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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단상] 후기청년 세대 단단해지려면
- “곱고 희던 그 손으로/넥타이를 매어주던 때(중략)/인생은 그렇게 흘러/황혼에 기우는데/다시 못 올 그 먼 길을/어찌 혼자 가려 하오/여기 날 홀로 두고/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故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노랫말 중 일부입니다. 김광석은 통기타 하나로 시대의 아픔과 대중의 삶을 전달한 음유시인입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1995년에 가수 김목경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부른 것으로, 김목경은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 런던에 살 때 건너편 집 부부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1980년대 런던에 사는 60대 부부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요즘 60대를 인생의 황혼기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학의 발달 등으로 사람의 신체·건강 나이는 젊어졌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지난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나이에 대한 국민 인식을 조사했습니다. 10명 중 9명 이상이 “나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나이보다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시대”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나이보다 더 어리게, 더 늙지 않게,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하는 ‘어른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2021년 기준 우리 국민 평균수명은 83.6세입니다. 1950년대 초반 48세(유엔통계)였으니 70년 사이 1.7배나 늘어난 셈입니다. 평균수명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를 보면 2067년 평균수명은 90.1세입니다. 유전학자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인류의 평균수명이 113세에 이를 것”이라고 했고, 진화 인류학자인 카델 래스트는 “평균수명 120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법을 보면 소년을 19세 미만(소년법 2조), 청년을 19세 이상에서 34세 이하(청년기본법 3조1항), 노인을 65세 이상(노인복지법 2조5항)으로 각각 규정합니다. 중년은 35세 이상에서 65세 미만입니다. 정신·신체 나이는 늘어만 가는데, 법은 과거에 머물면서 고용·사회 안전망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바꿔야 합니다. 청·장·노년의 기준을 바꾸고 정년을 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의 저자 전영수 한양대 교수는 “청년은 10~39세, 중년은 40~69세, 노년은 70세 이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 교수는 “그래야 젊은 베이비부머가 한국 사회의 빚이 아닌 힘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그렇게만 해도 인구절벽에 직면한 대한민국은 건강한 생산연령인구 300여만 명을 단숨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세대 역할의 변화도 불가피합니다. 인간의 긴 수명으로 인해 ‘나이가 곧 계급’이라는 인식은 재고돼야 합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의 멘토가 될 수 있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50+세대 일자리가 늘어도 일터는 정상 작동할 것입니다. 부모 자식, 선·후배 간 관계도 보다 수평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입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지령(誌齡) 100호를 맞아 그런 변화를 추적했습니다. 마크로밀 엠브레인과 함께 전국의 40~59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을 중장년(33.8%)보다는 X세대, 낀 세대 등(62%)으로 보는 응답자가 더 많았습니다. ‘실제 나이보다 젊게 느낀다’는 응답이 65%였고, 10년 이상 젊게 느낀다는 응답자도 14.4%나 됐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4050세대를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로 ‘후기청년’을 제시하는데, 68.4%가 자신을 후기청년으로 부르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젊어진 중년, 그래서 스스로를 청년으로 칭하는 이들의 미래가 녹록지는 않습니다. 100세 시대, 120세 시대가 다가오는 것에 대해 절반 이상이 ‘걱정된다’, ‘겁난다’, ‘절망적’이라고 답했습니다. 법적으로 노인이 되는 65세 이상이 되어도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73%에 달했지만 정작 ‘계획대로 노후 일자리 준비를 잘 하고 있다’는 응답은 13%에 그쳤습니다. 노인 연령 기준을 높이고 정년을 연장하는 사회적 논의가 활발합니다. 정년연장•폐지에 대해선 2030세대도 80%가 동의합니다. 연금 개혁 방안도 정부 차원에서 마련 중입니다. 20년 가까이 된 고령친화산업진흥법의 개정 목소리도 작지 않습니다. 줄어든 아이 울음소리와 늙어가는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생애주기 전체를 꼼꼼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설문조사에서 후기청년들의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정부 정책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청년 세대(후기청년을 포함한)야말로 출산과 육아, 고령화 부담을 직접 책임지는 세대입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청년 세대가 단단해지려면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규준과 역할은 물론 교육과 보육, 주거 등 정책을 재정립해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을 수 있는 소외계층에 대한 대책도 마련돼야 합니다. 시기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 2023-04-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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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만 명 찾는 광양 매화마을 홍쌍리 명인… "건강밥상 일념으로 광양매실 브랜드화"
