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퇴 후 단독주택 건축, “어떤 땅이 좋을까?”
-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첫 과정은 땅을 선택하는 것부터다. 모든 땅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법적으로 건축이 가능한 곳인지, 주변 환경과 방향은 어떤지, 도로 상황은 어떤지 등 여러 가지를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토지가 집을 짓기 적합할까? 아래 사항들을 살펴보고 현장답사를 통해 꿈에 그리던 주택을 구현해 보자. 1. 땅 계약 전 먼저 체크해야 할 것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 등을 통해 위성사진을 봐야 한다. 땅의 지번을 검색하면 대략적인 경계와 주변 상황, 기본적인 도로 문제를 알 수 있다.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지적 편집도 버튼을 눌러보면 더 자세하게 파악 가능하다. 또 ‘토지이음’에서 구입하고자 하는 토지의 주소를 검색하면 소재지, 지목, 면적, 지역지구 등 지정 여부, 기본법 및 시행령, 확인 도면이 크게 나타난다. 전부 숙지할 필요는 없지만 내 정보와 표시된 내용이 일치하는지 보고, 지역지구를 알아두는 편이 좋다. 해당 항목에 따라 건폐율과 용적률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2. 집터로서의 제1조건, 도로 내 땅까지 진입할 수 있는 도로가 없다면, 다른 조건이 모두 만족해도 건축을 진행할 수 없다. 보통 개인이 개발해 분양하는 택지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계약서에 도로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 놓지 않았다면 조심해야 한다. 도심지역보다 도심 외 지역에서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도심지역은 4m, 도심 외 지역은 3m의 도로를 확보해야 한다. 간혹 농로를 도로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적도상 정확히 ‘도로’로 명시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3. 원하는 용도로 건축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의 복잡함에 지쳐 지방으로 내려가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특히 문화재가 많은 경주나 심의가 있는 제주도는 땅을 구입하기 전 확인이 필요하다. 상가주택, 숙박 시설 등 옆 땅에 내가 원하는 용도의 주택이 있더라도 내 땅에는 허가가 나지 않는 사례가 종종 있다. 더불어 제주도에서 숙박업을 하고 싶다면 6m 도로와 상수도를 확보해야 한다. 4. 전문가들을 통해 한 번 더 검토하자 집 지을 땅을 정했다면 최종 계약 전 구청이나 군청에 들러 건축과 인허가 담당 공무원에게 ‘이 땅에 집을 지으려 하는데 인허가 나는 데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자. 지역의 설계사무소나 토목측량사무소에서 소정의 자문비를 지불하고 컨설팅을 받아도 된다. 땅을 구매하거나 집을 지을 때 스스로 판단하기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많은 법규를 챙겨 해석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지역마다 토지 상황이 달라 동일한 조건으로 분석할 수 없어서다.
- 2023-10-18 08:49
-
- 단독·전원주택, 짓기 전 알아야 할 6가지
- 꿈꾸던 집 한 채 지으려는데 시작도 전에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고 복잡하다. 어려운 전문 용어 탓에 이해하기도 힘들다. 집짓기가 처음인 데다, 어디에 물어야 할지 몰라 궁금증을 쌓아두기만 했던 건축주들을 위해 알아두면 좋은 상식들을 준비했다. (도움말: 이동혁·임성재·정다운 홈트리오 공동대표) Q. 상담 전 어떤 사항을 알고 가야 하나? A. ‘알아서 지어주세요’는 금물입니다. 우선 단독·전원주택에 대해 공부해야 해요.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이라도 읽고, 기초 지식을 수집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전문적인 부분은 업체에서 대신해 주겠지만요. 원하는 면적, 공법, 방 개수, 주방 크기, 층수, 디자인 시안, 예산을 대략적으로 정해두면 조금 더 수준 높은 상담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Q. 철근콘크리트 주택과 목조주택, 어느 쪽이 좋을까? A. 상담 시 어떤 공법을 선정할 것인가를 가장 먼저 이야기합니다. 공법에 따라 디자인 및 내부 공간 구성 방향, 건축비가 대략적으로나마 정해지거든요. 국내에서 흔히 진행하는 공법은 ‘경량 목구조’와 ‘철근콘크리트조’입니다. 경량목구조는 가성비와 단열성이 뛰어나고, 공사 기간이 짧습니다. 철근콘크리트조는 옥상 활용이 가능하고 누수 위험이 적어요. 간혹 목조주택이 친환경이라 인체에 무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목조주택은 뼈대가 목조고, 내·외장 마감은 타 공법과 거의 같습니다. 100% 친환경이라고 말할 수 없죠. 철근콘크리트 공법보다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덜’ 나올 뿐입니다. Q.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공간은? A. 건축 예산 내에서 가져가야 할 것과 포기할 것을 명확히 정리한 뒤 설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예산을 조금씩 분산해서 잡느니 개인의 취향에 맞게 집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돈을 들여야 할 곳을 추천한다면, 주방과 메인 1층 화장실입니다. 주방은 전체적인 집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1층 화장실은 손님이 왔을 때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Q. 단독·전원주택의 단점들,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A. 아파트와 다르게 단독주택은 방범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가의 장비를 고려하기보다 CCTV와 방범 방충망을 먼저 설치하길 권합니다. 벌레로 인한 피해 우려도 있을 텐데요. 집터를 정리할 때 땅을 한번 솎아주고, 벌레가 많다면 전문가를 통해 박멸 후 집터를 앉히는 것이 좋습니다. 건축적인 대처를 모두 했다 해도 벌레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럴 땐 전문 업체를 불러서 6개월 정도 관리받는 게 방법입니다. Q. 