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이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어른은 누구일지 고민했던 편집회의에서 기자들은 나태주 시인을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그는 인기를 넘어 추앙에 가까운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낯익어진 마이너한 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팬덤 같은 것이죠. 날씨도 팬덤이 되고 계절도 팬덤이 돼요. 눈과 비가 고르지 않게 한꺼번에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것뿐이죠. 낯익고 익숙한 것을 찾는 거예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최근 출간된 그의 신간 ‘좋아하기 때문에’는 발매 2주 만에 1만 부나 팔렸다. 요즘같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꿈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단지 친숙함에 습관처럼 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는 책을 통해 “시인은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서비스맨”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통했던 것 같다. 마치 ‘풀꽃’의 한 구절처럼 나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주길 기대했기 때문일까. 책을 내놓을수록 20~30대 사이에서 강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그 소감의 물결에선 희망과 위로, 치유 같은 단어들이 떠다녔다.
타인 감수성과 꼰대
이런 공감대 속에는 어른다움이 있다. 젊은 세대가 ‘꼰대’에 저항하는 이유를 그는 어른의 이해와 변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의 기준으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투 현상’이 사회를 뒤흔들 때 익숙해진 ‘성인지 감수성’에서 온 말이다. 이제 세상은 내 입장만 고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변에선 ‘타인 감수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니까, 시인은 더 좋은 표현이라며 그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나 하나와 나머지의 너로 나뉘어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나를 빼면 모두 ‘너’이기 때문에, 너를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꾸 나 때만 얘기하려 들고, 네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때는 그렇구나, 그거 참 힘들겠다 하고 관심 갖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그는 책 속에서도 꼰대를 상징하는 신조어 ‘라떼’를 지적했다. 어른과 젊은이 쌍방이 조금씩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기를 기대했다. 어른 쪽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도 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만큼 다양한 약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지만, 가장 즐거운 일정이 있다. 젊은 세대와 만나는 강연회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서 어려운 점, 괴로운 점, 그늘진 점을 봐요. 겉으로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 청춘들도 소통을 해보면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 싫은 여성, 학교가 힘든 선생님, 취업이 힘든 청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도움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만으로 부모 노릇이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져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른이 됐다는 건 졌다는 것이니까요.”
젊은 세대가 갖는 아픔에도 주목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젊은 빚쟁이’가 되고, 구직난에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망가진 경력은 쉽게 되돌릴 수 없어 ‘손닿는 직장’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고충에 대해서다. 그는 “가서 막일이라도 해라”가 어른 눈에는 맞는 말 같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른들이 더 주목해주길,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하길 당부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유교 사회도 농본주의 사회도 아니에요. 편리한 것, 새것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무조건 어른을 따르라 요구할 수 없어요.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떠도는 (디지털) 유목 사회가 됐어요. 내가 만든 우유 한잔도 휴대폰을 뒤져보지 않으면 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노마드처럼 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바뀐 세상에 맞춰 그 스스로도 변화를 택했다. 그는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한창 일했던 시기보다 정년퇴직 후 내 생활은 더 많이 바뀌었죠”라고 말했다.
모두 비워내야 좋은 어른
최근에는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인문학 강좌의 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세대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스스로를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태주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좋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은 스스로를 채워야 하는 기간이에요. 이기적인 삶이 되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으려면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젊을 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상 타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아닌 내 내면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철이 드는 과정이죠. 이것을 위해서는 젊을 때 스스로를 꽉 채워놓을 필요도 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을 통정성에 빗대 이야기했다. 살아온 삶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게 돼요. ‘그 대목은 참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고, 지금 같으면 안 할 텐데 그때는 내가 그랬다’고요. 어른이라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자기 잘못까지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 사회나 국가 운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을 때 맘껏 채우고 나면 이후에는 비우는 과정이 찾아온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야 돼요. 어떻게 비우고 갈 것인지. 때려 부숴서 비우고 갈까, 곱게 정리해서 도움이 되게 할까 말이죠. 지금 운영하는 풀꽃문학관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에요. 그간 모아놓은 것들을 쓰레기가 아닌 보물이 되도록 정리하고 있어요. 이것들을 욕심내 집에 데려가는 순간 쓰레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잘 비우고 간 인물 중 하나로 나태주 시인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청년 시절 누구보다 채우기에 열중했고, 말년에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놓은 ‘선비’ 같았다고 평가했다.
“옛날 교사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간 운동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모아다가 태운 적이 있어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태우면 아주 역겨워요. 아직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남아 그런 것 같아요. 그에 반해 가을이 되어 탈색되고 말라 떨어진 낙엽들을 태우면 냄새가 고숩고, 가볍게 훨훨 타요. 모두 비워냈기 때문이고, 사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성향이나 세대, 지역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 서로가 상대의 생채기를 기대하며 날선 감정을 말과 글에 담아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열려 동서남북이 다 보여요.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왜 동쪽 사람, 서쪽 사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나요. 다 동지고 친구죠. 인생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없어요. 성인들처럼 훌륭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BTS와 이생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은 가야 할 길이 멀어 고민이지만, 중년이 넘으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태주 시인은 청년과 중년 혹은 노년은 접근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10년짜리 계획이 필요하지만, 중년은 5년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5년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차근차근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해야 하고, 중년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어요. 좋아하는 일은 노력하면 잘할 수 있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지긴 어렵죠. 길게 보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대예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남은 인생 동안 성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늘 말과 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는 요즘 말에도 관심이 많다. 신조어와 노래 가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BTS의 노랫말을 모티브로 한 노래산문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요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젊은 엄마들이 쓰는 ‘육퇴’(육아퇴근)가 그랬고, ‘독박육아’나 ‘라떼’(꼰대를 상징하는 말)가 그랬다. 그는 ‘이생망’을 지목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말이에요. 절망적이죠. 왜 망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생이 망했으면 다음 인생도 망한 인생이 돼요. 좀 부족해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포기할 수 없어요. 모두 성과에 급급하니 나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많은 장소에서 만난 힘들고 지친 청년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너무 큰 꿈에 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커진 꿈을 원해요.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듯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치려고 하죠. 하지만 집채만 한 큰 것을 바라다가 안 되면 부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어져요.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어요.”
‘1924년 파리 FIFA 총회’를 기점으로 월드컵 창설 100주년인 올해를 기념해 스포츠 평론가이자 해설가인 기영노 평론가가 신간 ‘월드컵 축구 100년 - 100번의 영광과 좌절의 순간들’을 출간했다. 이 책은 월드컵이 지닌 100년의 역사와 그 안에 담긴 빛나는 순간들,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오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 대한 예측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제1회 월드컵부터, 2024년 현재까지 월드컵이 지나온 길을 조명한다. 월드컵 역사 속 빛난 선수들, 하늘의 별이 된 전설들부터 현재까지 활약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프란츠 베켄바워, 에우제비오, 요한 크루이프부터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킬리안 음바페, 손흥민에 이르기까지,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가슴 뛰며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지구촌을 하나로 만드는 월드컵의 힘과 매력을 집대성한 저서다. 지난 100년간 월드컵이 어떻게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영노 평론가는 ‘베이스볼 매거진’, ‘일요신문’, ‘민주일보’ 기자 출신으로,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해왔다.
시니어 토탈케어 기업 케어닥이 SK디앤디(SK D&D)와 시니어타운을 7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니어타운 표준 등급 가이드’를 개발, 공개한다고 27일 밝혔다.
