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트렌드 모니터 최인수 외·시크릿하우스
리서치 전문 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은 대중 소비자의 흐름을 분석해 트렌드를 전망한다. 2024년 핵심 키워드는 ‘피드백 부재가 낳은 고립된 개인’이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모리 슈워츠·나무옆의자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는 주어진 시간을 ‘자기만의 세계’로 완성한다면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공원의 위로 배정한·김영사
조경미학자인 저자는 국내외 여러 공원과 도시에 대한 생각을 58편의 에세이에 담았다. 공공 공간과 도시를 어떻게 가꾸어나가야 할지 묻는 책이다.
초간단 교양 1분만 1분만·메이트북스
구독자 96만 명의 유튜브 채널 ‘1분만’은 단 1분 만에 세상의 온갖 유용한 지식을 재미나게 알려준다. 책에는 반응이 뜨거웠던 질문을 엄선해 실었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맨해튼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웬만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어렵다는 말을 흔히 한다. 고층 빌딩이 빼곡한 맨해튼은 아주 삭막해 보이지만 어디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극장, 카네기홀,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이나 현대미술관(MoMA)과 같은 세계적인 명소보다 외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작은 문화공간에 오히려 더 애착을 가지곤 한다. 포장마차의 음식과 광장에서 열리는 즉석 이벤트를 즐기고 창고 같은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무명작가의 전시회와 소극장 공연을 나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 문화다. 아마존의 위세와 임대료 폭등으로 세계 최대 서적 체인인 반스앤노블(Barnes & Noble)마저 미국 내 점포를 800여 개에서 600여 개로 줄일 정도로 서점들이 타격을 받고 있지만 맨해튼에서는 여전히 진한 책 향기를 맡을 수 있다. 42번가에 위치한 뉴욕공공도서관은 세계 5대 도서관으로 뉴요커의 자랑거리다.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알린 첫 번째 편지,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초고 등과 같은 역사적 귀중품을 포함해 5100만 점의 서적과 마이크로필름 등을 소장한 이 도서관은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독립서점의 산역사, 스트랜드·알거시
뉴욕시에 있는 10개의 반스앤노블 매장은 서점이라기보다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뉴요커들은 이 서점에 들러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만사를 잊고 책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고 학생들은 함께 모여 온종일 공부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다양하면서도 전통 있는 독립서점들도 뉴요커들이 애호하는 문화공간이다.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거리가 쇠퇴하듯 유니언 스퀘어 인근의 서점거리(Book Row)도 번창했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 버렸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100여 개 독립서점은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센트럴파크와 접해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건너편에 위치한 앨버타인 서점은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불문학 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스타킹스 서점은 페미니즘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면서 관련 인사들의 아지트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요리사와 미식가들의 모임터가 된 요리 서적 전문 서점인 보니슬로트닉, 여행서 전문서점인 아이들와일드, 미스터리 서적 전문서점인 미스터리어스, 문학 서적 전문서점인 맥널리잭슨 그리고 일본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북오프 등과 같은 서점도 뉴요커들이 아끼는 곳이다. 기증받은 책과 소장품을 커피와 와인을 곁들여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금으로는 홈리스와 에이즈환자를 지원하는 하우징웍스 북스토어카페는 감동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고서적 수집가들이 신뢰하는 고서적 전문서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희귀본과 수집용 서적을 선별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서적 애호가들에게 공급해주고 있는 미국고서적상협회(ABAA)의 회원사는 220여 개. 이 가운데 40여 개사가 맨해튼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뉴요커들이 손꼽는 대표적인 서점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고서점인 스트랜드(Strand Book Store)와 1925년 뉴욕 최초로 개점한 알거시(Argosy Bookstore). 스트랜드서점은 48개에 달했던 책방들이 사라진 서점거리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89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타계한 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생전에 ‘미국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예찬을 하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명소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서점의 휘트니 휴 마케팅 담당 이사는 “소장한 서적만 250만 권으로 서가의 총길이가 18마일(29㎞)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물론 자로 재어 본 것은 아니고 책 두께를 감안할 때 그런 계산이 나온다는 뜻이다. 수만달러를 호가하는 희귀본에서 1달러 미만의 헌책까지 망라하여 독서 애호가와 수집가들이 마음껏 책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이 서점만의 생존비법이다.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책을 좋아하는 세계인들의 탐방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3층에 위치한 희귀본 및 수집용 서적 코너에서는 한인 2세 김현영(미국명 Jane Jaiswal)씨가 전문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도 일한 경험이 있는 김현영씨는 우리말이 능숙한 데다 섬세하고 친절해 한인 방문객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내자다.