집의 수명은 몇 년으로 봐야 하나? A. 건축주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부분인데요. 짧다고 느낄 수 있지만, 30년 정도로 보면 좋겠습니다. 집의 수명은 골조보다 설비 시설을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보일러 및 전자기기는 최장 10년이죠. 한 번씩 탈이 나 손봐야 할 일이 잦아지다 교체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수명은 30년이라 생각하고, 중간중간 유지 관리를 잘해주다 보면 그 이상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될 거예요. Q. 의뢰할 회사를 ‘잘’ 찾는 방법은? A. 회사를 3개 정도 결정하고, 그 회사에 대한 정보를 모으세요. 각 사 홈페이지에서 사업자등록번호와 종합건설업 등록번호를 확인해야 해요.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키스콘)’ 사이트에도 없다면 ‘면대(면허를 빌려 쓰는 행위) 업체’일 수 있습니다. 키스콘 검색을 통해 운영에 문제가 없는지, 회사명과 대표자명이 내가 아는 것과 같은지, 회사 위치가 내가 방문했던 주소가 맞는지 보고 산재보험이 있는지도 봐야 해요. 그 후 홈페이지 내 설계도면 및 완공 주택 사진들을 검토하고 내가 원하는 느낌을 잘 담을 수 있을지 판단하시면 됩니다.
- 2023-09-12 08:25
-
- 시니어의 전원생활을 위한 맹지탈출과 지목변경
- 직장 생활을 정리한 후 노후를 준비하는 시니어 중에는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을 택한 이도 많다. 하지만 몸만 갈 수는 없는 법. 귀농과 귀촌이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주거 공간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시골에서 전원주택 건축 시 알아두면 좋은 맹지와 지목변경(地目變更)에 관해 알아보자. 은퇴를 앞둔 김토지 씨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농지를 상속받았다. 그 땅을 둘러보니 근처의 풍광도 괜찮고 무엇보다 땅 옆에 도로가 나 있어서 출입이 용이했다. 그곳에 전원주택을 짓기 전에 지적도를 살펴봤더니 도로가 없는 땅이었다. 위 사례에서 알아야 할 개념이 바로 맹지(盲地)와 현황도로다. 김 씨의 농지는 지적도에서 맹지로 본다. 맹지는 도로와 접하지 않은 토지를 말한다. 다만 위의 농지는 일반적인 맹지와 달리 현황도로와 접하고 있다. 현황도로는 지적도에는 도로로 표기되지 않지만, 주민이 오랫동안 통행로로 이용하고 있는 사실상의 도로를 뜻한다. 김 씨가 농지에서 본 길은 현황도로였다. 건축법에 따르면 건축 시 주의해야 하는 두 가지가 접도(接道)와 도로의 너비다. 건축법상 건축물은 대지의 2m 이상이 도로에 접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건축법상 ‘도로’는 보행과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고, 너비가 4m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예외 규정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도로의 설치가 어렵다고 인정하여 그 위치를 지정 및 공고한 구간은 너비가 3m만 넘어도 괜찮다. 아울러 길이가 10m 미만인 막다른 도로는 너비가 2m 이상이면 된다. 그렇다면 위 사례와 같이 현황도로가 인접한 맹지에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황도로를 일반 도로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 현황도로의 소유자로부터 토지 사용 승낙을 받아야 한다. 건축법 제45조에 따르면 허가권자(지자체장)는 이해관계인(토지 소유자)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만 도로의 지정 및 공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진입도로를 만들면 맹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종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맹지에서 벗어나려면 현황도로의 소유자로부터 사용 승낙을 얻거나, 해당 토지를 매입하는 방법도 있다”라고 말했다. 대지로 지목변경 맹지에 진입도로를 설치했다고 가정했을 때 바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지목과 용도지역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목은 토지의 주된 용도에 따라 토지의 종류를 구분하여 지적공부에 등록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목이 전·답인 곳에 건축물을 지으면 불법이며, 원상복구 조치를 하고 과태료 같은 벌금을 내야 한다. 용도지역에 관하여 전 교수는 “용도지역 중 농림지역은 주택 건축 시 농업인의 자격 요건이 필요하고, 자연환경보전지역은 주택 허가가 까다롭다. 상대적으로 관리지역은 허가가 수월한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농지를 대지로 바꿔서 집을 지으려면 토지 형질변경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개발행위허가를 받아야 한다. 농지의 경우 개발행위허가 시 농지 개량 외의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농지전용(轉用)허가를 받아야 하며, 공간정보관리법에 따르면 지목변경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지적소관청에 신청해야 한다. 토지 전문가는 “농지전용허가는 일반적으로 개발행위허가 신청 시 일괄 의제 처리된다. 이후 형질변경을 하고 건축 후 지목변경을 신청하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토지의 지목을 사실상 변경한 경우에는 그로 인해 증가한 가액을 과세표준으로 하여 취득세 등을 신고 및 납부한다. 토지의 지목변경으로 인해 증가한 가액은 토지의 지목이 사실상 변경된 때를 기준으로 하여 지목변경 전 시가표준액과 지목변경 후 시가표준액의 차액으로 한다. 아울러 농지전용허가를 받은 자는 농지보전부담금을 내야 한다.
- 2021-05-18 19:09
-
- “나이 들면 한집에서 우리끼리 살아볼까?”