케어닥과 SK디앤디는 주거 공간으로서 표준화된 명확한 시니어타운 시설 기준이 미비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장 내 시니어 하우징 상품은 급증하고 있는 반면, 실제 소비자들은 시설별로 제각각인 데다 다소 생소한 시니어타운의 용어와 기준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번 등급 가이드 개발은 표준화된 기준을 제공, 상품 선택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평가 기준은 △규모 △프로그램 △입지 △부대시설 △건강관리 △공간디자인 △F&B △IT솔루션 △생활 편의 △기타 평가 등 크게 10가지 항목에 맞춰 구성했다. 서비스 및 공간 평가 세부 지표는 50여 개에 달하며 내외부 시설과 공간 구성은 물론 의료, 돌봄, 제공 프로그램, 편의 서비스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각 지표 별 점수를 더한 최종 점수 합계에 따라 총 7가지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1,2등급 시설은 기본 복지를 누릴 수 있는 무료 및 실비 시설이며, 유료 시설인 3등급부터 본격적으로 평가가 가능하다.
등급 가이드 내 기준 및 지표는 현장 실사를 비롯해 실제 시니어 인터뷰, 각 분야 전문가의 첨삭 등을 거쳐 구성했다. 한국시니어타운협회 회장인 박동현 고문 및 케어닥 내 시니어 하우징 전문가들도 가이드 개발에 대거 참여했다. 박동현 고문은 “시니어타운의 서비스 및 품질에 대해 일반 국민들이 가늠할 수 있는 명확한 선택의 기준과 적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번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진미정 서울대 웰에이징산업 최고경영자과정 교수는 “시니어 하우징에 관한 요구 증가에 반해 체계화된 정보는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이라며 “케어닥의 시니어 하우징 표준 등급 가이드 모델이 소비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강릉원주대 사회복지학과 박병선 교수 역시 “케어닥이 개발한 이번 가이드는 현재 증가 중인 시니어타운의 품질을 표준화해 평가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주목도가 높다”는 기대감을 밝혔다.
케어닥은 SK디앤디 등 시니어 하우징 운영 특화 기업들이 참여한 조인트벤처 ‘케어오퍼레이션’과 함께 시니어타운 표준 등급 가이드를 지속적으로 개선, 평가의 객관성과 신뢰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나아가 향후 국내 시니어타운의 시설 및 서비스 내역, 후기 등 다양한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등 소비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위한 관련 서비스 론칭도 예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니어 하우징 업계 선도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시장의 전반적인 품질 향상을 이끌어내겠다는 포부다.
케어닥 박재병 대표이사는 “시니어타운 입주는 사실상 노년기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인 만큼 기존 부동산 소비와 달리 노후 생활의 특성을 고려한 객관적이고 새로운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며 “케어닥의 이번 시니어타운 표준 등급 가이드가 소비자 선택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노후 생활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SK디앤디 김도현 대표는 “시니어 주거 공간을 판단함에 있어 어떤 점을 중시할 것인지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며 “향후 케어닥과 케어오퍼레이션을 넘어 시니어 업계 전체의 의견을 함께 가감해 가며 더욱 좋은 가이드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이었다. 중장년 사이 파크골프*가 인기라기에 한강변 파크골프장을 찾았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성 장맛비가 예고돼 있었지만 기어이 갔다. ‘이런 날에도 치면 진짜 인기다!’ 하고…!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 강가에서 시작된 운동. 도심 속 공원이나 유휴부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고 해서 공원 골프(PARK GOLF)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등포 파크골프장’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혹시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하는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줄 서서’ 파크골프를 치고 있었다.
파크골프는 클럽 한 개와 공 한 개, 그리고 티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몇 천 원이면 플레이할 수 있을 정도로 비용도 저렴하다. 파크골프장 별 재미도 각양각색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전 수집한 정보 그대로 어르신들은 답했다.
“재밌어요.”
“꽤 운동이 돼요.”
“집에서 가까워요.”
“이용료가 저렴해요.”
한 어르신은 파크골프 예찬론자였다. 다른 운동 여러 가지 해봤지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참 듣고 있다가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노인들이 다 집에만 있어 보세요.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근데 파크골프장 나오면 운동하고, 여기서 만난 친구들끼리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고, 내내 같이 놀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는 바로 잡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합니다.가지 말라고 할까 봐요.
본인 건강하지, 가정의 평화 가져오지, 종국에는 사회적 비용 안 들지. 삼박자를 다 갖춘 운동이라니까요?!”
속사정을 전한 어르신은 빙긋 웃으며 북적이는 필드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파크골프 열풍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다 집에만 있어 보세요.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생애는 극적이었다. 삶 전체가 한 편의 파란만장한 인간극장이자, 장면에 따라서는 야유가 쏟아지는 별점 5개짜리 장편영화였다. 생존 당시는 물론 사후까지 부정적이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는 송강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독특하다. 그의 문학은 빼어나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치 측면에선 잔혹해 지탄을 받았던 게 아닌가. 선조의 입에서 “송강이 조선 선비를 다 죽였다”는 한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송강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며, 학문을 닦고 시심을 기른 정신적 고향은 전남 담양이다. 5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곳은 강화도다. 그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기슭에 있다. 원래 경기도 고양에 묻혔으나 1665년 성리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의 권유에 따라 현재 자리로 이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서 퇴락한 사당을 현대에 이르러 크게 중건한 게 지금의 정송강사(鄭松江祠)다. 이곳엔 송강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정송강사는 송강의 넋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분위기는 여느 딱딱한 사당과 달라 포근한 맛을 풍긴다. 산자락을 움켜쥔 입지라 배후 풍치가 밝다.
송강의 묘소는 정송강사 옆으로 난 비탈길 끝자락에 있다. 묏자리는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일 만큼 아늑하고 훤칠하다. 우암이 잡았다는 터이니 어련하랴. 우암이 송강의 묘지 이장을 주도한 건 송강의 묘소에 물이 차 고민이라는 후손의 하소연을 접하고서였다. 그런데 우암이 하필 진천을 택해 이장 작업을 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여기에는 일련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우암은 영남계 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북 지역에 서원 다수를 건립했는데, 서인의 영수 송강의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정송강사 남쪽엔 ‘송강정철신도비’가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m에 달해 웅장하다. 비문을 쓴 이는 우암이다.
송강은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행이 잦은 질주였다. 당쟁의 이전투구를 조성하거나 휘말려 사실상 안심을 가지고 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정치적 참사로 평가되는 ‘기축옥사’ 때는 송강이 위관(委官, 재판장)을 맡아 동인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로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동인 쪽 사람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것. 송강 자신 역시 당쟁에 치받혀 부침을 거듭했으며, 수차례 유배지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년의 송강은 강화도에서 가난을 끼고 고독하게 살았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 ‘아무리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다’고, ‘부디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목에서 송강이 청빈을 버릇으로 삼았던 인물임이 드러난다고 보는 눈도 있다. 아무려나 송강은 강화의 누옥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고.
송강의 성품에 대해 동시대 학자 기대승은 ‘청결한 수석’에 견주었다. 율곡은 ‘강직하지만 속이 좁아 병통’이라 했다. 선조는 송강을 총애했지만 그가 죽자 ‘독기로 사람을 해친 자’라고 깎아내렸다. 무능한 군주답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셈이었다. 한편 가사문학으로 조선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송강을 두고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흔히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송강을 꼽는데, 서포 김만중은 송강의 ‘사미인곡’을 중국 굴원의 명시 ‘이소’(離騷)에 빗대어 ‘동방의 이소’라 극찬했다. 송강의 남다른 개성은 당시 문인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글로 시를 썼다는 데에서도 두드러진다.
