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와 윤석화, 두 사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배우다. 두 여배우가 하나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 박정자가 주연을 맡고 윤석화가 연출을 맡는 ‘해롤드와 모드’가 그것이다. 선후배 사이이자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참으로서 팬데믹 코로나에 도전하듯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며 풀어내는 ‘해롤드와 모드’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삶의 지혜를 말하는 ‘모드’ 역을 맡은 배우와 그 모드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연출이라는 교차적 입장에 서서 서로 배려하며 내어주는 두 사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삶과 연극을 들여다봤다.
삶을 연극과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연극 속 인물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1962년에 연극 ‘페드라’로 데뷔해 팔순인 2021년에도 여전한 현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배우 박정자의 얘기다. 5월 1일부터 무대에 올라가는 ‘해롤드와 모드’에서 맡은 모드는 그녀와 나이가 같은 팔순이다. 그녀가 모드 역을 맡은 건 이번이 일곱 번째. 드디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나이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녀는 이번이 자신에게 마지막 모드 역이 될 거라고 이미 밝혔다.
“이제 좀 내려놓고 싶어서, 가벼워지고 싶어서요. 뱀은 때가 되면 허물을 벗기도 하고 애벌레도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런 기분이에요. 이 허물을 내가 옳게 벗을 수 있을까, 그런 염려가 있긴 하죠.”
박정자, 80세의 모드가 되다
‘해롤드와 모드’는 규범을 거부하며 자살 시도를 벌이는 게 유일한 취미인 부잣집 아들 해롤드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자유분방하고 귀여운 80세 할머니 모드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미 오랜 시간 무대에 오른 검증된 작품이고 박정자 개인으로서도 큰 애착을 느끼는 만큼, 그녀가 생각하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국은 소통을 말하고자 하는 거죠. 부모와 친구, 사회, 국가, 세계… 이미 우리는 소통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소통이란 게 좋은 의미여야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인물과 작품을 통한 선한 소통으로 사람들이 조금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거죠.”
그녀가 보는 모드는 무공해 그 자체인 인물이다. 소유하지 않지만 모험적이라 매일 새로운 걸 해보자는 마인드다. 그렇다고 현자인 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생을 먼저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 연극을 보고 모드를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회가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다
박정자는 모드가 ‘나이를 먹어도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다’고도 했다. 그런 모드의 모습은 그녀 자신의 삶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듯 보였다.
“차를 버린 지 3년 됐어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정 가기 어려운 덴 카카오택시를 타고 가고. 거기에 굉장한 기쁨이 있어요. 바로 내가 소유했던 걸 내려놓는 것이죠.”
그녀는 그러한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정화’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정에 대한, 사회에 대한 정화다.
“자동차는 내가 늘 혼자 타고 다니는데 공해 문제, 기름 문제 때문에 나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 나 애국자야.’ 그런 생각도 해요.(웃음) 쓰레기 분리수거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죠. 작은 것부터 출발하면 삶이 정화될 수 있어요.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화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을 주변에 줄 수도 있죠.”
관객을 만나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주변 생활을 자신의 법칙으로 정화하고 있는 박정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저 ‘연극배우 박정자’로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간결함으로 이어졌다. 간결함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잊어버림과도 같다.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병이 돼요. 연연해하면 발목 잡히는 거니까. 늘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데, 마음도 새로워야 되겠죠. 그래서 되도록 그런 걸 없애려고 해요.”
새로운 해와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지만, 코로나19는 아직 암중모색 중인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은 행복하지 않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관객을 만나면 행복해질 거예요. 작년에는 그래도 ‘노래처럼 말해줘’라는 배우의 모노드라마를 했어요. 작년 2월 코로나가 막 터질 때였죠. 나는 그 작품으로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하거든. 좋았어요. 많은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저 배우처럼 나이 먹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해요. 내가 참 좋은 일을 했구나 싶죠. ‘해롤드와 모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이번 ‘해롤드와 모드’가 특별한 것은 연출을 후배이자 그녀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윤석화가 맡았다는 점이다.
“(윤석화에게) 내가 팔십에 연극을 하게 되면 그때는 네가 연출하라고 말했었죠. 그 약속을 지키게 됐어요. 사실 우리는 계속 티격태격해요. 티격태격 정도가 아니지.(웃음)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만족이 있을 수 없어요. 서로 부딪칠 때는 심하게 부닥치기도 하죠. 그런데 그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정이란 참아주는 거죠. 참고 기다리고…. 그건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단 나 자신을 위해서일 거예요.”
윤석화, 극 속에 담긴 시적 메타포를 찾다
그렇다면 이제 연출을 맡은 윤석화의 말을 직접 들어볼 차례다.
“선생님과 저하고 굉장히 친하기 때문에, 친한 사람과의 작업은 힘들 수 있죠. 함께 산전수전 다 겪었고요. 내 연출작에 처음 출연하시는 것도 아니고. 친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라면 제가 연출로서 배우로서 애매한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께 빛나는 정점이 되기 위해 감사하며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웃음)”
박정자가 모드 역을 이번으로 끝내겠다고 공언한 만큼, 두 사람이 함께하는 ‘해롤드와 모드’ 무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연출가로서 윤석화가 이번 ‘해롤드와 모드’에서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 작품의 스토리 자체가 완벽하다는 점을 전제로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해롤드와 모드’가 스토리텔링이 강했다면, 저는 그 행간에 시적 메타포를 좀 더 그려 넣고 싶어요. 무대를 미니멀하게 만든 것도 그런 정서, 즉 누구나 보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거죠.”
