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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시니어로 산다는 것이
- 제가 사는 곳은 나이아가라 폭포 가는 길목의 인구 20만 명이 사는 도시입니다. 온타리오의 많은 주택지처럼 계속 인구가 팽창해 집값이 많이 오른 타운입니다만 제 주거지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큰길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콘도를 구입했던 게 6년 전인데 한적하고 운치 있는 동네를 떠나 큰길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은 결코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쾌적한 동네가 아니어서 망설이기는 했지만 수년 전 과감하게 결론을 내렸던 이유는, 제 연령대의 여성들에 비해 건강이 빨리 나빠지고 있어 시니어(senior, 65세 이상의 노인을 칭함)가 될 때를 위한 필수 준비를 서둘렀던 것입니다. 모든 편리한 시설들이 가까이 있습니다. 가정의 병원과 치과, 약국, 우체국, 급할 때 필요한 일용품과 간단한 식품을 살 수 있는 슈퍼마켓, 버거킹 햄버거 숍까지 근처 500m 거리에 있어서 차를 더 이상 몰 수 없게 되었을 때 걸어서 가거나 휠체어를 밀고도 갈 수 있습니다. 1km 떨어진 곳엔 백화점이 있는 쇼핑센터와 거래 은행도 있습니다. 큰길 건너편에는 예술대학교가 있어 학교 입구에 여러 곳으로 향하는 버스 노선들이 있고, 그 버스들은 대개가 버스로 5분 거리인 GO(Government of Ontario) train 기차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근처 도시와 토론토까지 한두 시간 정도면 승용차 없이도 갈 수 있습니다. 캐나다 노인복지혜택은? 시니어가 된 후 처음으로 캐나다에 사는 시니어들이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시에서 받는 일반 혜택은 전혀 없고 한국처럼 노인정 같은 편리시설은 인구 20만 명인 이 도시에 오직 두 곳인데 거리가 멀어 자동차 없이는 불편합니다.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수업료는 무료가 아니며 치매 환자들을 도와주는 데이케어센터(Daycare Center)도 없습니다. 집에서 오갈 수 있는 시니어 데이케어센터가 아니라 아예 치매 환자만 모여 있는 요양원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연방정부에서 받는 노인기본연금(OAS)과 시니어이지만 저축성 국민연금(CPP)을 적립하지 않았거나 다른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 시니어에 대한 보조금 액수도 알아봤습니다. 현재 캐나다 국적자이거나 영주권자 시니어가 정부에서 받는 노인기본연금은 최고 한도액이 한 달에 613.53달러(약 55만 원)이지만 누구나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민자에게는 매우 불리한 정책으로 40년 이상 캐나다 거주자만이 최고 한도액을 수령할 수 있으며 거주기간에 따라 수령액수가 달라집니다. 25년을 거주한 저는 현재 242.98 달러(약 21만 원)를 받고 있으며 정부 보조금은 일절 없습니다. 저소득층 시니어에게 주는 정부 보조금(GIS)은 노인기본연금과 보조금을 합해 최고 한도액이 1529.95달러(약 136만 원)입니다. 정부 보조금으로는 생활 어려워 노인기본연금 수령액이 적든 많든 소득이 전혀 없을 경우의 총합계이며 별도의 소득이 있다면 보조금 액수는 적어집니다. 정부 보조금 최고 한도액은 916.38달러(약 81만3000원)입니다. 그리고 저축성 국민연금의 최고 한도 수령액은 한 달에 1200달러 정도이지만 그것도 얼마나 오래 적립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연금은 소득으로 계산되어 정부 보조금 수령액이 적어집니다.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매월 정부 보조금과 노인기본연금을 합한 최고 한도 수령액 1529.91달러(약 136만 원)의 연금과 저축성 국민연금 최고 한도 수령액 1200달러로 캐나다에서, 특히 GTA(Great Toronto Area) 토론토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이 경우는 보조금이 줄어듭니다. 제 경우는 저축성 국민연금 수령액이 약 600달러여서 정부에서 받는 노인기본연금과 국민연금 합계는 842.98달러입니다. 그래서 주택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산이나 저축이 없는 시니어들은 연금으로 살 수 없어 집을 담보로 역대출을 받아 살아가든지 집을 팔고 정부 보조 임대 아파트로 옮겨가야 하는데 신청에서 입주까지 10년이 걸립니다. 이런 경우에도 무료가 아닌 연금 액수와 소득에 비례한 임차료를 정부에 지불해야 합니다. 결국 주택 소유자가 아니거나 수입원이 없거나, 저축한 돈이 없는 시니어들은 홈리스가 되거나 빈민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서민층의 오래된 아파트 임대료가 한 달에 1800달러(방1, 거실1, 부엌, 욕실), 2000달러(방2, 거실1, 부엌, 욕실)인데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시니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식품비도 30%나 올랐습니다(온타리오 한국 식품점에서 판매하는 한국산 식품비는 2년 전에 비해 40~50% 상승). 지하철과 버스 이용료도 무료가 아닙니다. 캐나다의 IT 통신요금은 비싸기로 악명 높습니다. 제 경우 핸드폰 수수료는 8기가 사용료로 매월 82~100달러, 가정용 인터넷은 제한된 TV 채널 사용료와 전화비를 포함해 125달러를 지불합니다. 제가 받는 노인기본연금이 통신 시스템 사용료로 모두 쓰이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사는 콘도 관리비는 매월 1000달러, 주택세는 1년에 3000달러 정도 됩니다. 여기에 식품비, 약값, 보험료, 유류, 차량 유지비 등까지 더하면 아무리 절약해도 정부에서 받는 연금으로는 매월 수천 달러 적자입니다. 그러니 임대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든 자가 소유의 콘도가 있든 상관없이 정부가 저소득층 노인에게 주는 최고 한도액 보조금으로는 생존이 어렵습니다. 물론 직장연금(소방서원이거나 공무원, 은행 같은 대기업의 경우)을 많이 받는 시니어는 형편이 좋겠지만요. 의료 서비스는 무료이지만 시니어들도 예외 없이 MRI·CT 촬영, 암 검사 등을 하려면 6개월~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전문의와의 상담은 최소 3~6개월 정도 걸리며 수술은 1~2년씩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약값도 개인이 지불해야 합니다. 1년에 한 번 시력검사, 폐렴·대상포진·독감 예방주사, 건강검진이 정부에서 무료로 주는 혜택이지요. 긍정적인 일은 슈퍼나 백화점이 일주일에 하루 시니어를 위한 날을 정해 5~10%의 할인 판매를 한다는 것입니다. 맥도널드는 시니어에게 커피를 1달러에 판매합니다. 복지국가로 소문난 캐나다이지만 복지 천국으로 알려진 캐나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시니어의 실상은 녹록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시니어들이 모여 놀 곳도 없는지 특히 남성들이 맥도널드 숍이나 백화점 입구 소파에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한국에 사는 시니어들만 힘든 게 아니고 한국에만 빈곤층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세계 어느 국가를 가도 복지국가 캐나다처럼 빈민도 있고 거지도 있고, 힘없고 돈 없는 퇴직한 노인들이 길거리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풍경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래도 한국에는 지하철 연결이 잘되어 있어 시니어들이 무료 지하철을 이용해 갈 곳도 많아 보였습니다. 또 빠른 의료 시스템, 치매 환자에 대한 국가 보조금과 간병 도우미를 쓸 수 있는 혜택이 있고, 노인 무료 데이케어센터도 있으니 여기 캐나다보다 훨씬 나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것 같아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가난했던 나라에서 고생만 많이 하고 이젠 젊은 세대들에게 부양은커녕 존경도 받지 못하는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저 역시도 부모 봉양과 자식 뒷바라지에 삶을 다 바친 후 이 시대까지 숨차게 달려온 코캐네디언(Ko-Canadian) 시니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씁쓸하지만 이제 그 슬픔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 디자이너로 종사.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그림그리기를 즐겼다.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구름 따라 떠돌며 구름 사진 찍는 나그네로 활동 중.
