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시니어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계절이다. 추운 날씨 탓에 몸이 잔뜩 움츠러드는 데다 마치 몸에 기름칠이 덜 된 것처럼 허리에 뻐근함과 통증이 자주 나타난다. 겨울철 척추 질환을 완화·예방하기 위해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스트레칭으로 근육과 인대를 유연하게 만들어 보자!
브리지(허리 들어 올리기)
약해진 엉덩이 근육과 허리 뒤쪽에 신전근을 강화해 허리 안정성을 높인다. 또한 앞 허벅지 근육인 대퇴사두근을 이완시켜 신체 앞뒤 불균형을 해소하는 운동이다.
1. 척추를 완전히 붙이고 누워 두 무릎을 세운다. 양발은 골반 너비로 벌리고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지그시 눌러준다.
2. 엉덩이, 꼬리뼈, 척추 순으로 바닥에서 떨어뜨리듯이 들어 올린다. 턱을 약간 당기고 복부 긴장을 유지해 허벅지, 엉덩이, 허리가 일직선이 되도록 집중한다. 무릎과 발이 바깥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8초간 유지한다.
3. 척추, 꼬리뼈, 엉덩이 순으로 천천히 몸을 내린다. 10회씩 총 3세트 실시한다.
데드 버그(팔다리 뻗기)
누워서 하는 코어 운동으로, 복부 근력을 발달시키고 허리 안정화에도 도움을 준다. 이 운동은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골반 아래까지 숨을 끌어내린다는 느낌으로 복식 호흡한다.
1.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누워 양손은 천장을 향해 뻗는다.
2. 무릎을 구부린 후 양다리를 들어 올려 골반과 무릎 모두 직각으로 굽힌다.
3. 숨을 내쉬며 복부에 힘을 주고 왼팔은 머리 위로 넘기고, 오른쪽 다리를 쭉 뻗는다.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양쪽을 번갈아가며 실시한 후 총 10회 반복한다.
대퇴사두근 이완 스트레칭
걷거나 달릴 때 다리를 들어주는 대퇴사두근과 허리를 굽힐 때 쓰이는 장요근을 이완하는 동작으로 뻐근한 통증 완화에 도움을 준다.
1 무릎과 발등을 바닥에 댄 채 척추를 바르게 세우고 호흡하며 안정을 찾는다.
2 왼발을 앞으로 딛어 무릎을 90도 각도로 세운 뒤, 몸의 중심은 일직선을 유지하고 양손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다.
3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킨다. 호흡하며 15초간 자세를 유지한다.
4 반대쪽도 번갈아 총 3회 반복하며 하루 3세트 실시한다.
대퇴신전근 강화 스트레칭
등부터 다리까지 전반적인 근육의 안전성을 높이고 허리 대퇴신전근 강화에 도움을 주는 동작으로, 만성 요통 완화에 효과적이다.
1 먼저 엎드려 누운 자세에서 양팔을 머리 위로 뻗는다.
2 숨을 내쉬면서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8초간 유지한다. 이어 제자리로 돌아와 왼팔과 오른쪽 다리도 동일하게 실시한다.
3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들어 올려 8초간 유지한 후 처음 자세로 돌아오는 동작을 10회 반복한다.
4 하루에 총 3세트 실시한다.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 세대의 창업을 통한 도약을 지원하기 위해,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을 펼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점프업5060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하고 새 인생을 펼치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나이 들면 무얼 하면서 살까? 어떻게 해야 일터와 삶터를 분리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김은주, 박유하 부부는 은퇴 전부터 이어진 오랜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살고 있는 주택 지하에 자리 잡은 모모책방으로 말이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사람들은 모모책방에 모여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한다. 늦은 시간까지 필사를 하거나, 외국 드라마 ‘빨간머리 앤’을 보며 영어 공부를 한다. 수업을 이끄는 강사는 물론 도봉동 이웃 주민이다.
