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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을 탈출한 미술품들의 향연
- 도시 인근에 꽃 피는 산과 맑은 냇물이 있으니 어련했으랴. 행락객들로 몹시 붐비는 곳이었다. 휴일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소풍을 즐겼다. 덩달아 주변 일대의 식당과 주점이 성황을 이루어 난장판처럼 어지러웠다. 경기도 안양시 삼성산 자락에 있었던 예전 안양유원지의 모습이 그랬다. 이 유원지는 결국 제풀에 지쳐 시들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이 극에 달한 데다 대홍수가 계곡을 휩쓸어서다. 이렇게 사필귀정처럼 붕괴한 유원지를 딛고 문화 공간의 신예로 데뷔한 게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시가 주관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Anyang Public Art Project)의 트리엔날레를 기반으로 2005년에 첫발을 내딛은 것. 지금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도한다. 안양예술공원 일대엔 조각과 설치 미술, 디자인 작품 60여 점이 산재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미술 작품으로 구성한 노천 미술관이다. 일명 ‘화이트 큐브’라 일컫는 기성 미술관들의 정형성에서 탈출, 거리와 산야로 원정을 나간 작품들의 집합장이다. 한편 이곳은 공공미술의 전당이다. 공공미술? 이건 재미있다. 소수 전문가 그룹이 마치 대중의 미의식을 대리하는 것처럼 독점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추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발생한 게 공공미술이다. 즉 미술관에 들어앉아 사람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미술이다. 작가의 주관적 세계관을 앞세우기보다 미술 행위를 펼치는 지역의 장소성, 역사성, 공공성을 중심에 두고 조형물을 생산, 제작 현장에 그대로 전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안양예술공원 관람 기점은 ‘안양파빌리온’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신사조를 주창한 알바루 시자(Alvero Siza, 포르투갈)의 작품이다. 이는 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시자의 생산물이다. 그의 건축은 논리와 합리, 그리고 개념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 건축 경향과 달라 돌올하다.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하니까. 빛과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스트 시자를 ‘건축의 시인’이라 추켜세워도 과하지 않은 게 그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며, 지극히 관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저히 시각화된 여느 건축과 다르다. 간소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안양파빌리온의 건축적 성향을 보라. 튀지 않으며 모나지 않은 외관으로 주위의 경관과 조용히 조응하는 게 아닌가. 시자의 파빌리온이 어디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찾아지는 건 나직하고 수굿한 형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파빌리온의 내부를 볼까. 외관의 단순성과 백색 색조가 고스란히 내부로 흘러들어 간명하고 유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단순하기만 하다면 무슨 재미? 곡면의 연쇄로 이루어진 벽면은 부드러운 리듬감으로 생동한다. 사각형과 원형, 유선형 등 다양한 형태의 창들도 흥미를 돋운다. 거대한 둥근 천장 모서리 틈새로 들이치는 자연광은 은은하게 굴절하며 공간에 빛과 그림자를 배급해 슬쩍 유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공 조명보다 미묘하고 전위적인 저 빛살은 뭐랄까, 물이 흐르는 걸 바라볼 때처럼 상서로운 기분마저 야기한다. 태양이 쏴 보낸 광선으로 구조물에 자연을 입히는 방식은 시자의 오래된 건축적 관습이다. 빛의 유입과 변화에 관한 탐색과 성찰을 설계의 기저로 삼았다. 건축 행위를 통해 빛과 사물의 존재를 탐구한 철학자라 할 만하다. 이렇게 기똥차게 빼어난 고수의 작품을 눈요기할 수 있다는 건 흔한 행운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던지는 시대적 화두 이제 거리로 나서 냇물을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지나치는 길목마다 작품이 있다. 거리의 미술품들은 세상에 만연한 획일성과 권태를 누그러뜨린다. 삶이 우리를 녹초로 만들지만 예술 한 자락 걸친 감성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던가. 그래 미술품이 노상에 천변에 산야에 널려 있다는 건 황무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갑다. 봄날의 산은 화사해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낙원이다. 그럼에도 미술로 보탠 게 많으니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저 작품이 쓱 출연한다. 등산로를 따라 걷는 일 자체가 예술 향연에의 동참이다. 작품들 대부분은 까다롭지 않아 이해가 쉽다. 심지어 완구처럼 익살스런 소품들도 있으며, 걸터앉아 다리를 쉬게 만든 조형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후루룩 건성으로 지나칠 일은 아니다. 이름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도 많으니까. 물론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에 혹하는 건 우습지만, 농밀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간과한다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단무지만 질근거리다 나오는 것처럼 엉성하다. 저기 풀밭에 에페 하인(덴마크)의 ‘거울 미로’가 있다. 거울 기둥들로 원형의 미로를 만들었다. 미로란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순례자의 유랑을 상징한다. 거울 기둥 100여 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의 표식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불교를 융합한 조각인 셈이다. 작가가 굳이 불교를 동원한 건 안양예술공원이 있는 삼성산이 불교의 발흥지였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 지향하는 방법의 하나는 현장의 역사성을 작품에 담는 것인데, ‘거울 미로’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불교적 테마를 조형한 작품은 그밖에도 여러 점 더 있다. 