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지도 않다. 알고 보면 생각난 김에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DMZ가 인접해 있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폭포가 지금도 쏟아져 내린다. 아득한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 이야기와 임꺽정의 무대였던 지역임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먼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다가갈수록 북녘을 눈앞에 둔 철원평야는 황금 들녘이다. 절벽에 매달린 한탄강 협곡의 주상절리길은 스릴 넘치게 아찔하다. 전쟁을 대비하고 군부대 포사격 훈련장이었던 땅엔 백만 송이가 넘는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이 땅의 최북단 철원의 풍성한 가을이 마냥 아름답다.
마음을 두드리는 평원의 가을
가을을 마음에 담기에 이 땅의 드넓은 평야만 한 곳이 있을까. 누렇게 물든 대자연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철원 소이산은 다른 지역보다 가을이 먼저 시작된다. 새벽부터 분주히 달려서 도착한 소이산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소이산은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 높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20여 분 숨차게 오른 소이산 전망대는 본래 군부대 주둔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오르막 길목의 평화마루공원에서 공원과 지질 명소를 안내한다. 오래전의 미군 막사와 초소는 녹슨 채 허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의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인 봉수대오름길로 이어지는 코스도 보인다.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비로소 가을을 흠뻑 맞는다. 황금빛 너른 들녘의 놀라운 풍광이 전망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는 거대하다. 무한한 대지와 하늘, 철원 북쪽의 평강고원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도록 막힘없이 탁 트였다.
철원평야에 오름처럼 우뚝 솟은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는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다. 철원의 역사와 함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 너머엔 비무장지대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도 보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DMZ 건너편 철의 삼각지대를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최북단 철원은 가을이 일찍 찾아와 추수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9월 초부터 시작해 10월이 되면 조생종 벼들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낸다. 이미 추수를 한 논과 벼가 익은 상태에 따라 논마다 채도 대비가 다양하다. 끝없이 넓은 패턴의 선과 면의 들판은 한 편의 작품 같다.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오대쌀은 우리에게 유명하다. 무엇보다 용암 대지와 현무암의 풍화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과 밥맛을 결정하는 천혜의 기후 조건 또한 으뜸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패하고 철원평야를 빼앗겨 김일성이 슬퍼했다는 게 괜한 얘기가 아닌 듯하다. 철원오대쌀은 지역 특산물로 국내 최초로 브랜드화한 이름이다.
소이산을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아침 이슬을 매달고 있는 가을 들꽃들이 예쁘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나 유난히 색감이 선명하고 맑다. 쾌청한 숲길에서 절로 힐링된다. 소이산을 내려오니 막 운행이 시작된 모노레일이 지나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편치 않은 교통 약자라면 소이산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탑승하면 왕복 1.8km 거리다.
주변에 노동당사가 있어 가볼 만하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였으나 이후 전쟁의 크나큰 상흔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평화의 꽃을 피워 올리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이 이슬뿐일까. 소이산 전망대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철원 고석정 꽃밭에선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강원도 북단에 이토록 넓은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니, 꽃 따라 봄가을로 여행 올 만하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빨강과 다홍, 노랑으로 화려한 융단처럼 펼쳐진다. 꽃 이름이 촛불맨드라미다. 바로 옆으로 고향 마을에서 본 듯한 백일홍이 제각각의 색깔로 꽃밭 가득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마음껏 즐기는 꽃마당이다.
꽃밭 넓이가 자그마치 23만 1000㎡라고 한다. 축구장 서른 개가 넘는 규모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한참 걸린다.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백일홍, 천일홍, 메밀꽃, 해바라기, 장미, 코스모스, 가우라, 버베나, 핑크뮬리, 댑싸리, 억새 등 종류별로 가을꽃이 활짝 피어 눈부시다. 봄 시즌에는 노란 유채꽃이나 수레국화, 안개초 등이 피어난다. 꽃길을 걷다 보면 때론 연못이 나타나고 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어린 왕자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와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는데, 일몰 풍경과 꽃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편안하게 꽃구경을 하고 싶다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깡통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고석정 꽃밭은 애초에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었다. 과거 Y진지라 불리던 곳이 철원 지역의 새로운 관광 트렌드로 변신했다. 포성이 울리던 허허벌판에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철원이 안보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무한히 넓은 꽃밭에서 계절별로 꽃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수직 벼랑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주상절리
철원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한 마그마가 서서히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었고, 강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바위들이 수직의 벼랑을 이룬 비경을 그동안은 배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찔한 절벽에 선반처럼 매단 3.6km의 잔도(棧道)가 마련되었다. 일명 한탄강 하늘길로 불리는 잔도 덕분에 빼어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까이에서 생생히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두 군데다. 순담 게이트와 드르니마을 게이트가 있는데 대부분 순담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드르니는 애초에 양지바른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궁예가 고려 왕건으로부터 피신할 때 ‘들른’ 마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철원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예와 연관된 명칭을 자주 본다. ‘말등소’라는 소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빠졌던 소(沼)로, 말이 너무 힘들어 똥을 쌌다 하여 말똥소라고도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작점으로 다시 갈 경우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현재는 주말에만 운행한다.
