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키덜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키덜트(Kidult)는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와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한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년의 키덜트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주류로 떠오른 중년 키덜트의 파급력과 그 이유를 짚어봤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네버랜드 신드롬’을 언급했다.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친구들이 늙지 않고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사는 곳이다.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네버랜드 신드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리턴(Return) 유형이다. 배우 한소희가 착용해 3000원짜리 공주 세트가 돌풍을 일으킨 것, 포켓몬 빵 품절 대란 등을 이 유형의 예로 들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키덜트는 리턴 유형에 속한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두 번째 유형은 스테이(Stay)로, 나이 듦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형의 사람은 동안 외모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승진을 마다하면서까지 현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아이들처럼 쉽고 재밌고 명랑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플레이(Play) 유형이 있다.
고령화 시대와 키덜트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 시장 규모는 2014년 5000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1조 6000억 원으로 확대됐다. 향후 최대 1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덜트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은 주력 세력이다.
키덜트가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근본적인 이유는 전 세계가 빠르게 늙어간다는 데 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회가 유년화되고 있다. ‘이 나이 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나이 개념이 흐려지고 있다.
키덜트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추억의 장난감, 만화책, 만화영화 등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소비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런 키덜트를 향한 시선은 몇 년 전만 해도 부정적이었다. 유치한 취향을 가진 철없는 어른으로 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키덜트를 향한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른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장막이 걷히자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시대가 됐다. 이로 인해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키덜트가 늘어났고, 소비 시장 또한 커졌다. 자녀와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기는 키덜트 부모도 많아졌다. 드론, 무선조종 자동차, 레고 등을 가족이 함께 즐기며 유대감을 쌓는다.
키덜트가 급증한 두 번째 원인으로 미래 불안감이 거론된다. 키덜트는 불안한 미래와 힘든 현실로 인해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에 젖으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내 활동이 증가하면서 장난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해즈브로는 2019년 47억 2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64억 2000만 달러로 순수입이 증가했다. 동기간 바비 인형 회사 마텔의 순매출은 45억 달러에서 54억 6000만 달러로 늘었다.
문화 발전과 중장년 키덜트의 성장
현재 시장을 주름잡는 키덜트의 중심에는 중장년층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스타워즈, 포켓몬 등을 보유한 장난감 회사 재즈웨어스의 제러미 파다워 최고브랜드책임자는 CNBC에서 “1970~80년대에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장난감이 크게 유행하면서 이 시기에 팬덤을 경험한 세대가 현재 30~40대에 접어들었다. 이 사람들이 키덜트의 시작이 됐다”라고 말했다.
현재 상영 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가 흥행하는 것을 봐도 중장년층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2주 만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새해 첫 100만 영화다. 1990년대 만화 ‘슬램덩크’를 즐겨 본 중장년층이 오래 간직한 팬심을 드러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유튜브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를 운영 중인 라이너는 게임에 주목해 말했다. 그는 “중장년층을 1980년대생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생은 게임에 익숙한 세대다. 게임을 하기 위한 용도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였다”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게임을 취미로 이어가는 것이다. 중장년층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종합하면, 세상은 나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젊어지고 있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다. 앞으로 키덜트는 더욱 많아질 것이며, 개인과 사회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것이다. 개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가 된다. 시장 및 사회는 키덜트로 인해 활기와 역동성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덕사’ 교장 선생님, 라이너
“중장년 키덜트여,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유튜버 라이너는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맡고 있다. 오덕사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을 심도 있게 분석해 소개하는 채널이다. 채널의 주요 연령층은 30·40대다.
“10·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오덕사 구독자분들의 연령층은 다양합니다. 그중 30·40대가 제일 많은데요. 중장년층은 아무래도 추억의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기생수’, ‘에반게리온’을 소개했을 때 반응이 특히 뜨거웠죠.”
스스로 키덜트라고 말하는 라이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채널이 바로 오덕사다. 라이너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 만화방, 비디오방을 전전하는 것을 넘어 해적판 비디오를 구하러 용산을 찾아가곤 했다고. “친구들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게임도 좋아했고, 영화와 소설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죠.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문화의 힘이 되게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문화생활은 라이너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 중 그의 인생작은 무엇일까. 라이너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꼽았다. 마크로스는 거대한 우주선인데, 지구가 멸망하면서 마크로스에 탄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된다. 그들은 외계인 젠크라디와 싸움을 벌인다.
“외계인 젠크라디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어요. 바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류는 머리를 쓰죠. 마크로스 안에 당대의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가 있었는데, 우주 콘서트를 펼치죠. 음악을 듣고 젠크라디들은 붕괴됩니다. 거기서 ‘컬처 쇼크’(문화 충격)라는 말이 처음 나왔어요. 제 영화 유튜브 채널 이름도 ‘라이너의 컬쳐 쇼크’죠. 1980년대에 그런 스토리가 나왔다니,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덕사에서 다루는 콘텐츠 중 게임의 비중은 적지만, 라이너는 여전히 게임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수중에 돈이 없어서 게임을 즐기지 못했는데, 현재는 시간이 없어서 게임을 못 한다고.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게임 패키지를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상상으로만 게임을 하고 진열장에 넣어두죠. 그렇게 쌓인 게임이 한가득이에요.”
라이너는 키덜트인 자신의 취미 활동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특별한 장비 없이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취미 활동이다. 또 누구를 상처 입히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키덜트로 살 것이라는 라이너는 동년배 중장년층에게 자신처럼 ‘덕후’가 될 것을 추천했다.