모모책방에서는 번개모임이 잦다. 김은주 씨와 책방을 함께 운영하는 그의 동생이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지면 모모책방 밴드나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소식을 올린다. 곧 관람을 희망하는 이웃들이 각자 간식을 챙겨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빔프로젝트를 내리고 책방이 어두워지면 모모책방은 영화관으로 변신한다. 흥미로운 마을공동체 사업에 응모하거나 새로운 활동을 기획할 때에도 주민들은 자연스레 모모책방을 찾는다.
문화 갈증 채우는 동네 책방
모모책방을 탄생시킨 김은주, 박유하 부부는 인생 후반부 계획을 세우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점프업5060 공고를 발견했다. 미래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해결해줄 프로그램이라고 판단해 지원을 결정했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 수료할 때쯤에 맞춰 모모책방의 문을 열었으니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다.
“책방을 사업 아이템으로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예요. 제 오랜 꿈이 서점을 여는 것이었고, 마을 문화공간에 대한 높은 수요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도봉구의 문화공간 인프라는 창동에만 몰려 있어요. 도봉동 주민들이 집 주변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곳이 없죠. 책방을 비롯한 문화공간에 대한 갈망이 클 수밖에 없어요.”
걸림돌은 단 하나, 공간이었다. 책방을 열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때에 이웃의 한마디가 해결책이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의 지하층을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 일터와 삶터를 분리하지 않고도 마을 책방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묘수였다. 그렇게 모모책방은 2019년 12월 도봉동 주택단지 한가운데, 부부가 거주하는 주택 지하에 자리 잡았다.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지만 정작 마주한 건 코로나19 대유행이란 이름의 터널이었다. 부부는 넋 놓고 앉아 있는 대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스마트 기기 조작이 서툴고,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돌봤다. 적은 인원이라도 모여 책방에서 비대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를 대신해 숙제나 준비물, 가정통신문 같은 학급 전달 사항을 읽어줬다. 김은주 씨와 그의 동생은 심리학을 전공한 지식을 살려 ‘점심 도시락’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점심을 함께하며 종일 붙어 지내야 했던 엄마와 아이들의 마음 건강을 살폈다.
위기 속에서 탄생한 고향
김은주 씨는 힘든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모모책방이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감정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날 불쑥 찾아갈 수 있고,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주는 문화공간. 그게 바로 김은주, 박유하 부부가 생각하는 모모책방의 지향점이다. 이는 사업을 구상할 때부터 막연하게 품고 있던 목표다.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을지 막막하던 차에 되레 악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나 할까.
책방에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책들이 가득하다. 모두 김은주 씨와 그의 동생이 전공을 살려 선정했다. 이외에도 필사나 컬러링 키트를 구비해뒀다. 흉흉한 세상에 쫓겨 책방으로 찾아든 사람들이 마음을 돌보게끔 하기 위해서다. 도봉동 주민들은 갑갑한 집을 벗어나 책방에서 글씨를 끄적이고 책을 뒤적이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뛰어놀기 좋아할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했던 아이들에게는 더욱 답답한 시간이었을 터. 코로나19 시국에 유일한 놀이방이었던 책방은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줬다.
“고향이란 단순히 과거에 살던 동네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는 추억이나 문화가 있어야 충족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고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책방을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고향을 돌려주자’였어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난 동네, 살던 동네, 학교 다닐 때쯤 이사 간 동네가 다 다르잖아요. 이웃 간 왕래도 없죠. 개인적으로 그 점이 안쓰러웠는데, 책방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모모책방과 마을 아이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 하교하던 길에 신발 끈이 풀어졌으니 묶어달라며 불쑥 책방을 찾고, 학교에서 그렸다는 동네 지도에는 모모책방이 ‘우리 동네 명소’로 표시돼 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책방에 찾아올 때, 책방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부부는 큰 보람을 느낀다.