잔도는 걷기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에 잔도가 몇 군데 있지만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는 그 절정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 20~30m 높이 벼랑길에 매달린 잔도를 걸으면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에 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반원형 전망대는 아찔함의 최고점이다.
틈틈이 쉼터가 나타나니 잠깐씩 쉬면서 절경에 잠겨봐도 좋다. 쪽빛소쉼터, 맷돌랑쉼터, 돌단풍쉼터, 드르니쉼터 등 이름도 예쁘다. 자주 나타나는 13개의 출렁다리마다 지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생김새와 위치 등에 따라 돌개구멍교, 한여울교, 선돌교, 수평절리교, 단층교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잔도 위를 걷다 보면 신나고 짜릿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허공을 걷듯 공포감이 드는 구간도 지나야 하고, 가파른 계단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체력 조절이 필요하다. 감동과 스릴, 억겁이 빚어낸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철원 주상절리길이다.
엄마로서 때로는 아내, 며느리, 딸, 강사 등 상황에 따라 한바탕 역할극을 해내야 하는 필자에게 가면(페르소나, Persona)은 어쩌면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은 가정, 학교, 직장 등 크고 작은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고 나쁜 점을 감추려는 지극히 당연하고 본능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희비쌍곡선 롤러코스터 인생
글쓰기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은 강의입니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글쓰기입니다. 강의는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무슨 장난이며 조화란 말입니까. 저만 이러는 걸까요? 똑같은 일이 어떨 땐 정말 행복하고, 어떨 땐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고 당장 그만두고 싶으니 말입니다. 어느 힙합 뮤지션은 ‘음악은 행복이자 깊은 고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행복과 고통은 둘이 아닌 하나라 앞뒤로 딱 붙어 있나 봅니다.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여러분도 하루하루 지내시나요?
칼춤 추는 여자
필자는 막대기처럼 뻣뻣한 몸이라 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자칭 춤꾼입니다. 30년이 넘도록 주부로서 싱크대를 점령하고 있는 망나니이기 때문입니다. 망나니가 술 뿜어내고 칼춤 추듯 저도 도마 위에서 바다며 뭍에서 포획한 먹잇감 대가리 치고 몸통 자르며 식구들 위해 칼춤 추니까요. 살리기 위해 죽이는 역설, 이게 어쩌면 삶의 양면성 아닐까요. 먹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거잖아요. 죽여서 먹이기도 하고요. 쓱싹쓱싹! 탕탕탕탕! 칼자루 쥐고 김치 썰고, 양파 다지고, 오징어 저미다가 혹 원망 한 줄기 툭 터져 나오면 칼끝에 살기 실려 손톱이 썰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칼춤 추다 나쁜 생각 못 하도록 마음 단속해주는 하늘의 보살핌 아닌가 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자기 내면에 억눌렀던 추악함과 잔인함을 가감 없이 표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886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발표한 단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아 존경받던 지킬 박사는 쾌락을 탐하는 욕망을 억누르며 두 개의 본성 사이에서 고민하다 선과 악을 분리해내는 약물을 만듭니다. 지킬 박사로서 품위에 흠집을 내지 않고도 하이드로 변신해 깊숙이 눌러놨던 쾌락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약을 마시지 않아도 지킬 박사가 계속 하이드로 변신하면서 본성의 균형이 깨지고 내면이 악으로 차올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하고 맙니다.
앞뒤가 똑같은 동전
500원짜리 동전을 볼까요? 어느 쪽이 앞면인가요? 필자도 갑자기 헷갈리네요. 하여튼 한쪽에 학이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 숫자 500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하나 볼까요. 1000원짜리 지폐 앞면엔 퇴계 이황 초상이 있고, 뒷면을 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있습니다. 막연히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완락재라는 작은 정자에 앉아서 조용히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집필하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돼지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 은행에 입금하려는데 동전 하나가 앞면도 학이고 뒷면도 학이지 뭡니까. 또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앞면도 퇴계 이황 얼굴이고 뒷면도 똑같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동전과 지폐는 돈 구실을 할까요? 500원과 1000원이라는 돈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물건을 살 수 있는 교환이라는 값어치를 전혀 할 수 없게 됩니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하나이면서 둘인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면을 합쳐 ‘손’이라고 부릅니다. 양면이 손바닥만 있거나 손등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인데 경우에 따라 둘로 구분해 부를 뿐입니다. 우리 삶, 사건, 사람도 흡사합니다. 양면이 있어야 제값, 제 역할을 합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습니다. 건전지 한 몸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두 극성이 같이 있어야 전기 에너지가 생깁니다. 감정에도 애증(愛憎)이 함께합니다. 마치 동전 양면처럼 하나로 맞붙어 있습니다. 햇빛은 좋기만 하고, 어둠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양(陽)은 선(善)이고, 음(陰)은 악(惡)일까요.
겉과 속이 다른 게 나쁠까요?
어떤 사람을 평가하면서 “그 사람은 참 표리부동(表裏不同)해.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아주 형편없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속마음을 겉으로 곧장 드러내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고 올바른 것일까요?