혼자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연출의 고통
박정자에게 이번 모드가 일곱 번째 모드인 것처럼, 공교롭게도 윤석화에게도 이번 ‘해롤드와 모드’는 일곱 번째 연출 작품이란 의미가 있다.
“어떤 면으론 연기보다 연출이 낫지 않나?(웃음) 제가 원하는 모험심이란 게 창의력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내가 또 이상한 거 주문하지?’ 하고 자주 물어요. 그러나 예술은 새롭기 때문에 이상한 거죠. 우리에게 답습이란 교육이에요. 그런데 교육도 어떤 면에선 교육을 뛰어넘어 창의로 가야 하죠. 답습은 기본 과정이고 창의와 창조는 그것을 뛰어넘는 건데, 그걸 위해선 모험도 필요하고 새로운 발상이 필요해요. 그런 게 저에게 좀 맞지 않나 싶어요.”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CEO로서, 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녀에게 답습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법론은 체질화된 요소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연출가로서의 어려움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기만 하지 않았다.
“연출은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는 일이죠. 배우도 외로운 작업이지만 뭔가 표현해냄으로써 자기만족, 관객의 박수라는 보상이 있어요. 그러나 연출은 그런 게 없죠.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이 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면 나머지는 기계가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도 그렇고 다 자기 생각이 다르고 성격도 달라요. 그걸 합심해서 최선을 이루게 해야 배가 제대로 가잖아요. 큰 배를 지휘하는 선장도 외로울 텐데(웃음) 망망대해에서 사람과 계속 부딪치며 조율해야 하니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 없어
늘 밝고 활기찬 그녀 특유의 에너지가 넘쳤다. 어떻게 저렇게 에너지가 유지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 고난 없는, 절망 없는 삶은 없죠. 그 화두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거죠.”
참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은 스스로 낮추고 포용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욕심 때문이다.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해롤드가 보는 모드가 그런 사람이죠.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거든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든 800년 전이든 그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철학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그 사람이 누렸던 것은 다 모래알보다 못하게 사라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
윤석화의 요즘 삶은 본인 스스로가 표현하길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생활이다.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남편 뒷바라지도 하고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무척 분주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다운 한결같은 면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에게 쉼을 주려고 노력해요. 마음에 쉼을 주는 방법은 딱 하나더라고요.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는 삶.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사실 교회 다닌다고 모두가 믿음을 갖지는 않죠. 그러나 저는 믿음이 생기니 정말 편안해졌어요. 물론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가는 길은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 그런데 제 삶의 마디마디에 고난이 많았기에, 고난이 저에게 믿음을 준 거죠. 혹여나 이상한 몸부림을 쳤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너무도 감사하게 믿음을 허락해주셔서 자신을 비우고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시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가 자신을 유지하는 해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감사하기에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 그녀는 웃으면서 “내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어요”라고도 말했다.
“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미리 죽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 같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공연을 앞두고 맨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는 연출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윤석화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은 거의 잠을 못 자요. 제 머릿속에 그림이 있지만 공연은 배우 예술이기 때문에 구상한 게 얼마나 나와줄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죠. 가끔 공연한다는 게 도박 같다는 생각을 해요. 엄청난 모험심이 필요하니. 내가 생각했던 그림만큼 나오고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 살 떨리죠.”
어느새 46년간 연극을 한 그녀가 생각하는 연극의 의미란 ‘좋은 질문을 찾아서 관객들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 각자가 자신의 답을 갖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롤드와 모드’는 어떤 연극일지 물어봤다.
“ ‘해롤드와 모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얘기하는 작품이에요. 모드의 대사 중 아름답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들이 참 많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보시고 극장 문을 나서면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하나, 어떤 사람은 일곱 개, 어떤 사람은 여러 개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여러분 삶을 응원하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운동을 잘해서 국가대표로 올림픽에도 나가고 입상해 메달까지 따온다면 더 바랄 나위 없다. 하지만 국가대표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국민의 0.0001% 이하가 누리는 엘리트스포츠맨이다. 엘리트스포츠맨이 되려면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코치 밑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아야 하기에 돈도 많이 든다. 국가도 태릉선수촌을 만들고 지원도 많이 한다. 누구나 국가대표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일반인은 생활스포츠로 건강을 위해 즐기면 된다. 재능이 있으면 빨리 성장하겠지만 적성에 맞으면 생활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스포츠는 다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획득했다고 또는 위대한 선수를 배출한 나라라고 그 나라의 국민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올림픽의 메달 경쟁에서 상위권에 든 미국이나 중국의 국민들, 세계적인 축구 스타 호날두의 고국인 포르투갈 또는 메시의 조국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민들이 스포츠를 통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국민을 건강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발달한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닐까?
