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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나의 순수, 물방울의 생성과 소멸
- 노 시인(老詩人)은 우이동 솔밭공원을 거닐며 청여장(靑黎杖, 지팡이)을 한 손에 꼭 부여잡고,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시공 속에 있으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 물방울 너 황홀히 존재하고 있음이여 소멸 직전에 아슬아슬함을 지니고 있건만 거뜬히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꿰뚫린 빛과 그림자 소멸과 생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번갈아 이어지는 유무상통의 존재의 비의(秘儀) 그것을 투시하는 눈이 있는 한 너의 아름다움은 늘 영롱하고 신선할 수밖에 없다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댁을 자주 왕래하던 2011년 초봄 최근 습작한 시라며 ‘팔순을 넘긴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소묘’ 두 장의 습작 노트를 보여준 일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방울 소묘’다. 박 시인은 1990년에 발간한 수상집 ‘투명한 기쁨’의 표지도 김창열(金昌烈, 1929~) 화백의 물방울 그림으로 장식한 바 있다. “1972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 살 때, 작업하다 뒤집어놓은 캔버스 위에 튄 물방울,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져 햇빛에 반사되는 순간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었어요. 나는 그걸로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평생을 살아왔어요. 가끔 그 물방울이 영혼과 닿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요.” 노 화백은 술회하고 있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의 화업 50여 년은 영롱한 물방울 태어남과 스러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익혀온 한학과 접목하여 캔버스나 한지에 한자를 쓰고 그 위에 물방울을 얹은 ‘회귀(回歸)’ 시리즈로 작품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주옥같은 작품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제주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착공, 2016년 9월 개관했다.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물방울 그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10호 이내의 소품이 아주 귀해서 그 희귀성이 작품가를 올려놨다. 최근 경매에서 1975년에 그린 3호 작품이 무려 47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작품[사진]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700만 원에 낙찰받았다. 13개의 크고 작은 물방울이 X자로 배열되어 긴장감과 역동성을 주고 있다. 얼룩진 물 자국 위에 맺힌 방울방울에 빛이 부서져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고, 가슴 가득 푸르른 영혼이 일렁이게 한다. 형진식(邢鎭植, 1950~) 화백은 일반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예술인들과는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분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모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1976년부터 2006년 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길러냈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즘에 반대해 무심사 미술전람회로 통칭되는 ‘앙데팡당(independent)’ 전에 출품함으로써 정형화된 그룹 활동을 벗어나 자유로운 추상의 세계를 지향했다. “호흡하는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인식하는 일, 순수함에 환원되어지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작업이 아닐까, 얼음은 투명하고 맑아야만 얼음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불투명한 대상을 세척 정화하는 순수함만이 남기 위한 인식인 것이다. 뭉친 가운데서 흐트러짐,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의 일관성, 입체에서의 평면적 접촉, 평면 속에서의 입체적 구조의식, 이러한 것은 서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애매한 속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열려진 상황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체의 지향성만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 작가는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작가가 아니라 제시하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몇 회의 개인전에서 종이 위에 연필, 크레용 등으로 손 가는 대로 그려 낸 드로잉을 보면, 활기찬 생기(生氣)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선 하나하나가 마치 충전(充電)된 것처럼 공(空)을 가로지르며 또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그 공을 긋는 행위의 궤적을 흰 종이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 선생이 개인전 머리말에 쓴 글이다. 이 그림[사진]은 13년 전 ‘아름다운 가게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받은 작품인데, 같은 크기의 네 작품이 한 세트로 나와 바로 구입했다. 장방형의 캔버스 중앙에 파란 유화 물감을 떨어트리고, 자연스런 반동으로 물감이 튄 상태에서 최소한의 드로잉으로 마무리했다. 마치 만년필에서 푸른 잉크가 흩뿌려진 것처럼 자연스런 무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네 작품을 한데 모으거나 종횡(縱橫)으로 늘어놓아도 그 또한 아름답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의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은 기교나 힘을 뺀 아이들의 붓장난 같아서 순진함이 배어나왔다고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말년 작품들도 ‘아이들의 손짓 같다’고 한다. 순수로 회귀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된 것이리라. 물방울처럼 금방 소멸되어도, 찰나의 순수가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 2018-01-1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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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짧고 깊게,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잠
- 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 2016-08-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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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고] 박준영씨 별세 - 박희진시 부친상
- ▲박준영(前 한국전력공사 근무)씨 별세, 박희진(파라다이스 대리)ㆍ진주(16전투비행단 하사)씨 부친상, 최우진(구로경찰서 순경)씨 장인상=31일 오전 서울아산병원, 발인 2일 오전, 02-3010-2238
- 2014-04-01 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