- 2020-03-1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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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단톡방 10계명
- 카톡은 국민의 생필품적 통신수단이 된 지 오래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연말연시엔 수첩과 명함을 정리하곤 했는데, 지금은 카톡을 정리하는 게 큰일입니다. 불필요한 동영상이나 사진, 의미가 없어진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고 중요한 걸 따로 갈무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 작업을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이 느꼈을 법한 불편과 불쾌함을 덜기 위해 일정한 지침이 필요하다 싶어 카톡 10계명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주로 단톡(단체카톡)방에 관한 것들입니다. 1. 시도 때도 없는 “카톡!”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카톡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카톡, 카톡!” 소리가 싫어 묵음으로 해놓거나 아예 문자메시지만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 때나 카톡을 보내는 건 실례입니다. 특히 시차가 있는 외국에서 제 흥에 겨워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보내면 역효과만 나게 됩니다. 낮에는 전혀 카톡을 읽거나 답하지 않다가 남들 자는 밤 12시, 1시 넘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2. 정치·종교 이야기 금지 얼마전 모 사회단체의 단톡방에, 어떤 사람이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당 헌법 개정 초안이 나왔다는 글을 띄웠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정치 이야기하는 곳 아니다, 거짓 뉴스 띄우지 마라, 대체 누구냐, 나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 사람은 나가지는 않은 채 숨만 쉬고 있습니다. 친목과 사교, 공지사항 전달이 주목적인 단톡방에서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서로 불편해지고 편이 갈려 싸움이 납니다. 3. 삼가야 할 중복·반복 용량이 큰 동영상 또는 사진을 다량 전송하거나 동일 내용을 반복 홍보하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실황 중계를 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는데, 대부분 그 사진이 그 사진이어서 받자마자 삭제하기 바쁩니다. 잘 선별해 의미 있는 것만 최소한으로 보내든지 ‘사진 묶어 보내기’ 기능을 이용하면 남들이 편해집니다. 4. 기성품 안부·격려 지양 월초나 주초, 또는 명절이나 연말연시가 되면 “힘내세요”, “웃고 사세요”, “오늘도 으라차차!” 따위의 응원 인사가 폭주합니다. 내용이 빤한데 본인이 쓰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같은 걸 하루에 다섯 번 받은 날도 있습니다. 이런 거 어떻게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배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 “어디 가져오는 데가 있어” 하면서 알려주지 않고 뻐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5. 좋은 글·미담 공해 1960년대에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이런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글과 사진을 마구마구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도 자기보다 한참 적은 사람이 인생철학을 거론하며 착하게, 바르게 살라는 글을 보내오면 누가 좋아할까요? 이런 글 중 감동적인 미담에는 출처와 근거가 없는 가짜나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게 부지기수입니다. 6. 억지 초대 자제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을 모아 단톡방을 개설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삼가야 합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이야기만 하거나 자칫 말이 엉켜 불쾌해지게 됩니다. 100명 넘는 사람을 초대해 운영하다가 “잠시 잠적한다”며 없어지더니 몇 달 후 다시 나타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게 뭐야,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 OB 내지 않기 골프에서는 공이 규정된 지역 외로 나가면 OB(Out of Bounds)라고 합니다. 단톡방에도 OB꾼들이 많습니다. 아내에게 보내는 카톡을 엉뚱한 모임에 날리거나 임대료 빨리 보내라는 카톡을 대학 동창 단톡방에 올려 웃음거리가 되곤 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간판도 못 다는 사람이 많지만 단톡방 간판을 잘 보세요. 뒤늦게 삭제해도 ‘때는 늦으리’입니다. 8. 댓글 달기 신중하게 수신자가 지켜야 할 것도 많습니다. 행사나 모임에 초대하는 카톡에 눈치 없이 제일 먼저 못 간다고 댓글을 다는 건 한마디로 흥행을 방해해 김이 새게 만드는 짓입니다. 카톡을 빨리 읽는 건 좋지만 불참 통보는 최대한 늦춰야 합니다. 또 어떤 일에 대해 회원들의 반응이나 논의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다른 걸 올리는 건 실례입니다. 이런 중간 낙서는 먼저 글 올린 사람을 불쾌하게 할 뿐 아니라 호응도 얻지 못합니다. 하루 정도 지나 그 일이 정리된 뒤 새 글을 올리는 게 바람직합니다. 9. 딴전·딴청 부리지 말기 여럿이 의견을 주고받는 단톡방에서 그 주제 내의 특정 사항에 대해 둘이서 설왕설래, 지지고 볶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거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본인들은 신날지 몰라도 꼴불견이 되기 십상입니다. 개인 카톡으로 1대 1 대화를 하는 게 좋습니다. 10. 반응·답장 잘 하기 카톡을 받으면 반응을 보이고 답을 하는 게 소통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묵묵부답인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내용이 지겨워 오는 족족 카톡을 지우고 일절 답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자 보낸 사람이 삐쳐서 전화도 안 받더랍니다. 겨우겨우 기분을 풀어주었는데, 영영 안 볼 사람이 아니면 적절히 알은척을 해주십시오. 데이터가 꽉 찬 경우 카톡방에서 나가버려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휴대폰 우측 상단의 석 삼자를 누르고 그 아래 기능 버튼에서 ‘대화 내용 모두 삭제’를 눌러 몸을 가볍게 하십시오.
