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안경을 파는 쇼핑몰도 없던 시절부터 안경 디자인을 시작해 25년간 디자이너로서 묵묵히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1세대 안경 디자이너로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 디자인 회사 ‘디자인 샤우어’를 운영 중인 김종필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인터넷이 낯선 시대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본이 된 세상으로 변했지만, 같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업계를 떠났다. 그가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그간의 여정을 들으며 그 원동력에 관해 물어봤다.
어릴 때부터 암기나 받아쓰기는 못해도, 그림을 그리는 데 재주가 있어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다녔다. 그림 그리는 걸 얼마나 좋아했던지 다빈치의 해부도를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직접 따라서 매일같이 그렸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 타고난 본능이 이끄는 대로 대학에서도 금속공예 디자인을 전공했다. 우연한 계기로 선택한 첫 직장이 인생의 이정표가 됐다.
“어릴 때부터 안경 디자이너가 꿈은 아니었어요. 다만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그런 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상하게 안경에 끌렸어요. 당시 렌즈와 테가 조립되는 구조적인 디자인이 제게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운 좋게 안경 디자인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유명했던 ‘서전안경’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직장인으로서 애환은 누구나 있지만,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과 안정적인 생활은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뒤로하고 어떤 결심으로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든 걸까?
“첨엔 안경 디자인 리뷰 사이트를 만들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블로그라고 할까요? 막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절이라 ‘블로그’라는 개념조차 없던 때였죠. 심지어 안경원 하시던 나이 지긋한 사장님들은 이메일조차 못 쓰셨어요. 그때 전 세계의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안경을 수집하면서 리뷰를 꾸준히 올렸어요. 이 디자인이 왜 좋은지, 브랜드 스토리는 어떤지 스스로 공부도 할 겸 만들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기술로 승부
재미로 시작했던 일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입소문이 퍼지면서 여러 군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해외 브랜드 담당자들이 한국 업체에 그의 사이트를 문의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에게 투자해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디자인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몰랐어요. 기회가 오니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지금 같으면 착실하게 준비했을 텐데, 어린 나이에 그냥 저질러보자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경제관념도 없던 때라 다달이 통장에 꽤 많은 금액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계속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사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관리가 잘되지 않았고,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했다. 빚만 지고 돈을 벌지는 못한 채 계속 적자를 메우기에 바빴다.
“안경원을 4개나 운영하고, 내근직과 영업직도 있고, 도매까지 손을 댔는데 잘 안 됐어요.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직원이 24명이나 있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직원의 이름을 잘 모를 때도 있었어요. 통장 잔고 0원에서 시작했는데 빚이 13억 원까지 불어나니까 아찔하더군요. 결국 폐업 위기까지 갔고, 밀린 월급을 챙겨주면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냈는데 참 미안했어요.”
빚이 불어나고 직원을 보낼 정도라면 폐업을 신청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터. 그는 어떻게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걸까?
“다시 살아야겠다! 이 마음 하나밖에 없었어요. 거래처 가서 부탁도 많이 하고, 욕도 무진장 많이 먹었어요.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빚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고요. 한 8년을 그렇게 지나왔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진짜 앞만 보고 달렸어요. 다른 건 죽어도 할 자신 없고, 이걸로 끝장 본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때부터 기술로 승부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빚도 많이 줄었고, 신용불량자 상태도 풀렸어요.”
고심이 만든 고집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나? 그가 만든 안경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하나둘씩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특히 대중에게 얼굴을 자주 비추는 연예인들이 찾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단골손님이 가수 양희은이다.
“저희가 갤러리아백화점에 입점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양희은 선생님 스타일리스트가 저희 안경을 보고 선생님께 추천을 드린 거예요. 선생님도 안경을 보시고 맘에 들어 하셔서 그때부터 저희 안경을 자주 찾으세요. 이제까지 30개 이상은 구매하신 것 같아요. 황재근 디자이너나 김영하 작가도 저희 안경을 쓰세요. 대체로 보면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와요. 그렇지 않은 일반인 분도 종종 오시는데, 그분들도 개성이 강한 편이에요.”
그렇다면 단골손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제 안경의 독특한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분들이 많이 찾다 보니 재미있고 차별화된 걸 좋아하세요. 예를 들어 안경알의 좌우 형태가 다른 안경이 있는데 하나는 둥그렇고 다른 하나는 네모예요. 굉장히 특이한 안경인데 이런 스타일을 선호하시는 분이 꽤 많아요. 테가 탈착되는 방식이라 부러지지 않고 빠져요. 빠지면 다시 끼우면 돼요. 충격을 받아도 잘 부러지지 않는 것이 제가 만드는 수제 안경의 장점 중 하나예요. 오로지 제 손끝에서 나온 하나밖에 없는 안경들이에요.”
