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흙에 땀을 쏟아 결실을 거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나 햇빛의 동향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직업에 속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농사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 귀농의 경우는 더욱 버겁다. 자칫하면 풍랑을 만나 표류할 수 있다. 올해로 귀농 5년 차에 이른 김광호(65, ‘예단비농원’ 대표) 역시 이를 잘 알고 농사에 뛰어들었다. 농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장애물을 돌파해 기필코 부농의 꿈을 성취하겠다는 투의 결기로 무장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느 귀농인들과는 다른 방향에 타깃을 두었다. 농업으로 경제 효과를 거둘 생각 자체를 아예 내려놓고 귀농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득 창출에 목적을 둔 귀농은 애초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시골에 내려왔다.
‘난 그냥 농사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래! 그게 취향에 맞으니까.’ 김광호가 스스로 다짐한 목표가 그랬다. 농사를 즐긴다? 이게 가능할까? 자그만 텃밭 농사라면 몰라도 3000평이나 되는 농토를 재미 삼아 일구기로 작심하고 귀농을 하다니…. 김광호의 포부는 화통하고 유쾌하지만 평범을 초월해 낯설다. 그러나 그는 뜻한 대로 살아왔다. 지난 5년이 통째 즐거운 나날이었단다. 물적 소득은 별로 없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호황을 누리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한다.
김광호는 30년간 서울에서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했다. 은퇴했으니 이제 지도 펴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할 상황이 도래한 셈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아내가 챙겨주는 밥으로 채우는 ‘삼식이’ 노릇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길을 터주었다. “30년간 고생한 당신, 이제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이건 김광호에게 일종의 복된 신호였다. 진로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으니까. 그는 곧바로 내심에 두었던 행선지를 자비로운 아내에게 통고했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깊숙한 산골짝에 함께 들어가 살자는 제안을 한 거다. 그러나 아내에게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머리를 맞댄 상의 끝에 합의한 게 귀농이었다.
“이젠 용도 폐기된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 무엇으로 활로를 삼을까? 퇴직하자마자 고민했다. 어쩌면 공직과 함께 흘러간 세월보다 더 길 수 있는 여생을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는 게 숙제였다. 아내는 깊은 산골만 아니면 어디든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래 이곳으로 귀농하게 됐다. 처음엔 나 혼자 내려와 살았다. 농촌의 물정을 익히고 농사를 체험하는 일부터 선행하는 게 옳다고 봐서.”
선발대 역할을 했다? 빈 시골집을 빌려 썼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귀농 준비자를 위한 미리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귀농인의 집’에서 1년간 살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 공과금을 제외한 모든 걸 무료로 제공하더라. 귀농 준비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어서 좋았다.”
원주민들은 마을에 새로 등장한 귀농인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무대에 올라온 신인배우를 바라보듯 은연중 주시하게 마련이다. 불편은 없었나?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더라.(웃음)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하고 적극적으로 주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매번 인사 잘하는 건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나서서 도왔다. 그렇게 1년이 잠깐 사이에 지나갔는데, 그즈음 주민들이 비로소 속내를 밝혔다. 주민들로서는 외지인에게 일단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귀농인이 마을 분위기를 흐려놓거나, 땅값만 올려놓는 등 폐단을 경험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결론은 이랬다. ‘당신은 다르다!’(웃음)”
집과 농토는 어떤 경로로 마련했나?
“시골에 빈집은 많다. 그러나 팔지 않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도시에 사는 집주인의 자제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품을 많이 팔아야 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매물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용케 마을에서 매물이 나왔고, 여러모로 맘에 들어 매입했다. 집은 튼튼하게 잘 지어진 구옥이다. 남향으로 들어앉아 환하다. 집에 딸린 전답 3000평도 세트로 나와 함께 샀다. 이건 점토질 토양인데 말 그대로 ‘문전옥답’이다. 운이 따라준 것 같다.”
100여 종의 작물 길러
김광호의 집은 마을 중앙부에 있다. 저만치 사방으로 높거나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간혹 거쿨진 노송 숲이 보여 아늑한 분위기를 돋운다. 그에 따르면 이곳이 길지(吉地)란다. 뭐든 한번 해볼 만한 곳이라 한다. 뜻을 펼치기에 적격인 곳이라 한다. 그 ‘뜻’이란 농사를 즐기자는 데 있다. 여기에 기름진 농토가 있다. 딱히 빼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것도 없는 자연 풍광도 있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이자 지지자인 아내의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이건 완벽한 조건이다. 따라서 농사를 한바탕 신나게 즐기지 않고 어떻게 견디랴. 김광호의 생각이 처음부터 그렇게 웅장했다.
그의 농원에선 현재 1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거의 모든 농작물이 망라된 것 같다. 농사로 돈 벌 목적이 부재한 대신 농작물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은 질겨 해마다 작물 수를 늘려왔다. 그래 다종다양한 결실물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듯이 소득 효과는 미미했다. 이 대목에서 귀농인들은 경악한다. 내가 이러려고 귀농을 했나?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고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광호에겐 고심할 이유가 없었다. 태연자약할 수 있었다. 애초 소득 문제라는 뇌관을 제거한 귀농을 구상하고 농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폭약이 터질 일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닐까.
“돈벌이 대신 농작물을 취미 삼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자 모든 게 대체로 수월했다. 재배 기술은 서울에 살 때 이미 익혀둔 게 있었다. 18년간 남의 땅 25평을 빌려 주말농장을 일군 경험 덕분이다. 귀농교육도 충분히 받았다. 수년간 총 1000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요즘도 공부를 계속한다. 식물의 생태를 알면 알수록 농사 재미도 커지더라.”
농장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어디로, 어떻게, 누구에게 가나?
“생산성에 의미를 두지 않은 농사라서 소출은 적다. 아마 남들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수확물은 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과 친지, 이웃, 방문객 등에게 나누어 준다. 손수 지은 깨끗한 먹거리를 남들과 나누는 일은 정말이지 행복하다. 남는 물량은 공판장으로 보낸다. 다른 농가보다 싼 가격을 매겨 로컬 푸드에 내다 팔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 매출은 실로 낮은 수준이다. 사실 지금까지 손에 쥘 만한 게 거의 없었으니까.(웃음)”
농장 일은 부부가 함께 하나?
“아내는 간접 지원을 한다. 농장을 놀이터로 삼은 남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만으로도 그지없이 고맙다. 아내가 농장에 모습을 나타내기만 해도 몹시 기분이 좋아진다. 농장 일이 쉽지 않다. 벼농사는 남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일의 양이 엄청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품이 많이 들망정 기본적으로 매사 재미있다. 식물들이 자식처럼 보이고, 병든 식물을 내 손으로 응급처방을 해 살려냈을 때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모든 농부가 작물을 애지중지하며 비지땀을 쏟는다. 그렇지만 흔히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지 못해 고민한다. 농사를 취미로 즐기는 당신의 방법을 의아하게 보는 눈은 없을까?
“초기엔 나의 미숙한 농사 기술을 구박하는 이들이 있었다. 취미 생활 형태의 운영 방식에도 ‘그게 뭐야?’라며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 농사의 목적과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걸 이해하면서.”
궁금하다. 농업소득이 미미한데 생활비는 무엇으로 조달하나?
“연금으로 산다. 부부 둘이 소박하게 먹고살기 충분한 수준이라 걱정이 없다. 연금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경제의 불확실성이 자명했다면 농사를 취미처럼 즐기기가 불가능했겠지. 서울에서 가지고 살았던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점도 시골 생활의 만족도와 안정성을 높여줬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건 내가 원래 좋아한 식물 재배를 맘껏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50%
알고 보면 풀들도 춤을 춘다고 했던가. 김광호는 식물들의 생동과 약동에 덩달아 즐겁다. 물과 햇빛과 공기만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고 순환하는 식물들의 생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깊숙이 관찰하면서, 그는 인생의 참다운 열매를 따는 듯 만족을 느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설은 간결해 ‘식물이 너무 좋다, 농사가 재미있다’는 정도에 그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흥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흔치 않은 형태의 ‘농사 삼매경’에 빠진 셈이다. 그는 또한 마을 이장을 맡아 동분서주한다. 50여 가구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외지인이 이장에 선임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시골 마을의 권력은 보통 이장에게 집중돼 있다. 따라서 이장 선거전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마을도 드물지 않다. 물론 김광호의 관심은 마을 권력에 있지 않다. 공무원 출신으로 재능기부 차원에서 이장직 권유를 수락했다.
“올 들어 주민들과 마을대동회로부터 이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고사했다. 자꾸 요구하면 차라리 이사 가겠다고 강경하게 나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양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이장 일을 하다 보니 이 역시 재미가 있더라. 보람도 크다.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생겼다. 식물에 빠져 사는 것처럼 요즘은 이장 일에도 푹 빠져 지낸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나머지 50%의 에너지를 배분하며 산다.”
향후 지금의 일들에 어떤 걸 더 보태고 싶나?
“소득과 무관한 농사로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꿈은 이미 이루었다. 원했던 삶과 지금의 삶이 일치하는 기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깨소금 맛이라 해야 하나? 이젠 프로 농부를 지향하고 싶다. 귀농 2막이랄까. 농사의 방향을 전환, 소득 창출에 주력해볼 참이다. 준비는 이미 다 해놓았다. 농(農)식물원으로 가꿀 구상도 가지고 있다.”
놀이로 시작한 농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겠다는 것. 돈보다 취향을 중심에 두고 살아 만족스러웠던 날들도 이제 어깨 뒤로 넘길 시점이라는 얘기다.
김광호가 주는 귀농 Tip
•농사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 쉽지 않다. 시골에 왜 빈집이 많은지, 기존 귀농인들이 일쑤 귀농을 만류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헤아려보라.
•1만 평 이상의 농지 규모를 확보하거나 스마트 팜을 조성할 경우, 또는 특수작물을 재배할 경우 상대적으로 승산이 높을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
•지자체들이 주관하는 ‘미리 살아보기’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라. 큰돈 들이지 않고 농사와 농촌의 물정을 익힐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 정보처럼 빠르게 퍼지는 게 시골 소문이다. 주민과 융화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좋은 평을 들을 수 있다.