- 2020-03-1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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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스트로 금난새 "아버지의 소신과 낭만 본받고파"
- 한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금난새(73). 이제는 이름 석 자만 대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지만, 그도 한때는 ‘금수현의 아들’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젊어서는 그 그늘을 벗어나려 애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점점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그다. 어느새 일흔셋에 작고하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아들, 금난새는 아버지가 남긴 글을 악보 삼아 반세기를 초월한 앙상블을 이루고자 한다. 2019년은 금수현 선생(1919~1992)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금난새는 최근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을 펴냈다. 교향곡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책 전체를 4악장으로 꾸몄고, 1~3악장은 아버지의 글을, 마지막 4악장은 자신의 글을 담았다. 특히 책에 담긴 금수현 선생의 글들은 특유의 상상력에 해학이 더해져 5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읽어도 진부함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교육자, 작곡가로서 음악 발전에 기여하셨죠. 1957년부터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근무하시며 외래 음악 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공헌하셨고요. 또 ‘한글 이름 짓기’의 선구자로, 성을 ‘김’(金)에서 ‘금’으로 바꾸고 자녀들 이름도 한글로 지으셨죠. 대외적으로도 훌륭한 일들을 해내셨지만, 집 안에서도 정말 매력 넘치는 분이셨어요. 약주를 하신 날이면 밤늦도록 우리 다섯 남매를 둘러앉히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하셨죠. 어찌나 재미나는지 깔깔거리고 웃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선해요. 어른이 되고 아버지의 글을 읽어보니 당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곳곳에 많더라고요.” 금수현 선생은 1962년 모 일간지에 썼던 칼럼 100편을 모아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근래 들어 당시의 글들을 읽으며 금난새는 새삼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더듬었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이지만, 일면 그 속에 담긴 교훈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반세기 넘도록 묻혀 있던 글들을 다시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너무 옛날 책이라 세로쓰기에 한자도 많았어요. 그런 부분을 다듬는 과정에서 75편의 글을 추렸죠. 나머지 25편은 아들인 제가 써서 본래 책처럼 100편을 채우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두 사람의 글로 구성하니 출판사에서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게 좋은 테마로 한 책에서 아버지와 만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들아, 실패는 귀한 경험이란다 물론 가족에게 각별한 책이지만, 금난새는 이번 기회로 아버지 이야기가 일반 대중에게도 즐거움과 지혜를 선사할 수 있길 바랐다. 그의 바람이 통했던 걸까. ‘금수현’보다는 ‘금난새’가 더 익숙한 요즘 독자 몇몇은 ‘금수현 선생의 재발견’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보았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줬다니 정말 뿌듯한 일이죠. 특별히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었던 메시지는 아이디어의 중요성과 그것을 실천하는 도전정신이라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버지는 돈키호테 같은 분이셨습니다. 구태의연함을 싫어하셨고 변화무쌍한 걸 좋아하셨죠. 자녀들도 그런 삶을 살길 바라셨기에 늘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일’을 하라 말씀하셨고요.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저도 남들이 안 하는 일에 도전하는 걸 즐깁니다.(웃음)” 도전을 마다치 않을 수 있었던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그런 배포를 지니게 된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단다. 실제 금수현 선생은 ‘실패도 귀중한 경험’이라는 글에서 “자식을 기를 때 사랑하는 것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며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모든 문제를 어른이 풀어주면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니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 아버지의 이유 있는 방관(?)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동시에 자생력을 키울 수 있었던 금난새다. “제가 창단한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창단 당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 없이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죠. 오히려 남의 돈에 의존해왔다면 유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지원이 끊기는 즉시 위태로웠을 테니까요.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 지켜온 덕분에 오랜 세월 생존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에 대한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그는 아버지에게 역시 어떤 물질이나 금전이 아닌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현재의 자신에 이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책의 4악장에 드러난 금난새의 진취적인 면모만 보아도 그 유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만이 그에게 교훈을 준 건 아니다. 때론 아버지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신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보면 높이 살 행동인데도 당시엔 외면을 받곤 했으니까요.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셨는데, 그 여파로 가세가 기울었죠. 그걸 보면서 아무리 좋은 생각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 아버지는 괴로움을 술로 달래셨는데, 그 모습을 기억하며 술을 자제하는 버릇도 지니게 됐고요.” 영원히 가슴에 남을 유산 좋든 싫든 아버지의 특정 면모만을 가려서 물려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까지 닮아가는 자신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그다. “평생 자기 소신과 낭만을 잃지 않고 사신 분이에요. 그런 점은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본받고 싶습니다. 한편으론 이런저런 일을 펼치시느라 다사다난했던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지휘자의 길만 걷겠노라 다짐했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글도 쓰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더군요. 유전자의 힘이랄까, 어찌 못할 천성인 거죠.(웃음)” 금난새는 아버지가 그랬듯, 두 아들에게 물질적 유산보다는 삶을 개척하는 용기와 자유로운 영혼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선물 같은 추억을 많이 남겨줄 수 있길 바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집 앞 계단에 선물 다섯 개가 놓여 있었어요. 도·레·미·파·솔 순서였는데, 둘째인 저는 ‘레’가 선물이었죠.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라요. 저도 아버지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보물 같은 시간을 많이 남겨주고 싶어요. 어쩌면 먼 훗날 또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와 아들이 그런 추억을 이야기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 2020-02-1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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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골퍼 김용준 칼럼] 돌아오라 톰 왓슨이여
