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과학 기술과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 속에서 현대인의 삶은 지속적으로 다양해지고 복잡해졌으며 변수도 늘었다. 끊임없는 갈등과 지나친 경쟁, 소통 단절로 생겨나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저마다의 마음에 상흔을 남긴다. 사납게 일렁이는 사회의 굴곡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온 몇 가지 증후군을 소개한다.
기침 한 번에 불안해하는 건강염려증
건강염려증은 자신의 실제 몸 상태보다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강박장애다. 사소한 증상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며, 의사의 진단도 믿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몇 년간의 팬데믹을 거치며 TV나 신문, 책, 유튜브 등 의학 정보를 다루는 채널이 늘고, 인터넷이나 SNS 등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의학 정보가 난무해 나타난 결과다.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에 따르면, 건강염려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신체적 불편에 대한 인내심이 낮아 감각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당면해 환자 역할을 함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피하려고 하는 경우, 상실이나 배신으로 인한 분노와 죄책감 등의 방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와 같은 다른 정신질환의 변종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건강염려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공통적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며 CT, MRI 등 각종 검사를 반복하는 닥터 쇼핑(Doctor Shopping)을 한다. 검사 결과가 정상이며 질병이 없다고 진단한 병원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나름의 치료를 진행하며 건강식품 섭취나 민간요법에 심취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오히려 건강 정보를 지나치게 접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평소 자신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일상의 모든 것이 걱정 램프증후군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 근심이나 걱정을 불러내 스스로 괴롭히는 현상이다. 과잉 근심이라고도 한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접한 범죄, 사건 사고, 재난 소식뿐 아니라 뉴스에 보도되지도 않은 추측성 글이나 루머에서도 대리 외상을 겪는다. 더 나아가 실제보다 과장해 받아들이고 막연한 공포감을 느낀다.
다수의 광고에서는 대중의 불안한 심리를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다년간의 흡연으로 폐암이 발생한 사람의 인터뷰를 공익광고로 활용하고, 특정 제품 또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주입한다. 금융·보험 업계에서도 가난한 노인의 모습을 제시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유발하며 상품을 권유한다.
우리는 핵가족화·고령화로 인해 독거노인과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개개인이 가족이나 공동체의 보호 속에 있지 못하고, 충격과 불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과한 걱정이나 불안 때문에 장기간 학업, 대인관계, 직업 생활 등에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사람이 하는 걱정의 4% 정도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96%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니 96%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일상의 평화를 되찾아보자.
순간의 소비와 쾌락 좇는 도파민중독
현대로 올수록 세상은 결핍에서 풍요의 공간이 됐다.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스마트폰 화면에 답이 나타나고, 필요한 상품을 주문하면 당일 혹은 다음 날 바로 받아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서 알아내거나, 답을 찾는 동안 좌절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걸 기다려야 하는 습관을 잃고 있다. 더불어 SNS, 게임, 유튜브·OTT 시청, 음식 섭취 등 중독적인 행동을 반복해 뇌의 도파민 생성을 자극하고,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졌다.
도파민은 뇌의 시상하부에 의해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주로 행복감이나 만족감,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애나 렘키(Anna Lembke) 스탠퍼드 의과대학 중독의학 교수는 적절한 도파민 분비는 인간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지만, 폭발적으로 분비될 경우 신경회로가 손상돼 정상적인 작동이 어려워진다고 설명한다. 뇌는 쾌락과 고통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시소와 같은 성질이 있다. 쾌락을 느끼는 순간 해당 행위를 다시 하고 싶은 욕구, 즉 고통으로 이어진다. 특히 현대인은 순간적인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대가를 더 많이 치르게 된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쾌락과 고통의 균형을 맞추고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기 위해 자극을 찾게 된 셈이다.
