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은 ‘MSG워너비’ 활동 당시 ‘옛날 사람’으로 불리는 동시에 많은 20·30의 MZ세대 팬을 얻었다. 젊은 팬들의 존경의 마음을 느낀다.
“사실 제가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에요. 음색이 독특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지금도 노래 연습을 열심히 합니다.”
고(故) 최진영의 ‘영원’ 리메이크곡을 발표하기까지, 걱정이 많았다. 그럼에도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팬들과 함께 작업해서다.
“팬은‘또 다른 김정민’이죠. 저를 만들어줬고 지켜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팬들과 여동생, 남동생 같은 사이가 된 것 같아요.” 세 아들의 아버지인 그는 건강관리가 최고의 노후 준비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인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
“어쩌다 보니 기러기 아빠가 됐어요. 제 인생에서 그려본 적이 없는 삶인데, 쉽지 않더라고요. 아내와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중년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감을 찾았다고 말하는 김정민. 그가 지금껏 쏟아부은 노력과 부단한 채찍질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To. 브라보 독자
“매일 ‘오늘 하루도 나나 잘하자!’고 다짐합니다.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면, 행복한 세상이 열립니다!”
가을이 오면 우울증은 언제, 어디서든 뜬금없이 시작된다. 가령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정말 마음에 안들 때, 혹은 마치 어제 막 맨몸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이때 스카프를 떠올리는 건 ‘슈퍼 그레잇’한 일이다. 밋밋한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만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즉흥적으로 자신의 집 커튼을 쭉 찢어 스카프처럼 목에 감아 스타일을 ‘업’시켜줬다는 일화도 있지 않은가. 이번 가을 잘 고른 스카프 하나가 자식보다 더 큰 효도를 할지도 모른다.
패션에서 대부분의 아이템은 기능적인 목적에서 고안된다. 추위를 막거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데 이 스카프만큼은 태생적으로 장식적인 멋을 강조한 아이템이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멋을 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얘기다. 그만큼 스카프를 고르고 연출할 때는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요즘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차림이 화제다.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년) 여성으로 뜨겁지도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다양한 스카프 스타일링은 패션에 대한 그녀의 높은 감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령 독일 순방 중에는 평범한 회색 투피스에 핑크 스카프를 둘러 품위 있는 룩을 완성하기도 하고, (정신없던) 대선기간 중에도 편안한 옷차림에 감각적인 스카프 스타일링으로 우아함을 놓치지 않았다. 스카프를 얘기하며 배우 김용건을 빠트릴 순 없다. 소문난 멋쟁이인 김용건은 슈트를 입을 때도, 가볍게 봄버 점퍼를 입을 때도 스카프를 빼놓지 않는다.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스카프의 풍성한 주름으로 옮겨간다. 고수의 향기가 툭툭 둘러맨 스카프에서 느껴진다.
스카프는 군인의 예복 차림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정장 차림에 기품을 더하기에 그만이다. 남자의 경우 실크 소재의 유연한 광택을 지닌 스카프를 셔츠 안에 풍성하게 매면 타이와는 또 다른 뉘앙스의 정장을 완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밋밋한 원피스 위에 스카프만 잘 둘러주면 새 옷 못지않은 신선함을 줄 수 있다. 옷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토트백의 손잡이 부분에 얇은 스카프를 둘러 장식할 수도 있고, 1950년대 여배우처럼 머리에 두를 수도 있다. 휴양지에서는 멋진 선드레스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스카프 스타일링법이 궁금하다면 핸드폰을 켜고 에르메스의 ‘Silk Knots’ 앱을 다운받자. 상상 그 이상의 스카프 스타일링법을 친절하게 동영상으로 소개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연이 스카프 스타일링에서는 중요하다!
스카프를 한 번도 안 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매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매력 넘치는 스카프는 구입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스카프가 처음인 사람은 무늬가 없거나 스트라이프, 페이즐릿 같은 고전적인 무늬를 고른다. 이후 스카프 스타일링에 익숙해지면 점차적으로 과감한 프린트의 스카프에 도전한다.
요즘은 유명 작가의 일러스트를 담은 스카프나 타이포그래프가 그려진 스카프가 유행이다. 컬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외투나 재킷 컬러와 톤온톤으로 시작해 이후 보색이나 시즌 컬러의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면 옷 입는 재미를 배가할 수 있다.
