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약 800km의 길을 한 달가량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물론 출발지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섬이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순례길처럼 걷는 길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 섬의 12사도 순례길은‘섬티아고’라 부른다.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신안 섬의 순례길은 갯벌이 살아 있는,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바로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다.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달에 다녀와서 지금껏 그 들판이 차분하게 나를 다스린다. 여건상 순례길 일부만 돌아봤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찾아가 제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마음속에 기분 좋은 여정을 감춰두고 기다리는 은밀한 기분이다.
순례길의 주요 지점은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제와 합덕성당, 원시장과 원시보 우물터를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를 경유해 신리성지까지 약 13.3㎞ 코스로 비순환형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다. 시간은 발걸음에 따라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름길이나 거친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해서 이곳이 더 알려지지 않고 지금만큼만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솔뫼라는 순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으로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지난 201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곧 다가올 2021년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의 해이다.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도 선정되어 당진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 행사를 예고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솔뫼성당 입구로 들어서 조금 걸으면 원형 공연장 겸 야외 성당인 솔뫼 아레나가 쉼터처럼 펼쳐진다. 둘레에 12사도가 세워져 있어 야외 행사의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성당 주변을 둘러싼 솔밭 사이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모습이 노송들 사이에서 성스럽게 서 있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만나는 물길로,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범근내포’에서 유래됐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이 길에 서린 순교와 박해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발길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합덕제를 거쳐 합덕성당을 만난다. 1929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페랭 신부가 봉헌한 합덕성당은 조용한 합덕 마을을 앞에 두고 고요히 서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룬 두 개의 종탑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경건함이 붉은 벽돌의 고딕과 어울려 아름답다. 가던 길 멈추고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합덕성당에 들러 그 풍경 속에서 한참 머물다 가길 권한다. 100년쯤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합덕의 너른 들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받으며 처절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을 기억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걸어간다. 바람 부는 평야를 지나 조붓한 둑길을 걸으면 평온한 자연 속에서 버그내 길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순례길이 품은 순교자들의 신념, 아픔, 그리고 뜨거웠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시간이다.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 말이 당진 곳곳을 지나면서 자주 보였다. 여기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내심 생소했지만 하루쯤 걷고 둘러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서 그들의 뿌리와 죽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것을.
걷기 열풍이 계속 이어지는 추세이지만 순례길만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시간은 남다르다. 지난해엔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었을 만큼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다만 주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 묵상하면서 걷는 예의도 명심할 일이다. 비대면 여행이 강조되는 이즈음에 순례길 걷기는 더없이 좋다. 특히 이곳은 '혼행'으로 최적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아도, 애써 여러 날을 비울 필요도 없다. 어느 날 하루 훌쩍 떠나면 된다. 신념의 전파를 위해 피 흘리기를 택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언가 가슴에 실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면 가능한 버그내 순례길의 여운은 아주 길다.
▲주변 명소& 맛집
당진 면천읍성(沔川邑城 ) 마을
당진시 면천읍성 일대를 성안마을로 부른다. 아주 오래된 이곳은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이다. 우체국을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 자전거포를 동네 책방으로 변신시킨 ‘오래된 미래’, 원래는 대폿집이었던 소품 가득 감성 가득 ‘진달래 상회’, 건너편에 면천향교를 둔 연꽃 가득한 연못 ‘골정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등 마을 전체가 개발이 제한된 유적지여서 푸근한 시간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 느리게 그러면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면천읍성 마을이다.
아미미술관
당진보다는 아미미술관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들길을 지나고 산 아래로 다가가면 나타나는 맑은 공기 속 예술 공간 아미미술관. 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의 폐교를 개조한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 낡은 학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만에 갔더니 복도의 설치 작품들이 교체되어 다시 새롭다. 실내의 전시작품, 마당의 너른 잔디밭과 핑크 뮬리가 혼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소설 '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의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 당진에 내려와 직접 설계해 지은 집 ‘필경사’(筆耕舍). 필경사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 농촌 소설인 ‘상록수’가 집필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지식인은 붓으로 시대의 어둠을 가는 존재다"라는 심훈의 말처럼 당시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심훈기념관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 한참을 쉬어도 좋을 농촌 마을이다.
교황님도 다녀간 당진 식당 '길목'의 '꺼먹지 정식'
‘꺼먹지’는 당진의 향토음식이다. 가을 무청을 염장했다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무청 짠지로 처음에는 파랗게 절여졌던 것이 검게 변했다 하여 꺼먹지라고 한다. 걸쭉한 들깨 찌개에 구수한 꺼먹지가 함께 어울려 맛을 내는 음식이다. 그릇도 흰 분청사기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손맛이 좋은 반찬들이다. 교황이 솔뫼성지 방문 후 사제단 만찬을 이곳에서 했을 때 꺼먹지 정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명장이 만든 떡, 민속떡집
민속떡집의 쑥 왕송편이 유명해서 당진을 떠나면서 늦은 저녁에 들렀더니 왕송편은 이미 다 팔린 후였다. 떡 명장이 만들어내는 민속떡집은 당진시 최초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요즘 여자들이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이야기를 나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시작돼 ‘밀회’를 거쳐 폭발한 김희애의 불륜 연기는 의사, 음악가 등 고스펙 불륜녀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는 너무 완벽한 삶의 조건으로 균열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던 부부 사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남편의 오래된 불륜으로 급격하게 돌기 해 부부의 삶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용돌이치게 되는 부부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간통죄까지 폐지된 마당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대미문의 불륜들이 우리 주위에 넘실댄다.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솔직한 불륜들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이제 정치적인 은유는 물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 나무란다'라는 뜻으로 청소년들까지도 사용하는 대중적 언어가 된 지 오래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중년 여성들에게 '불륜'이라는 단어가 은밀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단아해 불륜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조용조용 속삭이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 가곡을 듣는 지적이고 단아한 가정주부, 메릴 스트리프(프란체스카)는 아내의 취향은 전혀 모른 채 큰 소리로 떠들고 문을 쾅쾅 닫아 프란체스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남편과 살고 있다. 엄마가 이탈리아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팝송으로 재빨리 바꿔버려 집안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리는 없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은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변한 지 오래.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 채 그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부속품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생활에 찌들어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어느 날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바깥세상의 살아 숨 쉬는 인생을 동경하게 해주는 그런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다.