선진국에서는 학교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경험하도록 해 자신에게 맞는 종목을 평생 자기만의 스포츠로 만들게 한다고 한다. 즉 생활스포츠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생 시절부터 야구나 배구, 아이스하키를 취미삼아 하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도 동호인 클럽에서 운동을 계속한다. 격렬한 운동인 축구도 그렇고, 70세가 훌쩍 넘은 분들이 은발을 휘날리며 탁구와 테니스를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다. 어디까지나 생활스포츠이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 즐기면서 한다.
나는 30대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테니스에 입문했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키도 작아 잘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동호인 클럽에서 영원한 현역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테니스로 건강을 다져 울트라마라톤에도 출전하고 헌혈 100회를 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내 건강의 8할은 테니스로부터 왔다고 자부한다.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면 건강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사람과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 그리고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운동장으로 뛰어갈 만큼의 건강한 사람도 아닌 중간 부류의 사람이다. 중간 부류의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찾아 즐겨야 한다.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고 행동도 둔해진다. 이를 더디게 하는 데는 운동만 한 것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산다고 해도 아파서 골골거리며 오래 사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국가도 엘리트스포츠맨을 육성하고 아픈 환자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생활스포츠에도 신경 써야 할 때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생활스포츠가 발전한 나라의 국민들은 쉽게 이겨내리라고 본다.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박경옥 저ㆍ나무옆의자)
대기업 임원으로 일했던 남편을 내조하며 25년간 전업주부로 살아온 저자의 인생2막을 그렸다. 그동안 은퇴자 입장에서 쓰인 책은 많았지만, 그런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책은 퇴직이 비단 당사자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닌 그를 둘러싼 아내, 자녀, 그리고 노부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때문에 저자는 가정을 위해 부부가 함께 경제 공동체로서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퇴직한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부터, 퇴직 이후 아내가 경제의 주체로 움직이는 법, 지혜롭게 살림을 줄여나가는 법 등 현실적인 솔루션을 내놓았다. 저자 부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 퇴직 부부의 풍부한 사례를 덧붙이며 행복한 노후를 위한 실질적인 비법들을 제시한다. 책 말미에는 퇴직 후 재무상태와 자신을 깨닫고 돌아볼 수 있는 프로젝트표, 부부가 함께 쓰는 건강 점검표를 부록으로 제공한다.
◇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저ㆍ위즈덤하우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군인과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거침없이 총살한 102세 할머니의 자백을 그린 소설이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속 여성에 대한 억압과 횡포, 비하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메리 마이퍼 저ㆍ티라미수 더북)
일흔이 된 임상심리학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여성의 노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세월의 도도한 흐름 속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불행한 상황도 그동안의 연륜과 내적 성숙을 발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조언한다.
◇ 전국 책방 여행기 (석류 저ㆍ동아시아)
서점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일을 그만두고 전국 책방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단순히 좋은 책방을 소개하는 가이드 역할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책방지기의 일상과 진솔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태로 보여준다.
◇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김선영 저ㆍ라이킷)
암 환자의 딸이었던 저자는 훗날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어린 시절 떠나보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매일 누군가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하는 상황 속,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어떻게 죽음을 인정하고 견뎌낼 것인지를 모색한다.
다른 사람들은 멋 내기로 선글라스를 쓰는데, 필자는 건강을 위해서 쓴다. 안력이 약해서 눈이 아파 햇빛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경이 익숙지를 않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 전, 눈에 백내장이 와서 안과에 간다는 지인을 따라나섰다가 우연히 눈 검사를 하게 되었다. 백내장인 지인은 수술하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동안 지내던 대로 일상생활을 하면 된단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필자가 '녹내장' 이란다. 체질적으로 눈이 약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녹내장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고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정신이 아뜩해졌다. 함께 간 지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미안해서 정신을 차리려 애쓰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백내장과 녹내장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백내장은 단백질의 노화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눈 속 수정체가 뿌옇게 변해 눈앞이 흐려지는 병이다.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간혹 선천적으로 오기도 하고, 눈 속에 염증이 있거나, 눈을 다쳤거나 하면 젊은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또, 당뇨병이 있거나 흡연, 음주를 하는 생활습관에서도 올 수 있고, 햇빛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외에 안질환의 합병증으로도 올 수 있다. 이런 원인으로 백내장이 오면 시력이 떨어지고 사물이 둘로 겹쳐 보이거나 눈이 부시고 빛이 번져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밝은 곳에서 오히려 더 안 보이는 현상이 생긴다.
백내장은 수술하면 말끔히 낫는 병이다. 수정체가 완전히 하얗게 덮이면 비로소 수술할 수 있다. 수술은 입원할 필요도 없고 간단하다. 그러므로 통원수술을 하면 된다. 이때 병원을 잘 선택해야 한다. 수술을 하고 나면, 안경을 착용해야 한다. 그러나 수술 후에 오히려 더 잘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다. 큰 문제가 없고 깔끔하다. 그러나 녹내장은 문제가 좀 다르다.