모모책방의 사업 목표는 ‘적정 수준의 적자를 유지하기’다. 지금도 서적 판매로는 책방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익 모델만 운영하고 있다. 수익을 내는 데에만 급급하다 이웃들이 모모책방을 찾으려던 발걸음을 망설이게 될까 조심스럽기 때문. 책방의 공간을 활용해 유튜브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역시 고개를 저었다. 하나의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한 뒤 편집하고 채널을 관리하는 동안 책방과 마을에 소홀해지기 싫어서다.
모모책방은 앞으로도 돈은 적게 벌더라도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선택해나갈 것이다. 큰길가 대신 주택가 안쪽에서,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언제나 문을 열어두고 있는 동네 책방. 모모책방은 아이들에게 고향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김치 없는 밥상을 상상할 수 없는 한국인에게 중요한 연례행사인 김장! 분주히 움직여도 꼬박 하루가 소요되는 고된 노동이다. 특히 허리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요인이 많아 시니어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무리한 동작은 삼가고 스트레칭으로 건강한 김장철을 지내보자!
허리 들어 올리기(브리지)
약해진 허리 주변 근육을 강화하는 대표적인 스트레칭이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두 무릎을 세운다. 양발은 11자 골반 너비로 벌리고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숨을 내쉬면서 엉덩이, 꼬리뼈, 척추 순으로 들어 올린다. 턱을 약간 당기고 복부 긴장을 유지하며 허벅지, 엉덩이, 허리가 일직선이 되도록 집중한다. 8초간 자세를 유지한다. 숨을 내쉬면서 척추, 꼬리뼈, 엉덩이 순으로 바닥에 닿도록 천천히 내린다. 총 10회 반복한다.
복근 강화 스트레칭
이 동작은 척추 움직임을 최소화해 부담을 줄이고 코어 근육인 복근을 강화해 척추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두 무릎을 세운다. 천천히 호흡하며 팔꿈치와 발등을 구부린 후 자세를 4초간 유지한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손발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머리, 팔, 발바닥으로 바닥을 눌러 8초간 자세를 유지한다. 골반을 배꼽 쪽으로 말아 올려 복부에 힘을 주고 허리로 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처음 자세로 돌아가 총 10회 실시한다.
10월은 건강과 관련된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로, 그 수가 무려 30여 개에 달한다. 10월 2일 노인의 날을 시작으로 뇌졸중의 날, 골다공증 예방의 날 등 시니어가 주의해야 할 질환들을 주로 다룬다.
10월 12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세계 관절염의 날이다. 관절염과 근골격계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응원하고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정됐다. 관절염에 걸리면 심각한 통증과 함께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초래한다.
요즘과 같이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가을에는 무릎 관절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낮은 기온에 혈관이 수축되면서 증상이 빠르게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자료에 따르면 9월에 65만 2214명이었던 무릎관절염 환자 수는 10월 68만 9992명으로 한 달 만에 약 5.8%나 증가했다. 김창연 대전자생한방병원 병원장은 슬안혈과 같은 무릎 주변 혈자리를 틈틈이 지압해 무릎 관절을 강화하고 건강관리에 나설 것을 권했다.
한의학에서 무릎의 눈이라고 부르는 슬안은 크게 내슬안과 외슬안으로 나뉜다. 의자에 앉아 무릎을 90도 굽혔을 때 무릎 안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내슬안, 바깥쪽이 외슬안이다. 양쪽 슬안혈을 엄지와 검지로 3초간 지그시 눌렀다 떼어주기를 10회 반복하면 무릎 주변 근육과 관절 강화에 효과적이다.
김창연 병원장은 “걷기나 계단 오르기 등 적절한 운동을 병행하면 무릎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된다”라며 “그러나 무리한 운동은 무릎 연골의 마모를 가속화 할 수 있으니 체력에 맞게 점진적으로 운동량을 늘려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관절이 우리 몸의 움직임을 담당한다면 척추는 몸의 구조를 담당한다. 척추는 무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며 주요 골격을 유지해 ‘신체의 대들보’라 불리기도 한다. WHO는 10월 16일을 세계 척추의 날로 지정해 매년 척추의 중요성과 척추 질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허리 통증은 일생에 한 번 이상은 경험하는 흔한 증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좌식 생활로 인해 젊은 층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 환자도 늘고 있다. 김창연 병원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금 당장 척추 건강관리를 시작하라고 권하는 이유다.
