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 스토리’는 살아 있는 장난감과 소년의 우정을 그린다. 우리에게도 영화처럼 장난감을 진짜 친구라 여긴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동심을 간직한 덕분일까. 어른들은 고장 난 장난감을 버리면서도 아이가 실망할까봐 “장난감이 아파서 병원 갔다”는 식의 말을 종종 꾸며낸다. 그리고 그 하얀 거짓말을 참으로 만들려는 이가 있다. 김종일(77) 키니스장난감병원 이사장이다.
1만 시간의 법칙. 어떤 분야의 베테랑이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하라는 얘기다. 이 시간을 채우기까진 대략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난감병원 ‘키니스’가 문을 연 지도 어느덧 만 11년이 흘렀다. 최초가 된다는 건 꽤 그럴싸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이기에 외롭고 험난하다. 이럴 땐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10여 년 전 장난감병원 설립을 앞둔 김종일 이사장에게도 뜻을 나눌 동료가 필요했다.
“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를 지냈는데, 일찍부터 은퇴 후를 고민했어요. 내가 가진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죠. 그러다 지금의 장난감병원을 떠올렸는데,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장난감은 건전지로 작동하는 게 많아요. 애들이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음료를 흘리면 쉽게 고장 나 버리죠. 이걸 고치려면 전자 신호나 회로를 읽을 줄 알아야 하거든요. 일단 주변에 알고 지내던 동료 교수들이랑 전자업체 연구원들에게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고맙게도 대부분 흔쾌히 승낙해줬어요. 덕분에 은퇴 후 바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죠.”
그렇게 지원군이 모이자, 김종일 이사장은 사비 3000만 원을 들여 비영리 민간단체 키니스장난감병원을 설립했다. 그를 비롯해 함께하는 이들 모두 봉사하는 마음으로 무보수 재능기부를 택했다. 선한 마음으로 모인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박사’라 부른다. 대부분 60~70대로 본업이 박사인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장난감 박사’라는 뜻으로 통한다.
“돈 받는 일도 아닌데 다들 사명을 갖고 임해주니 감사하죠.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분들은 정말이지 대한민국 최고의 장난감 박사라 자부할 수 있어요. 장난감 수리 쪽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열심히 연구해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웃음)”
사연 안고 입원하는 장난감 환자들
키니스장난감병원을 방문하려면 먼저 온라인 진료실에서 ‘입원 치료 의뢰서’를 작성해야 한다. 김 이사장은 의뢰서에 올린 사진과 사연을 보고, 70% 이상의 치료 확률이 있을 때 입원 결정을 내린다. 치료가 안 됐을 경우 오히려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 있기에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다. 물론 희박한 성공 확률에도 의뢰자가 원한다면 치료를 시도해보는 편이다. 이렇게 입원하는 장난감이 매년 1만 개에 달한다. 이 많은 장난감을 박사 6~7명이 고쳐내려니 종일 허리 펼 새도 없이 치료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또 전국 각지에서 택배로 들어오는 장난감들도 60대 후반인 막내 박사가 송장 붙이기부터 포장까지 도맡아 해낸다. 인터뷰 당일에도 실시간으로 방문객과 택배 박스가 정신없이 오갔다. 봉사가 아닌 혹사에 가까운 업무량이지만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박사들의 손은 바삐 움직였다.
“장난감마다 사연이 있잖아요. 특히 돌 전 아이들 장난감 중에는 모빌이 가장 많이 들어와요. 그맘때는 엄마들이 온종일 애랑 붙어 있는데, 그나마 모빌이라도 틀어줘야 엄마도 밥 먹고 쉬거든요. 근데 그게 고장 났으니 얼마나 쩔쩔매겠어요. 또 애착하던 장난감이 없어서 잠 못 잔다는 아이들도 있고, 이런저런 사연 떠올리면 얼른 잘 치료해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일반적인 가전제품과 달리 아이들 물건의 경우 다소 허술하게 만들어져 고치기 난해한 게 많다고. 키니스에서는 택배비 외의 비용을 따로 받지 않는데, 치료를 위해 부품을 새로 사거나 박사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할 때도 있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도 고쳐지지 않는 장난감은 나오게 마련. 간혹 고장 난 제품을 그대로 다시 받은 고객들은 불평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단다.