수제 안경의 장점은 확실히 특별하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안경인 동시에, 한 사람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다만 대량 생산과 비교해서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오랫동안 수제 안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들이 다 하는 걸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똑같은 걸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평소에 생각하던 걸 손으로 한번 구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죠. 처음엔 공장에 최소 수량을 맡길 자금도 수중에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었어요. 사실 손으로 만드는 과정은 중요해요. 머릿속 생각을 구체적인 오브제로 실현하는 동시에, 과정 중에 하나둘씩 문제를 발견하면서 해결책을 스스로 생각해요. 그 과정이 더 좋은 안경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고 봐요. 손으로 만드는 과정은 일종의 실험이에요. 제 공방은 연구소나 다름없어요.(웃음)”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사람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기계와 비교해서 한계와 단점도 존재한다. 이제껏 수제 안경을 만들면서 힘든 점은 없었을까?
“물론 있죠.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요. 거칠게 말하면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한계치까지 고심해서 만들어내는 고집인 거죠. 기계나 기술이 부족하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제 성격상 그게 잘 안 돼요. 같이 일하는 후배는 왜 사서 고생하냐고 묻지만, 저는 이게 좋아요. 매번 똑같은 걸 만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새롭고 더 좋은 안경을 계속해서 만들고 싶어요. 늘 한계를 실험 중인 거죠. 제 고집이란 게 그래요.(웃음)”
한 뼘이라도 나아지는 삶
안경 디자이너로서, 숱하게 수제 안경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히 있을 터.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안경의 기준과 디자이너로서 철학을 물어봤다.
“일단 기능적으로 충실한 것이 기본이죠. 편하지 않고 튼튼하지 않은 안경을 손님에게 드릴 수는 없죠. 덧붙여 수제 안경은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에요. 새롭지 않으면 손으로 만들 필요가 없죠. 안경은 오브제에 대한 열정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그리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에요. 완벽한 안경은 없다고 생각해요. 광이 잘 나는 것보다 부족하더라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은 안경과 제대로 된 브랜드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시도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새로운 시도는 열정에서 출발해요. 저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걸 만들려고 매일 다짐해요.”
끝으로 더 나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디자이너로서의 계획을 물었다.
“죽을 때까지 조금씩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 삶의 목표예요. 빠르고 크게 성장하는 건 기대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그렇게 조바심을 내면 많이 힘들었어요. 남들에게 보이는 성공보다는 행복하게 재밌게 보내는 하루가 더 소중해요. 어제보다 조금씩 더 성장하고, 일 년 전보다 한 뼘씩이라도 나아지는 것. 그게 디자이너이자 한 인간으로서 목표예요. 그런 점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대표로서 앞으로 사업을 조금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요. 올해는 친환경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한번 해보려고요.”
베테랑 안경 디자이너 김종필 대표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성장’과 ‘차별화’였다. 그의 차별화는 명함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다 쓰는 종이 명함이 아니라 비닐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안경닦이 위에 수제 안경 사진과 함께 새겨진 명함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을 차별화하는 수단이자 실용성을 더한 명함이었다.
한편 그는 늘 성장하고자 했다. 폐업에 내몰렸을 때 사업가로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영·마케팅·브랜딩 책을 400권 이상 독파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경영인으로서의 판단 기준이나 관점을 많이 익힐 수 있었다고.
이제껏 그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안경을 만들며 자신만의 사유를 표현했다. 그게 단순히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고, 구체적인 실행과 기본을 충실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더욱 빛나 보였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디자인적으로 차별화에 신경 쓰면서 편안함이라는 안경의 실용성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종필 대표는 디자이너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기 위해서 지난 25년 동안 밤낮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수제 안경이었다. 흔히 나이테라고 부르는 ‘연륜’은 계절의 변화가 뚜렷할수록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늘 시도하고 매일 성장하려는 그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큰 연륜을 만들고, 후에 품이 넓은 나무로 성장해서 넉넉한 그늘을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안경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며 마친다.
아이디어 닥터, 트렌드 몬스터, 강연여행가, 브랜드 전문가…. 이장우 브랜드 마케팅 그룹 회장(62)의 여러 별칭이다.
