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상조회사에 입사해서 내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장례 절차도 염습 기술도 아닌 ‘노자 멘트’였다. 염을 다 하고 관에 모신 직후 유족들을 모시고 염습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마지막 인사를 시킨다. 그러면서 시신 위에 저승 가시는 길에 마지막 용돈을 드리라고 ‘멘트’를 친다. 멘트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치느냐에 따라 그날 노잣돈 액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자 멘트는 매우 중요했다. 그 시절 노자 멘트는 대부분 보조팀장들이 했는데, 노잣돈이 적게 나오는 날에는 고참에게 욕을 들어먹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도 염습 장면을 참관하면서 아버지의 관 안에 노잣돈을 넣어드렸다. 마지막 ‘천판’(관 뚜껑)을 덮고 결관하여 다시 안치실에 모실 때까지도 나는 장례지도사들이 노잣돈 빼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마지막 천판 닫는 순간 유족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드리라고 하는데 그 순간 빼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잣돈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간은 영혼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생사관을 바탕으로 영혼이 사는 세계에서도 재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죽은 사람의 몸이나 무덤 속에 재물을 넣어주는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문화는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순장(殉葬)이라는 형태까지 생겨났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런 풍습은 점점 사라졌다. 이후 국가별·종교별로 다른 생사관이 생겨났고, 그에 따른 죽음 의례도 발전해왔다.
우리 전통 장례에서는 노잣돈 놓는 절차를 찾아볼 수 없다. 비슷한 절차로는 습(襲)1)의 단계에서 ‘반함’(飯含) 의례가 있다. 반함은 시신의 입에 쌀과 엽전 혹은 구슬을 물려 입안을 채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님에 대한 예(禮)로 행하는 것인데, ‘예서’에는 ‘반함을 하는 이유는 차마 입이 비어 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맛있고 깨끗한 물건을 채우는 것’이라 나와 있다. 저승 가서 쓰라고 드리는 노잣돈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내가 염습을 할 때는 주로 불교용품점에서 판매하는 지전(紙錢, 가짜 돈)을 준비해서 유족에게 미리 나누어드리고 노잣돈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노잣돈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 5만 원 지폐를 가득 넣어드린다고 해도 유족들 마음에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지전이라 하더라도 가족들 마음에 공경과 사랑이 가득하다면 10억 원, 100억 원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저승으로 보내드리자.
1) 유교 상례 절차의 두 번째 단계로 고인을 목욕시키고 습의(襲衣)를 입히는 절차다.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 “상조업법 제정, 보건복지부로 이관해 소비자와 상조업 상생 추구해야”
새정치민주연합 보건복지위원장인 김춘진 의원은 이러한 부실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상조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김 의원은 상조법을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김 의원은 고령친화적 산업으로의 상조업 육성을 위해 보건복지부를 소관 부처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의원은 “보건복지부가 생로병사 관련 업무를 주관하는 부처이며, 장사등에 관한 법률 등 연관 법률이 있고 고령화정책을 주관하는 부처로서 대표적인 고령친화적인 상조업을 담당하는 소관 부처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제도적으로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조업이지만 그 규모는 이미 산업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조업이 붕괴되지 않으면서 지금 소비자들이 겪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화가 시급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 의원이 강조하는 상조업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건복지부장관으로 하여금 상조상품의 품질 개선과 소비자 보호를 위해 상조상품의 표준을 제정·보급하도록 하고, 둘째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소비자를 보호하고 우수한 품질의 상조상품을 제공하는 상조회사를 우수상조회사로 인증할 수 있도록 하며, 셋째 상조회사가 사업의 전부를 양도하거나 상조회사에 대해 합병 또는 분할이 있는 경우 사업의 전부를 양수한 회사, 합병 후 존속하는 회사, 합병에 의해 설립된 회사, 또는 분할에 의해 사업의 전부를 승계한 회사는 원칙적으로 그 상조회사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해 중간에 상조회사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변경되더라도 소비자가 납부한 선수금 전체와 계약내용 모두에 대해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넷째 상조회사가 소비자피해보상보험계약 등에 따라 보전해야 할 금액은 법령으로 정한 선수금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자를 더한 금액으로 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서비스콜센터 설치를 요구했다. 그 이유는 상조가입자 가운데는 고연령자가 많아 인터넷 등을 통해 상품가입내역 등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7대 국회 때는 2007년 안명옥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18대 국회 때는 2008년 권경석 당시 한나라당 의원, 2009년 김춘진 민주통합당 의원이 각각 상조업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입법화에는 실패했다.
# 그래도, 건전한 장례문화 성장에 상조회사 역할 적지않았다
상조서비스는 발인 후 매장, 납골당 안치까지 장례절차를 알려주는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례용품이나 장례비용을 미리 준비해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 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른 상조서비스는 소비자들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소비자들을 보호하고 상조회사의 투명하고 건전한 경영을 유도하기 위해 조속히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상조업계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조회사를 통해 우리나라 장례문화가 개선된 것 또한 소비자는 인정하고 있다.
상조회사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전문 장례식장이나 대학병원 장례식장 등이 가리지 않고 받아 왔던 ‘노잣돈’ 문화를 없앤 것은 분명 상조회사의 긍정적 역할로 평가된다.
음침한 음성거래가 이뤄졌던 장례문화를 양지로 이끈 것 또한 상조회사의 역할이 컸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현재는 상조업계가 힘들고 어려워도 부실한 상조회사가 퇴출되고 제도권 내 상조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다면 1~2년 사이 제2도약의 길에 설 수 있을 것이다.
