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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어링, 극동대와 요양 실무 연계형 교육 프로그램 개발 나서
- 요양 서비스 스타트업 케어링이 극동대학교와 업무협약을 맺고 지역 인재 양성을 위한 산학 협력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다. 양측은 케어링의 요양 인프라 기반 시니어 케어 노하우와 극동대학교의 우수 인재 양성 전문 역량을 접목해 △실무 연계형 교육 프로그램 개발 △노인복지 분야 전문 인력 양성 △현장 실습 지원 △요양 인프라 채용 연계 등에 협력할 계획이다. 케어링은 가족요양, 방문요양, 주간보호 등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 기업으로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52개의 주간보호센터, 요양보호사교육원 등 직영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오는 8월에는 주간보호센터 청주 직영점이 오픈될 예정이다. 극동대학교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재 사립대학으로 지역사회 복지 증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수의 사회복지기관, 사회복지협의회, 요양보호사교육원 등의 기관과의 활발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케어링은 이번 협약을 통해 극동대학교 재학생에게 현장 실습 기회를 마련하고, 사회복지사, 간호사, 작업치료사 등 지역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방침이다. 최근 정부가 국내 대학 졸업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요양보호 분야 취업을 허용하는 특정활동(E-7) 비자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국내 취업을 희망하는 외국인 유학생도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김태성 케어링 대표는 “요양 산업 발전을 위해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 개발, 현장 실습 기회 마련 등 우수한 돌봄 인력 양성에 대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며 “양질의 돌봄 서비스 제공을 위해 지역 대학과의 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해 학생들의 실무 경험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지역 일자리 창출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 2024-07-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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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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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➋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 신성일’
- 한국영화에서 신성일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뺄 수 있을까?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10.12~ 21)에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 아이콘, 신성일의 회고전이 ‘한국영화 회고전’을 통해 선보였다. , , , 등 신성일이 주인공을 맡은 500여 편의 영화 중 8편을 엄선해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했다. 최근 폐암 3기 판정을 받아 항암 치료 중인 신성일은 회고전 기간 내내 활발한 모습으로 영화제 현장을 누비며 팬들과 소통했다. 신성일 야외 사진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10월 13일은 ‘신성일의 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성일을 회고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다. 영화의 전당(부산시 해운대구) 앞마당에서 펼쳐진 ‘신성일 야외 사진전’ 리본 커팅을 시작으로 영화 (김수용 감독·1967) 관객과의 대화,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등이 이어졌다. 오후 2시 야외 사진전 오픈식에 모습을 드러낸 배우 신성일은 단상에 서자마자 故 김기덕 감독(1934~2017)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62편의 작품 중 32편에 출연한 신성일. 김기덕 감독이 자신과 같은 폐암 3기 수술 후 20일 만에 유명을 달리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현재 폐암 3기 선고를 받고 방사선 치료 중인 신성일은 “10월 25일 방사선 치료가 끝나는데 건강도 많이 회복됐다”며 “모두들 건강 챙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를 본 뒤 잃어버린 두 개를 찾았다 한국영화 회고전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 신성일’의 첫 번째 영화로 (김수용 감독·1967)가 상영됐다. 김승옥의 소설 을 영화한 것으로 김승옥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까지 도맡았다.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는 영화 의 김수용 감독과 신성일이 함께 나와 영화에 대한 추억담을 꺼내놓았다. 정정한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선 김수용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22회짼데 다른 사람들 다 했는데 신성일씨가 어찌 지금 회고전을 하냐”면서 “아마 상황이 이렇게 되어(신성일의 병세를 두고) 하게 된 것 같다”, “이번 영화제만큼은 원로 영화인들이 가슴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영화 마지막 장면의 신성일 연기를 언급했다. “세월이 다 지나갔지만 저 사람 실력 있는 배우였다”며 극찬했다. 당시 두 번째 영화에 출연한 배우 윤정희에 대해서도 “그때 참 촌스러웠다”며 “신성일씨가 메이크업과 속눈썹을 다 봐줬을 것”이라고 말해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이날의 주인공 신성일은 “내 나이 딱 서른 때 찍은 작품이었다”, “정작 너무 바빠 이 영화를 지금까지 못 봤다”고 털어놓았다.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린 두 가지를 찾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제가 요즘 잃어버린 것이 많은데 영화에서 차고 나온 시계가 굉장히 좋은 시계입니다. 롤렉스 백금 시계였는데 3년 전에 도둑맞았어요. 