그가 가장 먼저 자랑스럽게 소개한 책은 1885년 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 2권으로 된 딜럭스 하드커버 초판본은 1000달러 수준이지만 야수파의 거장인 앙리 마티스가 직접 그린 삽화가 삽입된 희귀본은 4만5000달러(약 5000만원)를 호가한다. 오래된 종교서적과 컬러 삽화가 곁들어진 조류서적 등 3만달러 안팎의 희귀서적도 잇달아 선보였다. 1793년에 3권으로 발간된 아담 스미스의 은 경제학자들이 탐낼 만한 책이라 눈길이 갔다. 가격은 2000달러 수준.
수집 목적은 투자 보다 취미가 우선
김현영씨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유형의 서적을 상태가 좋은 초판본으로 구입하는 것이 책 수집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투자 목적으로 수집을 했다가 실망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좋아하는 책을 즐기면서 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그가 추천하는 권장 서적은 영국 유명배우이자 작가인 이안 맥켈런이 2014년에 발간한 법정소설 . 판매 가격은 20달러 내외에 불과하지만 작가의 이력과 소설의 내용 및 제본 상태 등을 감안했을 때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희귀본을 수집할 때는 미국고서적상협회와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인증하는 서점이나 전문가를 통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고 그는 강조했다. 값비싼 희귀본의 경우 서적의 주제와 내용, 발간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200여 분야로 분류되고 그 분야 전문가의 감정 없이는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 서점은 고객과 서적 관리 노하우가 차곡차곡 축적되면서 규모도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능가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
센트럴파크 인근 파크 애비뉴 59가의 부자동네에서 위치한 알거시 서점도 비싼 임대료를 거뜬히 견뎌내면서 3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코헨 가문의 세 딸 주디스, 나오미, 아디나와 주디스의 아들 벤저민이 함께 끌어가는 이 서점은 뉴요커들로부터 친근감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어 웬만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과 세계 고서적상협회, 그리고 고서적감정협회 등 각종 서적 관련 단체의 창립을 주도하여 서적 역사의 산증인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서점에는 미국 관련 고서적, 과학과 의료분야 역사서적, 각종 초판 서적 등이 빈틈없이 차 있고 이스트강 건너 브루클린의 창고도 비좁을 정도로 다양한 서적을 구비하고 있다. 산수(傘壽· 80세)를 이미 넘긴 맏딸 주디스 라우리 공동대표는 “두 동생과 아들과 함께 서점 일을 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자신이 태어난 연도, 지역이나 동·식물 등과 관련된 서적을 수집하다 보면 흥미와 전문성이 함께 높아진다”고 서적 수집 원리를 알려줬다.
한국인 고객들의 발길도 줄이어
족히 칠순은 된 듯한 막내 딸 아디나 코헨 공동대표는 “감동적인 소설과 세계를 변화시킨 서적, 그리고 위인의 서명이 담긴 서적을 접하다보면 자신도 그 세계의 일원이 된다”면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계를 선물하는 것보다 모든 세계를 담고 있는 책을 선물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조언했다. 연말에는 많은 고객들이 소중한 선물을 알거시 서점에서 고르곤 한다. 아디다 코헨 대표는 아름다운 화집과 사진집을 선물용이나 소장용으로 권장하고 있다.
알거시는 고객의 수집 성향을 세세히 파악하여 관련 서적이 입수되면 바로 연락하는 체제를 갖추어 고객의 만족도를 높여 나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한국의 고객들도 정기적으로 알거시를 찾고 있다. 한국 고객들은 교육적인 아동서적에 관심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코헨 공동대표는 덧붙였다.
세계에서 거래된 가장 비싼 책은 빌 게이츠 회장이 1994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 받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 노트로, 발명품을 구상한 라는 필사본이다. 중 한 권인 72쪽 짜리 를 손에 넣기 위해 지불한 돈은 3080만달러. 지금의 시세로는 4920만달러(약 570억원)를 호가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열렬한 팬인 빌 게이츠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천재의 예술적인 스케치와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메모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미국 방송사 CB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책을 통해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는 그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얻고 있는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그 길은 무한한 가치로 이어지는 탄탄대로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며, 내일의 과거가 된다. 즉, 오늘을 잘 사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잘 사는 것과 같다. 계획하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새해. 지난날의 후회도, 다가올 날의 걱정은 버리고 당장 오늘, 바로 지금에 충실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지금 이 순간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인생을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침내 제대로 살아낼 때까지” 완벽한 이상향을 향해 펼쳐지는 끝없는 회귀, 반복되는 삶과 죽음 속 오늘의 의미. 삶의 새로운 진화를 꿈꾸는 당신에게, 가슴 저민 시간 여행을 선사 한다
저자: 케이트 앳킨슨 (임정희 옮김) ㆍ 출판사: 문학사상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
75세에도 하는데 그대들이 못한다고?