- 갑자기 가슴 한편이 허전해지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7월이다. 가장 존경하는 골퍼 톰 왓슨(Tom Watson·70)이 PGA 투어 챔피언스를 떠난다는 뉴스였다. 내가 태어난 해에 투어 생활을 시작한 그는 50년 가까이 선수로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마침내 투어를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뉴스가 발표되기 바로 직전에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만들어낸 그였기에. 어떤 기록이냐고? 그는 그 주에 열린 메이저 대회에서 나흘 라운드 가운데 사흘 동안 ‘에이지 슈팅’을 기록했다. 골프를 즐기지 않더라도 에이지 슈팅이 뭔지 아는 독자는 많을 것이다. 골프에서 ‘자신의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로 18홀 경기를 마치는 것’ 아닌가? 평생 단 한 번만 기록해도 꿈같을 대기록이다. 어디 홀인원을 거기에 갖다 대랴! 그런데 한 대회에서 나흘 중 사흘이나 에이지 슈팅을 기록하다니! 그것도 ‘더 시니어 오픈’이라는 메이저 대회에서 말이다. 마법 같았다. 그는 첫날 69타를 쳤다. 그리고 이튿날 68타를 쳤고. 하루 건너뛰고 마지막 날 다시 68타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공동 17위. 70세 생일을 불과 한 달 남짓 남겨둔, 노장 중에서도 노장 골퍼의 기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록이었다. 아내 위해 골프를 내려놓다 그런데 그 대회가 끝나고 바로 은퇴 발표를 한 것이다. 앞으로 대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아니, 이렇게 잘 치는데, 아직 칼날이 서 있는데 왜 벌써 은퇴를 한다는 거지?’ 뉴스를 좀 더 보고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 힐러리 왓슨이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어서 그렇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 투어를 떠난다”고 그가 밝혔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아내는 2017년에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기적처럼 완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다시 재발한 것이다. 프로 골프대회 출전을 ‘투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경기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 다 짐작할 것이다. 톰 왓슨이 에이지 슈팅을 연거푸 기록한 ‘더 시니어 오픈’은 영국에서 열렸다. 그의 집은 미국이고. 그는 ‘더 시니어 오픈’보다 한 달 앞서 일본에서 열린 ‘마스터 카드 재팬 챔피언십’에 참가할 때도 혼자였다. 미국에서 열리는 경기에 나갈 때도 집을 멀리 떠나기는 마찬가지였을 테고. 동부에서 서부로 남부에서 북부로. 그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내를 위해 인생의 전부와도 같은 골프를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만 39승을 올린 톰 왓슨은 선수생활 마무리를 그렇게 했다. 10여 년 전 ‘2009 디 오픈’에서 59세란 나이로 우승 문턱까지 갔던 톰 왓슨. 그때 그 명승부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골프에 입문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다. 그해 순수 독학으로 화이트 티에서 처음 언더파를 친 나는 골프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 오픈’ 마지막 날 중계방송을 봤다. 내게는 작은아버지뻘 되는 골퍼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가 바로 톰 왓슨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18번 홀에서 두어 발짝짜리 퍼팅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퍼팅이 들어가면 디 오픈 최고령 우승이 기록된다”고 해설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디 오픈 최고령 우승 기록을 갈아치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솔직히 그때는 제대로 몰랐다. 그래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그는 차분히 퍼팅 루틴을 밟았고 스트로크를 했다. 우승보다 값진 ‘명승부’ 아~! 내 탄식과 함께 그 퍼팅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먼저 경기를 마치고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선수와 연장전을 치렀다. 연장전은 네 홀을 쳐서 점수를 합산했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한 홀씩 승부를 겨루는 ‘서든 데스’가 아니었다. 명색이 세계 최고 권위의 골프대회 ‘디 오픈’ 아니던가. 나는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톰 왓슨을 응원했다. 결과는? 내 바람과는 반대였다. 그는 그렇게 우승을 놓쳤다. ‘디 오픈 최고령 우승 기록 경신’도 물거품이 됐고. “너무 지쳐서 연장전에서는 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다”고 그는 소감을 밝혔다. 그해 ‘디 오픈’ 소식에 우승자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온통 준우승을 한 톰 왓슨 얘기뿐이었다. 당시 우승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훗날 사람들은 2009년 디 오픈 우승자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준우승을 한 선수가 톰 왓슨이라는 사실만 생각할 것이다”라고. 그가 한 예언은 맞았다. 나도 그해 우승자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다. 최근에 찾아보고 나서야 스튜어트 싱크라는 대선수였음을 알게 됐다. 그 명승부를 보고 나는 톰 왓슨을 존경하게 됐다. 내게 큰 감동을 준 그가 투어를 떠난다고 하니 서운했다. 얼마 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상심이 클까. 사랑하는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인생의 전부였던 골프도 내려놓은 톰 왓슨. 이제 다시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문득 지난해 투어를 떠나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영원히 투어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믿기로 했다. 그가 투어 무대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래서 내게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임을. 톰 왓슨이여, 돌아오라!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제법 큰 사업을 하다가 아예 골프의 길로 나섰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경기위원 교육과정 최고단계 타스(TARS, Tournament Administrators and Refree’s School)를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했다. 그때 한 공부를 밑천으로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평소 말이 앞선다고 욕을 먹는가 싶더니 그 재주를 살려 방송인으로도 변신했다.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골프쇼 ‘필드 위의 사냥꾼’에 출연해 예능 기질도 뽐내는 중이다.