•부부 동반 귀농은 필수다. 혼자만의 귀농은 실패를 초래할 수 있는 첩경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풍파가 잦은 게 귀농 생활이다. 성실하게 농사를 지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흔히 혼선이 빚어진다. 무주군 설천면 산기슭에 사는 신현석(62) 역시 두루 시행착오를 겪었다. 올해로 귀농 13년 차. 이제 고난을 딛고 완연하게 일어선 걸까? 어느덧 산정에 성큼 올라섰나? 그의 얘기는 이렇다.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다!” 그러나 농사로 손에 쥐어지는 건 여전히 변변치 않다. 어쩌면 이제야 본격적인 레이스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신현석이 귀농을 한 건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도시라고 매력과 평화가 없으랴. 그러나 직업상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괴로움을 씻기 위해선 시골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전에 살며 긴 세월을 매진한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선량한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심하게 지친 몸과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단다.
“건축업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많다. 공사를 마치고도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러면 속이 탄다. 심지어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불상사가 반복되자 사람 자체가 싫어지더라.”
사람 드문 시골에 살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도시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게 시골이라고 봤다. 농촌에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라기론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살고 싶었다. 약초를 기르며 마음 편하게, 그 무엇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 이건 사실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지만 여하튼 시골에 살 작정으로 농토 3000평을 미리 사둔 게 있어 귀농을 추진하는 게 수월했다.”
첫 농사 작물은 어떤 것이었나?
“매실이었다. 미리 사둔 땅이 묵은 매실밭이어서 비교적 용이하게 농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떤 작물을 기르든 유기농을 추구하자는 기본 방침대로 나름 충실한 농사를 했다. 첫 농사였지만 성과가 있었다. 당시 매실 가격이 상당히 좋기도 했고. 그러나 어느 날 매실청이 설탕물에 가깝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전국의 매실 농가 대부분이 큰 타격을 받았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매실 식초를 생산했으나 영 신통치 않았다.”
결국 매실 농사를 접고 새로 도전한 게 다래 농사였다지?
“무주군이 다래 농가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던 때였다. 따라서 승산 있는 작물로 판단해 다래를 재배, 토핑용 가공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잔뜩 재배만 권장하고 후속 연계 지원은 전혀 없는 농정의 얄팍함을 실감했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대안을 가진 농정이 아니었다. 당시 나 역시 기대를 가지고 주변에 토종 다래를 많이 보급했다. 결과적으로 욕만 먹었지만.(웃음)”
매실 농사에 이어 다래 농사에서도 쓴맛을 본 셈인데, 귀농 초기에 홍역을 단단히 치른 것 같다. 이를 피할 방법은 없었던 걸까? 귀농 교육이라거나 사전 준비에 소홀한 측면은 없었나?
“비록 손실이 컸지만 매실 식초와 머루 가공품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긴 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하지 않았다. 귀농 뒤 교육을 받아 물정을 익혔으니까. 하지만 농사 초심자에겐 어떤 작물이든 만만치 않았다. 실패한 작물이 다수였으니까.”
대충 농사지었을 리 만무하지만
신현석은 그저 ‘자연인’처럼 살고 싶다는 기분을 가지고 시골 생활을 선망했을망정 막연한 충동에 이끌려 일을 추진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삶이라는 교실에서 배운 대로, 매사 구체적으로 숙고하는 버릇을 몸에 붙이고 사는 게 유능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귀농 전에 토지를 미리 장만해뒀지만 서둘러 집을 짓지 않았다. 집은 천천히 짓기로 했다. 일단 농장 저 아래 마을의 빈집을 임대해 5년쯤 살며 농사를 했다. 지역의 풍토와 경향을 파악하고, 농사 물정을 익히고, 아울러 자금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충분히 고려하고 헤아려 귀농 생활의 리스크를 줄여나가고자 했다. 그러니 농사인들 대충 생각하고 대충 덤벼들어 대충 지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실패에 가까운 기록이 즐비하다.
“남의 논을 빌려 벼농사를 한 적이 있다. 화학비료를 배제한 자연농법으로. 그런데 이게 품이 무척 많이 들더라. 반면 소득은 보잘 게 없었다. 남들이 쌀 열 가마를 거둘 때 난 겨우 두세 가마를 수확했으니까.(웃음)”
재배 기술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렇다. 의욕만으로 안 되는 게 농사다. 게다가 귀농 교육장에서 배운 이론적인 기술로는 한계가 자명했다. 벼농사 실패 뒤엔 콩 농사를 했는데 죽정이 수준의 콩을 소량 수확했을 뿐이다. 보리 농사도 했지만 실패했다.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누룩용 밀도 재배해봤지만 아예 제대로 자라지 않더군. 멧돼지나 고라니 등 야생동물들도 흉작에 기여했다.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손을 댄 작목마다 어긋나다니. 농사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론보다 농사에 박사인 농민들에게 농사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경험을 확실하게 했다. 귀농을 할 경우엔 현지 멘토를 선정해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 그런데 크든 작든 실패의 경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노하우라는 게 생기니까. 덩달아 자신감도 생긴다.”
현재 주력하는 분야는 어떤 것이지?
“토종 다래로 만든 청고추장을 생산하는데 꽤 인기가 있다. 주력 상품은 머루 발사믹(Balsamic) 식초다. 전에 매실 식초를 생산했던 경험을 살려 고품질 발사믹 식초 제조에 전념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드레싱과 스테이크 소스 등으로 활용되는 식재료로 일반 식초보다 향과 풍미가 뛰어나다. 신현석은 무주군에서 유일하게 머루를 원료로 하는 발사믹 식초를 생산해 주변의 관심을 사고 있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정통 발사믹 식초를 만든다. 그가 식초에 뜻을 둔 건 10년 전부터인데, 이제 머루 발사믹 식초로 본격적인 행진을 할 참이라고 한다. 귀농 이후 난항과 혼선이 흔했지만 발사믹 식초를 견인차 삼아 대차게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비로소 얻은 마음의 여유
“귀농 이후 가장 난처한 건 경제 문제였다. 사실상 이렇다 할 농업소득이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반면 거듭 자금을 투여할 일은 많았다. 시설과 장비 확보에 자주 큰돈이 들어갔다. 귀농엔 자금력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며 살아왔다.”
생활비는 그간 무엇으로 충당했나?
“틈틈이 건축 일을 해 생계 문제를 해결해왔다. 대전에 살 때 벌어들인 소득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내와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늘 쫓기는 기분으로 고민에 사로잡히곤 했다.”
농사와 건축업을 병행한 형국이다. 이건 이상적인 배합이지 않을까? 농외소득을 최대한 끌어올려 농사의 부진을 메워나가는 건 고육지책이라기보다 진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단점도 있다. 건축 일을 하다 보면 농사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게 바로 그렇다. 나와 아내는 이 산골에서 여생을 살다 흙으로 돌아갈 걸 작정하고 귀농했다. 농업에 전적으로 몰두하며 살 수 있는 여건 마련이 향후 숙제다. 이제 발판은 마련됐다.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당신은 무주군귀농귀촌협의회 리더 그룹에 속해 있다. 귀농인들의 실정에 밝을 테지. 농사 문제를 제외할 때 귀농인들은 흔히 어떤 사안에 가장 큰 애로를 느끼는가?
“토박이 주민들과 융화하는 문제다. 대체로 원주민들은 귀농인들에게 심적 불편을 느끼는 것 같다. 일부 주민들은 대놓고 ‘굴러온 돌’ 취급을 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다행히 예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13년을 살며 좋은 유대관계를 맺어온 나를 내심에선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긴다. 불화와 반목이 심한 마을에선 귀농인이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반면 일부 귀농인들이 물을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한편에만 문제의 원인이 쏠려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해결책이 있다면?
“깊이 들어가 보면 농업지원금 문제로 갈등이 유발되는 걸 알 수 있다. 토박이들은 귀농인들이 지원금을 독식한다 하지만, 귀농인들은 혈연과 학연의 힘을 가동하는 원주민이나 귀향인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불합리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관에서 매우 공정한 룰을 운용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융합교육도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올더스 헉슬리라는 작가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다른 행성에서 바라보면 지옥일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든 유쾌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시골의 풍속은 기본적으로 순한 것 같더라.
“정중하게 다가가면 마음을 열어주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본심은 다 좋다. 순박하다. 이해관계가 발생했을 때 서로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신현석의 산골 거처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집은 집주인을 닮는다던가? 정갈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을 품은 집만큼이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 역시 담백하다. 눈길은 따사로워 뿔도 발톱도 없이 사는 초식동물처럼 양순하다. 도시에서 그의 영혼까지 쥐어박았던 스트레스와 번민은 어느덧 바람처럼 흩어졌나? 농사에선 혼선과 부진이 많았지만 삶의 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고 한다. 중심을 놓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달려온 덕분인데, 그의 중심엔 ‘가족 사랑’이 들어 있다.
“귀농으로 얻은 게 많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게 됐다. 게다가 아들 내외까지 이곳에 합류해 각자의 일을 한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산다. 난 어릴 적 혼자 성장하다시피 해 한없이 외로웠다. 따라서 가족과 동행하는 삶에 가치를 두었는데, 그걸 성취한 셈이다. 내겐 지금보다 더 행복한 시절이 없었다.”
신현석이 주는 귀농 Tip
•냉정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귀농의 제반 상황부터 면밀하게 파악하라.
•농사를 시작한 뒤 일정 정도 소득이 나오기까지 최소 4, 5년은 걸린다는 걸 유념하자. 여유자금 비축이 필수라는 뜻이다.
•집부터 먼저 짓지 마라. 임대하거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인의 집’에서 일단 살아보고 물정을 충분히 파악한 뒤 천천히 짓는 게 현명하다. 농토 역시 처음엔 임대해 쓰는 게 좋다. 찾아보면 무상으로 빌릴 수 있는 전답도 있다.
•농업 기술은 현지에서 멘토를 선정해 배우자. 그래야 재배 작목 선정은 물론 판매망 문제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부부가 과수 농사를 할 경우 3000평 정도 규모가 적당하다.
•반짝하다가 추락하기 쉬운 유행 작물보다 기본 작물을 충실하게 짓는 게 안정적일 수 있다.
•농사는 1년 내내 하는 게 아니다. 농한기나 여유시간엔 봉사활동이나 취미생활을 해 활력을 돋우자.