평소에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앞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의 이러저러한 면이 정말 밥맛없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어요. 어쩌면 그렇게 재수가 없는지, 당신이 잘 안 됐으면 정말 쌤통이겠네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봅시다. 싫어하는 내색은 감춘 채 “저번에 만든 그 상품은 정말 근사하던데요. 아이디어가 탁월하십니다. 저는 그쪽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하하하!” 이런다고 나쁜 사람일까요?
오히려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고 무례한 것은 아닐까요? 겉과 속이 하나라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수라 백작 같은 당신 그리고 나
우유부단(優柔不斷)과 심사숙고(深思熟考)는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놓고도 누구는 “참 깊이 있고 침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만 다른 누구는 “어째 사람이 결정장애야, 뭐야. 판단을 못 해”라고 하니까요. 한 사람, 한 사건을 놓고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반된 입장에 놓입니다.
말수가 적고 신중을 기하는 면이 좋아서, 또 남들 앞에서 나대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좋아서 그 남자랑 결혼했다는 301호 김 여사. 결혼 30년 차가 되도록 살다 보니 심사숙고하는 모습이 징글징글 싫어졌다고 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임기응변도 제대로 못 하는,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꽉 막힌 남자라는 겁니다. 처세도 젬병인 데다 상황 판단하는 능력도 느려터진 한참 못난 남자로 보인다나요. 선택이나 결단을 미루는 것도 그렇고요. 내가 좋아서 선택했던 성격이나 특징, 외양이 싫어지곤 합니다.
인공지능(AI)의 양면성
도대체 양면성이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를 풀자면, ‘한 가지 사물에 속해 있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 성질’을 양면성이라고 합니다. 풀이는 간단해 보이는데 언뜻 와 닿지 않습니다. 최근 화제만발인 ‘챗GPT’라는 인공지능 오픈AI 시스템에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AI 가라사대
“인간의 양면성은 사람 안에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이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개인은 선과 악, 빛과 어둠, 그리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모두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경향도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측면이며 관계, 감정, 의사결정 등 삶의 많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일반 사전이나 학문적 정의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 같아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 철학, 종교에서 공통 주제이며,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탐구되어왔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성과 그들이 일차원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의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이 더 자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개발하고, 더 균형 있고 조화로운 삶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작가나 학자나 기자 같은 글 쓰고 분석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는 것 아닌가 싶어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덜 미워하며 살아가려면
필자가 강의 말미 칠판에 분필로 이런 글을 또박또박 적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기 존경스럽고, 각기 추악하다.”
이 양면을 어떻게 다스리고 잘 조절할지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그 허물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듯이요. 동전이나 건전지가 음양이 있고 앞뒤가 공존해야 가치가 있고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사물도 사람도 그렇습니다. 숙명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균형과 조화를 찾아야겠습니다. 잘하려고, 인정과 칭찬만 받으려고 안달복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행일치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때도 많습니다. 대신에 자신을 덜 미워하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안의 허물, 추악함, 부끄러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장단이 고루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 장단을 조율하며 오늘은 굿거리로 신명 나게, 내일은 세마치로 사뿐사뿐 가볍게, 모레는 진양조로 느릿느릿 장단 맞추며 살아보아요.
●Exhibition
◇프리다 칼로 사진전 : 삶의 초상
일정 3월 26일까지 장소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멕시코의 국보’로 불리는 세계적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오리지널 사진전이다. 프리다 칼로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담은 20여 사진작가의 147점의 작품과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그동안 작품으로만 보았던 프리다 칼로의 삶 자체를 만날 수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가 1911년에 찍은 ‘4살의 프리다 칼로’와 니콜라스 머레이가 1939년에 찍은 붉은 레보소(Rebozo)를 걸친 ‘프리다 칼로’, 레오 마티즈가 1941년에 찍은 ‘태양 아래 프리다’ 시리즈가 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계 사진작가였다. 6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와 사춘기 시절에 전차 교통사고로 생긴 장애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았던 프리다 칼로. 강렬한 색채로 담아낸 자화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일정 3월 12일까지 장소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은 2017년부터 매년 도성의 여덟 성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열어왔다. 올해는 여섯 번째 전시로 혜화문의 역할과 변화상을 소개한다. 전시는 ‘혜화문을 열다’와 ‘그날, 혜화문’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혜화문을 열다’에서는 홍화문으로 건설돼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와 도성 문으로서의 역할, 임진왜란 이후의 중건까지 조선시대 혜화문의 역사와 위상을 소개한다. 옛 혜화문의 모습을 묘사한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를 포함해 관련 유물도 볼 수 있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18세기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감상 가능하다.