“가끔 장난감이 안 고쳐졌다거나 더 고장 나서 왔다면서 안 좋은 후기를 남기는 분들도 있죠. 우리 박사들은 실명제로 일하는데, 자기가 치료한 장난감이면 글만 봐도 다들 알 수밖에 없거든요. 참 속상하고, 어떨 땐 상처도 받아요. 치료가 잘 안 됐을 때 슬퍼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우리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은 조금만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장난감 잘 고쳐줘서 고맙다는 반응이 더 많습니다. 아이가 장난감 가지고 노는 사진도 자주 올라오고, 고사리손으로 감사 인사를 적어 보내는 꼬마 손님들도 있고요. 그럴 때 정말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고장 난 장난감, 기부로 환골탈태
아픈 장난감 치료와 더불어 키니스의 주요 활동은 나눔이다. 설립 이래 해마다 저소득층 가정을 비롯해 보육기관, 장애인 시설, 치매센터(어르신들의 인지력 향상에 장난감을 활용) 등 곳곳에 1000여 개의 장난감을 기부해왔다. 특히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는 절대 거르는 법이 없다고. 보내는 물품의 일부는 다른 곳에서 기부한 고장 난 장난감이다. 물론 박사들이 성심껏 치료한 후 전달한다. 키니스장난감병원 맞은편에는 ‘아나바다 본부’가 있다. 익히 아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를 실천하기 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기증받은 장난감들을 전시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자신의 장난감과 교환해 갈 수 있다. 미래에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을 생각하며 자원을 아끼고자 고안해낸 방법이다.
“아이를 키워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성장 시기마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계속 바뀝니다. 아이들이 쉽게 질려 하기도 하죠. 또 얼마 안 하는 장난감은 조금만 고장 나도 쉽게 버리더군요. 그렇게 계속 새 장난감을 사주면 돈도 들지만 자원 낭비가 심하잖아요. 그러니 가급적 쓸 만한 것들은 고쳐 쓰고 바꿔 쓰고 하자는 거죠. 아이들에게도 환경을 생각하자는 차원에서 그런 부분을 일러주고 함께 실천하면 좋은 교육이 되지 않을까 해요.”
비슷한 취지로 최근 지역마다 장난감을 대여해주는 곳이 적잖이 생겨났다. 일정 기간 단위로 회비를 내거나 보증금을 내면 무료로 장난감을 빌려주는 식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아이들에게 다양한 장난감을 경험하게 할 수 있어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이 역시 훌륭한 서비스지만, 김 이사장은 아쉬운 부분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경험해보니 장난감은 고장 안 나기가 힘들어요. 아기들은 물고 빨고 던지면서 놀잖아요. 조금 큰 아이들도 먹다가 음식물을 흘린다거나 실수로 떨어뜨려서 망가지기 일쑤죠. 그런데 대부분 대여점의 정책을 보면 장난감이 고장 났을 때 수리비 명목의 비용을 내야 하더라고요. 키니스에 장난감 맡기는 분 중에도 대여점에서 빌린 게 고장 나서 갖고 오신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도 못 고치면 그만큼 돈이 나갈 테죠. 그러다 보니 엄마들도 애들한테 맘껏 갖고 놀게 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하더군요. 또 장난감에 애착이 생겼는데 반납한다고 하면 아이가 슬퍼하고 실망할 거 아녜요. 그런 점들이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은퇴 후 장난감 박사를 추천합니다
최근 키니스는 인천광역시 고령사회대응센터와 함께 ‘장난감 수리 전문가 양성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난감 박사가 되기 위한 교육인데, 이를 통해 양성된 인력은 인천 무료 장난감 대여소에서 장난감 수리 전문가로 활동한다. 지난해에는 인천시노인인력개발센터와 ‘장난감 척척박사 사업 활성화와 맞춤형 일자리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이러한 인력을 전국의 장난감 대여소에 배치한다면 앞서 언급한 수리비 부담 문제를 일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내다봤다. 아울러 그 어느 세대보다 은퇴 이후 중장년들이 장난감 박사로 함께 해주길 바라고 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초반에는 공구랑 장비 마련한다고 사비를 많이 썼어요. 또 그때만 해도 박사님들 경험이 부족하니 기술도 지금만 못했고요. 요즘은 여기저기서 후원도 꽤 들어오고, 우리만의 노하우도 웬만큼 쌓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우리 일을 권할 만한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고 봐요. 간혹 기술 없다고 주저하는 분들도 있는데, 와서 익히면 되니 큰 문제는 아녜요. 중요한 건 ‘봉사하려는 마음’ 그게 얼마나 진심인가죠. 게다가 나도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데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나처럼 너무 나이 든 노인은 좀 그렇고(웃음) 60대 후반이면 딱 좋겠어요.”