그때는 쉽게 수입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극동 필름 차태진 사장이 일본에서 사다준 결혼선물 시계입니다. 현재 시세로는 한 몇 억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끼고 나온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반지입니다. 두 개 다 도둑맞아서 이제 저에겐 없지만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어서 반갑습니다. 눈으로라도 찾았으니까요.” 나는 배우의 삶이 좋다 신성일은 한 기획사의 제안으로 내년 봄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몸이 많이 회복돼 촬영할 수 있게 됐다”며 “따뜻하고 행복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날로그로 대표되는 우리 세대와 디지털 세대, 인공지능 세대인 손자 세대가 따로 살지만 한 가족을 이루고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영화 진행이 잘돼 영화제에서 작품이 소개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성일은 배우의 삶을 산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배우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이지만 서울대학교에 떨어진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경남고등학교 출신으로 나름대로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공부했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배우가 됐어요. 영화배우가 됐기 때문에 4·19혁명 같은 큰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화 찍느라 바빠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의식 있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더라면 시위 현장에 있었겠죠. 내 후배나 선배들 고문당하고 붙들려 들어가서 골병들었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런 속에 영화를 찍었습니다. 김수용 감독도, 정진우 감독도 그렇고요. 우리 작품이 매번 검열에 다 걸리니까 대신 청춘 영화를 찍고 현대문학을 찾아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 좋아질 것을 예상했지만 또 다른 군부가 들어섰어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요. 당시 제게 정치판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만 고사했습니다. 그때 만약 갔더라면 국회의원 세 번 정도 하고 이 자리에는 있을 수 없겠죠.” 신성일은 마지막으로 “관객 앞에 설 수 있기에 영화배우로 살아온 것이 거듭 고맙고 많은 얘기를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배우로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어 늦은 밤 해운대 파크 하얏트에서 열린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에는 신성일과 다수의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윤정희를 비롯해 임권택, 이장호, 안성기, 한지일, 허기호 등 영화계 원로가 참석해 회고전의 밤을 축하해주었다. 또 이날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부산 출신 박태호 작가가 만든 액터스 체어를 신성일에게 증정했다.
- 2017-1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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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어진 대로 ‘살아지면’ 사라집니다”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
-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말이다. 31년을 최고경영자로 살아온 인물의 첫 멘트로는 의외다. 선입관 없이 듣는다면 달관한 성직자 내지 철학자의 말 같다. 인터뷰 장소인 도심 복판의 강남 특급호텔이 갑자기 호젓한 사찰로 변해 수도승과 선문답을 나누는 느낌이다. 탈속 버전(?)에 맞춰 묘비명 질문으로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해봤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태어나자 마자 1년 만에 아버지를 여읨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유·청소년기 보냄 △지망 중학교 입시 실패 △IMF 때 47세의 나이로 해직 △창업에 도전했다가 실패, 이후 산막에 칩거해 세상과 격리생활 2년. 반면에 다음의 이력을 보라. △35세에 한보건설 사장이 된 후 3개 건설사 사장 역임 △현직 특급호텔 사장 △교수 △합창단 단장 △쓰기, 말하기, 노래하기 등이 프로 수준 △주말마다 별장에서 전원생활 향유. 두 삶의 이력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위의 삶에서 짙은 불운의 그늘이 느껴진다면 아래의 삶에선 행운, 그것도 보통이란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억세게 좋은 트리플 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단순히 성공도, 행복만도 아닌 균형적 삶으로 말이다. 알고 보면 동일 인물이다. 바로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이야기다.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메니지먼트(주)는 국내의 정상급 호텔인 앰배서더와 세계적인 호텔체인 아코르가 공동 출자한 호텔 운영 전문 기업이다. 권 사장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과 불행을 카르마로 풀어 이야기했다. 카르마란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그는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운이나 불운이나 결국은 업보이기 때문에 늘 현재의 행실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묘비명에 꼭 한 줄 적히길 바라는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명예입니다. 돈, 명성보다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그냥 두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물론 나도 (유혹에) 흔들립니다. 인생의 매순간은 유혹이니까요. 누구나 흔들리지만 깨어 있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공자는 ‘일흔이 되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해도 세상의 규율에 얽매임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도 이럴진대 보통사람이 어떻겠습니까. 