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등 교통약자 보행 안전을 위해 횡단보도 경계석 턱낮춤 상한폭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는 ‘인천광역시 보행환경 지침’(이하 인천 보행 지침)상 경계석 턱낮춤 폭 설치기준(1~1.5m)를 개선하도록 인천광역시에 의견표명을 제출했다.
인천광역시·인천도시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는 인천 검단신도시 택지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2013년 3월 제정된 ‘인천 보행 지침’에 따라 횡단보도 경계석을 ‘부분 턱낮춤’ 으로 설치하고 있다.
앞서 입주 예정자들은 교통약자의 보행안전을 위해 동탄 등 다른 신도시처럼 ‘전체 턱낮춤’으로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인천도시공사는 ‘인천 보행 지침’에 따라 적법하게 설치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입주예정자들은 지침상 횡단보도 경계석 ‘부분 턱낮춤’ 설치기준을 개선해달라고 권익위에 고충민원을 제기했다. 권익위는 법령 검토와 관계기관 현장회의, 사실관계 및 유사사례 조사 등 다각도로 검토했다.
조사 결과,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법 편의증진 시행규칙’은 경계석 턱낮춤 폭 상한 제한 규정이 없는 반면 ‘인천 보행 지침’은 턱낮춤 폭 상한(1.5m)을 제한하고 있었다.
해당 지침은 2013년에 제정됐는데, 전동휠체어·노인전동차 등 다변화된 보행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지난해 서울특별시 교통약자 편의시설 실태조사에 따르면, 턱낮춤·점자블록 등 횡단보도 관련 불편이 40.5%로 턱낮춤 관련 사항이 교통약자 보행환경의 주된 장애요인으로 드러났다.
권익위는 사업시행자가 현장 여건에 맞는 적합한 경계석 턱낮춤 방식을 택하도록 ‘인천 보행 지침’상 횡단보도 경계석 턱낮춤 설치기준을 개선하도록 했다.
권익위 임규홍 고충민원심의관은 “국민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법령·제도 등을 과감히 개선하여 범정부 규제혁신 기조를 충실히 뒷받침하고, 적극행정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순천 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바다가 변해 공단이 됐으니, 상전이 바다가 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420년 세월의 두께가 이렇게 두터울 줄 몰랐다.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해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터 앞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거대한 제철소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격전지에 웬 공장인가 싶었지만 그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너무 놀라웠다.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무수한 공장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저 넓은 공단이 얼마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여수반도 동안을 메우다시피 한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격전지 노루섬[獐島]도 뭍으로 변했다. 더 멀리 광양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고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오렌지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소 공장 건물군,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 대교 트러스가 희미했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마른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았다. 그것도 허물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어두운 돌은 옛것이고, 밝은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엇박자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 구역이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 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구비 더 오르니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이 펼쳐졌다. 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 저편 끝에 천수대(天守臺) 자리가 우뚝했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안내판에는 ‘천수대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명나라 종군 화수(畵手)가 그렸다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에 나오는 조감도가 복사돼 있었는데, 그림 속 건물은 교회 첨탑을 닮은 목조 오층 누각이다.
천수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어 망해루라 한 것이리라. 바다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 올렸으니, 실은 적정을 살피는 장대 역할을 한 건물이었다. 그 밑은 바로 바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 시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망해루 건물은 지금 없고 기단만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11월 하순에 소실됐을 것이다. 천수대 기단의 크기가 옛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크지는 않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라고 하지만, 모서리는 바윗돌을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을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쌓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고역이 다 인근에서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백성들 피해가 어찌 그 노역뿐이었으랴!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과 목재로 이루어졌으니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이 출토된다고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민가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다. 여러 지붕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다.
엄청난 성의 규모
축성에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해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축성은 1597년 9월에 시작됐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 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돼 있다.