- 2020-01-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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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한양대 교수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된다"
- 국내에서 시집 해설을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진 유성호(柳成浩·56) 한양대학교 교수가 첫 산문집 ‘단정한 기억’을 출간했다. 규준이 정해진 딱딱한 논문과 평론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쓰며 모처럼 그는 ‘자연인 유성호’가 간직한 섭렵과 경험의 기억들을 가지런히 펼쳐보였다. 유 교수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이번 산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글까지 모았더니 하나의 범주로 묶긴 어렵더군요. 삶의 이력처럼 복잡한 장르의 글들을 정리하며 목표로 삼은 건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어느 시기에 내가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어요. 또, 살면서 저를 위해 애써준 분들이 쉽게 볼 만한 책을 선물하자는 거였죠. 그동안 평론 전문 서적을 더러 냈는데, 일반인에게 쉽게 읽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책은 평론가나 연구자보다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동창에게 많이 보냈어요. 저야 책 받는 게 익숙한 직업이지만, 그들에겐 책 선물이 귀하고 감동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잘 봤다며 선물도 보내오고, 몇 권 사서 주변에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는 무게를 덜고 소통 친화적인 글을 더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추억 산문집을 엮으며 과거를 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유 교수는 지난날 곳곳에 남긴 삶의 흔적들과 마주하곤 했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인생의 기억과 추억을 ‘물방울의 흔적’에 빗대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물방울이 머물다 날아간 ‘마른 흔적’은 그 물방울이 존재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지금은 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증과 같다는 것이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물방울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실체가 마른 흔적인 셈이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요. 한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거나 소멸했다는 ‘실감’ 사이에서 살아가니까요. 그런 점에서 ‘추억’은 물방울 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라 할 수 있죠.” 유 교수는 추억이 꼭 과거지향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의 ‘자화상’ 마지막 문장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에서, 이때의 추억은 지난날을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넘어서겠다는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추억이란, 기억되는 그 순간의 온기로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꿈꾸는 기억’과 같다고 표현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 가사에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 늙어가는 첫사랑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반가움과 동시에 상실감도 들 겁니다.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거니까요.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앞서면 추억에서 ‘꿈’이 빠져나가고, 현재의 물리적 어색함만이 남게 됩니다. 오히려 꿈꾸는 기억으로 머물 때보다 더 왜소하고 허약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움은 그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리워하는 마음과 행위 자체에서 빛을 발하고, 그것이 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반해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매몰돼 현실에 울분을 갖고, 젊은 세대를 부정하는 등의 행위는 경험적 한계에 갇힌 결과라고 해석했다. “흔히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식의 경험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젊어본 적 있다고 뭔가를 더 많이 아는 건 아녜요. 가령 어딘가를 직접 여행한 사람보다 가지 않고 책만 본 사람이 그곳을 더 잘 알기도 하잖아요. 실제 가본 사람은 경험적 한계에 갇히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렇듯 젊은이는 늙어보지는 않았지만 늙음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막상 늙어서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죠.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을 내세우게 되고요. 옛날에도 말 안 듣는 학생은 많았는데, 마치 요즘 아이들만 유난하다고 지적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등의 언행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역설적 기억, 청춘 물론 누군가의 과거 속엔 실제로 열정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청춘’이라 부른다. 유 교수는 ‘청춘’이란 오히려 청춘을 지나버린 사람들의 생에서 발견되는 흔적, 즉 역설적 기억과도 같다고 일컬었다. “청춘은 젊은 시절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 생의 조건이 아닌, 뒤늦게 발견하는 기억의 형식이라 볼 수 있죠. 저 역시 지나고 떠올려보건대, 온전히 대학 4년이 제 인생의 청춘이었던 것 같아요. 미정형이던 육신과 정신이 그때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과 이후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를 기점으로 생(生)이 갈라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책도 대학 시절의 것이 많은데, 그때 읽은 것이 진짜 책이고, 요즘 읽는 것들은 플러스알파라고 봐요. 말하자면 별책부록 같은 거죠.” 별책부록에 자주 비유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여생’(餘生)이다. 유 교수는 책에서 ‘향원익청’(香遠益淸, 향이 멀리 퍼질수록 더 맑아진다)을 언급하며 “자기 경험에 갇힌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향기를 전하는 노경(老境)의 모습이 간절한 때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생’이 아닌, 소통과 공감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반 인생’을 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부분 남은 생을 버티는 식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존경받는 어른으로의 후반생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고, 꿈에 그린 노후를 포기한 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유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말년을 위엄 있게 지켜나가길 바랐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긴 참 어렵죠. 그러나 그토록 힘든 만큼, 오히려 더 되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알 게 뭐야’ 하며 무신경하게 사는 이도 있겠죠.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기억도 있어요. 저도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부재함으로써 진정 존재하는 것들이 생기더군요. 사랑하는 사람, 나와 가치관을 나눈 이들에겐 내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시작되는 기억들이 존재해요. 아무리 내 삶이라도 그 기억의 용량까지 줄일 순 없잖아요. 가치 있다고 여긴 일들을 변함없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남기는 것이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2020-01-1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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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는 시래기와 우거지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2020-01-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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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바뀌는 연금제도 "이렇게 대응하라"
-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올해 연금제도 변화를 분석한 ‘행복한 은퇴발전소’ 11호를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행복한 은퇴발전소’는 키워드 ‘RAISE’에 맞춰 5가지 정책변화에 대한 연금자산 증식 방법을 제안했다. 5가지 정책변화는 △주택연금 가입 완화(R), △노후자금 연금화(A) △수익률·편의성 제고(I) △스스로 연급 적립 지원(S) △은퇴소득 불평등 완화(E) 등이다. 먼저 R은 ‘주택연금 가입 완화’다. 정부는 올해 주택연금 가입연령을 60세에서 55세로 하향 조정하고 주택가격 기준을 시가 9억 원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변경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주목할 점은 최소 가입연령 하향이지만 일찍 가입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아 금융자산 규모와 주택 입지를 살펴 결정해야 한다. 둘째, A는 ‘노후자금 연금화’다. 퇴직연금 가입률은 50% 정도로 그나마 중도인출하거나 일시금으로 받아 소진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퇴직연금 의무화, 퇴직소득세 강화, 퇴직연금 중도인출 요건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퇴직급여의 연금 수령 시 11년차부터 연금소득세를 퇴직소득세의 70%에서 60%로 추가 인하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절세효과 극대화를 위해 10년차까지 연금 수령을 최소화하고 11년차 이후 금액을 늘리면 된다. 셋째, I는 ‘수익률·편의성 제고’다. 개인·퇴직연금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낮은 수익률로 연금자산 형성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될 예정으로 연금 편입 가능 상품 확대, 금융기관 및 상품 변경 간소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DC형 퇴직연금에서 상장 리츠 투자가 가능해지고 이달 말경부터 연금계좌의 금융상품 및 관리 금융기관 변경을 온라인을 통해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 넷째, S는 ‘스스로 연금 적립 지원’이다. 노후소득을 늘리려면 공적연금뿐만 아니라 연금저축, IRP 등 개인연금저축도 늘어나야 한다. 정부의 지원 방안으로 50세 이상 투자자의 연금계좌 세액공제 한도가 증액되고, ISA 만기자금의 연금계좌 납입 및 세액공제가 허용된다. ISA계좌에 만기까지 3000만 원을 만들어 연금계좌로 넘겨 절세효과를 극대화하고, 50대 이상은 올해부터 3년간 연금계좌에 연 200만 원을 추가로 납입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E는 ‘은퇴소득 불평등 완화’다. 소득 불평등이 노후에는 연금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은퇴소득 격차를 해소하려는 것도 정부 정책의 한 방향으로 고소득자의 사적연금 지원을 제한하고 취약 고령층의 주택연금 지급액을 상향, 기초연금 지급을 확대하는 등의 다양한 정책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이번 호에는 △외국의 은퇴 소식을 담은 ‘글로벌 은퇴이야기’ △김헌경 도교건강장수의료센터 연구부장이 말하는 은퇴 후 건강비결 ‘웰에이징’ △만화가 홍승우의 카툰 ‘올드’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정신건강 칼럼 ‘힐링 라이프’ 등이 수록됐다. ‘행복한 은퇴발전소’는 정기구독을 통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으며 미래에셋은퇴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전자책 형태로 열람할 수 있다.