그 나이가 어때서! 망설이다가 기회를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후회스럽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일단 문을 열고 나가라. 75세 도보여행가의 유쾌한 삶의 방식
저자: 황안나 ㆍ 출판사: 예담출판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도 어렵고, 사랑도 어렵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애써 고민을 숨기며 괜찮은 척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스토아철학의 빛나는 통찰
저자: 변지영 (윤한수 사진) ㆍ 출판사: 카시오페아
#지금 여기 깨어 있기
깨달음을 경전 속에 가두지 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한다. 지금 깨닫고 나머지 인생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법륜스님이 전하는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방법.
저자: 법륜 ㆍ 출판사: 정토출판
◇ 2015 한 해를 책임질 도서
#한 줄의 기적, 감사일기
쓸수록 힘이 나고, 매일매일 행복해지는 ‘한 줄의 기적, 감사일기’. 당연하게만 여겼던 모든 일에서 감사와 깨달음을 찾다보면, 어느새 일상은 행복으로 가득해진다.
저자: 양경윤 ㆍ 출판사: 쌤앤파커스
#행복다이어리 ‘Present’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장 최인철 교수가 다이어리에 담은 행복의 조건과 기술. 빡빡한 업무와 스케줄로 가득 찬 다이어리는 이제 그만, 2015년은 ‘Present’에 선물 같은 나의 일상을 채워보자.
저자: 최인철 ㆍ 출판사: 한스미디어
#2015 가계북
부자 되는 사람들의 비밀 노트. 똑똑한 경제생활의 시작. 소득과 지출만 적는 평범한 가계부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알짜 경제 정보는 물론, 연간 월간 스케줄러까지. 끝까지 쓸 맛 나는 종이 가계북의 매력에 빠져보자.
저자: 그리고책 편집부 ㆍ 출판사: 그리고책
#연말정산 완전정복
세금폭탄을 피하고 환급액을 늘리는 초간단 지침서.재테크의 마무리는 연말정산. 손해 보지 않는 연말정산을 위한 핵심 정보와 2015 개정 포인트를 짚어준다.
저자: 유흥관 ㆍ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습관의 재발견
지키지 못할 계획만 세우는 ‘계획중독자’에서 벗어나라. 작게, 사소하게, 가볍게. 못하는 게 더 어려운 작은 습관의 힘. 결심과 포기를 반복하는 이들에게 무조건 실천 가능한 전략으로 작은 습관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를 제시한다.
저자: 스티븐 기즈 (구세희 옮김) ㆍ 출판사: 비즈니스북스
◇ 2015 트렌드를 읽어라
#빅피처 2015
2015년은 변곡점의 시대, ‘진화형 어젠다’와 ‘전통 어젠다’를 주목하라. 하버드대 출신 국내 전문가 11인이 말하는 2015 대한민국 주요 이슈와 쟁점들
저자: 김윤이 외 10명 ㆍ 출판사: 생각정원
#2015 생생트렌드
국내 최초 빅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트렌드서. 2015년 달라질 비즈니스, 문화, 라이프스타일의 흐름과 액티브 시니어의 영향까지 빅데이터로 분석하고 인포그래픽으로 시각화하다
저자: 타파크로스 ㆍ 출판사: 더난출판
#핫트렌드 2015
산업계 최전선에서 날아온 냉철한 분석과 뜨거운 예측, 글로벌 핫트렌드 25. 저자들이 엄선한 25개 트렌드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물들’, ‘새로운 도시들’로 나눠 트렌드의 발전방향을 분석하고, 실무에 적용하는 기술을 제안한다.
저자: 핫트렌드연구소 핫트렌드 연구위원회 ㆍ 출판사: 호름출판
중.장년의 희망은 오직 기술뿐 !.
자신과의 싸우며 기술 배우기를 3년……
수백 통의 이력서로 취업 활동 후 드디어 취업에 성공!