- 봄이 오면 인기가 많아지는 ‘엄마’가 있다. “매화꽃아 니는 내 딸이제, 매실아 니는 내 아들이제”라고 말하는 홍쌍리(79) 명인이 그 주인공이다. 한 해 110만 명의 상춘객이 그녀가 있는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을 찾는다. 1966년 홍쌍리 명인이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현재의 매화마을이 됐다. 그녀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수놓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손님들을 초대했다. “스물네 살에 산에서 일하다 외로운 산비탈에 홀로 핀 흰 백합꽃같이 살기 싫어서, 사람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매화꽃을 심었어요. 5년이면 꽃이 피겠지, 10년이면 소득이 있겠지, 20년이면 세상 사람 내 품에 다 오겠지,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홍쌍리 명인은 ‘음유시인’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단어, 문장 모두 시가 되고, 노래가 됐다. 홍쌍리 명인은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듯 이야기하면서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늘 사람이 그리워서 자연과 얘기한다는 그녀. 지금 그녀가 제일 그리워하는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 시아버지! 홍쌍리 명인은 1943년 밀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여의었고, ‘엄마 없는 가난’을 겪었다고 표현했다. 현재도 각종 방송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홍 명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고, 가수로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딸을 광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을 부산 삼촌 집으로 보내버렸다. ‘못 배운 가난’까지 품게 된 홍쌍리 명인은 “친정아버지를 내가 제일로 미워했다”고 말했다. 삼촌은 건어물 장사를 했는데, 밤을 팔러 왔던 시아버지 율산 김오천 선생이 홍쌍리 명인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홍 명인을 며느리로 안 주면 밤을 안 주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경상도 여인은 전라도로 시집가게 됐다. 스물세 살이었는데, 홍쌍리 명인은 “1965년 당시에는 노처녀였다”고 말했다. 율산 김오천 선생도 유명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일본에서 밤나무는 식량 대용으로, 매화나무는 약용을 목적으로 들여왔다. 김오천 선생은 밤나무 사업에 주력했고, 그로 인해 광양의 특산물은 밤이 됐다. 그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집안에 시집갔으니 편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홍쌍리 명인은 시아버지와 밭일을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무엇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광산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가 망해 화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홍쌍리 명인은 무려 33년의 긴 시간 동안 남편 수발을 들었다. “남편은 빚쟁이가 올까봐 방바닥에 제대로 눕지를 못했어요. 숨을 못 쉬면 산소호흡기가 필요했는데, 당시에는 하동에 산소호흡기가 없으니 순천까지 가야 했죠. 병원 한 번 갔다 오면 반나절이 걸렸어요. 그때 저도 빚쟁이들한테 머리를 쥐어뜯기기 싫어서 머리를 다 잘라버렸어요. 그리고 수건을 벗지 못했죠. 밥 먹을 때 시아버지가 ‘아야, 밥 먹을 때는 수건 벗는 기다’ 하시는데, 그 소리에 눈물이 소낙비처럼 줄줄 흐르는 거예요. 시아버지가 수건을 벗겨보시고는 둘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홍쌍리 명인은 시집온 이듬해부터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의 반대를 꺾기 힘들었다.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밤나무를 베고 매실나무를 심겠다고 했기 때문. 시아버지는 홍 명인이 씻겨주고, 안마해주고,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다가도 ‘매화’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시아버지는 홍쌍리 명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더욱이 법정 스님이 찾아와 ‘꽃 천지를 만들라’는 말에 홍쌍리 명인은 더 많은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매실 사업을 시작한 지 6년이 됐을 때, 부산 대선소주에서 홍실주를 만들었다. 홍쌍리 명인의 매실로 만든 매실주다. 그때 번 돈은 137만 원. 홍쌍리 명인은 그 숫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이때 비로소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인정해줬다. 홍쌍리 명인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시아버지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자수성가했고, 명품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더불어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도 시아버지다. 홍 명인은 시아버지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연의 선물, 건강 먹거리 현재 홍쌍리 명인은 6만 평의 청매실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전통식품명인 제14호에 지정되면서 ‘매실 명인’이 됐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 홍 명인은 매화와 매실이 진짜 아들이고 딸이라고 했다. “내 꽃딸하고 매실아들은 내가 뭘 입고 가든 맨발로 가든 언제든지 반겨줘요.” 광양에서는 1997년부터 매년 3월 매화축제가 열린다. 그 시작에는 그녀의 제안이 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3년간 축제를 열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홍쌍리 명인은 1991년 국무총리상을, 1998년 대통령상(가공식품 부문)을 각각 수상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유일한 집안이라고 자랑했다. 홍쌍리 명인은 시집오고 고된 일을 도맡아 하다 결국 탈이 나버렸다. 스물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생사를 오가는 큰 수술을 했다. 당시 의사는 ‘살면 천명이고, 죽으면 제 명’이라고 했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퇴원할 때, 의사는 ‘맛없는 것을 연구해보라’고 조언했다. 입에는 맛없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이때부터 홍쌍리 명인은 ‘오미오색’(五味五色), 오장육부가 좋아하는 건강 음식 개발에 집중했다. 특히 홍 명인이 키우는 매실은 ‘동의보감’에도 ‘마음을 편하게 하며, 갈증과 설사를 멈추게 하고, 근육과 맥박이 활기를 찾게 한다’고 효능이 적혀 있다. 그녀는 3000개의 장독대를 활용해 매실을 숙성한 건강식품을 만들었다. 매실장아찌, 청매실 농축액, 청매실원, 청매실 고추장 등 30여 종에 달한다. 더불어 홍쌍리 명인은 2007년 광양매실 지리적표시 제36호 등록, 2008년 광양매실산업특구 지정, 2010년 광양매실 지리적표시 단체표장 등록 및 빛그린 상표 등록을 하면서 광양매실의 브랜드를 키웠다. “매실 많이 먹어서 죽는다 하면 나는 10번도 더 죽었지”라고 말하는 홍 명인은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잘 때까지 매실을 먹고 마신다. 덕분에 뱃속 설거지가 잘돼 지금처럼 건강한 것이란다. “농사는 작품, 밥상은 약상. 뱃속 설거지를 해서 미움, 증오, 욕심을 버리면 안 건강할 수가 없다”고 외쳤다. 이렇게 자연이 준 건강밥상의 효과를 직접 느낀 홍쌍리 명인은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집을 짓고 마음 아픈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당신들이 먹고 싶은 것을 심게 하고, 밥 먹을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빼먹게 하고 싶어요. 고기는 내가 시장에서 사다주고요. 내 몸은 내가 가꾸는 것이에요. 그러면 병이 없거들랑.” 밤에는 등단한 시인으로 홍쌍리 명인은 시인이기도 하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혼자 책을 보면서 글을 공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자연과 나눈 대화를 글로 썼고, 이는 시가 됐다. 2011년 종합문학지 ‘서울문학인’ 여름호에 ‘학처럼 날고 싶어라’ 등으로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 ‘행복아 니는 누하고 살고 싶냐’ 시집도 냈다. “사람하고 같이 일하면 좋지만, 내 혼자 일해도 하나도 안 심심해요. 