- 2020-01-0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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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은둔형 외톨이
- 일본어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는 ‘집에 틀어박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사회 문제 관련 기관에서는 이미 국제 학술어로 정착된 ‘히키코모리’와 우리말로 풀어쓴 ‘은둔형 외톨이’라는 두 용어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히키코모리’에 관한 우려가 우리나라에서도 확산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큰 사회 문제로 등장해 이에 대한 정부와 학계의 관심도 큽니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입니다. 일본 총무청은 1990년에 ‘청소년백서’를 발표해 청소년의 장기 등교거부와 ‘히키코모리’ 문제를 보고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히키코모리’를 청소년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3월에 일본 내각부(內閣府)가 발표한 보고는 40~64세의 중고년(中高年) ‘히키코모리’가 추정치로 약 61만 명에 달한다고 했습니다. 2016년에 발표한 15~39세의 청소년 ‘히키코모리’ 추정수 약 54만 명을 합치면 115만 명이나 돼 국민을 놀라게 했습니다. ‘히키코모리’가 문제인 나라들 ‘히키코모리’ 문제를 20여 년 연구해온 일본 쓰쿠바(筑波)대학교 사이토 타마키(齊藤環) 교수는 정부 당국의 추정수의 약 2배인 200만 명 이상이 ‘히키코모리’ 해당자이며 이 중 반 이상이 중고년일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키코모리’에 관한 여러 권의 책도 낸 사이토 교수에 의하면, 일본 다음으로 ‘히키코모리’가 인구비례로 한국에 많고 중국, 타이완, 홍콩 등 유교문화국으로 경제발전을 어느 정도 달성한 국가들에 ‘히키코모리’ 문제가 크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되어도 가족과 동거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에 이 문제가 많다고 말한 사이토 교수는, 서구문화의 나라에서 이 문제가 비교적 적은 것은 성인이 되면 독립해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히키코모리’가 비교적 많은데 일본, 한국, 스페인, 이탈리아 네 나라의 공통점은 청년이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이 인구의 70%를 넘는다는 데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또 이런 이유로 일본에는 ‘히키코모리’ 수가 선진국 중 가장 많은 반면 홈리스(homeless) 수는 가장 적어 정부 통계에서도 5000명 미만이고, 개인주의가 우선하는 영국에는 26만 명, 미국에는 100만 명 이상의 홈리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히키코모리’ 문제는 가족주의 대 개인주의 구도에서 관찰해야 하며 젊은이의 거처가 ‘집 안이냐 노상(路上)이냐’의 차이에서 문제 해결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홈리스는 생활환경이 나빠 평균수명이 50세 정도인 데 비해 ‘히키코모리’는 주거환경이 좋아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을 것이라고, 사이토 교수는 덧붙였습니다. 올해 일본에서 ‘히키코모리’ 문제가 특히 화제에 오른 것은 지난봄에 나흘 간격으로 ‘히키코모리’와 관련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76세의 전직 농수산성 차관이 44세의 ‘히키코모리’ 아들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은 평화스럽던 가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매스컴의 대대적인 취재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교양 있는 아버지가 ‘히키코모리’ 아들이 근처 초등학교 운동회의 확성기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불평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흘 전 ‘히키코모리’의 ‘묻지마’ 살인사건을 연상해 타인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이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의 동정을 샀습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이 아이도 그와 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강박감에서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이 전직 정부 고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전 오사카(大阪) 시장이며 인권변호사인 하시모토 토루(橋下徹) 씨도 트위터에 “나도 같은 입장이 되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 나흘 전에 일어난 일은 51세의 ‘히키코모리’가 등교하는 초등학생이 탄 스쿨버스를 습격해 두 사람을 죽이고 10여 명의 다른 아이와 보호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신은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히키코모리’ 반 이상이 중고년 이처럼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가 이제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중고년을 포함한 모든 연령층의 문제로 확산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8050’이라는 유행어도 생겼습니다. 즉 “80대의 노부모가 50대의 ‘히키코모리’ 자식을 돌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키코모리’의 일반적 정의는 ‘집에만 틀어박혀 외부와의 연락을 6개월 이상 단절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터넷과 휴대전화, 텔레비전 등이 발달한 오늘날, 이 낡은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사이토 교수는 말합니다.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壽) 씨는 잡지 ‘분게이 주(文藝春秋)’에 쓴 글에서 일부 ‘히키코모리’ 관련 범죄가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매년 3500명 이상 사망하는 교통사고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며, ‘히키코모리’는 결코 범죄예비군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히키코모리’ 중 인터넷을 통해 언론활동을 하거나, 소설이나 음악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가정에 있으면서도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8050’ 문제에 약간의 희망을 준다고도 했습니다. 지금 사이토 교수가 우려하는 것은, ‘히키코모리’의 범죄사건이 아니라 머지않은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들의 대량 고독사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2030년쯤 일본이 ‘히키코모리’ 장수사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지금 50대 중반의 ‘히키코모리’ 수만 명이 연금 수급자가 될 것인데, 수많은 사람이 연금 수급신청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히키코모리’ 지원 대책이 더 확충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통계청 추산이라면서 우리나라의 ‘히키코모리’ 인구수가 약 31만 명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은 있습니다. 이웃 나라의 심각한 ‘히키코모리’ 실상과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사회의 대응을 ‘타산의석(他山의石)’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황경춘 칼럼니스트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 2019-12-2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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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부희령, 무정한 세상에서 말리는 내 안의 축축한 슬픔