인터뷰 말미 여생의 목표에 대한 질문을 앞두고 있을 때 한 꼬마 손님이 찾아왔다. 장난감이 잘 치료되어 기분 좋은지 껑충껑충 뛰며 병원 문을 나서려는데, 김 이사장이 황급히 무언가를 챙겨 아이에게 다가갔다. 막대사탕이었다. 손님은 물론이고 이곳을 지나는 아이들을 보면 과자든 풍선이든 꼭 뭔가 하나를 쥐어 보내야 직성이 풀린단다. 사탕을 받아 들고 신이 난 꼬마를 보는 김 이사장의 얼굴에 너그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의 표정에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이내 예상 답안이 흘러나왔다.
“내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고칠 겁니다. 이렇게 매일 뜻밖의 동심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지금처럼 다른 욕심 없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해요. 아, 욕심나는 타이틀이 하나 있긴 한데요(웃음). 어린이날 창시자 방정환 선생처럼, 먼 훗날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장난감병원 설립자로 기억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그만큼 키니스가 오래오래 아이들 곁에 함께하길 바란다는 뜻이고요. 그게 제가 미래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전북 익산시에는 은퇴자를 위한 놀이터, ‘청춘놀이터 목공방’이 있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은퇴자 혹은 은퇴 예정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 작업장이다. 이곳에서 책상, 의자, 장난감 교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고 수리할 수 있다. 개인이 마련하기 어려운 각종 목공, 용접 작업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은퇴자들의 생산적 여가문화를 도와, 삶의 보람, 취미, 일거리를 찾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작한 물건은 전시, 판매해 수익 창출도 한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55세 이상 익산시 거주자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수준에 맞는 교육과 실습도 제공한다. 취미 과정, 전문가 과정으로 나뉘어 교육이 진행되며, 수료 후 목공방을 이용할 수 있다.
한 이용자는 “청춘놀이터 목공방에 오기 전에는 무료한 삶을 살다, 목공방을 이용한 뒤부터 활발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며, “내 손으로 직접 목공 제품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물 모양 장난감을 만들어 손자 손녀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즐겁게 잘 갖고 놀아 뿌듯했다.”고 이용 소감을 밝혔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전북도에서 조성한 ‘은퇴자 작업공간’ 중 하나다. 남원의 ‘목금토 공방’도 운영 중이다. 전북도는 전주시와 고창군에도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올해 사업 대상지 1개소를 추가로 선정할 계획이다.
전북도의 은퇴자 작업공간은 뉴질랜드의 ‘남자의 헛간’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남자의 헛간은 남성 은퇴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목공, 금속, 전기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작업장이다. 대형 기계, 장비가 마련돼 있다.
소정의 이용료를 내면 누구나 원하는 물건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장비 제작, 보수 공사 등이 필요할 때 이용자들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은퇴한 이들에게 소일거리를 마련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고, 사회생활을 이어가도록 돕는다.
전북도는 남자의 헛간을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 도입하여 전국 최초로 은퇴자 작업공간을 조성했다.