자리 한번 잘 잡았다. 나지막한 야산이 품을 벌려 농장을 보듬은 형국이다. 둥지처럼 안온한 터다. 보이는 건 숲 아니면 하늘이다. 밤이면 부엉이가 악곡을 연주한단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의 변두리, 절묘하게 살짝 후미진 곳에 있는 자그만 농원이다. 정해정(62, ‘이레새싹삼’ 대표)은 이곳에서 새싹삼을 생산한다. 그의 귀농 이력은 특이하다. 이곳이 두 번째 귀농지니까. 첫 번째 귀농지에서는 거의 실패에 가까운 고난에 봉착해 ‘탈출’했다.
첫 번째 귀농은 2016년, 충남 천안의 산골짝으로 들어가 시작했다. 산 좋고 물 맑은 산촌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그는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았다고 한다. 내릴 것 내려놓고, 버릴 것 버리고 담백하게 살았다. 정직한 농사로 부부가 먹고살 만한 정도의 돈을 벌며 자족하고 싶었던 거다. 특별할 것 없는 이 계획과 희망은 차질 없이 실현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빙벽을 만났다. 원주민의 횡포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원주민과 좋은 관계 맺기. 이는 흔히 귀농 생활 수칙 제1조에 꼽힌다. 불화가 깊어지면 마침내 짐을 싸 철수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은 원주민의 말도 안 되는 텃세에 있는가 하면, 귀농인의 돌처럼 아둔한 처신에도 있다. 여하튼 귀농을 했다면 일단 원주민과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에 공을 들이라는 충고는 비처럼 쏟아진다. 정해정도 이를 유념해 공을 들였다. 따라서 주민 대다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든 시골이든 사람 사는 곳 어디나 ‘삐딱이’들이 있는 법. 그는 몇몇 주민들이 은근히 행사하는 텃세에는 대범하게 자세를 낮춰 무마해나갔다. 그러나 도무지 기초상식이 통하지 않는 ‘강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트랙터를 몰고 마을 안길을 지나가다 어느 할아버지 댁의 헛간 모서리를 조금 망가뜨렸다. 당연하게도 수리를 해 원상복구를 해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요구가 지나쳤다. 배상비를 별도로 내놓으라는 거였지.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결국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리 비용은 50여만 원에 불과했지만 총 500만 원 정도 들어갔다.”
원상복구를 해주면 그만일 텐데 할아버지는 왜 배상비까지 요구했을까?
“평소에도 그분과 어려운 관계였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감정이 강한 할아버지였던 것 같다. 내가 원주민이었다면 배상비를 요구했겠나? 그렇다고 노인을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좋은 감정이 없어지더라. 귀농인을 불편한 이방인으로 여기는 일부 주민들의 심리를 확연히 깨닫게 된 계기였으며, 우리 부부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주민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면은 없었나?
“딴엔 최선을 다했다. 마을 발전기금을 냈고, 잔치를 벌여 신고식도 했다. 좋은 출발이었으며, 좋은 앞날을 예감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뭐든 나누며 살자는 평소의 신념으로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계를 깨달았다. 이곳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산야의 풀로 잃었던 건강 되찾아
결국 귀농 1년 만에 그는 철수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3년을 더 눌러앉아 살았다. 그러고자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였다. 이건 어인 일인가?
“집과 땅부터 서둘러 매물로 내놓았으나 도무지 팔리지 않더라.(웃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가격을 낮춰 내놓으면 되지 않나?
“애초 가격의 반으로 내려도 소용없더라고. 매물을 보러 드나든 사람들이 30여 명이나 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만 3년이 돼서야 어떤 회사 사장이 수련원을 짓겠다고 매수해 드디어 뜻을 이루었다. 떠날 수 있게 됐으니까.”
무슨 그런 요상한 일이 다 있나?(웃음) 감옥 생활 비슷하지 않았을까? 원치 않는 곳에 발목 잡혀 3년을 더 살다니….
“억울하진 않았다. 인생사,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면 고통도 별거 아니다. 천안 산골에서의 4년여 동안 사실 큰 걸 얻었다.”
무엇을?
“건강을 얻었다. 도시에 살 때 부부의 상태가 아주 나빴다. 나에겐 심한 위장병과 비형간염이, 아내에겐 갑상선항진증과 빈혈, 가슴에 혹이 있었다. 우리는 산골로 귀농해서 건강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게 귀농의 한 동기였는데 목적을 이루었다.”
자연이 유능한 의사였나? 산골에서 난치병을 고친 귀농인이 드물지 않더라.
“가령 봄이면 새벽부터 산에 올라 산야초를 배낭 한가득 얻어왔다. 산야초가 사람을 살린다는 말, 정말 맞다. 매우 빠른 속도로 부부의 건강이 좋아진 게 산야의 풀을 많이 먹은 덕인 거 같다.”
풀만 먹고 살 수는 없었을 테지. 돈은 무슨 수로 벌었나?
“귀농 전부터 공부하며 구상해둔 게 산약초 재배였다. 마을 주민들과 공동으로 산속에 ‘산약초 공원’을 만들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계획이었지. 그래 명이나물, 땅두릅, 고사리, 도라지, 제충국 등 갖가지 약초와 나물류를 가꾸었다. 그러나 포기했다. 야생풀들을 제거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주민들이 뭉쳐지지 않아 공동사업도 무위로 돌아갔고.”
부부가 역할 분담해 마케팅 나서
정해정은 목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직 목사다. 도시에서 20여 년간 개척교회를 이끌었던 그가 귀농을 결행한 건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욕구에 추동되어서였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어라, 이건 아니잖아? 나,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 그런 회의와 통찰이 방문해 나를 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게 인생이라는 드라마인데, 정해정은 하나의 반전을 연출했던 것이다. 목사로서 그는 일단 할 일을 할 만큼 했다고 결산했다. 20년간의 목회활동이면 졸업을 해도 무방하다 봤던 것 같다.
한편 졸업은커녕 자신에게 스스로 중퇴 명령서를 발부한 측면도 있다. 개척교회 목사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차가운 광야에 몸과 마음을 쏟아 소명을 다하고자 하는 존재일 텐데, 그는 이 점에서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 매양 궁하다 보니 돈에 관심이 쏠리더라는 것.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은 사회봉사에 있다. 그런데 자주 한계를 느꼈다. 심지어 성도들의 주머니에 관심을 갖게 되더군. 이런 나를 감히 목사라 할 수 있겠나? 과감하게 정리했다. 이젠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하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예전부터 바랐던 건 시골 생활과 농사였다. 귀농이 대안이었던 거다.”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용기로 삶의 방향을 쇄신했다. 중도에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지도를 놓고 가야 할 좌표를 읽어 새로운 항해에 나섰다. 교회 안의 예수에게 매달려 도움을 청하기보다 내 안의 예수를 돋우어 길을 나선 셈이겠다. 이 진취적인 사람은 임야를 사들여 개간하는 것으로 숙원이었던 귀농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첫 시도였던 산약초 재배에선 쓴맛을 봤다. 이후 주력한 작목은 새싹삼. 새싹삼이란 인삼의 새싹을 먹을 용도로 재배하는 아주 어린 인삼이다. 묘삼을 심어 보름 내지 한 달 만에 수확한다. 어린 삼 이파리엔 5, 6년생 인삼 뿌리보다 사포닌 성분이 6배 이상 함유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에 힘입어 약초 시장의 신예로 데뷔한 게 새싹삼이다. 그는 천안 산촌에서 약 4년간 새싹삼에 매달렸다. 작년에 찾아든 두 번째 귀농지인 현재의 터에서도 새싹삼을 기른다. 그의 농사는 순항할까?
“내 생각에 새싹삼 재배는 상당히 이상적이다. 재배 과정이 수월해 가혹한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계절 내내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재배사 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더위와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우리는 30평 규모의 재배사를 운영한다. 매우 작은 규모지만 연중 일정한 소득이 발생해 만족할 만하다.”
소득액은 얼마나 되나?
“지난 5년여 동안 연간 매출 6000만 원에서 8000만 원 정도를 올렸다. 이 농사엔 비용이 많이 드는 편인데, 순소득 비율은 40% 정도다.”
월평균 250만 원쯤? 귀농인들의 일반적인 현실에 비할 때 나쁘지 않은 실적인 것 같다. 내가 취재한 귀농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태반이 적자 구조에 허덕였다. 귀농이야말로 고행 장정임에 놀라웠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해도 먹고살기 힘든 게 농사다. 귀농은 신중하게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 특히 시니어가 경솔하게 귀농을 했다가는 수렁에 빠질 확률이 높다.”
누가 귀농해 새싹삼 농사를 하겠다고 하면 어떤 충고를 하고 싶나?
“자주 상담 요청을 받는다. 이미 새싹삼 농사에 뛰어든 사람에겐 나의 경험에 바탕을 둔 컨설팅을 해준다. 그러나 이제 시작하려는 이에겐 하지 말라 말린다. 막차에 올라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새싹삼이 아니더라도 귀농은 실로 난해한 길이다.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하다.”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자족할 수 있는 귀농 생활의 관건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소소한 소득이나마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부부가 분업을 하는 게 좋겠다. 어떤 작물이든 생산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판로다. 우리는 분업으로 길을 모색했다. 나는 오프라인에서, 아내는 온라인에서 마케팅 활동을 했다. 적은 소득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도 귀농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지닌 것 없이 귀농한 나에겐 빚도 많다. 그러나 아내와 사랑을 키우며 불안감 없이 지낸다. 소득이야 부진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산다.”
매사가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게 귀농이다. 작물의 비위를 맞추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농사에 현명한 최선을 다하되 날뛰는 욕망일랑 지그시 누르고 돌아오는 대가에 긍정하는 배짱, 순응. 이게 귀농으로 삶을 확장하는 방법이라는 게 정해정의 귀띔이다.
정해정 씨가 주는 귀촌 Tip
•TV 방송에 나오는 귀농 성공담을곧이곧대로 믿지 말자.
•부부 협력이 중요하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 한 사람은 농사를, 한 사람은 취업해 수입을 보충하는 방법도 슬기롭다.
•너무 외진 곳은 피하라. 나중에 팔고 나오기 힘들다.
•귀농 후보지를 정했다면 셋집을 얻어 1년 정도 미리 살아보자. 농사 경험도 익히고 마을의 풍토를 파악하기 위해.
•귀농인은 없고 원주민만 있는 마을은 피하는 게 좋다.
•가급적 마을 복판이 아닌 변두리에 터를 잡자.
•귀농 정책자금을 면밀히 파악해 적극 활용하자.