“중장년층에게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나 하던 유치한 것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숨은 명작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취미 활동을 당당하게 즐기면서 ‘원더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hibition
◇박래현, 사색세계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아트조선스페이스
“수많은 장벽에 부닥치고 가혹한 시련 앞에 몸부림치며 이를 넘길 수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존의 권리… 봄이라는 뽀얀 계절은 때때로 나를 이런 부질없는 사색세계에 몰아버린다.”
한국 근대 화단의 대표 여성 미술가 우향 박래현(1920~1976). 1959년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출품하며 에세이 ‘봄이면 생각나는 일, 삶과 마주 섰던 계절’을 함께 기고했다. 에세이의 한 구절인 ‘사색세계’가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됐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지난 몇 년간의 봄을 상기하며 식민국가의 운명 속에서 마음의 어두운 흔적과 불안한 감정을 더듬어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국의 봄은 아름다웠다고 술회했다.
‘박래현, 사색세계’ 전시는 ‘생동하다’, ‘피어나다’라는 주제로 1, 2부를 나누어 그녀의 작품세계를 돌아본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대적인 회고전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로, 초기 대작부터 대표적인 추상 연작, 그리고 미공개 작품까지 8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아내로,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화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운보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리고 여류라는 굴레를 넘어 한국화의 현대화를 개척한 박래현을 만나볼 수 있다.
◇사빈 모리츠 : RAGING MOON
일정 4월 24일까지 장소 갤러리 현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독일 여성 화가 사빈 모리츠(53)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사빈 모리츠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 그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추상의 풍경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작가다. 독일 추상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부인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회화, 에칭 연작 등 50여 점을 소개한다. 동독에서 보낸 유년기의 경험과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구상 작업을 하던 작가는 2015년부터 추상 회화로 ‘정신적 풍경’을 다뤘다. 과감한 붓질과 풍성한 색채로 완성된 매혹적인 추상의 이미지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Book
◇백만장자와 승려(비보르 쿠마르 싱·다산초당)
사찰을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승려와 고급 호텔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해온 백만장자가 있다. 백만장자는 물질의 정점에, 승려는 정신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극과 극인 두 사람이 호텔에서 21일간 함께 머물며 행복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소한 삶은 성공으로 가는 첫 단계다”, “명상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라”,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있다” 등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넘나든다. 백만장자와 승려가 서로 배우며 깨닫는 인생의 본질을 통해 독자는 ‘지금 행복한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비보르 쿠마르 싱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인도의 전통 명문인 셔우드대학과 스리람상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재무회계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금융 최전선에서 일하는 그는 물질적 풍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 있는 삶이 주는 정신적 행복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맞추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행복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책은 인도에서 출간 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12개국에 판권이 팔릴 정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부자가 아니라서, 마음이 공허해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특히 추천하는 책이다.
◇울다가 웃었다(김영철·김영사)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DJ이자 코미디언, 김영철의 웃픈 휴먼 에세이다. 그는 “나의 명랑은 수없이 노력하고 연습한 결과”라고 고백하며 가족, 일상, 방송담을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달은 ‘웃음과 울음이 균형을 이룰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민음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5년간 매진해 써낸 신작. 코로나 이후 최초의 팬데믹 소설로 역사소설에 미스터리를 결합했다. 소설은 1901년 오스만제국의 민게르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하며, 페스트로 인한 종교적·정치적 분열을 그린다.
◇쓸모 있는 음악책(마르쿠스 헨리크·웨일북)
저자는 독일에서 독창적인 음악 테라피를 통해 대중의 고민을 해결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왔다. 그는 음악을 제대로 들으면 더 나은 일상을 꾸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뇌 기능 활성, 창의력과 영감 자극 등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Stage
◇데스노트
일정 4월 1일 ~ 6월 26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동연
출연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데스노트’는 2022년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뮤지컬로, 동명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가 이름을 쓰면 죽는 ‘데스노트’를 우연히 주우면서, 전 세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해온 베일에 싸인 명탐정 ‘엘’(L)과 맞서게 된다. 각자의 정의를 위한 라이토와 엘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두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갈등과 대결에 프랭크 와일드혼의 트렌디하고 팝스러운 넘버가 시너지를 더해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이번 시즌은 논레플리카(Non-Replica) 버전으로 작품의 고유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긴장감 넘치는 연출, 디테일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무대로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여기에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역대급 라인업을 자랑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몬드
일정 4월 2일 ~ 5월 1일
장소 코엑스아티움
연출 김태형
출연 문태유, 홍승안, 이해준, 조환지, 임찬민, 송영미, 김선경, 오진영, 유보영, 김태한 등
뮤지컬 ‘아몬드’는 2017년 출간 이후 해외 20개국 출간, 국내 판매 90만 부를 돌파하며 지금까지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는 동명의 소설(손원평 저)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 2월 뮤지컬 개막 소식이 알려진 후 2022년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아몬드’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감정조절 역할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문제가 생겨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인 알렉시티미아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주변인들과 갈등을 겪고 화해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광주
일정 4월 15일 ~ 5월 1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이지훈, 조휘, 정동화, 신성민, 문진아, 김나영, 효은, 최지혜 등
‘광주’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광주를 평화의 땅으로 일궈낸 열사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감동적인 서사와 ‘님을 위한 행진곡’, ‘투쟁가’ 등 웅장한 멜로디는 그날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광주’는 2020년 초연됐으며, 2년간 공연 횟수만 총 74회, 관람객 수는 2만 명이 넘는다. 미국 뉴욕 진출도 예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뮤지컬이자 아시아의 ‘레미제라블’로 극찬받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과거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와인이 각광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홈술과 혼술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주류 중에서도 특히 와인 소비가 괄목할 정도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와인 수입액이 전년 대비 27% 가까이 증가했다. 그 결과 와인은 20%가량 수입이 줄어든 맥주로부터 수입 주류 1위 자리를 넘겨받았다. 올해 와인의 수입 증가폭은 작년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와인의 인기를 코로나19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규모가 큰 와인 수입사들이 저렴한 와인을 마트나 편의점을 통해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와인 대중화에 기여했고, 와인의 매력인 감각적인 즐거움과 다양성, 그리고 웰빙에 대한 관심이 근본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자 화려한 꽃향기가 피어났다. 난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 시즈쿠처럼 어느 순간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입안에 넣자 싱싱한 산딸기를 비롯한 과일 맛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어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안을 조여주는 타닌(떫은맛)과 정교하게 짠 교토(京都)의 직물처럼 복잡하고 우아하며 섬세한 맛에 혀가 매료됐다. 그리고 어질어질할 정도로 오래 이어지는 여운까지…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작가 아기 다다시가 1985년 빈티지의 DRC 에세조(Echezeaux) 와인을 마시고 느낀 바를 ‘와인의 기쁨’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와인을 마실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이보다 멋지게 표현한 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보통 ‘맛있다’는 짧은 찬사로 와인의 맛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는가.
