처럼 차라리 시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건축은 노래해야 한다”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집이다”라고. 이런 시적 메시지, 들어본 적 있는가?
- 2022-04-1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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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해 시골서 서점 운영, "생각보다 잘나가"
- 한결 가치 있는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의 귀촌을 부추겼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인생을 한번 획기적으로 바꿔보자는 욕심으로 부푼 건 아니었다. ‘느림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며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즐기자는 쪽에 무게를 두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귀촌을 통해 가급적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똑떨어지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다. 그 용무란 서점 일이었다. 시골에서 서점을?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새들이야 지천이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라야 마을 원주민 몇몇에 불과한 후미진 산골에서? 이건 무인도에서 혼자 ‘전국노래자랑’을 공연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기획일 수 있다.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일처럼 요상한 이벤트이기도. 소비자들의 호응이 있고서야 생존이 가능한 게 서점 사업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김미자(59, ‘그림책 꽃밭’ 사장)에겐 남다른 속대중이 있었다. 믿는 구석이 다 있었던 거다. 그 믿음이란 오직 자신의 경험과 능력에 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가늠하는 내공까지는 아닐망정, 적어도 서점에 관한 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바탕 제대로 붙어볼만한 게임으로 여겼던 것 같다. 미리 말하자면 그의 산골 서점은 놀랍게도 탕탕 잘나간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아동 그림책 관련 직업 활동을 했었다. 공공도서관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했으니까. 그림책 커뮤니티를 만들어 동네 엄마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지속했으며, 그림책 카페를 7년간 운영한 경험도 있다. 머릿속에는 항상 시골 생각이 들어 있었다.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그림책과 시골살이를 아우를 수 있는 삶을 늘 꿈꾸었던 것이지.” 김미자가 남편과 함께 이 시골로 내려온 건 2017년.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편의 퇴직금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고서였다. 흔히들 귀촌지를 결정하느라 진을 뺀다. 첫 단추부터 똘똘하게 끼우기 위해 해부학 교실의 연구원처럼 면밀히 분석하고 평가해 장소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지루한 물색의 과정을 싹둑 잘라냈다. 숲이 있는 시골이면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그리 여겼다. 경륜과 자신감을 완비했으니 어디에 갖다놓아도 승산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리서치를 통해 몇 군데 시골 서점의 순항 분위기를 미리 눈치채기도 했다. 그는 지인이 소개한 경매 토지를 덜커덕 사들여 집을 지었다. 서점과 살림채, 그리고 북스테이 공간을 마련해 영업을 개시한 게 만 3년 전. “처음 한동안은 손님이 오지 않았다. 날마다 매상과 마진을 계산하며 고민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덩달아 매출이 늘더라. 수익의 절반은 책 판매에서, 나머지 절반은 북스테이에서 발생한다. 이젠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없는 날은 없다. 덕분에 부부 둘이 먹고사는 데엔 아무런 불편이 없지. 이쯤이면 노후 생계 대책으로 충분하기에 안도감과 만족을 느낀다.” 단기간에 자리 잡다니. 이 서점은 어떤 힘과 매력을 지녔기에? “가급적 질적 수준을 높게! 풍경은 예쁘게! 그런 모토를 정하고 충실하게 구현한 결과물이다. 예전에 일본의 숲속 도서관들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감흥이 컸다. 모델로 삼을 만했지. 아무리 외진 시골이라도 구색과 내용이 충실하면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걸 확인했던 셈이다.” 도시에도 특별히 공들인 서점들이 있지만 흔히 불황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다. 이곳의 자연경관이 유력한 재료라 봐야 할까? “아동 그림책에 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자연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시골 서점은 그 자연과 생명에 관한 아이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환경 여건으로 한몫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림책에 나오는 자연을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연과 함께 펄펄 뛰노는 아이들과 얘기하고 싶었다.” 숙박을 하거나 책을 구입하는 고객층은 어떤 이들인가? “주 고객은 30~40대 부모와 아이들이다. 그림책 관련 각종 자격증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학습 차원에서 찾아오고, 시골 서점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방문한다.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선생님 손에 이끌려 찾아오는 당진시 일대의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아동들이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다락을 구비한 책방 공간은 동화처럼 아기자기하되 품격을 돋워 꾸몄다. 