강영석 상주시장 인터뷰
오래전부터 쌀, 누에, 곶감의 도시로 유명한 상주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농업 도시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난해 치러진 4·15 보궐선거를 통해 민선 7기 8대 상주시장으로 취임한 강영석 시장은 상주시의 농업 혁신 도시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강 시장은 인터뷰에서 상주시가 귀농귀촌 1번지로서 손색이 없다고 밝히며, 농업 혁신 도시로서의 가능성과 귀농귀촌인을 위한 정책, 그리고 농촌의 애환 등을 솔직하게 술회했다. “농업 여건만 보더라도 상주시로 귀농귀촌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에게 상주시의 귀농귀촌 여건과 현실에 대해 들어봤다.
“우리 시는 낙동강과 백두대간을 사이에 낀 천혜의 자연환경과 방대한 농지, 풍부한 용수량 등으로 예부터 뛰어난 농업 여건을 자랑해온 곳입니다. 삼백(三白, 쌀·누에·곶감)으로 잘 알려진 전통적인 농업 도시로서 국제 슬로 시티로 인증도 받았죠.”
강영석 상주시장의 말대로 상주시의 농가는 1만3885호로 전국에서 네 번째, 경북에서 두 번째다. 농업 인구도 2만9290명으로 전국에서 일곱 번째, 경북에서 두 번째고, 농지 면적은 2만5315ha로 도내에서 으뜸이다. 그야말로 경상북도에서 손꼽히는 거대 농업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농업의 선택지도 무척 다양하다고 강 시장은 밝혔다.
상주시의 귀농귀촌 강점
“곶감과 시설오이는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근래는 신품종 청포도가 고소득 작물로 각광받고 있어 생산 면적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봉, 육계, 한우, 쌀, 배 등의 기존 작물도 전국 1~2위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팜 혁신밸리와 경북농업기술원을 유치함에 따라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선진 농업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강 시장은 곶감과 쌀, 친환경 농업, 과수 등의 중점 품목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농사만 잘 지으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상주시가 귀농귀촌인의 유입을 강력하게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지 면적은 도내 최고이나 전체 인구수는 면적에 비해 턱없이 적다.
“우리 시는 2019년 초부터 10만 이하 인구로 돌아섰습니다. 2021년 5월 통계로는 9만6337명입니다. 시내 동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4만9957명이니, 실제로 18개 읍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4만638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1개 면의 인구가 2500명 이하로 떨어지면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기반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특히 우리 시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31%가량 되는 초고령 지역이기도 합니다. 향후 농촌 사회, 지역 사회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규 인력이 유입되어야 합니다.”
2021년 귀농귀촌 사업비로 125억5000만 원
귀농귀촌인을 위해 상주시가 준비하고 있는 옵션은 다양하다. 올해 상주시 귀농귀촌 사업 비용은 총 125억5000만 원에 달한다. 분야는 귀농귀촌인 보조 및 융자 지원, 귀농귀촌인 유치를 위한 주거 조성, 귀농귀촌 활성화를 위한 교육 사업이다. 귀농귀촌인 보조 지원은 총 3억1200만 원으로 주민 초청 행사 운영, 주거 임대료, 주택 수리비, 정착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한다. 융자 지원은 올해 상반기 선정분만 해도 45억 원 규모이며, 39개소의 귀농인에게 토지 구입, 하우스 신축, 농가 주택 매입 및 신축 등의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한다.
귀농귀촌인 유치를 위한 주거 조성 사업에는 72억 원을 투자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 사업과, 매년 2~3개소씩 추가로 조성하는 귀농인의 집 조성 사업이 있다. 귀농귀촌 활성화를 위한 교육 사업으로는 총 3억5000만 원을 투자하여 마을 단위 융화 교육, 공동체 귀농학교, 농촌생활기술학교, 귀농귀촌인 역량 강화 교육 프로그램 등을 추진한다. 또한 귀농귀촌인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지원 조직으로 상주다움 사회적협동조합을 지원하여 민간 차원에서 교육과 공동체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것도 타 시군과는 다른 상주시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 최초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 마련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공검면 양정리의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와 사벌국면 삼덕리의 스마트팜 혁신밸리와 인접한 청년보금자리 조성 사업을 통해 농촌 지역에 주택을 마련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전국 최초로 올 연말에 조성되는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는 규모는 작지만 널리 알려져 농촌형 주거 복지 사업을 새롭게 이끌어나가리라 기대되고 있다. 농촌 지역에 단독주택단지를 지어 공공임대로 제공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1만여 명의 귀농귀촌인이 지역에 와서 농업과 농업 관련 직종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의 농업과 농촌 관광, 농산물 가공 분야 등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스타 농부가 되고 성공 사례가 되어, 다른 귀농귀촌인들을 유인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2009년에 생긴 민간 공동체귀농지원센터가 주축이 되어 귀농귀촌인들의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많은 귀농귀촌인의 디딤돌이 되어주었습니다. 매년 계속되는 교육과 모임으로 귀농귀촌인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어주고, 우리 시로 오고자 하는 귀농귀촌인들을 맞이하는 마중물이 되어주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귀농귀촌을 하려면 급격한 변화에 대비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통해 농촌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은 지역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강 시장은 급격한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변화의 밝은 부분에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역 사람들과 귀농귀촌인 간에 갈등이 생기면 기존 지역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방식으로는 봉합되지 않고 갈등이 드러납니다. 이는 순기능도 있지만 귀농귀촌인에게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부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귀농귀촌인들이 조용한 지역 사회에 갈등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지역에는 고소득 영농을 위해 귀농하는 분들이 많아, 막상 투자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면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텃세를 지레 두려워하여 기존 마을과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자 하는 귀농귀촌인들도 있습니다. 고향에 온 귀농귀촌인 중에도 마을 주민들과의 불화로 마을을 옮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귀농귀촌으로 인해 생겨난 변화가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귀농귀촌인들이 지역에 와서 반드시 잘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만, 지역 주민과의 갈등을 ‘텃세’라고 이름 짓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
텃세라는 말의 어폐, 다르게 생각해봤으면
텃세라는 것은 지역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새로 들어온 귀농귀촌인을 괴롭힌다는 뜻이 있지만, 귀농귀촌인이 관련된 갈등에서 기존 마을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귀농귀촌인을 가해하는 경우는 없다고 강 시장은 밝혔다. 오랜 시간 지역민과 귀농귀촌인을 보아온 강 시장은 도시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느냐고 반문한다. 무엇보다도 현재 농촌의 현실이 텃세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존 마을 공동체도 많이 붕괴됐고, 노인들밖에 없어 텃세를 부릴 만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이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자율방범대장 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텃세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시 지역에서도 층간 소음, 주차 등으로 끊임없이 언성 높일 일이 생깁니다. 특정 인물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대도시에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농촌은 과거처럼 긴밀한 대면 접촉이 일상화된 공간이 아닙니다. 노년층도 스마트폰으로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고, 옛날처럼 동네 사람들이 장례식과 마을 잔치를 하며 모이는 일도 줄었습니다. 진입로와 토지 경계, 소음, 쓰레기, 축사 악취 등으로 이웃 간 갈등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텃세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포털 검색창에서 ‘상주 귀농’ 검색
강 시장은 매년 1400가구 1800명을 유치하여 농촌 지역의 인구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5년간 매년 1200여 가구, 세대원은 1700여 명이 유입되고 있다.
“귀농귀촌은 농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가꾸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통계와 숫자로는 잡히지 않지만, 지역에 이미 터를 잡은 귀농귀촌인들이 지역에 만족하고 기존 주민들과 화합하며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많은 고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강 시장은 마지막으로 귀농귀촌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당장 두 가지를 해봤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한 가지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검색창에 농업교육, 귀농교육을 입력하고 동영상 온라인 교육을 듣거나 오프라인 교육 행사에 참가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고 싶은 지자체의 이름과 귀농을 붙여서 ‘상주 귀농’과 같은 식으로 검색해서 시군 귀농귀촌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보는 것입니다. 귀농귀촌 담당자들이 친절하고 간결하게 귀농귀촌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풀어줄 것입니다.”
강 시장은 다양한 귀농귀촌 정책을 개발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사람이 찾아오는 환경 조성’을 통해 인구 감소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있는 참외 농장.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엔 샛노란 참외가 가득 숨어 있다. 참외 농사는 한 번 심어 늦겨울부터 늦여름까지 연속 수확이 가능해 어떤 작물보다 안정된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성주로 내려왔다는 50대 부부. 수확한 참외를 선별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4월에 부부를 만났다.
30년을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남자, 서울 여자인 곽창신, 박미영 부부는 귀농을 결심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맸다. 남편 곽창신 씨는 ‘6시 내 고향’, ‘나는 자연인이다’, ‘인간극장’ 등을 시청하며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약 6개월의 준비 기간에 이들 부부는 곽창신 씨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충청도, 경상도까지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겨울에도 수확되는 딸기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충청도 제천에서 얼음딸기를 생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제천을 몇 번이나 방문해 그 지역 농부들을 만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쟁자가 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며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농부들에게 결국 두 손 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귀농귀촌지원센터를 통해 몇 군데 문을 두드린 끝에 마침내 2017년 1월 성주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로 귀농, 참외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됐다. 귀농은 2017년이었지만 참외를 첫 수확한 것은 2018년 3월. 첫 실습치고는 큰 착오 없이 성주참외를 수확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직거래를 시작했다.
남편 곽창신 씨가 주로 참외 농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면 아내 박미영 씨는 농사를 거드는 것은 물론, 직판매를 위한 사이트 및 블로그 운영으로 판매 채널 다양화에 힘쓰고 있다. 서울에서 책 편집 디자이너로 일해왔던 만큼, ‘호호네성주참외’는 참외 농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귀농 생활 체험 정리 등 다양한 콘텐츠가 소개된 알짜배기 귀농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
올해 귀농 생활 5년 차. 지난 4년간 겪은 고생을 말로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라는 부부는 귀농을 결심했던 그 즈음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직 귀농인의 성공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에서의 삶을 시골로 모종한 후 조심스럽게 뿌리 내리고 있는 곽창신, 박미영 부부의 귀농 체험을 브라보가 귀알못(귀농귀촌에 관심은 많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제별로 묶어본다.
Q 왜 귀농을 결심했을까요?
