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의 미학에 새로운 영혼을 수놓다
작업 과정들만 봐도 그녀가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지독한 창작의 과정에서 받게 될 예술적 고통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독과 괴로움이요? 말로 표현 못하죠.”
어째서 그토록 보통 사람이 보면 ‘사서 고생인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말하는 예술가의 정의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은 끝이 없어요. 무한하죠. 그러니 좋아서 해야 하는 게 예술이에요. 생계를 위해서라든지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건 작가로서의 덕목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봐요. 어려울수록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어요.”
가난하든 풍요롭든 타고난 예술적 유전자가 있으면 ‘올인’해야 하는 게 예술가라는 그녀의 말에는 예술에 대한 운명론적인 관점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운명으로서의 예술이란 손 작가에게 가장 적합한 표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그녀는 그녀를 예술의 길로 이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조건 창조하라”는 어머니 말씀
손 작가의 어머니 이경수 씨는 외할머니로부터 자수를 전수받은, 자수 전문가였다. 또한 초등학교 교장, 경상남도 초대 교육위원 등 교육자로서의 자질 또한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딸인 손 작가를 보며 3대째에 이르는 자수 예술가로서의 미래를 발견한 것은 다분히 운명적인 면이 있었다. 7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10세 때 자수를 손에 쥔 손 작가는 붓 대신 실로 그리는 그림에 미쳤다. 뒤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학과에 진학한 뒤에는 자신의 운명적인 삶의 길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게 어머니 말씀이었죠.”
손 작가가 밖으로 나온 것은 1976년이었다. 그때 제작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독립선언문 자수가 미국독립기념관에 소장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자수 작가로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86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자수 작가로서 우뚝 섰다. 그러한 손 작가의 여정에서 어머니는 든든한 조언자이자 동지였다. 1500여 가지에 이르는 색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만든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한 말들은 예술가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금언들이다.
“무조건 창조하라. 숲을 만들면 새와 호랑이는 찾아오게 되어 있다. 욕심을 버리고 모든 걸 나눠라. 본인 소유로 생각하지 마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마라.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해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협업
그토록 노력해서 만들었는데 본인 소유로 생각하지 말라니?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말은 자신의 작품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소유로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시작될 것을 오래전부터 예견했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이 기계 자동화와 AI 발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상향평준화가 되고 있는 현재, 문화는 각국이 국가적 헤게모니를 걸고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백범 김구 또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
말하자면 손 작가에게 있어 어머니가 말한 ‘숲’이란 한국의 예술을 통칭하는 셈이다. 실그림을 매개로 한국 예술이라는 큰 틀을 연결하고자 하는 손 작가의 도전의식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와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전통 장인들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술적으로 각 분야 전통 장인들과 협업해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셈이다.
전통 장인들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
손 작가는 자수, 배접, 백골, 조각, 옻칠, 매듭, 침선, 장석의 장인 등 여덟 파트의 전통 장인들과 35년 넘게 한 팀으로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조형물·병풍 등의 협업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고민이 늘어나고 있다. 전통문화계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다.
“장인들의 생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다 그만두는 추세이고, 맥이 끊겨 대를 잇지도 못하고 있어요. 협업할 수 있는 장인들이 사라져가고 있어 그 부분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통과 고독을 벗 삼아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재에 정작 전통 장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거니와, 당장 작품 제작의 추진력을 잃게 될까 걱정하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얼마 안 남은 장인들은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이 그녀 작품의 특징인 디테일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안 보이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만약 각 분야의 장인들이 없어지면… 이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며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년 후에, 우리 장인들이 없어졌을 때 작품을 복원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요즘 그녀는 15년 전부터 ‘전탁’을 다시 재해석해 이제야 옻칠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100년 이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그림의 새로운 경지를 열다
손 작가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인 수평선인 사람”이라는 말에서 그녀 자신에 대한 판단이 느껴진다. 그녀는 주어지고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 가치가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는 그녀가 품고 있는 작가론과도 연결된다.
“진짜배기는 한 분야를 정말 미치도록 좋아하면서 자신에게 정직한 작가죠. 일반 관객들은 자신을 속이는 작가를 처음에는 못 알아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날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작가는 뭐라고 말해도 본인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요. 자신에 대한 인정도 본인이 해야 하고, 스스로 봤을 때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시정을 해야 하죠.”