인도네시아의 에코 프라워트는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수백 개의 대나무로 사원을 만들어 안양의 불교적 풍토를 기렸다. 공공미술은 지역의 풍속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중국 작가 왕두의 ‘신기루’는 그 본이다. 그는 이미 소실된 안양유원지 시절의 건물 형태를 대리석 조각으로 재현해 냇물에 담가두었다. 이건 공공미술의 본령이 지역의 사회사를 형상화하는 데에도 있음을 알게 한다. 공공미술은 현장의 환경 개선과 기능성 보강에도 신경을 쓴다. 작품이 통째 벤치가 되기도 하고, 어수선한 주차장을 설치 예술로 성형해 실용성과 미감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도 있다. 공공미술은 이렇게 명멸하는 세사와 역사, 바람에 실려 사라진 시간들의 사연을 예술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다. 무섭게 변하는 세상과, 더 무섭게 악화되는 환경의 문제를 가급적 예리한 갈고리로 찍어내 시대의 화두로 던진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와 표현 방식을 구사하지만 의도가 선명해 허영이 없다. 안양예술공원 관람의 종장에선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덤으로 등장한다. 한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할까. 김중업의 건축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고지식하게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건축에 반영했으니까. 김중업의 설계로 지어진 옛날 공장 건물을 손질해 설립한 김중업박물관에서는 그의 설계 도면, 설계 수첩, 사진, 문학적 기록 등을 볼 수 있다. 김중업은 알바루 시자처럼 차라리 시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건축은 노래해야 한다”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집이다”라고. 이런 시적 메시지, 들어본 적 있는가?
- 2022-04-1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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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겨울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부희령 작가가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너와 만나기로 했던 곳은 종로 2가의, 지금은 문을 닫은 어느 서점 앞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종로 2가는 지금의 홍대 입구나 망원동처럼 젊음으로 북적이는 거리였다.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 한 번쯤 겪고 넘어가는, 빈둥거림, 반항 혹은 방황, 무엇을 하든지 남보다 도드라지고 싶은 치기, 그런 기색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막, 대학 입시를 치른 예비 대학생이었다. 딱히 만날 이유가 없어도 실내 장식이 멋진 카페의 통유리창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자 친구와 약속을 잡고 종로로 나가곤 했다. 이제는 없는 종로 2가의 서점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럿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그런 우연을 기대할 수도 있는 때였다. 문득 네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너는 중학 시절 단짝이었으나,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그 시절 나는 숫기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 사귀는 일이 참 어려워, 학교 다니면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소풍날 점심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네가 먼저 다가왔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봄소풍 때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너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갸름한 얼굴, 외꺼풀 눈이 크고 콧날이 또렷한 아이였다. 가무잡잡하고 윤기가 흐르는 살결이라 너를 볼 때마다 잘 볶은 땅콩을 떠올리곤 했다. 친해지기 전부터 나는 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멀리서 훔쳐보곤 했다. 너는 그걸 알지 못했겠지.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자, 나는 너의 독특한 성격도 좋아하게 되었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던 네가 어른스럽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공부 같은 건 너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그러니까 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감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중2 여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문 성품의 아이였다. 내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너는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곤 했다. 그런 네가 나를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세검정에 있던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 내려 어디론가 한참 걸어갔다. 을지로 3가쯤이었던 것 같다. 유리의 성처럼 휘황찬란한 높은 빌딩이 즐비한 지금의 을지로가 아니라, 아래층에는 철공소와 인쇄소, 허름한 식당 같은 가게들이 있고 그 위로 성냥갑 같은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 남루한 거리를 떠올린다. 살림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복잡한 거리,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속을 걸었다. 너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고, 그리고 우리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무뚝뚝한 철제 책상들이 놓인 사무실을 가로질러서 빗장이 달린 견고한 철문을 열자 비로소 가구가 몇 개 놓인 살림집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너와 네 가족의 거처였다. 