A 다니던 직장이 발전소였어요. 하루 24시간 운행되는 곳이라 3교대로 근무하는데 밤 근무가 되면 꼴딱 밤을 새서 일해야 했어요.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죠. 같은 공간에서 살고만 있을 뿐이지 아이들과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수도 없고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어요.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던 참에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가 떴어요. 오랜 고민 끝에 아내에게 귀농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죠. 흔히 아내와 함께 온 가족이 귀농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란 말이 있어요. 행복하게도 아내의 동의를 얻게 됐고, 이런 점에서 정말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죠.
Q 내려오길 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지점은 뭘까요?
A 저희 부부가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 아침 우리 가족 4명이 같이 밥을 먹어요. 저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참 우습죠? 쉬운 일처럼 보이는 이걸 직장생활 할 때는 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녁에는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이 너무 행복해요. 귀농하면서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을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요.(웃음)
Q 경북 성주로 꼭 집어서 귀농한 이유는?
A 제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귀농을 결심한 후 준비하면서 귀농한 선배들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귀농귀촌지원센터에 등록해 교육도 듣고 상담도 받았죠. 전 전원생활을 즐기며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귀촌이 아니라, 아직 한참 키워야 하는 어린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생활이 가능한 특화작물 쪽으로 열심히 알아봤어요.
이때 참외가 눈에 띄더라고요. 비닐하우스 생산을 하면서 일 년에 수확을 몇 차례 한다고 하니 수익성도 높을 것 같았고요. 참외 하면 성주참외가 특화돼 있는 상태라 경북 성주에 관심을 갖고 지원센터에 상담을 요청했죠. 그렇게 성주를 여러 번 방문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간 다른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이야기도 잘 안 해줬던 것과 달리 개방적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고요. 최종적으로 성주로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4~5번은 왔던 것 같아요. 농장에서 참외 체험도 해보고요.
Q 귀농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뭘까요?
A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려면 제가 먼저 도움이 많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비하면서 용접도 배우고 기계 수리도 배우고. 그런데 제가 내려와서 정착한 마을이 집성촌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거의 친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불쑥 이방인이 참외 농사 짓겠다고 내려온 것이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죠. 그나마 두 아들이 마을에서 뛰놀고 그러는 게 좋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만.
저희는 시골 생활이라고 강아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워낙 그런 생활이 일상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생활이 지겨워서 닭도 안 키우시고 그러세요. 근데 갑자기 마을에서 새벽에 닭이 울어대니까 좀 뭐라고 하셨죠. 웃픈 이야기죠?
정말 어려웠던 건 참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한데 땅을 구매하기가 어려웠죠. 현재까지 저희는 땅을 구입하지 못했어요. 이제야 농지 구매를 위해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농업인에 선정돼 3억 원을 대출받게 됐어요. 이 자금으로 참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을 알아볼 예정이에요.
물론 밭을 구매하는 게 또 어려움이 있죠. 이런 시골에서의 논이나 밭 거래는 주위의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귀농한 지 이제 5년 차지만 아직도 주민분들에게 이런 거래를 귀동냥 듣기에는 친밀도가 아무래도 떨어지니까…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조금 비싸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또 이렇게 조금 비싼 금액으로 거래하면 그 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을 주민이 뭐라 하세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거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열심히 농사지으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죠. 결국 진심을 다해서 대하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Q 거주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였나요?
A 저는 4인 가족이 당장 생활을 해야 하는 상태라 농지보다 거주지를 먼저 장만했어요. 답답한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게 하고 싶었죠. 옆에 밭을 포함해 411평에 건평은 29평 정도 되는 단독주택을 직접 지었습니다. 귀농귀촌지원센터에 가면 농가주택 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기본 평면도까지 업로드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는 농지 확보부터 한 후 주거지를 해결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주거 공간에 관해서 각 지방자치 정부마다 빈집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시골의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1년간 살아보고 귀농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집주인은 돈을 들이지 않고 집을 리모델링해서 좋고,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은 첫 1년을 테스트 기간으로 삼아 적은 월 임대료로 살아볼 수 있어서 좋고, 일석이조죠.
Q 농사일이힘들지는 않았나요?
A 모든 농사는 힘들죠. 농사가 처음이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참가했어요. 강소농 교육, 농민사관학교, 현장실습, 심화교육… 다 쫓아다녔죠. 아내는 사이버농업인 e비즈니스 교육까지, 2017년과 2018년은 교육의 해였습니다. 그러면서 2018년 3월에 참외 첫 수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공판장에는 출하를 못 했고, 밭에서 키우던 소소한 채소들과 참외까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직판매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공판장에 첫 출하한 게 2018년 4월이었어요.
참외 농사짓는 걸 처음 해본 거잖아요. 모종판에 참외씨 넣고 또 모판에 호박씨 넣고 접목하고 수정시키고, 참외순이 자라면 순 자르기, 참외순과 호박줄기 접붙이기, 자꾸 성장해서 참외 성장을 가로막는 호박잎 떼어주기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참외는 열대작물이라 겨울에는 보온성 좋은 부직포로 이불도 덮어줘야 해요. 또 물을 대는 방법이나 비료 쓰는 법 같은 것도 터득해야 해요.
매일 마을 어른들에게 혼도 나면서 배웠어요. 모종을 키워서 본밭에 심어 3개월 정도 되면 수확하는 거죠. 그리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특히 참외는 새벽에 따야 해요. 새벽 시간에 못 따서 기온이 올라갈 때 따면 참외의 아삭한 맛이 덜하고 물러져요. 아침 11시면 경매가 시작되거든요. 그때까지 오늘 출하량을 맞춰야 하니까 성주 분들은 새벽부터 참외 따느라 부지런하게 움직이죠. 저희 같은 경우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해서 이게 참 힘들었어요. 참외 따랴, 아이들 학교 보내랴.
Q 참외 농사로 매출액이 얼마나 되나요?
A 비닐하우스 1동당 연간 매출액이 1000만 원 정도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농사짓는 사람의 노하우에 따라서 위아래로 20% 정도는 왔다 갔다 하죠. 비닐하우스 10동이 있다면 연간 매출액 1억 정도죠. 그래서 성주에는 억대 농부들이 많아요. 물론 자신 소유의 밭에 비닐하우스 시설을 갖췄을 때 이야기고… 이 시설을 임대해서 하는 저희 같은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겠죠. 자가 소유라고 하면 기본 경비를 매출액의 30~40% 잡으면 될 것 같아요. 제일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비료입니다. 땅의 토양을 좋게 해야 상품 가치도 높아지고 당도도 높아지죠.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배양해 토양을 좋게 하는 것들도 지원하고, 토양을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무엇보다 성주의 토양이 다른 곳보다 미네랄 함유치가 높다고 해요. 그리고 가야산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고 눈이 잘 안 오고, 다른 곳보다 일조량이 많다는 점 등이 참외 재배에 장점이라고 들었습니다.
Q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됐던데 어떤 점이 어필됐을까요?
A (취재에 동행한 성주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의 담당 이태일 계장이 보충 설명을 곁들였다)
박미영 씨의 꾸준한 SNS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농사짓는 것만 올리시는 게 아니라 농촌 생활을 꾸준히 업로드하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계셨는데, 이게 저희 센터가 할 일을 직접 해주신 거죠.
경험자로서 생생하고 유익하게 말이죠. 어린 자녀와 함께 귀농하셔서 자녀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요.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되셔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게 됐으니 앞으로 참외 농사를 더 늘리실 수 있을 겁니다.
Q 가장 큰 문제는 농지 확보겠네요?
A 그렇죠. 현지 분들이 귀농인 때문에 땅값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근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귀촌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쌓고 직거래 등의 포장 판매 부분에서 뭔가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어요. 꼭 농사짓는 것만이 농촌에서의 경제적 활동은 아니라고 봐요.
농사 힘들어요. 어느 정도 연세 들어서 오시는 분은 차라리 현지에서 생산된 참외를 직접 구매해 소포장 판매를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부분도 고려했으면 해요. 특히 온라인 판매 등 관련 기능이 뛰어나다거나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던 분이라면 판매 채널 다양화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Q 귀농 혹은 귀촌을 원하는 분들은 어떻게 도움을 받으면 될까요?
A 일단 귀농귀촌지원센터를 방문해 귀농하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서든 연결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시죠. 요즘은 1년짜리 현장실습 교육도 받을 수 있는데, 센터에서 농사 잘 짓는 멘토를 연결해 멘토멘티 프로젝트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멘토에게 월 30만~40만 원, 멘티에게는 월 80만 원의 훈련 참가비를 줘요. 하루 8시간 농사를 배우는 거죠. 5개월 정도 배울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지원센터에 상담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Q 귀농귀촌을 원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뭘까요?
A 어렵네요, 하나만 꼽기가요. 그런데 제가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농촌 마을도 사람이 모여 사는 거잖아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저희 집에 인터넷 설치가 안 됐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아니, 저 높은 가야산 꼭대기에서도 인터넷이 되는데 제가 이사한 성주의 읍내 권역에 인터넷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죠.
그래서 도시에 살 때처럼 군에 민원 넣고, 심지어 청와대에도 민원 넣었어요. 그런데 공무원은 원칙만 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날 저희 옆집에 이사 왔는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 인맥이 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집에는 그 다음 날 인터넷을 바로 설치해주더라고요.
또 한 가지 꼽자면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정말 귀농은 소확행을 실천하는 거예요.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에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인생을 음미하며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귀농해서 비로소 우리 가족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성주군 귀농인들 연간 수입과 비용
귀농 A 사례(농지 임대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2억 원(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3000만 원(1년), 평균 수입: 8000만 원(1년)
귀농 B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5억 원 (농지·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1억 원(1년), 평균 수입: 3억 원(1년)
귀농 C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상추, 평균 투자비: 1억 5000만 원, 연간 운영비: 400만 원(1년), 평균 수입: 4500만 원(1년)
2018년부터 경상북도 성주군을 이끌고 있는 이병환 성주 군수는 미래 성주를 위해 풀어야 할 두 가지 큰 과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 대표 작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성주참외의 시장과 문화적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효과적인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로부터 인구를 유입시켜 성주군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지금 다행히 양쪽 다 긍정적인 지표가 나오고 있어, 이 군수 입장에서는 좀 더 발전적인 모험을 시도할 여력이 생긴 상황. 그의 군정 방향을 통해 성주군의 미래상에 대해 살펴봤다.