그는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헐적 단식, 찬물 샤워, 운동, 학문적 노력, 창의력을 발휘할 만한 일 등 ‘미리 수고하기’를 제안한다. 일부러 어려운 일을 먼저 함으로써 도파민 수치를 건강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중독된 것이 무엇이든 4주간 완전히 끊어보는 구속을 통해 뇌의 항상성이 회복되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4주가 지난 후에는 각자에게 맞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면 된다.
예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해 애완동물이라 했지만, 이제는 사람과 ‘심적 친밀감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로 반려동물이라 부른다. 신문이나 광고에서 반려동물 천만 시대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보이는 현재, 동물들은 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참고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 한겨레 애니멀피플)
작은 몸에 올망졸망한 눈으로 한결같이 나만 바라보는 반려동물은 우리 마음의 정화를 불러일으킨다. 성별, 외모, 장애, 경제력 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며 비판하거나 질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최근 강아지, 고양이, 새와 같은 동물을 인생을 나누는 ‘반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638만 가구로, 인구로 환산하면 15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국내 반려동물 산업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펫 택시, 전용 유치원, 장례 서비스, 원격 양육 서비스 등 관련 시장 규모는 2015년 1조 9000억 원에서 지난해 3조 4000억 원으로 성장했으며, 전문가들은 2027년에는 6조 원으로 2015년보다 3배 이상 확대되리라 전망했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방송사마다 동물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SNS와 동영상 플랫폼에 동물 콘텐츠가 넘쳐난다.
반려동물의 긍정적 효과
우리 사회가 점점 고령화되어가고, 1인 가구가 꾸준히 늘면서 동물은 사람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이자 가족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반려동물이 사람의 심리와 정서 안정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19년 서울시 취약계층 반려동물 양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동물을 기르는 청장년 1인 세대보다 노인 부부 세대가 더 높은 심리적 효과를 누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하면서 책임감 증가, 외로움 감소, 삶의 만족도 향상, 스트레스 감소, 대화 증가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반려동물이 노인들의 인간관계와 사회활동을 촉진하는 사회적 윤활유 역할을 하는 셈이다.
반려동물과 장기간 생활하면 기억력 감퇴와 인지 능력 저하 등을 늦춰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반려동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식사를 챙겨주고, 산책을 시켜주거나 털을 빗겨주는 등의 행동이 치매 환자의 정신 상태나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해서다. 미국 플로리다주 제니퍼 애플바움(Jennifer Applebaum) 박사가 50세 이상 1300명의 인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53%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인지 능력 저하 속도가 느렸다. 애플바움 연구원은 “반려동물과의 상호작용과 스트레스 감소의 생리학적 측정(코르티솔 수치 및 혈압 감소를 포함해 장기적으로 인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 사이에 연관성을 확인했다”며 “반려동물이 인지 저하를 예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초기 증거”라고 말했다.
동물들은 그저 존재하는 자체로 치유를 일으키기도 한다. 공원에서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걷는 강아지의 뒷모습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테니 말이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애니멀 테라피’를 실시하고 있다. 애니멀 테라피란 동물을 통한 치료 방법을 말한다. 활용되는 동물로는 개, 고양이, 돌고래, 소 등 다양하다. 예컨대 난독증 환자의 치료법 중 강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있다. 난독증 환자들은 자신이 더듬거리는 것에 대해 깊은 열등감이 쌓여 있거나 주눅 들어 있는 등 평소 자신감이 약한 태도를 보이기 쉽다.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은 존재인 개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낮아진 자신감을 올려주고, 점차 말을 더듬는 증상을 완화하는 식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일본 내 유기 동물 문제 해결과 노년층의 건강 회복 모두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올해부터 요양원에 애니멀 테라피를 도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환경성은 지자체가 보호 중인 개나 고양이를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보내 노인의 심리 치료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동물과의 아름다운 이별
노년에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거나 계획이 있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반려동물의 죽음이다. 보통 반려동물의 평균 수명은 15~20년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정들었던 동물 친구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식처럼 기른 반려견, 반려묘가 죽어 큰 슬픔을 호소하는 ‘펫로스 증후군’을 겪기도 한다. 특히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적고 반려동물을 향한 심리적 의존도가 높아 극도의 우울, 무기력, 자책 등의 감정을 동반할 수 있다.
