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로부터 출발했지만 더 창의적이고 복잡하며 섬세한 미감을 자랑하는 예술로 거듭난 실그림. 손인숙(70)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1500여 종류에 달하는 색실을 다루는 실그림의 대가로서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현대예술로 이으며 독자적인 미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예술 선진국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은 그녀의 실그림은 단순히 그림의 틀을 넘어 다양한 전통 장식 등 공예의 세계와 결합했고, 이제는 건축과의 컬래버까지 진행 중이다. 거침없는 예술가적 도전의식으로 한국 예술의 큰 숲을 수놓고 있는 그녀의 뜨거운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전통은 예술이 넘어야 할 무의식적 소재의 바다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숙명은 전통과 창작의 끊임없는 대화와 변형의 연속인 셈이죠.”
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우리 예술의 현재를 말할 때, 전통과 현대의 만남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 바로 전통 자수를 현대예술로 승화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음을 홀린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곳은 다름 아닌 서구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였다.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은 실그림을 감상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전통과 창의성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모습입니다. 너무나 모던하기도 하죠. 이 작품들을 볼 때면 신선한 숲속을 걸어갈 때 받곤 하는 자연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해요.”
또한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 전문박물관인 기메박물관 관장인 소피 마카리우의 찬사도 여기에 더해질 가치가 있겠다.
“한국인의 내밀한 속, 한옥의 안채를 들여다보듯 흥분됩니다. 이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강하면서도 절제된 섬세함이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소피 마카리우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계 저명인사들의 찬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손 작가 작품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표시로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를 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손 작가는 2015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에 정부 후원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문화원 전 다니엘 올리비에 원장, 소피 마카리우 관장은 그녀의 작품이 한국의 전통문화 자수를 예술로 승화한 놀라운 성과라며 적극 나서서 한불 수교 130주년 공식 행사 인증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의 ‘르 몽드’ 지와 ‘르 파리지앵’ 지 문화면에 손 작가의 실그림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되면서 처음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6개월간의 기메박물관 전시로 성공적인 유럽 데뷔를 이뤄냈다. 250여 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는 3개월 만에 8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전시회로 기록되며 대성공리에 끝마쳤다. 이어서 프랑스의 니스동양미술관과 스위스 제네바 바우어재단 극동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손 작가의 작품은 세계 각 분야 문화 예술인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큰 문화예술의 아트코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화가의 붓처럼 색실로 그려지다
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수에서 비롯됐지만 자수라고 하지 않고 ‘실그림’이라고 칭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왜 그렇게 지칭되는지 바로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에 보고 접한 자수와는 다른, 훨씬 고도화된 미술 영역의 세계를 보여주며 손 작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실그림이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틀에 씌운 빈 천에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세계를 충실하게 투영해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재료와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창작 방식이다. 마치 화가가 캠퍼스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바늘이란 붓으로 실을 채색하듯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실그림을 완성한다. 틀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여주며 영혼을 수놓는 것 같다. 화풍으로 보면 동양화와 서양화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다. 이때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은 더 깊고 풍부하게 표현된다. 일반적인 전통 자수는 100여 개 안팎의 색실을 사용하지만 그녀가 쓰는 색실은 1500여 개에 이른다. 그 숫자의 차이만 봐도 그녀가 갖는 자부심의 합당한 근거를 알 수 있다. 그녀의 실그림 작품들이 기존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을 넘어 풍부한 미학을 선보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추상화, 풍경화, 목공예, 보자기, 회화 보자기, 인물화, 불교미술, 풍속화, 산수화, 서예, 한방 문화, 노리개, 복식, 주머니, 열쇠꾸러미, 걸개장식, 우드아트, 물푸레나무 조형물, 장신구, 병풍, 그리고 건축에 이르기까지 22가지 장르를 넘나든다.
세계가 먼저 알아본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들에 쏟아지는 호평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실그림만이 창조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적 디테일에 있다. 자수 작품은 앞면만 아니라 뒷면도 볼 수 있다. 뒷면을 보면 작품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손 작가는 이 부분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작품을 만든다.
그녀 작품의 섬세함은 재료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자수 뒷면에 풀칠하는, 즉 배접 과정에 쓰이는 풀은 전통 방식으로 2년여에 걸쳐 만들어진다. 인물의 머리카락을 표현할 때는 실제 머리카락을 쓰기도 한다. 목재를 쓸 때도 경도를 따져서 10년 이상 말린 통나무를 사용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대하는 그녀의 엄격한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그녀의 실그림이 해외 갤러리에서의 감탄을 유발케 하는 근거들이다.