●Stage
◇아마데우스
일정 2월 12일~4월 1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이지나
출연 김재범, 김종구, 차지연, 문유강, 전성우, 이재균, 최우혁 등
연극 ‘아마데우스’가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2018년 초연됐고, 2020년 재연 무대를 거쳤다. ‘아마데우스’는 18세기 비엔나를 배경으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를 질투한 살리에리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1984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져 큰 사랑을 받았다. 재연 당시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 김재범과 차지연이 다시 살리에리 역으로 무대에 오르며 김종구와 문유강이 새롭게 합류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역에는 전성우, 이재균, 최우혁이 캐스팅됐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 더 라스트
일정 3월 4일~5월 7일
장소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연출 추정화
출연 김찬호, 오종혁, 백인태, 이창민, 서동진 등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며, 2016년 초연 후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북한 특수공작원 3인방이 남한 달동네에 잠입해 동네 바보, 가수 지망생, 고등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북한 엘리트 요원 원류환 역에는 오종혁, 백인태, 김찬호가 출연하며,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아들 리해랑 역으로 서동진과 2AM의 이창민이 무대에 오른다. 최연소 남파 요원 리해진 역에는 그룹 빅톤의 임세준, DKZ의 민규, 조용휘, 차이도가 출연한다.
◇루쓰
일정 3월 5일~4월 2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김다현
출연 선예, 정지아, 김다현, 이지훈 등
원더걸스 출신 가수 선예의 첫 뮤지컬 도전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루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진출을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창작 뮤지컬로,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구약 성경 ‘룻기’를 원작으로 한다. 극은 사랑을 통해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이방인 여자 루쓰의 일생을 조명한다. 특히 성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커플이라고 할 수 있는 루쓰와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를 통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힐링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2021년 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생전 수집한 미술품 2만 3000여 점을 국립기관과 지자체 미술관에 기증했다. 지정 문화재를 비롯한 고미술품과 세계적인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의 근대미술 작품이 총집합한 ‘이건희 컬렉션’은 공개와 동시에 미술 애호가는 물론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으로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백자 청화 매죽문 항아리’(국보 제219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등 지정 문화재만 60건이다. 파블로 피카소, 클라우드 모네, 마크 로스코,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해외 유명 예술가들의 역작도 포함돼 있다. 가히 세계적인 수준의 ‘이건희 컬렉션’ 기증 후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도’(미술품 물납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술품 물납제도는 미술품이나 문화재로 상속세, 재산세를 현금 대신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
미술품 물납 2023년부터 시행
미술품 물납제도 도입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2020년 전성우 전 간송미술관 이사장이 세상을 뜬 후, 유족은 보물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을 경매에 내놓았다. 문화재 보존에 따른 누적 적자와 막대한 상속세 부담이 이유였다.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문화재 보존에 애썼던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한국 최초 사립박물관이라 충격은 더욱 컸다.
오랜 논의 끝에 상속세법 개편을 통해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신 납부하는 물납 특례가 마련됐다. 2023년 1월 1일 상속세 개시분부터 적용 시행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현금으로 상속세 납부가 어려운 상황이 인정되면 예외적으로 부동산이나 유가증권으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물납제도를 뒀다. 앞으로는 상속받은 미술품 또는 문화재의 가치에 해당하는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신할 수 있다. 물납 신청은 상속받은 미술품의 상속세액이 2000만 원을 넘어야 한다. 또한 역사적·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와 미술품에 한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요청이 있는 경우여야 한다. 가치가 부족하다고 판단돼 국고 손실이 우려되는 작품은 제외될 수 있다.
다만 아직 걸음마 단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미술협회·한국박물관협회 등 문화계 단체와 인사들은 숙원 사업을 청산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술품 물납제도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경매를 통해 해외로 유출되는 비극을 방지하고, 공공 자산화로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확대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국의 미술품 물납제도는 해외에 비해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문화재나 미술품 상속으로 인해 부과된 상속세 외의 다른 재산(금융, 부동산) 상속에 대한 세금은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없다. 미술품 상속에 의해 발생한 상속세로만 미술품 물납을 한정했다는 의미다. 문화재나 미술품을 향후 물납에 충당할 수 있는 재산의 범위에 포함시킬지는 결정된 바가 없다.
지난해 8월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최한 ‘세금으로 받는 물납의 문제점 분석과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미술품에 대한 객관적 가치 평가가 어렵고, 명확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거래 성사가 불확실해 현금화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이달곤 국민의힘 의원은 문화재 및 미술품 물납 대상 여부 및 가치 평가 등을 전문적·중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물납심의위원회를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두도록 하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한편 1968년부터 미술품 물납제도를 시행한 프랑스는 물납의 적용 범위를 보다 넓게 허용한다. 상속세뿐 아니라 증여세와 재산세를 예술 작품, 역사적 수집품, 주요 문서 등으로 납부할 수 있게 했다.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유족은 상속세를 돈이 아닌 그의 작품으로 대신했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 피카소 박물관을 열고 해당 작품들을 공개한 바 있다.
이건희 소장품 살짝 엿보기
‘이건희 컬렉션’이 21일부터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다. 그런데 이를 보고자 하는 관람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현재 관람할 수 있는 날짜 예약이 모두 마감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달 치 예약, 국립현대미술관 2주 치 예약이 매진됐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1일 동시에 개막한다. 고대 유물부터 현대 회화까지 이 전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일부가 일반 관람객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서울 이촌동 2층 서화실에서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9월 26일까지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소격동 서울관 1층에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을 내년 3월 13일까지 연다. 일정은 추후 변동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9792건, 2만 1600여 점의 미술품이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중 명품 45건, 77점 유물을 먼저 공개한다. 이번 전시작에는 국보 12건, 보물 16건이 포함돼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작품은 국보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보물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다.
