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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천혜의 오지 마을, 응곡마을
-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06-0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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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5저 2고 시대에도 부동산을 선호할 것인가?
- 요즘 필자의 부업(副業) 중 하나는 주례를 서는 것이다. 말이 부업이지 돈이 생기기는커녕 꽤나 품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흔쾌한 마음으로 주례를 서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시대에 주례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면 안 되지~’ 하는 은퇴연구소장으로서의 애국심(?)이 아니라면 진작부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주례랍시고 다소 무례한 줄 알면서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집 마련에 관한 부분이다. 집을 샀다면 어느 지역의 몇 평짜리를 얼마에 샀으며, 전세는 몇 평짜리가 얼마냐 하는 세세한 내용까지 다 털어놓게 만든다. 요즘 젊은이들의 집에 대한 생각과 함께 부동산시장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신혼부부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30대 초·중반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집사기를 꺼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집값이 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셋값이 오르고 있지만 둘(맞벌이가 대부분)이 벌어서 충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집을 샀다가 집값이 떨어질 경우 당해야 할 충격과 손실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결국 30대와 40대 초반 연령대들은 ‘지금까지는 집이 주거의 대상인 동시에 투자의 대상이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주거의 대상이지 투자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집을 사야 하고 집을 사면 무조건 오른다는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는 세대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생뚱맞은 생각일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 물론 양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집을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돈을 모으더라도 반드시 집부터 사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집보다는 좀 더 좋은 차, 특히 외제차를 사고 싶고 둘이서 여기저기, 특히 해외로 여행 다니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신혼부부와 양가 부모의 갈등이 외제차 구입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말로만 듣다가 우리 집 아이들이 그럴 줄 몰랐다”는 부모들의 푸념도 심심찮게 들린다. 서론이 길었지만 젊은 층의 주택관을 들여다본 이유는 이들이 앞으로 주된 주택수요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30대는 집에 대한 애착이 없는 세대이다. 왜냐하면 부모 세대는 악착같이 벌어서 가난과 집 없는 설움을 벗어나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였지만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마련한 집에서 집 없는 설움을 거의 겪지 않고 자란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과연 5저(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저고용, 저자산가치) 2고(고령화, 고소득화)시대, 특히 소득 3만~4만 달러의 고소득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동산 선호가 계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가계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93년 76%에서 2001년에는 83%까지 높아졌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낮아져서 작년에는 68%까지 떨어졌다. 아직도 부동산, 부동산 하지만 13년 만에 고점(83%) 대비 68%로 15%포인트나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부동산 보유비중이 계속 하락할 것인가? 부동산 보유비중은 부동산 가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움직인다. 예를 들면 아파트 등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것 같으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더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부동산 가격이 내릴 것 같으면 부동산을 줄이는 대신 다른 자산으로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최근 수년간 부동산시장이 침체했던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지역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신혼부부는 물론 주된 수요층인 40대가 집을 사지 않고 버티면서 주택가격은 하락안정세를 보인 반면 전세가격은 급등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감안해야 할 것은 부동산시장의 사이클과 함께 소득수준에 따라서도 부동산 선호도가 달라지리라는 점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보다 소득 3만, 4만 달러를 먼저 간 선진국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라마다 인구밀도, 출산과 고령화, 주택건축규제, 주택소유에 대한 인식과 관습, 세제 등에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어떤 공통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도출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처럼 주식시장보다는 은행 위주의 금융제도를 가지고 있는 독일, 프랑스, 일본의 경우 소득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 사이에서 부동산 보유비중이 고점을 치고 소득이 3만, 4만 달러로 갈수록 부동산보유비중이 계속 줄어든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는 미국과 영국처럼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인들의 부동산보유비중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호·불황에 따라 30~40%에서 움직이고 있다. 개인들의 주식보 유비중이 높은 데다 국토가 넓고 주택 개발지가 널려 있는 반면 인구밀도는 낮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의 부동산 보유비중은 1980년대에 각각 72%, 71%로 최고를 기록했었다. 이후 조금씩 낮아져서 최근에는 60%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부동산 거품기였던 1980년대에 부동산 보유비중이 65%에 달하기도 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계속 떨어지면서 최근에는 40% 안팎까지 내려와 있다. 필자는 소득수준과 부동산 보유비중의 이 같은 관계를 ‘부동산 포화의 법칙 또는 부동산 포화계수’라고 부르고 있다. 부동산포화계수는 1인당 소득수준이 1만 달러와 2만 달러 사이에서 부동산 보유비중이 고점을 치고 내려오면서 소득이 높을록 부동산보유비중은 줄어드는 대신 금융자산 보유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소득 1만 달러(1994년)와 2만 달러(2006년)의 중간지점이었던 2001년에 83%로 고점을 기록한 부동산 보유비중이 지금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소득 1만 달러시대를 돌아보면 ‘내 집 마련’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은 집은 이제 됐고 ‘늘어나는 소득을 어떤 자산으로 굴릴 것인가, 즉 예금, 보험, 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로 자산관리의 초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간 부진했던 수도권 부동산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부동산 보유비중이 다시 올라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80%에 근접하기보다 70% 초·중반대로 올라갔다가 부동산 경기에 따라 다시 하락하는 흐름을 보일 것이다. 특히 부동산보 유비중이 높아지더라도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2017년을 고비로 다시 하락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인당 소득 4만 달러가 넘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선례를 따라간다면 2020년경 우리나라 가계의 부동산 보유비중은 현재의 68%에서 60% 안팎까지 낮아질 것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5-06-0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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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4년생 말띠들의 거침없는 질주,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
- 2015-06-0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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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5]한 지붕 열 세 식구 이야기
