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은 섬 부자다. 우리나라 3300여 개 섬 중 2165개가 전남에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군에 1004개가 모여 있다. 신안군을 천사 섬이라 부르는 이유다. 2019년 10월 신안군 기점·소악도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 열두 개가 지어졌다. 아무 볼 것 없던 섬에 천사의 은총이 내린 듯했다.
갯벌을 건너는 섬티아고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는 병풍도,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 등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병풍도를 뺀 나머지 다섯 섬을 한데 묶어 기점·소악도라 부른다.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은 노두길로 이어져 있다. 노두길은 섬과 섬 사이를 잇는 길을 말한다.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난다. 오래전 섬 주민이 갯벌에 돌을 던져넣어 만든 것이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를 덮어 포장했다.
썰물이 되면 노두길이 드러나 기점·소악도가 하나로 이어진다. 서너 시간 뒤 밀물이 찾아오면 노두길이 사라져 다시 다섯 섬이 된다. 자연이 매일 하루에 두 번 이 신비한 마술을 부린다.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바다만큼 넓은 갯벌이 나타난다. 바닷물에 말갛게 씻긴 갯벌은 곱디곱다. 짱뚱어, 칠게, 달랑게, 다슬기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귀여운 갯벌 생물들을 구경하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드넓은 갯벌과 섬 문화인 노두길을 품은 기점·소악도는 2018년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되었다. 섬마을 가꾸기 사업의 목적으로 한국, 프랑스, 스페인 건축미술가 열한 명이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 열두 개를 지었다. 기점·소악도 주민 80% 이상이 기독교인이고, 증도면이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와 관련된 것에 착안했다. 열두 개의 아름다운 건축미술 작품을 찾아 걷는 길을 ‘순례자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스페인 산티아고를 본떠 ‘섬티아고’라 부르기도 한다.
한 사람을 위한 작은 예배당
열두 개 예배당은 예배당이라 불리지만 특정 종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누구라도 종교와 상관없이 묵상, 기도, 명상, 쉼을 할 수 있는 휴식처다. 예배당마다 고유번호가 있고, 모양이 모두 다르다. 공통점은 예배당 안에 두 명만 들어가도 꽉 찬다는 것. 1인용 예배당인 듯 작다. 예배당을 지은 작가들은 이곳을 찾은 이들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바랐던 것일까.
순례길을 걸을 때는 보통 번호 순서대로 걷는다. 기점·소악도 중 면적이 가장 넓은 대기점도에 1번부터 5번까지의 예배당이 있다. 순례길은 약 12km다. 부지런히 걸으면 4시간 남짓 걸린다.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이지만, 걷는 중에 밀물이 되어 노두길이 사라진다면 서너 시간 동안 썰물이 되길 기다리거나 섬에서 하루 묵어야 한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 배 시간과 물때를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
섬 여행을 할 때는 이런 불편함을 오히려 즐긴다. 당일치기가 가능해도 섬에서 하룻밤 묵었을 것이다. 마지막 배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떠나면 섬은 고요해진다. 호젓한 이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때다. 갯벌 위로 떨어지는 붉은 해, 밤새 섬을 휘감은 회색빛 해무, 푸른 밤 노두길을 비추던 하얀 보름달, 산책길에 동행해주었던 민박집 강아지 복실이가 삼삼하다. 어쩌면 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울지도.
걸어도 자전거를 타도 좋을 순례길
원래 계획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대기점도 민박집에서 묵었다. 지나고 보니 더 잘된 일이다. 민박집 음식이 아주 맛있었다. 이번 여행에선 여행 당일 물때와 민박집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순례길을 거꾸로 걷는 게 나았다.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12번 예배당이 있는 소악도에 도착해 순례길을 걸었다. 첫날 여덟 개 예배당을 둘러보고, 이튿날 민박집 근처에 있는 나머지 예배당을 찾아다녔다.
소악도와 모래 해변으로 연결된 딴섬에 12번 ‘가롯 유다의 집’이 있다. 몽쉘미셀의 성당이 연상되는 예쁜 예배당이다. 처마에 순례길 완주를 알리는 종이 달려 있다. 소악도 진섬 솔숲 해변에서 만난 11번 ‘시몬의 집’은 가운데에 통로를 내어 솔숲과 바다를 예배당 안으로 불러왔다. 9번 ‘작은 야고보의 집’은 소악도 둑길 끝에서 찾았다. 프로방스풍의 오두막이 생각나는 예배당이다. 나무문과 스탠드글라스 지붕의 조화가 아름답다.