이 꽃이 이 소리 하고 저 꽃이 저 소리 하는 게 다 들려요. 꽃이 ‘마스크 부대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마스크 부대가 입 한 번 안 맞춰주고 가네’라고 해요. 저는 ‘내 딸 장하다’고 안아주죠. 이렇게 농사꾼으로 사는 게 얼마나 재밌나요.” 홍쌍리 명인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자연한테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어떤 교수가, 박사가 이런 것을 가르쳐주느냐”면서 웃음 지었다. 배우 최불암도 그녀에게 “어떤 작가가 그렇게 말이 술술 나올 수 있겠냐. 겪지 않고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겠냐”고 말했다고. “저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사투리도 그대로 하고 욕도 그대로 해요. 제가 상사화를 보고 욕을 좀 많이 해요. 야 이 년아, 왕관같이 예뻐서 너를 심었는데 왜 니는 도도하게 서 있느냐. 사람이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든가 화병에 갖다 꽂아야 시집을 가야 예쁘단 소리를 듣는데, 너는 미인하고 똑같이 도도하게 서 있느냐. 이렇게 글을 써놓고 저는 그 소리를 해요. 예쁜 것도 좋지만 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고 싶은 사람이 되면 인간 승리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돈이 많으면 무서워서 못 살아요. 그런데 사람 울타리 백만장자가 돼보니깐 높은 담장이 없어도 대문이 없어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더랍니다. 내가 돈이 많으면 진짜 무서워서 못 삽니다.” 홍쌍리 명인은 자신의 이름 앞에 ‘아름다운 농사꾼’이라는 수식어를 늘 붙인다. 처음에는 농사꾼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 바람이었고, 섬진강의 강물에 보탬이 됐다고 했다. 이제 그녀는 꽃 한 송이와도 대화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매일매일이 행복이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행복을 어디다 표현하리. 이 은공을 내가 어떻게 다 갚으리. 참 재미 안 있습니까, 내 삶이? 그런데 인생의 파도를 50대 안에 안 넘으면 안 돼! 힘들어서 안 돼요.” 기댈 곳 없어 일에 기대고 흙에 의지하고 바삐 살아온 그대는 거울 앞에 고인 눈물이 막 해대네 타고난 팔자인걸 보호자도 없이 이 산 저 산 구멍 난 고무신에 발바닥이 아문 삶아 뭐가 그리 좋아 주름 사이 웃음꽃이 피더노 일이 있어 고맙고 흙에 의지할 수 있어 고마워서 웃음이 헤프네 -홍쌍리 -
- 2022-04-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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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다…사이먼과 가펑클
-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안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어요. 이제 겨우 그 노래를 배웠는데. 그렇게 빨리 사라지다니. 그렇게 빨리.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매일 밤 우린 동틀 때까지 어울렸죠. 그때처럼 그렇게 오래 웃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는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2인조 그룹 ‘사이먼&가펑클’의 마지막 앨범에 실린 ‘So Long, Frank Lloyd Wright’의 가사 일부다. 애달픈 사랑을 노래하는 곡 같은데, 가사 속 프랭크는 누구일까? 건축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현대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건축가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이다. 건축학도로서 건축가를 꿈꾸었던 가펑클은 평소에 프랭크를 존경했고, 프랭크를 추모하기 위한 곡으로 사이먼이 가사를 썼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사이먼은 프랭크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이먼은 오랜 친구인 가펑클이 존경하던 그의 영웅을 존중했고,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곡을 만들었다. 동시에 이 곡은 해체에 대한 암시를 담은 노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이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다. 동네 친구였던 둘은 음악적 스타일과 예술적 성향이 달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하다가 이 앨범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닮고 싶은 마음 가펑클이 프랭크를 동경했던 것만큼 나 역시 ‘사이먼&가펑클’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앨범은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2집에 큰 감명을 받았던 터라 이 앨범도 명반이라는 걸 알지만 혹여 2집에 못 미칠까 봐 걱정됐다. 듣고 나선 달라졌는데, 특히 위의 곡을 굉장히 좋아했다.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어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이 곡에 이상하게 끌렸다. 메이저 세븐 코드와 디미니시 코드를 잘 섞은, 브라질 보사노바 곡의 코드 진행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보통 장조는 기쁨을, 단조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장조 7번 화음(메이저 세븐)은 장조 같으면서도 단조처럼 들려서 감정적으로 복잡하고 묘한 화음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꼭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저 세븐 화음은 향수와 그리움을 가장 잘 불러일으키는 화음이란다. 향수와 그리움은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갈망과 행복했던 추억이 합쳐져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감정이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서 슬픈 마음이 드는 동시에 그 시절의 행복이 떠올라 벅찬 기쁨을 맛보게 하는 감정.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장조와 단조의 중간인 이 화음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이런 복잡 미묘한 화음은 추모의 감정과 비슷하다. 사랑했지만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누군가를 추모할 때 드는 감정. 그와의 추억은 행복했지만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 진정한 사랑과 감사, 후회와 미안함, 안타까움, 그리움, 함께 나눈 기쁨과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 방향성,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느끼는 감정적 경험의 총합이 바로 추모다. 우리는 추모를 통해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존경은 흑백논리가 아니라 이렇듯 복잡한 감정이라는 걸 깨우친다. 결국 진정한 추모란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닮아가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프랭크는 사라졌지만, 사이먼&가펑클은 그를 기리며 노래를 불렀다. 난 그 노래를 들으며 프랭크 같은 건축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그 듀오처럼 가수가 됐다. 가수로서는 생명을 다한 사이먼&가펑클을 내 맘속에서 늘 그려왔는지도. 