배경은 1965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조용한 시골 마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만간 철거될 이 마을의 명물인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트럭을 몰고 온다. 낡은 청바지에 셔츠, 니콘 카메라를 메고 프란체스카가 동경하는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로즈먼 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마침 남편과 두 아이는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결혼 이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길을 묻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구를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이 잡지는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현대화로 사라지고 있는 옛것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놓는 전통의 잡지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격조 높은 잡지다. 그러니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지와 천혜의 자연을 촬영하는 로버트라는 사진작가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한 남자와 자식만을 위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세계의 풍물과 삶의 모습들을 렌즈에 담는 로버트의 인생은 동경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로버트가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와의 대화는 익숙하다 못해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없는 남편과 나누는 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과 여행, 음악과 미술… 그 자체로서 너무나 환상적인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떨릴 듯 화면에 전해지던 장면이 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저녁에 초대해서 함께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감자 스튜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산스럽기만 하다. 감자는 미국 중부를 상징하는 아이오와주의 대표적인 농산물.
프란체스카의 부산스러움을 느낀 로버트는 “제가 도와드릴까요?” 란 말로 그녀의 맘을 빼앗아 버린다. 너무나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의 생활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요리를요?” “예… 요리를” “당근을 깎아주세요” “이거 말인가요” “예… 끝은 이렇게 다듬어야 해요”
짧은 단답식의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두 남녀가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세계를 향해 들어오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손질하고 감자 스튜를 저으며 그렇게 완성해갔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제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지금까지 가꿔왔던 자신의 세상을 박차고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순서가 잘못돼 '만났어야 할 운명의 파트너'를 만나 인생을 살고 있기보다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그 누군가'를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산다. 착각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 믿으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
이렇게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결혼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쌓고 그 일상이 다시 모여져 삶의 결로 퇴적된다. 퇴적된 내 인생의 결이 어느새 작은 봉우리가 되고 제법 봉긋한 작은 산 하나 만들어질 때쯤 우리네 인생은 노년의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의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중년의 감성은 아니었기에 100% 감정이입을 못했지만, 육체적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시선을 맞추며 안타까워하는 그런 '선'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그렇게 부산스럽게 타오르지 않는 사랑, 스튜처럼 오래 끓이며 뭉근히 재료의 맛을 우려내고 깊어지는 사랑. 하지만 ‘불륜’은 그러하지 못할 경우가 많으므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속전속결로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깊은 울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흔히 남녀들이 하는 것처럼 세속에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카는 이 작은 마을에 남아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헌신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의 유품이 프란체스카에게 도착한다. 로버트가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로 담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와 니콘 카메라,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남긴 다리 위의 쪽지.
프란체스카는 이 유품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다. “살아온 인생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죽은 뒤에는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에 뿌려 달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로버트에 대한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도 연령대에 따라 감상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난다. 예전에는 이 부분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프란체스카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 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의 뜻이 이제 정확하게 이해된다. 프란체스카는 죽어서까지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에 매여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바다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난 또 어쩔 수 없이 엄마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 연휴 주말 방영된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전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뒤를 이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이미 헤어진 부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고 옷이 흐드러진 침대를 보여주면서 끝나 전국의 여성들이 갑론을박 난리가 났다.
한번 갈라진 부부의 길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잠깐 합쳐지는 듯하다가도 이미 다시 파국을 맞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스펙의 의사도 자신의 감정 다스리기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 19의 극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부 혹은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간섭해야 하고 내 뜻대로 콘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들이 의외로 많다. 내 눈앞에서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내 가시권 안에 있을 때는 완벽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다. 흔히 똑똑하고 성공했다는 고스펙 여성들의 결혼생활은 평강공주 신드롬에 빠져 온달들을 관리하느라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적정한 거리 두기는 결국 나에 대한 객관화로 이어져 보다 성숙한 자아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제발, 몰빵 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깝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시니어들은 감자 스튜 같은 뭉근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프라이팬에 와인을 부으면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세 스러지는 그런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나?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스페인 남서부 지역의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Arcos de la Prontera)'는 '과달레테 (Guadaleta)강'이 삼면을 둘러싼 구릉 지대에 있는 작은 도시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이 작은 도시의 이름은 “최전방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성안의 작은 광장에 가면 이곳을 최전방 기지로 만든 이유가 이해된다.
이곳은 11세기부터는 무어인의 터전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슬람풍의 하얀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13세기에는 가톨릭이 무어인을 몰아내면서 무어인과의 경계를 짓는 지역이 되었다.
목적지인 호텔은 성문을 통과한 뒤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유럽의 구시가지 대부분처럼 이곳 역시 길이 좁았다. 성문 앞에서부터 길은 일방통행이었다. 성문을 통과한 뒤 조금 더 올라가니 왔던 길보다 길이 더 좁아졌다. 너무 좁아서 차가 통과하지 못할 거 같아 차를 세웠다. 일방통행인 길에서 앞으로 갈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백미러를 보니 다행히 우리 뒤에 오는 차들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상등을 켜고 후진을 하였다.
그때 길을 걸어 내려오며 우리가 후진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있던 한 젊은이가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어디를 가려고 후진을 해요?”
“저 좁은 길을 차가 통과하지 못할 거 같아서……”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데……”
“양쪽 사이드 미러가 벽에 닿을 거 같아서……”
“닿을 거 같으면 사이드미러를 접으면 되지…… 나 믿고 한번 해봐요!”