소악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길에서 만난 8번 ‘마태오의 집’은 멀리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갯벌 위에 세운 이 예배당은 러시아 정교회를 닮았다. 양파 모양 지붕이 오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소기점도 게스트하우스 뒤편 언덕에 있는 7번 ‘토마스의 집’은 흰색 외벽과 파란 나무문이 돋보인다. 바닥에 별과 달 모양의 색유리를 박고, 내부에 손바닥 크기의 성경책을 두어 동화 속 집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소기점도 저수지에서 만난 6번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호루라기 모양이다. 저수지 위에 지어 출입할 수 없었지만, 저수지에 비친 고운 반영을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섬마을 이야기를 담은 예배당
소기점도에서 대기점도로 넘어가는 노두길 입구에는 지붕이 요정의 고깔처럼 생긴 5번 ‘행복의 집’이 자리했다. 물고기 비늘 모양의 목재를 하나씩 붙여 지붕을 완성했다. 대기점도 남촌마을 팔각정 근처에는 염소 조각상이 지키는 4번 ‘요한의 집’이 있다. 문 맞은편 벽에 세로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구멍 사이로 무덤 한 기가 보였다. 이 예배당에는 무덤 주인을 기리는 누군가의 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별장처럼 생긴 3번 ‘작은 야고보의 집’은 대기점도의 논두렁과 연못을 지나 숲으로 가는 길에 보였다. 문에 거울을 붙여놔 내 모습이 비쳤다. 잠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기점도 북촌마을 언덕에 있는 예배당은 2번 ‘안드레아의 집’이다. 고양이 조각상과 양파 모양의 민트색 지붕이 눈길을 끌었다. 북촌마을에 길고양이가 많아 고양이 조각상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예배당 옆 정자에 오르면 대기점도와 병풍도를 잇는 노두길이 훤히 보인다.
1번 ‘베드로의 집’은 대기점도 선착장에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건물 양식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울렸다. 화장실을 갖춘 유일한 예배당이다. 예배당 위치가 신의 한 수처럼 보였다. 곡선으로 휘어진 방파제 끝에 그림처럼 서 있다. 국내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착장이 또 있을까.
1번 예배당에는 순례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종이 달려 있다. 여행자들이 이 종을 울리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 나는 기점·소악도를 떠나기 전에 순례길 완주를 기념하며 종을 쳤다. 선착장에 따라온 복실이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탔다. 기점·소악도에 다시 올 때는 복실이가 털갈이를 끝냈기를.
◇ 여행 정보 ◇
기점·소악도 숙소 민박집이 있으니 잠자리는 걱정 없다. 순례자의 길 중간 지점인 소기점도에는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061-246-1245)가 있다. 식당도 함께 운영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열지 않을 수 있으니 반드시 예약 후 방문해야 한다. 대기점도 북촌마을에는 대기점민박(010-9226-2093), 노두길민박(010-3726-9929) 등이 있다. 대기점민박 주인장의 음식 솜씨와 인심이 매우 좋다. 식사는 생선, 나물, 장아찌, 해산물로 구성한 8000원짜리 백반이 기본이다. 식사 예약은 필수. 건물은 노두길민박이 더 깔끔하다.
교통 신안군 압해도 송공여객선터미널에서 대기점도까지 차도선(천사아일랜드호)이 운항한다. 송공항에서 출발해 당사, 매화, 소악, 소기점, 대기점, 병풍, 소악, 매화, 당사도를 거쳐 송공항으로 돌아간다. 송공항에서 대기점도까지 70분 정도 걸린다. 배 시간은 계절과 물때, 기상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므로 반드시 미리 확인해야 한다. 배 예약: https:// island.haewoon.co.kr / 송공여객선터미널: 전남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718-64 / 문의 해진해운 061-279-4222
기점·소악도 전기자전거 투어
소악도 선착장과 대기점도 선착장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전기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반납할 때 대여한 곳 또는 반대편 대여소에 반납하면 된다. 이용료는 1일 5000원이며, 반대편 대여소에 반납하면 1만 원이다. 순례길이 대부분 평지 포장도로이므로 자전거로 돌아보기 좋다. 전기자전거로 오르막도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대여 문의: 010-6612-5239
2018년 어느 가을 날, 아침 일찍 인천의 연안부두 대합실로 향했다. 초등학교 동문 선·후배 12명이 소청도와 대청도 투어를 할 목적으로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여건이 된다면 바다낚시도 할 예정이었다. 연안부두를 출발하여 소청도에 들렀다가 대청도를 경유해서 백령도를 목표를 출발하는 쾌속선 ‘코리아킹’을 탔다.