실그림이 자수 기법으로 제작되는 이상, 그리고 그 기법이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실 한 땀 한 땀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상,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작업에 들어가면 외부 노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외부 노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호 본지 표지 인물도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사명감으로 용기를 내게 됐고 후배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어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어쩌면 명맥이 끊기는 전통 장인들을 보며 느낀 바였을지도 모른다. 한층 새로워진 손 작가의 행보를 보며 실그림 예술이 한국 문화의 한 획이 되고, 그 길에 자신이 기여한다는 작은 자부심을 갖는다는 그녀가 만드는 숲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새와 호랑이가 모여들게 될지 자연스레 기대를 품게 된다.
자수로부터 출발했지만 더 창의적이고 복잡하며 섬세한 미감을 자랑하는 예술로 거듭난 실그림. 손인숙(70)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1500여 종류에 달하는 색실을 다루는 실그림의 대가로서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현대예술로 이으며 독자적인 미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예술 선진국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은 그녀의 실그림은 단순히 그림의 틀을 넘어 다양한 전통 장식 등 공예의 세계와 결합했고, 이제는 건축과의 컬래버까지 진행 중이다. 거침없는 예술가적 도전의식으로 한국 예술의 큰 숲을 수놓고 있는 그녀의 뜨거운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전통은 예술이 넘어야 할 무의식적 소재의 바다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숙명은 전통과 창작의 끊임없는 대화와 변형의 연속인 셈이죠.”
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우리 예술의 현재를 말할 때, 전통과 현대의 만남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 바로 전통 자수를 현대예술로 승화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음을 홀린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곳은 다름 아닌 서구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였다.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은 실그림을 감상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전통과 창의성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모습입니다. 너무나 모던하기도 하죠. 이 작품들을 볼 때면 신선한 숲속을 걸어갈 때 받곤 하는 자연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해요.”
또한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 전문박물관인 기메박물관 관장인 소피 마카리우의 찬사도 여기에 더해질 가치가 있겠다.
“한국인의 내밀한 속, 한옥의 안채를 들여다보듯 흥분됩니다. 이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강하면서도 절제된 섬세함이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소피 마카리우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계 저명인사들의 찬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손 작가 작품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표시로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를 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손 작가는 2015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에 정부 후원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문화원 전 다니엘 올리비에 원장, 소피 마카리우 관장은 그녀의 작품이 한국의 전통문화 자수를 예술로 승화한 놀라운 성과라며 적극 나서서 한불 수교 130주년 공식 행사 인증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의 ‘르 몽드’ 지와 ‘르 파리지앵’ 지 문화면에 손 작가의 실그림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되면서 처음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6개월간의 기메박물관 전시로 성공적인 유럽 데뷔를 이뤄냈다. 250여 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는 3개월 만에 8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전시회로 기록되며 대성공리에 끝마쳤다. 이어서 프랑스의 니스동양미술관과 스위스 제네바 바우어재단 극동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손 작가의 작품은 세계 각 분야 문화 예술인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큰 문화예술의 아트코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화가의 붓처럼 색실로 그려지다
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수에서 비롯됐지만 자수라고 하지 않고 ‘실그림’이라고 칭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왜 그렇게 지칭되는지 바로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에 보고 접한 자수와는 다른, 훨씬 고도화된 미술 영역의 세계를 보여주며 손 작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실그림이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틀에 씌운 빈 천에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세계를 충실하게 투영해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재료와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창작 방식이다. 마치 화가가 캠퍼스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바늘이란 붓으로 실을 채색하듯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실그림을 완성한다. 틀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여주며 영혼을 수놓는 것 같다. 화풍으로 보면 동양화와 서양화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다. 이때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은 더 깊고 풍부하게 표현된다. 일반적인 전통 자수는 100여 개 안팎의 색실을 사용하지만 그녀가 쓰는 색실은 1500여 개에 이른다. 그 숫자의 차이만 봐도 그녀가 갖는 자부심의 합당한 근거를 알 수 있다. 그녀의 실그림 작품들이 기존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을 넘어 풍부한 미학을 선보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추상화, 풍경화, 목공예, 보자기, 회화 보자기, 인물화, 불교미술, 풍속화, 산수화, 서예, 한방 문화, 노리개, 복식, 주머니, 열쇠꾸러미, 걸개장식, 우드아트, 물푸레나무 조형물, 장신구, 병풍, 그리고 건축에 이르기까지 22가지 장르를 넘나든다.