그 무렵 읽은 ‘안네의 일기’에 나오는 숨겨진 공간 같았다. 평소처럼 너는 무덤덤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조금은 딱한, 그리고 서글픈 사연이었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위로 두 언니가 있는 막내딸이라 했다. 가족 앨범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둘째 언니가 가장 예쁘다, 어느 날 길에서 둘째 언니를 보고 따라온 남자가 저 철문을 쾅쾅 두드리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날 너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해 겨울, 종로 2가 서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을까? 나는 낡은 수첩을 뒤져 네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걸까? 너는 전화를 받았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서점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어느 대학에 진학했을까? 취직을 한 건 아닐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왠지 너를 만나기가 꺼려졌다. 마침 그날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서울 시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형색이었으나 버스는 다녔으므로, 못 나간 게 아니라 안 나간 것이었다. 너는 약속을 지켰을까. 그 뒤 나는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쉰 중반을 넘으면서, 이따금 내가 놓친 인연들이 슬그머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아름다운 인연이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부끄럽기만 해서 빨리 잊고자 했던 기억도 이즈음은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너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그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변명해본다. 미안하다, 여전히 열다섯 소녀인 나의 친구 은숙아. 부희령 작가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소설과 산문을 쓰면서,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꽃’, ‘고양이 소녀’, ‘무정에세이’ 등이 있다.
- 2020-07-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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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 파이어족의 꿈
- 미국에서 파이어(FIRE)족이 인기를 얻고 있다. 파이어족이란 30~40대 중반의 조기은퇴(Retire Early)를 목표로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의 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영문 앞 글자를 합성해 만든 말이다. 40대 중반에 조기은퇴해 40년 은퇴생활을 하는 파이어족을 꿈꾼다고 가정해보자. 매월 생활비 20만 원으로 생활이 가능하다면 40년간 1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20대 중반에 취업해 15~20년간 소득의 50~70%를 저축하면서 은퇴자금을 확보하고 매년 4~5%의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면 원금을 인출하지 않고 투자수익만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결코 쉽지 않은 목표이지만 꿈같은 얘기는 아니다. 10억 원 목표 조기달성하려면 코리아 파이어족이 되면 더 이상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옥철을 타고 직장에 억지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또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하며 가족과 함께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쯤은 파이어족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먼저 연 수입과 총지출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연간 저축률을 산출해보자. 예를 들어 연봉이 5000만 원이라면 연 2500만 원 이상을 저축하면서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그렇게 10년을 모으면 원금이 2억5000만 원, 20년이면 5억 원의 종잣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요즘 1%대 정기예금 이자로는 원금의 2배 투자수익을 내기 어렵고 목표금액 10억 원 조기 달성도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코리아 파이어족의 꿈을 이루고 싶다면 포기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보자. 종잣돈을 10년간 투자해 2배로 불리기는 쉽지 않지만 방법은 있다.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를 보면 2009년 대비 3배 정도 상승했다. 뱅가드ETF(Vanguard S&P 500 ETF)에 꾸준하게 투자했다면 어땠을까? 벌써 꿈을 이뤘을 것이다. 달러로 투자하기 때문에 환차익까지 덤으로 얻으면 10억 원 목표금액은 조기에 달성할 수도 있다. 글로벌 우량주에 장기투자 물론 S&P 500 지수가 꾸준히 우상향해야 하고, ETF 수수료는 낮아야 하며, 환율도 동일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붙어야 한다. 하지만 조기에 경제독립을 쟁취한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선 긍정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발품을 팔고 그동안의 재테크 방식에서도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내 투자, 정기예금 등으로 종잣돈을 굴려왔다면 이제는 미국 등 글로벌 우량주에 자산을 배분해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 시장은 항상 등락이 있지만 장기적인 시장 흐름은 꾸준히 상승할 확률이 높다. 