저는 56년생으로 2010년 10월 은행 경영의 악화의 원인으로 고액 연봉자들의 대대적인 명예퇴직을 유도하여 전직원의 25%인 3800명이 퇴직할 때. 저 또한 나이가 정년에 가깝고 경영악화의 주범으로. 그리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고 퇴직을 하였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그동안 여행하고 싶었던 몇 몇 곳을 선정하여 나 홀로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전국으로 여행 다녔으나. 마음은 항상 퇴직 후 무엇 하며 노후를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제2인생 준비할 것인가? “노력하는 자에겐 하늘이 돕는다”
퇴직을 결심하고 돈을 절약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 집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하기 위해, 그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하여, 동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가서 고치면서 기다리는 중에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옆에 있어, 물었죠, ‘이 자전거 가게 사장님은 노후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다’고, 그랬더니 가게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이 자전거 가게를 이 자리에서 40년을 했는데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을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으며, 작은 건물도 구입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같은 60대 나이에 은퇴도 없고 자식들에게도 손 내 밀지도 않고 친구들 모임에 회비를 낼 수 있고 가끔 막걸리도 사주는 친구들 중 가장 유일하며,가장 행복한 친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
‘기술만이 남은 여생 30년을 보낼 수 있겠구나’를 생각하였으며, 나도 자전거 수리를 배워, 노후를 보낼까를 생각하면서 삼천리 자전거 홍보부에 근무하는 후배를 만나 자전거 수리점에 대하여 많은 의견과 자문을 받아 보는 등 여러가지로 고민하며 수일을 보냈습니다.,
2010년11월 은퇴 후, 12월 중순에 은행으로부터 2년 계약직(지점감사업무)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통보 받아 1월 초에 근무지로 출근하던 중. 지하철역에 붙여있는 홍보 벽보에 서울시에서 기술교육을 무상으로 가르쳐 준다는 포스터를 보았으며. 아! 그렇구나 내가 여생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적은 수입이라도 뭔가 할 수 있는 일거리로 보람을 느끼며 앞에서 언급한 자전거 가게 사장님과 같이 뭔가 기술을 배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늙어서 할 수 있는 기술이 뭔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기술을 배울 것인가?
그동안 강남의 대형 점포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사장들과 식사하는 중에 ‘조경과 보일러, 목공, 자동차 수리, 조리 기술 중 어느 기술을 배우는 것이 미래가 가장 유망 하겠나’를 물었더니, 조경 쪽으로 교육 받으라고 하였으며, 조경은 무료교육 대상자 모집에서 연령제한이 없었으나, 보일러, 자동차 수리 등은 만 55세는 이후 노령자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여, 연령이 제한되기 전에 보일러, 자동차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보일러 기술은 월급이 적지만 힘이 들지 않는 직종이라 생각하여, 2011년 2월에 서울종합직업학교(현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 후 합격자 발표만을 손 꼽고 기다렸으나, 합격자 발표일에 제 이름 석자가 없었기에, 아!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또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일 3일 후 기술학교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등록학생 중 몇 명이 주간으로 등록을 변경하게 되어 야간학생 결원이 있어 예비 합격자 중에 제가 포함되어 합격 했으니 3월 3일부터 학교에 나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여, 3월부터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술 취득과정
(1) 보일러 기능사 취득 과정
2011년 3월부터 고덕동 소재 서울종합직업학교에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개월 공부하였으며, 실습할 때는 30년간 책상에 앉아서 근무한 은행원이 보일러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하여 용어를 익히는데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특히, 가스나 전기 용접시에는 옷을 태우기도 하였으며, 손이나 발을 다치기도 하는 등 잦은 실수를 연발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여 창피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나 참고 견디었습니다.