자신감이 생겼다.
“오케이. 쌩큐!!!”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 앞으로 갔다. 차분하게 천천히 운전하니 조금 전 이야기해 준 젊은 친구의 말대로 좁은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는 여행자에게 관심을 준 젊은이가 고마웠다. 여행하면서 이렇게 사람의 도움과 배려를 받을 때 세상의 따스함이 가슴에 와닿는다.
전국 95개 지역 체인망 국영 호텔 파라도르(Paradores)
찾아간 호텔은 국영 호텔이다. 스페인에는 중세의 수도원, 고성, 청사, 궁전 등 역사적 건물을 개조해서 국가에서 호텔로 운영하고 있다. 이를 ‘파라도르(Paradores)’라고 부르며 4성급 호텔 수준의 시설과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 전국 95개 지역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내부 시설과 부대시설도 최고의 수준이다. 우리가 묵었던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의 파라도르는 마치 아라비아 왕궁에 있는 느낌을 주는 호텔이었다.
파라도르 예약은 ‘amigo 카드’에 회원으로 가입해 카드번호를 발급받은 후 ‘파라도르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첫 번째 예약을 할 때 일회용 ‘2인 무료 조식 바우처’를 주니 꼭 챙기자.
▶ amigo 회원 가입: 파라도르 홈페이지에서 오른쪽 위 ‘find access’를 누른 후 각 공란 체크. 마지막으로 약관에 동의하면 이메일로 회신(reference number)이 온다.
※ Tip
- 여름철 성수기에는 가격이 비싸지만, 기타 계절에는 가격이 저렴하게 변동된다.
Ex) 네르하Nerja: 여름철 201€ → 겨울철 81€
- 비수기와 프로모션 행사를 이용하면 80€ 대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Ex) 톨레도Toledo: 85€, 세고비아Segovia: 72.26€,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 80.76€
- 전망 좋은 파라도르: 론다(Ronda), 톨레도(Toledo- 지성, 이보영 커플 웨딩 촬영 장소로 유명)
파라도르 데 그라나다(알람브라 궁전 안에 있는 파라도르)
성인이나 현자들이 하나같이 사막이나 황야를 찾아간 것은 그곳이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비어 있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사람이 해오는 질문 중 하나는 가봤던 여행지 중 한 곳만 추천한다면 어디를 꼽겠느냐는 것이다. 장소마다 느낌이 다른데 그런 데가 어디 있냐며 웃어넘겼지만 결국 꼽은 곳은 모로코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진기한 것들로 가득한 곳. 정비된 수도 라바트와 천년 미로의 도시 페스, ‘본 아이덴티티’를 비롯해 온갖 영화의 배경이 된 다닥다닥 붙은 하얀 집들이 있는 항구도시 탕헤르, 이름만 들어도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낭만 가득한 카사블랑카도 좋지만 역시 모로코 여행의 백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시장이 열리는 마라케시와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 사막의 야영이라 하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대고 며칠간 제대로 씻을 수도 없지만 밤이 되면 500만 개, 아니 5000만 개의 별을 이불 삼아 잘 수 있는 곳. 사하라 사막의 하룻밤은 세상 어느 5성급 호텔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모로코의 심장, 마라케시
카사블랑카를 지나 기차를 타고 모로코의 심장이라 불리는 마라케시(Marrakesh)로 간다. 밤이면 세상에서 가장 큰 포장마차촌이 펼쳐지는 제마엘프나(Djemaa el-Fna) 광장과 미로로 된 장터 수크(souq)가 있는 곳. 가게마다 손님을 불러 세우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 안 사도 좋으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을 걸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선 귀찮지 않다. 모로코 사람들 특유의 유머와 밝음 때문이다.
이곳에선 반드시 흥정을 해야 한다. 함께 여행한 유럽 친구들은 평소엔 콧대 높게 굴다가도 수크에 갈 때면 한껏 낮은 자세로 함께 가줄 것을 청했는데 그들에겐 흥정 문화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80%는 후려치고 들어가며 흥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난 마치 묘기라도 부린 듯 으쓱해진다. 그들은 왜 정찰제가 아니냐고 투덜대지만 이런 맛이 있어야 장터이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민트차를 마신다. 제대로 씻지 않은 민트 잎에 뜨거운 물만 부었는지 흙이 우적우적 씹힌다. 포장마차가 열리기 전 낮의 빈 광장에선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기한 묘기를 볼 수 있다. 젤라바(모로코 전통의상)를 입고 춤을 추는 마라케시의 명물 물장수를 비롯해서 뱀 부리는 사람, 약 파는 사람, 헤나 타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수백만 명이 들끓는 광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보는 것 같다. 저녁 무렵이 되니 목욕탕도 아닌데 거대한 광장에 일제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낮 동안 비어 있던 광장이 거대한 포장마차촌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다닥다닥 붙은 포장마차에서 타진, 하리라, 쿠스쿠스, 케밥, 에스카르고 등 갖가지 산해진미에 취해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리는 동안 밤이 깊어간다.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여행이 시작되는 므하미드로!
마라케시에서 뭉친 일행은 미니버스를 타고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캠프가 있는 므하미드(M’hamid)로 향했다. 베르베르족들의 터전이기도 한 므하미드 사막 캠프의 숙소는 진흙으로 된 카스바다. 카스바라니? 가요에서나 듣던 카스바가 정말 존재한다는 말인가? ‘카스바(casbah)’는 ‘요새’라는 뜻으로 주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도시의 방어를 위해 시가지의 일부 또는 그 외곽에 세워지는 성을 말한다. 붉은 사막 한가운데 미로처럼 붙어 있는 성안에 있는 집에서 민트차를 마셨다. 므하미드엔 사막 캠프가 여러 개 있다. 혼자서 온 여행객도 이곳에서 사막 투어를 예약하면 안내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차 한 대와 부대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사막 투어는 혹시 모를 위험도 있어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3대의 지프차에 나눠 타고 자동차 경주대회인 다카르 랠리가 열리는 길을 따라 에르그 시가가(Erg Chigaga)로 들어갔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용광로처럼 뜨겁다. 모로칸들은 머리엔 터번을 쓰고 젤라바라 부르는 긴 가운 같은 것을 입는데, 패션이라기보다는 이곳의 기후에 최적화된 의상이다. 어느 나라의 패션이든 그렇게 입고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사막에서 하는 스카프는 장식용이 아닌 것이다. 모래바람을 막아주고, 살을 몽땅 태워버릴 듯한 50℃의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사막 중의 사막, 사하라!