“성주참외는 2년 연속 참외 조수입 5000억 원대를 달성하며 명품 참외의 명성을 한층 더 높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더 과감한 혁신을 통해 미래 농업을 선도하겠습니다. 언택트 수요 급증과 급격히 변화하는 농업 트렌드에 대응하고, 20~30대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온라인 유통 강화와 홍보 마케팅 전략을 마련하여 추진하겠습니다.”
성주군의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인 참외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고품질 참외 생산을 확대하고 명품 참외 종가의 명성을 더욱 견고히 하겠다는 이병환 성주 군수는 언제 어디서나 성주참외 홍보대사다. 정부에서도 성주참외의 성과와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다. 작년에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민생·경제 투어 첫 방문지로 경북을 찾아 23명의 시장·군수와 화상회의를 했는데, 회의를 마친 후 정 전 총리는 페이스북에 ‘면역력에도 좋은 성주참외를 드시라’고 권하는 글을 올렸다. 이를 통해 성주군과 성주참외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홍보 효과를 거둬 타 지자체장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 군수는 “총리님이 참외가 면역력에 도움이 되는지 물어봐 주시고 성주참외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성주군민 모두 감사하다”며 “성주참외 자주 드시고 주위에도 권해주시면 농민들에게 더없는 위안이 될 것”이라는 답글을 달았다.
조수입 1조 원 달성을 목표로
이병환 군수는 최근 과학영농기술 보급을 통한 농업 조수입 1조 원 달성을 목표로 농업 기술을 선진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성주는 전국 참외 생산량의 70%를 담당하는 주산지이기에 이에 초점을 두면서도, 참외가 주작목이 아닌 농가의 소득 증대를 위해 샤인머스켓, 딸기, 취나물과 공심채 등의 아열대 채소 재배단지를 조성하는 등 다양한 작목 시범과 육성 관리를 병행하는 중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선 귀농귀촌 인구 유입이 더욱 절실하다.
“귀농귀촌 인구 유입은 고령화·저출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에 활력소가 됩니다. 또한 농촌 인구 감소 문제를 완화하고, 다양한 산업 분야의 고용 증대와 이용 가능한 서비스를 확대시키는 등 농촌 경제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귀농귀촌인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주 의향 단계부터 이주 정착 단계까지 차별화된 귀농귀촌 유입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귀농인의 집’, ‘농촌에서 미리 살아보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역 활성화와 우수한 농업 인구 유입에 주력할 예정입니다.”
귀농귀촌 인구 꾸준히 느는 중
현재 성주군의 귀농 현황은 인근 지역과 비교해 높은 편이다. 이는 성주군 소득의 주를 이루는 성주참외의 영향이 크다고 여겨진다. 압도적인 네임밸류 덕분에 고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성주는 지리적으로 참외 등 과채류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분지 지형에 토양이 비옥하고 맑은 물과 풍부한 지하수가 있어 농사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평가된다. 또한 낙동강을 기대고 있으며, 기상재해가 적고 겨울철 안개 발생이 거의 없어 옛날부터 당도 높고 품질 좋은 참외가 많이 생산되었다. 농업이 주업이었던 시대에 명당이라고 일찌감치 인정받은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재 귀농귀촌 인구 유입은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최근 5년간 성주군의 귀농귀촌 가구는 약 6000가구에 달합니다. 경북 내에서도 높은 유입률을 자랑합니다.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젊은 층 등 신규 농업 인력의 유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청년 귀농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고, 지역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춘 귀농귀촌 시책을 펼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농촌을 떠나는 인구, 즉 역귀농을 방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지역 여건을 만들어야 하며, 농촌 중심지 활성화를 통한 지역사회 서비스 수준 제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귀농인의 집’으로 임대형 주택 지원
성주군의 귀농귀촌정책 사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농정착 지원으로는 귀농인 정착 지원, 귀농 농업 창업 및 주택 구입 지원, 농기계 임대사업 등이 있다. 교육 지원으로는 신규 농업인 현장실습 교육(멘토와 멘티가 함께 현장실습 운영), 귀농귀촌 교육 등이 있다. 주거 지원에는 귀농인의 집 지원이 있고, 추후에 이사 비용 및 주거 임대료도 지원할 계획이다. 특히 귀농인의 집 지원은 주거할 수 있는 임대형 주택을 파격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귀농인의 집 지원은 귀농귀촌 희망자에게 농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안정적인 정착을 돕기 위해 임시 주거 주택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지역의 빈집을 수리하거나, 빈집을 철거 후 신축 또는 이동식 주택을 구입해 귀농인의 집으로 운영합니다. 관리 기간은 조성 후 7년입니다. 입주 자격은 귀농인의 집에 거주하면서 주택과 농지를 확보한 후 성주군에 정착하고자 하는 자 중, 가족 입주자거나 귀농 교육을 이수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정합니다. 4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용 기간은 1년 범위 내 이용을 원칙으로 합니다. 입주 대기자가 없을 경우 3개월 이내 범위에서 추가 이용이 가능합니다.”
성주군에는 또한 귀농귀촌지원센터가 설립되어 있다. 전문 상담원이 상담 안내는 물론이고 각종 지원사업의 신청 접수 등 귀농귀촌인의 통합 민원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귀촌인들에게 재능기부 교육 지원
사실 귀농귀촌은 도시 은퇴자들의 꿈이고 낭만이기도 하다. 그런 수요를 증명하듯 귀농귀촌 체험은 예능 프로그램 어디를 틀어도 나오는 단골 소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귀농귀촌인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를 먹는다. 이른바 ‘텃세’를 두려워한다.
“살아온 문화가 다르기에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귀농귀촌인의 정착에는 마을에 흡수되려는 귀농귀촌인의 노력 못지않게 마을의 귀농귀촌인 수용 분위기와 준비가 중요합니다. 우리 성주군에서는 성주군귀농인연합회 회원분들이 봉사활동 등 마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농귀촌인 대상의 융화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귀농귀촌인 교육에 ‘지역민과 융화 및 갈등 관리’ 과정을 편성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귀농귀촌인 상당수는 전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사람들이다. 성주군에서는 이들의 역량을 활용하는 방법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경영, IT 등을 경험한 귀농귀촌인들이 농업의 6차 산업화에 기여하고 지역 리더로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귀촌하신 분들이 가진 역량을 더욱 활용할 수 있도록 재능기부 교육 개최, 모임활동 지원 등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적극 지원해줄 계획입니다.”
귀농귀촌 희망자들이 해당 지역에 미리 살아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증가하는 추세다.
귀농귀촌을 계획하는 도시민들이 우려하는 점이 정착 성공 여부다. 도시와 다른 생활환경과 문화, 주민들과의 관계에 적응해야 하고, 농업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소해 줄 목적으로 각 지자체들은 희망 지역에 미리 살아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귀농인의 집’과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다. 건물을 신축하거나 빈집을 정비해 마련한 곳으로, 귀농 희망자들이 거주하며 영농 기술을 배우고 농촌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체류 기간은 짧게는 1개월, 길게는 6개월~12개월로 지자체마다 다양하다.
선배 귀농인 가정에서 며칠간 지내며 농가 현장, 농사 및 주거 체험을 하는 ‘귀농 홈스테이’도 있다. 현지인 가정과 직접 매칭되어 관계를 쌓고, 실제 농가에 거주하며 보다 밀접하게 귀농인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체험형 프로그램은 귀농인의 성공적인 정착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경남 함양군 체류형 농업지원센터에 따르면 3년간 수료생 150여 명 중 70%인 100여 명이 함양군에 정착했다.
정부에서도 체험형 귀농귀촌 지원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중점 정책으로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이 농촌에 장기 거주하며 일자리, 생활, 주민 교류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전국 89개 시군에서 500가구를 지원할 예정이다. 참가자에게는 최장 6개월의 주거와 연수 프로그램, 월 30만 원의 연수비를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의 주요 참가자는 5060 은퇴 예정자, 40대 이직 희망자, 청년 구직자다. 농식품부는 지자체와 협력해 이들의 관심을 고려한 지역 맞춤형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다.
농식품부는 귀농귀촌 정책 방향을 ‘지역 밀착형 체험ㆍ정보 제공’으로 전환해, 귀농귀촌 희망자들이 안정적으로 농촌에 정착하도록 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농식품부 김정희 농업정책국장은 “귀농귀촌에 대한 도시민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런 관심과 수요가 농촌 이주 실행과 지역 안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촘촘하게 정책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귀농생활이 힘들 것을 미리 충분히 알았으나 단단히 각오할 것까진 없었단다. 도시의 아파트를 벗어나는 해방감이 컸거니와, 시골에서 자라며 쌓인 경험과 정서를 밑천으로 삼은 귀농이라 날아오르듯 가뿐한 행보였다. 그리고 즐거운 귀농의 나날이 이어졌다. 살다 보니 구름인 양 물인 양 걸림 없이 한 세상 흐르기에 좋은 게 시골인 걸 알았나보다. 김영남(56, 옥천 풀잎체험농원) 씨는 이렇게 정든 시골에서 활개를 친다. 그저 매양 웃으며 산다. 웃지 않고 산다면 이 무슨 인생 낭비? 그리 여기는 것 같다.
영남 씨의 귀농은 우연한 계기로 촉발되었다. 남들처럼 뜸 들여 면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귀농지를 물색하는 식의 사전 작업을 면제해준 선연(善緣)이 그를 방문했던 것이다. 대전의 한 병원에 입원한 시어머니를 수발하다 옆 병상의 어떤 할머니까지 덩달아 수발한 게 귀농의 연줄이 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가만 있어도 술술 풀리는 일이 있으니 인생이란 기묘한 게임이다. 영남 씨는 할머니와의 인연을 복이라 친다. 그렇다면 이 복은 하늘이 내렸나? 영남 씨의 갸륵한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세사의 인과(因果)는 대략 오차 없이 행진하는 법이다.
“퇴원을 한 할머니께서 당신의 시골집에 놀러오라 청하시더라. 병원에서 정들어 양어머니로 삼아 섬겼던 터라 막역한 관계 형성이 됐던 거였다. 해서, 남편과 함께 놀러갔더니 마을의 느낌이 무척 좋아 거기에 아예 살고 싶어지는 게 아닌가. 게다가 양어머니가 빈집을 추천해줬다. 뭐를 따지고 잴 게 없었다. 살던 대전의 아파트 등 부동산을 서둘러 팔아 자금을 만들었고, 그 빈집을 사 허물고 황토 집을 나름 멋지게 지었다. 일사천리로 단숨에 귀농했던 거다. 2016년의 일이었다.”