정왜기공도는 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의 육상공격전 상황으로 보인다. 왜성 북쪽 검단산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이 기병을 앞세우고 외성을 향해 들이닥치자 왜병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성 아래 당도한 보병들이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성루 안쪽에 점점이 뚫린 총안에 총신을 걸고 길게 늘어선 소총수들이 결사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묘사됐고, 그 아래서는 판벽에 몸을 숨긴 왜병들이 반격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만4000명의 병력을 너끈히 품었음직하다. 높이 40m쯤 돼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세 겹으로 배치됐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내성과 외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텄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 공격을 막는 해자 역할을 했다. 다리를 끌어들이면 내성 지역은 섬이 됐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 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유키나가가 구사일생으로 순천 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철병이 얼마나 다급하고 치욕스런 것이었는지를 증언한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까지 뇌물공세를 취한 사실이 얼마나 화급했던 지를 말해준다. 화가 난 이순신은 “우리의 보화는 너희 대장 머리뿐”이라고 말하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
유키나가는 사천시 선진리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쓴 뇌물 덕에 명군이 철수하고, 지원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
1598년 8월 18일, 침략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 전 진영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곱게 돌아가도록 놓아둘 조선이 아니었다. 성안에 갇혀 농성 중인 왜병들을 수륙 협공으로 섬멸하자는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육지에서는 조선군까지 거느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명 수로군 대장 진린(陳璘)이 동시에 협공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내 전투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정은 처음에는 기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군을 포함해 2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량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공격하자고 하면 성만 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를 근거로 한 기사에는 그 위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유정은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늘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려 왔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울산 왜성을 포위했던 마귀(麻貴)가 그랬듯이, 그는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세월만 보냈다. 아직 병기가 오지 않았다, 공격의 적기가 아니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군량만 축내다가 유키나가의 강화 제안과 뇌물에 눈이 멀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는 “성을 비워줄 때 군량과 약탈 재물을 그대로 넘겨주고 1000수급(首級)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유정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던 떡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에게 그 정도 조건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겠는가. 뒷날을 기하겠다면서 유정이 순천으로 회군한 길가에 군량 쌀이 허옇게 흘려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성 주둔 중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수륙 협공 계획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의 함대와 함께 강진 고금도 기지를 떠난 것은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조명수군연합 함대가 왜교성 공격을 시작한 것은 9월 20일. 광양만은 바다가 얕아 썰물 때는 배가 다니기 불편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치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전법으로 10여 일을 보내는 사이 육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은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10월 6일 철군하고 없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큰 전과를 올렸다. 왜선 격침 30척, 나포 11척이었다. 노루섬 왜군 군량 창고를 털고 불태우는가 하면, 얕은 수로에 좌초된 진린 함대를 지원해 진 제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진린은 유정의 행로를 답습했다. 퇴로를 얻기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에 따르면, 11월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나와 배를 맞았다. 왜군은 돼지 두 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1월 14일 밤 왜 소장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진린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 사자가 또 도독부로 갔고, 16일에는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陳文同)을 적 진영으로 보냈다.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을 싣고 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에도 기록돼 있다. 14일자 일기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해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진문동을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16일 밤 왜교성에서 나온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했다. 그 배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주둔한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진린은 왜교성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남해에서 농성 중인 왜군을 먼저 토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니 급할 것 없다”는 이순신의 만류에도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라면서 함대를 인솔해 떠나갔다.
같은 날 저녁, 왜교성에서 한 줄기 봉화가 올랐다. 사천, 곤양, 남해 등에 주둔한 왜군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지 않으면 다 놓치겠다는 판단으로 왜교성 앞바다를 떠났다.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남해에 있던 진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군 왜선 500척과, 조명 연합수군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포성과 불길과 피로 물든 틈을 타 왜교성을 탈출한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쥐새끼처럼 도망쳐갔다.
귀로에 ‘소서행장 전승비’를 찾아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을 때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했다.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 주민들 손에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에는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돼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小西行長之城’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 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이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쓰고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 , , , 등.
올 여름 초복인 오늘은 종일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네요. 한해의 중간에 있는 7월 중순이다 보니 무덥기도 하고 비가 자주 오는가 봅니다. 아부지 계신 곳 날씨는 어떠신지요? 많이 덥지는 않으신지요?
지난주에는 시골집 엄니께 들려서 주변 정리도 해 드리고 텃밭 마늘도 캐서 묶어 매달아 두었지요. 햇 옥수수도 첫 수확으로 따서 쪄 먹기도 했답니다. 엄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부지! 2주전엔 아부지 손자 ‘우태’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로 이사 오려고 매매계약을 했어요. 돌아오는 10월 초엔 아부지 증손자가 태어날 건데 며늘아가가 맞벌이로 직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저희한테 아기를 맡기기로 하고 이리로 이사 오려 한거예요. 아부지는 알고 계셨는가 봐요? 그날 밤 제 꿈에 오셨었잖아요. 옆 동네 새로 짓고 있는 전원주택 옆을 지나가며 여러 가지 일러주시던 꿈속 기억이 생생하기만 한데 벌써 멀리 가 계시는군요.