- 내가 2003년에 낸 에세이집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자녀 네 가족과 우리 내외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분도 있고 부러워하면서 묻는 이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분은 당장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이런 급한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달리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이근후(李根厚·이화여대 명예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핵가족도 모자라 일인 가정으로 살아가는 인구도 참 많아졌습니다. 교과서적인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학 교과서에 실린 가족의 개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대가족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핵가족이란 개념입니다. 확대가족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했던 가족구조입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삽니다. 핵가족이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생긴 가족형태입니다. 가족 이동이 손쉽도록 기능적인 가족이 부부와 미성년 자녀들로 구성하는 가족형태입니다. 13가족 함께 한 지붕아래 산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곧바로 분가하여 자신의 핵가족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이런 고전적인 가족 정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족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회적 추세로 보아 우리 집은 13가족이 한 지붕아래 함께 산다고 하면 당연히 궁금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2남2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5가구 손자녀 합해 13명입니다. 함께 돈을 모아 빌라 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여 그런 발상을 해서 내가 동참한 것입니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입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습니다. 1년 여의 의논과 1년 여의 설계를 거쳐 함께 모여 삽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다는 말은 자녀들의 요구와 우리 부부의 사정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현실적인 요구는 자녀들이 모두 전세를 살고 있어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갖지 못했습니다. 손자녀들이 어렸는데 그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진 터라 육아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은퇴를 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 이런 상황에서 모였으니 우리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서 신혼 6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분가를 시키면 남남이 될 것 같아서 서로 양해를 하고 6개월의 소통기간에 합의했습니다. 새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사위도 우리 부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부도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 자라던 친가에서 하던 습관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부부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던 습관대로 했습니다. 서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6개월의 학습동거 끝에 분가시켰습니다. 6개월 학습동거 끝의 분가 이후 이런 사정을 거쳐 서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아무리 필요에 의한 재집결이긴 하지만 의논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요에 의한 재집결의 아이디어는 큰며느리가 제안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의논하기를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타계하게 되면 남은 부모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자녀가 넷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시면 어떨까라고 형제들 간에 의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자면 한 집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를 내가 정년퇴임하는 시점을 맞추어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모여 어떻게 하면 필요성을 극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부부간에 생각을 맞추어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대가족이 모여 살자면 의견이 다른 점도 많고 서로 부딪쳐 속상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적응할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의논 끝에 찾아 낸 핵심적인 요체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이 고유한 가치관과 종교관을 갖고 간섭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서로 같음은 나누면서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한 하나는 가족 간의 거리입니다. 함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가까운 만큼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서적 거리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갈등으로 꼬이고 너무 멀어도 남남입니다. 얼마만한 정서적 거리가 필요할까요. 고슴도치를 생각했습니다. 서로 꽉 껴안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면 가족정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낱말이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입니다. 이런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독립성의 유지와 간섭의 배제였습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 인정해 3세대 가운데 우리 부부가 그 약속을 지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가하여 나름 가족을 형성했다고 해도 부모 눈엔 역시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이 위태한 아이(?)로 보는 시각은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서적으로 느끼기에 부족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습관이 변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간섭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어린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습득한 방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늘 이런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부부의 손길이 없어도 잘 지냅니다. 되돌아 보면 기우입니다. 우리 부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자녀들의 창의성이 넓어집니다. 자녀들도 제가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이나 가족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패가망신할 삶이 아니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꼭 부모가 살았던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삶이 모델입니다. 집 구조상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법적으로 각기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니 공동경비만 갹출해서 유지보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독립이 보장된 셈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고 산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혜택을 받은 층은 당연히 우리 부부입니다. 다음이 손자녀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자녀들은 샌드위치 신세입니다. 위로 부모를 모시랴 아래로 자녀들을 키우랴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자녀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그 자체 때문에 불편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공동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이제 손자녀들도 자라 우리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습니다. 처음 모여 살기로 했을 때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언제까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손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의논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10년이 지나 보니 그런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서 꿈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일꾼으로 자랄 것을 소원합니다.” 이 약속은 다섯 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제 손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공동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상호 존중하는 독립성과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는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가치 있는 기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근후 명예교수는 1935년생인 이근후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 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전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현재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 디스크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손녀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쓰도록 해준다며 가족들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걸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한다고 했다.