작별은 슬프지만 추억은 달콤한 법이니까. 그들의 듀엣을 무대에서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기타를 잡는다. 최고의 듀오 사이먼&가펑클을 닮기 위해. So Long, Frank Lloyd Wright - Simon & Garfunkel 2인조 그룹의 원래 이름은 톰과 제리였다. 이름의 영향인지 몰라도 그들은 불화가 잦아서, 자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다. 하지만 포크송 세대의 마지막 음유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유명했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10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고, 6개월 만에 800만 장이나 팔리며 경이로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남성 2인조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그룹 ‘SG워너비’의 첫 두 글자도 이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2021-06-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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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항조 노래의 마력, 그리고 사명감
- 트로트계의 음유시인, 조항조가 부르는 트로트는 여타 트로트 곡들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을 준다. 1997년에 발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남자라는 이유로’는 여전히 즐겨 불리는 트로트 곡이지만, 조항조의 대단한 점은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 그 후로도 20여 년을 넘기는 동안 꾸준히 좋은 노래들을 발표했고 차트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는 점이다. 과연 조항조가 부르는 트로트의 인기 비밀은 무엇일까?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 트로트계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중 한 명이지만, 질문에 답하는 조항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최근 KBS 드라마 ‘기막힌 유산’ OST ‘걱정 마라 지나간다’가 그의 지난 메가 히트곡들처럼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는 상황. 그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앨범 만들려고 열심히 하는 중이고, TV 프로그램 출연이 잡힌 게 있어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예능을 많이 하지 않죠. 예능과가 아니라 생각해서 그런지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나마 노래하는 프로그램은 열심히 쫓아다녔죠.(웃음)” 트로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 확실히 조항조는 예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스테디셀러가 된 그의 노래들은 노래방에서, 라이브 무대에서, 그리고 경연 프로그램에서 여전히 즐겨 불린다. 시들지 않는 그의 노래가 가진 마력의 비밀이 궁금했다.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원하는 음악이죠. 그래서 한쪽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다양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부르자는 게 제 나름의 철학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트로트는 한 소절에 두 박자가 들어가는 리듬의 한 종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트로트는 꼭 4분의 2박자여야 하는 게 아니라 더욱 다양성 있는 음악이 펼쳐질 수 있는 장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트로트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트로트는 이렇게 불러야 해’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MBC ‘복면가왕’에 나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죠. 그리고 밴드생활 등 지금까지 음악을 하는 동안 섭렵한 다양한 장르를 트로트에 접목하려고 해요.” ‘사랑찾아 인생찾아’에 얽힌 비화 조항조의 인기곡은 많지만 젊은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를 꼽자면 단연 ‘사랑찾아 인생찾아’다. KBS2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OST가 인기를 끌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다. 심지어 그도 몰랐다. “드라마 OST는 흔히 발라드 쪽이잖아요. 저는 드라마 내용도 모르고 OST 제의를 받았어요. 가수 라인업 중 만장일치로 뽑혔다 해서 곡을 받았죠. 그 노래가 그렇게 큰 사랑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외려 트로트 가수가 드라마 OST를 불러 거부반응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죠. 심지어 제가 불러놓고도 다른 가수가 갈아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거든요. 처음에는 제 이름을 알리지 않고 노래를 내보냈어요.” 그는 ‘사랑찾아 인생찾아’를 트로트답지 않게 팝 스타일로 부르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가사에서 오는 느낌을 살짝 넣어 녹음했다고 한다. 그리고 데모를 보낸 후 마침 미국에 갈 일이 있어 떠나면서 “내가 불렀다고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트로트 가수라는 선입견 때문에 드라마에 누가 될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귀국하니 노래가 뜬 거예요. 왜 음원 공개를 안 하느냐고 요청이 빗발치더군요.” 그때 그는 이미 ‘남자란 이유로’, ‘만약에’, ‘거짓말’을 성공시킨 인기가수였다. 그는 ‘대중이 모든 걸 다 좋아할 순 없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사는 사람이다. ‘사랑찾아 인생찾아’의 성공에는 그의 의도나 기대가 전혀 없었다. 그저 가사가 좋아 이런 식으로 부르면 되겠다 싶어서 담담하게 불렀을 뿐이다. “저는 한 우물만 파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금도 목이 아프면 젊을 때부터 다닌 병원에 가요. 그곳의 시설은 현대적이지 않고 의사도 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죠. 그러니 제 목 상태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그런 게 좋아요. 제 이름 조항조가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똑같잖아요. 처음이나 끝이나 똑같은 사람이고 싶어요.” 트로트가 대세라서 기쁘지만 최근 트로트는 대한민국 문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 상황들을 보며 조항조는 선배로서 책임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제 위치에서 후배들이 따라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봐요. 마침 후배들이 제 노래들을 많이 불러주더군요. 그럴 때마다 시대적 변화에 나도 일조를 하고 있구나 합니다. 앞에서 후배들을 끌고 갈 수 있는 귀감은 됐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고맙고, 선배들이 해줄 일은 이런 거구나 싶죠.” 