사막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붉은 모래사막을 떠올리지만 흰색과 핑크색의 소금사막부터 잡초가 자라는 사비나 사막, 이집트의 흑사막과 백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막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막 중 사하라(Sahara)만 한 게 있을까. ‘사흐라(Sahra, 불모지)’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사하라는 사막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막으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비롯해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걸쳐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끝없이 굴곡을 달리하는 사하라의 듄(Dune, 모래언덕)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의 이미지는 바로 사하라다. 낮 동안 달궈진 사막은 걸어 다니기가 힘들지만 이른 아침의 사막은 밤 동안 식어 맨발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때 발끝에 느껴지는 시원한 감촉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감미롭다. 인간의 기억 중 가장 오래가는 감각이 촉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해가 지자 사막은 변화무쌍하게 변했고 곧 밤이 찾아왔다.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를 두른 사막 캠프 주인 하산과 운전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더니 “밥 먹으러들 내려와~” 하며 손짓했다. 언제나 유쾌한 모로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 짓게 하는 매력덩어리들이다.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즐기는 야영
사막 야영을 갈 때는 운전사와 요리사가 함께 간다. 일행이 사막을 보며 광분하는 동안 그들은 텐트를 치고,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한다. 사하라 사막의 밤, 전갈이 있다 해서 높은 매트리스를 깔았다. 무수한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지붕이다. 새벽 무렵 사막을 덮어버릴 듯 쏟아져 내리던 별들. 그 향연을 잊을 수 없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모래 위에 발을 얹어본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밤새 식어버린 곱디고운 사하라 사막의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 아름다운 듄에 호젓하게 올라본다. 최고의 명상이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고요함 속에서 붉은색 모래 평원을 보니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하다. 가늘고 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인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달콤한 오르가슴이다. 겹겹이 쌓인 산맥처럼 듄과 듄 사이를 너머 시야를 넓히니 멀리서 부지런한 이탈리아 친구가 벌써 산책 중이다. 모래 위에서 잠을 자던 운전기사 모하메드와 요리사 알리도 어느새 일어나 메카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검은 옷의 카스바 여인!
사막을 나와 낙타를 타고 카스바 마을을 지나는데 단체로 어디를 다녀오는지 검은 옷을 입은 카스바 여인들이 지나간다.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알라의 평화를)!” 하고 인사를 하니 “봉주르~” 하고 답한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은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에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로코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사우이라 등지에 별장을 사두고 바캉스 시즌이 오면 차를 몰고 온 가족이 내려와 한 달간 머물다 돌아가곤 한다. 사막에서 돌아온 밤, 숙소에서 생존을 축하하며(?) 하산이 열어준 모로칸식 전통공연을 관람했다. 마치 현실의 시간이 아닌 듯 몽롱했다. “별밤에 더워서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공연을 보며 놀지 뭐.” 멋쟁이 프랑스 언니 오빠는 흥에 겨운 듯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Travel tips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카사블랑카까지 직항이 있으며, 여기서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 추천 숙소 및 카페/ Hotel & Guest House
Marrakech 추천숙소: Hotel Ryad Mogador(tel: 024-43-8646)
Earth cafe website: www.earthcafemarrakech.com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명량대첩의 기적은 기울어져가던 조선의 운명을 건져 올렸다. 서해안을 타고 올라가 한강하구로 도성을 도모하려던 왜군의 계획을 보기 좋게 좌절시킨 것이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부터 꼭 2개월,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왜선을 격퇴한 기적 같은 승첩이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기록한 전투였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승전을 세계 4대 해전사의 하나로 등재했다. 150척이 넘는 전선이 수몰되고, 장수도 군졸도 죽고 흩어져 전력 제로 상태의 조선수군이 어떻게 그런 기적을 이루어낸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이 전투의 경과는 여러 나라 해군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자신을 군신(軍神)이라고 떠받드는 말에 “진정한 군신은 이순신 정도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 정도도 못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것이 기적의 단초였다. 8월 3일 진주에서 복직교서는 받았지만 달랑 종이 한 장뿐이었다. 군영도, 병력도, 군량도, 전선도 없는 완전 제로였다. 그래서 기적이었고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것이다.
그날부터 이순신은 전라도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을 순회하면서 수군 재건을 서둘렀다. 그가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숨었던 군관들과 군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한심한 패전에 분을 품었던 모양이다. 배흥립(裵興立), 송희립(宋希立), 이몽구(李夢龜), 최대성(崔大晟) 등 옛 측근들이 상사를 찾아와 진용이 갖추어지자, 거제 현령, 발포 만호 등 지방관들도 낯을 내놓았다. 다시 옛날과 같은 권한을 쥐게 된 사람과 관계를 수복하려는 것이었다.
순천, 보성, 장흥 땅을 거쳐 전선의 소재를 찾아가는 동안 군관 군졸이 120여 명으로 늘었고, 보성에서는 창, 칼, 활, 화살 등 무기류에 약간의 군량미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피란민들도 이순신 가까이로 몰려들어 든든한 배후가 되어줬다. 배설(裵楔)이 끌고 도망쳤던 12척의 전선은 우여곡절 끝에 8월 19일 장흥 회진포에서 인수되었다. 이순신이 무서웠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주저주저 현장에 나타나 전선을 넘겨주고는 명량회전이 임박하자 도망쳤다.