- 절친한 친구 사이, 우애 좋은 형제자매의 로망.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일이다. 꼭 그리 살아보자 약속을 했어도 지내다 보면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멀리 떠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꿈만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있다. 경기도 여주에 모여든 세 친구, 서울시 은평구 한옥마을에 둥지를 튼 삼남매. 이들의 집을 설계한 건축사 대표를 만나 집 짓기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제공 요앞건축사 사무소, 삼공사건축사사무소 ◇ 세 친구, 럭셔리하면서도 소박하게 요앞건축사사무소 김도란·류인근 대표 남한강이 잔잔히 흐르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내양리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세 사람이 지은 집이 있다. 418㎡의 땅에 이들 부부가 사는 집 세 채와 공동생활을 위해 지은 커뮤니티 돔 한 채가 길게 들어서 있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 이들은 종종 귀촌해서 함께 살자고 했다. 김도란 대표 세 분이 오랜 친구이고 지금 60대 중반입니다. 공무원 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곧바로 집을 지었어요. 친구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귀촌한 케이스죠. 여주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어요. 10여 년 전에 남한강에 놀러갔다가 풍광에 반해서 매물로 나온 땅을 즉시 매입했답니다. 세 분이 3필지를 샀어요. 공동소유입니다. 2015년 설계를 시작해 2016년에 완공된 세 친구가 사는 집. 건축주 3명과 그들의 아내까지 총 6명. 서로 의견을 조율하다 보면 작은 잡음이 생기곤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을까. 김 대표 없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같이 살자! 처음에는 건물 한 채 지어 함께 살겠다는 생각만 있었죠. 류인근 대표 미팅하러 여섯 분이 함께 오셔도 남편들은 빠지셨어요. “나는 뭐만 있으면 돼!” 이러고 세 분이서 당구 치러 갔다가 한두 시간 후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집에 가자” 그러기도 했어요.(웃음) 아내들이 대부분 아이디어와 의견을 냈습니다. 디자인이 나오기까지는 크게 세 번 정도 방향을 틀었다. 집을 길게 붙여도 보고, 특히 집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방향이 잡히고 난 뒤에는 세부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류 대표 집 방향이 사실 좀 문제였습니다. 남한강이 북쪽이거든요. 거실에서 강을 바라보느냐. 방에서 강을 바라보느냐가 관건이 됐습니다. 결국 거실에서 북쪽의 강을 보는 걸로 결정을 내렸어요. 대신 천장에 큰 창을 달아 직광이 들어올 수 있게 설계를 했습니다. 천장을 그렇게 처리하니 남쪽의 빛이 꽤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침실에서 보는 풍경도 좋아요. 논이 보이는데 사시사철 바뀌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세 친구가 구상했던 집은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공간이었다. 자연스레 시니어가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는 집을 건축하게 되었다. 김 대표 노년을 위한 집이기 때문에 100㎡ 규모의 단층으로 설계했어요. 다락도 있는데 주로 자녀가 방문할 때 사용합니다. 기본적인 공간은 1층에 다 있어요. 동선을 긴밀하게 연결했고 구성도 콤팩트하게 처리했어요. 사실 이 집은 더 먼 훗날 노년의 삶을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지금은 아직 젊잖아요. 손주들이 자주 놀러 오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오면 공간이 좁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북적거리고 좋다 하더라고요.(웃음) 세 채의 집 형태는 모두 같다. 똑같이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같은 액수의 돈을 투자해서 진행을 했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되면 공사비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어 미리 합의한 사항이었다. 류 대표 실내 건축에 대한 의견은 별다른 게 없었는데 바깥 환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텃밭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이었어요. 커뮤니티 돔 뒤에는 부뚜막과 장독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황토방을 만들고, 손주들이 와서 놀 수 있게 수돗가에 수영장 기능을 할 만한 공간을 넣어 달라는 주문도 받았어요. 김 대표 커뮤니티 돔도 만들었어요. 남편들은 여기에 전용 당구장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아내들은 밥 같이 먹는 공간이 되길 바랐고요. 그런데 당구대 설치는 사실 아내들이 더 원했어요. 남편들이 밖으로 나갈까봐요.(웃음) 나가서 술 먹으면 운전해서 오기도 어렵고, 걱정이 되잖아요.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픈형으로 만들었어요. 손님이 오면 잘 수도 있어요. 폴딩 도어를 설치해 날씨 좋은 날은 활짝 열어놓아요. ◇ 삼남매의 집 Privately, But Together 삼공사건축사 사무소 김덕호·윤효중 소장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을 간직한 삼남매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지었다. 북한산 국립공원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들어선 그들의 집. 완공한 지는 올해로 1년을 갓 넘겼다. 진한 회색 벽돌로 지어진, 현대적인 감각의 건물이 보인다면? 바로 삼남매의 집이다. 김덕호 소장 모두 50대이시고 1남 2녀 삼남매입니다. 이분들 중 둘째가 학교 선생님인데 방학기간을 활용해 저희와 의견 조율을 했습니다.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아직 결혼 안 한 여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삼남매가 같이 산다고 해서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노래방도 같이 가고 정말 가깝게 지낸답니다. 우애가 깊어 보였습니다. 2017년도에 시작해 설계 6개월, 시공 후 완공까지 9개월이 소요됐다. 430㎡ 규모의 땅에 지은 2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방 8개, 주방 3개, 화장실 6개가 들어섰다. 첫째와 둘째가 함께 쓰는 공용 대문이 있고, 미혼인 막내 동생은 대문을 따로 냈다. 