- 2015-06-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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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그 순간] 루시타니아 호의 최후
- 글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영화 을 잘 아실 것이다. 1997년 제작되어 전 세계 흥행 1위를 기록한 영화다. 한국에서는 다음해에 개봉되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이 뉴욕으로 향하는 첫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해양사고이다. 아직도 민간 해상참사로서는 1514명이라는 최대 사망자를 낸 사건이다. 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해상 사고가 있다. 1차 대전 초기인 1915년 5월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Lusitania) 호 사건이다. 은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 첫 항해, 빙산과의 충돌이라는 사실(facts)에 사랑 이야기를 곁들인 것이다. 루시타니아 호는 전쟁, 잠수함, 동맹국들 간의 배신이라는 더 큰 틀에 당시 최대의 호화 여객선 피격이라는 사실, 그리고 로맨스가 들어가면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역사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 초기 독일의 공세가 추진력을 잃고 전쟁이 참호전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독일에게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국들로부터 물자 공급을 저지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영국에 대한 공급이 중단되면 영국은 전쟁능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영국은 독일의 전략을 예견하고 먼저 1914년 11월 독일 잠수함이 대서양으로 나오는 길목인 북해를 ‘전쟁 지대(war zone)’로 선포하여 이를 저지하려 한다. 독일은 다음해 2월 영국의 주변 해역을 전쟁 지대로 선포한다. 일반 상선의 전쟁 지대 항해는 가능하지만 이에 관련된 국제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요점은 독일에게는 전쟁 물자를 나르는 중립국 상선도 공격 대상이 되며, 영국으로 오는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선박을 검색하기 위해 잠수함이 해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국제법에 따라 수색을 당하기보다는 덩치가 큰 상선이 잠수함을 들이박아 버리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관련 법규들이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1월 공식 선언된다.) 루시타니아 호는 이 전투의 대표적인 희생자이다. 영국 리버풀과 미국 뉴욕을 항해하는 4만 톤급으로 세계 최대이자 최고 속도를 자랑하며 내부 장식이 화려한 이 초호화 여객선은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앞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사전 경고 없이 공격을 받고 침몰한다. 금년 5월이 침몰 100주년이 되는 셈이다. 독일은 당시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 신문에 이 여객선을 탑승하지 말라는 광고까지 실었다. 루시타니아 호 앞에는 RMS(Royal Mail Ship)가 붙어 있다. 전통적으로 우편물 수송에 정확한 시간을 지키듯 권위 있는 배라는 말이다. 에도 RMS가 붙어 있었다. 동시에 민간 선박이라는 뜻이다. ‘전투함’ 앞에는 영국은 HMS(His/Her Majesty’s Ship), 미국은 USS(United States Ship)를 붙인다. USS Enterprise란 미 전함(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라는 말이다. 그런데 독일은 이 민간 ‘여객선’이 전쟁 물자를 싣고 있어 독일의 행위는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종전 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보다도,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해군은 루시타니아 호의 항해 루트인 영국 주변 해역에서 독일 잠수함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루시타니아 호를 호위하도록 함선을 파견하고 리버풀 항 주변을 순시하기도 했다. 또 독일 잠수함의 잠복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한 다른 루트로 유도하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이란 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승객 1265명과 승무원 694명 등 총 1959명 중 사망자 1198명이 대부분 영국과 캐나다 국적이지만 미국인도 128명 포함되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음모론이 대두한다. 이 논쟁의 중심 인물이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다. 그는 루시타니아 호 침몰 1주일 전에 무역부 장관에게 중립국 선박을 영국 해역으로 끌어들여 미국과 독일 간에 분쟁을 야기토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서신을 보낸다. ‘젊은’ 처칠은 루시타니아호 침몰 직전인 1915년 1~4월에 영국 등 연합군이 무리하게 감행한 흑해 다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상륙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처칠의 서신은 이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 2차 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들은 미국을 독일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승리에 대한 확실한 보장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윌슨이나 루스벨트(FDR) 등 미국 대통령들은 선거에서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탐욕에서 시작된 ‘그들 간의 전쟁’에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해왔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국가이익이란 관점에서 미국의 참전 필요성이 높아지지만 그 명분이 필요해진다. 