필기시험은 과거 5년간 시험 출제 문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어느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지를 분석하고 외웠습니다. 입학 2개월 후 용어도 잘 모르던 제가 현장에 근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입학하여 공부한 학생들도 낙방하는 보일러 기능사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5월부터 보일러 기능사 2차 실기시험을 준비하였으며, 6월에 최종 합격하여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2) 공조냉동 기능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시험 준비는 기술학교에서 보일러시험 끝난 후 기초적인 내용을 가지고 졸업할 때까지 약 2개월간 배우고 실습하였으며, 학생들이 쉴 때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홀로 가스 용접 실기에 매달렸으나 무난히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과는 달리 2차 시험인 실기 시험에 낙방하여 10월에 재 응시하여 12월에 어렵게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3) 에너지산업기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을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께서 보일러, 공조냉동 자격증을 취득 후에는 요즘에 인기 있고 정부차원에서 각종 지원되는 에너지관리 기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으나, 정해진 수업기간이 끝나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술학교 보일러 과정을 끝마친 후 또 다른 기술을 준비 중에 기술학교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더니, 에너지 관련 수업이 9월부터 진행된다고 하여 9월에 지원하여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관리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에너지 기사시험은 실무 경력이 없어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만 응시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시험은 1년에 1회밖에 없으며, 2011년의 경우는 124명이 응시하여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이라고 유념하여 공부하라고 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공부할 때는 33명이었으나, 각종 공식이나 수치 계산 등으로 점차 공부가 난해 함을 느끼고 또한 수업하는 교실이 추워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다들 중간에 포기하였으며, 마지막 남은 3명의 학우들도 포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금년 아니면 내년에 공부한다고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나이가 60대를 바라보니 지금 이 기술 공부를 포기하면 갈 곳이(취직할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끝까지 기술 공부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험이지만, 2012년에는 내가 한번 도전하여 합격 했다는 소문을 듣게 하겠다고 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관리시험 준비하기를 7개월,.. 드디어 1차 시험을 무사히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주관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합격자 발표 전날 밤 꿈에, 합격자 명단을 보니까 4명이 있는데 나의 이름이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국에 단 4명만이 합격하였으며, 그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크게 감동했으며 노력하는 자는 하늘이 돕는 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근무하던 지점의 은행 직원들이 더 좋아했으며 같이 공부한 동료학생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습니다. 1차 시험에 60점으로 겨우 통과했는데, 2차 시험은 과연 몇 점이나 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 했더니, 문답 50점 만점에 22점, 동영상 문제 50점 만점에 38점으로 더도 덜도 아닌 합격점수 커트라인인 60점으로 합격하여 감동의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4) 전기기능사 취득과정
보일러, 공조냉동, 열에너지관리산업기사 자격증 있으면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은행보다는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취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가입하여 컨설턴트와 상담도 하고, 베이비부머 취업박람회에 참가하는 구직활동에 전념하였지만 성사되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많이 활용되며 취업대상업체가 더 광범위한 전기기술을 배워 기술력을 더욱 향상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기기능사과정 교재와 동영상 C/D를 구입하여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전기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술학교 야간과정에 등록하여 9월부터 수업을 듣게 되었으며, 수업 듣는 그해 12월에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보다 먼저 1차 필기 시험과 2차 실기시험을 통과되어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5)전기산업기사 자격증 취득 도전기
2012년 12월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하여 이젠 취업이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취업활동을 하여 00시설관리공사, 00회사, 00구청 등 무려 수십 곳에 서류전형에 합격하여 면접을 보았으나 결과는 역시 나이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젊은이에게 밀려 나기를 수십 번….
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능사 자격증만으로는 나이에 대한 한계를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점점 나이에 따른 압박관념에서 모든 일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노후에 대한 자신감과 활기를 잃어가며 가족들 간의 유대도 소홀해 지며, 패배의식이 팽배해져 가며, 우울증으로 지내기를 수개월 지난 후 어느 날
한편의 신문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참판집 종으로 일하며 ‘도둑공부’… 신분벽 넘어 형조판서 우뚝
공부하고 싶은 노비의 열망이 높은 신분의 장벽마저 뛰어넘었다. 참판 집안의 종에서 형조판서로 우뚝 선 반석평(潘碩枰·?∼1540)의 이야기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이다.19세기의 족보 ‘만가보’에 따르면 석평은 충북 음성에서 아버지 반서린(양반으로 추정)의 서자로 태어났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노비 신분으로 서울의 이 참판 집에서 종노릇을 했다. 본래 똑똑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자기 또래였던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글씨를 쓰면서도 배우는 대로 외우는 영리한 아이였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 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종은 공민권이 없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남달리 여긴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석평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아들이 없는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검열(예문관에서 사초를 기록하던 정9품 벼슬)이 되었다. 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賤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문신 안당의 추천으로 경흥부사가 되었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3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정2품·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를 지냈다.