아이들의 구미에 어울리게. 엄마들의 호감을 살 수 있게. 그림책 일색의 도서들은 모두 5000여 권.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온 2000여 권과 새로 구입한 3000여 권을 합쳐 공간을 채웠다. 그림책을 좋아하던가? 게임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아닌가? “아동들은 순식간에 알아차린다. 엄마가 왜 나를 책방에 데려왔나를. 그러고서 하는 말이 이렇다. 나, 책 안 봐! 오나가나 아이들은 휴대폰 게임에 몰입하는 거다.” 그럴 때면 어떤 처방을 사용하지? “책이 싫으면 고양이하고 놀아! 마당에 나가 뛰어놀아! 그렇게 말해준다. 그러나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다.” 엄마들은 책이 싫다는 아이들을 왜 굳이 이곳에 데려올까? 책을 강요하면 자칫 책을 더 징그럽게 여길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든 책을 접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겠나? 그러나 엄마들의 방법엔 문제가 있다. 책을 학습이나 훈육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나는 늘 한다. 연령에 맞는 책을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나직이 읽어주라고 권한다. 아이들에겐 가르침보다 위로가 필요하니까.” 마을 풍경을 볼까? 딱히 빼어나거나 미묘한 설렘을 자아내는 풍치는 아니다. 변방의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농촌 마을이다. 야트막한 야산들이 강강술래를 하듯이 1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을 빙빙 감싸고돌아 푸근하다. 김미자는 이 평온한 풍경에 안심을 느끼는 것 같다. 쉽게 오를 수 있는 산과 숲이 있으니 불만이 있을 때면 애먼 남편에게 툴툴거리기보다 나무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해소하겠지. 그에겐 자연과 사계의 순환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사실 김미자의 귀촌은 자연에 가까이 가자는 목적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그게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연이 좋다지만 날마다 산을 바라보다 보면 권태감이 밀려들기 십상이다. 거칠지만 생동하는 도시의 풍속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긴 어렵다. “권태를 느낄 겨를 없이 분주한 게 시골 생활이다. 하지만 문화적 충격과 자극이 하나도 없다는 건 큰 단점이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나 전시를 볼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아쉽다. 주변에 예술가라도 하나 산다면 해갈이 될 테지만.” 마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 시골에도 지혜로운 이들이 있기 마련인데. “시골 할머니들의 평온하고 깨끗한 삶의 태도에 느끼는 게 많다. 대체로 할머니들은 인간관계에서보다 땅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생을 사는 것 같더라. 그들은 아무리 노쇠했더라도 호미를 놓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호미로 땅을 긁는다.” 도시의 노인들에게선 보기 어려운 야생의 에너지. 시골 노인들에겐 그런 육화된 근성이 있다. “맞다. 처신에 깨끗하고 이치에 밝은 할머니들과 사귈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이 주는 값진 행복의 하나다.”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은 놀이로 시골이라고 눈 밝고 경우에 환한 이들이 흔할 리 없다. 도시든 시골이든 ‘삐딱이’ 그룹이 있어 활약을 하는 게 아닌가. 김미자도 초기 한동안 유별난 이웃에게 좀 시달렸지만 적절히 타협하며 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포용했다. 보다 덜 소중한 것에 보다 더 소중한 걸 훼손하고 싶진 않았던 것일 텐데, 그에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소박한 삶의 지속이다. 물구나무 선 세상을 뒤집을 힘이야 없지만, 최소한 자신만큼은 악다구니와 돈과 허영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귀촌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는 예상은 딱 적중하진 않았다. 그러나 거둔 성과와 만족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뭐냐면,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 그리고 헨리 니어링 부부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을 닮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안 되더라. 우선은 돈벌이를 하는 내가 돈에서 해방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도시 생활과 자본에 길들여진 남편과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귀촌으로 부부가 함께 도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만도 어디인가? “나는 오늘도 들에서 냉이를 캐왔다. 시골에 살며 산나물 채취로 식사를 한다는 것, 육식을 덜 하고, 덜 소비하고, 덜 욕심부린다는 것, 이건 뿌듯한 일이다.” 한때 암과 싸웠다지? 고통이 극심할 때면 어떤 생각을 하나? “암! 무서웠다. 자주 권정생 선생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지극히 병약했지만 엄격한 절제로 삶을 완성한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성찰의 습관도 그에게서 얻어왔다.” 심지어 가뭄에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도 가여워 눈물을 흘렸던 권정생. 그는 성자가 아니었을까. “평생 병고에 시달렸지만 강하고 꼿꼿한 분이었다. 한번은 외투를 사다드렸더니 고사하더라. 이미 있는 외투 하나로 충분하다며. 스콧 니어링도 소유에 무심해 옷 한 벌로 살았다. 그러니 어떻게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무욕으로 살았던 고수들을 무슨 수로 따를까.