처칠이 이를 제공해 주려는 것이었다. 루시타니아 호의 격침은 영국이 방관/방조함으로써 미국의 여론이 참전으로 기울게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미국은 1917년 4월 독일에 선전포고하는데, 루시타니아 호 격침이 다른 사건들과 함께 이 결정에 주요한 기여를 한다.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일본의 진주만 공격도 처칠은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모른 척했다는 소위 ‘처칠의 음모’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나는 강의 중 루시타니아 호 사건은 영화 보다 훌륭한 영화 소재가 될 것이라면서 나의 ‘지식재산권’이라 말하곤 했다.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5-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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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카톡으로 용돈 보내고, 자녀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에게 커피 쿠폰을 쏴라!
- 새로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자극을 주는 것과 같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스마트폰으로 통화만 하는 게 아니라 손주에게 카카오톡으로 용돈도 주고 자녀들에게 커피 쿠폰 하나 보내는 센스를 발휘해 보면 어떨까? 글 유장휴 (소통기업 AG브릿지 대표/전략명함 코디네이터) ◇지갑을 대신하는 모바일 지갑 예전에는 물건을 살 때 현금을 사용했는데 요즘은 현금보다 카드를 더 많이 사용한다. 최근에는 이와 더불어 모바일을 통해 결제를 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이 생일에 카카오톡(카톡)으로 생일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확인해보니 친구가 보낸 카톡에 커피 모바일 쿠폰이 있었다. 휴대폰으로 받은 모바일 쿠폰은 카페에 가서 휴대폰 속 쿠폰만 보여주면 돈을 내지 않고 커피를 살 수 있다. 이분은 모바일 쿠폰을 받은 게 처음이기도 하고, 신기해서 사용법이 궁금해졌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자신도 친구에게 모바일 쿠폰을 보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바일 쿠폰은 모바일 지갑과 연결되어 있어 최근에는 카톡을 통해 송금도 하고 커피 쿠폰도 살 수 있다. ◇ 통장 계좌번호를 몰라도 돈을 보낸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모임에 나가서 회비를 내려고 하는데 현금이 없어 옆 사람에게 빌려서 내는 것 말이다. 이렇게 빌린 돈을 돌려주려면 만나서 현금을 주거나 계좌로 이체해 주기도 하는데, 적은 금액이라면 빌려준 사람이 안 받는다며 극구 사양할 때도 있다. 빌려준 사람이 계좌번호도 알려주지 않을 경우 난감해지고 찜찜한 것은 빌린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대방의 계좌번호를 몰라도 보내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최근 은행과 손을 잡고 ‘뱅크월렛카카오’라는 것을 만들었다. 카톡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으면 상대방 계좌번호를 몰라도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 물론 모바일 뱅킹과 달리 소액 거래용이다. ◇카카오톡으로 용돈을 준다 지난 설에 지인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정이 있어 설날 내려오지 못한 손자에게 세뱃돈을 주고 싶은데 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통장번호 물어보는 것도 낯간지럽고, 그때 카톡 송금이 생각났다고 한다. 손자하고는 카톡으로 종종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통장번호를 몰라도 카톡만 있으면 송금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녀에게 사용법을 물어서 결국 카톡으로 세뱃돈 보내기에 성공했단다. 물론 다음에 만나서 주거나 자식을 통해서 줘도 되는데 왠지 설날에 주고 싶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서 보냈는데 반응은 최고였다고. 멀리서 세뱃돈을 받아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카톡으로 보내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냐는 둥, 원래부터 사용했냐는 둥, 손자의 대단하다는 감탄과 질문에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모바일 지갑 ‘뱅크월렛카카오(뱅카)’ 사용하기 모바일 지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카드사나 은행에서 모바일 지갑을 별도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그중 하나인 카카오톡과 은행이 연결된 ‘뱅크월렛카카오’는 모바일 지갑이다. 시중 12개 은행과 연결되어 있어서 은행 계좌를 연결해 돈을 충전해 놓으면 친구나 가족에게 카톡으로도 보내고, 편의점 같은 곳에서 물건도 구매하고 은행 ATM기에서 스마트폰만으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 단, 금융거래라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충전금액도 제한해 놓고, 하루에 보낼 수 있는 최대 금액도 10만원으로 정해 놓았다. 카카오톡 모바일 지갑을 사용하려면 먼저 어플을 설치해야 한다. 어플을 다운받는 Play스토어나, 앱스토어에 접속해서 ‘뱅크월렛카카오’를 검색해서 설치할 수 있다. 