기술은 더 발전하고 글로벌 우량 회사들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들 기업은 더 좋은 제품으로 투자수익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직접 창업할 수 없다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저축률을 높이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안에 조기퇴직해 40년간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면 엄격하게 지출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만의 마이라이프북(수첩)에 매일 지출을 꼼꼼히 적다 보면 돈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지출 중 주거비, 차량구입비, 교육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빤한 연 수입으로는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주하는 집 사이즈를 과감하게 줄여 조기은퇴를 앞당길 종잣돈을 마련해도 된다. 승용차도 3~5년 주기로 신차를 구입하기보다는 20년 이상 탈 각오를 해야 한다. 자녀 교육비 지출에서는 사교육비 비용을 점차 줄여나가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파이어족을 위한 여정은 고통스럽고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삶의 의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파이어족 꿈에 도전하고 있다. 2020년 대망의 새해! 소중한 당신의 코리아 파이어족 꿈을 힘차게 응원한다. 신동일 KB국민은행 강남스타PB센터 부센터장 VVIP 자산관리팀장을 역임했다. 20년 이상 국민은행에서 퇴직연금과 PB를 담당했다. 자수성가한 100억 원대 부자들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한국의 슈퍼리치’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저서로 ‘슈퍼리치의 메모’, ‘부자의 선택’, ‘마흔의 역전’, ‘한국의 슈퍼리치’, ‘슈퍼리치의 습관’, ‘한국의 장사꾼들’이 있다. 현재 ‘신동일꿈발전소’를 운영하며 ‘행복한 부자 되기’ 꿈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 2020-01-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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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이규리 시인의 아포리즘에 영감을 준 도서들
- 아포리즘에 영감을 준 도서 by 이규리 ◇ 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에게 영혼과 인생을 사로잡혔던 한 청년의 이야기. 저자는 17세 당시 37세의 카프카를 만났다. 이후 카프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그와 나눈 대화와 정신적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 작가수첩 (알베르 카뮈 저) 알베르 카뮈가 22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록한 총 7권의 노트 내용을 모아 엮었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떠올린 단상과 창작계획, 초고, 독서메모 등으로 구성돼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성찰을 엿볼 수 있다. ◇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저) 평생 정원사로 일하며 400여 편의 시를 쓰고 200여 편의 시를 번역한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대표 시 30선을 담았다.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한 그의 시들은 담백하게 읽히면서도 강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 소유하지 않는 사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장미를 사랑했으나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 그런 모순과 방황 속에서 살았던 시인의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해 정리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릴케의 시작노트와 헌시,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공개한다.
- 2019-07-1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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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영혼, 서울 한복판에 별을 짓다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
- 바깥에서 유리문 가까이 고개를 낮춰 눈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깜짝 놀라 몸이 뒤로 밀렸다. 점심시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손맛 좋기로 소문난 동네 맛집으로 고민 없이 향했다. 가을볕 맞으며 맛난 된장찌개 삭삭 긁어 나눠 먹고는 그녀의 별로 들어가 향 깊은 커피를 마주하고 앉았다. 음악소리가 나뭇결을 타고 전해지는 문화살롱 ‘아리랑’ 안. 그곳에서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崔銀眞·58)의 지나온 인생과 살아갈 날의 이야기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풀어봤다. “문화쟁이들은 나 모르면 간첩이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옆에 예술인 최은진의 문화공간 ‘아리랑’이 있다. 사람들이 익히 알 만한 설명이라면 말 많고 탈 많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의 주요 무대가 바로 아리랑이다. 낮에는 손님 받을 생각 없는 듯 늘어지고 한산한 모습이다. 밤이 되면 그녀의 별 ‘아리랑’에서는 따뜻한 불빛 아래 술잔이 오간다. 기분이 좀 오른다 싶으면 최은진의 노랫가락에 흠뻑 젖을 수도 있다. 화가, 글 쓰는 작가, 건축가, 교수 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이들은 성지마냥 이곳을 찾는다. “예술가들 많이 오죠. ‘평범’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인들이 많이 와요.” 최은진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만요 가수로만 소개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재능이 많다. 타고난 음색은 노래 분위기에 따라 아이 목소리도 됐다가 농염한 재즈가수도 된다. 옛 가요에 세련미와 특별함을 더해 사랑받고 있다. 인천 출신인 최은진은 초등학교때 인생 최초로 듣게 된 ‘흑자청춘(1966년·정원 노래)’ 한 곡으로 노래에 빠져들었다. 