독일의 게슈탈트 심리학자 칼 둔커(Karl Duncker)는 와인과 연관해서 아주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어떤 객체(object)인가 아니면 그 객체가 주는 즐거움(pleasure)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즐거움이 객체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긴다’ 혹은 ‘무엇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level) 중 하나를 적시하는 것이라며, 와인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와인, 와인을 마시는 것(Drinking of the wine),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 in drinking wine)이 와인이라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다. 와인은 객체 그 자체이고,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얻는 경험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fact)인 반면,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고,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이 즐거움이다.”
심리학자 둔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와인을 ‘감각적 경험이라는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와인이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알코올 음료라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와인 애호가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와인 애호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와인이 맛있다’라는 표현보다 훨씬 근사하고 유식해 보인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는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와인을 마셔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복한 경험에는 와인의 감각적 즐거움(sensory pleasure) 이외에 감정적인 즐거움(emotional pleasure)과 사회적인 즐거움(social pleasure)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거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와인에 대한 지식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것이 더욱 즐거워질 때 혹은 그러한 지식을 갖춘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지적인 즐거움(intellectual pleasure)도 가질 수 있다. 종교의식에서 와인을 사용할 때 와인 애호가는 정신적인 즐거움(spiritual pleasure)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은 ‘와인의 철학’에서 와인을 분석하는 즐거움과 분석한 것을 말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대담한, 영감에 찬 코멘트들이 쏟아지면서 아주 재미난 순간이 되기도 한다”고 경험을 들려준다. 즐거움의 종류 중에서 인지의 즐거움(cognitive pleasure)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분석하는 즐거움은 사실 와인 경험이 적은 초보자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뽐내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와인을 전락시키는 누군가 때문에 참기 힘든 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경험은 주관적이라는 사실과, 와인에 대해 느낀 것을 말할 때 와인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반드시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알드 달(Roald Dahl)이 쓴 책 ‘맛’에서 소개하는 와인에 대한 분석은 주관적이고, 와인 전문가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흥미롭다.
“조신한 포도주로군. 약간 수줍어하고 망설이는 듯하지만 어쨌든 아주 조신해.” “명랑한 포도주로군. 자비롭고 명랑해. 약간 외설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랑해.” “아주 재미있고 귀여운 포도주로군. 상냥하고 우아하고, 뒷맛은 거의 여성적이네.”
이와 같이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럴수록 와인과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진다. 또 어떠한 즐거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와인의 냄새로 인해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느 냄새를 맡는 순간 과거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험을 한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에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작가의 이름을 딴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용어가 유래한다.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실 때 코를 아주 활동적으로 만들고, 후각적인 경험을 즐긴다. 그래서 프루스트 현상은 어쩌면 와인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와인 전문가들이 냄새를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으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와인 전문가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는 ‘Essential Winetasting’이라는 책에서 “후각은 미각이 주는 육체적인 만족감에 대한 지적인 전주곡으로서 사람, 장소, 상황과 감정 등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와인 전문가 제이미 구드(Jamie Goode)는 ‘와인 테이스팅의 과학’에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의 힘”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와인 애호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1905년에 발표한 수필 ‘와인연구’(Weinstudien)에서 “와인은 내게 컬러가 아니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유아 시절로 돌려보내는 와인도 있고, 학창 시절이나 여행, 사랑의 경험, 우정 등을 회상시키는 와인도 있다”고 강조했다. 1919년에 출판된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는 와인을 ‘갖가지 추억을 여는 열쇠’라고 정의했다. ‘프루스트 현상’보다는 ‘헤세 현상’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헤세는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와인 한잔 마시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나는 와인을 마실 때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경험을 자주 한다. 숙성되어 페트롤 향을 물씬 풍기는 리슬링 와인을 마실 때, 오토바이를 탄 아버지 등에 매달려 논과 밭을 지나고 야산을 넘어 할아버지 산소에 가던 한식과 추석의 날들이 생각난다. 리치 향이 특징인 게뷔르츠트라미너 와인을 마실 때면, 가족과 함께 살던 독일 도시 부퍼탈에서 암스테르담에 당일치기로 놀러 가던 날 네덜란드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리치로 만든 디저트를 먹고 좋아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프랑스 와인 산지 루시옹에서 그르나슈 그리로 만든 짠맛이 아주 강한 화이트 와인을 마셨을 때, 칠레의 와인 산지 레이다 밸리에서 스테파노 간돌리니(Stefano Gandolini)라는 와인메이커가 만든 짠맛의 소비뇽 블랑을 마셨을 때, 나는 부모님과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갔던 1970년대의 어느 날을 그리워했다.