설치가 됐다면 돈을 충전해놔야 꺼내 쓸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본인 확인과 은행 연결을 거쳐야 한다. 다음은 자주 이용하는 은행을 선택하고 본인 확인에 필요한 공인인증서, 보안카드번호를 입력하는 단계가 있다. 공인인증서나 보안카드는 처음에 등록할 때만 필요하다. 거래하고 있는 은행을 선택하고 충전에 필요한 비밀번호 설정하면, 뱅크월렛카카오를 사용할 준비가 끝난다. ◇자녀에게 힘내라고 커피 모바일쿠폰 선물 모바일 쿠폰은 저렴한 금액으로 큰마음을 센스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비싼 모바일 쿠폰도 있지만 커피나 도넛 같은 쿠폰은 저렴하다. 친구 생일 때 선물 사기는 부담스럽고 말로 때우기에는 서운할 것 같을 때 저렴한 도넛 모바일 쿠폰을 보내 성의를 표시하는 것은 어떨까. 간혹 아내나 남편에게 뜬금없이 모바일 쿠폰과 힘내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기분 좋은 이벤트가 되기도 할 것이다. 모바일 쿠폰은 다양한 곳에서 살 수 있는데 역시나 결제가 번거롭다.
- 2015-05-1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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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보험금 지급청구권과 상속재산
- 사례1> A씨는 생명보험 계약을 하면서 보험계약자는 A씨, 피보험자는 A씨로 하고 보험금 수익자는 배우자인 B씨로 하였다. 그 뒤 A씨가 사망한 후 배우자 B씨가 보험금을 받았다. 이에 대해 A씨의 채권자들이 보험금은 상속재산이므로 자신들에게 채권을 변제하라고 요구하면 B씨는 거부할 수 있을까 없을까? 생명보험이나 상해보험에 가입하는 경우 보험금의 수익자를 배우자나 자녀들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보험가입자가 사망하면 보험계약에 따라 보험금 지급청구권을 갖게 되는데, 그 보험금 지급청구권이 상속재산에 포함이 되는지 궁금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속재산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따라 상속인들 간의 상속재산 분배의 효과가 다르고 제3자, 특히 피상속인의 채권자에 대한 대항 여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갑’이 자신을 피보험자로 하여 생명보험에 가입하면서 배우자인 ‘을’을 수익자로 지정하였다면 ‘을’은 ‘갑’이 사망하는 경우 보험금 전액을 받은 후 나머지 재산도 법정상속분에 따라 받을 수 있다. 보험금이 상속재산이 아니라 을의 고유한 재산이라면 갑의 채권자는 상속을 이유로 B씨에게 채권 변제를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갑’이 사망해 ‘을’이 보험금을 수령하였는데 ‘갑’에 대하여 채권을 갖고 있는 채권자가 ‘을’에게 상속을 원인으로 보험금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더라도 ‘을’은 고유재산임을 이유로 위 채권자의 청구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위의 사례에서 B는 보험금이 고유재산임을 근거로 A의 채권자들의 채권변제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사례2> A씨가 남편 B씨를 피보험자로 하고, A씨 자신을 보험수익자로 하여 생명보험을 체결하였다. 보험계약자이면서 보험수익자인 A씨와 B씨가 동시에 사망한 경우 보험금 수익자는 누구일까? 우리 상법 제733조 제1항에서는 보험계약자가 보험수익자를 지정 또는 변경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만일 보험계약자가 보험수익자를 지정하지 아니하고 사망하는 경우에는 피보험자를 보험수익자로 하고, 보험수익자를 변경하지 않고 사망한 경우에는 보험수익자의 권리가 확정되는 것이 원칙이다(제2항). 보험수익자가 보험 존속 중 사망한 때에는 보험계약자는 다시 보험수익자를 지정할 수 있으나 지정권을 행사하여 다른 사람을 보험수익자로 지정하지 아니하면 보험수익자의 상속인을 보험수익자로 한다(제3항). 보험계약자가 지정권을 행사하기 전에 보험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피보험자 또는 보험수익자의 상속인을 보험수익자로 한다(제4항). 그런데 보험계약자이자 보험수익자와 피보험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대법원은 상법 제733조 제3항 후단에 준하여 보험수익자의 상속인이 보험수익자가 되고 이는 보험수익자와 피보험자가 동시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에도 같다고 본다. 보험수익자의 상속인이 피보험자 사망이라는 보험사고가 발생한 때에 보험수익자의 지위에서 보험자에 대하여 가지는 보험금 지급청구권은 상속재산이 아니라 상속인의 고유한 재산이라고 본다. 단 대법원은 보험금 지급청구권을 상속재산이 아니라 상속인의 고유한 재산이라고 하면서도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8조 제1항의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인하여 받는 생명보험 또는 손해보험의 보험금으로서 피상속인이 보험계약자인 보험계약에 의하여 받는 것은 상속재산으로 본다’는 규정을 헌법이나 실질적 조세법률주의에 위반된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 2015-05-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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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1] 조부모의 손자녀 사랑, 왜 아들딸보다 손자손녀가 더 사랑스러울까?
