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 자꾸 부딪혀요.”

자녀를 키우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던 시절에는 크게 다투지 않았는데, 은퇴 후 오히려 배우자와 갈등이 잦아졌다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 성격이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전문가들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생활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함께 있는 시간은 늘고, 역할은 바뀌었다
은퇴는 부부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하는 시기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관계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각자의 생활 리듬에 익숙했던 두 사람이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 사소한 습관 차이도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통계청 ‘2024 사회조사’에 따르면 배우자와의 관계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은 75.6%였지만, 반대로 5.0%는 불만족, 19.4%는 보통이라고 답했다. 만족하는 부부가 많지만, 적지 않은 부부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조사 대상을 60세 이상으로 좁혀보면 온도 차가 드러난다.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배우자 관계 만족도는 66.9%로, 전체 국민 평균보다 약 9%포인트 낮았다. 은퇴 이후 배우자와의 관계가 이전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영역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달라진 것은 성격보다 ‘기대’
갈등의 원인은 의외로 큰 문제가 아니다. 집안일, 생활 습관, 대화 방식처럼 일상적인 부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은퇴 후에는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이제는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기대가 커지는 반면, 상대방은 여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원할 수 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원하는 관계의 방식이 다르면 서운함이 쌓이기 쉽다.
‘노인실태조사’에서 배우자와 관계는 69.4%를 차지한 자녀와의 관계 다음으로 만족도가 높은 영역으로 나타났다. 이는 건강상태(43.7%)나 경제상태(31.4%)보다도 노년기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노년의 행복은 건강이나 소득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도 크게 좌우된다는 뜻이다.
좋은 부부는 싸우지 않는 부부가 아니다
관계 전문가들은 오래 함께 산 부부일수록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푸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생활 규칙을 함께 정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하며 “왜 그랬어?”보다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묻는 대화가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배우자와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퇴 이후는 부부가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기다. 서로를 가장 오래 아는 사람인만큼, 익숙함에 기대기보다 다시 이해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오래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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