과거에는 인천서 백령도까지 240여km. 시속 12노트(22km) 정도로 달리던 옛날 연락선은 10시간가량 소요됐는데 지금은 쾌속선으로 4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다. 그것도 소청도, 대청도를 들러 기항하는 시간까지 합친 것이니, 실제 항해 시간은 3시간 반 남짓으로 보면 될 듯하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연안부두를 출항한 ‘코리아킹’은 유유히 인천대교 밑을 빠져나가자 거침없이 망망대해를 달렸다. 쾌청한 날씨이기는 하나 해무(海霧)가 살짝 물든 바다를 가르며 달리니 흡사 거대한 모터보트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우리 일행은 멋진 여행을 기대하면서 출렁이는 가을바다로 가르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멀리 섬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소청도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청도’는 인천에서 210km 거리로 옹진군 대청면에 속해 있는 섬이다. 지도에서 보면 북방한계선(NLL)을 기준으로 가장 북쪽에 백령도, 그 아래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가 있다. 바위섬인 소청도는 ‘소암도’라고도 하였으나 이후에 수목이 무성한 섬이라 해서 ‘소청도’로 불린다. 완만한 섬의 형태가 남북으로 길게 널려 있고, 200여명이 채 안 되는 주민들이 두 개 마을(예동, 노화동)에 살고 있다. 옹진군에 속하는 소청도는 한때 '푸른 섬'이라 하여 청도(靑島)로도 불린 바 있다.
서해 5도를 밝히는 등대 소청도 등대
섬의 서쪽 끝 해안절벽 83m 고지에는 새하얀 소청도 등대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소청도 등대는 대한민국 서해안의 최북단에 위치해 육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등대로 기록돼 있다. 마을을 지나 등대로 가는 길은 언덕배기 외길이다. 소청등대는 1908년 설치되었다. 점등 당시의 등명기가 지금도 광채를 발하며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돌고 있다. 소청도 등대는 1908년 1월에 점등(點燈)하였으나 등탑이 노후하여 2006년에 새로운 등탑을 건립했다. 콘크리트 구조의 등탑 높이는 18m로서 42㎞ 떨어진 해상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3교대 근무를 한다는 등대지기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등탑에 올라 바라본 바다는 너무나 푸르고 고요했다. 해안선 따라 울긋불긋 가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햇살은 따사로웠으나 해풍이 시원하게 불어주니 마음속에 쌓여있던 찌꺼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소청도에는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제법 가파른 산비탈에 미로처럼 자동차길이 나있었다. 4륜구동 2대에 나누어 탄 일행은 마치 곡예 하듯 달리는 차에 의지한 채, 작은 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소청도 분 바위
소청도에는 유난히 하얀 바위가 많았다. 과거 섬 주민들은 값을 쳐주겠다는 육지 사람들의 말에 하얀 바위를 깨 자루에 담아 팔았다. 쏠쏠한 수입원이었다. 지난 2016년 지질학자들이 이곳을 다녀가고 나서야 소청도의 '귀한 존재감'이 드러났다. 분을 바른 듯 하얗다고 해서 분바위로 불렀던 바위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이었다. 석회암이 오랜 시간 열과 압력을 받아 대리석으로 변한 것이었다. 소청도 남동쪽 끝자락에는 이런 대리석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다. 조상들은 달빛에 빛나는 대리석을 '월(月)띠'라고 불렀다. 등대가 없던 시절에는 이걸 보고 뱃길을 찾았다고도 한다. 분바위(월띠)는 석회암이 변하여 대리암으로 된 것으로서 하얗게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원생대 지질유산이므로 천연기념물 제508호로 지정되었다.
분바위가 우뚝 서있는 해안가에는 무성한 다시마와 홍합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바다냄새가 물씬 코에 스민다. 분바위와 더불어 바닷물에 잠긴 갯바위의 고고한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바다풍경은 어릴 적 섬에서 나고 자랐던 우리들에게는 잃어버린 향수를 일깨워주었다. 바닷물에 빠지지 않고 갯바위에 겨우 의지한 채, 바닷물에 간들거리는 다시마를 채취하니 금세 한 무더기가 되었다. 신이 난 일행은 홍합을 채취해서 즉석에서 홍합탕을 끓였다.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홍합의 구수한 맛에 모두가 환성을 지른다. 어디 그 뿐이랴! 말간 바닷물에 성게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귀하디귀한 성게가 이렇듯 지천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으니 이 얼마나 청정해역이던가! 성게를 건져올려 맛을 보니 그 짭조름한 맛 뒤에 달콤한 향이 뒷맛으로 입안 가득히 풍긴다. 즐거운 시간을 뒤로 한 채, 소청도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멀리서 신나게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 ‘코리아 킹’을 타고 일행은 다음 여정지인 대청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