왜적이 자신을 찾아나선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순신은 즉시 회진포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안전한 포구를 찾아 진용을 정비하고 교육·훈련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왜적에게 쫓기며 수군 재건에 노심초사 과로한 탓인지, 토사곽란이 일어 꼬박 사흘을 앓았지만 편히 누워 쉴 수가 없었다.
이진(梨津·해남군 북평면), 어란포(於蘭浦·해남군 송지면)에 진을 치자 왜적이 알고 달려왔다. 전의와 실력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어란포에 닻을 내린 8월 28일 새벽 왜 척후선 8척이 포구 안으로 돌입해왔다. 칠천량 이후 사기가 오른 탓도 있겠으나, 전선이 10여 척뿐이라는 것을 알고 얕잡아보는 것 같았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우리 전선이 마주 나가 싸움을 걸자 적은 황급히 달아났다.
야습을 우려한 이순신은 즉시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진을 옮겨갔다. 그곳에서 보름 동안 머물며 참모들과 함께 왜의 대군을 맞아 싸울 궁리에 머리를 싸맸던 이순신은 마침내 울돌목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15일자에 그 까닭이 적혀 있다. “벽파진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진도와 해남 땅 화원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은 옛날부터 물길이 사납기로 유명한 곳이다. 진도대교가 놓인 곳은 폭 300여 m에 불과한데 수중에 날카로운 암초가 많아, 조류가 바뀔 때면 회오리 물결이 일어 물소리가 20리를 간다고 울돌목이란 이름을 지녔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진도읍에서 고속버스를 내려 되돌아 나와 도보로 대교를 건너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물목이 300m 정도인 바닷속에 수심이 20m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뾰족뾰족한 한 암초가 숨었다니, 조류가 바뀔 때 물살이 울고 돌지 않고 어쩌랴! 특히 해남 쪽 물길이 크게 울었다.
흰 거품을 뿜어내며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당시의 통쾌한 전황이 떠올랐다. 조류가 한창 빠를 때는 해남 쪽 해안에서 뜰채를 들고 있다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숭어를 잡는다는 말도 이해되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 9월 16일 별망군(별도로 조직된 정탐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우리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어란포와 그 부근에 진을 쳤던 무리들이다. 이순신을 따라온 해상 피란민들이 벽파진 인근 야산에 올라 헤아린 바로는 왜선이 300척이 훨씬 넘는다 했다. 초고에도 330척으로 기록돼 있다.
적 선봉장은 해전의 천재라는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였다. 마다시(馬多時)라 불리던 그는 임진년 당항포 해전에서 왜군 함대를 이끌다 전사한 지휘관의 친동생으로, 안골포에 진을 두고 있었다. 그는 “내 손으로 이순신의 수급을 베어 형의 원수를 갚고 서해를 통해 경강(京江·한강)으로 항진하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 이야기는 14일자 기록으로 입증된다. 이날 탐망군관 임준영(任俊英)이 왜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에 들어왔다는 보고 끝에 “왜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김중걸(金仲傑)이 말하기를, 왜적이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서 조선수군을 섬멸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기로 의논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혀 있다. 연합선단을 꾸려 어떻게든 서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확인된 셈이다.
왜군은 수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였다. 그 휘하에 해전에 능하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등 제장이 총동원되었다. 현지 해역에 330척을 비롯해 남서 해안 곳곳에 숨겨놓은 것을 다 합치면 적세는 1000척으로 추산되었다.
출진 전날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유명한 정신무장 훈화를 남겼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1000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16일 오전 9시쯤 명량해협에 나타난 적은 진도 해안에 머물다가 유속이 느려지기 시작한 정오 가까이 되어 울돌목에 나타났다. 이에 맞추어 이순신 함대도 우수영을 떠나 울돌목 동북쪽, 우수영 포구를 감싸고 있는 양도 앞 바다에서 전투대형을 이루고 기다렸다. 맨 앞에 이순신의 기함, 그다음이 김응함(金應諴)의 중군선단, 그 뒤가 김억추(金億秋)의 후군선단, 그 배후에 전선으로 위장한 피란민 어선 100여 척이 포진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는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다 없다고 낙심하면서 모두 회피할 꾀만 냈다. 그 와중에 김억추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늘어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니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16일자 에 적힌 초기 상황은 이렇게 위태로웠다.
겁을 먹은 중군과 후군이 멀찌감치 물러서 있고 이순신만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해도 적이 대들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초요기(부르는 깃발)를 세웠다.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다가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친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통제사의 질책을 받은 안위가 마지못해 적진으로 돌입했다. 김응함에게도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대장을 구원하지 않는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두 장수가 적진으로 뛰어들자 다른 배들도 용기를 내어 본격적으로 해전이 시작되었다. 적 대장선과 휘하 두 척의 군사들이 안위의 배에 오르려고 개미 붙듯 한 것을 보고 이순신이 달려가 총통과 화살을 마구 날렸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淙),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도 달려와 합세했다. 지자, 현자 총통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고 화살이 빗발처럼 날았다.
왜군이 남긴 명량해전도에는 조선수군이 쇠뇌를 발사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쇠뇌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로, 5~10초당 한 발씩 쏠 수 있어 왜적이 무서워한 무기다.
한창 교전 중 기함에 타고 있던 준사(俊沙)라는 항왜(降倭)가 “적장 다마시가 바다에 빠졌다”고 말했다. 총통이 대장선 층루에 맞아 선교가 통째로 부서져 바다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순신이 물 긷는 병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적장을 낚아 올렸다. 준사는 “그래, 다마시 맞다!” 하며 좋아 날뛰었다. 그의 시신이 토막토막 잘려 대장선에 효수되자 갑자기 적진이 조용해졌다.