평소 스트레칭을 자주 해 척추 주변 근육을 키워주면 도움이 된다. 시니어들도 누워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으로는 ‘척추기립근 강화 스트레칭’이 있다. 먼저 바닥에 엎드려 누워 양팔을 머리 위로 뻗는다. 이어 숨을 천천히 내쉬며 양팔과 다리, 머리, 가슴을 모두 위로 들어 올린다.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며 수영하듯 왼팔과 오른다리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가, 반대로 오른팔 왼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빠르게 교차한다. 동작을 10회 반복하는 것을 한 세트로 총 3회 실시하면 척추기립근을 강화해 척추의 올바른 정렬과 골반 비대칭 개선에 도움이 된다.
척추관절 질환과 함께 시니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환 중 하나로는 뇌졸중이 있다. 갑자기 맞는다는 의미의 ‘졸중’(卒中)에서 알 수 있듯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이던 사람도 갑작스레 생명을 위협받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이에 세계뇌졸중기구(WSO)에서는 10월 29일마다 뇌졸중 예방과 적극적인 치료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뇌기능의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급속히 발생한 장애가 상당 기간 이상 지속되는 질환인 뇌졸중은 ‘골든타임’을 놓쳤을 때 생존율이 크게 떨어지고 후유증이 남기 쉽다. 예방과 조기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한의학에서는 뇌졸중을 ‘중풍’(中風)이라 칭하며 치료해 왔다. 현대의학의 표준 치료와 함께 ‘한의학계 구급약’이라 불리는 우황청심원을 활용한다면 뇌졸중 예방과 회복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황청심원의 신경세포 사멸 억제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가 SCI(E)급 국제학술지 ‘Antioxidants’에 게재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대뇌피질 신경세포에 우황청심원을 처리한 후 뇌졸중을 유도한 결과, 우황청심원을 처리하지 않은 경우보다 세포 생존율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와 일상생활 속 노력도 동반되어야 한다. 김창연 병원장은 뇌졸중 예방 및 증상 완화에 좋은 운동법으로 ‘뒤로 걷기’를 추천했다. 뒤로 걷기는 뇌졸중 환자 재활치료에도 활용되는 운동법으로, 혈관 탄력성을 증가시키고 균형감각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균형감각이 발달하면 좌뇌와 우뇌 연결이 활성화되고, 뇌가 고르게 발달할 수 있게 된다. 주변에 걸려 넘어질 만한 것이 없는지 살핀 뒤 벽을 손으로 짚으면서 하루에 30분씩 뒤로 걷는다면 뇌졸중 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김 병원장은 “노년기에도 활력있는 삶을 추구하는 액티브 시니어들이 증가하며 건강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라며 “건강의 날이 집중된 10월을 맞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생활 습관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56세 김골프(가명) 씨는 6년 차 골퍼인 친구 소개로 골프 세계에 입문했다. 필드에 나선 첫날, ‘오잘공’, ‘구찌’ 등 낯선 단어가 귀에 들렸다. 은어인 듯했지만 다들 웃고 떠드는 분위기에 의미를 묻기도 민망했다. 게다가 정확한 골프 용어도 아니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알아보기도 애매했다.
골프는 정식 용어만큼 다양한 은어들이 있다. 기본 용어도 외래어가 많아 자연스레 사용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은어까지 눈치껏 이해해야 한다면 막막해진다. 뜻을 오해해서 잘못 사용하면 황당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의미를 알면 골프 재미도 늘어난다. 이에 브라보가 막 골프에 입문한 ‘골린이’ 시니어를 위해 알아두면 좋은 은어를 소개한다.