와인에 대한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와인을 마시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상상하는 즐거움’, ‘욕망하는 즐거움’을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이러한 즐거움도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먹을 음식에 잘 어울릴 만한 와인을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담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과, 와인 잔에 따른 와인을 바라보며 이 와인은 어떤 향과 맛을 선사할지 궁금해하는 짧은 순간을 상상해보라. 시인 황지우는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통해 기다림의 숨겨진 의미, 즉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 알려주고,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의 능동적인 기다림, 즉 와인을 마시는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는 즐거움과 욕망하는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향과 맛에 의한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와인 애호가로서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보자.
시니어들에게 반가운 신문수화백이 그린 만화 전단지가 페이스북에 등장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7일 페이스북에 지난 5월 14일 식품안전의 날을 기념해 이달의 소장품으로 신문수화백이 1979년에 그린 ‘불량식품을 몰아내자’ 전단지를 소개했다.
이 전단지를 본 한 커뮤니티 시니어 회원들은 “신문수화백의 그림이 반갑다”, “도깨비감투의 신문수화백이군요”, “로봇 찌빠!가 생각난다” 등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신문수 화백은 도깨비 감투가 흥행하면서 유명한 만화가로 발돋움했고, 이를 바탕으로 소년중앙에 로봇 찌빠를 연재했다. 두 작품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신문수 화백의 로봇 찌빠는 길창덕 화백의 꺼벙이와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과 함께 한국 명랑만화의 대명사로 통한다.
한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불량식품 퇴치의 필요성이 1960년에서 1970년대부터 대두했는데, 그 배경이 어린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색소나 탈색제 등 유해성분이 들어간 불량식품이 유통되면서 어린이 피해가 발생해서”라고 전단지 제작 배경을 밝혔다.
이어 “불량식품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이어지자,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1978년을 부정불량식품 근절의 해로 정하고 특별단속을 강화했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79년 보건사회부와 한국식품공업협회에서 발행한 ‘불량 식품을 몰아내자’ 전단이 1979년 세계 아동의 해를 맞아 어린이들에게 불량식품을 사지 않는 요령을 알려주기 위해 제작한 자료”라며 “앞면에는 불량식품을 사지 않는 요령을 만화로 넣어 어린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고, 뒷면에는 불량식품 주의사항을 문구로 인쇄했다”고 설명했다.
1979년에 전단지를 발행할 정도로 만연했던 불량식품이 지금은 얼마나 줄었을까? 안타깝게도 불량식품은 지금도 계속 유통되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단속이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불량식품을 근절하려면 뿌리를 완전히 뽑겠다는 각오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야 한다. 아울러 처벌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길어지는 코로나19로 손주와 만남조차 어려운 요즘이다. 기술이 발달해 영상 통화, 메신저 등 연락할 방법은 많아졌지만, 얼굴을 보고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작은 휴대폰 화면에 담기에는 부족하다. 길을 거닐다 손주 또래의 아이가 눈에 띄면 절로 생각이 나기도 한다. 집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적적한 시니어를 위해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꼬마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마틸다 (Matilda, 199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처럼 자식은 부모의 행실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소녀만은 예외인 듯하다. ‘마틸다’의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총명한 마틸다(마라 윌슨)는 어려서부터 혼자 핫케이크를 만들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씩씩한 소녀다. 반면 마틸다의 아버지는 사기꾼에 가까운 중고차 매매업자로 돈밖에 모르고, 어머니는 게임과 사치에 빠져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던 어느 날 TV나 보라며 책을 빼앗는 아버지에 화가 난 마틸다는 저도 모르게 눈빛으로 TV를 망가뜨리고, 자신도 몰랐던 초능력을 발견한다. 이후 학교에 들어간 마틸다는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자 자신의 초능력으로 못된 어른을 혼내주기 시작한다. 로얄드 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로얄드 달 특유의 위트와 풍자로 무책임하고 부조리한 어른의 모습을 꼬집는다. 권선징악의 전개를 성실히 따라 극이 진행될수록 사이다를 마신 듯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마틸다의 똘똘한 표정과 야무진 말투가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2. 애니 (Annie, 1982)
“사랑 대신 구박을 받아. 키스 대신 매를 맞아.” 구슬픈 가사와는 달리 씩씩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는 아이들. 이내 분주한 몸짓으로 집안일을 거든다. 그 중심에 애니(아이린 퀸)가 있다. 뮤지컬 영화 ‘애니’는 1933년 공황기, 미국 뉴욕의 아동 보호소에 사는 애니가 친부모를 찾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앞서 나온 가사처럼 아이들의 보호소 생활은 녹록지 않다. 보호소 원장이 시키면 한밤중에도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아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애니는 친부모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희망을 품고 지낸다. 그러던 중 억만장자 워벅스(알버트 피니)가 보호소를 찾아 애니를 양녀로 삼으려 하는데, 친부모가 그리운 애니가 이를 거절하자 얼떨결에 ‘친부모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애니’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애니의 명랑한 태도와 사랑스러움을 극찬한다.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하는 영화지만, 손주가 더욱 보고 싶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3. 보스 베이비 (The Boss Baby, 2017)
탱탱한 볼살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 영락없는 아기의 모습인데, 어딘가 이질적이다. 옷은 쫙 빼입은 양복 차림에 표정은 인생 2회 차인 듯 매사가 따분해 보이고, 목소리는 중년 남성처럼 중후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 베이비’(알렉 볼드윈)는 ‘베이비’가 아니다. 아기인 척하는 기업의 ‘보스’다. 영화 ‘보스 베이비’는 7살 팀의 집에 베이비 주식회사의 CEO가 경쟁업체인 퍼피 주식회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아기로 위장을 하고 들어오는 이야기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아기 행세를 하다 팀 앞에서만 본래의 성격으로 돌변하는 보스 베이비의 발칙한 행동이 웃음을 유발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형제간의 다툼과 화해, 성공에 대한 열망 등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감정을 기발하게 표현해 연령을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 본의 아니게 한 팀이 되어 투덕거리면서도 우애를 쌓아나가는 두 주인공의 귀여운 동맹이 감동을 자아낸다. 보스 베이비의 귀여운 매력에 홀딱 빠졌다면 넷플릭스 독점 만화인 ‘보스 베이비: 돌아온 보스’를 이어 봐도 좋다.
