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먼 곳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멀리 미국 유타주에서 오신 존 고 조이(John Ko Joy) 씨입니다. 이 분은 한국 전쟁 중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56년 만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주일 예배시간. 트럼펫을 든 한 남자가 성가대와 함께 나와 협연했다. 듬직한 체구에 웃음 밴 얼굴의 조이 씨.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미스터 조이, 인터뷰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으니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성사시키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이별을 직감한 조이의 선택
조이 씨의 어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조이를 출산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조이는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미군이던 생부 덕에 미군 야전병원에서 진료 혜택을 받으며 치료받았다고 했다. 조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생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식이 곧 끊겼다. 생각지 못한 임신과 어려운 가정 형편. 조이를 한국에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생모는 아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조이 씨는 부산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하와이를 지나 미국 본토로 갔다. 어린 나이에도 험난한 사회에서 안 굶고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차라리 모국에서 버림받아 미국행 위그선에 탑승한 것이 노아의 방주에 승선한 행운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밥을 굶고 있을 가족이 걱정됐다고 회상했다.
“‘플라잉 타이거’라는 비행기 모양의 ‘위그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일주일 동안 햄버거와 오트밀 수프만 먹었습니다. 그동안 먹었던 된장찌개와 김치가 갑자기 그립기도 했죠. 아니 김치를 찢어 숟가락에 올려주던 엄마가 그리웠습니다. 굶어도 엄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위그선에는 500명 정도의 영·유아가 베이비 박스에 담겨 배 3층까지 정렬돼 있었다. 얼굴 부분은 열려있었고 가슴 부분에는 양부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했다. 마치 “과수원에서 과일을 포장하여 출하하는 모습이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위그선 안에서는 수십 명의 간호사가 아기를 돌봤다. 입양이 생모와 영원한 이별임을 직감했던 조이 씨는 훗날 혈연을 찾 는데 도움될까 싶어 이름을 아버지의 성 ‘존’, 어머니의 성 ‘고’ 그리고 자기 이름 ‘조이’를 사용했다고도 덧붙였다.
인생의 친구 트럼펫을 만나다
조이 씨는 미국 유타주에 사는 좋은 양부모를 만났다. 1953년생으로 조이 씨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1958년 12월 19일. 조이 씨의 입양일인 동시에 새로운 생일날이 됐다. 처음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잘 못 했는지를 몰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중 9살 되던 해에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슬프기 전에 먼저 다가와 울어주고 기쁜 일 있으면 가장 기뻐해 주는 트럼펫이었죠.”
[IMG::CENTER]유타주의 한 음악대학에 진학해 재즈 트럼펫을 전공한 조이씨는 LA와 휴스턴, 텍사스를 돌아다니며 음악활동을 했다고. 예배 도중 성가대와 피아노 반주자와 예행연습 없이 연주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 오보에’는 실제 연주보다 더 아름다웠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그의 현재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미국 LA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여러 명의 음악인과 협연을 하며 음악 봉사를 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협연도 미국 교회에서의 인연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미국 생활 초반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조이 씨지만 이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 사람으로 성장했다. 필리핀 출신의 부인과 슬하에 자녀 3명이 있었으나 암으로 사별했다고. 그리고 3년 전 지금의 중국인 부인을 만나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지났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일곱 살 어린아이를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고 입양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이 씨는 대답했다. 불평이나 원망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어려서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웃음)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와서 엄마의 나라를 살갑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한국은 내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인터뷰 도중 ‘어머니의 나라’라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모국을 찾았지만 만남은 뒤로 미뤄야 했다. 한국 방문한 두 주 동안 입양되기 전까지 살던 의정부 집과 보육원, 어머니의 이름은 알아냈지만 말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DNA 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기회가 된다면 눈물의 모자 상봉 장면을 내 카메라에 꼭 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 둬 줘서 고맙다”고 했다. 차마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친절함과 화기애애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눈가에는 눈물 가득 고였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악수하는 손은 서로가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