동춘 서커스단 공연 모습을 보고는 교내 체조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20대에는 영혼에 대한 갈증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도 꿈꿨다. 지금은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 정신세계에 관한 공부와 수행, 묵상하는 삶을 산다. 젊은 시절연극배우로서도 두각을 보여 각종 무대에 올랐다. 그 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99년 현대방송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타면서 매스컴 앞에 섰다. 그때 최은진 나이 마흔. 예인의 길을 걷고자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음악 아리랑과 인연을 맺었다. 아리랑에 정착하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방송사에서 시키는 거 하는 게 싫었어요. 대신 재즈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뉴욕으로 유학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어요. 그때 우리 아들이 어리니 한 5년만 다녀올까 생각했는데 제 앞에 아리랑이 다가왔어요. 오케스트라 협주로 된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잔뜩 쏟아냈습니다.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아리랑도 결국 재즈잖아요. 우리만의 소울이 깃든 재즈요. 2003년에 나운규 탄생 100주년 음반 ‘다시 찾은 아리랑’을 낸 것이 새로운 삶의 시초가 됐습니다.” 진정한 음악을 찾아 뉴욕에 가고자 했다. 알고 보니 영혼이 깃든 음악의 본질은 최은진 자신이 서 있는 토양에도 있었다. “이생에서 정체성을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아리랑을 하러 세상에 왔구나. 아리랑 음반을 내고 나서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마이크랑 스피커도 가져다 놓고요. 여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더니… 희한해요. 사람 구경 못하던 거리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저기 가면 옛날 목소리 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아리랑에 무슨 애환이 있기에 최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는 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국제교류 아리랑 축제에 초청돼 갔어요. 그때가 추석쯤이었는데 아리랑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위문공연을 했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목화밭에서 그렇게나 많이 고생하셨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입구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공연을 못할 뻔했어요. 너무 울어가지고요. 일주일 전쯤 소록도에 갔을 때도 화장장 근처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했죠. 교감이 되는 거죠. 그 당시 힘들었던 사람들의 삶이 저에게 그대로 오는 거예요. 나도 조금은 특별한 별인 셈이죠.” 다가오는 영혼들의 울림이 있기에 곡마다 정성과 마음을 담아낸다. 2010년에는 지극정성의 보답처럼 2집 음반 ‘풍각쟁이 은진’이 1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인기를 얻었다. “‘오빠는 풍각쟁이(1938)’를 리메이크한 앨범을 냈어요. 처음에 음반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구입했다더군요. 서점에 가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봤죠.(웃음) 인터넷도 안 하고 매일 이곳에 있으니 알 수 있겠어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대요. 이 여자가 누구냐고요.”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강산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른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도 그녀의 왕팬을 자처했다. 그렇게 최은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소문을 타고 흘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에게도 알려졌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기타리스트 하치가 세션과 프로듀싱을 담당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음악 작업에 힘을 보탰다. 진정한 레트로 음반 ‘헌법재판소’ 최근 최은진은 엄청난 시도를 감행했다. 아리랑 소리꾼 혹은 조금 현대적인 느낌으로 편곡된 옛 곡을 부르던 것과 차원이 다른 음악 장르에 도전한 것. 바로 옛 가요를 1980~90년 대 인기를 끌었던 일렉트로닉 스타일로 재해석한 세 번째 앨범 ‘헌법재판소’다. 아들 또래인 젊은 음악가와 작업을 하고 음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그녀의 이전 음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이 불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 그 자체다. 시니어가 노래방에 가서 18번으로 잘 부르는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1960)’과 백년설의 ‘아주까리 수첩(1942)’은 젊은 세대의 숨을 불어넣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즐겨듣던 시니어에게는 신선함을, 곡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음악으로 느껴질 만하다. 지난 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로 다뤘던, 진화하는 레트로 열풍의 기류에 최은진의 새 앨범도 합류했다. “정말 현대적으로 만든 거예요. 나이어린 음악인들과 같이 작업하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거죠. 젊은 세대도 저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배우는 게 있었을 겁니다. 옛날 정서를 무시하고 과정 없는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요즘은 ‘아리랑’ 문을 여는 일 외에는 새 앨범 홍보 쇼케이스 무대에 선다. 12월 1일에는 홍대 더스텀프에서 새 앨범을 소개하고 알리는 쇼케이스를 열어 성황을 이뤘다. “처음에는 ‘아우!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어떻게 노래하지?’ 그랬는데 들을수록 좋아요. 