녹내장은 안압이 높아질 때 시신경이 눌리거나 혈액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압이 높아지면서 진행되는, 시신경 손상으로 인해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병이다. 약물로 진행하다가 안압이 조절되지 않으면 레이저로, 그것도 듣지 않으면 수술을 하기도 하는데, 녹내장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시각은 약물이나 수술로도 회복할 수가 없다. 시신경이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급성 녹내장은 시야가 좁아지는 걸 느낄 수 있지만, 만성 녹내장은 증상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말기가 되어서나 알 수 있다. 시야가 손상될 때는 주변 시야의 손상이 먼저 오고, 중심 시력은 실명 상태에 이르기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기에는 거의 자각 증상이 없다가 말기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정기적으로 안과 검사를 해야 한다. 필자도 지인을 따라가 검사를 해보지 않았다면 녹내장이 온 지도 몰랐을 것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
눈은 원래 촉촉하고 부드러워야 정상이다. 그런데 녹내장이 오면, 눈이 건조해져서 뻑뻑하고 눈알이 빠질 듯한 통증을 느낄 때도 있다. 눈앞이 뿌옇게 보이고 눈이 침침하다. 가끔 어지럽고 메스껍고 두통도 온다. 그러다 보면 피로를 쉽게 느낀다.
녹내장이 아니더라도 눈이 건조해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도 생기고, 비만, 당뇨 환자에게도 생긴다. 또, 스마트 폰을 오랜 시간 사용하거나, TV를 긴 시간 시청하면 눈이 건조해진다. 눈의 건조를 막으려면 인공눈물을 사용해보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때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진료는 의사에게. 먼저 의사에게 물어보고 인공눈물을 사용해야 한다.
시신경이 손상되는 진행을 늦추려면 안압을 낮춰야 하는데, 그러려면 카페인, 알코올, 담배 등을 삼가야 한다. 음주와 흡연은 안압을 높이는 주범이다. 그 외에도 맵고 짠 음식을 먹는 것은 혈압, 안압이 높아지는 원인이 된다. 이때 균형 잡힌 식단으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고 음식 간을 싱겁게 먹으면 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운동도 가벼운 산책 정도는 눈의 압력 조절에 효과적이지만, 너무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안압을 높일 수 있으니 삼가야 한다. 특히 머리로 피가 몰리는 운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잠을 잘 때도 자는 습관에 따라 안압이 높아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평소 옆으로 누워 자거나 엎드려서 자는 습관이 있다면, 오늘부터 당장 바른 자세로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자는 것이 좋다. 좋지 못한 자세는 눈에 무리가 가서 안압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내장보다 녹내장이 훨씬 무겁고 어려운 병이다. 지인을 따라 안과에 갔다가 이 무겁고도 무서운 녹내장이란 걸 처음 알게 되고, 의사의 권유로 시력은 아직 괜찮은데도 일반 안경과 선글라스를 쓰게 되었다. 눈이 아파서 쓰게 된 것이다. 무려 안경 6개를 장만했다. 집에서 책 볼 때 쓸 돋보기 1개, 밖에서는 렌즈에 색이 들어가 눈을 보호해주고 실내에서는 맑은 렌즈로 공부도 할 수 있게 쓸 수 있는 변색 렌즈 안경 1개, 교육받을 때 사용할 다초점렌즈 안경 1개, TV 볼 때 쓸 다초점렌즈 안경 1개, 그리고 도수용 선글라스 2개 이렇게 모두 6개다. 안경을 쓰면 눈은 편안하지만, 쓴지 벌써 2년이 다 되었는데도 쓰고 있으면 아직도 영 답답하고 거추장스럽다.
겨울이나 이른 봄에는 변색 렌즈 안경만 써도 햇빛차단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점점 햇빛이 강해지는 계절이 되면 변색 렌즈는 강렬한 태양 아래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때부터는 도수용 선글라스를 쓴다. 그래서 어떤 안경을 쓰고 나가야 할지, 외출하는 날이면 베란다에서 날씨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외출하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화창하고 참 좋은 날씨다. 그래서 기분 좋게 외출준비를 하고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는데 좀 전에 베란다에서 본 화창한 날씨가 금방 흐려져 잿빛이다. ‘우산도 안 가지고 내려왔는데 어떡하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필자는 화들짝 놀랐다. 아 참! 기가 막힌다. 정말 어이가 없다. 선글라스를 써서 날씨가 흐려 보였던 것이다. 이거 혹시 치매 아냐? 그때부터는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하루는 아들과 함께 이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운전을 하고 무거운 식품들은 아들이 맡아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은 내가 운전을 했다. 차를 몰고 주차장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어두컴컴하다. 이마트가 얼마 전에 주차장을 증축하는 공사를 해서 주차장 구조가 전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전기시설을 어떻게 한 거야? 차들이 접촉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시설을 어둡게 해 놓은 거야?”
그런데, 아들이 야릇하게 배시시 웃는다.
“왜 웃어?”