특별한 공간은 오빠의 집 욕실에 마련된 건·습식 사우나. 집에서 사우나도 하고 찜질도 즐길 수 있는 공간 마련은 내가 살 집을 직접 짓는 거라 가능했다. 김 소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시니어라도 집 지어본 분이 드물어요. 처음 지어보는 것이니 당연히 선호하는 스타일도 없죠. 그래서 설계할 때 정말 여러 가지 수를 제시합니다. 대문을 다 따로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집 형태보다는 밀도를 높여 사용하기 편하게 해주는 걸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려볼 수 있는 도면이란 도면은 다 그렸다. 앞마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원하는 방향에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삼남매의 의견을 반영해 지금의 집이 탄생했다. 삼남매의 추억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각각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출장이 잦아 자주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오빠, 오빠의 아들 또한 직장일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둘째의 아들도 유학 중이다. 그래서 남은 가족이라도 가깝게 모여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누가 집을 비우면 서로의 집을 돌봐줄 수도 있고, 돌아왔을 때는 가족이 기다리는 푸근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삼남매의 집은 앞의 세 친구 사례와는 다른 점이 있다. 투자 비율도 다르고,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은 만들지 않았다. 윤효중 소장 이 집은 누가 얼마만큼 투자했느냐에 따라 각각 평수도 다르게 잡았어요. 가장 많이 투자한 오빠는 2층과 다락과 옥상테라스를, 둘째는 1층과 함께 이어진 중정마당을, 막내는 독채를 쓰면서 나머지 귀퉁이 땅을 선택했어요. 오빠와 둘째는 공용 대문을 사용하지만 각자의 현관 스마트키가 따로 있죠. 투자비에 따라 공간을 정확하게 나눴지만 오빠 집에 모여 자주 밥도 먹고 돈독함을 자랑한다. 윤 소장 이 집의 콘셉트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함께 살자’이거든요. 내 공간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 공동 주거의 개념은 아니죠. 둘째도 중정 조경을 따로 했으니까요. 설계 혹은 건축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어요. 둘째 분이 중간에서 상황 정리를 계속했습니다. 형제의 우애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모여 살기는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친구와 삼남매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다. 첫째, 친하다는 개념 그 이상으로 서로를 존중한다. 둘째, 투자나 재산의 목적이 아닌 노후까지 생각하며 오래 살 집을 지었다. 셋째, 집을 지으면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마음과 달리 누구든 살면서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집을 짓기도 전에 의견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긴다면 함께 사는 걸 포기하는 편이 낫다. 같이 거주할 집을 꿈꾼다면 각자의 생활 패턴에 대한 디테일한 이해와 존중이 우선 있어야 하겠다.
- 2020-03-17 14:22
-
- “작은 집의 매력, 손수 지어봐야 압니다”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문건호 교장
- 충북 제천의 한 마을 산자락. 작은 집 짓기 마무리 작업을 위해 모인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수강생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8㎡(5.5평) 규모의 목조 주택을 8일 만에 완성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보니 침실, 욕실, 주방은 물론 작은 거실까지 갖춰져 있다. 일명 자크르 하우스를 통해 미니멀 라이프의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현장이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벌써 300여 명이나 이 학교를 다녀갔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사는 집’이라는 말이 있다. 조부모가 산 집의 빚을 손자 세대에 가서야 비로소 갚는다는 의미다. ‘사는(live) 공간’이어야 할 집이 ‘사는(buy) 물건’으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 “집 한 채 구입하려면 은행의 노예가 되어 인생 절반을 꼬박 바쳐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쏟아지는 현실이다. 어쩌다 현대인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괴상한 꿈까지 꾸게 된 걸까. 다행히도 다른 한편에서는 망치와 못을 들고 자기 삶의 진짜 주인이 되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이들의 선봉장 역할을 자처한 이도 있다.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이하 작은집학교) 교장 문건호(文建晧·53) 씨가 바로 그이다. 살인적인 집값에 지쳐가고 허리케인, 지진 해일과 같은 대형 자연재해로 살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자 사람들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타이니 하우스(Tiny House) 열풍. 이동식 초소형 주택인 타이니 하우스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보다 빚을 지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매력도 크게 작용했다. 바람은 금융위기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미국에서 먼저 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거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스몰하우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학교 작은집학교는 올 연말까지 수강생이 다 찼다. 