그가 MBC 경연 프로그램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를 섭외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온 작가들이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요즘 신인이 많이 나오는데 무조건 흥겹고 신나기만 한 트로트가 아닌 품격 있는 트로트를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조항조밖에 없을 거 같다는 게 그들의 섭외 이유였다. “옛날 선배들이 부른 노래는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노래들은 너무 소모품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 그럼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하기로 했죠.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고단했지만 보람은 있었어요. ‘그래도 잘해냈다. 선배로서의 역할은 해냈다’ 하는 마음이 들었죠.” 인생의 반 이상을 무명가수로 살다 많은 이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뜻밖에도 조항조의 무명가수 생활은 지독하게 길었다. 그가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곡으로 사랑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은 얼추 20여 년. 그전의 무명생활은 30년이 넘었다고 한다. 나이가 ‘환갑은 넘었다’며 웃어넘기는 그가 30여 년 세월을 무명가수로 보냈다면, 그의 가수활동 시작은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노래밖에 없어요. 진짜 힘들게 무명생활을 했는데, 그때는 누구나 다 힘들었으니 힘들다고 말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너무 지치니까,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음악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죠. 결국 가족들을 위해 미국에 갔는데 거기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미국에서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다 ‘안 되겠다. 음악하려면 대한민국에서 해야지’ 하곤 아내에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당신 꿈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내가 책임지겠으니 가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너무 고마웠어요.” 1990년, 다시 돌아온 그는 홀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마침 운도 따라줬다. 그리고 1997년 ‘남자라는 이유로’가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다. “아내를 만난 것과 가수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게 가장 잘한 일 같아요. 물론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미치게 했기 때문이죠. 여전히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는 게 낙이에요. 모든 게 음악을 위한 것이죠.” 나는 운이 좋은 가수 조항조의 일상들은 음악을 향해 있다. 그는 많이 쓸수록 노화되는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안 한다. 될 수 있으면 친구도 안 만난다니 음악에 미친 은둔자적 성향이 느껴진다. “그렇게 살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어요.(웃음) 집에서는 아내 일을 도와주고 작업실에서는 음악공부만 하네요. 제가 남들처럼 TV에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조항조는 왜 노래를 이렇게 해?’ 하고 질타를 받을 순 있는데, 그건 내 영역이잖아요? 제 자존심이고요. 그게 무너지는 게 아주 싫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죠.” 길고 끝없을 것 같은 무명생활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가 바라보는 요즘 후배 트로트 가수들은 어떤 모습일까? “좋죠. 잘하죠. 옛날 생각도 나고…. 사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인프라가 잘 갖춰진 시대는 아녔어요. 불안하고 힘들었죠. 고생으로 따지면 저희가 더 많이 했죠.(웃음) 그런데 너무 좋은 환경이긴 한데 그래도 성공은 운이에요. 요즘 뜨는 가수들 말고도 음지에도 정말 잘하는 가수가 많아요. 그들에게는 찬스가 오지 않았고 기회를 못 잡은 것일 뿐이죠.”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회한이 느껴졌다. 매일 ‘나에게 어떻게 이런 좋은 운이 와서 견디고 버티고 있는지 감사하다’라고 생각한단다. 그답게, 지금도 무명가수로 어느 지하실에서 언젠가 올 기회와 성공을 상상하며 연습하고 있을 후배가 생각나서였을까. 트로트의 한계 돌파하는 법 트로트를 부르지만 트로트의 한계를 깨고 있는 조항조에게 트로트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포인트에 대해 물어봤다. 그가 말해준 해법은 사명감이었다. “가수들이 사명감을 가졌으면 해요. ‘가수에게 무슨 사명감이야’ 하겠지만 필요하다고 봐요. 어떤 사람은 ‘노래는 그저 히트를 쳐야 하고, 돈 벌면 좋은 거다’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적어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라면 그 시대를 반영하는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소 의외였던 대답, 그러나 그 사명감이야말로 그를 더욱 바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로도 보였다. “조항조라는 가수가 어떻게 기억돼야 할까요? ‘조항조는 다른 건 모르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자기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사명감이 있는 가수였다’라고만 얘기해줘도 저는 성공했다고 봐요. 제가 황제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고, 지나치게 포장된 말은 불편하고 어색해요.(웃음)” 그는 쇼잉이나 포장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원래 그런 성품이다 보니 자신이 재미도 없고 지루한 스타일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요즘 녹음을 하고 있는데 다양한 장르를 해보고 싶어요. 락 트로트, 발라드 트로트 등등. 예를 들어 ‘수고했다’는 락 트로트예요. ‘고맙소’, ‘나의 하루’, ‘후’는 발라드 트로트라고 제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죠. 라틴 트로트나 EDM 트로트도 해봤고…. ‘조항조 음악 가게’죠. 여기서 놀고 있는 거예요. 혼자.(웃음)” 조항조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조항조 음악 가게는 코로나19 사태임에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모두가 겪는 일이니까요. 나만 겪는 일이면 실의에 빠질 수도 있는데 다 함께 겪으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계속 노래 연습하고 있어요. 하던 일 열심히 그냥 하는 거죠.(웃음)” 그는 앨범 제작을 위해 작곡가들에게 무려 37곡을 받았고 녹음까지 마친 상태다. 요즘 그 노래들을 음원 사이트에 한 달에 한 곡씩 올리고 있다. 디지털 음원 차트에서 마니아들이 상위 차트곡이 아닌,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취향을 즐기려면 ‘다양성 있는’ 노래들이 나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하면 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는 그의 음악적 여정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덤덤한 만큼 진실하게 다가왔다. “많은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잖아요. 어차피 영원한 건 없어요. 저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제가 가진 철학으로 소신껏 펼칠 생각입니다. 변함없이.”