그 틈에 조선함대는 북을 크게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들어가 적선을 만나는 대로 부딪쳐 깨트리고 불화살을 쏘았다. 삽시간에 31척이 분멸되었다. 때마침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적진은 우왕좌왕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적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류에 떠밀려 북쪽으로 흘러든 적선들은 후위의 어선들에게 협공을 당해 흩어졌다.
우리 측 인명과 전선은 전혀 피해가 없었고, 부상자는 기함에서 5명, 전체로는 100명이 안 되었다.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적 함대를 물리친 전대미문의 승첩이었다.
유성룡의 에는 이때 조선수군 병력이 8000명이라 했다. 불과 2개월 전 120명을 거느렸던 ‘회령포 결의’ 때와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통행첩을 발행해 막대한 전비를 충당했다고 썼다. 바다로 피란 온 백성들에게 큰 배는 쌀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씩을 받고 통행첩을 발행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백성들이 갖고 있는 구리와 쇠 등을 모아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이순신에게 의지해 난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성안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실정으로 보아 병력 자원 해결이 어렵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적 함대가 그토록 허무하게 깨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세키부네(關船)라는 전선이 조선 판옥선보다 몸체가 작아 충돌에 약한 탓이었다. 임진년 연전연패에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선 대형화를 명해 정유년에는 몸체가 큰 아다케부네(安宅船)가 많이 왔다. 그러나 폭이 좁은 해협에 들어설 수가 없어 뒤에 물러서 있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간 것이다.
조선수군 승인의 하나로 거북선의 역할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더 고증되어야 할 문제다. 8월 19일 배설에게서 12척을 인수하고 1개월도 못 되는 사이 거북선을 건조할 시간이 있었겠냐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 , 같은 신빙성 높은 기록에 거북선이 출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한 가지는 ‘쇠사슬’론이다. 조선수군이 울돌목 바다 밑에 쇠사슬을 가설해 적선이 걸려 항진할 수 없었다는 학설인데, 이 역시 기록이 없어 증빙이 되지 않는다. 쇠사슬은 임진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해역에 설치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항만 방어용이었지 실전에 이용된 기록이 없다. 다수 학자들은 물살이 센 울돌목에는 무게가 몇십 톤이나 되는 쇠사슬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인 해남 땅에 국민관광지 명량대첩 기념공원이 있다. 작년에 개관한 기념관에는 거북선과 판옥선 실물대 모형선과 전쟁 경과 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유물은 없다. 진짜 유물은 거기서 2km쯤 떨어진 우수영 마을에 있는 명량대첩비다.
숙종 때(1688년) 건립된 이 비석 상단에 새겨진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 전액 12자는 의 작가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전서체로 유명하다. 1942년 일제가 강제 철거해 조선총독부청사 뒤편에 방치했던 것을 1950년 우수영 지역 유지들이 되찾아 세웠다. 처음에는 우수영성 밖에 이건했다가, 2011년 도로공사 관계로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다.
1964년 우수영 마을에 건립된 사당 충무사도 지난 5월 비석 옆으로 이전 건립되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석을 둘러보다가 현지 주민에게서 기막힌 수난사를 들었다.
“왜놈 헌병 둘이 비석 앞에 와서 권총을 꺼내 몇 발이고 비석을 쏘아버리두만. 비석이 무슨 죄라고. 그때의 파편이 저기 저렇게 남아 있소.”
철거 당시 일곱 살이었다는 노인은 지금도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비석 상단을 유심히 보니 어린애 주먹 크기의 총탄 자국이 몇 개 식별되었다.
대승첩 직후 이순신은 빠른 조류를 타고 당사도(唐沙島·신안군 암태면), 어의도(於義島·신안군 지도읍), 법성포를 거쳐 전북 고군산 열도까지 진출했다. 명량승첩과 이순신의 건재를 알려 피란민들을 안심시키려는 행보였는데, 왜군의 추적을 따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왜군은 어디에 숨었을지 모를 조선함대가 두려워 서해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신출귀몰하는 이순신의 전법에 또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를 일 아닌가. 참패의 원수는 갚아야겠는데 바다는 무서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뭍에 있는 이순신의 고향집이었다.
10월 14일, 일단의 무리가 아산 금성촌 이순신 본가에 불을 지르고 분탕질을 쳤다. 막내아들 면(葂)이 그 와중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영내에 있는 민가에 들어 밤새 통곡했다. 그날 밤 코피를 한 되 넘게 흘렸다는 기록도 남았다. 영웅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 exhibition
픽사 애니메이션 30주년 특별전
일정 8월 8일까지 장소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 , 등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영화로 사랑받아온 픽사(Pixar,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스튜디오)의 30주년 기념 특별 전시다. 제작 과정에 쓰인 스케치, 스토리보드, 컬러 스크립트, 캐릭터 모형 조각 등 약 500여 점을 각 영화별로 전시했다. 정지된 이미지들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토이 스토리 조이트로프(zoetrope)’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담은 ‘아트 스케이프(artscape)’ 등을 통해 애니메이션 탄생 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일정 7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이집트 문화부, 샤르자 미술재단의 협력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 166점을 초현실주의가 걸어온 흐름에 따라 다섯 파트로 나누어 구성했다. 출품작 중 상당수가 해외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미라’, ‘피라미드’로만 인식되어온 이집트의 새로운 문화와 마주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 book
남자 혼자 죽다(성유진 외 공저·생각의힘)
고독사 중에서도 시신을 인수할 사람이 없는 상태, 이른바 무연사(無緣死)로 생의 마지막을 보낸 209명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한국의 무연사 현상을 현대 사회 남성의 어려움과 연관해 밝히고자 했다.
치매박사 박주홍의 뇌 건강법(박주홍 저·성안북스)
20여 년 동안 치매 전문가로 살아온 저자가 치매를 비롯한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해 환자와 가족들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한다. 질병에 대한 기본 정보와 더불어 식생활, 운동, 명상치료 등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담았다.