농원 규모가 엄청나다. 이 너른 언덕배기 토지를 어떻게 확보했지?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전답과 임야로 이루어진 1만8000평짜리 터로 이 가운데
1만 평을 과수원으로 개간해 운영한다. 복숭아도 꽤 많이 심었지만 사과 재배에 주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농원 일대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팔짝팔짝 뛰더라. 정작 나는 풍경을 즐길 시간 여유조차 없는데.(웃음) 귀농, 이거 정말 장난 아니다.”
우연하고도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귀농이었구나.
“그런 셈이다. 계획적이었다면 남편의 직장생활부터 청산했겠지만 그러질 않았다. 시골에 내려와서도 남편은 한동안 대전으로 출퇴근을 했다. 1년 이상 직장 일을 계속하다 그만뒀거든.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옆집 주민과 마찰이 빚어져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동네에서 아예 내놓은 기인이었다. 결국은 여생을 눌러 살고자 공들여 잘 지은 집에서 2년여를 살다 현재의 이곳으로 이사를 했지. 이게 전화위복이 됐다.”
이곳은 풍광부터 평온하다. 산자락에 안긴 집이라 호젓하고. 이런 터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이사를 결심했던 때에 나온 매물이었다. 처음에 살던 집과 지척이지만 모든 여건이 더 좋았다. 기도원으로 쓰던 2층집이었다. 부지 2000평에 전답도 딸려 있어 금상첨화였다. ‘야, 여기가 낙원이구나, 이제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고고싱이다!’ 내가 그렇게 외쳤던 거다.(웃음)”
드디어 농사를 시작했나?
“농사를 해본들 보람이 있겠나? 내가 원래 농사라는 직업엔 회의적이었다. 시골 출신으로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남편은 농사에 뛰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복숭아대학을 다니는 등 농업에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건 나의 일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농사는 남편이 짓고,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은 너무도 많았다. 뭐든 맘먹고 덤벼들면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쳤지. 문제는 최적의 일을 찾아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식용곤충농장이 적합해 보여 산업곤충 공부를 좀 해봤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이런저런 모색을 하다 그냥 적성과 능력에 맞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답이 나오더라.”
어떤 답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다육식물과 야생화를 즐기는 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다육식물 전문 농원을 만들기로 했다. 된장이나 고추장을 맛있게 담그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니 장류 사업을 병행해도 무난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기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래 일단은 카페를 차려 생활비를 벌기로 하고 2층 공간을 개조해 찻집을 차렸다. 내겐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었다.”
그의 카페엔 특별한 게 있다
허세와 뻥 없는 겸허함으로 내 실력에 맞춰 사는 일. 그걸 지혜라 일컫지만 지지고 볶는 세파에 흔들리다 보면 과욕과 과속을 일삼다 표류하기 십상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해내는 인생은 꽃길이다. 그러나 정작 가시밭길을 헤매다 종 치기 쉬운 게 인생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영남 씨,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자신부터 기쁘게 하는 쪽으로 일을 구상했던 것 같다. 후미진 산기슭에 웬 카페인가 싶지만 개업 1년 남짓이 지난 현재 어지간히 자리가 잡혔다. 잘 돌아간다.
농원 전체의 담백하고 조촐한 풍색과 마찬가지로 카페 역시 소박하게 꾸몄다. 조화나 그림 액자, 소쿠리, 또는 특별할 것 없는 빈티지 장식품들로 공간을 치장해 동네 사랑방처럼 따사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그래서인가, 인근 읍내 주민들이 찾아들어 단골 노릇을 한다. 멀리 대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사뭇 독특하거나 매력적인 공간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순탄하단다. 이 카페엔 뭔가 특별한 게 있나보다. 뭘까.
“손님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찻값이 착해 좋다고들 한다. 차와 함께 제공되는 군것질거리로도 호감을 산다. 푸짐하게 내놓거든. 요즘 같은 철엔 군고구마와 군밤, 옥수수 튀밥을 한꺼번에 제공한다. 이렇게 퍼주고 남는 게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이 외진 산골짝을 찾아주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 뿐이지. 난 스스로 선택한 일이면 무조건 즐기는 태도로 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즐거워지더라.”
날이면 날마다 손님들을 맞이해 신경 써야 하는 게 찻집 일이다. 은근히 감정 소모가 많을 것 같다.
“난 센치한 멋과 분위기를 추구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전혀 아니다. 사교적이랄까, 긍정적이랄까, 내겐 그런 기질이 충만해 있다. 때로 아줌마들과 어울려 앉아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 일에 만족스럽다.”
코로나로 불황이 자심하다. 찻집에서 나오는 월수입을 말해줄 수 있을까?
“평균 순소득 250만 원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부부 둘의 생활비로는 부족하지 않다. 그래도 남편에겐 좀 미안하다. 그간 농원 조성을 위해 내가 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거든.”
당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남편은 자동차 회사 쉐보레에서 판금 기술자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농장 운영이나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력의 소유자라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모든 걸 주도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남편에게 선언한 약속이 있다. ‘걱정 말라, 반드시 수익이 창출되는 농원으로 키울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하하하!”
아직은 불쏘시개 지피는 단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쾌활하다 못해 화통하다. 말방울 쩌렁거리는 것 같다. 그건 오래된 습이다.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낙관과 긍정으로 매사를 접수하면 넘지 못할 벽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밝은 천성도 한몫 거들어 잘 웃게 하는 안면근육을 발육시켰다. 그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가수였다. 결혼을 하고서도 버리지 않은 꿈이었으나 남편의 반대로 포기했단다.
“남편이 뒷바라지를 해줬다면 지금쯤 유명 가수는 아니라도 밤무대 가수 정도로는 뛰고 있을 게 틀림없다.(웃음) 애석하게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노래강사 자격증을 따 대전에서 갖가지 봉사활동을 했다. 웃음치료사로도 맹활약을 했다. 그거 아시나? 웃음치료사가 얼마나 좋은 건지를. 남들을 행복하게 하기 이전에 나 자신부터 행복해져 너무 좋더라. 인생이 바뀌더라. 매사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거든.”
우울의 늪에 빠질 뻔한 시절도 있었다.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사투를 했던 것인데 긍정심을 약 삼아 완치했다. 이후 삶이 한결 소중하고 감사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삶의 감사함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걸 실증해보이기 위해 귀농의 나날들을 웃음으로 맞이하고 웃음으로 떠나보낸다.
농장을 둘러볼까. 집 뒤편 경사지에 비닐하우스 석 동이 있다. 하우스 하나에선 다육이 화분들이 도란거린다. 영남 씨는 이 땅딸보 식물들이 향후 농원의 성장 주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믿는다. 특용작물을 시험 재배하는 하우스도 있다. 닭과 칠면조와 토끼를 기르는 하우스도 재미있다. 국화를 군락으로 조성한 산책로 맨 위편 평탄지엔 언제 보아도 푸근한 인상으로 무상의 보시를 하는 항아리 200여 개가 놓여 있다. 한판 야무지게 된장 사업에 뛰어들 것을 예고하는 풍경이다. 찜질방과 민박용 객실도 지어놨다. 아직은 불쏘시개를 지피는 단계이지만 영남 씨는 복합농원으로 키워나갈 포부에 부풀어 있다.
“친구들은 나를 두고 이미 성공한 귀농인이라 한다. 나를 보고 귀농을 따라 한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귀농인의 귀감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목적 지점에 도달하고 싶다. 마을 이장 선거에도 나갈 참이다. 왜냐고? 이장의 선의와 노력만으로도 마을 공동체의 풍토가 개선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김영남 씨가 주는 귀농 Tip
•반드시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농촌에선 원주민들과의 소통 등 아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다.
•농업정책자금에 관심을 가져라. 크고 작은 각종 지원 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귀농하기 전에 각 지역에 있는 귀촌귀농단체의 총무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자. 그게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길이다.
안녕, 시골아, 드디어 내가 너에게 왔노라! 그에겐 그렇게 흐뭇한 인사말을 읊을 겨를이 없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사업을 하다 귀농한 김열홍(60) 씨. 그의 귀는 얇은 귀였나? 그는 “농지며 집이며 거저 쓸 수 있으니 몸만 오라”는 지인의 달짝지근한 권유를 받고 설레어 달려 내려간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상황이 영 달랐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된통 당한 셈이다. 그러나 열홍 씨는 부아를 가라앉히고 얌전히 눌러앉기로 작정했다. 속인 건 지인이지만 홀린 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내가 나에게 속은 꼴이지 않은가, 남 탓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여기고 후루룩 상황을 넘어서기로 했던 모양이다.
약간 요상한 귀농 시발이었다. 진즉부터 시골살이에 뜻을 두었기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한바탕 열심히 뛰어보기로 다짐하자 새삼 흥미가 동했던가보다. 한 방 얻어맞고서야 귀농에 본격적인 발동이 걸렸던 거다. 이렇게 뒤늦게 엄청 진지해진 열홍 씨, 일단 도시에 있는 부동산을 싹 처분해 7억 원쯤의 귀농자금을 만들었다. 그건 그가 믿을 만한 가장 유력한 ‘실탄’이었다.
돈을 일컬어 ‘요물’이라고도 하고 ‘웬수’라고도 하지만, 그는 비장하게도 ‘실탄’이라 부른다. 내가 쥔 자금이 떨어지면 성벽을 넘어 거침없이 돌진해오는 세파의 기총소사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에서다. 그래 실없이 실탄을 낭비하지 않고 가급적 효율적이고도 참신한 전투에 임하기로 결심한 병정처럼, 열홍 씨는 최대치의 슬기를 발휘해 자금을 잘 운용하기로 하고 귀농열차를 집어탔던 것이다.
그 결과는? 귀농 10여 년이 흘렀으나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에 따져볼 사안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귀농생활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기로 결정했으며, 실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다고 자부하기 전에 도출되는 대차대조표는 잠정적인 결과물에 해당하거나 무의미한 문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이란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3도 화상을 입으며, 또는 자주 뒤집어지며 익어가는 빈대떡과 이웃사촌. 용을 쓰더라도 엎치락뒤치락, 삶이란 굴곡과 파란으로 점철되는 꽤나 허무맹랑한 레이스라는 걸 그도 잘 알지 않겠는가. 일희일비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리라! 이게 열홍 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의 추세라는 게 있을 텐데, 한마디로 오랫동안 주로 죽을 쑤었다.