스카프를 고를 때는 예산을 넉넉히 하자. 피부에 직접 닿는 아이템이자 볼륨감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이므로 고급 소재를 고르는 것이 좋다. 한 번 사면 오래 두고 사용하는 것이니 목걸이나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고르듯 공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스카프는 마치 매력적인 친구 같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빠져든다.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 스카프, 이 가을에 스카프가 필요한 이유는 끝도 없이 많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는 진짜 남매를 알아채는 방법 한 가지가 있다. 원활한 관계를 위한 친절한 안부는 없고 퉁명스럽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어간다면 100%다. 멋진 추억여행이 있다기에 만난 김미혜(42)씨와 김대흥(40)씨는 완벽한 남매 자체였다. 화창한 봄, 꽃향기 살짝 풍기던 어느 날. 인사인 듯 인사 아닌 인사 같은(?) 직설 화법 쏘며 대화를 이어가는 남매. 이들이 만나 두서없이 나누는 이야기는 역시나 여행. 부모님과 함께여서 행복했다는 여행 이야기였다.
해군 출신 부자, 여행에 추억 더하기
“아버지! 저랑 같이 술 마시고 좀 돌아다녀요. 입원하고 나면 한 달간은 못 마시니까 여행이나 함께 하시죠?”
퇴역 군인 아버지와 배우 아들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해군에서 복무 중 잠수를 많이 한 탓에 생긴 염증으로 아버지 김성준씨가 고막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아들 대흥씨의 꿀맛 같은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술이나 마시게 여행을 가자니.
“동해안 해군 부대를 쭉 둘러보고 오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아버지는 해군 퇴역 군인이시고 저 또한 해군으로 제대했거든요.”
군복을 벗고 다시 그곳으로 가면 어떤 느낌일까? 군부대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근처라도 닿게 되면 그 또한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원도 봉평에서 메밀전병 사 먹은 것을 시작으로 정동진, 통일전망대까지 쭉 훑고 올라갔다. 아버지 김성준씨가 수술을 바로 앞둔 2012년 3월 중순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여행
여행의 행선지가 동해안으로 정해진 이유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흥씨가 찾아낸 빛바랜 아버지 사진. 발견 당시 기분은 소름끼칠 만큼 신기했다고 대흥씨는 말한다.
“해군에 들어가 얼마 안 됐을 때인 일병 시절, 배 위에서 사진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사진을 뽑고 난 뒤 집에서 앨범 정리를 하다가 아버지 젊을 때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와 아버지가 찍은 사진 배경이 똑같은 거예요. 위치까지도요. 소름이 끼쳐서 ‘아버지 이거 뭐예요?’ 그랬더니 ‘그 배, 내가 미국에서 끌고 온 배야’라고 그때서야 말씀하셨어요. 시간을 초월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곳에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언젠가 그 배에 가서 꼭 한번 같이 사진 찍자고 약속했어요.”
“늙은이들끼리 한번 늙은이 보러 갑시다”
여행에서 바라던 최고의 장면은 퇴역 함정과의 해후였다.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의 ‘강릉통일공원’에는 아버지와 김대흥씨의 군 시절을 함께했던 같은 기종의 구축함이 전시돼 있다. 배와 만난 시대와 그 이유는 달랐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오랜 친구임에 분명했다.
“둘 다 군 생활을 마치고 여행 가서 퇴역 배에 다시 올라탄 거잖아요. 다 고물로 만난 거죠. 배는 고물, 아버지는 퇴역 군인, 나는 제대 군인. 이 셋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말이다. 이 무심, 무뚝뚝, 무정한 부자는 정말 꼭 같은 장소에서 사진 한번 찍자는 말을 제대로 지키고야 말았다. 단둘이 간 여행에서, 단둘이 찍은 사진이 ‘바로 그 위치’란 곳에서 찍은 단 한 장(!)뿐이란다.
“남자들이 다 그렇죠 뭐(웃음). 만나면 술 먹고. 여행으로 서로 더 돈독해진다거나 그런 거 없어요. 낮에는 운전해야 하니까 술은 못 마시고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젊으셔서 술 정말 잘 드셨어요. 수술 앞두고 어머니가 술 못 드시게 하시니까 제가 아버지에게 술 실컷 마실 기회(?)를 드린 것이죠. 그러고 딱 돌아오자마자 입원하고 수술하셨어요.”
여행 가서 정치 얘기는 금물
“술 먹고 아버지랑 싸우지 말걸 그랬어요.”
술이 부르는 여러 가지 사건 중 하나가 싸움. 대흥씨도 아버지랑 여행하던 중 다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배에 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시작해 천안함 사건으로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더니 결국 정치 얘기로 가고야 말았다. 해서는 안 될 대화였다고 회상했다.