‘논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빈둥빈둥하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바쁘게 노는 건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는 놀이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일 외에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놀이에서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면 논다는 게 단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혼자서 놀아도 그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직장이 없어 노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테고 그런 일을 빼고 나면 취미생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노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집에서 혼자 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힘들지만 즐거운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전원생활의 빛과 어둠을 비교해 글을 썼다. 즐거운 것 중 하나로 매실주 담그는 얘기를 했는데 늦가을인 요즘, 애주가로서 그때 담근 매실주를 조금씩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심히 골프를 치러 다녔다면 이런 맛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친구가 은퇴 후 10년이 된 나이인데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러 다닌다 해서 좀 부러웠다. 나는 젊은 시절 치다 이마를 다친 후 손에서 놨다. 하지만 코트 위의 검투사처럼 사각 틀 속에서 온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친구는 체력은 문제없는데 같이 칠 파트너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골프나 테니스에 대한 나의 희미한 갈망은 텔레비전 중계로 풀곤 한다.
재미 들린 작은 농사
스포츠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지만 꽃과 나무들을 돌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쓴다. 꽃나무들은 사올 때처럼 예쁘게 가만 있지 않는다. 보기 흉하게 자라지 않도록 가꿔줘야 한다. 그냥 놔두면 야생의 숲처럼 돼버린다. 하루 작정하고 나가 일하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일을 끝내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 즐거움이 스포츠 활동과 진배없다.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보람까지 느끼면 쾌감이 더 오래간다.
꽃나무뿐만 아니라 40~50그루 규모의 블루베리 농사도 짓고 있다. 열매를 1년 내내 생으로 또는 가공해서 먹을 수 있어 좋다. 블루베리는 면역력 향상은 물론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눈을 좋게 해주는 효능도 크다. 실제로 연전에 돋보기를 맞춰 뭘 읽을 때마다 써보니 영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빼닫이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부터는 지금까지 돋보기 찾을 일이 없다. 한번은 쓰고 다니는 근시 안경이 맞지 않아 안경점엘 갔는데 시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현상 아닌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7년 전 블루베리 2년생, 그 어린것을 심어놓고 밤낮으로 물 주며 돌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키가 2m를 넘는다. 커갈수록 일은 더 많다. 잡초 뽑고 오래된 가지 베어내고 더 이상 크지 않도록 긴 가지는 잘라주고, 누운 가지는 지지목을 대주기도 한다. 품종별로 익는 시기가 달라 열매 따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서 따야 한다. 수확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의 블루베리 열매 따기 걱정이 시작된다. 내가 “좀 덜 따고 놔두면 어때? 떨어져서 개미가 먹으면 안 될 일이 있나?”하며 늑장을 부리면, 아내는 “1년 내내 먹을 블루베리잼은 어떻게 만들죠?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애한테는 뭘 보내주죠?” 한다. 블루베리 농사는 벌써 9년째에 접어들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도 한 번씩 맛보게 하려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작은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배우는 게 많다.
스포츠와 농사를 비교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하는 스포츠에 비해 농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집중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도 는다.
명품 매실주 담그기
매실주 담그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 애주가로서 담금 매실주를 조금씩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주로 우메보시를 만들어 먹는데, 우리처럼 청매를 쓰는 게 아니라 다 익은 황매를 이용한다. 익은 열매는 나무 밑에 보자기를 낮게 매달아놓고 가지를 털면 잘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그런 준비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낸 뒤 주워서 모으는 방식으로 수확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몰입해 작업을 하고 나면 만족감이 든다. 큰 플라스틱 용기에 쌓이는 굵고 누런 매실이 얼마나 듬직해보이던지. 수확 후에는 세척하고 말리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한다. 다음 날에는 큰 유리 용기에 담금용 소주를 붓고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저울에 재서 일정량을 쏟아 넣고 거기에 맞춰 소주를 부으면 된다. 자그마치 큰 용기 두개, 작은 용기 한 개. 세 용기에 채워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런 상태로 5년은 숙성해야 마실 만한 명품 매실주가 된다. 좋다. 5년을 기다려보자 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흐뭇한 마음으로.
