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을 것인데, 너희들도 이런 일을 즐거이 하지 않느냐?”
조선 후기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천리 먼 길 유배지로 떠나 살면서 지아비로서의 애틋함과 가족을 향해 노심초사하던 내면을 담은 편지는 지금 읽어도 절절하다. 당시 유배지 강진에서 남양주 마재마을까지 한없이 느릿한 방식으로 아들을 향한 끊임없는 부성을 전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스마트폰, SNS 등으로 빠르게 마음이 전송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방법이었을 텐데.
경기도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후에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다산을 생각하면 다산초당이 있는 유배지 전라도 강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의 고장으로 알려진 남양주는 팔당 호숫가에 위치한 다산의 생가와 다산유적지가 있어서 인문 여행지로 의미 있다. 그리고 주변에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부드럽게 합쳐져 만나는 곳, 두물머리의 수려한 풍광이 곧잘 그곳으로 발걸음을 이끈다.
결국은 만나는 인연, 두물머리
새벽길은 언제나 상쾌하다. 남양주로 향하는 길에 들러보는 두물머리의 새벽.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 남한강에서 합류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중간에 여러 경로의 길을 돌고 돌지만 결국은 하나가 되는 인연이다. 어떻게든 서로 만나게 되는 자연의 순리처럼 강줄기가 만들어낸 새벽 풍경은 신비롭다.
어스름한 두물머리의 새벽 공기는 쾌청.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속에서 400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가 두물머리의 파수꾼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날씨에 따라 멋진 일출을 보지 못하면 어떠랴. 강 건너 산을 감싼 물안개 사이로 뱀섬이 아련하며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그 너머로 유려한 곡선으로 겹겹의 능선이 아스라하다. 빳빳한 자세로 돛을 세운 황포돛배가 오롯하다. 어슴푸레한 여명의 안개 범벅 속에 파묻혔던 시간을 가끔씩 떠올리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두는 일, 짜릿하다.
두물머리의 새벽 의식은 길지 않다. 이윽고 서늘함이 가신 물길 따라 산책하다 보면 주변에 전망 좋은 브런치 카페도 있어서 여유롭게 쉬어볼 만도 하다. 일상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린 요즘, 새벽길 달려와 반길 두물머리가 있다니. 머잖아 연꽃의 운치를 보여줄 차례다.
인문 여행지 남양주 마재마을
자동차로 15분 정도 더 달리면 남양주의 다산 생가가 금방 나타난다. 소박한 듯 기품이 느껴지는 생가 뒤편에는 다산 묘소가 있다. 정쟁에 휘말려 강진 유배 생활을 했지만 다산은 이곳에서 났고, 생을 마감한 곳도 여기다. 남양주의 아들이다.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 잡고 살았던 땅이다.
다산유적지에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실학박물관, 거중기, 다산 문화의 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주변으로 다산생태공원과 남양주 8경이 둘러 있고, 자연 속으로 북한강 자전거길이 이어져 있다. 산과 강으로 어우러진 다산 생가를 중심으로 슬로시티 남양주의 팔당 다산길을 라이딩 행렬이 시원하게 휙휙 지나간다.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고픈 언택트 여행자들이 넉넉히 위안을 얻는다.
또한 손 타지 않은 자연 마을답게 북한강을 앞에 두고 남양주 유기농테마파크가 조성돼 있어 들러볼 만하다. 우리의 24절기에 따른 농사와 의식주 문화를 알 수 있는 생활의 면면이 전시되어 있다.
문 밖으로는 야외 공연장과 동물 체험장, 체험실, 카페테리아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연인들로 가득하다. 당연히 슬로시티 남양주의 농작물 체험 농장이 많다. 그중에 딸기농장에 가면 유기농 딸기를 직접 따서 다양한 요리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에 들기 전 앞마당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당시 실제 크기의 거중기를 만나게 된다. 실학정신의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역작이다. 여유당은 정갈한 한옥이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관료로서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검소함이 담긴 여유당이다. 고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다산이 유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석학이지만, 아버지나 지아비로서의 간곡한 면모를 알 수 있는 기록도 제법 남겼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801년 전라도 땅 강진으로 유배될 당시 다산의 나이가 40세였다. 아비로 인해 벼슬길에도 오를 수 없는 자식들을 위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절하고 세세하게 편지로 소통했다.