“당연히 군인으로 한평생을 산 아버지와 저는 분명한 이견이 있었어요. 여행 가서 아버지랑 얼굴 붉힐 줄이야(웃음). 지금은 싸운 것도 웃기지만 좋은 추억이 더 쌓여서 괜찮아요. 이 여행을 계기로 영화 시나리오도 썼고요.”
여행 뒤 김대흥씨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을 주제로 한 작품 를 집필했고 2014년 제주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가작’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솔직히 엄마와 딸은 들어본 적 있어도 다 큰 아들과 나이 든 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아버지와 싸웠던 것도 시나리오에 녹였죠. 단 정치로 싸우는 거 말고 다른 것으로 상상해 썼어요.”
아버지와 단둘이 또 여행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대흥씨.
“아버지랑 함께 군함에 올랐던 것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가 정말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부모와의 여행은 좋지만 늘 고민되는 일
그러면서도 부모님과의 여행이 쉬워졌다거나 편해졌다고 선뜻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히 쉽지 않아요. 부모님과의 여행은 아무리 자주 여행을 함께한다 하더라도 늘 대단한 각오가 필요해요. 그게 쉽다고 말하면 정말 제가 이상한 사람이죠. 가기 전에 항상 고민해요. 이 돈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가서 맞출 것도 많고요. 그래도 갔다 오면 잘 다녀왔다 생각하게 됩니다.”
김대흥씨는 시시때때로 사진을 찍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의 시간을 기록한다. 여행은 부모와 가족 모두를 사진에 담기에 아주 적당한 장치 같은 것이다.
“지금 제 핸드폰에도 부모님 사진이 있거든요. 미혜 누나 결혼식 때도 북촌길을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요. 요즘 보면 대부분 부모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많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욱더 부모님과의 여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누나가 여행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을 거예요. 누나는 엄마랑 대만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말 잘 놀다 왔더라고요.”
둘째 누나 김미혜씨의 꽃보다 엄마 ‘대만 편’
이제 그럼 김대흥씨 누나의 여행 이야기에 빠져볼까? 김대흥씨는 삼남매 중 막내. 둘째 누나 김미혜씨가 여행에 조예가 깊다고 귀띔해줬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은 전문가 수준이라고. 현재 IT업계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미혜씨는 전직 여행작가다. 거짓말 약간 보태 국내외 구석구석 안 가본 지역과 나라가 없을 정도다. 지금도 호시탐탐 여행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혜씨는 가방에서 앨범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엄마와 대만 여행 갔을 때 사진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념도 될 것 같고요.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어요.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엄마랑 여행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여행지에서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늘 엄마가 생각나더라고요.”
김미혜씨 가족은 제주 출신이다.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살았고 종착지는 부모님이 나고 자란 제주가 됐다. 제주에 살고 있는 부모님. 물리적인 거리가 다소 걸림돌이 되지만 엄마와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곳에 갈까 찾아보고 고민한다. 그렇게 떠난 첫 외국 여행지는 대만. 이유가 있었다.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을 재밌게 보셨나봐요(웃음). 일본이나 중국 2박 3일로 갈 수 있는 곳을 추천해드렸는데 갑자기 대만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혈액 투석하는 어머니를 위한 맞춤 일정
미혜씨는 고민 끝에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대만을 자주 다녔고 여행 일정도 짤 수 있었지만 패키지여행을 선택한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어르신이랑 여행을 할 때는 식사와 동선이 문제거든요. 젊으면 모르겠는데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게 힘들어요. 무엇보다 식사를 특히 잘 맞춰주잖아요. 현지식과 한식을 고루 섞어주니까. 자유여행의 경우 자식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걸 눈앞에서 보시니까 부담스러워하시더라고요. 패키지는 여행 전에 돈을 미리 지불하잖아요.”
혹시나 패키지여행의 일정이 빡빡하고 버스 이동이 많아서 어머니가 재미없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매 순간 즐기고 따라다니셨다고 했다. 그리고 패키지를 선택한 이유가 또 있다. 어머니의 건강이 문제였다. 어머니 이경숙씨는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한다. 그래서 멀리 가고 싶어도 2박 3일이 넘는 여행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월·수·금 중 하루 투석이 끝난 오후 시간에 여행을 떠나요. 제주도에서 투석하거나 서울에서 할 때도 있어요. 만약 엄마가 속초나 이런 곳에서 여행을 하시게 되면 며칠을 자야 하니까 제가 미리 그 근처 병원을 알아보고 시설이 어떤지 확인하고 예약해요. 그런데 항상 하는 일이라(웃음). 대만 갈 때는 아주 많이 기대하셨고 다녀와서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고 말씀하세요.”