5070세대 대부분은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청년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려주면 마치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현재의 청년들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어른들이 굶주리며 일할 때 지금의 시니어들은 가사를 도와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달려왔다. 책도 부족하고 TV나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친구와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부모님께 꾸중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때 아이들 옆에는 만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 만화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
최초의 단행본 만화 작가 ‘코주부’ 김용환
코가 뭉뚝하고 키는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코주부’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 캐릭터다. 때론 모자를 쓰고 점잖은 어른으로 나와 신문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사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코주부’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잡지에 연재된 를 통해서였다. 청소년 교양지였던 은 10만 부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잡지였다.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 빼어난 이야깃거리인 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당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1955년 만화책 로 발행되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의 만화는 세련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는 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아동만화를 많이 발표한 작가였다. 최초의 단행본 만화를 발표한 작가도 김용환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발표된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평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린이에게 친숙한 만화책이 처음 나온 것은 해방 후였다.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의 작품인 를 김용환이 만화로 각색해 1946년에 발표한 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아동문화를 만들기 위해 을유문화사에서 만든 아협만화문고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단행본 만화로 기록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7호로 등록되었다.
김용환은 만화 발표 외에도 만화신문과 만화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1948년, 최초의 만화신문인 의 기획자, 작가로서 참여했고 도 직접 발행했다. 또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엔 성인시사만화잡지인 를 통해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각종 신문에도 시사만화를 발표했다. 이렇듯 김용환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방송인 만화가 신동우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만화가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슥슥슥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충격적이었다. 바로 신동우 작가였다. 그가 유명 방송인이 된 것은 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7일 서울 대한극장을 비롯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신동우 작품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인데, 이 연재만화를 대본으로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신동우 작가의 은 홍길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정도였다. 이 작품은 허균의 에 대한 가슴 벅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홍길동’ 외의 주변 인물인 ‘호피’와 ‘차돌바위’, ‘곱단이’ 등의 캐릭터도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이다.
신동우는 1970년대에 유행했던 잡지의 만화 광고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진주햄소시지 제품을 일상 만화로 풀어냈는데,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웹툰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미학으로 전쟁의 상흔을 위로한 김종래
휘영청 밝은 달은 금준의 마음을 알듯 구름을 머금고 내려다본다. 나쁜 사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러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를 찾아 나선 금준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풍천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 지쳐 장승에 기대어 엄마를 불러본다. 김종래의 중 한 장면이다. 김종래는 한국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파괴된 삶과 가족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할 때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감동 만화로 인기를 누린 작가다.
1956년에 발표한 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 예산의 한 가족사를 다룬 만화다. 주인공 김일, 최도천, 향순이가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는 내용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김종래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특히 1958년 에 연재했던 는 당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금준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위기에 맞서 나가는 사이,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엄마는 모진 수모를 겪으며 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다. 이렇게 아들과 엄마가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의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2년에 발표된 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엄마와 헤어져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영진이네 가족 이야기이지만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 영진이 선생님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종래의 만화는 치밀한 구성과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애잔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했다. 또한 길가의 돌부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섬세한 필체가 특징이다. 25년간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소녀들의 판타지를 보여준 엄희자
1960년대 초반에는 예쁜 공주들이 만화책 속에 등장했다. 이전에도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다수 있었지만 엄희자 작가의 등장으로 순정만화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큰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빛나는 별, 머리를 장식한 예쁜 리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주인공은 순식간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로 영화나 영미소설의 스토리를 각색한 작품이 많았는데, 현대적인 패션들을 한껏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최고 인기였다.
소설 을 만화로 만든 , 소설 을 각색한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화려한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만화방에서 빌려온 엄희자의 만화책을 보면 찢긴 페이지가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소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 주제는 권선징악이었고 순정만화는 그러한 교훈이 더 강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은 착한 주인공을 질투, 음해하고 모함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의 선행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엄희자의 작품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수하고 맑은 감성도 이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의 명랑사회를 보여준 길창덕
1970년대는 ‘꺼벙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범생이나 천재나 능력자가 많았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린이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일지라도 어른들의 몫을 나눠서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씩 먹고사는 것이 안정이 되던 1970년대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어른의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길창덕의 다. 1970년에 에서 연재를 시작해 으로 옮겨 1977년에 완결된 작품으로 잡지뿐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를 풍미했다.