혹여 예약자에게 사정이 생겨 자리가 나면 추가 모집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문을 연 첫해(2015년)에는 수강생보다 스태프가 더 많았지만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 접수마감 문패를 일찌감치 내다 걸 때가 많다. 수강생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시니어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성 수강생 비율도 10%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 오는 목적은 다 다르지만 8일 동안 이론 강의도 듣고 건물 내·외장, 전기 설비, 도배, 도장, 난방 시공 등 집 짓기의 전 과정을 실기로 배운다. 숙식을 같이하면서 짓는 집. 목조 바닥과 벽체를 만들고 지붕을 올리면서 함께 땀을 흘리다 보면 첫 만남에 서먹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수강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도 동기생 중 누가 집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기꺼이 달려가 품앗이도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자크르 하우스(‘딱 알맞게 좋다’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에서 한솥밥 먹은 사람들의 우정이고 힘이다. 제대로 판 벌인 부부 작가 문 교장은 아내 손정현(孫禎賢·51) 씨와 학교에 마련된 11㎡(3.4평)짜리 집에 살면서 강의도 하고 수강생들 밥도 챙겨주고 시시콜콜한 정도 나눈다. 이곳에서 부부는 ‘작가님’으로 불린다. 알고 보니 문 교장은 홍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했고 아내도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 자신들도 건축의 길에서 환상의 호흡을 자랑할 줄 몰랐다. “젊었을 때는 작품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했어요. 공연 무대장치, 광고 세트장 등 손기술로 가능한 일들은 다했죠. 그러다가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크게 망했습니다. 빚이 5억 깔려 있으면 3억짜리 일을 수주해서 돌리는 식으로 무리하게 운영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어린 딸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게 괜찮나?’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밤낮없이 일을 해도 빚만 늘어나는 사업에 회의감도 들었고요. 접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당장 손을 떼면 빚만 떠안게 되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어요. 결국 고민 끝에 접었죠.” 이를테면 자발적 파산이었다. 그 후 부부가 힘들게 마련했던 집은 전셋집에서 월셋집으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지인이 내어준 반지하 방이었다. 급기야는 쌀 살 돈도 없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그 시절 아내가 시집살이를 좀 했다고 문 교장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손 작가는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저희를 많이 헤아려주셨죠. 그래도 여자들에게 시집이 편한 곳은 아니잖아요. 시부모님도 불편하셨겠죠. 방 한 칸 내어주셔서 1년 정도 살았는데 죄송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과수원 한쪽에 우리 세 식구 지낼 수 있는 조그만 집을 한번 지어보자 했어요. 곧바로 시동을 걸었죠. 둘 다 실패를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때는 돈 한 푼 없어 누구한테 공사를 맡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어요.”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풍족했다. 부부는 작은 집을 지으며 미대 출신자들답게 맘껏 솜씨를 겨뤘다. 창 하나의 위치를 두고 즐거운 실랑이도 벌였다. 그렇게 방 두 칸에 화장실과 거실이 딸린 15평짜리 집이 완성됐다. 두 사람이 손수 지은 첫 번째 집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이 밀려오는지 손 작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첫눈이 펑펑 내렸던 날이었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흰 눈에 덮인 산과 들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눈 위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보는데 가슴이 마구 뛰더라고요. 그 순간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제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풍경이에요.” 자연 속에서 살며 무엇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알게 된 부부는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접었다. 물론 그 뒤에도 몇몇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충북 제천으로 오면서 시골살이는 더 깊어졌다. 귀촌한 사람들과 건축 협동조합 법인을 만들었다가 공중분해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작은 집 짓기 운동을 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보자고 프로그램을 짜고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심신이 고단했어요. 빚도 또 졌고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절망스럽지는 않았어요. 건축 일 하면서 자기 집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제대로 읽었거든요. 저로서는 아주 중요한 해답을 얻은 셈이죠. 작은집학교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마침 지인이, 조합 만들 때 짜놓은 프로그램이 아깝다면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한번 넣어보라는 조언을 했고,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전을 해봤다. 