◇ movie
심야식당2
누적판매 240만 부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만화 을 원작으로, 2015년 국내 개봉했던 영화 의 두 번째 시리즈다. 1편에서 함께한 마츠오카 조지 감독과 배우 코바야시 카오루, 오다기리 조가 다시 만났다. ‘오늘도 수고한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늦은 밤 불을 밝히는 특별한 식당’이라는 콘셉트로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운영하는 심야식당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개봉 6월 8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츠오카 조지 출연 코바야시 카오루, 오기다리 조 등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국의 길고양이가 대만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의 로드무비다. 고양이 마을로 알려진 대만의 관광지 ‘허우통’과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산다는 ‘고양이 섬’ 일본 ‘아이노시마’ 등을 돌아다니며 길 위에서의 공생의 의미를 탐구한다. 영화계 대표 애묘인(愛猫人) 조은성 감독이 기획과 연출을 맡아 고양이의 시점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발자취를 담았다. 고양이의 마음을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준다.
개봉 6월 8일 장르 로드무비 감독 조은성 내레이션 강민혁
◇ stage
로미오와 줄리엣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원로 연극인 오태석이 번안과 연출을 맡았다. 청사초롱 불빛 아래 한국무용과 풍물이 어우러져 한국판 이 탄생했다. 원작과는 또 다른 비극적 결말로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일정 6월 18일까지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오태석 출연 이신호, 정지영, 정진각 등
천덕구씨가 사는 법
극본을 맡은 김태수 작가는 삶은 끝나지 않은 여행이며,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긴 여행을 준비하는 시니어 세대에게 삶이란 견딜만하다고, 또 웃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런 그의 시선을 담아 누구나 겪는 노년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일정 6월 8~18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순영 출연 오영수, 차유경 등
복순이할배
‘사랑을 모른다’라는 이유로 짝사랑에게 거절당한 태수는 돈 많고 건강한 독거노인 ‘복순이할배’에게 연애 상담을 하게 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괴짜 노인과 연애 풋내기 청년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 다뤘다.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대학로 두레홀 4관 연출 박정우 출연 김시권, 정동진, 이재욱 등
시카고
미국 브로드웨이 대표 뮤지컬 의 오리지널 팀이 2년 만에 내한한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 클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재즈 음악을 14인조 밴드의 연주로 즐길 수 있다. 강렬한 조명 아래 관능적인 안무가 돋보인다.
일정 5월 27일~7월 23일 장소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출연 딜리스 크로만, 로즈 라이언 등
이번 야수도 역시 미녀를 좋아했다.
모처럼 집에서 가까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큰딸로부터 가끔 받는 선물이다.
때로 머리가 복잡할 때 스트레스 해소로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다. 물론 후기가 찜찜할 때도 있지만 그런대로 시간은 흘러 골치가 덜 아프다. 더구나 역시 여유로운 시간과 함께 신바람 나는 것은 아주 큰 사이즈의 달달한 팝콘 한 통이 엉킨 기분을 싱숭생숭 마냥 즐겁게 만들어준다.
영화관 안에는 여기저기 남녀의 연인들, 어린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의 모습도 군데군데 많이 보인다. 휴일의 정겹고 따뜻한 한가로움이다. 입장하는 손에는 모두가 커다란 팝콘 통들을 애지중지 끼고 있다. 동화 속 애니메이션, 판타지 영화이기에 어린이들도 어른도 온 가족이 환상 속 나들이를 한 모 양이다.
그동안 각종 장르의 미녀와 야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디즈니사에서 만든 작품이라 왠지 기대가 되었다. 미국에 살 때도 가끔 한 번씩 가고 싶은 곳이 환상의 디즈니랜드였다.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이른 아침부터 일찌감치 입장해 거의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퇴장을 하곤 했다. 하루 종일 실컷 동화 같은 신비의 세상에서 신나게 즐기고 오면 그동안의 쌓인 피로가 한방에 사라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화려한 비주얼 캐릭터로 장식된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는 역시나 웅장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배경도 어디론가 상상 속 나라로 관객들을 충분히 이끌어가 주었다. 멋지고 찬란하게 춤을 추며 화려하게 전개되는 뮤지컬 영화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적 차이도 모두 뒤로 한 채, 관객은 환상 속 나래를 꿈꾸며 그저 자연스레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어마어마하게 멋진 궁궐, 춤과 노래, 화려한 캐릭터들의 동선 속에서 부를 상징하며 펼쳐지는 파티는 언제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하게 만들어준다. 늠름하게 생긴 백마 탄 왕자와 호화찬란한 드레스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많은 여인들의 신비로운 몸동작, 화려한 무대 위에 춤을 추는 장면들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설렘이다. 쿵 짝짝 쿵 짝짝, 왈츠의 리듬이 웅장하고 높다란 성을 음악 속으로 뒤덮는다.
황홀하던 순간, 역시나 마녀의 저주 속에 왕자와 성안에 모든 시종들은 마법에 걸려들고 만다. 졸지에 흉측한 야수로 변해 버린 멋진 왕자는 엄청난 실의에 빠지게 되고, 다행히도 한 송이 장미꽃의 이파리가 다 떨어지기 전에 왕자가 진실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면 그 마법을 풀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가 있었다.
어느 작은 마을, 아주 똑똑하고 현명하고 어여쁜 벨이라는 청순하고 어린 소녀(엠마 왓슨)가 등장을 한다. 소녀는 아빠와 함께 단둘이 살며 극진한 효녀로 생활을 한다. 그녀는 최고의 미녀이며 늘 넓은 세상을 꿈꾸는 용기와 지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마을에서는 대장부 기질을 자청하는 욕심에 가득 찬 건장한 청년이 그 소녀를 자기 아내로 만들려고 온갖 권모술수를 자행한다.