국보 216호인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북악산에서 바라본 안개 낀 인왕산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풍 산수화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직접 그린 진경산수화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보물 1393호인 추성부도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다. 중국의 송시 ‘추성부’ 전문을 쓰고 갈필로 가을 산을 그렸다. 단원이 사망하기 전해에 그린 작품이다. 갈필은 먹물 사용을 억제해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 기법이다.
청동기 시대 ‘붉은 간토기’와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로 권력을 상징했던 국보 제255호 ‘청동방울’도 공개한다. 조선시대 당대 최고 기술과 디자인을 보여주는 보물 1390호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과 국보 256호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도 전시된다.
이 밖에도 고려불화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 15세기 우리말과 훈민정음 표기법을 보여주는 한글 전적들도 포함돼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유물을 볼 수 있다. 토기⋅청동기, 금동불, 전적, 사경, 청자, 목가구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건희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소격동 서울관에서 이번에 기증받은 1488점 중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인의 주요작품 58점을 먼저 선보인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작은 크게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 세 가지 주제로 나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바꾸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수용과 변화 주제로 묶였다. 백남순 ‘낙원’, 이상범 ‘무릉도원’이 대표적이다. 백남순은 1920년대 파리 유학을 떠났던 여성화가다. 이중섭의 스승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낙원은 해방 이전 제작된 백남순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귀작이다.
개성의 발현 주제에는 광복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기에 새로운 미술을 추구한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했다. 1950년대 작품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이다.
정착과 모색 주제에는 전후 복구 시기 고유한 조형 세계를 구축한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사전예약제로만 운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모두 무료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1회에 30명씩 1시간 관람할 수 있다. 매일 8회차가 운영되고 수⋅토요일은 야간에도 개장해 총 11회차가 운영된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 희망일 14일 전부터 예약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회차당 20명씩 30분 간격으로 매일 15회차 진행된다. 야간개장하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21회 운영한다. 관람 희망일 30일 전부터 예약할 수 있다.
국내 미술시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위기 이후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올해 미술시장 규모가 1조 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서울옥션이 지난 22일 연 ‘제161회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총액이 2008년 이후 국내 경매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울옥션은 이번 경매 낙찰률이 87%, 낙찰총액은 243억 원으로 집계됐다고 23일 발표했다. 경매 전 추정가 합계액인 230억 원보다 낙찰총액이 높았다. 올해 2월부터 6월 초까지 서울옥션 메이저 경매 낙찰총액은 대부분 84억~110억 원대였다. 서울옥션의 올해 상반기 마지막 경매였던 이번 경매에서 낙찰총액이 2배 넘게 올랐다. 역대 최고기록은 2007년 9월 경매에서 올린 낙찰가 277억 원이다.
이옥경 서울옥션 부회장은 “근래 보기 힘들었던 이우환 희귀작, 유영국 수작 등 작품 구성이 좋아서 높은 낙찰총액을 기록했다”며 “현장 경매 열기도 뜨거웠지만 최근 급증한 젊은 세대와 기존 큰손 컬렉터, 외국 고객들이 온라인 응찰로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게 이번 경매의 특징”이라고 밝혔다.
한국적 서정주의 추상화가 김환기가 1971년 그린 점화 '27-XI-71 #211'은 이번 경매 최고 낙찰가 30억5000만 원을 기록했다. 국민 화가 이중섭이 1945년에 그린 ‘가족’은 15억5000만 원, 대한민국 1세대 서양화가 유영국의 ‘영혼’은 12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특히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생존 작가인 이우환 작품이 작가 개인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푸른 점과 붉은 점이 나선형으로 흩어지는 ‘점으로부터’가 15억 원에 시작해 22억 원에 낙찰됐다. 기존 작가 최고가 작품은 2019년 홍콩에서 20억7000만 원에 팔린 ‘동풍’이다.
고미술 작품 중에서는 겸재 정선의 ‘동작진’이 4억4000만 원에 낙찰됐다. 시작가 1억5000만 원의 세 배 가까운 가격에 낙찰되면서 정선의 낱폭 실경산수화 중 최고가 기록을 썼다. 겸재의 종전 최고 기록 작품은 ‘백악부아암’으로 3억4000만 원이었다.
해외 작가 작품도 치열한 경쟁 끝에 고가에 낙찰됐다.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Silver Nets’가 18억 원에 경매를 시작해 29억 원에 판매됐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아트프라이스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0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 연말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경매시장 낙찰총액은 1153억 원이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는 양대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 낙찰가 총액만 합해도 지난해 두 배에 이른다. 미술계 관계자들은 아트페어 같은 다른 미술품 매출 총액까지 합치면 올해 미술시장이 1조 원대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디지털 실감영상관을 다녀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0일 넘는 시간을 공들인 결과물이다.