“2002년에 90억 원으로 프리드라이프(구 현대종합상조)를 울산에 창업한 때부터 대한민국 상조업계에서는 저를 이단아이자 미친 놈으로 취급했어요.”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의 기질은 소문대로였다. 특유의 힘 있는 말투에 담긴 내용에는 거침이 없었고 가리는 것도 없었다. 그는 프리드라이프가 다른 상조회사들의 견제 속에서 시작됐다는 걸 분명히 밝히며 그런 고난을 정면돌파하여 선두에 올라섰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상조업계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프리드라이프의 거친 개척기를 박 회장의 ‘직설’로 들어본다.
“상조회사를 시작하면서 저는 세 가지 문제를 없애겠다고 다짐했어요. 하나는 영남 지역에 머물러 있던 지역 상조회사의 한계, 어둡거나 슬프거나 혐오스럽게 보는 장례 문화에 대한 시선, 부르는 게 값인 횡포 문화.”
영업사원 수당 보장, 불입금 납부기간 확대… 혁신의 시작
그래서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은 우선 당시 상조업계가 관행으로 갖고 있던 ‘노잣돈 문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영업사원을 소모품처럼 써버리는 관행도 뜯어 고쳤다. 고치는 것부터 시작된 회사인 셈이다.
“내가 보험 회사를 다녀 봤으니 알잖아요. 영업사원이 연고판매를 하고 나서 가치가 떨어진다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잔여수당을 안 줘요. 보험회사의 잘못된 관행들만을 상조회사가 흉내 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난 모든 영업사원들이 우리 회사에 와서 한 건을 팔든 열 건을 팔든 회사가 약속한 수당은 끝까지 수령하게 했어요. 단, 안 좋은 행위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
박 회장은 또한 상조업계의 관행이던 3년~5년이라는 불입금 납부 기간을 10년으로 늘렸다. 그 덕에 고객은 불입금 액수를 반 이상 싸게 낼 수 있게 됐다. 또한 서비스 개념에도 집중하여 초기 상조회사들에 소속된 염사들이 염습만 하며 빠지던 것을 장례지도사로 전환시켜 장례의 처음과 끝을 책임지게끔 만들었다.
상조업계 최초의 홈쇼핑 광고, 터지다
박 회장은 대한민국 장례 문화를 바꾸려면 서울과 경기도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문을 연 3년 후인 2005년도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서울을 변화시켜야겠는데, 이젠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였어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TV CF를 하자. 그래서 상조업계 최초로 과감하게 CF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제가 스스로 모델이 됐어요.” 당시 프리드라이프의 CF에서 박 회장이 했던 멘트는 “슬픔을 이용해 장사하지 않겠습니다”였다. CF는 성공적이었다. 박 회장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 마음 속에는 핵가족화에 따라 장례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는 걸 꿰뚫어봤다. 그래서 박 회장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TV CF 직후 6개월만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홈쇼핑’을 파고들었다.
“물론 홈쇼핑 측에서는 상조회사 광고라니 자기네 이미지 망친다고 절대 안 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고문으로 계시던 김영일 전 현대백화점 회장님을 통해 계속 접근했어요. 마침내 딱 한 번 해보자고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방송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박 회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조회사들이 자신을 죽일 놈 취급했다고 회고했다. 회사가 망한다는 유언비어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틈부턴가 상조업계가 프리드라이프의 마케팅 전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업계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준비 기간까지 치면 우리 회사가 올해로 13년 차예요. 지난 3년 연속 흑자였고, 상조업계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중요치 않아요. 가장 자랑스러운 건 고객만족도 1위라는 숫자입니다. 대한민국 장례 문화를 바꾸려고 목숨을 걸고 달려온 보람을 느낍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이들을 위한 환경 만든다
“손해보험회사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실패한거나 다름없어요. 그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뛰어들었으니 안되는 거예요. 이 일은 정말 목숨을 걸고, 특별한 사명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죽음 문화를 바로 잡고 세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만 해야 합니다.”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없다고 뛰어들지 않는 일,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일. 박 회장은 그 어려운 일에 스스로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1000원짜리 지갑, 전집, 레저용품, 카메라, 보험까지…. 35년간 국내 세일즈업계에서 그는 전설로 통했다. 최소한 영업에 있어서 그는 불가능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영업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바쁘게 산 자신의 삶에 회의가 느껴졌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 고민하던 그가 선택한 탈출구는 ‘캐나다 이민’. 출국을 준비하던 그는 이민 한달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낸 친구의 모친상 소식을 들었다. 이역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에 찾은 병원 장례식장은 내부 전체가 지하실 쾌쾌한 냄새로 가득한, 음산함 그 자체였다.
“꼭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나?”
집으로 돌아온 뒤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캐나다 이민을 포기하고 가족들에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소개했다.
“한번 사는 인생, 이별도 아름답게 하는 상조, 장례 사업을 시작하겠다.”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상조서비스에 촉이 섰다. 이렇게 시작했던 상조시장에서 그는 이제 슬픔을 이용해 장사하는 회사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정직과 함께하겠다고 역설했다.
“소비자들이 프리프라이드를 신뢰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믿음에 어긋나면 안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일본보다 앞선 장례문화를,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장례 문화를 바꾸는 게 제 목표입니다. 현대종합상조에서 프리프라이드로 이름을 바꾼 것도 한국만이 아닌 글로벌을 지향하기 위해서예요. 그건 제 꿈이자 프리드라이프 모든 직원들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