그 결과 1기생 수강생 8명 모집. 그는 뜻밖의 화답에 놀라 부랴부랴 교장이 되었다. 작은 집에 담은 큰 철학 작은집학교에서는 주문을 받아 집 짓는 일이 없다.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관계는 갑을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건축,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하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문 교장의 목표는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야 집 짓는 과정이 행복하다는 지론을 펼친다. “집을 짓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로망을 펼치는 일이에요. 여기에 그 꿈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겠다는 계산도 끼어듭니다. 반면 건축가는 무조건 이익을 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게 되는 이 필드에선 어느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 합니다.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도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클라이언트는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뒤늦게 ‘창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저기 있네’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곤 한다. 문 교장은 집을 직접 지어보지 않으면 이런 분쟁은 영원히 피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작은집학교가 클라이언트를 원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이 지은 집은 수강생들에게만 판매가 됩니다. 집을 가져가는 사람은 동기생들과 땀 흘리며 지은 집이라서 내부 구조를 잘 이해하고 어디가 고장이 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관리는 이제 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집 짓기의 전 과정을 단기간에 가르쳐주는 곳은 없어요. 여기 오면 다들 빡빡한 작업량에 힘들어하지만 수업료와 노동이 아깝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내 집 마련의 계획을 작은 집으로 수정한 사람도 꽤 돼요.” 그러나 궁금해졌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어도, 세컨드 하우스를 구입한다 해도, 땅이 없으면 장밋빛 환상일 뿐이지 않을까. 문 교장은 괜찮은 정보 하나를 귀띔해준다. “시골에는 10년, 20년 임대 가능한 토지들이 있어요. 땅을 살 때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니까요. 일단 마을 이장님을 만나 빌릴 수 있는 땅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아요. 요즘은 농사짓기 힘들어서 그런지 몇 년간 내주고 월세 받는 걸 더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1년에 100만 원 정도 연세로 계약하면 이동식 주택 가져다 놓고 살 수 있어요. 그렇게 살다가 정들면 그때 가서 땅을 사도 늦지 않아요.”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동안 문 교장에게서 은퇴자들의 열정과 꿈, 잠재력, 융복합, 작은 집 마을 등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바탕 고민한 시간들이 전해주는 통찰의 메시지다. 그 속에는 기발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우리 사회가 시니어의 에너지와 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워요. 은퇴 후 여기 오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가치 있는 일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기회가 되면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저는 이곳에서 집 짓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선순환 관계로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젊은이들 집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그 해결 방안들도 같이 모색해보고요. 작은집학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적극 해나가겠습니다.” 젊은 시절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가 5평도 안 되는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2년 여를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언제까지 집 짓는 즐거움을 목수에게 넘겨줄 것인가?” 일단 그 즐거움부터 되찾아 와야 할 것 같다. 물론 교장선생님과 함께.
- 2019-08-19 14:42
-
- "먹고 입고 잘 수 있으면 끝! 더 이상 무슨 필요?"
-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3-08 09:00
-
- 전남 구례 산동면 지리산 자락에 사는 정부흥 씨
-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12-03 17:06
-
- 귀농·귀촌이 아니라 ‘이도(離都)’
-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7-27 10:57
-
- 시니어 은퇴 후 직업으로 목공 분야에 관심 커져
-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7-10-27 10:07
-
- 철의 역사를 써나가는 칼럼니스트