엄마가 묻는데도 아들은 계속 웃기만 한다. 잠시 후, 아차! 그때야 생각이 났다.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운전을 하고 왔지 않은가!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아! 나 이러다 치매 환자가 되면 어쩌지?'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면서부터는 실수 만발이다. 앞으로 점점 실수가 늘어갈 테지만 그래도 눈을 보호하려면 이런 해프닝쯤은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며 살아야겠지. 그래도 오늘, 저 하늘, 찬란한 태양과 아름다운 달과 별, 내가 좋아하는 일출과 석양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아름다운 강산, 예쁜 꽃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나의 사람들, 나의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만끽하련다.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또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탈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전 우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것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다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잰 듯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禮)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참 사랑했죠. 남편은 절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그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때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그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주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그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쟤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못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것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우 씨는 쌀도 씻을 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밤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할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우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못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때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왜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후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선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옷 입으면 안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다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제 몸에 안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덜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세월이 흐르면 입맛이 바뀐다. 달거나 짭조름하면 대충 맛있어하고 시거나 쓰면 덮어놓고 싫어하다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구미가 좀 더 풍부해지고 복잡해진다.
맥주나 커피처럼 쓴 물이 시원하거나 향기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맵고 쓰기만 하던 양파 같은 채소가 전에 없이 달콤해지기도 한다. 혀로만 맛을 느끼다가 점점 더 머리와 가슴으로 즐기게 되는 것이다.
글 김유준 본지 프리랜서 기자
그처럼 너그러워지고서야 비로소 맛있는 음식의 대표선수로, 나는 냉면을 꼽는다. 달고 시고 짜고 쓴, 사람이 느끼는 네 가지 맛에만 반응하는 원초적 입맛이라면 메밀 면 맛을 어떻게 느낄까. 쫄깃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툭툭 끊기는 면에서 여물지 않은 입맛으로 특유의 향기를 잡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육수도 마찬가지. 요즘 사람들 하는 말로 ‘초딩 입맛’이라면 심심하고 밍밍한 것이 맹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냉면 육수의 참맛을 느끼려면 속에서 다소곳한 감칠맛을 지긋이 발견해낼 끈기가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메밀은 면을 만드는 데 그다지 적합한 재료가 아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메밀은 잘 뭉쳐지지 않아 반죽을 만들기 어렵거니와 어렵사리 만들어 면을 뽑는다 해도 쫄깃하지 않다. 둘째, 메밀은 금속에 약하다. 셋째, 메밀은 열에도 약하다.
음식의 대표 선수, 원초적 입맛
자, 여기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를 만들었더니 향기도 좋고 맛도 좋고 다 좋다. 다만 질기지가 않다. 씹기도 전에 툭툭 끊기기 일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은 메밀의 이런 단점 때문에 전분을 섞어 면을 만든다. 메밀이라는 곡식만으로는 반죽 만들기가 힘든 탓에 전분의 힘을 빌려와 가락을 만든다. 이 때문에 그 비율을 놓고 미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떤 순수주의자는 오로지 메밀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일본 쪽에서 ‘주와리(10할)’라고 부르는 면이 바로 순수 메밀 면이다.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메밀만으로도 찰기가 제법 살아 있는 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의견도 만만찮다. 메밀 9, 밀가루 1의 비율이 가장 알맞다는 학설도 있고 8:2가 정답이라는 주장도 있다. 메밀 10에 밀가루 2라는 다소 난해한 비율이 최고라는 일본 장인도 있다. 어느 유명한 춘천 막국수 집은 메밀 6, 밀가루 4 정도는 돼야 쫄깃쫄깃하다고 고집한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메밀국수는 질기지 않다. 메밀에 글루텐 성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물 속 메밀 가락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고 치자. 그때 면발들이 끊어지지 않고 찌이익 딸려 올라온다면,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면서 세차게 씹었는데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금 당신이 메밀향기 대신 사(詐)자 향기를 풍기는 면발계의 ‘타짜’를 상대하고 있다는 증거다. 맛있는 것을 맛보겠다는 소박한 식도락의 꿈이 몇 젓가락 지나지 않아 거덜 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함흥식 냉면은 쫄깃쫄깃함을 넘어 질기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함흥식 냉면의 면은 메밀 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감자전분으로 면을 만들고, 때문에 함흥 지방에서는 냉면이라 부르지 않고 ‘농마국수’ 또는 그냥 ‘국수’라고 부른다(농마는 녹말의 그쪽 말이다).
자, 또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를 만들었더니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금속에 약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금속을 멀리하면 된다. 때문에 메밀 면을 가위로 썰어대는 짓 따위는 삼가야 한다. 심하게 예민한 어느 전문가는 냉면을 먹을 때는 나무젓가락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좀 지나친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메밀 면에 금속을 너무 들이밀면 메밀 특유의 향기가 다 날아가 버린다.
자, 마지막으로 여기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메밀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로 만들었더니 향기도 좋고 맛도 좋고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열에 약하다. 를 쓴 이상처럼 훌륭한 문인들이 폐병을 기본으로 앓은 것처럼, 이 섬세한 면발은 조금만 뜨거워져도 그만 원기를 잃고 풀어지고 만다. 씹기도 전에 목구멍을 타고 후루룩 넘어갈 만큼 매가리가 없다. 이 유약한 샌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뜨거운 게 싫다면 찬 걸 뒤집어써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찬물에 집어넣고 강하게 키웠다. ‘뜨거운 게 싫다면 찬 걸 뒤집어써라.’ 이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결과, 냉면과 막국수가 생겨났다.