애니멀피플이 공공의창·한국엠바밍·웰다잉문화운동과 함께 실시한 ‘한국 반려동물 장례 인식조사’를 보면, 펫로스를 경험한 응답자의 과반수가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52.8%)을 꼽았다. 우울증(19.5%), 반려동물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18.7%), 죽음에 대한 분노(7.9%) 등이 뒤를 이었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던 대상이 떠난 후 밀려오는 그리움과 상실감은 당연하지만, 이를 잘 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 관련 책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의 저자 이학범 수의사는 “반려동물과 이별하며 슬픔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러 증상이 함께 나타나거나 기간이 길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심리적·정신적 고통을 겪지만, 수습 절차나 방법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주변 산에 묻는 행위는 불법이다. 보통 동물은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쓰레기봉투에 담아 생활 쓰레기로 배출하거나, 동물병원에 맡겨 의료용 폐기물로 처리한다. 최근에는 오랜 친구를 폐기물로 처리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늘면서 병원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합동 화장을 진행하거나, 반려동물 장례 시설을 이용하는 추세다. 동물 장묘업체는 반드시 이동식 장묘업체가 아닌 농림축산식품부에 등록된 업체여야 한다. ‘e동물장례정보포털’(eanimal.kr)을 통해 합법적인 업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반려동물을 부탁할 곳도 고민해야 한다. KB국민은행에서는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내 강아지를 돌봐줄까 고민되는 사람들을 위해 반려동물 신탁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반려동물의 주인인 ‘위탁자’가 사망해 반려동물을 돌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수탁자’인 은행에 자금을 미리 맡기고, 본인이 사망한 뒤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인 ‘사후 수익자’에게 반려동물의 보호 관리에 필요한 양육 자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반려동물을 돌봐주는 조건으로 가족 또는 제3자에게 자신의 유산을 일부 상속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어떻게 돌봐줘야 하는지 등 상세한 내용을 담은 유언장이 있어야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한편 비교적 명확한 반려동물 관련 산업의 성장성에 비해 반려인 사망 시 반려동물에게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이에 돌연사, 고독사, 사고, 질병 등에 의해 반려인을 잃고 홀로 남을 반려동물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 마련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죽음은 떠나는 이의 생애 마지막 과제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이가 견뎌야 할 무게이기도 하다.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몸의 반쪽을 떼어낸 듯한 슬픔을 초래한다. 사랑하는 남편 또는 아내의 부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상재회’의 가사처럼 꿈에서도 그리워하며 울어야 할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점잖이 보내주어야 할까. 정답은 없다. 그저 장마처럼 퍼붓던 슬픔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반려자의 몫까지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밖에.
“아내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가 않습니다.” 한순간에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자가 있다. 홀로 살아남아 병원에 도착한 그는 불과 10분 전 아내를 잃었음에도 평온한 얼굴로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는다. 그러나 자판기는 삐걱대며 말을 듣지 않고, 돈을 잃은 그는 집에 돌아가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쓴다. 고장 난 자판기로 인해 불편을 겪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아내가 죽었는데 왜 눈물 한 방울조차 나지 않는 것인지, 아내의 환영이 수시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알 수 없는 마음을 토해낸다.