세계가 먼저 알아본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들에 쏟아지는 호평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실그림만이 창조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적 디테일에 있다. 자수 작품은 앞면만 아니라 뒷면도 볼 수 있다. 뒷면을 보면 작품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손 작가는 이 부분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작품을 만든다.
그녀 작품의 섬세함은 재료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자수 뒷면에 풀칠하는, 즉 배접 과정에 쓰이는 풀은 전통 방식으로 2년여에 걸쳐 만들어진다. 인물의 머리카락을 표현할 때는 실제 머리카락을 쓰기도 한다. 목재를 쓸 때도 경도를 따져서 10년 이상 말린 통나무를 사용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대하는 그녀의 엄격한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그녀의 실그림이 해외 갤러리에서의 감탄을 유발케 하는 근거들이다.
전통 건축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자수라는 특별한 소재가 만들어내는 독자적 미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의 결에 따른 음영과 입체감까지 고려해 표현한 것이 생생한 공간감을 색다르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만든 작품의 색감과 요철감을 확실하게 감상하려면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실그림과 건축의 결합이라는 도전
실그림으로 표현한 건축물은 그녀로 하여금 실그림과 건축의 융합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무려 20여 년째 제작한 것이란다. 어느 누가 자수와 건축이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옛 선인들의 옷과 귀중품을 보관하던 대형 의걸이를 만들고 있어요. 흑단나무를 주재료로 해 전체를 꽃살문으로 디자인하여, 248개 서까래의 끝 부분에는 연화 문양의 실그림이 들어가게 됩니다. 몸체에는 96개의 문짝에 한국의 문살을 디자인해 단청 이미지의 실그림으로 표현했고 지붕에는 암키와 수키와가 조화를 이루며 네 귀퉁이 상단에는 용마루를 앉혔습니다. 곡선이 내려오는 처마 위에는 잡상을 얹어놓았으며 축 하단에는 운룡을 조각하고 봉황의 길을 만들어 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단 사방에는 건축을 지키는 해태를 조각해 대우주를 지키는 의미를 드러냈죠.”
단순히 자수틀에 수만 놓는 게 아니라 디자인한 큰 그림을 여러 영역의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수월관음도’를 들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투명한 사라를 걸친 관음보살의 고귀한 자태가 어둠속에서 마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현신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신비롭게 묘사돼 있다. 표현기법상의 우수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고려 불화 중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들에 의해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었고 국내에는 몇 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손 작가는 수월관음도를 실그림으로 창작해보고 싶었다.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는 길이 419.5cm, 너비 254.2cm로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수월관음도는 배경 부분과 정병, 선재동자로 이어진 부분에 손상과 훼손이 더러 있어서 손 작가는 화원의 입장이 되어 상상하고 디자인하여 창작하는 게 작업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해석한 수월관음도는 각고의 노력 끝에 길이 5m가 넘는 대작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2편에 계속)
‘실그림’이라는 한국문화의 깊이와 이채로움을 만나볼 수 있는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가 해외 문화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 자리 잡은 아파트 1층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방문객이 대분분이다. 손인숙 작가의 아틀리에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손인숙 작가의 실그림 작품은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지난 2016년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6개월간 특별 전시됐던 적이 있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이 한 개인의 작품을 반년 동안 전시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례다. 그러다보니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진 손인숙 작가는 우리 예술의 세계적 위상을 가다듬는 전략을 모색하려면 예술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참다운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 각 분야 문화예술인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큰 문화예술의 아트코어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된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제 작업실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해외 국빈들에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 출판 제안차 방문
실그림 작품은 이후 니스에서도 전시돼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았다. 이후 실그림 아틀리에 명성도 높아지면서 이제 예술 관련 문화 관련 명사와 해외 유수 박물관장을 비롯해 유명 인사들이 한국에 오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최근 손 작가는 프랑스 대형 출판사 갈리마르(Gallimard)로부터 출판 제의를 받았으며 지난 10월 25일부터 3일간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장과 예술 담당 편집자 등 프로젝트 책임자가 실그림 아틀리에를 방문해 작품집 출판 협의를 심도 있게 나눴다.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서 만난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장 캐롤라인 레베스크는 “2015년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전시 작품을 봤을 때도 놀라웠지만 서울에서 직접 보니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한 손 작가의 창의적인 상상력이 세계적으로 통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호평을 쏟아냈다.
1919년에 설립된 갈리마르는 20세기 프랑스 제일의 출판사로 알려져 있으며 그동안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카뮈를 비롯한 많은 유명 작가의 주요 작품을 출판했다.