일본 사람들은 장국이나 소스에 찍어 먹는 쪽을 선택했다. ‘뜨거운 게 싫다면 안 주면 되지.’ 이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결과, 소바라는 면 요리가 탄생했다. 소바라는 일본어 단어는 자체로 메밀을 뜻하지만 메밀로 만든 면 요리를 뜻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냉면을 먹어본 것은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은 여름방학 때였다. 피난 시절부터 밀면이 대세로 자리 잡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탓이다. 그때까지 내게 냉면은 그저 차갑고 심심한 국물에 특징 없는 면을 말아놓은 한심한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생애 두 번째의 서울 나들이에서 어머니는 그 맛없는 음식을 먹자고 고집을 부리셨다. ‘하고 많은 음식들을 젖혀두고 하필…’ 싶었지만, 어르신께서 잡숫고 싶으시다니 어쩔 도리 없었다. 그렇게 먹게 된 냉면 맛에 참 많이 놀랐다.
아랫니 윗니 가릴 것 없이 갖다 대기만 해도 툭툭 끊기더니 고소한 향기까지 풍겨난다. 육수는 또 어떤가. 시원함과 진함이라는 이율배반의 두 요소가 잘도 어우러져 숫제 완벽하다. 면 음식의 궁극, 그때 장충동에서 맛본 냉면은 더할 나위 없는 면 중의 면이었다.
허겁지겁 젓가락질 끝에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봤다. 빙그레 웃으시는 표정이 꼭 ‘어떻노? 맛있제?’ 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니도 인자 냉면 맛 알 때가 됐다’ 하셨는지도 모른다.
무더위가 찾아오고 있다. 입맛이 떨어질 때마다 근처 단골 냉면집을 찾는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당신께서 맛을 가르쳐준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그럭저럭 잘 피하고 있다고, 살아 계셨으면 전화라도 드렸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쉽다.
>>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1970년대를 풍미했던 ‘쎄시봉’ 가수, 라디오 장기 DJ, 예능 프로그램에 감초 게스트, 그리고 독보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화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영남. 올해 칠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영남과의 인터뷰는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사고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 거침없음으로 인해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대중의 호불호 속에서도 그가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짧고 굵다. 무뚝뚝하고 툭툭 던지는 듯한 조영남의 화법은 마치 묵직한 못을 박은 것처럼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답을 던진다.
“재밌게 사는 방법에는 낚시, 바둑, 골프, 등산…. 그중 하나 골라서 하면 되는데 돈 안 드는 걸로는 그림 같은 게 있지. 딴 것들은 돈이 드니까 추천하기가 거북하네. 그런데 낚시하고 똑같아. 뭐든 낚싯줄 드리우듯이 시작하면 하게 되는 거지. 일단 경험을 해봐.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그림 시작할 때는 아마추어로 시작했지. 그런데 이걸 계속 3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프로 대접을 받더라고. 저절로 프로가 됐어.”
인생 후반전에 들어와 화가로서 이름을 세운 조영남.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길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의 대답이다.
뿔테 안경 너머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늙지 않는 청춘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 진솔했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이 좋다 나쁘다의 평가 기준이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도 조영남다웠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는데 남이 뭘 보고 느끼겠어. 그런 건 모르고. 낚시나 바둑 같은 것보다 그림 그릴 때가 단순히 좋을 뿐이야. 그래서 하는 거지.”
그러나 대화를 더 진행하니 단순히 좋아서는 아니었다. 조영남이 화투를 통해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미술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내가 노래 잘하는 사람과 똑같이 하면 금방 인정받잖아? 그런데 내가 피카소와 똑같이 그리면 미술계에서 실력이 없다는 굴욕적인 평가를 받아. 음악과 미술은 그런 차이지.
그런데 화투를 아무도 안 그렸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서 처음 화투 그림을 시작한 거지. 딱지도 그린 사람이 없었어. 딱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추억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2년 전부터 그리고 있어. 미술은 100% 자유야. 화투를 그려도 되고 딱지를 그려도 되고 하다가 말아도 되고. 그런데 음악은 까다롭잖아. 음정, 박자를 맞춰야 하잖아. 내게 음악과 미술은 정반대야.”
그는 치열하고 골똘하게 연구해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이라며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모순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닿는 그림을 담아내고 있다.
징징 짜면 죄(罪)라는 생각
우리는 동창들을 만나면 “그 친구보다는 내가 괜찮았는데 잘 안 됐어” 식의 추억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된다. 조영남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말 안 어울리는 질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열등감 있게 보여?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얼마나 무감각한 남자냐 하면 어렸을 때 가난했잖아? 가난도 실감을 못 하는 정도였어. 어렸을 적에 가난했다고 한숨 푹푹 쉬는 친구들 있잖아. 난 학교 가는데 하늘이 노랄 때가 있었거든? 그럴 때는 ‘아! 내가 굶었구나’ 생각하고 친구들 접선해서 얻어먹으면서 견디고 그랬지. ‘가난하다’, ‘불행하다’, 그런 느낌을 안 가졌었어. 그러려니 싶었던 거지.”
조영남은 자신의 낙천적인 면모가 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부모님 양쪽으로부터 받은 긍정의 피다. 혹시 그런 천성이 그가 젊게 사는 비법이 아닐까. 그는 세대 갈등을 느껴본 적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이 나이 돼서 늘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보다 몸이 더 불편하잖아. 그러면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하지만 한탄하지는 않아.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태반이잖아. 내가 징징 짜면 안 되지. 그러면 죄 받는다고 생각해.”