상실을 다룬 영화 ‘데몰리션’은 아내와 사별 후 감정이 고장 나버린 남자가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자판기 회사 직원 캐런을 만나 자신의 진짜 내면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의 상황을 굴곡 없이 보여주다 마침내 ‘슬픔’을 느낄 때 마무리된다. 그에게 슬픔은 극복해야 할 시련이 아닌, 새 삶을 위해 마주 봐야 하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슬픔의 모양은 같지 않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준다. 모든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특히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은 극한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는 ‘상심증후군’을 앓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심리학자 토머스 홈스와 리처드 라히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가까운 친구의 죽음(36점),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63점), 이혼(73점)보다도 배우자 사망(100점)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가장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준석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연구원은 “사별 경험은 대개 충격과 마비, 그리움과 분노 등을 거쳐 심한 무기력과 우울감을 초래한다”며 “특히 시니어의 사별은 생애 주기 마지막 단계에서 겪는 이별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무력감과 공포가 더욱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별자가 같은 단계를 밟아나가며 동일한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이가 있는 반면, ‘데몰리션’의 주인공처럼 공허한 감정이 먼저 고개를 내미는 경우도 있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은 “지난달 코로나19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센터를 찾아왔다.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죽음에 어리둥절하고 무감각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사별 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아니다. 눈물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어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억울하고 섭섭한 것도 당연하다. 모두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라며 “다만 2개월 정도 지나도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우울증이 나타날 수 있으니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래도 계속되는 삶을 위해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전 생활로 돌아가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사별 경험자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특히 어려워한다. 집 안 곳곳, 생활 면면에 배우자의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센터장은 “사별 전의 일상으로 80% 정도 돌려놓는 것이 중요하지만, 회복이 어렵다면 시공간을 재배치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시공간의 재배치’란 생활과 환경을 사별 전과 다르게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리모델링, 이사 등으로 공간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다. 단 지나치게 먼 곳으로 떠날 경우 낯선 환경에 더 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평소 잘 알던 동네나 근거리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은퇴 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니어라면 일주일 단위로 계획을 세워 루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때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등 주 2회 정도 규칙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좋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경우 주변인의 반응으로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속감에서 비롯된 안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떠난 이의 몫까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양 연구원은 “우리의 삶이 상실과 사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별 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따금 삶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찾아온다. 그것이 삶의 신비다”라고 말했다.
도움받을 수 있는 기관과 모임
서울어르신상담센터 ▶ 사별로 인한 상실, 우울감 등 생활 속 문제를 겪고 있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무료 상담을 진행한다. 내방 상담, 전화 상담, 온라인 상담 등 방식이 다양하다. 온라인 홈페이지 ‘상담신청예약’ 게시판에 상담 유형을 선택 후 글을 남기면 담당자의 회신을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 ‘마음건강 테스트’를 통해 가벼운 자가진단도 가능하다.
건강가정지원센터 ▶ 전국 207개의 지역 센터를 운영하며, 생애주기에 따라 발생하는 가족 내 다양한 문제와 갈등, 심리적 외상 등에 대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거주 중인 시·도와 지역구를 선택하면 지역센터 사이트로 이동한다. 해당 홈페이지 ‘사이버상담’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답변을 받을 수 있다.
인터넷 사별 카페 ▶ 사별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다. 전문가와의 상담도 좋지만, 인터넷 사별 카페 회원들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아픔을 공유하는 것도 슬픔을 덜어내는 방법 중 하나다.
배우자와의 사별 후 극심한 슬픔에 잠겨 고인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사례를 종종 접한다. 그 밖에 가족이나 친구, 반려동물, 애착했던 인물(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의 죽음 뒤 황망한 심정을 떨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비극은 대개 상심증후군의 악화로 일어나곤 한다. 죽음이 아닌 물리적 단절이나 소외 등으로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하며, 특히 자녀 문제로 인한 상심 증상은 빈둥지증후군이라 일컫는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심리학적으로 상심증후군은 애도(哀悼) 증상과 비슷해, 애도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했고, 많은 것을 함께했던 사람, 즉 배우자와의 사별은 가장 큰 상심을 안긴다. 일반적으로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애도기간을 보낸 후에도 극도의 슬픔이 지속되거나 눈물이 나고, 이전처럼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면 상심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고인과 생활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 바뀌어야 상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보통 6개월 정도면 뇌가 새로운 습관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라 슬픔에 잠기기도 해, 1년 정도 지나야 회복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애도기간을 거친 뒤에도 상심이 가시지 않고, 무기력증, 우울증, 분노 등이 동반되거나 면역력 저하 등 신체적 질환까지 나타난다면 곧장 병원이나 심리센터를 찾는 것이 좋다. 상심증후군은 자살과 관계된 척도로 검사가 이뤄질 만큼 위험한 증상으로, 주변에서도 유심히 살피고 도움을 줘야 한다.