캐롤라인 레베스크 편집장은 “작업실에서 본 손 작가의 작품 중 ‘수월관음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독특한 작품세계에 매료됐다. 갈리마르가 실그림 작품을 소개하는 일은 저희에게 엄청난 모험이 될 것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손 작가의 대형 작품을 저희 회사에서 출판하는 작품집을 통해 프랑스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서 그녀는 출판하고자 하는 손 작가의 작품집 콘셉트는 작가의 정신을 드러나게 할 것이고 작품의 앞보다는 뒤를 더 배려한 손 작가의 작품을 디테일한 부분까지 질감을 밀도 있게 보여줄 수 있도록 디자인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내년 가을쯤 출간을 목표로 일정을 체크하는 등 짧은 방문기간에 손인숙 작가와 의견을 다양하게 나누는 등 작가의 개인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점검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갈리마르 출판사 프로젝트 팀들은 작품집 판형, 페이지 분량, 표지 콘셉트, 내지 용지, 목차, 카테고리, 가격, 사진 구도등 전체적인 디자인 구성 체제를 세워놓고 있다.
실그림 작품을 통해 한국 문화에 취한 갈리마르 출판사 프로젝트 팀들은 손인숙 작가의 작품집이 프랑스에서 유일한 베스트셀러로 탄생할 거라는 설렘을 안고 돌아갔다. 내년에 출간할 프랑스어판·영어판 작품집은 ‘실그림의 거장’ 손인숙 작가가 해외에서 이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美 조지아 귀넷카운티 방문단 영접
지난 10월 28일 강남구청(구청장 정순균)이 미국 조지아 주 귀넷카운티와 자매결연 10주년을 기념해 귀넷카운티(의장 살럿 나시) 방문단 12명을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에서 영접했다.
2009년 귀넷카운티와 자매결연 후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강남구는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이사장 이기수)을 통해 강남구의 우수 행정을 홍보하는 기회를 특별히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0월 29일에 작업장을 방문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디자이너는 “손 작가 작품을 보고 너무 행복했다. 환상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듯, 불타는 듯했다. 지난 수년간 보았던 아름다운 다른 작품들 중 단연 최고이며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며 감동을 전했다.
지난 10월 31일에는 소피 듀어르망 루이비통 이사가 손 작가와 인증 사진을 찍으며 “숨이 막히는 발견이었고 실을 이용하여 강한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에 감탄했다”며 방문객으로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소피 루이비통 이사는 지난 10월 30일 서울 청담동서 열린 루이비통 플래그십 스토어 ‘루이비통 메종 서울’ 오픈 행사 참석과 국내 주요 면세점과 백화점 방문을 위해 방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처럼 25권이 넘을 정도로 찬사와 극찬을 하며 기록을 남기고 간 방문객들의 방명록이 아틀리에의 보물이기도 하다.
최근 손 작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셀럽들만 봐도 실그림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로르 슈왈츠 극동박물관장, 소피 마카리우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 이사장, 올리비에 갸벨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장, 다니엘 올리비에 전 프랑스 문화원장,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전 프랑스 장관 장 마르크 에호의 부인 브리지트 에호, 장뱅상 플라세 프랑스 상원의원, 오렐리 사무엘 입생로랑 박물관 컬렉션 디렉터, 프랑스 건축가 장누벨 수석 디자이너, 프랑스·독일·일본·인도네시아·모로코 등지에서 온 대사와 그 부인들이 다녀갔다.
손 작가의 독보적인 작품을 마주한 외빈들은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에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실그림이 한국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서 창조적이고 철학적으로 작업을 펼쳐온 손 작가의 아틀리에를 보고 해외 문화예술인들은 어떤 콜라보를 이끌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17대 고려대 총장, 사립대총장협의회장,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중국연변과학기술대·러시아모스크바국립대·미국조지워싱턴대 등 국내외 유수 대학의 명예교수 및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기수(李基秀·71)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경력은 법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성공 사례들의 목록이다. 그런 그가 법학이 아닌 예술계의,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소 돌출적인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그 선택이야말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사장이 예술을 접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버릇이자 의지일 것이다.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합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험하는 거니까 책을 읽는 만큼 내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나는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학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그 밖의 경제와 인류,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든 것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가져와서 내 삶에 녹여 삶을 좀 더 향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예술의 후원자가 되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이사장은 그동안의 삶을 법 연구로 세운 대표적인 법학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배영 이화여대 총장께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초청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인숙(예원실그림문화재단 관장) 작가가 만든 를 보고 ‘어떻게 저런 작품을 직접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건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죠. 그런 걸 오천 점 정도 만들었다니까, 신의 경지여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작품에 매료되어 있는데 손 작가가 재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던 돈 삼십만원을 후원금으로 냈어요.”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첫 후원자였다. 재단 통장에 첫 번째로 후원금을 넣은 첫 후원자로서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요청으로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작품 전시와 공연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부터 12월 말까지 130개의 작품을 전시 및 공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파리에서 3개의 작품 전시 및 공연이 이뤄졌는데 각각 종묘제례, 공예 작품, 그리고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이다.