머리의 기계충 자국과 졸린 눈에 약간 모자란 듯하지만 착하고 여린 심성의 꺼벙이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해서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명랑 어린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살다 상경한 여동생 꺼실이가 후에 등장하면서 그 재미는 한층 더 배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 , , 등 그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부리고 엉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가족의 희로애락 그려낸 이상무
가난하지만 명랑한 아이인 독고탁은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대문에서 주저한다. 대문을 열면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직 어린아이인 독고탁의 키만큼 달려들기 때문이다. 개는 독고탁이 좋다고 달려들지만 그는 자기 몸집만큼 큰 개에 겁을 먹는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를 굴리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상무의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희귀 성인 ‘독고’와 강한 이름인 ‘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6남매의 막내로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서 슬프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투 유망주였던 형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게 된다. 독고탁의 가족에게 벌어진 시련은 1970년대 여느 가정에서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독고탁은 누나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어렸지만 집 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 채는 섬세한 아이였다. 또, 그런 독고탁을 통해 가족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만화 속에 진하게 담아낸 작가가 이상무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스포츠가 등장한다. 특히 같이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만화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기훈련과 노력들로 보여준다. 좌절의 순간에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고 무한 경쟁이 아닌 사람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이상무 작품의 인물들은 악인이라도 사람 냄새가 난다.
한갓진 시골이다. 도시의 소음과 야단법석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산골이다. 눈이 내리면 고스란히 쌓여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솔바람이 술렁이며 지나거나 밤하늘에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외엔 마냥 적막강산이다. 이 참신하고도 쓸쓸한 시골마을에 서점이 있다. 도시에서도 고전을 면하기 어렵다는 서점을 후미진 산골에 차리다니…. 의외성으로 보자면 이색이며, 관습의 틀을 깬 파격으로 보자면 다분히 진보적이다. 순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변이렷다.
서점 이름은 ‘숲속 작은 도서관’. 쥔장은 6년여 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괴산군 칠성면 산골로 귀촌한 김병록(53)씨 내외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제목에 이런 게 있다. . 사실 머리 굴려 논리를 따져 진로와 셈평을 도모하는 게 한결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김병록씨는 세세한 논리로 인생을 측량하지 않았다. 논리 대신 충동을 앞세웠다. 서울에서의 어느 날, 김씨의 내부에서 어떤 간절한 음향이 번져 나왔다. 아아, 나 시골에서 살고 싶어! 그게 귀촌의 단초였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후다닥 부응했다. 얘기를 들어볼까.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었어요. 깊은 오지로 갈까, 교외의 전원마을로 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역시나 중요한 건 호구지책이었어요. 제아무리 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이주한다 해도 손가락만 빨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지속가능한 게 무엇일까, 가족을 무엇으로 먹여 살릴까, 그런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이미 귀촌 욕구는 팽배해 있었죠. 내가 기왕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뭘 좀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구상이 있었으나 또렷한 답은 나오질 않았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시골에 눌러앉아 살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하는 작심으로 귀촌을 결행했던 겁니다.”
머리를 싸맨 숙고나 장고 대신 가차 없는 결단으로 귀촌을 서둘렀던 셈이다. 신속하게 정처를 물색해 장만했고, 다니던 회사를 미련 없이 그만뒀으며, 마침내 이삿짐을 싸 시골로 내려왔다. 이른바 친환경마을을 표방하는 집단촌의 집 하나를 분양받아 이주했는데, 미처 건축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내외는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그 안에서 한동안 살림을 살았더란다.
옹색한 컨테이너 생활은 필시 뒤숭숭했을 게다. 그러나 산골 자연의 풍광이 수려하고 다채로워 견디기에 따분할 게 없었다. 자연만 한 섬려한 벗이 다시 있던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산천의 모성이란 인류가 두고두고 예찬한 조물주의 선물이지 않던가. 하지만 느긋한 유유자적은 뒀다가 나중에 해야 했으니 우선은 생계를 모색하는 게 화급했던 거다. 김병록씨는 책을 재료로 밥을 벌 궁리를 본격적으로 하고 나섰다. 김씨 부부는 원래 책과 인연이 많았다. 경기도 일산에 살 때 사립도서관을 운영한 경험이 있으며, 서울 마포에서 아내 백창화(52)씨가 공공 도서관 네 곳을 오픈하기도 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옳다구나, 책방을 차리자! 부부는 찰떡처럼 의기투합했다. 라는 책을 보고 필이 꽂혀 유럽 몇몇 나라의 시골 서점을 답사하기도 했다.
2년 만에 단단히 다진 기반
“저희가 답사한 유럽의 시골들도 우리나라처럼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곳들이었어요. 그럼에도 책방이 활성화돼 있더라고요. 그게 굉장한 설렘을 줬어요. 다녀와서는 부부 공저로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후 북 스테이, 즉 책과 함께하는 민박을 운영하는 것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3년 전의 일이고, 2년 전부터는 민박과 책 판매를 겸한 책방으로 전환했습니다.”
“매우 독특한 발상이에요. 전에 도서관을 운영했던 경험이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었겠죠?”
“물론입니다. 부부가 공히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낸 셈이죠. 저희의 책 공간은 도서관과 책방, 민박을 결합한 형태입니다. 경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냈다고 자부합니다.”
“산골에서 책방을 만난다는 일, 마치 폭염에 소낙비를 만난 것처럼 신선해요. 문제는 운영이 제대로 되겠느냐, 그 점일 텐데, 이 산골까지 책을 사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걸요.”