사별 아닌 부재도 상심증후군 불러와
# A(68·여) 씨의 남편은 몇 해 전 치매 진단을 받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 요양원은 외진 곳에 있었고, A 씨는 거동이 불편해 남편을 쉽게 볼 수가 없다. 은퇴 후에 일상을 함께 나누던 남편과의 생이별로 그녀는 무기력해졌고 삶의 무의미함마저 느낀다.
A 씨처럼 꼭 사별이 아닌, 배우자의 부재로도 상심증후군을 앓을 수 있다. 특히 치매나 다른 중병으로 온전한 대화와 교감이 어려운 상태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사별 못지않은 심리적 스트레스와 상심을 겪게 된다. 심해지면 망상장애나 정신분열증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면역력 저하를 비롯한 섭식장애, 근육통, 탈모 등 신체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시절보다 중장년기에 사별(또는 부재)을 겪었을 때 상심증후군에 취약하다. 버팀목이었던 존재가 사라지면서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자신의 삶마저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장년기는 직장생활이나 양육 등의 의무가 줄어드는 시기로 미래 목표의 가치가 흐려져 더욱 무기력해질 수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사별은 예고된 이별과 다름없다. 상심증후군 예방법 중 하나는 언젠가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꼭 유서를 쓰거나 심각할 필요는 없다. 가령 “내가 죽으면 통장은 OO에 뒀으니 찾으면 돼”, “당신이 먼저 떠나면 난 고향에 내려갈까 해” 등 자연스럽게 죽음 이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심을 완화할 수 있다. 또, 이별의 아픔을 겪었더라도 작은 목표라도 세워 생활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한 달짜리 체크리스트를 만들거나,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만약 이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봐야 한다.
사회적 빈 둥지 함께 겪는 아버지들
# 은행 지점장 출신 B(66·남) 씨는 퇴직과 동시에 인맥이 줄줄이 끊기며 자연스레 약속과 모임도 줄어들었다. 거금을 들여 유학을 다녀온 아들은 진로 문제로 B 씨와 다투더니 독립하겠다며 집을 떠났다. 노후자금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그는 한없이 우울하다.
자녀의 독립으로 상심과 외로움을 느끼는 증상은 빈둥지증후군이라 한다. 주로 갱년기 여성이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성도 이러한 증상을 보일 때가 있다. 특히 퇴직 후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소외를 당하면서 ‘사회적 빈둥지증후군’을 호소하는데, 여기에 자녀 문제로 가정에서의 빈둥지증후군까지 겹치면 증상이 악화된다. 그렇다고 전업주부의 증세가 덜한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 대신 아이와 밀착해 육아에 몰입해온 엄마들은 자녀가 떠났을 때의 충격과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이나 배신, 반항심으로 자녀가 떠났다면 부모의 상심은 훨씬 크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있거나,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상황을 겪는다면 증상 회복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빈둥지증후군 역시 예측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녀 독립 후 계획’을 미리 세워두면 좋다. 또, 자녀가 물리적으로 멀어졌을 뿐 아주 자신을 떠났다고 인식해서는 안 된다. 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마음의 유대가 중요하다. 실천적 방법으로는 ‘봉사활동’이 있다. 자식에게 헌신했듯, 누군가를 돕는 일로 상심을 달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가급적 지속가능하면 더욱 좋다. 무엇보다 누구의 부모가 아닌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빈 둥지를 새로움으로 채운다면 상심은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
분노사회’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 중장년의 경우 ‘한이 많은 세대’라 불릴 만큼, 노여움과 울분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이가 대다수다.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해, 또 누군가는 화를 내뱉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다. 이러한 화가 자칫 ‘분노증후군’이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흔히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으로 잘 알려진 ‘분노증후군’은 오랜 시간 축적된 화를 표출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다. 이와 반대로 ‘분노조절장애’는 느닷없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화를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분노조절장애의 경우 지하철에서 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노인이나 묻지마폭행을 가하는 중년남성 등이 표면적 이슈가 되어 이러한 증상을 가진 시니어가 많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생계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온 한국 중장년의 특성상 분노증후군을 겪는 이가 훨씬 많다(분노조절장애는 해외에서, 또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남). 다만, 가족도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는 증상이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조증상이 덜한 암일수록 늦게 발견돼 치료가 어렵고 위험하듯, 분노증후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나도 꿈이 있었는데… 엄마의 울화