- 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이번에 만난 이도 마찬가지였다. 철강 산업 분야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국내 철강 역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묻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도 저절로 나온다. 평범한 사람은 물을 수도 없는 스토리다. 평생을 철강 업계에서 보내던 그가 이제는 다소 독특한 철강 칼럼니스트란 직종을 창직(創職)해 활동 중이다. 바로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金鍾大·63)씨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책 한번 내볼 생각이 없냐고.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동안 회사와 업계의 대표선수 중 한 명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이름으로 출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었던 것이죠.” 그가 칼럼니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순간의 이야기다.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사사(社史)를 준비하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에게 받았던 그 질문은 그의 두 번째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까지 그는 동국제강 홍보를 담당하는 상무로 활약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 철강 칼럼니스트.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는 많다. 최근에 각광받는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꽤 많고 정치나 음악,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니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철강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처음부터 철강 칼럼니스트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30년 가까운 인생을 보낸 철강 분야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자고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를 해왔죠. 먼저 주변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오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예 연재를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모아가면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데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그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홍보 일을 하면서 각종 연설문이나 축사 등을 자주 썼고 매체에 기고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철이 미래다’라는 주제와 부정 철강제품 추방에 대한 글을 1년 동안 쓸 계획에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글들은 한국철강협회 간행물과 동국제강 블로그, 그리고 업계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원고 청탁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철강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은퇴 후 그는 자연인이 된 자신을 소개할 때 철강 칼럼니스트라고 말한다. 정권에 의해 운명이 바뀐 두 번의 변곡점 그가 철강업계에 몸담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첫 직업은 신문사 편집기자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꽤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꾀를 부렸죠. 선배들이 신문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우기 위해 소조(小組)들을 집에 챙겨왔어요. 소조는 면 구성을 메모해놓은 종이인데, 기사의 분량이나 제목, 속보 등에 따라 최종결정이 나기까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선배들이 버린 소조들을 사환을 시켜 확보해놨다가 하숙집 천장에 잔뜩 붙여놓고 편집 공부를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몰래 모으느라 애먹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노력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신문사는 1980년 언론통폐합을 통해 경향신문에 흡수 합병된 신아일보였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였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혀뒀던 기술은 후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인쇄, 편집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수요가 많았는데,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학교 학보나 회사 사보 편집을 대행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국제상사 홍보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사보 의 편집장이 되면서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론통폐합 한 번으로 변곡점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국제상사는 1985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는 고초를 겪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상사에서 연합철강으로 적을 옮기게 됐고,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어요. 그때부터 동국제강 사람이 됐죠.” 편집기자에서 철강 홍보맨으로 ‘철강맨’이 된 그는 동국제강이라는 회사의 소식을 외부에 전하는 ‘입’이 되었다. “사실 철강회사 홍보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어요. 철강산업 자체가 대중을 소비자로 상대하는 곳이 아니고, 철강 소비자들은 모두 기업이니까요. 게다가 초창기 철강산업은 제품만 만들면 팔리는 잘나가던 사업이었어요. 경제성장기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주지 못해 너도나도 먼저 제품을 사가겠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그는 때로는 회사를 상대로 때로는 언론을 상대로 때로는 경쟁업체와 기관을 상대로 치열한 길을 걸었다. 