먼저 연습장에서 연습만 하다가 필드에 처음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머리 올린다’, 정해진 타수의 2배를 쳤을 때 ‘양파’, 날아간 공이 도로를 맞고 더 좋은 위치로 갔을 때 ‘도로 공사 협찬’ 등이 있다.
‘버디’없이 ‘보기’만 줄줄이 기록한 스코어카드를 작성했을 때 나오는 탄식이 ‘땅만 팠다’다. 아무런 소득 없이 디봇만 냈다는 뜻이다. 아마추어들에게는 ‘변태’라는 말도 통용된다. 행동은 하지 못하고 보기만 한다는 설명이다. 러프만 전전하면 동반자들이 ‘그린피 다 내지마’라고 한다. 페어웨이를 '보호'했으니 그린피라도 할인 받으라는 비아냥이다. 또 홀을 대부분 파로 마치면 파를 많이 먹어 ‘토할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오바마는 ‘오케이(OK)를 바라지 말고 마크를 하라’는 표현이다. 일본어로 입, ‘구찌’는 말로 멘탈이 약한 상대방을 흔들어 놓는 경우에 쓰인다. 첫 홀인 1번홀에서 한 명이라도 파를 하면 동반자들의 스코어를 모두 파로 써주는 ‘일파만파’, 4개 홀 연속 파를 잡았을 때 ‘아우디파’, 5개 홀 연속 파는 ‘올림픽파’, 더블파를 기록하면 ‘양파’다.
‘오잘공’은 오늘 제일 잘 친 공의 줄임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손님이 제일 잘 친 공 ‘손잘공’, 어쩌다 잘 친 공 ‘어잘공’, 지금까지 제일 잘친 공 ‘지잘공’ 등이 있다.
실제 필드는 지형, 날씨, 습도 등 다양한 외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연습장과 상황이 다르다. 또 같이 온 동료의 샷에 위축되거나 집중력이 흐려지기도 한다. 이처럼 ‘닭장 프로’는 연습장에서는 프로처럼 잘 치지만, 필드에 나오기만 하면 외부 환경에 의해 스코어 관리가 되지 않는 골퍼를 칭한다.
골프장 캐디들이 쓰는 은어도 있다. ‘피아노맨’은 라운드 내내 동반한 여성 골퍼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성 골퍼를 지칭했는데, 최근엔 의미가 달라졌다. 캐디에게 스킨십을 시도하거나 심지어 음담패설을 일삼는 ‘진상 골퍼’를 통칭한다.
‘섰다맨’은 말 그대로 가만히 선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골퍼를 말한다. 뭐든 캐디가 해 주기를 기다리는 골퍼다. ‘거북이맨’은 진행이 느린 골퍼를 일컫는다. 세 차례 이상 스윙 연습을 하거나 자기 차례가 된 뒤에야 부랴부랴 장갑을 끼고 공과 티를 찾는다. 누가 봐도 죽은(아웃오브바운즈) 공을 계속 찾고 있는 유형도 여기에 속한다.
이 외에도 공이 앞으로 가는 대신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가는 ‘와이파이’ 유형이 있다. 남은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어 클럽을 계속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캐디들에게는 까다로운 골퍼다. ‘오늘은 딱피야’라는 말도 캐디들 대화에 자주 등장한다. 딱 정해진 캐디피만 받은 걸 말한다.
골프는 매너를 중시하는 스포츠다. 과도한 은어 사용은 때때로 독이 되기 때문에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려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 농담으로 사용한다면 분위기도 완화하고, 즐거운 라운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머리를 올린다고?
우리나라에서는 첫 번째 정규 홀 라운드를 할 때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을 흔히 쓴다. 이 말이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많은 이가 이런 표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쓰인다.