이 별칭들엔 이장우 회장의 개인 브랜드 혁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현재 전통제조업에서 IT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기업 7곳에서 고정·비고정의 급여를 받는다. 1년에 최소한 5~6회는 미래 유망 트렌드를 찾아보고자 해외 아이디어 탐방 여행을 가 브랜드의 촉과 감을 갈고 온다. 삶 자체가 ‘살아 있는 브랜드’로 부단한 자기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 햇빛이 투명한 어느 멋진 날,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화려한 컬러의 통 좁은 바지에 선글라스, 중절모는 물론 반지와 팔찌 등 액세서리 일습을 갖춘 그는 말 그대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인터뷰 다음 날, 그는 인도로 3주간 홀로 명상연수를 떠날 예정이라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 곳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좌불안석입니다. 무려 일곱 군데에서 급여를 받으신다니 부럽습니다(웃음). 퇴직 후 급여가 오히려 더 많아졌겠습니다.
“돈의 재미를 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현재 다섯 군데가 고정급여이고 두 군데는 비고정급여인데 늘었다가 줄었다가 합니다(웃음). 솔직히 퇴직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최고경영자들이 퇴직 즈음해선 쪼잔한 상념이 많아지거든요. 부러진 날개 신세에서 영웅담을 생각한다는 것은 뻥이에요. 하다못해 국민연금, 4대보험 문제는 어떻게 하나, 별 게 다 걱정이 됐어요.”
퇴직 후 바로 이장우 브랜드 컨설팅 그룹을 만드셨지요. 직원 한 명을 둔 미니 지식기업을 창직(創職)하셨습니다. 퇴직 후, 현직 때 마지막 연봉의 두세 배를 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실정과 저의 현실을 냉정하게 본 것입니다.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리지 않은 것이지요. 퇴직 후 회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조직을 키우기보다 개인으로서 나, 이장우를 키우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규모의 경제에서 제가 대기업, 다국적 컨설팅 그룹과 경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 기업들의 CEO와 경쟁한다면 승부수를 던질 만하지요. 개인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직 후 공황을 겪는 것은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려서입니다.”
퇴직 CEO들이 과거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러 인생 2막 설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더군요.
“강의, 컨설팅 모두 부단한 콘텐츠 개발 싸움입니다. 대중의 열광, 과거의 영광 모두 거품이고 잠깐이에요. 길어야 1~2년 가기도 힘들고 곧 고갈되지요. 강의는 말이 아니라 콘텐츠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해도 콘텐츠 있으면 오래 갈 수 있어요.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돼 있지요. 멀리 보고 깊이 보려면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지요. 저는 책 공부보다 여행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스몰데이터, 감(感)이 브랜드 차별성이에요. ○○에서 들었다, 읽었다는 개인의 스몰데이터가 기업의 빅데이터를 이기기 힘들어요. ‘내가 직접 해봤다, 가봤다, 느껴봤다’를 이야기해야 먹히지요.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나만의 느낌에서 옵니다.”
브랜드 전문가, 아이디어 닥터, 그리고 강연여행가로 별칭이 계속 진화하고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브랜드 연구는 제 평생의 업으로 한 일입니다. 여행은 콘텐츠 개발을 위해 하다 보니 어쩌다 본업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인문학 강의를 좋아하더라고요. 트렌드의 발상지, 원산지를 직접 방문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는데요. 요즘은 여행인문학으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저는 관심의 촉, 미래의 촉이 느껴지면 배울 만한 곳이 어디에 있나 찾아봐 세계 어디든 직접 가보려고 합니다. 가령 2009년 도쿄 책방을 갔을 때의 일인데요. 트위터에 관한 책이 한 코너를 다 차지하고 있더군요. SNS가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미국 뉴저지 스테이트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동양의 중년 남자가 그 먼 곳으로 한겨울에 SNS 공부를 하러 왔다니 학교에서 놀라더군요(웃음). 공부는 선(先)투자이자 선(善)투자예요. 공부하면서 계발하고, 계발하면서 공부해야지요.”
일반인이 ‘트위터’의 ‘트’란 말에도 익숙하지 않을 때 조기유학(?)을 한 덕분에 그는 SNS 브랜딩 홍보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 6만 명. 카카오스토리 5만 명, 인스타그램 1만 명의 팬을 확보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의 ‘본산지, 원산지 찾아 아이디어 탐방 삼만리’는 SNS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치즈학교, 미국 포틀랜드 커피 바리스타스쿨, 영국 수제맥주 학교, 이탈리아 전통 베네치아 파스타 학교 등 관심 분야도, 아이디어 탐방 지역도 무궁무진하다.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 도처를 누비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익혔다. 말 그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배웠노라’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부딪치는 소소한 사고와 우연한 사건들. 그것이 경험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느낌이 되어 그만의 브랜드로 승화된다.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먼저 걱정되는걸요. 항공비, 체재비, 게다가 연수비용까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버는 것의 20%는 자기계발에 투자한다는 주의입니다. 되도록 스폰서를 잡지 않고 제 돈으로 가는 게 원칙입니다. 후원을 받으면 여행 순서를 깨뜨리고 구속이 되거든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데 2000만~3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강연, 컨설팅 요청이 들어와 투자한 것의 10배 정도는 뽑게 되더군요.”