송강의 시적 절창은 주로 유배지에서 나왔다. 신세가 궁색해질 때마다 송강은 복잡한 심정을 시에 묻어 다독였던 거다. 그가 매달린 것이 시만은 아니었다. 술이 또한 송강을 삼매경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음주벽으로도 한가락 했다. 대낮 근무시간에 거나하게 취해 사모를 삐뚜름히 걸치고 임금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지. 이런 송강에게 선조는 작은 은배(銀杯)를 하사했다. “이 잔으로 하루 한 잔만 마시라”고 당부하며. 이에 송강은 은배를 망치로 두들겨 사발만 하게 만들어 술을 마셨다던가? 이럴 때의 송강은 익살스런 꾀보다. 정송강사 경내에 있는 송강기념관엔 송강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선조가 내린 은배 한 점도 보인다. 진품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직접 쳐볼 수 있는 대종도 있다
이제 발길은 진천종박물관에 닿는다. 한국 범종(梵鍾, 절에서 쓰이는 큰 종)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2005년 개관한 국내 유일의 종 전문 박물관이다. 진천엔 고대의 제철 유적인 ‘진천 석장리 유적’이 있다. 따라서 진천에선 일찌감치 금속공예의 싹이 텄을 걸 알 만하다. 이 특유한 역사를 배경 삼아 금속예술의 정수인 범종의 모든 걸 보여주는 종박물관이 건립됐다. 직접적인 설립 계기는 범종 제작의 명인 주철장(鑄鐵匠)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이 만들거나 모은 종 150여 점을 기증한 것이었다.
진천종박물관은 크기와 세세함이 조합돼 매우 알차고 흥미진진한 박물관이다. “어, 이런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었어?” 감탄이 절로 터진다. 범종의 전시는 물론 범종의 역사, 제작 기술과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섹션에서부터 세계의 종 전시관, 기획전시실, 타종 체험장 등을 갖추어 관람객을 충족시킨다. 나는 ‘충족’ 정도가 아니라 사로잡혔다. 이 박물관의 핵심 공간은 시대에 따라 변전한 한국 범종의 양상과 실체를 보여주는 1층 전시관이다. 여기에선 범종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을 비롯해 상원사 동종, 낙산사 종 등 다수의 명품 범종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종도 전시해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종이 원광식이라는 한 개인이 실물 그대로 재현한 복제품이라 하니 경이롭다.
이곳의 종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덕대왕 신종 앞에서 눈을 뗄 방법이 없다. 예전 이 거대한 보물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때 경주시민 10만여 명이 몰려들어 운송 광경을 지켜봤다. 그토록 인기 있으며, 그토록 유서 깊으며, 그토록 빼어난 예술이다. 범종은 종소리의 깊음과 신비감으로 아름답다. 중생의 미망을 일깨우는 소리를 내는 신성한 법구다. 이른바 ‘맥놀이’라는 오묘한 과학을 무뚝뚝한 쇳덩어리에 주입해 부처의 음성, 천상의 소리를 뽑아내다니. 종의 피부에 새긴 조각은 또 어떻고? 사람을 압도하는 저 능란한 세공을 보라. 범종의 과학, 미학,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진천종박물관은 기분을 돋워주는 명소다. 야외 광장엔 직접 쳐보라고 만들어놓은 대종 2점이 있다. 종을 치자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 그윽한 여음을 남기고 꿈처럼 사라진다. 그러자 가슴에 괸 먼지가 가셨나? 쾌감이 엄습한다.
장주식 진천문화원 원장
‘이상설 기념관’은 건축문화 성지
“올해 진천문화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보재 이상설 기념관’을 차질 없이 개관하는 데 있다. 계획대로 올해 상반기에 개관되면 곧바로 전국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상설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갖가지 자료는 물론이고 건축의 미학까지 겸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천문화원 장주식 원장의 얘기다.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2023년 10월에 준공식을 마쳤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사업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천신만고로 일을 추진한 장 원장의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본 셈이다. 그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우뚝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의 선구자이며, 인품과 학식도 빼어난 분이다. 그러나 충분히 조명되지는 않았다. 흔히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기억할 뿐이지 않은가.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선생의 업적과 뜻이 널리 선양되길 기대한다.”
건축에 구현된 기법이 특별하다지?
“전통적인 목 구조와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융합해 지은 대형 건물이다. 고려 중기에 성행한 주심포 양식도 도입했는데, 이모저모 고도의 기술력이 들어간 건물이다. 이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향후 건축문화의 성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진천 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부터 떠오른다.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진 연유가 있겠지?
“주로 너른 구릉지로 이루어진 진천은 과거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지형 구조상 자연재해도 드물다. 따라서 농사가 순조롭고, 덩달아 인심도 좋을 수밖에. 진천엔 널리 이름난 효자도 많았다. 이 역시 지역에 만연한 후덕한 인정을 웅변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한 요즘 진천군은 활력이 넘친다. 문화원이 할 일도 많아졌을 것 같다.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한 청년층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원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다. 기존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한편 현대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보완할 참이다.”
진천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장면을 소개한다면?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이 진천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했는데, 그의 화랑도 정신과 통일 열망이 진천 땅에 이어져 남북통일의 기운이 들끓어오를 경우, 마침내 통일 한국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요즘 진천에 떠오른 문화 이슈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백원서원 복원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최고의 효자 김덕숭 선생을 비롯한 4인의 선현을 배향한 곳으로 ‘충효의 고장 진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현재 재원 마련을 위해 주민들도 성금을 모으고 있다.”
장 원장은 백원서원 복원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전통 서원을 현대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다.
오롯한 섬이었다. 세상의 변화로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뭍이 되어 자동차로 이어진다. 전북 부안의 계화도를 향해 달리는 새벽길에 정적만 가득하다. 도로 양옆의 들판은 어둠 속에서 박하 향기보다 짙은 기운을 뿜어내고, 새해의 쨍한 새벽 공기는 차창에 서릿발을 만들어낸다. 어스레한 불빛 저편으로 광활한 농경지와 갈대숲이 함께하고 물 빠진 갯벌도 드러난다.
광복 이후 최대의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는 계화도(界火島). 한때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식량 자급을 위한 1호 간척공사로 인접한 부안군 동진면과 방조제로 연결되었다. 바닷가에 둑을 쌓고 고인 물을 빼내니 섬은 곡창지대로 변했다. 농경지 조성이 활기를 띠고 쌀이 생산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의 계화미(米)를 브랜드화하기도 했다. 계화마을은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각종 조류가 서식하고, 겨울철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지내기도 한다. 여전히 계화도라 불리는 섬마을에서 이제는 빼어난 운치의 새해 해맞이를 한다.
계화마을은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소박하다. 들어서자마자 바다를 막은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소나무 행렬이 잔잔한 반영을 이루며 맞는다. 간척지와 마을 사이의 좁고 긴 물길의 계화조류지는 1km에 이르는 방풍림 소나무를 품었다. 언제나 온갖 철새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검푸른 새벽하늘의 구름과 수면 위로는 물결의 잔상이 신비롭다. 마을을 마주 보는 방죽의 고요함으로 차분해진다.
차츰 주변의 어둠이 옅어지고 이윽고 하늘 저편으로 불그스레한 기운이 번진다. 해 뜨기 직전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살짝 바람이 불면서 잔잔하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숨죽이며 정지된 시선은 생동감 있는 자연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짧은 순간 고요한 세상을 뒤덮은 매직이다. 단조로운 듯 반듯한 제방 위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세상을 일깨우는 아침 해의 운치는 계화리 작은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다 수평선 위에서 솟아오르는 동해의 일출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장엄한 해맞이를 하고 새로운 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왔다.