아부지가 26살 되던 해, 제가 4살 때 큰집에서 분가하시며 지으셨던 고향의 옛집! 아부지는 그곳에서 23년을 사시다가 엄니와 우리 5남매 남겨두고 그 곳 멀리로 가셨던 거잖아요. 그 후로도 19년은 더 살다보니 엄니는 점점 늙어 가시는데 여러모로 불편해서, 텃밭을 정비해서 터를 다듬고 지금의 새집을 짓고 이사했던거지요. 그 후로 13년 동안 비워놓다 보니 많이 망가지고 보기도 흉해서 헐어 버리고, 메꾸어 밭으로 만들려고 흙을 받아 쌓아 놓은걸 보니 아부지께서 서운하셨던지 2주전 제 꿈속에 다니러 오신 거 같아요.
아부지 손길과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성리 136-2번지 옛 집터 이지요. 기역자로 지어진 초가집에 안방, 윗방, 건넌방에 부엌과 외양간, 뒷간.
처음엔 마루도 없이 문 앞 댓돌에 두툼한 발판을 놓고 드나들었던 기억이 제겐 아직 생생하거든요. 차차 바깥 행랑채를 들이시고 사랑방과 헛간도, 곡간도 늘리고 초가도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바꾸시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단단히 길들이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다듬으셨었죠.
뒤꼍에 펌프 물을 팠다가 가물면 물이 짧아, 다시 안마당에 깊숙이 파고 파이프를 박아 동네에서 제일 달고 시원한 맛있는 샘물 올리는 펌프를 장만 하셨었지요. 한여름 무더위에 논밭에서 땀에 젖어 돌아오시면 치컥치컥 펌프물 퍼올려 흙먼지도 털어내고 등목도 해드리고, 마루 위에서 함께 했던 보잘 것 없지만 푸짐했던 밥상이 목이 메이게 그립습니다.
강 건너 골짜기에 다락 논을 장만 하시고는 배타고 건너다니시며 논농사를 지으셨죠. 이른 봄 뒷간의 재거름을 배에 싣고 건거가 못자리를 만들고, 연장 질 할 큰 소들은 나룻배에 태우고 건너가 갈고 써래질 하여 모내기를 한 후로는, 이틀이 멀다 않고 돌아보며 어린자식들 이밥을 먹이려 애쓰셨던 거지요.
윗마을 너 댓 배미 논도 그 아래 경사진 돌밭도 보리밭으로 콩밭으로 바꾸어 가며 곡간의 항아리를 채우고, 검단 논과 밤나무골 다락 논은 우리 식구 귀중한 식량의 터전 이였지요. 그런 농토를 한 필지, 한 마지기 손수 늘려 가시며 그렇게 좋아하시고 뿌듯해 하셨다는 걸 나중에 엄니로부터 말씀 들어 알게 되었었구요.
아부지! 제가 중학교 시험을 쳐야 할 때나 고등학교 진학하고파 할 때엔 주렁주렁 5남매 자식들 걱정에 덥석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지 못하셨던 거 전 기억하고 있어요. 힘들게 어렵사리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 혼자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에 올라가 애쓰다가, 예비고사에 떨어지고 난 한겨울에, 성남시 어느 버스종점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가, 툭툭 털고 군대에 간 후로는 휴가, 외출, 외박, 면회도 없는 힘든 부대에 가서 33개월 넘게 아부지 엄니 속 애타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1979년 1월 군대 제대 하던 해 운 좋게 한국전력에 입사하였고, 입사한 후 아부지 친구 분들이나 이웃 분들의 소개를 받아 장가도 들이고 며느리도 보고 싶어 하셨는데, 그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제 생각대로 살다보니 입사 후 3년 만에 아부지는 제가 뵈러 갈 수 없는 먼 나라로 가신 거예요.