흔들릴 때마다 내게 스스로 묻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선의를 갖고 있는가. 둘째, 의로움과 정직함이 살아 있는가. 셋째, 내 자식이나 후배에게 떳떳한 역사를 쓰고 있는가입니다. ‘호호·당당·담담(웃음 넘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만 담담해질 수 있다)을 살펴보는 세 가지 자성 질문이 나를 잡아주는 마음의 기둥입니다.” 중간에 부침이 있었지만 31년째 CEO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또 65세인 지금까지도 현역이십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인생 선배로서 청춘들에게 전하는 조직생활 성공 메시지를 담은 책 를 최근 출간했다.)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버벅거렸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사에 아부를 떨고 눈치 9단이 되어 설설 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회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일과 동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당당해집니다.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 아닙니까. 회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해야 내가 삶의 주인이 되고 당당해져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자존이 살고, 자존이 살아야 자유가 삽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조직이나 상사가 ‘주인을 의식하게’ 해 고민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멘토로서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정 힘들면 최면을 걸어서라도 내 일을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하하). 조직에서 80%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데 조직생활이 불행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사가 있다면 ‘내가 왜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라는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후일의 영광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신념과 내공이 쌓이고 진정한 자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권 사장은 지금도 새벽에 출근할 때 회사에 경례를 하곤 한다. 사람, 상사에 대한 경례가 아니라. 회사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새벽바람 맞으며 달려오는 동료들의 열정과 마음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경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 들었던 ‘너가 회사다’란 말이 생각났다. 상사, 동료, 직원, 조직문화를 탓하지만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겐 회사가 아니겠는가. 승승가도를 달리다 법정관리에 들어가 47세에 극동건설 사장을 그만두셨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하셨다가 바로 실패하셨는데요.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큰 두려움입니다. 오죽하면 공자도 ‘자기를 몰라줘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의 외면, 망각 그런 게 두려워 창업을 서둘렀지요. ‘건설의 포털, 민간건설사업의 조달청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었는데요. 전화 몇 통 걸어 이틀 만에 12억원을 모았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였지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사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문 경영인과 창업은 완전 다른 차원이더군요. 내 돈도 아니고 지인들의 피 같은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하루하루 보는 게 피가 마르는 고문이었습니다.” 그 후 산막에 들어가 2년간 은거생활을 하셨더군요. “중년 백수,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지요. 처절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산막에 기거하는 생활, 힘들었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것들, 깨닫지 못한 삶의 중요한 요소를 생각할 숙성의 시간이 됐다고나 할까요. 돌이켜보니 더 올라갔다고 더 소신이 있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여유로워진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에 쥔 것을 잃을까봐, 자리를 뺏길까봐 더 소신이 없어지고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막상 산에서 살아보니 사람이 하루 동안 먹는 게 별 거 없고 돈도 그리 많이 필요 없더군요. 과일 몇 알 가지고도 버틸 수 있고요.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비굴하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지면’ 사라지겠구나, 살아지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 소명의식을 갖고 내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기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말엔 산막에 가서 생활하신다고요. 중년의 많은 사람이 ‘산막의 전원생활’을 동경합니다. “(웃으며)겉만 봐선 안 됩니다. 사람들은 산막의 여유로움이라는 좋은 면만 바라봅니다. 그 뒤의 땀과 수고를 봐야 진정으로 진정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령 원두막에서 한가로운 독서를 하기 위해선 그 뒤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누가 흙 범벅의 손 되어 씨 뿌리고 잡초 뽑고 거름 줄 것인가. 개 먹이는 누가 주고 진드기 잡고, 청소하고, 닭똥 냄새 맡으며 누가 거름 만들 것인가. 낭만으로만 생각할 거면 차라리 콘도나 펜션으로 놀러가라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산막, 전원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행해야 복이 옵니다. 행하지 않고 낙(즐거움)은 없습니다.” 