부모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어 노심초사하는 아비의 마음이 느껴진다. 친구 사귀는 법,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법, 정보의 중요성, 밭을 가꾸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 인간관계, 술맛을 아는 것, 잘못을 꾸짖거나 칭찬하기, 부모를 위한 생각 등을 세밀하게 전한다. 정약용은 당대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자상하고 정이 넘치면서도 깐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직도 효를 강조하고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한다고 누군가는 ‘꼰대’라 말할 법도 한 세상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말씀은 200년이 지났어도 지당하기 그지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니 이해와 해석은 각자의 몫일 뿐.
다산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는 어린이용으로도 출간되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전하는 독서로도 좋을 듯하다. 아이들이 어릴 적 읽었던 책이어서 오래전 기억이 난다. 200여 년 전의 내용이지만 시공을 넘어서 부모 자식 간의 소통 능력은 이 책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몸져누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다. 천 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두거라.”
유배 시절 아내 홍 씨가 보낸 빛이 바랜 다홍치마 여섯 폭을 받아 들고 그리움에 슬퍼하며 치마를 잘라 두 아들을 위한 서첩을 만들어 보낸 것이 ‘하피첩’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철학과 인생의 지침을 담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혼인을 하는 외동딸에게는 남은 치마폭에 ‘매조도’를 그려서 보냈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이런 선물을 받아 든 자식들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멀리서나마 지아비에게 사랑을 전하는 부인 홍 씨의 마음도 헤아려보게 된다.
이 땅의 대석학, 다산
생가 옆에 자리한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은 다산의 삶과 사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4분의 1과 2분의 1 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200년 전 조선의 위대한 학자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다산문화관, 그리고 맞은편의 실학박물관은 2개 층으로 전시실과 북 라운지가 있다. 천천히 빠져 들어가는 시간이다.
실학박물관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다산정원이 푸르게 펼쳐진다. 평화로운 정원을 거닐며 역사 속 대석학의 인간적 고뇌와 철학을 마음에 담는다. 빠르게 변해버린 현대의 가족 간에 부모와 자식으로서 꼭 짚어볼 만한 메시지를 전한다. 20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당에 와서 비로소 알아가는 그분의 인간미와 지적(知的) 서사, 과연 그분이 꿈꾸던 세상이 되었는지.
남양주 마재마을을 다녀와서 오래전 책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들췄다.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던 전남 강진을 초반에 소개할 때 다산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유홍준 교수는 그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산 정약용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무던히 고심했다. 사실 나 또한 이 시대 대부분의 지식인처럼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고 사모한다. 만약 단군 갑자 이래 이 땅의 가장 존경받을 인물을 꼽는 한국갤럽의 사회조사가 있다면 ‘학삐리’ 사회에서는 그분이 단연코 1등을 차지할 것이다.”
마재마을에서 만난 조선 최고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계절의 푸릇함과 함께 느닷없는 배움의 욕구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푸르러가는 시절을 놓칠 뻔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 길 11(마재마을)
꽃피는 봄. 가슴이 설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봄꽃 소식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따스한 봄바람 따라 꽃길을 거닐고, 자전거도 타며 봄꽃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두 발로 만나는 봄날의 향기는 두 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경기관광공사가 추천한 봄꽃 트레킹 코스를 따라 화려한 꽃 잔치가 열리는 경기도에서 싱그러운 봄을 만끽해보자.
■꽃향기 넘실거리는 ‘남양주여행’
‘걷기 길’ 열풍이 식을 줄을 모른다. 남양주시에도 한강나루길, 새소리명당길 등 총 13개의 길이 조성돼 있다. 그 중 가족, 연인들의 봄꽃 트레킹으로는 다산길 2코스가 제격이다. 능내삼거리에서 마재마을 연꽃단지를 거쳐 다산유적지까지 이어지는 2코스는 강물을 따라 조용한 숲길과 야트막한 산길, 마을길이 어우러져 있어 봄날의 정취를 즐기며 걷기에 좋다.