- 단편소설 ‘어떤 갠 날’로 등단한 후 집필 활동과 더불어 수십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겨온 부희령(夫希玲·55) 작가. 최근 그녀는 소설과 번역서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아 첫 산문집 ‘무정에세이’를 펴냈다. “소설이 그림이라면 에세이는 사진과 같다”고 비유하는 부 작가의 글은 민낯처럼 기교는 없지만, 그 밋밋함이 주는 위안이 퍽 살갑게 느껴졌다. 부 작가의 다정한 미소와는 대조되는 책 제목이었다. 까만 어둠으로 덮인 표지를 들춰 담담하게 쓰인 문장들을 읽어낸 한 독자의 평이 인상적이다. “일반 에세이처럼 긍정적 교훈을 주는 내용은 별로 없지만 읽는 내내 난롯불을 쬐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무정한 마음 붙들고, 참으로 유정해서, 무정한 세상을 건너간다.” 그들이 말한 ‘긍정 없이 따뜻한’, ‘유정해서 무정한’ 등 다소 모호했던 표현은 책을 읽은 뒤 제법 수긍이 갔다. “현대 사회는 정념이 들끓고 있죠. 때론 그런 정념이, 유정함이 누군가를 소외하고 차별한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이는 사랑하지 않고, 특정 단체를 좋아하면 그 밖의 공동체는 배척하듯, 내가 어떤 감정을 갖는 일 외엔 무정하게 굴게 마련이죠. 평등이나 박애 등을 실현하려면, 어쩌면 그 사회가 무덤덤해져야 하지 않을까 해요. 치우침 없는 보편적인 사랑과 관심은 편애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이때의 사랑은 존중하는 마음이겠죠.” 부 작가는 내면의 자신에서 출발해 바깥의 공동체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글쓰기의 길이라 일컬었다. 지난한 그 길에서 역시 독자를 향한 존중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그녀다. “자기 상황에 맞는 글에는 공감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에선 소외를 느끼곤 하죠. 또 책은 작가의 일방적 소통이기 때문에 자칫 독자를 끊임없이 가르치려 들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배제되지 않게 글을 쓰려 했어요. 가령 ‘그런 사람이 돼야 해’라고 하는 대신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해’라거나, 내 처지를 통해 ‘그런 사람이 아닌 이런 사람도 충분히 자족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무외시를 실천하며 얻는 행복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기에 책에는 일상의 경험과 사색이 주를 이룬다. 평범한 공간 속 마주하는 낯선 인연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에서 무정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녀는 책에서 ‘무외시(無畏施)’를 언급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베풂을 뜻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 한 번이 곧 무외시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아울러 내가 베푼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보시(布施, 널리 베풂)라 칭했다. 부 작가는 이렇듯 보답을 바라지 않고, 보답할 부담 없이 이뤄지는 선행이야말로 온 세상을 향해 이뤄지는 보시라고 말한다. “몇 년 전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 높은 고개를 넘기 위해 작은 비행기를 탔어요. 근데 그 비행기가 일 년에 일곱 번은 추락한다는 거예요. 불현듯 내 목숨은 저 조종사 손에 달렸다 여기니, 평소 버스나 지하철 등에서도 알게 모르게 내 삶을 타인에게 의탁하며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한편으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뜻밖의 도움을 받기도 하죠. 그물망처럼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는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이 와 닿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랐다. 며칠 전 길을 지나던 아이가 떨어뜨린 허리띠를 주워준 일, 그다음 날 지하철에 두고 내린 휴대폰을 한 승객 덕분에 찾은 일. 마치 앞선 선행의 보답처럼 느끼기도 했지만, 실상 주고받는 이가 맞물리지 않는 오묘한 사이클이었다. 부 작가는 “도움을 준 이에게 은혜를 갚긴 어렵다”면서 “그런 엇갈림이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도울 때 그 상대보다 내가 더 힘을 얻는 경우가 많아요.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때, 뭔가 1등 한 것처럼 자신을 훌륭하게 여기고 격려해주면 좋겠어요. 별거 아닌 일로 뿌듯해하긴 좀 그렇지 않냐 하겠지만, 때론 그런 유치함도 필요하다고 봐요. 저도 그냥 촌스러운 사람이 되겠다, 유치해지겠다고 방향을 바꾸니 자신감도 생기고 꽤 행복해지더라고요.” 달콤한 긍정은 기만이다 중년 이후 그녀는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여겨온 사회 문제를 체감하면서, 공적인 자아와 공동체를 위한 일에도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칼럼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며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받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걸 느꼈어요. 어쩌면 개인의 삶이란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자아가 확장되면서 긍정적인 부분도 생기더군요. 자기 탓을 하지 않게 된 거죠. 내가 실수하고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면 꼭 내 잘못도 아니고 나만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나아가 타인의 삶은 어떤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요.” 그녀는 작가답게 글로써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랐다. ‘무정에세이’ 역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썼지만 혹자는 “글이 너무 건조하다”며 “좀 더 다독다독해야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단다. 그러나 부 작가는 “그것은 기만”이라고 일축했다. “요즘 출간되는 수필집이나 자기계발서에는 긍정의 말이 넘쳐요. 그런데 세상에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긍정적으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높이 띄웠다가 현실에서 내팽개쳐졌을 때, 그 아픔이 더 크리라 생각해요. 달콤한 말은 사탕처럼 잠깐의 위안일 뿐입니다. 결국 스스로 견뎌낼 힘을 찾아야죠.” 일시적 힐링과 위로는 결코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보단 자기 안의 불행과 고통을 마주하고 세상에 비춰볼 때, 또 그런 사회를 무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위안을 얻는다고 조언했다. “어른이란 비바람 치는 들판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존재잖아요. 슬픔이나 괴로움을 삶의 디폴트(default, 기본값)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스스로 이겨낼 힘은 나오지 않아요. 또 자기 안에만 머무는 우울은 축축하고 잘 마르지 않죠. 밖으로 끄집어내 말려줘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가엽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나만 괴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안고 산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위안을 얻기도 하죠. 저 또한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 똑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훌륭해져야 하는가?’ 등에 대해 글로 이야기하고 위안을 나누고 싶습니다.”