눈부신 겨울 서정, 변산해수욕장
해돋이의 위엄으로 얻은 에너지를 장착하고 아침 햇살 반짝이는 해안길을 달린다. 조금 전 일출의 여운을 지닌 채 만난 변산해수욕장은 온 누리가 환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네’라고 했건만,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출의 장엄함을 이미 보여주었고, 밀물과 썰물의 변산해수욕장 앞에선 희고 고운 모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을 실컷 볼 수 있는 철 지난 바닷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두 눈에 꾹꾹 담는다. 송림으로 둘러싸인 백사장과 조화를 이루며 평온하게 휴식의 시간을 안겨주는 여름과는 다른 매력을 풍기는 겨울 바다다.
아득한 전설 속으로, 채석강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물속에 잠겨서 지금에 이르렀다. 파도에 씻기고 기온과 압력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비경을 변산 격포리에 가면 마주 보게 된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채석강’이다.
자연이 만들어온 억겁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공룡을 떠올린다. 지질학적으로 공룡 시대보다는 비교적 짧은 약 7000만 년 전부터 형성되어온 채석강의 퇴적암이다. 지금도 암석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자연 속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켜켜이 쌓이고 겹겹이 맞물린 퇴적암 앞에 서면 그동안 자연이 이끌어온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변화무쌍한 파도의 침식을 받으며 쌓아 올린 퇴적암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문득 아득한 전설 속의 인물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물이 가득 차오른 채석강은 층층의 아찔한 해안 절벽과 먼 바다의 풍경으로 아련하다. 이윽고 물이 빠져나가고 드러난 바닥의 넓은 암반 위로 간간이 파도가 훑다 가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그 위로 온전히 드러낸 채석강의 비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과 분주히 해식동굴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오간다. 외변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참고로 격포항 물때를 확인하고 간조 시간 1~2시간 전후로 방문하는 게 좋다.
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는 절집, 내소사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 현판의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약 600m에 이르는 사철 푸른 전나무 숲길이 사랑받는 내소사. 마치 절 마당에 닿을 때까지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마련된 듯한 전나무 숲길이다. 명품 치유의 숲길로도 알려져 있다. 침엽수 특유의 맑고 그윽한 향이 경건함과 마음의 안정을 주는 통과의례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소사는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과, 일주문 앞과 천왕문 뒤의 당산나무인 천년의 느티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목적이 되기도 한다. 전나무 숲이 끝나면 벚나무길과 요사채 옆의 보리수와 산수유, 그리고 피안교부터 천왕문 가는 길의 단풍터널이 또한 그렇다. 계절마다 은은하게 자연 속에 푹 잠긴 내소사는 특히 눈 내린 설경 속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으뜸이다.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우리가 보아야 할 곳 중에 내소사를 꼽았다. 자연을 닮은 모습이 조화를 잘 이룬 사찰이라고 했다. 특히 대웅보전의 솟을연꽃살문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수백 년을 견뎌낸 나뭇결이 자연 그대로의 색감을 보여주어 눈여겨볼 만하다.
내소사 안에서는 무엇이든 자연스럽다. 절 마당에서 둘러보는 능가산의 산세가 낯선 느낌 없이 편안하다. 무채색의 사찰 색감이 고고하고 정갈하다. 도회인들에게 주는 한적함으로 유달리 힐링을 얻는다. 복잡한 세상에서 수습되지 못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이곳에 오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절 이름(來蘇) 때문인지 새해 들어 찾아가 보기에 걸맞은 절집이다.
곰소염전의 겨울
염전의 소금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다. 변산반도를 돌아보면서 철이 지났다고 곰소염전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다. 요즘 후쿠시마 원전 방류 문제로 소금 이야기가 분분한데, 천혜의 땅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곰소염전은 겨울이 되어 쉬는 중이다. 한때 전통 소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궁(宮)에 진상까지 했다는 곰소염전이다. 지금은 퇴락하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품질은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군데군데 염부들이 염전을 손질하고 정리하는 모습이 보이고, 건너편 산이 염전 속으로 들어와 반영을 이룬다. 부근의 곰소항으로 가면 곰소젓갈단지에서 질 좋은 젓갈을 구입하고, 감칠맛 나는 젓갈정식을 맛볼 수 있다.
자연의 집,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에서 머물다
채석강에서 자동차로 5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은 국립공원공단의 체류형 생태관광 시설이다. 숙소 창밖으로 서해의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젓한 자연 속 숙소에서 파도치는 바다가 보이고, 노을이나 별을 볼 수도 있다. 2023년 7월에 개원해서 내부 시설이나 집기 등이 깔끔하고, 저렴한 이용료까지 금상첨화다. 숙소를 보유한 본관 건물과 언덕 위 자연의 집이라는 독채 객실의 풍광이나 환경 또한 수준급이다. ‘숲나들e’에서 예약하는 전국 자연휴양림과는 달리 이곳은 국립공원 생태탐방원 홈페이지에서 매월 1일 예약이 시작된다. 생태 프로그램을 필수로 예약해야만 객실 예약이 가능하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3세에 이미 ‘천자문’을 떼고 6세부터 본때 있는 글을 썼다. 딱히 스승이 없는 채로 독학을 해 유학의 최고봉으로 부상했다. 평지돌출한 인걸이다. 뉘신가. 이른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면서 내세운 사상)으로 당대의 격변에 대응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다. 산 많은 양평군에서도 외진 서종면 노문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외진 곳일수록 반색한다. 산수경관이 살아 있어서다. 화서의 생가 마을 일대에도 중구난방으로 들어앉은 전원주택이 흔해 어수선하다. 그러나 시야에서 집들을 거둬내고 풍경을 바라보면 상황이 다르다. 높거나 낮은 산들은 조율한 듯 조화롭고, 산 사이론 벽계천이 흘러 오롯이 수려하다. 산자수명을 본연으로 지닌 곳이다. 낮엔 초목이 초록을 토하고 밤하늘엔 별들이 모여 소곤거린다. 박순, 김창흠, 남언경 등 조선 중후기 거유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이유를 알 만하다. 자연 풍경에 관한 관조를 최고의 공부이자 최상의 낙으로 삼은 게 선비들이지 않던가. 화서가 영위한 웅장한 삶의 원천적 비결은 이곳 산수를 젖으로 삼아 성장한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가를 볼까? 물소리 들려올 듯 벽계천 가까이에 있는 남향집이다. 집의 전체적인 모습은 좌우로 긴 ‘ㅁ’자를 닮았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자 공간을 확연하게 양분한 담장이 보인다. 담장 왼편에 안채가, 오른편에 사랑채가 있다. 담장에 난 중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를 오갈 수 있다. 흔히 앞쪽에 사랑채를, 뒤쪽에 안채를 두지만, 이 덩실한 고택은 특이하게도 안채와 사랑채를 병렬로 배치했다. 전형에서 벗어난 구성이다. 야산 자락 경사지를 깎아 확보한 대지의 면적이 협소해 사랑채를 앞쪽으로 끌어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범례보다 합리와 실용성을 중시한 건축이다. 사랑채엔 방이 유난히 많다. 묵어가는 이들이 많았던 걸 알 만한데 ‘청화정사’(靑華精舍)라 쓴 현판이 걸린 이 집에서 화서의 강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부가 많아 유학의 산정에 올랐으니 흠모하여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론이 다반사였으리라.