권 사장은 “산막은 야인 시절, 권토중래의 재기 의지를 다짐하는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새로운 힘과 아이디어 충전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며 “세상이 나를 속이고 버릴지라도 언제든 돌아갈 보루가 있다는 점에서 든든한 안식처가 되고 마음의 힘이 된다”고 말했다. “산막을 지은 게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로 꼽는다”는 말에 자부심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권 사장님 하면 청춘합창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오디션 장면, 저도 TV로 봤는데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온 삶이 아니었다”라는 말에 공감한 분이 많았습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하하,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처음 공개오디션 과정에 응한 것 자체가 큰 도전이고 용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참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흐릿한 미래에 활력이 더해지고 꿈이 보다 더 또렷해졌습니다. 유엔 무대에 서겠다는 ‘가당찮은’ 꿈이 실제로 이뤄졌고 올해는 오스트리아 그리츠 음악제에 초대받아 해외 무대에도 진출합니다. 평균 연령 64세의 ‘청춘 또래들의 합창’을 통해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세계 무대에 전파하겠다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다음 문제입니다. 꿈이 있는 한 외롭지 않고, 과정이 아름다우면 인생도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SNS 활동도 활발하신데요. 곡우라 칭하시는 사모님과 부부지간 금슬이 알콩달콩 보기가 좋습니다. “사실은 제가 철든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오십 넘어 집사람의 고마움을 알았어요. 알고 보면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예요. 당연히 나와 같으리라고 짐작해 내 고집을 피우고 우기지 말고, 나랑 다르다는 것을 알고 물어보고 배려해야 합니다. ‘따로 또 같이’라고나 할까요. 함께할 수 있는 일, 각자 할 일을 구분해 함께 혹은 각자 하고 즐기는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쓰(쓰기)-말(말하기)-노(노래하기)에 능하십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중년, 노년들이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첫째, 죽을 때까지 명함을 파야 한다. 둘째, 최소한의 경제 독립. 이미 갖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셋째,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넷째,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 단적으로 반찬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기본적인 일에서부터 은행일, 세금 신고하고 납부하는 일 등 일상과 관련한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 놀기뿐 아니라 혼자 먹기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다섯째, 확실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 하다못해 숨쉬기 운동이라도 취미로 가져야 무료하지 않습니다. 시간 알차게 보내기,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요체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삼십 년을 무료하게 살지 않으려면 취미든, 공부든, 일이든 새로 시작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꿈은 아름답지만 정작 그것을 이루어가는 길은 늘 험하고도 멀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꿈꾸는 청년’ 권대욱 사장의 마지막 멘트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한 편의 인생론, 행복론 장편 강의를 들은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의 진정한 달관은 포기가 아니라 진격의 용기가 아닐까. 밖으로 나오니 꽃샘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바람을 헤치고 봄꽃들이 얼굴을 군데군데 내밀고 있었다. 문득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다. / 나는 내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어 마시겠다. 나는 언제나 / 기쁨도 고통도 최대한 누리고 겪었다. (중략) 한결같이 변함없는 영웅적 기개 / 세월과 운명 때문에 약해졌지만, /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강하도다.” 인생의 행복은 남보다 높이,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로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데 있다. 당신은 인생을 진격시키는 힘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3-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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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지금은] 김봉연, 미완의 역전 드라마 “프로구단 감독으로 마침표 찍고파”
- 한 중년 남성의 상경은 슬펐다. 40년 가까이 한곳만 바라보며 달려온 인생이다. 가난했지만 불꽃같은 열정과 투혼이 있어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 꽃은 많은 사람에 꿈과 희망과 용기를 줬다. 중년 남성의 얼굴 곳곳에 깊게 파인 주름은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 속 온갖 사연을 담은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2000년 10월, 제2의 인생을 위해 서울행을 선택한 그는 한국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金奉淵·63)이다. 그의 야구인생은 그렇게 씁쓸한 마침표를 찍었다. 1963년의 어느 날이다. 소년 김봉연(당시 10세)은 두 살 터울 형 김봉구에 의해 야구부 훈련 장면을 지켜보게 됐다. 형 김봉구는 김봉연보다 먼저 야구를 시작했다. 그땐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훈련이 끝나고 형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형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창문 밖에서 교실 안을 훔쳐보니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졌다. 