디지털 실감영상관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 디지털 박물관으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하는 추세에 발맞춰 박물관 상설전시공간에 실감콘텐츠 체험 공간을 본격적으로 조성한 국내 첫 번째 사례다.
지하철 이촌역을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니 건물 앞마당에 한국의 멋을 뽐내는 아담한 정자를 낀 호수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호수를 끼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유물과 문화재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찬찬히 둘러보며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껴보려면 며칠을 둘러보아도 부족할 것 같다. 다른 것은 후일에 시간을 갖기로 하고 새로 개관한 디지털 실감영상관을 찾았다.
이번에 첫선을 보이는 디지털 실감 영상관은 3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관은 ‘화폭 속 세상에 빠지다’, 제2관은 ‘세상을 잇다’, 제3관은 ‘고구려 벽화무덤, 박물관으로 들어오다’라는 테마로 이루어진다. 제1관에서는 높이 5m, 폭 60m의 파노라마 스크린에서 초대형 영상이 펼쳐진다. 처음 보는 환상적 영상에 빠져 황홀함마저 느껴진다. 철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 ‘금강산에 오르다’에서는 ‘봄의 금강산, 여름의 봉래산, 가을의 풍악산, 겨울의 개골산의 영상미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영상뿐 아니라 보물 제1875호로 지정된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과 구룡폭포, 장안사, 삼불암 등 절경에 빠져들면 신선의 경지에든 착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조선시대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이루어지는 화성 행차와 낙성연은 현대의 영상기술로 200년 당시의 모습을 재연하는 장관으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혼의 여정과 신선들의 잔치‘도 놓치기 아까운 장면이다.
디지털 실감 영상관 2관에서는 ‘세상을 잇다’라는 주제로 ‘태평성시도’가 놀라움을 나타낸다.
8K 초고해상 화질로 8.5m짜리 8폭 영상이 펼쳐진다. 태평성시도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태평한 하루를 담은 영상이다. 2,1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이 각자 움직이며 낮과 밤의 일상을 보여준다. 새벽이 열리고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천태만상의 사람들이다. 보는 나를 조선 시대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빠져들게 한다.
또한 VR(가상현실) 체험실에서는 보존과학실과 수장고 및 고대의 유물 보관을 가상현실 속에서 실제처럼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수백 년 지하 땅속에서 여기저기 파손된 유물 파편들을 가상현실 속에서 복원하여 완성 시키는 짜릿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디지털 실감영상관 3관에서는 ‘고구려 벽화무덤, 박물관으로 들어오다’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가볼 수 없는 북한 땅의 고구려 벽화무덤을 영상으로 살려내었다. 안악3호 무덤과 덕흥리 벽화무덤, 강서 대묘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살아있는 듯 생생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무덤의 정면과 측면, 천정까지 4면의 무덤 안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무덤 주인 부부, 병사들의 긴 행렬, 상상 속 동물 등 고구려 사람들의 삶과 사후 상상의 세계가 담겨있다. 강서 대묘에서 발견되는 현무와 주작, 밤하늘의 별자리들은 그 세계의 모습 등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디지털 실감영상관은 살아있는 듯 시공을 초월하여 영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웅장함과 역동성은 현대과학이 빗어낸 작품이다. 좋은 작품을 감상하고 박물관 앞 물결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해 본다. 영상에서 만난 그 시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며, 먼 훗날 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인플루언서’(Influencer)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영향을 주다’라는 뜻의 ‘인플루언스’ 뒤에 접미사 ‘er’을 붙여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칭한다. 연예인, 운동선수 혹은 잘나가는 유튜버 크리에이터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플루언서’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자다. 특히 부자들의 삶에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경매시장에 나온 예술품은 범상치 않은 이의 손과 손을 거치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들의 입소문을 타면 예술의 가치가 올라갔고, 문화로 정착했으며,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를 업고 문화를 껴안다
재력을 쌓아올린 부자들은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자 규칙을 정하고 그들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최고급, 최상품, 최고 가치는 부자들의 눈썰미에 최적화되어 분류됐다. 도시가 생겨나고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 예술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시간과 정서적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었다.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이들은, 예술세계를 알면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가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인플루언서였던 그들은 시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을 찾아내고 성장시켜왔다. 당장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예술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원은 결국 부자들이 했다. 그것은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였다.
예술과 학술 활동을 후원하고, 문화 가치의 보존에 힘쓴 역사 속 수많은 부자 중에는 15세기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섬유 사업으로 가세를 키워 금융업으로 성장해 유럽 최고 부호가 된 가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 정치도 좌지우지했다. 그다음으로 한 것이 바로 예술인 후원. 온갖 고서를 찾는 책 사냥꾼을 고용해 전 세계의 서적을 모았고 문화, 조각, 회화는 물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작품을 메디치 가문이 보존했다.
한국판 메디치 가문을 꼽자면,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가거나 훼손, 말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하고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간송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현 종로4가) 중심의 상권을 장악해온 대부호 집안의 상속권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중국어 역관이자 서화가, 수집가였던 오세창과 함께 민족문화재 수집 보호에 힘을 쏟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눈썰미, 그리고 두 사람의 민족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문화재를 회수했다.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했다.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를 비롯해 불상, 불구, 와전 등의 문화재도 수장했다.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해 중국 역대 미술품도 수집했다.