- 2019-12-1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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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딸에게 나의 재산 모두를 주고 싶다 상속, 가업승계 분쟁
- A(77) 씨는 2000년경 계열사 사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이후 협력업체를 세워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회사생활이나 사업은 큰 어려움 없이 잘해왔지만 가정사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아내가 2000년 초 일찍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그곳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큰딸은 사업가와 결혼 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큰아들에게는 유학 자금과 함께 사업 관련 명목으로 100억 원 가까운 거금을 주었지만, 한국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A 씨 부인)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사업이 잘 안 돼 시가 50억 원가량의 청담동 빌딩을 증여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을 때뿐이었다. 사업 자금을 더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A 씨가 거절한 이후에는 소식조차 없다. 큰딸도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크게 싸우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버렸다. 20년 가까이 왕래는 물론 전화 한 통 온 적 없고, 심지어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A 씨 곁에 남아 있는 가족이라고는 아직 미혼인 작은딸밖에 없다. 작은딸을 결혼시키려 A 씨와 지인들이 여러 번 남자를 소개해줬지만 소용없었다. A 씨가 보기에 요즘 들어 부쩍 기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외로움을 타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A 씨는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작은딸에게 모두 물려주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먼저 A 씨는 생전에 모든 재산을 작은딸 명의로 이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작은딸이 다른 형제들로부터 유류분 반환청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유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언은 그 내용이 불법이 아닌 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유언의 효력이 발생하는 사망 시까지 언제든 유언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있고, 그 재산을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유언에는 중대한 제한이 있다. 자필증서, 비밀증서, 공정증서, 구수증서, 녹음 등 민법이 정한 5가지 방식을 엄격히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법에 의해 보장되는 최소한의 상속 재산인 유류분도 제한으로 작용한다. 유류분제도는 개인의 유산 처분에 대한 자유와 재산의 공평한 분배라는 대립되는 요청을 법으로 조정하는 제도다. 역사적으로는 남녀차별 해소와 가족의 생활보호, 상속인 간의 불공평 해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유류분은, 직계비속(사망자의 자녀와 손자녀)과 배우자는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이고, 직계존속(사망자의 부모 등)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이다. 법정상속분이란 민법에서 정해둔 상속분으로서 상속재산분할의 기준이 되는 비율을 말한다. 법정상속분은 공동상속인들 사이에서는 균등한데, 사망한 사람의 배우자 법정상속분은 사망한 사람의 자식이나 부모의 상속분에 50%를 가산한다. 예를 들어 사망한 사람에게 딸 2명과 아들 1명, 그리고 아내와 부모가 있으면 직계비속인 딸들과 아들(1순위 상속인)과 아내(배우자)만 상속인이 되고 그 비율은 1:1:1:1.5가 되기 때문에, 법정상속분은 딸들과 아들은 9분의 2씩, 아내는 9분의 3이 된다. 따라서 유류분은 딸들과 아들의 경우 18분의 2, 아내는 18분의 3이 된다. 이런 유류분제도에 대해, 유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할 뿐 아니라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외국의 입법례에 비해 그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도 있다. 유류분제도 때문에 A 씨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작은딸에게 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두더라도, 큰아들과 큰딸은 A 씨의 유언이 없었을 경우 자신의 받을 수 있는 법정상속분의 반씩을 작은딸에게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유류분제도 역시 상속인들 간의 유산 분할의 공평을 꾀하기 위한 제도라서, 유류분 부족액을 계산할 때 상속인들 중에 이미 피상속인(사망자)으로부터 생전에 증여받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그 금액(이를 특별수익이라고 한다)만큼 반환받을 금액에서 공제한다. 따라서 생전에 특별수익액이 많은 큰아들은 특별수익액이 거의 없는 큰딸에 비해 유류분으로 받을 금액이 훨씬 적거나 없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신탁계약을 체결해두는 것이다. 두 번째 칼럼에서 필자가 소개한 것처럼, A 씨는 생전에 신탁회사 등에 전 재산의 명의(소유권)를 이전하고, 생전에는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임대료, 이자, 배당소득 등)을 갖되, 사후에는 A 씨가 상속인으로 지정한 작은딸만이 그 수익권을 갖도록 정해둘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유언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신탁계약을 할 때 수익권 발생 또는 분배, 지급 방법, 신탁 재산의 처분 조건 등에 관해 자세히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후에도 재산이 신탁자의 뜻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다만 신탁제도를 이용해도, 현행법상 상속세와 증여세 감면 혜택이 없고, 수익권을 받지 못한 다른 상속인의 유류분청구를 막을 수 없다는 면에서는 장점이 제한적이다. 사람들은 유산 상속, 분배와 관련한 법률과 제도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들을 하지만 가족법, 세법 같은 법률이나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돼 있고 현실에 맞게 개정된다 해도 가족끼리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 자신이 노력해서 벌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평’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 이상, 유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진흙탕 싸움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재산 때문에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지내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생전에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아낌없이 쓰다가 깨끗이 기부를 하고 떠나는 ‘웰다잉’을 계획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호를 끝으로 김성우 변호사의 ‘상속과 증여 톺아보기’ 연재를 마칩니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 2019-12-04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