그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석평이 형조판서일 때 길에서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거지가 다 되어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석평은 초거(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했다. 석평은 왕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 이오성에게 주기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 용서하고,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벼슬을 내리고 석평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석평과 조정을 모두 높이 평가하며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 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물론 석평의 출세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참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워 양인이 되게 해 주었고 석평이 노력해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보살펴 준 이 참판의 아들이 거지꼴이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양심고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종실록에는 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그가 종 출신이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든 것이 인상적이다.
위 기사에 힘을 얻어 다시 전기산업기사에 도전하면서 취업 활동을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201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지참하여 인근 도서관에 9시에 도착하여 밤 10시까지 공부하였으며, 친목회,동창 모임 등 참석하지 않고 기술 공부에 홀인 하였습니다.2014년 3월 제1회 전기산업기사에 시험을 응시했으나 역시 유사직종에 근무한 경험이나 유사한 학과에 공부하지 않는 터라, 또다시 5~8점 차이로 낙방하는 쓴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격증으로 재 취업!
전기기능사는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합격하였으나, 역시 기사 시험은 실무나 관련 학과와 인연이 있어야 이해가 쉬워 기사 시험 응시에 쉽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마저 우울해지게 되어 기사 시험 종료와 동시에 취업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홈페이지와 노동부의 워크넷에 등재된 채용공고를 검색하던 중에 2014년 2월 27일 국민은행 본점 시설과 근무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28일 이력서를 제출하여 가진 자격증으로 응시하여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친 후 2014년 3월5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결론적으로 말하면 눈높이를 낮추면 미래가 보이며
국가나 사회나 자식들에게 손을 내 밀수 있는 것보다 은퇴후에도떳떳한기술하나라도배우고익히면,개인이 행복하고 가정이 건전하며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확신합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만 유념 하시면 됩니다.
첫째, 지난 것 다 잊으시고, 오직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지점장을 했느니? 정부, 재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느니? 월급을 얼마나 받았느니? 이런 생각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라야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같이 배우는 옆 학우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시대는 과거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느 직업을 가졌나 보다는 오직 자격증만이 살길입니다. 자격증 없이는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으며 월급도 많이 받지 못합니다. 물론 경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회사에 취직을 한다든가,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자격증을 소지해야만 우선 지원서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금이 넉넉하여 쉽게 회사나 가게를 차리실 수는 있겠지만, 기술이나 경험이 없이 시작하는 것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둘째, 처음 시작하는 아름다운 마음 변하지 마시고 끝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기술을 배울 때는 하루 빠지시면 그 다음 수업과 연결이 안 됩니다. 특히, 기술을 배우시는 분들은 더 더욱 그렀습니다. 용어 등이 생소하기 때문이며,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용어들을 그때그때 듣고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와 같이 보일러과에 등록하신 분들 중에 열심히 참석하신 분들은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다 취득하셨으며, 또한 공조. 냉동자격증 까지 바라보고 공부하여 원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반면에 상반기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 출석이 부진 했던 분들은 교수님께서 출제 예상 문제를 가르쳐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석이 빈번하여, 불합격 원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시려고 하신다면 중간에 여러 가지 극복하셔야 할 일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야간으로 기술 받는 기간 중에도 여러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제안이, 유혹이 많았습니다.
물론, 2~3년은 현재보다는 더 많은 월급 받고, 대우도 받으며 살겠지만,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여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또한, 연말 연시 때나 주말에 동창, 동료직원, 각종 사회모임으로부터 회식, 등산, 골프, 낚시 등 많은 종류의 유혹들도 있었지만, 제2인생을 준비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회사 퇴근 후나 주말에는 곧바로 기술학교로,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말입니다.
셋째,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를 잘하면 또 다른 하나를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즉, 필기 시험에 자신이 있는 분은 실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고요. 실기시험에 강한 분들은 필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같이 합격하실 수 있도록 상호 서로 도와주라는 뜻 입니다. 그래야, 힘들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기억력이 약하여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고. 특히 실기시험은 완전 빵점 인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 필기시험에 대비하여 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제공 하였더니, 필기시험에 도움 받은 동료 학생들이 실기 때는 제가 모르는 각종 공구들, 밸브들, 전기용접 및 가스용접 등등… 많은 도움을 주어 쉽게 실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지난날들을 회상해 볼 때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은행 지점장이 겨우 보일러 기능사 공부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기술만이 남은 30년 인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원봉사하며! 내가 배운 기술로 겨울을 따뜻하게, 여름을 시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기술을 펼치며 보람 있게 살며, 멋지게 보내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을 먼저 기도로 준비했으며, 다음에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위 내용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에서 올해 초 실시한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