어느 날 소녀의 아버지가 야수의 정원에서 딸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도둑으로 몰려 성에 갇히게 된다. 모험심으로 가득한 소녀는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한 지극함으로 그 성으로 들어가 야수를 만나게 되고, 결국 성 안에 캐릭터들의 노력으로 인해 흉측한 야수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끝내, 시간이 흘러 장미꽃의 마지막 이파리가 떨어지게 되고, 흉측했던 왕자와 성안의 사람들은 엄청난 저주의 마법에서 서서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소녀를 차지하기 위한 이기와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마을의 사나운 사내는 야수의 왕자와 싸우다 높다란 성위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라지고 만다.
너무나 뻔한 스토리로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역시 탁월한 연출력과 제작은 보는 이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꿈같은 무대와 주옥같은 명곡으로 수놓은 두어 시간들이 긴장과 행복 속에 둥둥 떠다니다 어디론가 떠내려온 듯 영화는 아쉬운 막을 내렸다. 기분 좋은 행복감이 온몸을 휘감고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은 여운을 남기며 스며내렸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무서워서 감히 바라볼 수 없었던 야수의 흉측한 얼굴이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에 넘치는 커다란 야수의 눈망울에는 애틋하고 묘한 감정도 곁들여졌다. 역시나 진정한 사랑의 황홀함과 함께 오랜만에 멋지고 웅장한 스케일의 뮤지컬 영화 한 편은 필자를 만끽하게 만들어 주었다.
살다 보면 복잡한 미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빛을 향해 발버둥 칠 때가 있다. 때로는 단순하고 심플한 것이 어둠이 드리워진 삶의 해결사이며 악성 스트레스를 순간이라도 단숨에 날려주기도 한다. 그저 주변이 잠시라도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한다면, 그 자체가 탈출구로 주위에 모든 것들은 긍정의 마음으로 돌변해 문제는 마냥 쉽게 술술 풀리기도 할 것이다.
오늘 하루도 주어진 멋지고 행복한 시간들이 있어 또 감사할 따름이다.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다. 문 열면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이고 집앞 텃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나가도 바닷물에 발 담글 수 있고 좋아하는 낚시도 원 없이 할 수 있는 섬, 제주.
그런데 남자는 제주살이를 끝까지 찬성하고 여자는 반대하고 있다. 남자는 자기가 평생 꿈꾸던 일이라 하고 여자는 답답해서 섬에서 못 살겠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구본홍(63·남·정년퇴직·광명시)씨는 작년부터 제주살이 하고 있다. 그는 모 중소기업의 이사 직함을 끝으로 꽃중년이라 불리는 61세에 정년퇴직했다. 퇴직하자마자 오라는 회사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행을 선택했다. 그곳에 가기까지 아내와의 견해차가 많아 쉽지 않았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는 놀멍쉬멍 느린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 김옥녀(60·여·주부) 씨는 아직도 낯선 곳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 이주를 찬성하는 남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여력이 된다면
남은 생을 갈무리하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구본홍 씨의 퇴직 후 남은 재산은 중형 아파트 1채와 퇴직금. 그리고 다달이 나오는 연금이 있다.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결과다. 욕심을 버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들어보니 앞으로 20년 후까지의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놓았다.
제주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보증금 2천만 원에 1년 치 집세를 선납으로 200만 원을 주고 얻었다. 살아보니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다고 한다. 가능하면 제주에서 오래 살고 싶단다. 전입신고도 마쳤다. 제주도민이 되면 비행기요금 할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온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형님 아우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외지인이지만, 현재 그 마을에서 제일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이 막내라고 챙겨주고 있다. 섬이란, 원래 타지사람을 ‘육지 것’이라 배척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품 좋은 60대 젊은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나이 든 이웃을 잘 도와준다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남자가 제주이주를 찬성하는 이유는 드디어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잘난 체 있는체하지 않고 다가가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 내가 먼저 도울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한테 잘하다 보니 이 집은 채소와 과일 생선 등을 이웃 사람들이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넘치고 있으니 생활비도 서울살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고 한다. 다만 남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석 달에 한 번 여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답답함을 풀기 위해 1달에 한두 번 서울에 다녀온다고 한다. 앞으로는 두어 해는 유유자적 지내다 원하면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일손이 부족해 부지런하면 남녀노소 수입을 낼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부인의 말로는 남편이 요즘은 갯바위 낚시에 재미 들려 시도 때도 없이 고기를 잡아 오기 때문에 가끔은 손질하기 귀찮을 때도 있다고 행복한 푸념을 한다.
제주 이주를 반대하는 여자
현재 사는 집의 위치는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올레길 20코스 중간쯤이다. 15K 이내에 성산리 일출봉과 함덕 해수욕장이 있다. 공기 좋고 조용한 건 좋지만, 제주살이를 불편해한다. 이유는, 물론 제주에도 문화공간이 있긴 하지만 도심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고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을 가질 수 없어서이다. 그 가운데 제일 불편했던 경우는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있어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결항이나 출발시각이 지연될 경우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비행시간만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출발부터 도착지까지는 총 4시간 정도 소요되니 힘들다. 그 외에 금융기관과 대형마트, 편의시설이 적고 멀리 있어서 도심 같으면 5분 거리인 것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여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남편이 끝까지 우긴다면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니 양보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튼, 둘만의 시간이 많다 보니 부부간의 정은 더 깊어지는 거 같다고 한다.
남자는 제주도가 좋다고 무작정 내려와서 대문 굳게 닫고 자기만의 성안에서만 살면 이웃의 곱지 않은 시선과 외로움 때문에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인 4·3사태를 보면 그들이 왜 외지사람들한테 ‘육지 것’이라 하는지 이해된다. 제주에서 태어났어도 본적이 육지이거나 아버지 대에 제주에 이주했다면 수십 년을 살아도 제주도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타지에 살면서 부딪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자연풍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