그는 현재 딸과 함께 사는 중이다. 딸의 나이도 20대 중반. 딸의 결혼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다.
“그건 자기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나는 딸이 뭘 하든지 찬성하고, 간섭 안 해.”
딸과 함께 수다를 떠는 거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도 외면당하는 요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조언을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쳤다.
“자식 문제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할 주제가 아니야. 두 번 이혼했는걸. 해선 안 되는 거로 생각해. 현대인들이 문제를 푸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냐. 안 돼서 안 하는 거지.”
“주된 관심사는 이성”
‘조영남’이라고 하면 스캔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지 물어봤다. 그러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가장 빠르고 굳건한 목소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내 제일 주된 관심사지.”
조영남 하면 다들 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활력이 나이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반응에는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왜 철딱서니 없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한테 데려와 봐. 누가 철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해줄게. 나처럼 철딱서니 없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웃음)
솔직히 생각해보자. 요즘 사람들은 인생관을 세워도 그 인생관대로 삶을 잘 운영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조영남에게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관대로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돈 쓰기를 싫어하니까.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데 되겠어? 그게 큰 원인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잔머리를 너무 써. 너나 할 것 없이. 그게 걸림돌이야. 그러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하지. 그런데 내가 그걸 솔직하게 말하니까 철딱서니 없다 하지. 진실을 얘기하니까. 진실은 항상 거북살스럽거든.”
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의 표현에 대한 수위 조절 또한 참 어려운 일이다. 그 물음에 그 또한 선선히 어렵다고 동의했다.
자신에 대한 반감에 투덜대지 않는 이유
조영남이 자주 가는 본인만의 아지트가 있을까? 그는 그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술도 줄였다고 한다.
“난 독주가 좋아. 그런데 나이가 드니 술도 안 들어가. 맛도 없고, 흥도 안 나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술이 들어갈 때 마음껏 먹어둬라, 나중에 후회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 클럽도 한 번 가봤는데, 정말 재미가 없더라고. 젊었을 때 갔어야지.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조영남의 삶의 궤적을 보면 다른 것들은 열정이 보이는 게 많은데 유독 돈을 버는 일에는 크게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잖아. 그래서 내 이름으로 해서 망한 적도 없고. 그런 걸 하면 죄 짓는 거라 생각해. 나는 신이 노래만 불러도 먹고 살게끔 해줬는데, 다른 걸로 먹고 살려고 하는 건 신의 뜻에 어긋나고, 나 자신에게도 어긋난다고 생각해.”
확고한 신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다.
“꼼꼼하다기보다는 와이즈(Wise)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거 같아. 나는 현명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고 나름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그는 유명인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볼 때가 가장 섭섭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유명하니까 나에 대한 몰이해도 나오는 거로 생각해. 그래서 나에 대한 반감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아. 사람들이 날 모르는 척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상 사람 전부가 다 날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오늘 같은 인터뷰를 통해 조영남이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겠지. 해서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거고.”
“없어지는 걸 생각 중…생텍쥐페리처럼”
그는 영화 ‘버킷리스트’를 좋아해서 네 번이나 봤다고 말했다.
“보면서, 난 어떤 버킷리스트가 있을까…. 한 가지가 딱 생각났어. 내가 손목시계를 좋아해. 그래서 제네바에 가서 손목시계를 3박 4일 보고 오는 걸로 버킷리스트를 정했지. 그런데 그걸 하고 나니까 너무 싱거워. 너무 싱거워서 뭐 다른 건 없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더라고.”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고 싶은 걸 다한 상태였다는 걸 깨달은, 억수로 운이 좋은 남자, 조영남의 정체다.
“없어지는 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몰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잖아. 그게 늘 부러워서 흉내 내려고 했는데 비행기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귀찮아. 그러니 버킷리스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최근 그의 화투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 같아 인터뷰 막바지에 넌지시 가격이 많이 올라갔느냐고 물어봤다.
“굉장히 비싸졌지.”
그리고 바로 무심하게 툭 던진다.
“아, 그런데 그게 뭐 팔려야지.”
쎄시봉 큰형님으로 알려진 조영남은 이전까지 쎄시봉 콘서트와 별개로 개인 활동을 했지만 올해는 쎄시봉 전국투어 콘서트에 합류한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영화 쎄시봉 OST에 등장한 신곡 백일몽 라이브 버전을 최초로 공개 할 예정이다.
다음은 2015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 상반기 일정이다.
4월 4일 일산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4월 11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4월 12일 전주 전주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4월 18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hall D
5월 9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
5월 23일 인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친정엄마께서 이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친정엄마 모시고 구례산동 산수유마을에 갔던 날, 친정엄마께서 너럭바위에 앉아 백일장 대회 나온 소녀처럼 쓰셨던 그 글이 궁금하여 읽어보고 싶다며 졸라댔더니 이렇게 보내오신 것입니다.