“순풍에 돛을 달고 내달리는 중입니다. 요즘은 너무 많은 방문자들이 들이닥쳐 고심할 정도예요. 처음엔 최소 5년은 지나야 기반이 잡힐 것으로 예상했으나 2년 안짝에 자리가 잡혔어요.”
“저런! 비결이 뭐죠?”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덕분입니다. 게다가 저희 부부 공저로 2015년에 낸 가 꽤 많이 팔려나가면서 바람직한 홍보 효과를 거두었어요. 한 가지 부연한다면, 우리 책방에 오신 분들은 반드시 책 한 권은 사가야 한다는 수칙을 마련했는데, 그 역시 성과를 거두게 했죠.”
“무조건 책을 사야 한다? 그토록 도도한 비즈니스가 탈 없이 먹혀든 거예요?”
“아시다시피 오프라인 서점들은 대체로 고전합니다. 책이 안 팔려요. 왜지? 왜 안 팔리지? 제가 고민과 분석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책을 사고 싶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관건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저희는 많은 책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북 콘서트를 열거나, 도서관처럼 종일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붙었어요. 식당에 일단 들어가면 누구나 음식을 시켜먹어야 하듯이, 서점 역시 그런 식의 관습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와 같은 신념으로, 서점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욕을 좀 먹더라도 무조건 책을 구입하도록 했죠.”
김씨 내외는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남달리 기발하고도 날렵한 두뇌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김씨는 미디어 분야를 전공했다. 아내는 국문과에서 배운 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 바 있다.
실내의 표정이 책이 있는 카페풍이라면, 마당은 명랑만화 속에 나올 법한 놀이터 분위기다. 어린 자녀들을 대동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구색이다. 김씨 부부는 비지땀을 비처럼 쏟으며 집 안팎의 목조 구조물들을 손수 만들었다. 손에 손을 잡고 등장하는 가족들에게, 연인들에게, 부부들에게, ‘숲속 작은 도서관’은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며, 추억을 새기도록 하며, 책이라는 골치 아픈 물건이 삼겹살보다도 향기로운 풍미를 야기할 수 있다는 실감을 하도록 이바지한다. 게다가 산골 특유의 정적과 나무숲과 온기에 찬 에테르는 또 얼마나 값진 보너스인가. 너희는 해변에서 회를 먹으며 놀았니? 우린 숲속 책방에서 우아한 한나절을 노닐었다! 아마도 방문자 중엔 그리 토설하는 이가 드물지 않을 게다. 진심으로 구하면 적중하게 마련이다. 줏대에 찬 정신이 깃들면 장사도 문화에 도달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이미 행운
김병록씨의 책방은 기세 돋운 활보로 늠름하다. 따라서 의식주에 궁할 게 없다. 시련과 고생을 피하기 어려운 게 귀촌이라지만, 그는 끄떡없다. 애초에 선망했던 시골살이의 낙을 짬짬이 누리는 일도 흐뭇하다. 자연의 조화와 경이를 일깨워주는 산골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평온하게 건사하는 일은 도시에선 얻을 수 없는 진품.
“제가 귀촌을 통해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적막 덕분에 잠다운 잠을 자게 된 것 같아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쓰는 일이 얼마나 좋은가를 깨닫기도 했어요. 예컨대 목공일을 원 없이 해봤는데요, 심신이 맑게 깨어나더라고요. 나무와 화초를 심어 정원을 가꾸는 일, 텃밭을 일구는 일도 참 좋았어요. 건방진 얘기이지만, 이제는 자연의 순환이랄까, 낳고 자라고 커서 마침내 죽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죽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고 말이죠.”
“선생의 책방은 산골 책방으로 기반을 다진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네요.”
“제가 시골에 내려온 뒤 남들에게서 들은 가장 흔한 질문이 ‘그 외진 산골에서 뭘 먹고 사느냐, 생활이 되느냐?’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의문들은 제게 기우에 불과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데요, 막상 하고 싶은 일을 했으나 돈과 연결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무방하다 생각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행운이지 않겠어요?”
산골에서 자신의 일을 찾은 사람의 자부심이 오롯하다. 진부하거나 쓸쓸할 수 있는 삶에 일로써 빛을 끌어들인 사람 고유의 자족감이 완연하다. 산골 책방이 건재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세상을 건너는 옹골찬 비결 한 자락을 들여다본 듯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귀로의 산경(山景)이 환하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10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서울역 1·4호선 환승 통로에서 서울역 일대의 역사를 그린 만화가 김광성(金光星·62)의 그림이 전시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참 따뜻하다, 정겹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수묵담채로 그려진 한국적인 특유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과 풍경들에서 오래전에 볼 수 있었던 서울의 옛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주제와 소재들로 밀도 높은 작품세계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김 작가의 그림은 파리 크리스티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삶과 일에 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 만남인지라 준비해간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동 통인가게 2층 찻집에서 내준 발효 생강차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대표작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앞으론 뭘 그리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은 ‘김광성’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이런 진부한 질문들을 의미 없이 던지는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노트북을 덮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광성 작가는 올해 62세다.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다소 늦은 36세 때였다. 당시 인기 만화잡지였던 이 그 전까지 대기업 직장인, 가게 사장님으로 살았던 그를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했다. 이후 26년간 펜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경력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만화가들은 대부분 30년 경력을 넘겼을 테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또래이면서 활동하는 만화가가 적은 현실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에 도전하게 된 만화가의 삶
“학생 때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명랑만화에서부터 극화만화까지 만화란 만화는 다 좋아했죠. 살던 데가 부산 외곽 시골이었는데 만화방이 생긴 게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김 작가의 아버지는 남사당 사물놀이 꼭두쇠였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예술적으로 만들고 돗자리나 가마니도 전부 손으로 만들곤 했다. 그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사회에 나와서 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죠. 학창시절 때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께 혼쭐이 났어요. ‘그림 그리지 마라, 빌어처먹는다’라는 말씀이셨죠(웃음). 그래서 그림을 접어야 했어요.”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다. 회사를 가니 유화반이 있었고, 그는 거기서 유화를 배우게 된다.