실그림 작품 전시는 우선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서 했고 이어서 니스 동양박물관에서 콜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8월까지 3개월 동안 8만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르몽드 지는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라는 카피를 내놓으며 두 번이나 지면에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예원실그림문화예술로 한국 예술의 위대함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9월에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만났어요. 이분이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프랑스 부모님 밑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자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사실이죠. 그런데 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와서 작품을 보고는 계속 감탄하시더군요. 전통과 모던의 조화라고요.”
이사장이 추구하는 ‘헌법에 입각한 예술론’
이사장 역할까지 하면서 실그림을 알리는 데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예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총장을 끝내고 난 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론은 나머지 인생을 대한민국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바치겠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또 고민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만든 헌법 소책자가 눈에 띄었어요. 헌법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고, 그 텍스트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국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입니다. 이는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죠. 그리고 해야 할 게 9조입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제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헌법 가치 제고와 통일, 문화가치 창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예원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이사장직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거죠.”
실그림에 담긴 민족문화 창달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라는 빨간색 소형 책자. 그는 기자에게 헌법 제9조와 69조를 읽어보라고 했다.
“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문인데, 여기에도 대통령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적혀 있지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 중
이 이사장은 1945년생이다. 이제 70이 넘어가는 시니어로서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정년을 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웃음). 명예교수로서의 생활이 참 좋습니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시간이 있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가였는데 이제는 반주 정도로 줄였어요,”
이 이사장은 최근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쓰면 손녀가 정리해주고 있다. 이 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의 삶을 체험하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쓰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이렇게 잘 기억이 나네’ 하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니까 마누라가 ‘당신이 술을 안 먹으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웃음).”
이 이사장의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잘살아왔다고 생각할까?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시집 장가 잘 갔어요. 친손녀가 대학 3학년, 친손자가 대학 1학년, 외손주 중에 가장 큰 녀석이 대학 1학년이고 둘째가 고3, 셋째가 중3이죠. 제 처가 오십 될 적에 가족들 전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 칠순잔치 때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찍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 또 있었다. 올해 3월 1일,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마흔 번째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학문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제자가 마흔 명이나 4년제 대학 교수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총장 재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그때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웃음) 다들 좋다고 그래요. 그때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간에 쫓겼고 저녁에도 두세 군데 들러 인사해야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자유를 느껴요.”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사장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천생 학자다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로 돌아가고 싶죠. 공부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고. 논문만 쓰면 되니까(웃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진행하는 작업이 또 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 중 조교가 스물일곱 명, 교수가 마흔 명이 나왔다. 그 제자들이 그와의 인연을 원고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제자들과의 인연을 정리한 원고는 책이 되어 그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회고하는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은 제가 만으로 예순다섯 살 되던 날이었어요. 정년퇴임 논문집을 만들어 롯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는데 그때 말했어요. 내 인생 2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45년은 고대 법대, 독일 박사, 회사법·공정거래법·지식재산권법·국제거래법 갖고 먹고 살았는데 예순다섯 살부터 45년간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연과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하면서 살겠다고. 그럼 110세예요. 그런데 왜 하필 110세냐. 고려대가 19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55년이 고려대 150주년이에요. 그해가 마침 제가 110세 되는 해고. 그래서 고려대 150주년이 되는 5월 5일에 17대 고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축사하는 게 마지막 내 꿈이에요.”
그는 호탕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가장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용은 그의 섬세한 친화력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다. 자식뻘 되는 기자인데 늦어도 괜찮다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며느리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는 시아버지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110세까지 발굴에 나설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마르지 않은 깊은 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깊은 연구와 후덕한 인품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계에서 우뚝 섰던 그가 요즘 부단히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면서 스스로 정한 가치에 열렬히 투신하고 있다. 이런 이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대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저는 전주 이씨 경남 하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열심히 산 사람이다’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