화서는 소가 닭 보듯 벼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의 한평생 이곳 향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화서에게 자연과 사교하는 일은 일상의 루틴이었다. 퇴계가 ‘도산구곡’을, 우암이 ‘화양구곡’을 경영하며 만족을 구가했듯이, 화서 역시 이곳의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다. ‘노산8경’이 바로 화서가 애호한 경승이다. 풍경에 시를 헌정하고 이름을 부여해 자연을 찬탄했다. 그렇다면 화서는 은자로 살았나? 세사엔 식상해 차라리 눈을 감았나? 정반대다. 그의 DNA에 초야의 생리가 박혀 있었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오감의 플러그를 빼놓고 살 성격은 아니었다. 고종 임금에 따르면 화서는 ‘밝고 슬기로우며, 강직하고 과감하여 뭇 사람을 초월한 인물’이다. 비록 산림에 묻혀 자족했지만 시국과 정세에 관한 지론이 깊어 주창과 직언도 많았다. 모름지기 사대부의 말년이란 산수간으로 물러나 세상일 따위는 흘러가는 뜬구름에 맡기는 게 상책이라고 보는 유가의 전통도 있었지만, 화서의 계보는 다른 쪽에 속해 있었다. 현실참여형 지식인의 본이었다.
산골에 칩거한 재야 지식인이더라도 학식과 덕망이 높으면 바람에 실린 송홧가루가 천리만리를 날아가듯, 결국은 그 이름이 멀리까지 알려진다. 제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튼튼한 세력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세력으로 힘을 쓴다. 이렇게 되면 조정이 그를 부른다. 화서 역시 임금의 부름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화서는 벼슬에 초연했다. 별별 임명장이 수시로 내려왔지만 곧바로 사직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때는 동부승지에 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화서는 75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 조정에 사직서와 함께 상소문을 제출했다. 상소문의 요점은 이렇다. 서양과 화친하지 말고 적극 싸우라는 것. 서양과 손잡는 건 짐승의 삶을 자청하는 꼴이라는 것. 백성을 수탈하지 않으면 백성이 스스로 고무돼 적을 몰아낸다는 것. 간명하고도 격렬한 상소문이었다. ‘위정척사’의 필요성과 실천적 대안을 역설한 글이었다. 매천 황현은 이 상소문을 ‘100년 이래 가장 유명한 상소문’이라 평가했다지.
당대의 격변과 풍랑을 잠재우는 길은 오직 나라의 문을 닫고 저항하는 데에 있다는 게 화서의 솔루션이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조짐을 통찰하는 한편, 일본의 조선 침탈을 예언했던 그의 광활한 현실 인식은 이른바 ‘화서학파’의 학통으로 전수돼 항일 독립운동의 밑불로 타올랐다. 화서의 사상적 상속자인 최익현, 유인석, 양헌수 등이 한말 국권사수의 전위에 서지 않았던가. 박은식과 김구도 화서의 계보에 든다. 그동안 화서는 반근대적인 골수 보수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외세의 불량한 본질을 간파하고 국권의 자주성 강화를 역설했다. 이런 주장에 박힌 줏대와 혜안을 외면하는 건 불공정하다. 한쪽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봤다는 허풍처럼 초라하다.
용문사 명물, 1000년을 산 은행나무
이제 발길은 용문사에 닿는다. 용문면 용문산 아래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화서 생가가 양평의 정신적 유적이라면 용문사는 불교 문화유산의 대표다. 일주문을 지나 냇가로 난 소로를 따라 30분쯤 오르면 용문사 경내가 환히 드러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펼쳐진 품새의 위용으로 보면 큰 절이다. 유서도 깊다. 신라 신덕왕 재위 때인 913년에 창건됐다. 일설에 따르면 원효가 초창하고 도선이 중창했다. 내력이야 어쨌든 첫 산문은 초막이나 토굴로 시작됐을 법하다. 그러던 게 천년 세월을 거치면서 대찰의 외양을 갖추어 번듯하다. 용문사에서 득도한 이도 한둘에 그치지 않을 텐데, 이를테면 고려 말의 선승 정지국사가 이곳에서 정진했다. 그는 중국 연경으로 건너가 만행을 하기도 했다.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던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을 만나 교유도 했고. 이후 무학과 나옹이 명성을 얻은 반면 정지국사는 자취를 감추고 수도하길 거듭하다 72세에 홀연히 입적했다. 용문사엔 정지국사를 기리는 부도와 비가 있다. 빼어난 조각 기법으로 아름다운 금동관음보살좌상도 이 절의 성보(聖寶)다.
용문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은행나무 노거수다. 수령 1000년 이상으로 국내 은행나무 중 최고령이다. 나무의 건강을 위해 가지치기를 대대적으로 해 현재 높이는 40m 정도지만, 이전엔 60여 m에 달해 유실수로서는 동양권 최대 거목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한 알의 씨앗에서 출발한 나무가 천년을 살다니. 단지 물과 햇빛을 취하는 광합성으로 기적적인 생육을 하다니. 그 도도한 생명력에 인간은 그저 압도될 수밖에 없다. 뭐랄까, 바위라거나 강물이라거나 거목이라거나, 묵연히 유장한 것들은 길을 일러주는 선생에 가깝다. 인간을 감싸주는 고요한 포용력으로 보면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겠지, 오늘도 은행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저 노거수를 보고 무너진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돌아간 이가 한둘이랴.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
“분원(分院)까지 네 곳 만들어”
경기도 양평군은 자연경관이 생동하는 곳이다. 특히 강 풍경이 수려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에 몰리는 인파를 보라. 사시사철 쉴 만한 물가다. ‘굴뚝 없는 청정지구’ 양평으로 아예 이주한 이들도 많다. 그래 인구가 늘어났다. 곳곳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문화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가령 지하에 묻힌 옛 유물을 발굴하기가 어렵다.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전통문화의 전승엔 다소 취약점이 있다. 반면 현대 문화가 확장돼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를 채워준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도드라진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한 긍정적인 현상이다. 양평문화원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다양한 문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근래에 있었던 문화원 사업 가운데 큰 성과를 거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하나만 꼽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추억의 영화 상영’으로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6년간 3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무려 1만여 명의 주민이 영화를 감상했다. 우리 문화원은 모든 문화 혜택이 주민들에게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걸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상영은 매우 주효한 프로그램이다.”
2024년에 펼칠 새 사업을 소개해달라.
“지방문화원은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사업을 한다. 그런데 지자체들이 대부분 2024년엔 긴축 예산을 편성하고 있으며, 양평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양평문화원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신년에 새 사업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기존 프로그램들을 점검하며 유지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안타까운 대목이다. 열정은 많지만 예산 문제로 늘 고민하는 게 지방문화원의 현실이다. 양평문화원은 학예사 같은 인적 자원을 갖추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벽에 부닥치는 일이 잦다.”
주민의 문화원 프로그램 참여도는 어떤가?
“양평문화원엔 현재 6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인구 대비 타 지방 문화원보다 많은 인원이다. 관내 4개 지역에 분원(分院)도 설립했다. 이는 사례가 드문 방식이라 판단한다. 문화원에 조경을 해 쾌적한 환경도 갖추었고.”
양평 하면 용문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양평을 불교 문화 융성지로 봐도 될까?
“그렇다. 천년 고찰 용문사 외에 상원사나 사나사 등 유서 깊은 고찰이 더 있다. 용문사에서 유명한 건 1000여 년의 수령을 가진 은행나무다. 양평문화원은 매년 10월, 이 나무의 장생과 군민의 안녕을 비는 ‘영목제’를 거행한다.”