- 2020-06-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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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보다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먼저다
- 언젠가 나는 어느 노인에게 들었다. 적게 먹고 가느다란 똥을 눠라! 청명한 게송이다. 가급적 물욕을 자제해 가뿐하게 살라는 뉴스다. 너무 많은 걸 움켜쥐지 않고 사는 게 현명한 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기 쉽던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망나니는 주야로 날뛰어 기세를 돋운다. 돈으로 모든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사실 돈의 위력은 막강하다. 돈을 사용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만족의 수효가 워낙 많다. 적당한 정도의 돈이 있고서야 안정된 삶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더 채우려고 젊어서도 일하고 늙어서도 일하는 사람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도 많다. 정신, 마음, 사랑, 우정, 헌신, 자아실현 같은…. 자주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환장하게 만드는 돈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돈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는 오해를 교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돈이 부족할지라도 자족하며 살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귀촌은 그것의 한 대안일 수 있다. 덜 벌어 덜 쓰고도 기분 좋게 살아갈 여지가 많은 게 시골생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골에서도 삶의 고역은 미행처럼 따라붙는다. 가난이 자심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지독한 궁핍은 으라차차 조속히 해치워놓고 볼 일이다. 배를 곯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등한시하면서 만족과 행복을 구가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그런데 우리가 괴로워하는 가난은 대개 절대가난이 아니다. 공들여 밥벌이를 하면서도, 이미 적당히 가졌으면서도, 마치 사막에 쓰러져 물을 갈구하는 사람처럼 엄살을 떤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모으려 하고 더 채우려 한다. 젊어서도 일하고 늙어서도 일한다.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한다. 이게 다 욕망이라는 놈의 농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채우고 또 채워도 허기지는 욕망의 뱃구레! 집요한 욕망의 간계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을 통해 한결 품질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 뭐, 그런 내공의 소유자라면 도시에서도 끄떡없겠지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흔히들 내가 하고 싶은 걸 내가 하며 사는 걸 그 답으로 꼽을 것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걸 내 멋대로 하며 신바람 나게 사는 인생. 그런 삶에 관한 소망엔 아무런 결함이 없다. 그러나 실천엔 아둔하거나 나약하다. 여건을 완비한 뒤에 나를 위한 인생을, 내가 원했던 일을, 그제야 비로소 신나게 즐기며 살아보겠다는 소심한 전략을 평생 지속하기 십상이다. 그 여건이라는 건 대개는 돈이다. 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도시라는 사각 링에서 코피를 쏟아가며 복싱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스스로 탕진하는 꼴이다. 돈이 많아야 뭐든 누릴 수 있다는, 축재가 있고서야 행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지속하는 사이에, 시간도 건강도 꿈도 손아귀에서 새나가는 모래처럼 흘러 덧없이 사라진다. 각설하고! 아무튼, 덜 벌어 덜 쓰고서도 기분 좋은 삶을 누릴 수도 있는 게 시골이다. 돈 들어가지 않는 행복과 해후할 수 있는 게 귀촌이다. 아마도 조물주께서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대충 빚어놓은 게 인간이라는 작품일 텐데, 이 진기한 피조물이 돈의 노예로 살라 하명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입증해볼 만한 곳도 산골이다. 독특한 사례 하나를 볼까. 지금 뭐하는 거냐, 제대로 살아보자” 월 생활비 달랑 20여 만원을 쓰며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유쾌하게 살았던 사나이 S.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던 그는 어느 날 덜컥 느낀 바 있어 귀촌을 했다. 귀촌 첫해엔 빈집에 세 들어 살다가 재미가 붙자 손수 흙을 버무려 방 하나, 부엌 하나짜리 오두막을 지었다. 오두막 안엔 냉장고나 TV 따위를 두지 않았다. 아예 전기를 들이지 않고 촛불로 살았으나 나중엔 전기를 끌어다 전등을 썼다. 한 달 전기요금은 1000원 남짓. 검침원이 놀랐다지? “어라, 이거 계량기 고장 아녀?” 햐! 전자제품이 없으니 전기료 들어갈 일이 없었다. 대신에 연구를 해 요령을 터득했다. 일테면, 냉장고가 없으니 일단은 음식을 많이 만들지 않았고, 김칫독은 냇가에 묻어 냉장 효과를 거두었다. 그런 식으로 많은 실험을 해 불편을 해결해나갔다. 인디언처럼 말이다. S는 전기가 싫었다. 전기 없이 사는 게 지구라는 초록별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런 가상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서울에서의 어느 날, 석유문명의 위험을 다룬 다큐를 볼 때 찾아왔다. 머잖아 석유가 고갈되면 지구가 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다큐. S는 쇼크를 먹고 곧바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 제대로 살아보자, 어떻게든 전기에 의지하지 않고 제대로, 스스로 사는 인간이 돼보자, 고민의 결론은 그랬고, 그는 즉각 산골로 내려갔다. 원래 귀촌을 바랐던 아내와 함께 말이다. 1000원어치의 전력만 소비하는 오두막의 나날들은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내가 지금 거창한 일을 하는 거 맞지? 그런 자부심으로. 그런데 밥은? 거의 맨손으로 귀촌한 그는 무엇으로 생계를 해결했을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다. 그렇게 살자는 애초의 계획을 잘 관철했다. 정 어려우면 잠시 도시에 나가 접시라도 닦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두둑한 배짱과 여유라니. S는 희희낙락, 날마다 노래하며 오두막살이를 즐겼다고 한다. 노래가 있는 인생은 그의 오래된 꿈이자 이상이었던 것. 산골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끼적여 자작곡들을 지었고, 우쿨렐레 줄을 팅팅 뜯으며 베짱이처럼 노래하며 살았다. 그렇게 3년여가 지나자 싫증이 일어 다시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게 또 시골이었다. 이번엔 빈집을 빌려 들어앉은 S의 생활 방식은 이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자급자족을 도모하며 날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를 거듭한 이 베짱이는 40대 중반이 돼 도시의 호명을 받고 정든 시골을 떠났다. 홀로 산골에서 부른 노래가 도시로 흘러가 애호가들이 생겨나서였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S는 현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S는 돈 없이 시골에 살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았다. 행복하게 말이다. 그가 누린 귀촌생활상이 보편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눈여겨볼 절경이 서려 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만족할 만한 삶을 구가해온 사람의 지향과 방식이 완연하다. 돈의 추구보다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시골의 자연 속에서 배양된 낙천적 감성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게 한다. 거의 모든 게 돈과 결부돼 돌아가는 대도시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라는 걸 읽을 수도 있고.