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나? “돈은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을 놀이로 즐기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다르다. 일에 치여 산다. 속엔 답답한 게 많지만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겉으로는 웃는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갖고 산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나를 맞춰 살고 있으니 크게 어긋난 건 아니다.” 인생을 깊이 읽고 있다는 안도감. ‘나’를 진정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속에 산다는 확신. 귀촌의 나날을 선용하고 있다는 자부심. 속세에서 흔히 맛보기 어려운 감흥들로 김미자는 기쁜 것이다. 표정은 근엄하지만, 내부는 햇살로 밝아 바야흐로 인생의 봄날을 다시 만난 셈? 김미자 씨가 주는 귀농 Tip 시골에서 작은 서점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지만 함부로 덤벼들 일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성향 하나만 믿고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좋은 책을 고르는 능력, 인문학적 소양과 실력, 그리고 예술적 눈썰미를 미리 갖추는 게 중요하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기 전에 까먹어도 무방할 정도의 소자본으로 도시에 작은 북카페를 차려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 장소 선정도 매우 중요하다. 가급적 자연환경이 뛰어난 곳을 찾자.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나 명소 인근도 잘만 하면 유망하다.
- 2022-04-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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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 전체 오브제 삼아 대지미술 구현
- 박신정 관장은 ‘젊은달 와이파크’ 이전에 강릉 ‘하슬라아트월드’를 만들었다. 남편 최옥영 작가와 함께. 처음엔 ‘하슬라아트월드’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사립미술관에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게 운영난이라서 하지 말라는 고언이 난무했던 것. ‘젊은달 와이파크’를 추진할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그러나 박 관장 부부는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어떤 신념이 박 관장을 추동했을까? “예술가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작품에만 주력하는 작가들과 좀 다른 길이지만, 미술관을 통해 대중에게 현대미술을 보여주고, 돌아오는 반응과 소통하고 싶다는 건 오래된 꿈이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후미진 시골 동네에 미술관을 열 용기를 내다니. “미술이란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가?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남들 역시 아름답게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계산이 아닌 확신, 좋아하는 일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관을 설립했다.” ‘젊은달 와이파크’의 관람 포인트를 얘기한다면? “미술관에 산재하는 모든 구조물을 하나의 작품으로 즐기면 좋겠다. 최옥영 작가는 이곳의 8000여 평 부지를 통째 오브제로 삼아 대지미술을 구현했다. 특별하기론 ‘레드 파빌리온’이다. 어디에도 없는 구조물이니까. 주변의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프레임이고.” 술샘박물관의 구색이 고루해 아쉽더라. “영월군이 만든 박물관이라 손댈 수 없다. 첨단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지만.” 미술을 즐기는 국내 애호가들은 과거보다 많이 늘었다고 보나? “애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좋아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웃음)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심지어 미술작품을 그저 아이들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지.” 미술을 좋아하는 이가 드물어 사립미술관들이 난항을 겪는 현실. 이를 해소할 방법은 무엇일까? “미술관 운영자들의 강인한 자립 의지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미술관 두 곳을 운영하는 내겐 원칙이 있다. 외부 환경을 탓할 것 없이 자립하겠다는 게 바로 그렇다. 정말 수익이 없어 벼랑에 몰린다면 문을 닫는 게 순리라는 각오도 다졌다. 예술이 돈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가난에서 영감을 얻겠다는 듯이 돈벌이에 무심한 작가들도 많다. “마치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열심히 작업에 몰두한다면 왜 가난하겠나? 모든 삶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진정 땀을 쏟아야 성취할 수 있다.” 박 관장은 일곱 차례 개인전을 치른 화가다. 주로 작가적 개성과 고집을 가지고 까다로운 작업을 이어왔다. ‘젊은달 와이파크’에 있는 설치작품 ‘시간의 거울-신사임당이 걷던 길’은 다르다. 작풍이 변했다. 한결 쉬워졌다. “신사임당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 시대를 초월해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아름다운 건 상처의 반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담은 작품이다.” 모성(母性)의 빛과 그늘에 봉헌한 작품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는 삼척에 세 번째 미술관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올 연말이면 부분 개관을 한다. 무적함대에 가까운 항진이다.