아부지! 49년 젊은 세월 접고 멀리 그 곳으로 가신지가 올해로 33년째 입니다. 이젠 거기서도 터 잡고 재밌게 사시나요? 가끔은 이 곳 생각도 하시는지요? 아부지가 갑작스레 허망하게 떠나가신 후 저는 엄니와 우리 5남매 열심히, 남들 손까락질 안 받고 살아보려고 애썼지요. 아부지가 뿌려 놓으신 삶의 터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살려고 했던 거예요.
그 후로 우리 5남매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낳아 키워가며 가끔씩 만나 옛 얘기도 해가며 ‘배나들이’ 혈육의 정 이어가고 있답니다. 재작년 12월엔 제 딸, 아부지 손녀딸을 시집 보냈구요, 지난해 봄 4월엔 제 아들, 아부지 손자 장가를 보내어 춘천 가까운 곳에 둥지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저희 끼리 잘 살아 갈 거예요. 두 녀석 다 직장에 다니며 나름 생활을 개척해 가고 있거든요
아부지! 이렇게 식구들의 모습이 변해 갈 때마다, 얼마나 아부지가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이정도 살아온 것도 다 아부지 덕분이고 가르치심 이었지만, 실은 저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맘 편히 의논드리고 도움 받아야할 아부지가 멀리 만날 수 없는 곳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속상하고 야속 하던지요.
아부지의 땀 냄새가 그립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용마루로 타고 오르던 아부지의 담배연기가 보고 싶습니다. 데이터 무제한으로 영상통화도 하고 싶습니다. 패밀리레스토랑에 모시고 가서 한 번도 맛보신적 없는 스테이크도 잡숫기 좋게 잘라 드리고, 보랏빛 와인도 조심스레 따라 드려 보고도 싶습니다.
지난 1월에는 엄니 팔순 생신이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부지는 팔십 둘 되시네요. 우리 자식들하고 혈육 가까운 친척들 모여서 엄니 팔순생신 차려 드렸어요.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농사일에 진땀 흘리시던 아부지가 더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자주감자 깎아 썰어 넣은 수제비국으로 허기진 배 채우고 바깥마당에 멍석 펴고 누워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자주 편지 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초복 날 늦은 밤. 큰 아들 올림
# 경기도 화성시 동탄1신도시에 거주하는 박경한(50)씨는 동탄 2지구가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수용되면서 토지보상금 50억원을 받았다. 10년 넘게 음식점을 하며 큰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를 키우던 박 사장은 요즘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보상금으로 땅을 사자니 이미 주변에 땅값은 토지보상금 수령 시 가격보다 배로 올랐고, 그냥 정기예금에 넣어 놓기에는 4%가 되지 않는 저금리에 금융소득종합과세도 부담된다. 결국 토지보상금으로 인근 상가에 투자할 계획이다. 박 사장이 투자하려는 상가는 은행으로 선임대가 확정되어 있고, 준공이 11월이라 투자회수도 빠른 편이다.
11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올해만 인천 검단신도시 3조, 운정3지구 2조2410억원, 부산 에코델타시티 9000억원 대구수성의료지구 4000억원 등 전국적으로 25여개의 사업지구를 추산한 결과 16조원 이상 규모의 토지 보상금이 풀릴 것으로 조사됐다. 이 외에도 보상을 준비중인 곳이 많이 있어 뭉칫돈이 어디로 유입될지에 대한 부동산 업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대시장인 수도권에서는 경기 하남감일지구 1조 3786억원, 구리월드디자인시티 1조원, 경기구리~포천고속도로 방향 9711억원 가량의 보상금이 대거 풀릴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의 선례를 보더라도 토지보상금의 50% 정도가 부동산 시장에 투입되는데 이 중 인근 대토를 위해 10%정도가 투입되고 40%가량이 상가, 오피스텔 등의 수익형부동산 시장으로 투자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토지보상금으로 강남권 아파트에 투자하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익형부동산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크게 늘었다. 따라서 수익형부동산 업계는 풍선효과가 발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속적인 아파트값 하락으로 대형아파트에 대한 투자수요가 사라지고 주거용 오피스텔과 도시형 생활주택 등은 임대소득 강화로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업계에서는 이번 토지보상금도 상가나 건물, 지식산업센터 등으로 투자 수요가 옮겨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토지보상금을 받은 후 1년 내에 부동산을 매입해야 취득세 감면 혜택을 받는 점은 유의해야 하고, 상가나 건물은 철저하게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 투자해 한다.