“귀농에 만족하느냐고 내게 묻지 마라. 그 답을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웃음) 때론 만족스럽다가도 때론 힘겨워 불만스럽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게 11년 전인데 5~6년 동안은 수익이 아예 나질 않더라고. 해마다 적자였지. 그럼에도 투자를 계속해왔다. 규모를 키우는 게 난관을 돌파할 길이라 판단하고서였다. 그러면서 ‘실탄’을 꽤나 허비했다. 다행스럽게도 4~5년 전부터는 ‘똔똔’이거나 약간의 흑자가 나고 있다.”
그는 처음 한동안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를 보고 2000평 규모의 사과농장을 조성해 공을 쏟기 시작했다. 10여 마리에 불과했던 한우도 70여 마리로 늘려 사육하고 있다. 실로 모처럼 쏠쏠한 흑자를 본 작년의 경우, 사과로 올린 매출액이 5000만 원 정도. 이 가운데 60%쯤이 순수익이란다. 한우 사육에서도 비로소 자금회전이 시작되고 있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자칫 적자를 보는 일에 도통하기 십상인 게 농업이다. 그렇다고 꼭 그러라는 법이 있겠나. 매사가 썩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성난 얼굴로 현실을 돌아보길 거듭했으며, 활로를 찾기 위해 몸과 머리를 아낌없이 써왔던 것 같다. 염소 털처럼 허옇게 쇤 그의 턱수염은 분투의 소산일 게다. 그 결과 서광이 들이쳤나?
“이제 웬만히 자리가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애환이 많았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나날들이었지. 공연히 거액의 자금만 날리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귀농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내려왔다는 데에 있다.”
준비한 건 오직 자금뿐이었나?
“그렇다. 호밋자루 한 번 손에 쥔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 겁 없이 농사에 덤벼든 꼴이었다. 뭐든 잘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거든. 이게 오산이었다. 기술 없이 농사에 뛰어들었으니 노력을 해본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더라. 뒤늦게 농업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1년 과정의 한우대학도 수료했다.”
귀농은 왜 했지? 목적이 뚜렷했다면 사전 준비도 부실하지 않았을 거 같아 묻는 얘기다.
“조용한 시골에 나만의 작은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꿈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 원하는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농사 노동으로 떳떳한 시간을 보내고, 가끔 하루 이틀쯤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뭐 그런 소박한 기대가 있었으나 아직 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인간사에 낙원이 어디 있겠나. 감상적으로 살 일이 아니더라.”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도시를 떠나지 않았겠지. 사업이 괜찮게 돼 가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늘어나는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인생에는 돈벌이보다 중한 게 있지 않던가? 내 마음이 흘러가는 곳에 살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이게 좋은 인생이지 않을까. 난 귀농을 통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귀농보다 귀촌이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텃밭 농사 정도나 하며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귀촌 말이다. 당신은 독신이다. 7억 자금이면 놀면서 슬슬 까먹어도 평생을 살 수 있을 게 아닌가.
“아하.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무위도식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일과 맞부딪쳐 뭔가 보람을 끌어낼 게 없는 생활에 무슨 활기가 있겠나, 무슨 재미가 있겠나.”
비록 고행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농업이 지닌 매력과 흥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더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에겐 피땀 흘려 생산한 사과가 팔리지 않아 숭숭 썰어 소 사료로 주는 식의 환장할 만한 혼선이 잦았다. 그러나 농사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자유 직종이라는 것, 이상과 자질을 마음껏 실험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인생교실이라는 것, 게다가 정년이 없어 무기력한 노년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열홍 씨는 농사가 지닌 긍정적 속성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가령 농산물이 안 팔리더라도 남 탓을 할 게 없다. 모든 게 나의 능력, 기술, 전문성의 여부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면 농사란 가장 자립적인 형태의 직업이다.”
그는 ‘모든 게 나의 문제’라는 걸 자주 자신에게 세뇌하며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자기학습의 효과는 커 그를 좀체 실의에 잠기게 하지 않는다. 농사로 맞닥뜨리는 난관이 이를테면 어떤 외부의 흉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한숨과 낙담에서 신속하게 벗어날 수 있는 힘과 깡을 끌어내는 것 같다. 저 잘난 농업정책의 협찬이나 선한 이웃의 과도한 헌신을 기대하는 따위도 그의 본성에 맞지 않아 남세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
그런데 열홍 씨가 직면한 넘어야 할 산은 농사만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해야겠다. 그의 콩팥은 좀 서러운 콩팥이다. 기능을 상실한 탓에 그는 1주일에 사흘은 신장 투석을 한다. 월, 수, 금, 3일간은 거의 종일 병원에 누워 혈액을 걸러낸다.
“나이 들면 누구나 한두 가지 질병은 다 가지고 산다. 그저 내 복대로, 내 팔자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병원에선 의사에게 맘 편히 투석을 맡기고, 집에선 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일에 묻혀 산다.”
동네 이웃들은 당신을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 칭찬한다.
“무슨 그런 과한 얘기를.(웃음) 남들은 수백 마리의 소도 기르고, 수만 평 규모의 사과밭을 경영하기도 한다. 난 그 반의반도 못 따라가고 있잖은가. 농사일에도 아직 서툴러 사실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콩팥에 문제가 생긴 건 언제부터?
“40대 초반에 이상이 왔다. 플라스틱을 다루는 공장을 운영한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 한동안 일을 놓고 쉬었으나 결국은 신장이식을 받게 되었지.”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중한 병을 고친 이들도 있다.
“귀농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식받은 콩팥을 달고 산 지 12년 만에 완전히 망가지더군. 투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형제 하나가 콩팥을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나 좋다고 형제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시골에 들어와 병을 고친 사례는 나도 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병은 좋아질 병이 아니거든. 계속 끝까지 투석해야 하고 식이요법도 충실해야 한다.”
그런 건강 상태로 열심히 농사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강철 인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군.
“난 어릴 때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고난을 겪었다. 먹을 게 없어 사나흘씩 굶기를 자주 했고, 심지어 20일간 물만 마시며 견디기도 했지. 아마 그런 경험들이 나를 꽤나 강하게 만들고 독립적인 근성을 길러준 게 아닐까. 난 지금도 알몸으로 어디에 던져져도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웃음)”
자신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인간 유형? 열홍 씨는 차돌처럼 야무지다. 불편한 몸 상태에 희한하게도 거의 무심하거나 태연하다. 간혹 표정이 딱딱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사람의 버릇일망정 병세에 상심하는 징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로, 두통, 요통 등 신장투석에 따르는 불편이 자심할 터이지만, “난 그런 거 몰라!” 하는 투로 유유한 게 아닌가.
그는 신장 투석을 시작하며 유능한 일손 하나를 고용했다. 축사며 과수원을 혼자 건사하기엔 역부족이라 동원한 인력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이 일손은 귀농 지망생으로 향후의 귀농을 위한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셈이다. 열홍 씨로선 신통치 않은 재무구조에 월급이 나가 부담이야 되겠지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게다. 이렇게 그는 동갑내기 직원과 둘이 5년째 동거하며 일을 한다. 오직 끔벅거리는 눈으로 언어를 발하는 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사과나무들이 간혹 청원하는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준다. 그 와중에 그가 남몰래 해온 일이 또 하나 있다. 과수 농가들에게 쓸모가 많을 그 뭔가 새로운 도구들의 개발에 열을 내왔던 것인데 2017년, 마침내 ‘가지 유인(誘引) 철 클립’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과수 농사에서 가지 유인 작업은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다. 가지들을 적절히 늘어뜨리거나 구부려줘야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지. 그동안 흔히들 콘크리트로 만든 추(錐)나 플라스틱 물병을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유인을 해줬다. 내가 만든 ‘철 클립’은 획기적으로 간소하고 효율적이다. 현재 농가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창의(創意)의 산물이구나.
“도시에서의 오랜 전공이 기계설비였다. 농사를 짓더라도 전공을 살려 만든 장비나 기구를 도입하자는 생각이었지. 내겐 다종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으며 나름 연구를 해왔다. ‘가지 유인 철 클립’은 개발이 실현된 한 가지일 뿐이다.”
‘철 클립’ 매출액은 어느 정도?
“출시 이후 약 3000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제 막 알려지고 있는 과정이라 차후의 매출 상승을 예감한다. 소비자들과 만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특허를 내고 홍보를 하는 등 그간 1억 정도를 투자했지만 충분히 회수가 가능할 거라 본다.”
당신의 귀농 역시 결국은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겠지?
“소들의 순한 눈망울, 새벽이슬을 매단 사과나무, 눈부신 아침 햇살, 이런 것들이 주는 짜릿한 전율이 행복의 감정일까. 한 사람의 월급을 주고, 나 먹고살 형편은 되고, 이 역시 행복이겠지. 그러나 행복은 순간에 왔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걸 안다. 과욕 없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몸 아픈 사람들에겐 시간이 한결 귀하다.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난 그쯤의 인간이길 바란다.”
비록 시련이 많지만, 지금 살아가는 방식,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홍 씨는 별 유감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선용해 현재보다 더 나아가고자 하는 갈증. 이건 뜨거운 목마름이다. 그렇기에 건강상의 한계나 노동의 과중함마저 그는 곧잘 무시하는 것 같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처럼.
김열홍 씨가 주는 Tip
•귀농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자. 기술 습득 없이 농업에 나섰다간 십중팔구 실패하기 때문이다. 시골 농가에 일꾼으로 1~2년쯤 취직해 살며 농사를 익힌 뒤 귀농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똑똑한 인재다.
•집부터 먼저 잘 지을 거 없다. 자금을 아껴 써야 살아남는다. 근사한 집을 지었더라도 나중에 팔 일이 생겼을 경우엔 낭패를 볼 수 있다. 좀체 팔리지 않는 게 전원주택이니까.
•깊은 산골의 집성촌으로 귀농하면 텃세에 시달릴 수 있다.
•귀농을 하면 일단 베풀며 어수룩하게 처신하라. 술자리, 회의자리 등에 적극 동참해 사교를 하라. 잘만 사귀면 원주민들이 결국엔 귀농인의 조력자가 된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