- 손자와 손녀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들인가! ‘손자 손’(孫)은 ‘아들 자’(子) + ‘이을 계’(系)를 하고 있다. 손자는 아들의 계대를 이을 사람이란 뜻이니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손주만 보면 웃음꽃이 절로 핀다. 삶의 종반부에서 맞닥뜨리는 조부모 단계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다. 손자녀로 인해 가족 사랑의 기반이 되고 자녀와의 관계도 개선이 된다. 손자녀 사랑이 자녀 사랑보다 더 밀도나 농도가 강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조부모의 역할과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탐색해본다. 자녀가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중년기나 노년기에 조부모가 된다. 조부모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새로운 가족역할로서 황혼의 부부생활에 큰 기쁨으로 느껴진다. 많은 조부모들은 손자녀를 보고 싶어 하고 자주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손자녀와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서구에서도 조부모는 손자녀에게 자비롭고 동정심 많은 천사로 인식될 정도로 조부모와 손자녀 관계는 특별하다. 심지어 자녀들보다 손자녀를 더 사랑하고 더 귀여워하며 더 소중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 생활하느라고 너무 바빠 자녀들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일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여 자녀의 소중함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쁜 삶을 영위하면서 자녀 양육기를 보낸다. 그러나 부부가 조부모가 될 무렵에 이르면 인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므로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이제 더 이상 새롭게 성취할 일도, 더 이상 중요한 일도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쁜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일도 어렵게 될 때, 손자녀들은 조부모들에게 축복인 동시에 유일한 미래로 지각되기 때문에 자녀보다는 손자녀들이 훨씬 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손자녀를 위해 조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부모가 용납하지 않는 손자녀의 행동이나 특성을 수용해 주고 바쁜 부모가 해 줄 수 없는 보살핌을 제공하며 가치와 윤리 및 도덕을 손자녀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부모의 일이나 역할은 조부모의 특성이나 상황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조부모와 손자녀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아무리 손자녀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할지라도 조부모와 손자녀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러한 유형의 조부모들은 원거리형으로 분류되고 생일이나 입학식 혹은 졸업식 같이 특별한 날에만 손자녀를 만난다. 조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형은 손자녀의 친구로서 자주 만나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친구형 조부모이다. 이 유형의 조부모들은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난 것을 가장 행복해하기 때문에 손자녀 양육에 관한 한 무간섭의 원칙을 고수한다. 이와는 달리 취업한 딸이나 며느리를 대신하여 대리부모 역할을 수행하는 소위 몰입형 조부모도 많이 있다. 특히 자녀가 이혼하거나 경제적,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은 어쩔 수 없는 대안이 된다. 조부모들은 손자녀 양육을 통해 삶의 목적감을 회복하고 가정 내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자기가치감과 만족감 혹은 보상감 같은 긍정적 경험도 할 수 있다. 물론 조부모 역할은 배우자가 생존해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더 많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글 장휘숙(章輝淑) 충남대 명예교수 이화여대 대학원 졸.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美 미시간주립대 객원교수, 한국발달심리학회 회장 등 역임
- 2015-05-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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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사진은 뷰 파인더를 통해 나를 보는 작업입니다
- 우리나라와 미국 두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전시를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가며 촬영할 때입니다. 지금은 모든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소위 큰 나라라고 불리는 대국들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휘둘리며 IMF를 선고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신 어깨동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태에선 누가 봐도 두 나라가 어깨동무를 하기에는 서로 무리였습니다. 내 눈엔 덩치가 크고 팔도 긴 미국의 손은 그래도 우리의 어깨에 닿았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팔도 짧은 우리의 손은 미국의 어깨에 닿지 않는 안타까운 뒷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예술을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이 일을 담당하기에 좋은 점이 많은 예술장르라는 접근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대강 훑으며 스케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름 충분히 준비하고 로드맵까지 미리 짜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 얼이 멍멍해집니다. 