전통 건축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자수라는 특별한 소재가 만들어내는 독자적 미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의 결에 따른 음영과 입체감까지 고려해 표현한 것이 생생한 공간감을 색다르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만든 작품의 색감과 요철감을 확실하게 감상하려면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실그림과 건축의 결합이라는 도전
실그림으로 표현한 건축물은 그녀로 하여금 실그림과 건축의 융합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무려 20여 년째 제작한 것이란다. 어느 누가 자수와 건축이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옛 선인들의 옷과 귀중품을 보관하던 대형 의걸이를 만들고 있어요. 흑단나무를 주재료로 해 전체를 꽃살문으로 디자인하여, 248개 서까래의 끝 부분에는 연화 문양의 실그림이 들어가게 됩니다. 몸체에는 96개의 문짝에 한국의 문살을 디자인해 단청 이미지의 실그림으로 표현했고 지붕에는 암키와 수키와가 조화를 이루며 네 귀퉁이 상단에는 용마루를 앉혔습니다. 곡선이 내려오는 처마 위에는 잡상을 얹어놓았으며 축 하단에는 운룡을 조각하고 봉황의 길을 만들어 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단 사방에는 건축을 지키는 해태를 조각해 대우주를 지키는 의미를 드러냈죠.”
단순히 자수틀에 수만 놓는 게 아니라 디자인한 큰 그림을 여러 영역의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수월관음도’를 들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투명한 사라를 걸친 관음보살의 고귀한 자태가 어둠속에서 마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현신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신비롭게 묘사돼 있다. 표현기법상의 우수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고려 불화 중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들에 의해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었고 국내에는 몇 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손 작가는 수월관음도를 실그림으로 창작해보고 싶었다.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는 길이 419.5cm, 너비 254.2cm로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수월관음도는 배경 부분과 정병, 선재동자로 이어진 부분에 손상과 훼손이 더러 있어서 손 작가는 화원의 입장이 되어 상상하고 디자인하여 창작하는 게 작업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해석한 수월관음도는 각고의 노력 끝에 길이 5m가 넘는 대작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2편에 계속)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봉덕사종(奉德寺鐘)’보다는 ‘에밀레종’이란 이름이 우리한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범종에 스며 있는 설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우리나라 사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범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업 때면 과목의 본질보다는 국사 시간에나 걸맞은 것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던 국어 선생님 덕분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에밀레종을 타종할 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세계 으뜸이라고 강조하면서 오래전 경주를 방문한 스웨덴 국왕도 “지금껏 들어 본 범종 소리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감탄했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왠지 그때 들은 그 얘기가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주해: 스웨덴 왕세자는 1926년 10월 10일 경주를 방문해 성덕대왕신종의 타종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유학 시절, 독일 언론에 구스타브(Gustav VI Adolf, 1882~1973) 스웨덴 국왕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독일을 방문한 스웨덴 국왕에 대해 크게 보도하면서 독일 언론은 국왕이 고고학(考古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유럽 고대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 찍은 그의 모습을 함께 실었다. 그때 필자는 유럽에서는 고고학이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성장한 특별한 학문적 배경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 국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극찬한 분인가?’
물론 국왕이 고고학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음색(音色)이나 음향(音響)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에서 경주를 방문한 국왕이 감탄한 것은 손님으로서 인사치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귀국 후, 필자는 경주국립박물관 야외에 따로 설치한 종각에 걸려 있는 범종을 보는 순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찬찬히 범종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왜 스웨덴 국왕은…….’ 범종은 일반 사찰에 있는 범종과 달리 지면(地面)에 가깝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범종 바로 밑바닥이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그걸 보면서, 타종을 하면 종신 내부에서 발생한 음파(音波)가 회오리를 치면서 밖으로 나오고, 그렇게 나온 음파가 옴폭 파인 바닥에서 다시 반향(反響)을 일으켜 특별한 음률(音律)로 이어질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우리나라의 종두(鐘頭) 부위가 중국이나 일본 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육중한 종신을 천장에 매달기 위해서는 용(龍)을 장식한 고리(걸개)가 필요한데, 국내 범종에는 거의 예외 없이 걸개 바로 옆에 음통(音筒)이 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운 음파의 비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중국과 일본의 종두에는 한결같이 음통이 없기 때문이다. 범종이 내는 음질을 위해 오래전인 7~8세기 통일신라 때 음통을 창안한 우리 선조들의 각별한 창의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신 중간 부위의 직경보다 아랫부분의 하구(下口)가 좁은 것은 몸통 안에서 일어난 음파를 오래 간직하기 위한 구조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우리 범종의 이런 특색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의 차이를 놓치지 않았던 스웨덴 국왕의 뛰어난 감음력(感音力)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