여행남매, 지금도 여전히 여행 계획 짜는 중
작년 미혜씨는 엄마와의 홍콩여행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 몸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어머니의 투석은 여행을 참 힘들게 하지만 해결하고 넘어야 할 일. 그럼에도 미혜씨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짧게라도 여행을 꾸준히 다닐 것”이라고 말한다. 오는 10월 아버지 김성준씨의 고희(古稀)를 기념해 김미혜, 대흥 남매는 온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 여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부모님이다. 아이들은 더 좋은 곳에 많이 갈 것이기 때문에 일정 대부분은 부모님 위주로 짤 계획이다.
김대흥씨는 자신과 누나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했다. 부모와의 여행이 불편하다는 편견을 좀 깨주고 싶었다고.
“여행 가고 싶은데 불편해서 못 간다구요? 어머니 투석 챙기는 누나 보세요. 그래도 누나는 하루라도 젊을 때 엄마랑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거든요. 게다가 저희 부모님은 제주에 사시잖아요.”
돈이 꼭 있어야만, 그리고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게 부모와의 여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터뷰 말미, 호기심이 발동해 질문 하나를 던졌다.
“누나와 동생, 단둘이 여행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이구동성으로 단호히 대답했다.
“없죠(웃음).”
계절과 상관없이 즐겨 먹는 설렁탕은 깍두기가 그 맛을 좌우한다. 여름엔 흘린 땀으로 약해진 몸보신용으로, 겨울엔 언 몸을 녹여주는데 설렁탕만 한 것이 없지 싶다. 마니아들은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넣어 구수함에 얼큰함을 더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직폭력배를 깍두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헤어스타일을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다녀서 그렇기도 하고 깍두기 국물이 피를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누군가의 빈곤한 상상력이 죄 없는 깍두기를 여지없이 폄하시키고 말았다. 이렇듯 맛있는 김치의 종류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를 이르는 별칭으로 쓰이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깍두기 애호가인 필자로서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깍두기는 이와 달리, 편을 가를 때 어느 한쪽에 붙여주는 덤과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늘 이런 깍두기가 있었다. 놀이를 하려고 편을 짤 때 짝수가 아니면, 한사람이 남게 된다. 남은 사람의 위치가 난감해지는 경우에 깍두기는 이편도 되었다가 저편도 되는 만능선수였다. 그렇다고 깍두기가 놀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부족한 아이를 내칠 수는 없고 함께 놀기 위해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놀고 싶은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언니가 데리고 온 어린애나 형보다 실력이 못 미치는 동생들, 어딘가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깍두기로 끼워주었다.
필자는 전학을 많이 다녔다. 친구를 사귈만하면 다시 전학 가는 바람에 긴 시간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네 번 전학을 했다. 그때마다 늘 외롭고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마다 놀이도 조금씩 달라서 따라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럴 때, 아이들은 필자에게 깍두기를 시켜주었다. 깍두기에게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누리지만, 패배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깍두기의 실수를 인정해주고 너그럽게 대했다. 그래서 걸려도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게임 내내 함께 놀 수 있었다. 놀이 규칙은 따르지만 벌칙은 받지 않는, 술래를 피해 숨기는 하지만 잡혀도 술래가 되지 않았다. 아마 요즘 같으면 깍두기 같은 존재는 쉽게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점을 빌미로 괴롭히기보다 그 약점을 보완해주고 기죽지 않고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생의 놀이문화였다.
깍두기를 허용한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그 작은 행복감이 씨앗이 되어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운동회에서 달리기하던 한 초등학생이 넘어졌다. 넘어진 친구를 두고 일등을 하기 위해 앞으로 달리는 대신, 뒤로 달려가 쓰러진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함께 달리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시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 되었다. 얼굴 가득, 좋은 일을 한 뒤의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지고도 이겼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에서 깍두기였던 지난 시절의 필자를 떠올렸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따뜻한 감성과 사랑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변함없이 간절하다. 어쩌면 깍두기 정신은 그런 본능에서 싹 튼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로 시끄럽던 놀이터는 휑하고 집에서 혼자 논다. 혼 밥, 혼술을 즐기는 문화가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함께보다는 혼자가 즐겁게 하는 걸까? 편안한 것인가?
바로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깍두기이고 싶어 하며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깍두기 문화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