한때는 ‘물을 먹였다(특종을 놓치게 했다)’는 이유로 한 매체가 부정적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는 바람에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기자를 찾아가 단판을 짓기도 했다. 기업 홍보실 책임자의 비애였다. 철강업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6월 9일 ‘철의 날’이다. “협회에서 홍보 담당자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도 기념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업계가 다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엔 다들 시큰둥해하더라고요. 하지만 꾸준히 제안해 6년 만에 철의 날이 제정되었어요. 그게 2000년 6월의 일이에요.” 한국철강협회의 철의 날이 6월 9일로 지정된 것은, 국내 철강 역사상 처음으로 고로가 가동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국내 최초로 쇳물을 생산한 날짜는 1973년 6월 9일이었다. 또 국내 사진계에서 손꼽히는 행사로 인정받는 철강사진전과 마라톤대회의 창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은퇴 후 직업을 위한 일상의 원칙들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남들과 다르게 은퇴를 미리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그는 2012년 말 첫 번째 은퇴를 한다. 사규에 따른 것으로서 정상적이었다면 회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 오너리스크가 발생하자 그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회사로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제겐 행운이나 다름없었죠. 2년 6개월의 은퇴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했던 퇴직과 실제로 경험했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맘먹었죠.” 그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서재다. 은퇴 후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전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추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짧은 은퇴 경험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장가 간 아들 방이 비어 있어 그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죠. 아내도 제 설명을 듣고 이해해줬어요. 덕분에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하며 글의 윤곽을 대강 구상하고, 낮에는 글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서 다듬기를 반복하면서 탈고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글이 제대로 써지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고요.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갔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리는 계기로도 삼았다. 자신에게는 자극이 되는 과정이었다. “은퇴 후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철강 분야에 대한 학습량은 30년 회사생활 동안 한 공부보다 더 많을 거예요. 막상 글을 쓰려니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국가기록원 등 철강산업의 발전과 관련한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어요. 다행히 오래 접했던 분야라 그런지 흥미로웠어요.”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모았던 다이어리, 스크랩들도 집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의 대화와 메모,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나 불황을 겪으면서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자료를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鐵’이 보인다 김종대씨는 이제 여행을 다닐 때도 ‘鐵’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 때문인지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철강문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관광 명소로 생각하는 에펠탑도 그에게는 철의 문화이자 역사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가 철강 칼럼니스트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남아 있는 철강산업의 역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물론 포항제철이 국내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맞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의 철강산업 역사는 이어져왔어요. 이 시기에 대한 자료나 학문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또 다른 바람은 철강산업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철강산업은 굴뚝산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데 철강산업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소재 개발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국내 철강산업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종사자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 2017-06-29 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