양평엔 여느 군에 드문 군립미술관이 있어 돋보인다.
“양평엔 650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거주한다. 이런 배경으로 군립미술관이 설립됐다. 문화원 원사(院舍)에도 회화와 지역 유물을 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있다.”
문화원 현관엔 직접 발간한 책들이 진열돼 있다. 주민 누구나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책이다. 진취적인 서비스 기법이다.
감사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는 찾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찾지 않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저물어가는 계묘년을 감사로 마무리해보면 어떨까요.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백미는 보물찾기입니다. 장기자랑도 좋고, 김밥에 사이다 먹는 맛도 좋지만, 보물찾기만큼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시절 보물찾기는 학생 수만큼 보물이 적힌 쪽지가 넉넉하지 않고 찾기 힘든 곳에 감춰져 있는 게 아쉬운 점이라면, 감사 보물찾기는 보물 쪽지가 학생 수를 넘어설 만큼 충분할 뿐 아니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 남들은 불운이나 불행·불평·불만이라 생각하는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보물 쪽지가 생겨난다는 점은 가장 특별합니다.
감사는 나에게 없는 것을 찾는 게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 남들 눈에 하찮아 보일지라도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사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불행을 은혜로 돌리는 마법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며 나쇼날, 파나소닉, JVC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든 마쓰시타(松下)전기 창업주입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성공을 이룬 비결을 묻자, 하늘로부터 세 가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가난한 것, 병약(病弱)한 것, 못 배운 것이 그가 꼽은 세 가지 은혜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덕분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네. 또 허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지.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썼기 때문에 아흔이 넘은 지금도 겨울에 냉수마찰을 한다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야. 그 덕분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고 배웠다네. 이런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주었으니, 하늘이 준 은혜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부모를 탓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불행 속에 자신을 가둘 것들이 그에게는 하늘이 준 축복이자 은혜였습니다.
고마운 게 없는 당신에게
“너는 그게 고맙지 않니?”
“왜요? 저는 하나도 고마운 게 없는데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은진 씨는 아들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통수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팔십 넘은 아버지가 혼자 된 아들을 위해 좋아하는 육회거리 장을 봐오셨는데 한다는 말이 그 모양이라니요.
괘씸하고 서운해만 할 일은 아닙니다. 찬찬히 아들 마음을 들여다봐야 할 때입니다. 요즘 들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늘 성난 얼굴로 자기 방에만 처박혀 있기 일쑤에, 고마운 게 없다는 말은 자기 마음이 상처받고 병들어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보아도 자기 기대와 욕심에 못 미치는 것들뿐이라 불평·불만이 꽉 찬 상태여서 고마운 맘이 들어갈 틈이 없을 테니까요.
‘때문에’ 안경을 벗을 때
2018년에 나온 영화 ‘레슬러’(Love+Sling)에서는 자신(유해진 분)의 뒤를 이어 레슬링 국가대표 선발전을 눈앞에 둔 아들(김민재 분)이 갑자기 결승전 문턱에서 사라지면서 숨겨왔던 갈등이 폭발합니다.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웃음을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시작한 레슬링 놀이가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이르자, 아들은 이게 자신의 꿈이 아니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홀로 너를 키우며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은 자신에게 꿈이 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아버지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한풀이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거야, 이런 말은 자녀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줍니다. 부모의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미안함은 무력감, 좌절, 분노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지옥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매사를 ‘때문에’ 안경으로 보면 불평·불만,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 차게 됩니다.
밥 한 그릇의 여정(旅程)
‘감사’(感謝)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우리말 ‘고맙습니다’도 이전 글에서 필자가 풀어본 것처럼 당신은 ‘고마’(신을 뜻하는 옛말)와 같이 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은 내 앞에 있는 존재를 하늘과 같이, 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로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 잘 먹겠습니다)와 ‘고치소사마’(ごちそうさま, 잘 먹었습니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타다키마스’는 ‘하늘과 땅의 은총을 젓가락을 높이 들어 받겠습니다’를 줄인 말로, 나에게 생명을 내준 식재료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밥 한 그릇만 봐도 씨 뿌리고 키운 농부의 정성, 비와 햇볕과 바람으로 함께한 하늘의 정성, 탈곡과 정미, 유통, 그리고 깨끗이 씻어 밥을 한 정성까지 긴 여정을 거쳐 상에 오릅니다.
‘고치소사마’는 일본식 한자로는 ‘ご馳走様’가 되는데 ‘馳走’는 둘 다 ‘달리다’는 뜻으로, 이 식재료가 내게 오기까지 분주히 뛰어다닌 모든 사람에게 감사드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히스이 고타로, ‘하루 한 줄 행복’ 중에서)
감탄-감사-감동 삼위일체
몸도 마음도 지친 퇴근길,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이 버스에 탄 승객들을 위로하고 감사와 감탄, 감동의 물결을 이룹니다.
“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수능을 앞둔 인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한 명도 빠짐없이 돌아가도록 손수 초코과자를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선물을 받아 든 학생들이 고마워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감사에 주파수를 맞춘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감사 파동이 일렁입니다. 감탄-감사-감동은 삼위일체처럼 움직입니다. 아, 감탄하는 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고,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갑니다.
감사가 바꾸는 세상 : 덕분에 챌린지
#장면1
무인(無人) 카페의 문이 열립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들어오더니 목이 말랐는지 물을 마십니다. 갑자기 한 아이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향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합니다. 가게 문을 닫고 나가면서도 두 아이 모두 고맙다며 인사를 합니다.
#장면2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어른 손님들 속에 한 초등학생이 계산대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더니 동전을 기계 뒤편에 놓고 나서 CCTV를 쳐다보며 주인에게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아이스크림값 여기에 두고 간다고요.
최근 들어 무인 점포가 늘어나면서 주인이 지키지 않는다고 물건을 함부로 집어가거나 바닥에 용변을 보는 등 파렴치한 일이 간혹 뉴스에 등장하곤 합니다. 부끄러운 어른들 기사 속에 별처럼 아름다운 아이들 이야기가 가슴을 찌르르 울립니다. 학교폭력에 손가락질하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요즘 아이들 욕하다가 정작 내 곁에 다가온 착하고 아름다운 천사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장면3
코로나19 시국이 길어지면서 우리 국민 모두 지쳐갈 즈음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 ‘#덕분에챌린지’를 통해 의료진을 위한 릴레이 응원 이벤트를 펼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국민은 의료진에게 수어(手語)로 ‘존경합니다’라는 표현을 하고, 의료진은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라는 뜻을 담은 손동작을 공식 SNS에 올렸습니다. 숨 막히는 장비를 껴입은 채 밤낮없이 더위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역과 치료에 매진했던 의료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글로 영상으로 나눴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1. 어머니가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2. 아버지가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3. 아버지, 어머니를 존재하게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합니다.
4. 어머니가 탈 없이 무사히 자라셔서 감사합니다.
5. 아버지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셔서 감사합니다.
6. 부모님이 잘 만나셔서 감사합니다.
7. 부모님이 결혼하셔서 감사합니다.
8. 저의 형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9. 저를 낳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10. 저와 형이 세상을 느낄 수 있도록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1. 제가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12.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 형 수능 끝나고 힘든 기간 잘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21. 저 수능 끝나고 진짜 위험한 순간 잘 넘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
27. 늘 저를 믿어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63. 제 사생활을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7. 우리 가족이 최고여서 감사합니다.