- 2022-03-2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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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하다! 빨강을 입힌 대지미술
- 산수미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강원도 영월군이다. 서린 역사와 보유한 유적은 또 어떻고? 그저 심심풀이로 여행을 갔다가도 오감 만족으로 기억에 새겨지는 곳이다. 박물관, 문화 공간, 전시장의 합이 자그마치 20여 개이니 말 다 했다. 2019년에 개관한 미술관 ‘젊은달 와이파크’는 개중 등등한 기세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주말이면 수백 명의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 벌어진 이변이다. 영월 변방 주천면 언덕배기에 있다. ‘젊은달 와이파크’에서 맨 먼저 만나는 건 입구를 이룬 설치작품 ‘붉은 대나무’다. 빨간 페인트를 입힌 수백 개의 기다란 강철 파이프로 작은 대나무 숲을 연출했다. 말이 대나무 숲이지 저만치서 보면 길길이 치솟는 불길을 연상시킨다. 빨강은 열정과 절정의 상징색이다. 욕망과 유혹과 혁명의 표식이기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해 교감신경을 일깨우며 심리적 침체를 털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붉은 대나무’ 입구를 들어서며 가슴을 빨강으로 물들여 기분을 기차게 돋우라는 권유? 미술관에 차려진 성찬을 포식하기 전에 입맛을 다시라는 애피타이저? 담긴 뜻이 한둘이 아닐 테다. ‘붉은 대나무’를 만든 이는 대지미술을 추구하는 조각가 최옥영이다. 강릉 정동진에 대형 미술관 ‘하슬라아트월드’를 세워 명소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는 내친김에 ‘젊은달 와이파크’를 2차로 설립해 다시 한번 실력을 입증했다. 빨간색은 최옥영의 시그니처 컬러다. ‘붉은 대나무’만이 아니라 미술관의 거대한 파빌리온(가설 건축물)에도 통째 빨강 물감을 쏟아부었다. 파란 하늘, 초록 산야, 그리고 빨강의 선명한 색채 대비가 주는 감흥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라는 뜻에서다. 미술관 본관으로 향하는 야외 동선을 따라 걷는다. 미지근한 일상에서 벗어난 쾌감이 오롯하다. 불면증과 우울증이 서식하는 도시의 권태를 잠시나마 멀리에 뒀으니 이게 어딘가? 미술관 외벽을 이룬 산과 하늘의 표정은 잡티 없이 해맑아 순수하다. 완벽한 회화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이 그리는 미술을 사람의 예술과 아울러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이 미술관이 지닌 미덕이다. 외부의 자연과 수시로 조우할 수 있도록 건축과 공간을 개방적으로 구성했다. 본관 로비로 들어서자 커피 향이 그윽하다. 매표소를 겸한 카페 공간이다. 미술관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길모퉁이 작은 찻집에서처럼 농밀한 운치를 즐긴다. 시스템 전환이랄까? 요즘 미술관들은 필수 부속처럼 카페를 운영한다. 미술과 커피의 조합이 거두는 효율이 커서다. 미술관은 커피를 팔고 관람객은 한 줌의 낭만을 산다. 커피 한잔과 내 인생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마는, 커피를 혀로 굴리며 예술을 생각해보는 잠깐의 휴식은 비루한 삶을 잊게 한다. 일러 ‘소확행’이다. 상상력을 돋우는 ‘목성’ 카페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거대한 돔 안으로 들어선다. 철골빔 뼈대에 일정한 크기로 빠갠 소나무들을 굴비 두름처럼 촘촘히 엮어 쌓은 돔이다. 이 미술관의 설치작품 대부분은 최옥영의 생산물. 대형 나무 돔 역시 그렇다. 타이틀은 ‘목성’(木星)이다. 작가는 우주에 사는 목성이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린 이벤트를 상정했나? 