이게 정서에 맞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제가 작사, 작곡한 음악도 수록했고요.” 군대 간 아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양구’는 최은진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는 노래인데 여성들은 무덤덤하게 듣는 반면 남성들은 곡을 듣자마자 “엄마 보고 싶다”를 연발한단다. 삶의 씻김, 문화살롱 ‘아리랑’ 3집 타이틀곡인 ‘헌법재판소’는 이노경이 쓴 곡에 최은진이 가사를 붙였다. ‘아리랑’에서 만나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모든 세대를 위로하고 싶어 만든 곡이다.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면 그렇게들 울어요.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낸단 말이죠. 대부분 다 울어. 그러면 나도 울고. 저마다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많잖아요. 위로가 필요한 모두를 위해 썼어요. 해우소라는 말 있잖아요. 내가 볼 때 이 집은 울다가 웃다가 위로받는 집이야.(웃음)” 어떤 것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뭘 하든 이렇게 가는 거지 뭐”라고 답한다. 그냥 매일을 사는 것. 시상이 떠오르면 적고 악상이 떠오르면 함께 작업하는 음악인들과 얘기하면 된단다. “그 젊은 친구들 밴드 이름도 만들었어요. 대열차강도밴드래요.(웃음)” 무엇보다 공연에 힘을 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무대가 늘 그리운 천생 무대 체질 그녀다. 세상을 위한 조언이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머리 말고 가슴을 써야 해요. 그래야 바로 연결될 수 있죠. 소통 말입니다. 그러려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후배들에게 고독한 시간이 중요하다고 조언해요. 오늘 인터뷰 때문에 산책을 못했는데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걸까. 헌법재판소 옆. 땅거미가 지면 작은 별 하나가 떠오른다.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 호주머니에 손 넣고 한 명, 두 명 들어와 착석. 위로가 필요한 당신들을 위해 오늘밤도 아리랑의 문은 열린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브라보!”
- 2018-12-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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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
- 난 아직 새내기 작가다. 작가가 된 계기는 지인의 추천 때문이었다. 퇴직 후 강사로 활동하는데, 지인으로부터 “유능한 강사가 되려면 자신만의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고, 자신의 책이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 조언이 깊이 와 닿았다. 곧바로 ‘작가 탄생 프로젝트’, 문화센터의 ‘작가도전’ 과정, ‘CEO 책 쓰기 포럼’ 등의 모임에 참가했다. 그렇게 글쓰기와 출판에 대해 강의를 듣고 공부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해 벌써 여섯 번째 책이 출간됐다. 첫 책의 제목은 ‘강소기업의 17가지 경영노하우’이며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에 출간된 ‘꼰대 될래, 오빠 될래’는 유난히 애정이 가는 책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크게 세 가지의 매력과 보람을 느꼈다. 첫째, 욕구를 충족시켜줬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글쓰기와 책 출간이다. 둘째, 스스로를 재발견했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을 통해 삶의 의미도 되찾을 수 있다. 셋째,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경로의존성’이란 일정한 경로에 한 번 의존하기 시작하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인 사실을 알고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말한다. 내게 글쓰기는 사람과 사물, 그리고 세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줬다. 원고를 탈고할 때의 보람, 밤새워 다듬고 공들여 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감동은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작가가 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힘들었던 점을 생각해보니 몇 가지가 떠오른다. 나는 무엇보다 엉덩이가 가벼워 고생했다. 글은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래 앉아 있어야 한 문장이라도 건지니 그만큼 견뎌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엉덩이가 가벼운 나는 조금만 앉아 있어도 지루하고 허리도 불편했다. 내 인내심에 대해 여러 번 실망하기도 했다. 선배 작가들은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일정 분량의 글을 꼭 쓰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전혀 몸에 배어 있지 않았으니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글을 쓰는 일은 차라리 고역이고 고문이었다. 그래도 이 시간들을 견뎌내지 못하면 작가는커녕 제2직업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채찍질을 했다. ‘글감’도 문제였다. 나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메모지가 없으면 식당의 냅킨이나 신문 쪼가리에 적어 호주머니에 넣어뒀다. 그러나 제때 노트나 컴퓨터에 옮겨 적지 못하고 그대로 옷을 세탁해 소중한 아이디어가 날아가 버리곤 했다. 그 후부터 메모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휴대하고 다닌다. 글쓰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순한 단어로 적은 분량의 글부터 써보자. 작가가 되고 싶다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봐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이미지나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작가라면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것들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다.