“회사 다닌 지 십 년째가 되니 사회 영향을 받아 회사에 변화가 생겼어요. 마침 저도 십 년 다녔으면 지긋지긋하게 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죠.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1988년에 올림픽이 있었죠. 그때 곳곳에서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넌 그림 실력이 있으니 간판집이나 해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게를 차려서 2년 동안 쏠쏠하니 재밌게 일했어요.”
간판집 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만화를 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다. 당시 만화계에는 신인들이 올라오던 시절이었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가져와서 보는데, 만화 보느라 간판 제작일이 잘 안 됐어요(웃음).”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재료를 사서 허영만, 이현세 등 기성작가들의 작품을 베껴봤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시장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색다른 작가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를 그렸죠. 그게 반응이 좀 좋았고, 그러면서 만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됐어요.”
만화는 농사와 같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만화가 생활을 했다. 이제 중견 만화가이자 인정받는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만화는 농사다’라고 말한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농사를 지었어요. 만화도 농사처럼 뭔가 다져지고 공부하고 비축이 된 상태에서 나온다는 의미죠. 그림도 기초가 되어 있어야 표현을 하잖아요. 만화는 머리에서 먼저 그려야 해요. 머리에서 먼저 안 그려지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머리에서 그릴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이 쌓여야 하죠.”
김 작가는 우리만화연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만화연대는 만화인들의 모임으로 이론적으로 만화계 저변을 단단하게 다듬는 걸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분석과 만화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법 등을 제시하는 활동은 김 작가의 성향과 공명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요즘 바라보는 만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나마 우리 만화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있어서 다른 예술 분야보다는 형편이 좀 좋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수년 전부터 만화에 대한 효용가치가 달라졌어요. 만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거죠. 요즘은 어디를 가더라도 만화가에 대한 대접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문제는 이제 신인, 기성 할 것 없이 양질의 작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은 에이플러스 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요. 그런데 그런 작가들은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많이 분발해야 하는데, 최근 웹툰 업체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 업체들은 작품을 달라고 성화죠. 그렇게 되면 작품성이 좀 떨어져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요. 작가들이 좀 더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작품들을 발표하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죠.”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밖에 없는 일
김 작가는 만화를 그릴 때, 그 안에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동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잘 풀려나갈 때 느끼는 감동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대개 새벽 두세 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참 뿌듯해요. 화가를 꿈꿨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태어나도 만화가 할 건가요?’라고 누가 물으면 그러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어요. 직업적으로도 매력이 있고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나도 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느끼게 되고 동시에 조심도 하게 됩니다. 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내 작품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을 못 하잖아요. 그런데 시인 고은 선생의 글을 읽고 ‘맛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제 만화를 보고 맛이 있다고 하니 최고의 칭찬이죠.”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저 말로만 청춘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전히 어린이 만화 제작 요청을 받는 활발한 현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서 그는 나이를 계속 ‘거꾸로’ 먹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그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만화가는 동방신기도 알아야 하고 걸그룹도 알아야 하고 아이들의 언어도 알아야 해요. 그러다 보니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도 수시로 보게 되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작품을 보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도태? 난 도태되고 싶어”
김 작가가 오랜 세월 만화계에서 일하면서 가져야 했던 작가적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가 계속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만화가 우월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활동하는 게 필요하니까, 직업일 뿐이니까 한 거죠. 직업이라고 말하면 한쪽에서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런데 요즘 사회학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잖아요. 사람들이 소위 새로운 무언가에 몰입해서 휩쓸려 다니는 게 보이니까요. 이건 개개인의 문제여서 스스로 뭔가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감성이나 비전, 사유를 접하면 사유하고 감성이나 비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반(反)문명론자로서의 사연(?)을 하나 소개했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핸드폰을 줬어요. 그런데 복잡해서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짜증을 내니까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거 안 하면 도태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도태? 도태시켜. 난 도태되고 싶어’라고 말했죠(웃음).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다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몰라도 된다고 봐요.”
‘역시 아날로그적 도구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백다운 발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김 작가는 SNS 등 인터넷 활용은 물론 포토샵까지 다룰 줄 안다. 심지어 권당 200페이지짜리인 전 10권을 모두 포토샵으로 컬러링 작업까지 한 디지털 능력자다. 제대로 반(反)문명론자가 되려면 문명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틈만 나면 놀러 다니고 싶은 나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김 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남은 셈이다.
“요즘은 틈만 나면 놀러가려고 해요. 원래는 놀지 않고 일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돈도 안 되는 걸 밤새면서 왜 그렇게 했나 싶고요.”
아직도 일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김 작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얘기일 수 있다.
“참 족쇄를 풀 수가 없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의무 같은 게 생겼어요. 그런데 의무가 무게를 가지면 참 골치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은 일 안 한다고 도망 다녔어요. 나중에 박재동 작가가 잡으러 왔어요(웃음).”
김 작가에게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비구니 스님과 함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제주도에 가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유명산 밑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해봤다.
“스킨스쿠버를 하면 세상이 확 차단돼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물고기들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스님이 다음에는 바이크 면허 따서 할리데이비슨 타자고 하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