머리를 올린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훈련받아온, 기생이 되려는 댕기머리 처녀가 한 남자에게 선택을 받아 밤을 보내고 쪽을 져 올리는 걸 의미한다. 머리를 올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기녀생활을 하게 된다. 골프는 17~18세기 유럽 귀족 사회에서 즐기던 운동이다. ‘신사의 스포츠’라고도 불리는 운동인데 골프 첫 라운드를 하필이면 기녀의 첫날밤을 의미하는 말로 표현하다니 괴리감이 크다.
국내에 골프가 처음 소개된 건 1900년 고종 37년, 정부 세관관리였던 영국인들이 원산 바닷가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일반인들이 골프를 하게 된 건 이보다 한참 뒤인 1924년 경성골프구락부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는 원래 1929년에 개장한 골프장 서울컨트리클럽이었다. 골프는 지금도 여전히 부자들의 스포츠로 인식된다. 일제강점기에 골프를 칠 수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그려보면 “머리를 올린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 유추가 되면서 씁쓸해진다.
“첫 라운드 가자”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된다. 좋게 생각하면 실전을 위한 준비가 그만큼 철저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골프 그린에 서기 전까지의 과정은 많은 노력을 요한다. 연습장에서 3~6개월 정도 기본기를 익히고 골프 매너도 따로 익혀야 한다. 요즘은 스크린 골프장에서 어느 정도 규칙을 습득한 후 필드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
곧바로 정규 홀에 가는 것보다는 실전 경험을 위해 9홀의 퍼블릭 골프장을 먼저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잔디의 감촉과 야외에서 골프를 칠 때의 감각 등 그린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공을 칠 때 서 있어야 할 위치 등 그린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알아야 서로 쾌적하게 공을 칠 수 있다. 골프는 단순히 채를 휘둘러 공을 홀컵에 넣는 운동이 아니다. 동반자를 배려하고 매너를 지키면서 즐기는 스포츠임을 인식해야 한다.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으로 필드에 서기 위해 해온 노력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또 머리를 올려준다는 표현으로 우월감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담백하게 “첫 라운드에 가자”라고 표현하자.
척추는 우리 몸의 중심을 지지하는 ‘기둥’입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 전체가 무너지듯, 척추 건강을 제때 챙기지 않으면 허리디스크, 척추관협착증, 척추측만증 등 여러 척추질환이 발생하게 되죠. 심각할 경우 합병증이나 장애를 유발할 수도 있다.
오늘도 "아이고~ 허리야"를 외친 당신!
어떻게 하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허리통증 완화 스트레칭을 추천한다.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허리 건강을 챙겨보자!
도움말 자생한방병원 홍순성 원장
◇ 고양이 스트레칭 ◇
하루를 여는 스트레칭으로 안성맞춤이다. 아침 스트레칭은 자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1 두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자세를 취한다.
2 숨을 마시며 머리를 들고 허리는 바닥으로 내린다.
3 숨을 내쉴 때는 등을 둥글게 말아준다.
4 이 동작을 10회 반복한다.
◇ 기역자 스트레칭◇
허리는 물론 하체, 어깨 등 전신의 근육을 이완해준다.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며 자세 불균형으로 발생 할 수 있는 통증을 완화시켜 준다.
1 의자를 1m 정도 앞에 두고 다리와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상체를 숙여 의자에 손을 올린다.
2 무릎을 편 채 허벅지가 당기는 느낌이 들 때까지 어깨와 허리를 아래로 내린다.
3 같은 동작을 5회 반복한다.
◇브릿지 운동 ◇
굳은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주며 허벅지 뒤쪽 근육과 엉덩이 근육을 강화해 주는 스트레칭이다.
1 누운 상태에서 무릎을 세우고 엉덩이, 허리, 어깨를 바닥에 밀착시킨다.
2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골반을 위로 올린다.
3 숨을 마시며 골반을 다시 내린다
4 이 동작을 10회 반복한다.
※ 다리힘이 아닌 엉덩이와 하복부 힘으로 들어올린다
※ 엉덩이가 너무 위로 올라가지 않게 주의한다.