형이 야구부원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야구부원이 되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구나.” 어린 김봉연에게 자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봉연의 야구 입문은 그렇게 자장면의 유혹으로 시작됐다. 어린 김봉연은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운동이었지만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면 담장을 넘어갔다. 하지만 김봉연의 진짜 야구인생은 군상상고에 진학하면서다. 1968년 야구부를 창단한 군산상고는 김봉연에게 야구 유니폼을 입혀 ‘역전의 명수’를 만들어갔다. 군산상고 3학년이던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는 9회까지 1-4로 끌려가다 5-4로 역전 우승하며 한국 야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을 남겼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 용사’는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현기봉, 송상복 등이다. 이 우승은 김봉연의 야구인생 전환기가 됐다. 서른한 살 김봉연, 프로야구 무대 밟다 이후 김봉연의 야구인생엔 걸림돌이 없었다.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란 수식어를 안겼다면 연세대 재학 시절엔 본격적인 홈런포를 가동했다. 대학 4년 동안 홈런왕을 놓치지 않을 만큼 그의 방망이는 위력을 발휘했다. 홈런만이 아니다. 아마추어 시절엔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에는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세대 졸업 후에는 한국화장품에서 3연타석 홈런을 세 차례나 기록했고, 대통령배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는 등 한국 최고의 거포로 군림했다. 그리고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은 또 다시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김봉연은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서른에 가까웠다. 뒤늦은 모험보다 어릴 적 꿈이던 교사가 옳은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봉연은 장고 끝에 일생일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까짓 거 한 번 부딪혀보자.” 김봉연은 프로야구 원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초대 홈런왕에 올랐다. 그의 홈런포는 이듬해인 1983년에도 불을 뿜으며 해태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올스타전 브레이크에서 가족과 함께 전남 여수에 다녀오던 김봉연은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만 200바늘(총 314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동승자가 사망할 만큼 생명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입원 한 달 만에 다시 일어나 후기 리그 우승 팀 MBC 청룡과의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불을 뿜은 그의 방망이는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한국시리즈 성적 1홈런 포함 19타수 9안타(0.474) 8타점을 기록한 김봉연은 해태에 첫 우승을 안기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바로 그 우승이 해태(KIA) 10회 우승의 시발점이다.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부상 후유증과 체력적 한계, 그리고 상대 투수들의 견제로 슬럼프 늪에 빠졌다. 4번 타자의 부진은 해태의 침체로 이어졌고, 1984년 롯데, 1985년 삼성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86년 2년 만에 재기에 성공, 생애 두 번째 홈런왕(21홈런)에 오르며 해태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제패를 이끌었다. 그것이 김봉연 야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정년퇴직까지 2년…제3의 인생은 다시 광주에서 김봉연은 1988년 은퇴까지 630경기에 출전해 2145타수 596안타(0278) 110홈런 334타점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국 야구의 영웅이자 호남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의 은퇴는 씁쓸한 마침표였다. “스포츠신문을 통해 ‘김봉연 은퇴’란 제목의 기사를 봤다. 세상에 나도 모르는 은퇴가 어디 있나.” 구단의 일방적인 은퇴 결정은 아직도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코치생활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2000년 김응용 감독이 삼성 사령탑을 맡으면서 후배 김성한이 후임 감독으로 정해진 것이다. 결국 김봉연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야구판을 떠났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김봉연은 지금 충북 음성의 극동대학교에서 사회체육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릴 적 교사 꿈을 교수가 되어 이룬 셈이다. “야구를 그만둔 지 벌써 15년이나 됐다. 이제 정년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정년퇴직하더라도 강의는 계속하고 싶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그는 야구판을 떠나서도 신명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내 야구 인생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로 감독을 못했다는 점이다. 일흔이 되기 전에 꼭 KIA 감독을 맡고 싶다.” 바로 그것이 해태를 떠나 지낸 15년 세월도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해태는 가난했지만 모든 선수들이 책임감이 강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해태와 KIA의 차이점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KIA엔 그게 없다. 그래서 더 KIA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그렇게 제3의 인생을 설계했다.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역전 드라마의 마침표가 김봉연의 잊힌 야구 열정에 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 2015-04-16 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