그는 나무 무더기를 무수히 쌓아 동굴을 닮은 설치를 하고서 목성을 보라 한다. 광폭의 감성 사이즈로 우주를 느끼라 한다. 그렇다면 ‘목성’은 우주의 축약이며, 신과 우주를 향한 외경을 표출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처럼 신성하다. 최옥영의 창작 변을 간추리면 이렇다. ‘무한의 영역인 우주를, 상상의 우주를 조각적 형태로 만들었다. 이는 생명의 분화구를 상징한다. 원초적인 힘과 사랑, 그리고 우주적 활력을 돔 안에 쏟아냈다.’ ‘목성’은 대작이다. 높이 15m, 지름 12m에 달하는 원형 구조물이다. 꼭대기엔 휑하게 구멍을 내 하늘을 보게 했다. 늘 거기에 있는 일상의 하늘과 돔의 구멍을 통해 올려다보는 하늘은 달라 상상력을 돋운다. 내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또는 하늘과 공존하는 썩 의미 있는 생명체임을 자각하게 한다.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과 나뭇더미 틈새로 들이치는 빛살 역시 일상의 빛을 바라볼 때와 달라 유심히 반추하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따라 읽자면, 저 빛들의 산란은 우주적 쇼다. 우리가 늘 눈에 달고 사는 빛의 출처가 무한 우주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는. 급기야 나 역시 우주에 동참한 하나의 소우주임을 느끼게 한다. ‘목성’을 뒤로하고 이제 오만 가지 조화(造花)를 오브제로 삼은 설치작품 ‘시간의 거울-신사임당이 걷던 길’과 만난다. 박신정(그레이스 박)의 작품이다. 여성을 사회적 타자로 방기한 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의 삶과 내면을 칡넝쿨과 꽃, 그리고 거울을 설치해 조형했다.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은 꽃들의 퍼포먼스에 기뻐 팔짝팔짝 뛰며 인증샷을 찍는다. 박신정은 최옥영의 부인으로 ‘젊은달 와이파크’의 관장이다. 화가 부부의 협연으로 미술관을 구축, 공간 곳곳에 선율과 리듬을 부여한 셈이다. 이곳엔 원래 ‘술샘박물관’이 있었다. 주천면의 유별한 술 문화와 양조 역사를 홍보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운영이 신통치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버려지다시피 한 걸 박신정 부부가 미술관으로 살려냈다. 술 박물관이 시들고 미술관이 꽃 핀 것. 미술관이 생동하면서 숨이 넘어가던 술 박물관도 회생했다. 다시 말해 미술관이 술 박물관을 옆구리에 끼고 동행한다. ‘젊은달 와이파크’의 주조음을 탄주하는 건 어디까지나 최옥영의 작품들이다. 재생타이어 수백 개로 만든 ‘블랙 드래건’, 쓸모를 잃은 널빤지들을 조형해 별의 원초적 에너지를 은유한 ‘우주정원’, 금속 재료로 회오리치는 바람기둥을 만들어 승천하는 용을 상징한 ‘실버 드래건’ 등 다수의 설치작품이 스케일과 볼륨을 과시한다. 그렇다고 난해하지 않다. 뭐가 뭔지 모를 관념의 카오스로 애먼 관람객의 기를 죽이는 현대미술의 경향과 달라 감정이입이 쉽다. 최옥영이 구현하는 대지미술이 자연주의의 계보라는 걸 고려하면 작품 이해가 더 쉽다. 재미있는 미술관이란? 어디서 도무지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는 미술관? 그렇다면 이 미술관이다. 공간 구성의 핵을 이룬 작품 ‘레드 파빌리온’을 보라. 철제빔과 철판, 쇠 파이프만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온통 빨강을 칠해 야릇한 미감을 구현했다. 미술관의 랜드마크다. 이 흥미로운 구조물은 전시장이자 통로다. 공중에 걸쳐진 통로 바닥은 숭숭 구멍 뚫린 철판이라 마치 허공을 걷는 듯 묘한 느낌을 준다. 붉은 창살 밖으로는 푸른 자연이 환히 보여 작가의 의도가 비친다. 그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하늘, 산, 들판, 마을, 허공에 부유하는 미세먼지, 그리고 사람까지 모두 우주를 이루는 미립자라는 걸.
- 2022-03-29 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