◇ 전신 누르기 운동 ◇
약화된 복근과 신체 뒷면 근육을 강화하는 동작으로 허리의 자세를 바로 잡는데 도움을 준다.코어 강화와 허리 통증 예방에 효과적이다.
1 바닥에 누워 무릎을 세우고 양팔꿈치와 발목을 구부려 손과 발바닥을 들어올린다.
2 1번 동작을 4초정도 유지한다.
3 들고 있던 팔과 발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머리 뒤, 팔, 발바닥으로 바닥을 4초간 누른다.
4 배에 힘을 준 상태로 복식호흡을 유지한다.
5 같은 동작을 4회 반복한다.
※ 허리가 바닥에서 뜨지 않도록 복근 전체에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중요!
※ 디스크 환자도 할 수 있는 동작이지만 통증이 심한 분들은 주의!
옥돔은 몸길이가 30~50cm 가량의 옥돔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제주도에서는 '솔래기'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분포하고 제주도 근해에서 많이 잡힌다. 제주 옥돔은 생선의 황제, 또는 도미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클수록 맛있고 옥돔찜, 옥돔구이, 옥돔 미역국 등으로 조리한다. 제주도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내놓고 잔칫상, 제사상에 옥돔구이를 올린다.
옥돔을 바다에서 잡아서 반찬이나 안주용으로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옥돔은 음력으로 9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주로 잡힌다. 제주산 옥돔은 겉면인 머리와 등 쪽이 붉은 기가, 돌고 눈이 선명하며 꼬리부분에 노란색 선이 5~6개 있고 배쪽은 희고 고운 색을 띄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입산으로 분류한다. 제주도 연안에서 어선들이 주낙 낚시로 고기를 잡고 있다. 어획량도 적고 잡는 방법도 까다로운 생선이다.
배에서 꺼내기 전에 용도에 맞게 장만해 나오거나 아니면 그대로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거래처나 식당 등에 넘기기도 한다. 조림이나 국거리용을 만들 때 배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비늘을 제거하고 내장을 뺀 후 고기를 토막을 낸다. 구이용이나 튀김용은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고기를 반으로 펴 싸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집 마당이나 올레 돌담 등 깨끗한 곳에 널어서 건조시킨다. 좋은 날 이틀 정도 말리면 고기에 물끼가 없을 정도로 마르게 된다. 자연 바람으로 고기를 말리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대 이전 옥돔 거래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제주도 어촌 해변 작은 골목가게나 오일장에서 주로 판매를 하였고 지금은 어시장과 오일시장은 물론 마트나 백화점 등 전국 어디에서나 구입할 수 있다. 집까지 배달도 된다.
옥돔은 찜이나 국보다 구이로 많이 먹는다. 굽는 방법은 1970년대 이전에는 검질(짚) 불에서 구웠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장작불,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는 연탄불, 2010년대에 들어서서 가스불을 이용하여 굽는다.
그러나 옥돔구이의 제맛은 검질 불이나 장작불로 구울 때 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편하게 구우려고 토막을 내고 꽁지를 짤라 버리곤 하는데 그렇게 구우면 맛이 없다. 통째로 머리와 꼬리가 붙은 채로 구워야 한다.
먹는 방법도 통째로 구운 고기를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적당히 쪼개야 제 맛이 난다. 모든 부위가 각각 제 맛을 낸다. 살은 살대로 먹고 머리와 꼬리도 다 씹으면 제맛이 난다. 제주도 옛 어른들은 옥돔 머리 하나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옥돔 고기의 살은 애들을 주고 부모들은 머리를 먹기도 했다.
최근 바다의 수온이 올라가 바닷물의 오염 등으로 옥돔의 질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수입산 옥돔의 보급으로 옥돔의 이미지가 떨어지고도 있다. 제주 옥돔이 제주를 상징하는 고기로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잘 보전하는 노력이 긴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