# 70대 여성 A 씨는 젊은 시절의 사회 분위기와 가정 사정 등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한을 자녀 교육을 통해 풀고자 했고,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은 고학력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자녀들은 번번이 어머니의 무지(無知)함을 들먹이며 무시를 일삼았다. 이에 A 씨는 소외감과 우울함으로 지난 세월을 한탄했고, 급기야 극단적 시도까지 생각하게 됐다.
한국의 중장년 여성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학력 단절을 겪거나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전업주부로서 소임을 다했고, 못다 이룬 꿈을 대신 펼쳐줄 자녀들에게 헌신하며 살았다.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의 공(功)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식수준과 비교하면서 종종 무시하거나 소외시킨다. 물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본의 아니게 내뱉은 말 등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중장년이 박탈감을 갖게 되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번아웃증후군(소진증후군)까지 겹치면 심한 우울 증세가 나타나고, 상태가 악화하면 극단적인 시도까지 감행한다.
이렇듯 위험한 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가 확인이 쉽지 않아 예방이 어렵다. 몇 가지의 체크리스트만으로 진단할 수 있는 단순한 심리·정신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와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예방책은 자녀들 손에 달렸다. 보통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과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한다. 그러나 이럴 때 자녀가 따뜻하게 공감해주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면 부모의 울화는 조금씩 누그러진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묻어둔 고충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게 좋다.
내가 왜 화를 냈지? 분노 컨트롤이 어려워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60대 남성 B 씨는 최근 들어 자괴감이 많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들어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자주 역정을 내곤 한다. 심할 땐 욕설에 소리까지 지르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희한할 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데, B 씨는 분노조절이 안 될 때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몰려와 괴롭기만 하다.
분노조절장애는 뇌신경이나 호르몬 등의 문제로 스스로 감정 조절이 어려워 뜻하지 않게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마치 조울증처럼, 심하게 화를 냈다가 이내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곤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본인은 물론 주변인까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증상이 의심되면 반드시 정신과 진료와 약물치료 등을 받아야 한다.
특히 과거에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았거나 파킨슨, 치매 등 뇌 질환 환자인 경우는 분노조절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또,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망가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때때로 분노조절장애가 지속되다가 우울증이 오거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한 주변과의 소통 단절을 겪어 분노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중장년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증상이 더 심해지므로 환절기나 추운 계절엔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주변에서 점검해주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보고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길 권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신아연 소설가가 전 남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고즈넉한 봄날 5월의 주말 아침,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어느 덧 7년째,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눈을 뜨고, 혼자 아침을 먹고, 혼자의 하루를 시작합니다. 내가 없는 당신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밥보다 빵을 좋아하니 오늘 아침도 빵을 먹었겠군요. 그러고는 산책을 나가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간간이 글도 쓰면서 나처럼 단조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요?
호주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겠군요. 이 무렵의 기온은 두 나라가 비슷하지요. 하지만 한국은 여름으로, 호주는 겨울을 향해 서로를 등지며 가고 있지요. 북반구와 남반구는 계절이 반대이니까요. 한때는 생을 함께 꾸려왔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는 당신과 나처럼 말이죠.