- 2018-09-0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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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는 듯한 더위, 땀을 식히며 읽어볼 만한 신간
-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 잠시 땀을 식히며 읽기 좋은 신간을 소개한다. 본과 폰, 두 사람의 생활 (본, 폰 저ㆍ미래의창)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75만 명을 돌파하며 전 세계 네티즌의 워너비로 떠오른 한 60대 부부가 있다. 바로 본(bon)과 폰(pon)이다. 일본의 평범한 부부였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딸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화제가 됐다. 백발의 머리로 커플룩을 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남편 본과 활발하고 다혈질인 아내 폰. 상반된 성격 탓에 종종 싸우기도 했지만, 남편이 은퇴한 뒤에야 비로소 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갖게 됐다는 두 사람이다. 결혼한 지 어언 37년 차, 함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이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콩달콩한 일상을 공유한다. 네티즌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감각적인 커플 패션. 똑같은 디자인이 아닌, 비슷한 무늬와 소재의 옷을 적절하게 매치해 같은 듯 다른 시밀러룩을 선보인다. 책에는 평소 부부가 자주 착용하는 커플룩 아이템과 스타일링 비법, 쇼핑 노하우 등을 보기 쉽게 정리했다. 아울러 그동안 두 사람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람들에게 받아왔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실었다. 커플룩에 도전해보고 싶은 시니어에게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지금이 내 인생의 골든 타임(이덕주 저ㆍ초록비책공방) 장수시대를 맞이해 이전의 노인 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신노년 세대’의 문화를 이야기한다. 나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도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사례를 담았다. 아울러 은퇴 후의 시간을 ‘인생의 골든타임’으로 만드는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김석중 저ㆍ지택코리아) 유품 정리를 배우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간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는 유품의 의미와 한·일 노년의 삶. 유품 정리뿐만 아니라 고독사 문제를 비롯한 사회 현상, 문화생활 등에 대해 한국 베이비붐 세대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프랑수아 아르마네 저ㆍ문학수첩) ‘당신이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가져갈 책 세 권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전 세계 유명 소설가, 시인, 극작가 등 196명이 내놓은 답변을 모았다. 개성 넘치는 작가들의 문체처럼 다양한 도서들과 더불어 책을 선정한 이유,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까지 엿볼 수 있다. 칵테일 도감(칵테일 15번지 외 공저ㆍ한뼘책방) 도쿄 긴자의 유명 바텐더들이 엄선한 228가지 칵테일 레시피를 담았다. 마티니, 모히토 등 역사가 깊고 잘 알려진 칵테일은 물론, 레인보우, 사케티니 등 독특하고 실험적인 칵테일도 소개한다. 생생한 사진과 아이콘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기 쉽게 구성했다.
- 2018-08-1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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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대표 여성 작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려냈을까? 한국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전시회는 이렇듯 가벼운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한다. 전시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듯 초기작을 접하고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감상하니 점점 그 이름이 각인된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화가, 사랑에 기뻐하고 아파한 여인의 대서사시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을 통해 펼쳐진다. 마리 로랑생에 대해…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우선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보기에 앞서 그의 인생 이야기와 연애담을 조금이라도 알면 좋겠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이자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마리 로랑생 감정 변화는 깊이가 더해지며 다양한 색채로 화폭에 담겨갔다. 1·2차 세계대전 시대를 산 인물로서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아왔던 예술가,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100여 년 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교육받았다. 입체파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화가가 된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업실이자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에 다니며 활동했고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이곳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5년 여 뜨거운 열애를 나눴던 이들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연루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인 남작과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가다 이혼한다. 이후 마리 로랑생은 색채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의상과 무대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56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됐다. 파리지엥 작가의 인생 궤적을 쫓다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은 마리 로랑생의 20대 무명 시절부터 73세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작품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다섯 개의 섹션이 친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하게 구성돼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 로랑생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옛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사진 19점이 전시 돼 있다.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니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화상과 피카소의 초상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열애시대’로 구별한 2부. 