2015년 4월 어느 날 필자 작은아들이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받은 후 부모 초청 행사에서 세족식(洗足式)을 하면서 읽어준 ‘100 감사’ 중 일부입니다. 올해 마지막 ‘마음 반창고’를 준비하면서 서랍에서 찾았네요. 당시 아들이 울면서 읽어 내려가느라 세세히 몰랐던 내용이 이제야 가슴에 들어옵니다. 독자님 덕분에 아들 마음을 다시 새겼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엔 구직 활동 과정에서 ‘자기소개서 작성’을 빼놓을 수 없다. 과거 중장년이 사회초년생이던 시절에는 이력서 정도만 준비하면 됐지만, 최근에는 자기소개서를 통해 구직자의 역량을 심층적으로 살피는 기업이 늘며 필수 자료이자 중요 자료가 됐다.
그런데 재취업을 위해 뛰어든 중장년 중 자기소개서 작성을 어려워하는 이가 적지 않다.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게 쉽지 않고, 기업마다 요구하는 인재상에 적합한 내용을 파악해 정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본지 ‘시니어 잡:담회’ 취재 당시 중장년 취업 컨설턴트들은 “새로운 업종이나 직업에 도전하려면 연대기식 이력서보다는 기능형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필요한데, 중장년의 경우 서술형으로 작성하는 자기소개서를 특히 어려워한다”며 “자기소개서를 잘 작성하려면 회사에 대한 정보와 지원하는 직군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기업 홈페이지나 관련 뉴스, 채용 공고 내용 등을 잘 살펴보면 좋다”고 조언한 바 있다.
또, 중장년들이 컨설턴트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샘플’(자기소개서 예시)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 관련한 정보를 주고 대신 작성을 부탁할 때도 있단다. (물론, 직접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기업에서 원하는 내용이나 글의 맥락에 도움을 얻기 위함인데, 이는 챗GPT(대화형 인공지능)로 일부 도움을 받아볼 수 있다. 가령 대화창에 ‘OO 기업 채용 핵심 전략 알려달라’, (관련 정보 입력 후)‘자기소개서를 작성해달라’ 등으로 제시하면 관련 내용을 답으로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해 커리어 플랫폼 ‘사람인’은 올해 ‘AI 자소서 초안 생성’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해당 서비스는 챗GPT를 기반으로 개발됐는데, 자기소개서 문항과 지원 직무 등을 기입하고, 그에 맞는 자신의 경험 및 이력 등을 키워드로 넣으면 AI가 문장 초안 마련해준다. 또, 사람이 자기소개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표절 검사 및 ‘AI 면접 코칭’과 연동한 면접 예상질문 답변까지 받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 당부를 덧붙인다. 공통된 주의사항은 2가지인데 ‘답변으로 제시한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지 말 것’ 그리고 ‘AI가 작성해준 자기소개서를 그대로 제출하지 말 것’이다.
챗GPT는 거짓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럴듯한 답변도 내놓기 때문에 참, 거짓에 대한 추가 점검이 꼭 필요하다. 잘 아는 정보를 정리해주는 용도로는 별무리가 없지만, 잘 모르는 내용이라면 무턱대고 신뢰하지 않는 편이 좋다. 가령 자기소개서처럼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이를 문장화하는 형태라면 스스로 사실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기업에 대한 정보 등을 확인할 때는 유의해야 한다.
챗GTP는 꽤 유려한 수준으로 문장을 구사하기 때문에, 글 솜씨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어떤 상황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어려울 때 활용하기 좋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기소개’에 대한 부분이기에 어느 정도 갈피를 잡는 정도로만 쓰고, 스스로 수정하고 다듬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한편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최근 챗GPT 등 AI 프로그램이 자기소개서 작성 및 구직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 일자리 사이트 Resume Builder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46%)가량이 챗 GPT를 사용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해당 보도에서 AARP는 중장년이 구직 활동에서 AI의 이점을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다.
△AI는 채용 공고를 찾는 데 유용하다. △AI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샘플 텍스트 제공) △AI는 연혁·주가·최신 뉴스 등 채용 기업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정리하는 데 효율적이다. △AI를 활용해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정리해볼 수 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신뢰할 만한, 완벽한 결과를 얻긴 어렵다. 조금이라도 정확도를 올리려면, 프롬프트(질문 값)를 구체화하는 것이 좋다. 또, 챗GPT로 특정 데이터를 물을 때는 해당 내용에 대한 출처를 함께 요구하면 사실 확인 시 유용하다”고 조언했다.
‘이게 뭔가? 세상에 뭐 이런 병이 다 있나?’ 몸 안에 심각한 병이 들이닥쳐 횡포를 부리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병명조차 알 수 없었던 정규원(54, 백민구절초연구소 대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갖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별 이상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조만간 죽음이 방문할 듯 몸의 통증이 자심했는데도 말이다.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민과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마침내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시골이라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기로 한 거다. 시골의 자연환경이 괴로운 육체는 물론 덩달아 저하된 정신까지 끌어올려 줄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의 귀농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규원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한 건 2010년, 41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인생의 전성기라 할 시즌이었으니 정리가 쉬웠으랴. 만족스럽던 직업(의류 관련 액세서리 사업)을 일거에 접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게다가 그의 곁엔 살뜰한 아내와 토끼 같은 어린 자식 둘이 있어 발목 잡히기 십상이었다. 과연 아내가 귀농에 동의할지,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하고 귀농할 경우라도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래저래 고심이 많았다. 그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우선은 혼자 외진 산속에 들어가 쑥이나 고사리처럼 조용히 사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TV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며 병부터 다스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내가 동행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만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내는 남편이 귀농을 선창할 경우 일단 반기를 든다. 매우 영민한 종족인 아내들은 날이면 날마다 풀을 뽑다가 뱀을 만나 까무러칠 가능성이 농후한 귀농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규원의 아내는 시골행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아마도 아내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민만큼이나 어려운 역경과 맞닥뜨릴 수 있는 게 귀농이다. 하물며 남편만의 단독 귀농이라면? 이는 가정의 불안정을 촉진하는 지름길이다. 최악의 경우 가정의 해체까지 불러들일 수 있다. 정규원의 아내는 이와 같은 리스크를 고려해 전향적인 판단을 했을 테다. 아내의 대범한 태도에 힘을 얻은 정규원은 마침내 귀농 거사를 착수하게 됐다.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사업을 정리한 뒤 가족 모두를 대동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가 귀농한 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청주시 문의면이다. 이왕이면 아주 낯선 객지보다 연고가 좀 있는 곳이 정착에 유리하겠다는 생각으로 점찍은 곳이다. 거처는 농촌 마을이 아닌 면 소재지에 마련했다. 초등생 아이들의 등하교 편의를 배려한 결정이었다.
“귀농 초기엔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텃밭 농사를 통해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음식을 주로 먹었고, 부지런히 뒷산을 오르내렸다. 명상센터에 나가 수련을 하며 마음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농사에 대한 구상도 많이 했다. 논을 사 벼농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쌀만큼은 직접 농사지어 먹자는 아내의 의견에 공감해서였다.”
귀농 전에 미리 받아둔 귀농교육이나 농사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나?
“서울에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주관한 귀농교육에 관심이 있어 아내와 함께 참여한 경험이 있다. 경기도 의왕에 텃밭을 마련해 작은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소소한 경험치에 불과했다. 사실 계획 없이 막연한 귀농을 한 셈이었다. 건강 문제가 화급해 사전 준비를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농업만큼 만만치 않은 직업이 드물다고 알려져 있다. 섣불리 농사에 뛰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농사로 가족을 건사하느라 고생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농업에 매력을 느껴보진 못했다. 하지만 한줄기 동경 같은 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알겠더라. 농부로서 긍정적인 풍모를 지녔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귀농교육은 귀농 이후 적극적으로 받았다. 이를테면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1년간 교육을 받았다. 친환경 농업을 기본 방향으로 정한 바 있어 관련 공부를 해 유기농업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전자상거래 등 다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필요를 느껴 E-비즈니스 교육도 받아두었다.”