옛 나루터에 고즈넉이 떠있는 나룻배는 운치를 더해주고, 물결 위로 반짝이는 물비늘은 걷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에 실린 꽃향기는 봄을 실감케 한다. 마을을 돌아 내려가면 다산지구공원에 닿는다. 강변을 따라 꽤 넓게 조성된 공원은 잔디광장과 실개울, 조망대, 산책로, 생태습지, 수생식물원 등의 시설이 있어 생태경관을 탐방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과 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산유적지와 실학이야기 가득한 실학박물관도 꼭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다산길 2코스는 풍경이 뛰어나고 볼거리가 풍성해 도시락을 싸들고 여유롭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남양주 여행에 아쉬움이 남는다면 옛 추억을 고이 간직한 ‘능내역’을 추천한다. 능내역은 2008년 이후로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이다. 하지만, 기차가 멈추고 오히려 더 이름난 역이 되었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대합실은 ‘고향사진관’이란 이름의 전시실로 꾸며져 추억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빛바랜 사진과 나무 의자들은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옛 철길을 따라 다산길(1코스)과 자전거도로가 놓이면서 열차카페와 간이식당, 자전거 대여소가 들어섰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꽃향기를 맡으며 실컷 달려보는 것도 좋다.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걷는 ‘수원여행’
해마다 4월 중순이면 수원의 경기도청에서 ‘경기도민 한마음 벚꽃축제’가 열린다. 40년생 아름드리 벚나무 200여 그루가 피워낸 하얀 벚꽃은 하늘을 덮고 산들산들 봄바람이 지날 때면 반짝이는 꽃비를 내린다. 도청 정문 주위와 우회도로를 따라 도청 후문에 이르는 팔달산로에서 화사한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오른편 팔달산공원을 거쳐 화성행궁 방향으로 내려온 후 화서공원에 이르는 팔달산길은 벚꽃은 물론 진달래와 개나리가 한데 어우러진 봄나들이 최적의 꽃길이다.
경기도는 행사기간 동안 도청을 개방해 주요 도정을 홍보하며 주요행사의 홍보 부스를 선보인다. 우수농산물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벚꽃길 나눔장터’는 벚꽃축제를 찾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수원여행에서 ‘화성행궁’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다. 벚꽃축제의 낭만을 가까운 화성행궁에서 이어가는 것도 좋다. 행궁은 왕의 지방행차 시 머물던 임시처소다. 화성행궁은 개혁군주 정조가 세우고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원행했으며 경복궁의 부궁이라 불릴 만큼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대장금’, ‘이산’ 등 사극 드라마의 세트장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정문인 신풍루에서는 4월5일 상설 한마당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무예24기 공연과 장용영 수위의식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DMZ 자전거 투어’
출발 신호와 함께 임진각 아래 통문이 열리고 300여대의 자전거가 일제히 임진강변 군 순찰로로 접어든다. 이어지는 철책과 초소 사이에서 다소 긴장된 얼굴이 통일대교에 접어들면서 상쾌한 봄바람에 부드러워진다.
DMZ 자전거 투어는 임진각을 출발해 민통선을 넘어 통일대교, 통일촌 입구, 초평도에서 임진각으로 돌아오는 17.2㎞구간에서 진행된다. 올해부터는 군부대의 협조로 약 2㎞ 코스가 더해져 초평도 인근의 중간 휴식 장소에서는 간식을 즐기며 수려한 임진강의 풍경을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느낌을 가족에게 엽서로 전하는 이벤트가 준비된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11월까지 매월 넷째 주 일요일에 DMZ 자전거 투어를 개최하며 4월에만 13일과 27일 2회에 걸쳐 진행한다. 경기관광공사의 임진각 평화누리 홈페이지를 통해 반드시 사전 예약해야 한다.
자전거 투어를 마쳤다면 냉전의 유산 ‘오두산 통일 전망대’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서부전선의 최북단으로 남과 북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2㎞ 거리에 대치해 있다. 전망실에서는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고 북한 주민들의 생활모습도 볼 수 있다. 1층의 개성공단 홍보관에는 남과 북이 힘을 합해 생산한 양말, 시계, 신발, 화장품이 전시돼 있고 기획전시실에는 통일·안보와 관련된 테마 사진전이나 특별전이 열린다.
탄현면 헤이리마을길에 위치한 ‘못난이유원지’는 헤이리 예술마을의 다양한 테마공간 중 특이하게도 못난이 삼형제를 중심으로 옛 소품들을 전시한다. 못난이 상회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울보 못난이 인형과 불량식품을 팔고 못난이 식당에서는 추억의 도시락을 맛보는 등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좋은 곳이다. 유원지 내의 옛날물건 박물관에는 마당에 있던 수도펌프, 오래된 잡지 등 소소한 소품들을 전시한다.
경기일보 박준상기자 parkjs@kyeonggi.com
사진ㆍ자료 제공=경기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