- 2017-12-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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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인생 3막의 장밋빛 인생,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2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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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 풍진세상 희망가를 부르는 소리꾼 장사익
- 장사익 소리판 대전 공연이 있던 날. 대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에 앞서 도리였다. 노래가 전부라는 사람, 장사익(張思翼·68). 작년 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대결절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8개월 뒤 불사조처럼 힘차게 일어섰다. 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나.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 소리가 가슴을 뒤흔들었다. 음악 안에서 행복하다는 그가 살아 돌아와 부르는 노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대전 공연에서 만나고 수 주가 지난 뒤,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장사익과 마주앉았다. 종로구 평창동 그의 자택 너른 창 앞이었다. “다섯 잔은 해야 소통이 된대, 차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을 건넸다. 인터뷰 때마다 치르는 장사익만의 통과의례이자 손님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인사법은 바로 차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수다스럽게 안부를 묻고,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한창 담소가 무르익어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산 뒤쪽으로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 어렸을 적 살던 홍천 우리 집에는 동산이 있어서 오전 9시나 10시나 돼야 아침이 됐죠. 대신 뻘건 일몰은 수도 없이 봤어요. 나이 먹으니 거꾸로 됐어(웃음). 그게 바로 인생이라. 초창기 때 내가 되게 힘들었어요. 노을만 보는 인생이었어. 근데 지금은 해가 뜨는 걸 본단 말이야. 지금이랑 옛날이랑 완전 정반대죠. 내 인생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사는 것과 지는 해를 보고 사는 것과 어떤 게 더 힘이 있어?” 대한민국 중·장년층에서 장사익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장사익 콘서트 티켓은 효도상품이 된 지 오래다. 1만7000명이나 되는 팬들과 여름과 겨울 꾸준히 팬 미팅을 진행하는 대형 가수이자 올해 예순여덟인 시니어 세대의 젊은 오빠(?) 장사익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94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노을 드리우던 굴곡진 젊은 시절을 지나 밝게 떠오르는 인생을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맞이했다. 마흔다섯,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유행가를 불러 젖히는 장사익. 소리꾼이 되기 전 그는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웃음기 없는 가장이었다. 15가지나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련하게나마 위안이 됐던 것이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가 불던 태평소 소리였다. “세상에 그 어려운 밥벌이하느라 직장에서 얻어터지면서 살았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걸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였어요. 아부지 장구 칠 때 옆에서 정말 태평소를 잘 불던 아저씨가 제 기억에 늘 있었거든요. 아무 욕심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내가 좋아서 목숨을 걸었어요.” 태평소를 손에 쥐면서 삶의 판이 바뀌어갔다. 노래하는 인생에 길을 내어준 것은 분명 태평소였다. “노래가 운명이었나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웅변 연습 삼아 목청을 풀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첫 직장 다니면서 대중가요도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배웠고요. 지금 부르는 유행가는 대부분 그때 알게 된 노래입니다. 군 3년 동안에는 문선대 가수로서 전라남도를 돌아다녔어요. 그땐 소리꾼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하게 노래란 놈이 다가왔어요.” 그 운명의 끈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1993년 1월 4일부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끼어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어요. 임동창은 그때 김덕수 쪽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광수 쪽. 그러니까 사물놀이 전설의 라이벌 밑에 둘이 각자 있었던 거야. 공연할 때 뒤풀이에서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거지. 나는 ‘저 피아노 치는 친구 잘하네’ 했고 임동창이도 ‘어! 저놈 노래 잘하네’ 한 거야. 내가 뒤풀이에서 조용필이야 조용필(웃음). 그때 임동창이가 ‘형, 그러면 한번 나가봐’ 그랬어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첫 콘서트가 계획됐다. 1994년 11월 6일, 7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벼락이 치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한 임동창의 피아노와 김기영의 북장단에 맞춰 ‘찔레꽃’을 비롯해, 20대 초 장사익이 낙원동 골목에서 배우고 흥얼거렸던 유행가를 관객 앞에서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석 규모 공연장에 이틀 동안 800명의 관객이 찾아온 것이다. 장사익이 드디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 그냥 논 거야. 웃기는 거 아냐? 그때 내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어. 밤새도록 연습해가지고 딱 한 번만 하자 했어요. 첫날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어요. 노래를 딱하고 그다음 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하고 좋은 거야.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주름살이 웃는 주름인 거예요. 하회탈마냥 웃잖아.” 노래 부르는 인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장사익은 공연 뒤풀이에 가서도 노래를 꼭 부른다. 긴 시간 공연에 쉴 만도 한데 그의 흥은 죽지 않는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팬만을 위한 무대가 뒤풀이 장소에서 더해진다. “제 인생에 신조가 있어요. 내가 속한 집단은 늘 행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인상 쓰고 먹으면 독이 돼요. 아무리 허술한 음식이라도 즐겨 먹으면 약이 된단 말이에요. 일도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 같아요.” 근본 없는 세상, 희망가를 부르다 장사익의 대전 공연이 있던 작년 11월 2일은 온 나라가 대통령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했다.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무거운 돌덩이 하나쯤 가슴 한쪽에 안고 있지 않았을까. 장사익은 공연 중간 ‘근본 없는 세상이라 이런 일도 생긴 것’이라 말하고 ‘희망가’로 관객들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노래하는 놈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단 말이지. 100m 달리기 선수가 달리다가 다리 부러진 거여. 그럼 어떻게 해요? 당장 앞이 안 보이잖아. 