또한 상가나 건물에 투자시 5억~50억원대 투자금액이 적합하며, 연 수익률 6%내외로 장기 안목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르면 상반기에 임대제한 규제 폐지가 예상되는 지식산업센터도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 및 수도권 대도시 도심내 임차수요 증가하고 있고, 통상 660㎡규모라면 분양가 10억선으로 보면 된다. 올해 분양을 받을 경우 취득세는 50%, 재산세는 37.5% 감면된다.
소형 오피스도 주목을 받고 있다. 경기침체 여파 인해 소규모 창업자 늘면서 소형 오피스 임차수요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동·회현동·충무로 등 서울 강북권 도심이 유망하며 최소면적 33㎡ 3.3㎡당 900만원대, 분양가 3억2,000만원선이다.
장경철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시중의 700조원에 해당하는 부동자금 규모를 고려해볼 때, 올해 수도권에 지급될 토지보상금의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라며 “다만 장기적으로는 토지보상금을 비롯한 시중의 부동자금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수익형 부동산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장 이사는 “특히 송파 위례신도시, 문정지구, 마곡지구, 동탄2신도시 등의 신규 상권의 형성이 예상되는 지역은 중장기적으로 자금 흐름이 원활해지면 가치 상승의 여력이 크다”고 전망했다.
부동산 정보회사인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에 따르면 토지보상금 대체 투자처 유망 수익형 부동산으로 경기 하남 풍산동 하남 수산물복합단지, 서울 서초보금자리지구 서초타워, 경기 광명 소하동 광명 행운드림프라자, 서울 강남 역삼동 강남역 센트럴애비뉴, 서울 강남 역삼동 신논현 마에스트로, 서울 왕십리뉴타운2구역 텐즈힐몰’서울 금천 독산동 독산동 현대지식산업센터, 서울 중구 충무로 엘크루 메트로시티 등이 있다고 밝혔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3월은 도보 여행을 떠나기에도 좋은 때다.
3일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 여행 길'(koreatrails.or.kr) 사이트에서는 이달 가볼 만한 도보 여행 코스 7가지를 추천했다.
전남 강진군에 가면 다산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이중 달마지 마을, 무위사, 강진다원 녹차밭, 월남사지 등을 잇는 4코스를 오르락 내리락 걷다보면 월출산 자락에서 녹차밭이 펼쳐지며 장관을 이룬다. 16.6㎞로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강원 춘천 '봄내길'에는 소설가 김유정이 고향을 배경으로 써낸 소설 속 봄의 정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중 1코스인 '실레 이야기길'은 김유정문학촌과 실레 마을을 돌아보는 2시간 가량의 짧은 길로 가족의 주말 나들이 코스로 좋다. 거리는 5.2㎞.
울산 '태화강 100리길' 1구간은 태화강의 푸른 물결을 따라 억새밭, 십리대밭, 삼호대숲, 태화강대공원을 보며 걷는 코스다. 15㎞ 거리로 5시간 가량 소요된다.
충남 홍성군에는 역사의 숨결이 담긴 '홍주성 천년 여행길'이 있다. 대교리 미륵불, 홍주의사총, 홍주향교, 홍주성, 적산가옥 골목길, 명동상점거리, 당간지주, 홍성천 벽화 등을 잇는다. 8㎞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수도권에서도 봄의 향기가 성큼 다가왔다.
서울 '안산 자락길'은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연희숲속쉼터, 봉원사 등으로 연결된 숲길이다. 특히 휠체어 등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무장애 숲길'도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에도 좋다. 9㎞ 거리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경기 파주 '살래길'은 통일동산 중앙공원, 고려역사박물관, 검단사 등으로 이어진 산책길이다. 4.2㎞ 구간을 1시간 30분 동안 둘러볼 수 있다.
부천 '둘레길' 1코스인 향토유적숲길은 고강선사유적지, 경숙옹주묘, 부천무릉도원수목원, 진달래 동산 등을 잇는다. 꽃피는 계절이 되면 철쭉과 진달래가 장관을 이룬다. 9㎞ 구간으로 2시간 30분 가량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