당신, 환상지 증후군이란 말 들어봤어요? 손이나 발이 절단된 후에도 그 부위의 감각이 여전히 느껴지는 증상, 가령 손목 아래가 잘려 나간 사람이라면 손 전체나 손가락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감각되는, 그래서 ‘유령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증상 말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는 환상지 증후군(phantom limb syndrome)이라고 한다네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나는 그 증상에 시달렸어요. 어떤 상황에 처하거나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우리 이렇게 할까?” 하며 마치 당신이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자동으로 고개를 돌려 말하곤 했죠. 늘 옆에서 걷던 당신의 기척이 느껴져 몸을 쓸어내리던 적도 있었고요.
당신과 내가 살았던 보라매공원 옆, 방 두 칸짜리 신혼집 부근(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도 서성거려보고, 아이들을 낳았던 난곡 입구 박산부인과 앞도 일 없이 지나가봤습니다. 무엇보다 꼬박꼬박 닥치는 주말이면 서러움이 더해서 하릴없이 거리를 헤매곤 했는데, 이것도 모두 환상지 증후군 탓이었지 싶어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주말이라는 개념조차 흐려져 삶은 온통 무덤덤, 무감각의 잿빛입니다. 온 나라를 뒤덮은 뿌연 미세먼지처럼.
“당신은 돈만 있으면 될지 몰라도 나는 돈 빼고 다 잃었다”던 당신의 고함이 아직도 귓바퀴를 울립니다. 21년간 당신과 함께 살았던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당장 내 입 하나를 먹일 수단이 없어 밥벌이에 전전긍긍하며 제발 돈 좀 보내 달라고 하자 전화로 당신이 내게 내지른 소리였지요. 아마도 당신은 이혼을 전제로 한 법적 별거기간 1년 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때 내 수입은 신문 기고로 받는 월 30만 원이 전부였던 터라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지만, 굶어 죽으면 죽었지, 먹고살 길이 없어 다시 당신에게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지요. 그 정도로 나의 이혼 결심은 확고했고, 그럴수록 당신의 분노와 원망은 커졌고 급기야 절망과 체념에 이르러 이혼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는 한때 서로 살을 ‘베어 먹일’ 듯 사랑했지만, 이혼을 앞두고는 서로의 살을 ‘베어 먹을’ 듯 으르렁거렸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모든 일들이 한바탕 꿈인 것만 같아요. 독 서린 감정의 날카롭던 칼날들도 시나브로 무뎌져 품속 어딘가의 칼집 속으로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당신을 꿈에서 만납니다. 꿈에서 당신은 대부분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다시 호주로 데려가려 하지요. 악몽이라도 꾼 듯 소스라치게 놀라 깨고는 꿈이라며 안도합니다.
당신에 대한 연민과 염려의 마음과는 별개로 당신의 폭력을 지금껏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커녕 세월이 흐를수록 25년 결혼생활 내내 당신이 내게 가한 폭언과 폭력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형식적으로라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분노조절장애와 폭력 성향을 고쳐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지요. 아니, 그 심각성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지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데도, 가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남편이라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더 중했던가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혼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둘째가 우리의 이혼 수속을 맡게 된 거였어요. 변호사가 되자마자 한 일이 제 손으로 제 부모를 법적 이혼시킨 거였으니…. 그 애가 하필 가정법원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위로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이래저래 미숙하고 부끄러운 부모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우리의 어머니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우리 두 아이들,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린 나와 당신에게 가정의 달 5월은 황폐하고 무참합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작은 아이까지 세 식구의 생일이 들었던 지난 4월도 잔인했지만, 우리에겐 5월도 여전히 잔인한 달입니다.
신아연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21년간 호주에서 지내다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인문예술문화공간 블루더스트를 운영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 심리치유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인문에세이 ‘내 안에 개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