긍정적인 생각부터 해야지. 다행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일단 찾았어요.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 때 행복하고 노래가 더 소중합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승승장구하다가 걸린 거예요. 정지.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거예요. 이건 아닌데. 가만히 보니까 폼도 잡고 있고, 객기도 부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목을 다치니 뒤도 좀 돌아보고 내 모습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도 해보더군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이번에 아프면서 알았어요. 이건 돈 주고도 못 사요. 그런데 딱 목에 신호가 와서 잠시 멈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반성하면서 곪고 터진 것들을 다 도려내야죠. 민주적으로 사정없이 혼내야죠.” 대규모 집회가 매주 집 주변에서 열리던 상황. 혹시 ‘희망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다면 응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얘기 않더라고(웃음). 나는 이렇게 같이 덩달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지요. 제의가 있다면 늘 마음은 있습니다.” 인생, 3할대만 쳐도 성공하는 거예요 성대결절 수술 후 장사익은 8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대안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 또한 악기인지라 연습하고 가다듬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목 상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음이라도 좀 내려 불러야 하련만 장사익 사전에 타협은 없다. “여기서 죽으면 관둬야 해(웃음).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여. 노래가 모두 다 좋을 수가 없어요. 특히 찔레꽃은 클라이맥스에서 톡 쏘는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노래 전체가 살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늘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그는 노래가 잘될 때도 또 안될 때도 있다면서 인생을 야구의 타할에 비유했다. “요새 하는 생각인데요. 야구 상위 타자가 몇 타를 치는지 알아요? 3할 중반은 넘지만 4할은 못 넘어가요. 기가 막히죠. 백인천이 옛날에 4할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죠. 국민 타자 이승엽도 10개 중 6~7개 정도는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못 치잖아요. 인생은 3할만 가도 성공하는 거예요. 세 번에 한 번. 그리고 두 번은 버려야 해. 욕심이야. 다 잘할 수 없어요. 그게 진리더라고요. 세 번에 한 번만 잘 쳐도 상위 타자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인생이 다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가 오든 수용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2할대 타자도 준수하게 치는 거야. 3할도 하고 5할도 하려다가 모두 도둑놈 되는 거여(웃음).” 은퇴와 죽음이 맞닿을 나의 무대, 무대! 늦은 나이에 소리꾼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섰지만 그에게도 분명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대수술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역시 그의 끝은 무대 위를 꿈꾼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조갑녀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이분은 마지막 춤을 내 무대에서 췄어요. 90에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왔는데 딱 일어나서 1분을 췄어요. 그 어떤 춤보다도 기둥 하나가 춘 거여. 밀양 북춤의 대가 하보경 옹의 무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분도 제자가 번쩍 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았어요. 농악 장단이 들어가고 1분 있다가 손을 번쩍 드는데, 언제 저렇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또 볼 수 있을까. 다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요.” 장사익은 최근 유명을 달리한 노래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캐나다·2016)과 차벨라 바르가스(멕시코·2012)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죽음을 코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표현한다. “이게 진짜 노래예요. 앞으로 나는 힘 좀 빼고 나이 먹는 것을 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나는 80에 90에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요. 지금도 주름살이 골목길처럼 있는 놈이 더 늙어져서 지팡이 짚고 나와 비틀비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내가.” 일생에 좋은 노래 하나, 좋은 공연 하나, 안 했을 수도 있고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진짜 저런 공연, 저런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
- 2017-01-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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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시니어] 3000억 재력 英 록스타 스팅 “자식들에게 골칫덩이가 될 재산을 남기고 싶지 않다"
- 3000억 재력가인 영국의 록 스타 스팅(62)이 자신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2일 (현지지시간) 현지 외신에 따르면 스팅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일을 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지금 지출하고 있기때문에 남겨줄 돈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아이들에게 얘기했다”고 밝혔다. 현재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세 아들과 세 딸을 둔 스팅의 재산 규모는 1억8000만 파운드(약 3119억원)에 달한다. 그는 “자식들에게 골칫덩이가 될 재산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아이들 역시 모두 스스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고맙게도 그동안 나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1951년 우유배달부인 아버지와 미용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스팅은 1977년 록 밴드 ‘더 폴리스(The Police)’를 결성해 메인 보컬과 베이시스트로 데뷔했다. 스팅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깊이 있고 철학적인 가사로 평화와 인류애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현재까지 약 1억 장에 이르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미국 그래미상을 16차례 수상했다. 또 그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과 ‘로큰롤 명예 전당’에 헌액된 바 있다. 스팅은 영국 문화 발전과 인권보호빈곤 추방아마존 열대우림 보호 등 다양한 활동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2003년 명예작위를 받았다. 한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와 음반 제작자 사이먼 코웰 등도 자신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 2014-06-24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