우선 미국이란 나라의 크기와 다양성 그리고 찾아 다녀야 할 장소와 그 거리를 인식하니, 주눅이 든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과 문화원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고 일터와 집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다시 촬영 현장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진 작업은 현장에서 사진기 뷰 파인더를 통해 나를 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풍광만 렌즈와 눈에 비칠 뿐,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가 들어간 현장이 스스로 감당되지 않을 때, 사진가로 사진기의 셔터를 도통 누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우리나라의 담양 소쇄원을 촬영할 때도 그랬습니다. 소쇄원의 계곡과 광풍각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제월당에 올라섰는데도 소쇄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월당까지 포함해 소쇄원 담장과 소쇄원으로 들어오는 대나무 숲 모두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뒷동산엘 올라갔다 왔는데도 셔터를 누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소쇄원 양재혁 원장이 준비해준 한 보따리의 책을 받아들고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훑어 본 얼마 후, 다시 소쇄원에 내려가 몇 번 소쇄원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경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미국동포들에게 힘을 얻고나서, 북미주에서 가장 높다는 위트니 마운틴(4500m)을 향했습니다. 그 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락에서 시작해 봉우리들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좋은 장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위트니 마운틴의 산세에 한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위풍당당합니다. 시샘이 날 정도로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산의 여기저기를 오르다, 무심코 밟고 가는 발밑 길바닥에 들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보니 그냥 맨땅인 줄 알았던 흙바닥에 많은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몸을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아예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야 눈높이가 겨우 맞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들풀들이 한층 반짝거리는 것은 햇살도 그렇지만 높은 산이 그 뒤에서 그늘 배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산자락의 그늘은 색 온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었습니다. 감동이 커져, 평상심을 찾으려 숨을 크게 쉬며 작은 들풀에 초점을 맞추니, 카메라 뷰 파인더 안에서 웅장한 산자락이 정말 하늘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들풀의 반짝거림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전체 노출을 셔터 스피드를 이용해 한 단계 줄였습니다. 피사계 심도는 뷰 파인더에 보이는 그대로 유지하고 명도와 채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나온 이미지입니다. 위풍당당한 위트니 산도 좋았지만, 작고 이름 모를 들꽃들 또한 연약하고 낮은 것이 갖고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한국을 떠나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며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동포들이 뷰 파인더 안의 들풀과 겹쳐 보인 것입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라는 전시 주제가 생겼습니다. 전체 전시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보낸 편지’로 잡아 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경쟁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서로 다른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사진 작업을 하다 우연처럼 만들어진 생각입니다.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섬세하고 연한 것을 만날 때 더 돋보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비되어 서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바꿀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나름의 가치인 것입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사람들이 나라의 영역이나 민족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그때 그렇게 사진에 담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나라들은 국경을 서로 낮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권을 어렵지 않게 정부로부터 발급 받고 있으며, 외국 방문과 거주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젠 누가 어느 땅에 살든 그곳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우리 부부는 중앙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몽골국제대학교의 예술 감독으로, 나는 사진으로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가는 하나의 길을 교수와 홍보대사로 이곳의 젊은이들과 의논하며 살고 있습니다.