친정엄마께서는 산수유 노란 꽃너울 속에서 느끼신 봄의 감흥을 잔잔하고 따뜻한 글로 풀어내셨습니다. 풋풋한 봄편지 내용이 마냥 좋아 당신의 고운 글을 이렇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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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순의 날씨는 변덕쟁이 할멈 같다.
아침저녁엔 영하의 날씨로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려 눈꽃이 만발하고, 남녘엔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꽃이 손짓하니 사람들이 갈팡질팡한다.
썰매 장으로, 꽃 마중으로 신나게 달려가는 젊은이들이 부럽다.
여기도저기도 끼지 못하는 방콕대학생이던 난, 심기가 따분하던 참에 서울에서 셋째 딸이 아침 일찍 내려와 봄 마중을 가자고 했다.
딸 내외는 어미가 지난 가을 다리와 허리를 수술하고 겨우내 방에서만 지낸 것이 안쓰러워 시간을 내었다며 사양하는 나를 부추겨 데리고 나섰다.
구례 산동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1시간 좀 넘게 걸렸다.
일찍 나섰기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조용했다.
햇살이 퍼지지 않아서 꽃들이 잠을 덜 깬 듯 이슬에 젖어 있었다.
다음주말에 산동면에선 산수유 꽃 축제를 연다고 길 아래편엔 뾰족 천막들이 즐비했다.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고 꽃도 지금이 한창 만개라니 잘 맞춰 온 것 같았다.
반곡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냇가로 내려가는 꽃담 길을 걸었다.
반곡 마을을 끼고 흐르는 서시천 가운데는 100m 정도 되는 넓고 긴 반석이 아래쪽 위쪽에 널려있었다.
나는 반석을 보자 반하여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건너 너럭바위 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야아, 참 좋다!" 소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기분이 좋아 감탄을 하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에 마음 놓고 소리를 질렀다.
연노란 꽃구름을 병풍처럼 둘러놓고 바위 양 옆으로 졸졸졸, 쏴아쏴아, 철철철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의 연주를 들으니 자연의 풍광에 도취되어 한동안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잠시나마 속세를 떠나 신선으로 변해 있노라니 창조주의 솜씨와 사랑에 찬 배려에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철따라 아름다운 모습을 주시어 세상사에 찌들고 지친 상한 갈대 같은 영혼들을 이렇게 위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래쪽 반석을 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진작가들, 동호인들이 무리지어 온 분들의 알록달록한 의상들이 노란 산수유 꽃과 어우러져 더 고운 풍경을 이루었다.
사진작가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가려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나는 ‘내 눈과 가슴에 담아가야지!' 메모를 하느라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건너편 언덕에서 딸이 “엄마 너무 멋있어요.”하며 몇 컷을 찍어대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일어나서 맑은 물에 손을 대고 싶어 비탈진 바위를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물에 빠질 뻔했으니 치신머리없는 노인네를 어찌할꼬!
놀란 사위는 신발을 벗어들고 건너와 부축하여 손을 꼭 잡고 하위마을 꽃길을 다니며 감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들이 밀려와 주차장을 채웠다. 전국에서 온 상춘객들은 연인들, 아기들과 온 가족들, 부모를 모시고 온 분들이 꽃 속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노란 산수유 꽃만큼이나 예뻤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딸도 이리저리 다니며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산수유꽃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마을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6.25전쟁 때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마을이 수난을 당하여 빈 집이 많아지자 빈터 여기저기에 심은 것이 지금은 군락을 이루어, 산수유 하면 구례 산동이 으뜸이란다.
상위마을로 접어들면 집집마다 울타리나 언덕배기에 오래된 나무가 많다.
꽃송이를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꽃잎 5개가 돋보기를 써야 보일정도로 작다.
밤알만한 꽃대 하나에 여러 꽃송이가 달려 있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꽃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산수유 찬양론을 나대로 상상해 보았다.
산수유 꽃은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봄의 전령사다. 이는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것이요.
산수유나무는 언덕이나 평지의 척박함도 가리지 않고 무리지어 살면서도 다투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우며 종족을 보존해가는 배려심 많고 사랑 많은 나무다.
낱낱이 보면 보잘 것 없는 꽃이지만 한 꼬투리에 몇 송이가 모여 있는 것은 협동심을 나타냄이라.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고상한 자태는 요란스레 뽐내고 자랑하고자 날뛰는 요즘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향을 풍기며 배려하는 다정다감한 품성에 반해 벌들이 찾아오지 않는가.
작은 꽃 한 송이에 많은 열매를 맺었다가도 서로 튼실한 송이에 양보하는 미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날 모든 것을 다 자기가 가지고 우쭐대고 싶어 안달하는 세상에 심성 고운 어머니처럼 자식을 달래며 타이르는 듯 꽃들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긴긴 겨우내 방콕대학생 노릇에 지친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노란 산수유 꽃들에 반하고, 서시천 너럭바위에 반하며, 물소리에 반하고, 노고단자락의 황홀한 풍광에 반했으니 소녀로 착각할 만하다.
거기에 산수유 꽃들이 주는 교훈을 가슴에 담뿍 담고 돌아왔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이렇게 즐거운 봄맞이를 하게 해 준 막내딸과 사위가 정말 고마웠다.
◆글쓴이 (79세)
전북 전주시 완산구 마당재길 14-26 (남노송동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