제2의 메디치 가문을 꿈꾸는 ‘메세나’
지난해 가수 헨리가 10년 동안 써왔다는 바이올린이 자선경매에서 1000만원에 낙찰되는 모습이 MBC의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전파됐다. 이 낙찰금은 ‘2017 오사카 국제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하고 ‘2018 티보르바르가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 김주선 양에게 전해졌다. 현재도 다양하고 굵직한 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김주선 양이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2013년 LG(회장 구광모)와 함께하는 사랑의 음악학교 장학생, 2014년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몽구) 아트드림콩쿠르 장학생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메세나’는 기업들이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현재 249개 기업이 (사)한국메세나협회에 가입해 문화 지원활동 분야에서 사회 공익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원 규모나 스케일도 꽤 크다. CJ문화재단은 음악 장학생을 선발해 청년 음악가를 후원한다. 특히 2014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후원을 시작해 2018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한다.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이끌어가는 것 또한 대중예술과 창작자를 돕는 사회 공익 사업 중 하나. 한류 문화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보니 대중문화 지원 활동이 눈에 띈다. 두산그룹(회장 박정원)은 매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청소년아트스쿨이라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우리나라 최고 연출가와 극작가를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대예술에 관심 있는 청소년에게 뜻깊은 프로그램이다. 연출가 박근형, 김수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참가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줬다. 한화그룹(회장 김승연)의 한화청소년오케스트라도 반향이 크다. 2014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평소 클래식 악기를 접하지 못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연주를 가르치고, 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년에는 천안과 청주 지역 청소년들에게 정통 클래식 악기를 가르쳤으며 연말에는 이틀에 걸쳐 정기 음악회도 열었다. 이러한 각 기업들의 활동은 더 나은 예술 환경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미래 인재를 위한 소중한 씨앗 뿌리기가 되고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소소한 풍경을 즐기며 심신을 가다듬어 주는 곳, 세상의 소음을 잊고 평온한 마음으로 한 나절 보낼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마곡 서울식물원의 겨울
서울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수목원이나 식물원이 100개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도심 근교나 수도권을 벗어난 외곽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5월에 개장한 '서울식물원'은 지하철이나 버스로도 쉽게 가볼 수 있다.
오래전 온통 논밭이었던 때와는 달리 요즘 거길 가면 공항 가는 길 일대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마곡 지구로 형성된 그 지역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치솟은 빌딩들이 이미 가득하다. 그곳엔 도시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어느덧 마곡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서울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미세먼지의 공습과 겨울 추위가 외출을 망설이게 할 때 언제라도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지하철 9호선 마곡나루 역에 내리면 지름이 약 100m에 달하는 원형 온실의 멋진 모습이 눈앞에 떡하니 서 있다. 관람객들이 자연스러운 동선으로 순환하면서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물의 부드러운 표정이 압도한다.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식물원의 디자인이 얼핏 생명체의 구조를 느끼게 한다.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듯 걷다
식물원은 열린숲, 주제원, 호수원, 습지원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입구의 열린숲의 안내 서비스를 받는다. 온실 외부로는 한국 정원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주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들길을 산책하듯, 아이들의 놀이동산처럼, 사람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거기 있다.
온실로 들어가면 열대식물원과 지중해식물원이 세계 12개 도시 정원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최초의 보타닉 공원이다. 원형 건물의 벽과 천장을 그물 모양의 철제 프레임과 유리로 마감해 하루 종일 햇빛이 가득 들어온다. 시야가 환해서 어느새 마음도 밝아진다.
열대 식물원은 적도 근처 월평균 기온 18°C 이상인 지역으로 하노이, 자카르타, 상파울루, 자카르타, 보고타의 식물을 볼 수 있다. 밖은 한겨울인데 벗은 외투를 팔에 걸치고 산책하듯 걷는 관람객들이 흔하다. 이 겨울에 지구 반대편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식물들을 이곳에서 여행하듯 걸으며 즐긴다.
후끈한 열대관에서 지중해관으로 넘어가면 기온이 확 다르다. 이어지는 지중해 식물원은 바르셀로나, 샌프란시스코, 로마 등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풍부하고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가득하다. 정글처럼 숲을 이루거나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하다. 로마의 올리브나 싸이프러스, 아마존을 방불케 하는 숲, 낯선 이국의 식물들이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특히 지중해관 스카이워크 입구 쪽에 우뚝 서 있는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바오밥 나무가 인상적이다.
바오밥 나무를 지나 스카이워크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다양한 각도에서 식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숲 위를 걷듯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내려다보는 온실의 푸르름이 평화롭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들이 이국적인 식물들을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를 누려보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옆문으로 나가면 식물문화센터가 이어진다. 로비 한가운데 시선을 잡아끄는 녹색 샹들리에. 정찬부 작가의 작품 ‘피어나다’가 생동감 있게 밝고 힘을 느끼게 하는 초록 색감이 싱그럽다. 이밖에도 식물전문도서관, 씨앗도서관, 편의 시설이 있어서 궁금한 것을 더 살펴보거나 편안하게 쉴 수도 있다. 초록의 식물 속에서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연인들이나 체험 프로그램에 몰두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이쁘다.