- 2015-05-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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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 명지대 바둑학과는 처음부터 독립된 학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체육학과 내의 바둑지도학 전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립된 학과나 다름없었으며 곧바로 바둑학과로 독립하였다. 이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에 대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바둑계에서도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과연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현 교수는 신입생 선발요강과 학과과정을 정하고 신입생을 뽑아 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교수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을 별 무리 없이 잘 처리해나가 교수라는 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가능한 한 외국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고 이를 위해 외국유학생의 장학금 상한선이 등록금의 70%이던 것을 100%로 상향조정하도록 했다. 2001년에는 과 주도로 명지대학교에서 제1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제2회 대회는 2년 후 해외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둑학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2003년 4월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동년 6월에는 한국바둑학회가 창립되어 필자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마침 그 해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 예카테리나 궁전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으로 제47회 유럽바둑대회가 7월 19일부터 8월 1일까지 그곳에서 열렸다. 한국바둑학회는 제 2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그곳에서 7월 26~27일 양일간 개최하였다. 필자는 한국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집사람과 함께 참가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바둑대회가 진행되던 약 2주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그 근교는 물론 모스크바까지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귀국길에 우리 일행은 바둑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바둑클럽이 있는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그들과 교류전을 가지는 한편 관광도 즐기는 바둑관광여행을 했다. 먼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하이델베르크와 낭만가도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 인터라켄과 융프라우를 관광한 후 다시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의 빈과 잘츠부르크, 체코의 프라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갔다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우리 일행은 이상기온으로 인한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파리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쳐 로렐라이를 구경하고 라인크루즈를 타기도 하며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말단 공무원을 하시면서 노상 일본사람들과 다투시는 바람에 진급을 하지 못하고 만년 주사노릇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바둑에 열심이셨던 이유는 다른 다툼에서는 편파적으로 일본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라도 바둑의 승부에는 깨끗이 승복하기 때문에 바둑으로 일본사람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조남철 국수의 자서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여하튼 할아버지의 기력은 5급(현 아마 초단) 정도로 당시에는 군(郡)에서 1, 2위를 다투는 고수였다고 한다. 바둑을 두실 때에는 할머니께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무리 부르셔도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국을 몇 번씩 다시 덥히다가 하도 화가 나셔서 빗자루로 대야 밑바닥을 두드리며 불이야! 하고 소리치자 바둑판만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시는 바람에 손발을 다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도 바둑이 당시로는 무척 세셔서 3급(현 아마 3단) 정도였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두 점 치수로 종종 바둑을 두시는 바람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과는 상당히 친밀한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필자를 데리고 나가시면서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시는 분은 조남철 국수이지만 장국원이라는 분도 만만치 않다는 것, 세계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시는 분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계신 오청원(우 칭위엔)이라는 분으로 살아 있는 기성으로 존경받고 계시다는 등, 국내외 바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도착한 곳은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시던 명동의 송원기원이었다. 그곳에서 조 국수를 비롯하여 몇몇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 후 바둑을 구경하며 담소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셔서 바둑에 대한 기초를 설명해 주셨다. 마침 당시 학교에서도 공책에 바둑판을 그리고 ○, Ⅹ로 바둑을 두는 것이 유행이어서 이때부터 바둑이 늘기 시작해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7급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한일대학생 바둑대회 대표로 활약했고 최근까지도 각종 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강1급 최훈 군을 비롯하여 과 정원 40명 중 약 10명 가까이가 1, 2급의 강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때쯤은 필자도 약한 1급 정도는 되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서도 4명 정도가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실력도 비슷했다. 이들과 자주 만나 바둑을 둔 덕분에 기력이 점점 더 늘게 되어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은 보통 1급(현 아마 5단)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80년에 열린 제1회 대한토목학회 바둑대회 A조에서 준우승, 그 다음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전국 토목공학과 교수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 2015-05-07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