입체파와 야수파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마리 로랑생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난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3부 ‘망명시대’는 마리 로랑생 인생 중 역경의 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 신혼생활을 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난 시기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있을 수 없어 택한 망명길이었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을 자신만의 색깔로 더욱 강하게 작품 안에 표현했다. 4부 ‘열정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시기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 유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공연 영상과 의상 도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5부 ‘콜라보레이션’에는 작가 앙드레 지드의 ‘사랑의 시도’, 오페라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잡지 ‘보그’ 등 마리 로랑생이 북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할 때 발표된 작품 38점이 전시돼 있다. 이밖에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과 마리 로랑생의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있고, 그의 시를 직접 필사해보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 정보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관람시간 2월 오전 11시~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 3월 오전 11시~오후 8시 (입장 마감: 오후 7시) 입장권 성인 1만 3000원 / 청소년 1만 원 / 어린이 8000원
- 2018-02-0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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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문학관, 그곳에 시인이 살고 있다
-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관람 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무료
- 2017-11-29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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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 답사기] 봄꽃 만발한 한옥집에 최명희가 피어 있다
- 라디오를 한창 듣던 시절. 라디오 광고에서 최명희의 장편소설 이 10권을 끝으로 완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가의 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듯 처절했던 몸부림을 생의 마감과 함께 알린 것이다. 길고 긴 소설, 아쉬움 속에 마침표 찍고 너울너울 혼불 돼 날아가버린 작가 최명희. 그녀의 살아생전 활동과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다녀왔다. 소설 의 작가 최명희를 만나다 거리는 화사했다. 어린 학생들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상춘객들의 밝은 얼굴. 기분 좋은 전통 도시 전주는 여행객들과 신나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옥마을 거리를 걷다 만나는 곳이 최명희문학관이다. 2006년, 전주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최명희문학관은 전주시가 건설한 뒤 민간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 작년 최우수 문학관에 뽑힌 최명희문학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최명희문학관은 말 그대로 작가 최명희를 기리고 만나는 장소다. 1980년에 등단해 1981년부터 대하소설 을 집필하던 도중 199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 최명희. 살아생전 오로지 모국어에 대한 집착스런 사랑과 강한 필력을 바탕으로 마음을 사로잡더니 결국 독자들 가슴에 묻히고 말았다. 그녀의 혼이나마 편히 돌아와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최명희문학관이다. 물론 작가 최명희를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 앞문을 통해 뒷문으로 나가는데 단 3초면 된다. 처마 밑에 내려놓은 돌 하나, 목각 하나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멋질 것이다. 문학관 어느 한 공간에도 혼불이, 그리고 최명희가 없는 곳이 없다. 친구 혹은 지인들과 나눴던 엽서들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작가 이금림이 기증한 최명희의 이력서가 눈에 띈다. 소설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최명희 하면 을 꼽을 수밖에 없다.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7년간 소설 쓰기에 집중했다. 당시 고료로 받은 2000만원은 강남의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최명희는 그 상금으로 강남의 성보아파트를 장만했다. 앉아서 글만 쓴다고 해서 지인들은 그녀의 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고 그녀에게는 ‘성보살’이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은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전라북도 남원이 배경이다. 유서 깊은 가문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사실 최명희는 10권을 끝으로 을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열 번째 책을 완성할 때쯤 난소암에 걸렸고 더 이상 집필을 할 수 없게 됐다. 최명희가 남긴 취재수첩 속에는 앞으로 쓰려고 했던 목록들이 수십 가지가 있었다. 그녀가 생존했다면 일제강점기 뒤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 끝을 알 수 없었던 작가 최명희의 열정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기에 문학관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아닐까. 최명희문학관을 다녀간 이름 하나, 하나… 최명희문학관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과 문학상 공모뿐만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문학관이다. 시니어층 참여가 많다는 ‘2017 꽃심소리’는 을 함께 읽어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2006년 개관 때부터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방명록은 모두 아크릴 상자에 담겨 전시되고 있다. 창고에 넣어둘 계획이었으나 공간이 협소해 방명록을 쓰는 한쪽에 놓아두었다. 방명록에 쓴 글은 스캔을 해서 홈페이지에도 올려놓는다. 최명희문학관에 방문해 방명록을 남겼다면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이 썼던 방명록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가 최명희 하늘의 별이 돼서도 극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문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녀를 기리는 문학관과 공원은 전북 지역에 세 곳이나 된다. 의 배경이 된 남원에는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혼불문학관(2009년 개관)이 있고, 최명희 작가의 모교인 전북대 옆에는 작가의 묘소와 함께 혼불문학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 곳곳에 소설 속 문장을 적어놓은 비석이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전주한옥마을 속 최명희문학관이 사람들의 발길이 제일 잦은 곳.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며 매일이 바쁜 문학관이다. 현대를 살다 간 ‘최명희’라는 작가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곳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라본다. 이용 정보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29
- 2017-05-25 0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