그는 처음인 일을 나만의 것으로 차별화하면 브랜드가 된다고 말했다. 가령 커피 바리스타 강의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커피와 맥주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브랜드 전문가는 흔치 않다.
흔히 “관광이 아닌 현지 체험, 풍경이 아닌 사람을 만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회장님처럼 여행을 즐기면서 아이디어 탐방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행은 필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세요. 너무 목적, 목적 하며 따지지 마세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에 갇히기 쉽습니다. 기회는 인과관계 밖에서 터져 나옵니다. 많이 가야 합니다. 삶은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여행은 꿈입니다. 꿈을 가져야 여행을 가게 되고, 여행을 가야 자꾸 꿈을 키울 수 있지요.”
이장우 회장은 “여행은 꿈이고 도전”이라며 “목적을 갖고 가지만, 가서 새로운 목적과 도전을 얻는 우연, 세렌디피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면 온갖 정보를 검색, 6개월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지만, 막상 가서는 널널하게 현지에서 자유여행을 즐긴다”고. 사전 계획 때는 채우고, 막상 가서는 비운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고의 과학적 플래닝과 동양적 사고의 인문학적 여백의 결합형이다. 이번에 가는 인도행은 이름하여 소울 트립(soul trip). 트렌드의 촉을 읽으면 정통 원산지를 찾아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다듬어 전달하고 퍼뜨린다. 그것이 바로 브랜딩 아니겠는가.
외국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세계 도처 어디든 도전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하시지요. 최근에는 힌두어, 라틴어까지 공부하신다고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입니다. 언어를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여행한 곳을 더하면 새로운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요. 외국어 공부는 자기를 다른 세상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유체이탈 행위입니다. 리얼하지요. 비유하자면 번역이 사진 속 풍경이라면, 원어는 풍경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 즉시 통번역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외국어 공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얼한 것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속도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예요. 앞으로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필(feel)의 경쟁시대가 될 거예요. 지식과 상식은 보편화돼 검색하면 나오니까요. 느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아요. 새로운 아이디어 탐방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입니다. 기업 자문을 하실 때 신세대 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들이 어려워해 소통이 어렵진 않던가요.
“제가 얼마나 신세대랑 잘 노는데요(웃음). 저는 나이듦을 장점으로 활용해요. 바깥바람 막아주지, 아이디어 아낌없이 공유하지, 성과 올려주지, 이들의 입장에선 ‘성과와 실력은 향상시켜주면서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일은 쉽게 풀어가면서 어려운 책임은 상대가 가져가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신세대가 저처럼 나이 든 멘토와 일하는 장점이지요.”
그는 세대 간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매력 자원이라는 무기의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하는 것은 어렵거나 겁먹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다. 기성세대에게 배울 게, 물어볼 게, 아쉬울 게,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소통하려면 호통이나 비위 맞추기는 불필요하다. 그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재미와 의미를 갖고 일하지 않으면서 ‘나처럼 돼보라, 해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냐는 반문이다.
평생 재미와 의미로 점철된 흥미진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의 ‘그늘’이 궁금합니다.
“웬걸요. 제가 콤플렉스 투성이인걸요. 콤플렉스가 힘이 되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단점이 강점이 되고, 엎치락뒤치락이에요. 집은 가난했고, 머리는 나빠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어요. 다행인 것은 지식이 들어가기 힘든 대신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외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렸어요. 그게 외국어 공부의 동력이 되었지요. 또 집이 가난해 구멍가게를 했고, 상고에 진학해야 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 팔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일즈에 일찍 눈을 뜨게 됐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제 삶의 모토가 ‘긴 호흡으로 살자’입니다.”
이장우 회장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원고를 한 자 한 자 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블로그에 인도에서 쓴 따끈따끈한 새 포스트가 올라왔다. 아쉬탕가 요가의 요람인 인도 마이소르의 한 수도원에서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주황색 승려복을 걸친 모습이 얼핏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켰다.
“요가와 명상을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그 느낌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영혼이 춤추는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배움의 여정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by 이장우
어느 날 문득 그가 명상과 요가 브랜드 전도사로 새롭게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여행가 뒤에 붙을 그의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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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