일련의 농업교육을 이수한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나? 아니면 몸 치유에 치중한 시간이 더 많았나?
“치유와 농사를 병행했다. 그게 바람직한 길이기도 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건강도 서서히 좋아졌고, 좋아지는 건강 상태에 따라 농사에 대한 의욕도 상승했으니까. 2013년엔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는 귀농인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상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멧돼지들이 농장을 초토화하기도
정규원이 선택한 주 작목은 구절초다. 구절초를 재배, 가공식품을 만들어 판매한다. 현재 그는 산속에 있는 4000평 규모의 구절초 농장을 운영한다. 바야흐로 유능한 구절초 농부로 부상하고 있다. 출발은 미미하고 미묘했다. 할머니 묘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가 가을바람에 살랑대는 구절초 꽃을 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200평 남짓한 작은 땅에 구절초를 심은 게 구절초와 인연을 맺은 계기라는 게 아닌가. 일종의 감성적 충동으로 시험 재배 삼아 구절초를 심어봤을 뿐인데 이게 향후의 길을 환하게 열어줬다.
“남에게 빌린 200평짜리 작은 밭에서 거둔 구절초로 조청을 만들어봤는데 50인분 밥솥 하나 분량의 조청이 나왔다. 판매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조청 품질이 좋다며 구입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홍보도 해주었고.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판매 효과까지 거둔 뒤엔 서서히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자연스럽게 구절초 농사에 본격 입문한 셈이다.”
조청만 생산하는 건 아니겠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구절초꽃차, 모종, 체험 상품인 에코화분, 그리고 구절초블랙이라 이름 붙인 농축액 등을 생산한다. 주력 상품은 구절초블랙이다. 이건 유기농 구절초 함량 97%에 달하는 제품으로 나름 야심을 가지고 개발했다. 현재 상표출원 절차를 밟고 있다. 소비자의 80% 이상은 구절초 제품을 약용 목적으로 구입한다. 구절초블랙은 이와 같은 소비자의 니즈에 부응하기 위해 개발됐다.”
구절초 농사 전체 과정 가운데 어려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
“모든 농사가 그렇듯 구절초 역시 제초 작업부터 뭐 하나 손쉬운 게 없다. 재배 기술 습득은 비교적 용이하다. 문제는 날씨 변동이다. 예상하지 못한 폭우와 긴 장마엔 구절초가 맥을 못 춘다. 과도한 습기에 약한 작물이니까.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밭에 경사도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병충해 예방을 위한 선제적 대응 능력도 필요하다.”
흔히 병충해 방제는 농약에 의존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유기농업은 농약 없는 농사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생태환경 유지에 공을 들인다. 난 구절초 농장 복판에 억새섬이라 부르는 작은 숲을 조성해 자연생태와 평형을 이루도록 했다. 이 작은 숲은 병충해의 기습을 완충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마귀 알집도 활용한다. 미리 채집한 사마귀 알집을 봄철에 방사하는 것인데, 부화된 사마귀들이 해충들을 먹어치운다. 이렇게 사마귀들이 농장을 지켜준다. 그런데 난해한 복병이 하나 있다. 바로 멧돼지다.”
멧돼지 피해가 심각했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멧돼지가 구절초도 먹나?
“구절초를 먹는 건 아니고 땅속에 있는 굼벵이를 꺼내 먹기 위해 밭을 아예 농부처럼 갈아엎는다. 한번은 멧돼지 군단이 몰려와 농장을 투철하게 초토화했다. 징을 쳐대고, 포수를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더라. 포수들이 야간 매복을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녀석들의 공격은 한 달간 이어졌다.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울고 싶은 심정이다.(웃음)”
구절초 향수를 개발하고 싶어
농사로 긍정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안락을 얻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죽하면 귀농을 고행에 견주랴. 정규원은 비지땀 이상의 피땀을 쏟았다. 덕분에 순항을 거듭했다. 매우 어려운 사안으로 알려진 판로 문제도 길을 잘 찾아 해결했다. 생명운동을 지향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관계를 맺어 상품을 납품, 꾸준히 안정적인 경영을 해왔다. 세상에서 익힌 처신과 경험을 슬기롭게 제련해 귀농 생활의 재료로 활용하는 능력도 뛰어나 안정적인 행보의 거름이 됐다. 그의 언사는 나직하고 다소 어눌하다. 반면 내부엔 뭔가 강철 같은 게 들어 있다는 느낌을 풍긴다. 이기심은 줄이고 이타적 선의를 키워 나아가는 게 삶의 정수를 맛보는 길이라는 신념을 육화한 인간 유형이랄까. 그는 사실상 신념을 밀어붙이며 당찬 귀농 생활을 해왔다. 2013년에 결성한 문화적 농업 공동체인 유기농협동조합에 이어, 2017년엔 경제 공동체인 마을기업 ‘백민구절초연구소’를 만들어 리드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 문제는? 여전히 아픈 몸을 고독하게 끌어안고 농장에서 뛰나?
“실로 고통스러웠다. 오죽하면 몸 하나 살려보자고 귀농을 했겠는가? 몸이 추락하자 온갖 회의가 몰려들기도 했다. 이 지경으로 몸을 망쳐놓다니, 난 패배자야! 그런 넋두리가 잦았다. 그런데 기대보다 빠르게 건강이 회복됐다. 2017년에 이르러선 병의 늪에서 거의 완전히 해방된 걸 알았다. 따라서 마을기업 결성에 나설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덧 대학생으로 자랐다지? 뒷바라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가계 형편은 어떤가?
“서울에 있던 집을 판 자금의 절반쯤은 귀농 초기에 다 까먹었다.(웃음) 농업으로 소득을 거둔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젠 꾸준히 소득이 늘고 있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부인은 당신의 농사에 어떤 식으로 조력하나?
“아내는 아내대로 일이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한다. 각자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상황에 우리 부부는 만족한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게 아내이고.”
만약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귀농을 하게 된다면 지금과 어떤 점이 달라질 거라고 보나?
“(잠깐 생각하다가) 일을 좀 줄여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귀농 방식을 모색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내겐 아직 꿈이 많다.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는 과욕과 과속 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농장을 키워왔다. 하지만 확장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구절초 가공 제품을 세계 시장에 선보이고 싶고, 구절초의 아찔한 향을 재료로 한 향수 개발에도 뜻을 두고 있다. 그 매너리즘 없는 정신이 그의 돛을 밀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정규원이 주는 귀농 Tip
•집과 농지를 서둘러 구입할 것 없다. 평생의 삶터로 삼을 경우엔 더 신중해야 한다. 처음엔 남의 농지를 빌려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농사 규모를 크게 설정하는 건 금물이다. 내 농사는 작게, 그리고 남의 일도 도와주면서 농사 물정을 익히는 게 필요하다.
•농업 교육기관에서 만난 귀농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자. 모임을 만들어도 좋다. 결국은 귀농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농사만으로 자립하기 쉽지 않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을 살린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보완하자.
•구절초 농사에 뜻이 있을 경우 5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로 시작해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판로 문제에 대한 사전 연구도 필수다. ‘한살림’ 같은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해 활로를 모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