일제강점기 근대문화유산 마곡 문화관
식물원 밖 뒤편 쪽으로 '어린이정원학교'와 '마곡 문화관'이 보인다. 마곡문화관은 예전에 가뭄이나 대홍수에도 안정적인 논농사를 위한 물관리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립되었고 등록문화재 363호로 한국 근대 산업 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로 보존가치가 크다.
한때 용도 폐지되었던 것을 복원하여 1층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 지하엔 배수펌프관이 있다. 1928년 지어진 일제강점기의 펌프장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가 되고 있다. 근대문화적 건축물의 분위기 때문에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낮보다 아름다운 식물원 호숫가의 밤
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호수의 야경은 더없이 좋은 산책로다. 식물원을 감싸던 노을이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 고요함과 한적함 속에서 고품격의 산책을 제공한다. 신비로운 조명이 호수에 반영되고 영화처럼 그 길을 걷는 맛을 즐겨볼 일이다. 이른바 마곡의 핫플로드다.
멀리 가지 않아도
“훌쩍 떠나고 싶어”고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그렇게 일상에서 멀찍이 벗어나면 과연 자유로운 영혼이 이입되고 막연하게 그려오던 신기루에 다가갔을까. 더러는 여행 폐인처럼 무수한 날들을 멀리 떠나 있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때로 감흥 없을 때가 있다. 과연 그런 날들이 어떤 시간을 제공했을지 생각해 본다.
머나먼 곳을 찾아가는 일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다만 일상에서 내 안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편안함과 관대함이 온몸으로 퍼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값비싼 티켓으로 외국의 이름난 성지나 낯선 곳을 누비고 돌아오면 그 거리만큼 영혼이 치환되었을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하루쯤 가뿐히 식물원을 다녀오면 알 수 있다. 날마다 새순이 피어나는 곳, 온실의 채광 아래서 산소 뿜뿜하는 식물들의 생명력과 함께 숨 쉬는 시간은 더없이 충만한 시간이었음을. 멀리 가지 않아도.
-주소 :서울 강서구 마곡 동로 161 서울식물원
△여행정보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8번 출구 (도보 10분) ▷ 주제원 (7번 진입구)
-9호선 마곡나루역 3, 4번 출구 연결 ▷ 열린 숲 (1번 진입구)
*버스
-겸재정선미술관 정류소 하차(도보 2분) 672, 지선 6631, 6642, 6712
-마곡나루역 정류소 하차 (열린숲 도보 5분) 672, 6642, 6645, 6648,
* 운영 시간
평시(3~10월) : 오전 9:30 ~ 오후 6시
동절기(11~2월) : 오전 9:30 ~오후 5시
( 열린숲, 호수원, 습지원은 연중무휴. 주제원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무료입장- 6세미만 65세이상, 1~3급 장애인(보호자1인 포함), 4급~6급 장애인 본인, 국가유공자, 참전용사증소지자,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증 소지자
- 공원구간(열린숲, 호수원, 습지원) 무료
- 주제원 유료- 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 제로페이 결제 시 30% 할인.
-평소에도 특별전시나 이벤트를 자주 하므로 언제 가더라도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식물원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양천 향교가 있다. 향교로 올라가는 길에 홍원사(弘願寺)라는 절이 있고, 거기서 한 발짝 더 걸으면 오래된 국숫집이 보인다. 이름조차 '옛날국수' 집이다. 오래 전의 향수 어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침 날이 흐려서 만들어 놓은 국수가 처마 밑 구석에 한 줄로 모여져 있다. 햇빛 쨍한 날이면 주렁주렁 널어놓은 국수를 볼 수 있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양천 향교(陽川鄕校)'가 보인다. 조선 태종 11년에 만들어져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교다. 이름은 양천향교지만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해 있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주변과 함께 옛 시절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특히 능소화가 향교 담벼락을 뒤덮는 초여름 무렵 다시 찾아가 볼 만하다.
양천 향교에서 이어진 골목을 통해 걸어가면 '궁산 근린공원'이 강서지역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그곳의 궁산 기슭에 ‘궁산 땅굴’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대 대륙 침략의 기지로 쓰인 김포비행장과 한강 하구 일대를 감시하던 일본 군부대의 본부와 탄약고 등으로 사용된 곳. 이렇게 아픈 역사가 곳곳에 있다.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그 옆으로 우리 산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작가 겸제 정선의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겸제정선미술관’이 궁산을 배경으로 앉혀졌다. 화가의 작품과 예술적 업적을 볼 수 있으며 기획전시와 체험문화공간도 있다.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속에 들어가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또 미술관 주변에 '허준박물관'도 있어서 들러 볼만 하다. 박물관 둘레의 산책로를 걸으며 옛 시간의 향기를 즐겨볼 수 있다. 서울 식물원을 비롯 주변의 볼거리도 놓칠 수 없는 서울 서남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