독서와 음악 감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항간의 말은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또한 맞다. 학교 다닐 때 취미를 기록해 써낼 때가 있었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피아노, 바이올린, 축구, 노래하기 등을 써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걸 취미라고 기록했다. 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으면 그때마다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서를 취미로 할 만큼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로 엄청나다. 전국노래자랑, 복면가왕, 히든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케이팝스타, 위대한 탄생, 미스트롯, 미트터트롯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만 꼽아봐서 그 정도이지 노래와 함께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듣기를 좋아해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오디오나 텔레비전 음악 채널을 틀어놓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음악을 듣고 있다. 고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됐고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대단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좋은 오디오와 LP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종종 그 집에 가서 감상을 하거나 빌려와 들어보기도 하면서 음악 감상 취미를 길러왔다.
매혹적인 나만의 ‘소리’에 취하다
20여 년 전 비엔나에서 근무할 때 덴마크 산 뱅앤올룹슨(Bang&Olufsen, B&O)을 제법 비싸게 사서 듣고 다녔다. 그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도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지금도 제주 집에 놓고 수시로 음악을 듣는다. 나는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교보문고에 들러 음악 시디를 아낌없이 사온다. 아내는 이 기기에 ‘남편 장난감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노트북, 소니 카메라는 2호쯤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음향기기는 딱 한 번 고장이 나서 회로를 교체하는 등 수리를 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성능을 잃지 않고 있다. 무얼 더 바랄까.
내가 듣는 음악, 우리가 듣는 음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의 대중음악을 다 좋아한다. 샹송, 팝송, 칸초네, 칸시온, 컨트리, 탱고, 파두 등등. 라디오 방송 중 클래식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클래식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삶이 녹아들어 있다. 감상하다 보면 그 사람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런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기고 이해한다. 스페인 음악을 듣다 보면 ‘코라존(Corazon)’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하면 Heart, 즉 마음, 사랑, 애인이다. 노래를 듣다가 이 가사가 나오면 시공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상상된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전음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기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대중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고양된 형태로 표현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천재 작곡가들이 온 정열을 바쳐 만든 음악을, 최고의 기예를 뽐내는 천재 연주가들이 빚어내니, 그 소리는 바꿔 말하면 천상의 소리에 지상의 양식이요 품격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빠졌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열다
아마추어일 뿐인 음악 애호가로서 크게 한 번 객기(客氣)를 부린 일이 있다.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재영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황이 한국에 요양차 한두 달 머무르는 기회에 남산 언저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 것이다.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그는 7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9세 때 신동으로 등장한 젊은 음악가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너무 잘해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전자를 선택했다. 1688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우스의 악기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그는 나흐트무지크(Nachtmusik)란 이름으로 그날 여섯 곡을 선사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여남은 명이 참가해 나름 성황을 이뤘다. 처음 해본 하우스 콘서트치고 성공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제주와 서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다. 음악 애호가가 많을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가는 이태원에 루체(LUCE)라는 시니어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이 있어 이따금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음악의 힘이다.
글 쓰면서 혼자 놀기
집에서 혼자 놀기 중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글쓰기다. 이젠 취미가 됐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을 써서 어디 기고를 하면 원고료도 나오니 돈 써가며 하는 취미가 아니라 시간도 잘 보내면서 돈도 생기는 취미다. 글 써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이라서 어떨 때는 지겹다고 한다. 나는 다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 필진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글을 쓴다. 주제와 형식이 자유롭다. 단, 원고료는 없어 일종의 재능 봉사라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건 아무 때나 써지지 않는다. 글 한 편 쓰기 위해 평소에 늘 글감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이게 또한 재미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 공연은 어떤 글감이 될까, 저 활동을 하면 어떤 글로 이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니 심심치 않다. 글을 발표하면 주변 친구들과 지인, 동창, 각종 단체에도 보내는데 갖가지 독후감을 보고 듣는 재미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나름의 원칙을 갖고 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 첫째, 읽는 사람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 둘째,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일로서든 취미로서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한 생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거북선 없는 이순신, 이순신 없는 거북선, 거북선과 이순신 없는 임진왜란. 이 세 가지 가정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성립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거북선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북선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빛나기 어려웠던 것처럼, 그 둘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너무도 부끄러운 국난이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이 이순신의 창제냐 모방이냐, 이런 논란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틀어쥐었던 사실이다. 조선수군이 왜 수군을 만나는 대로 때려 부수어 병참선을 차단해줬기 때문에 조선은 망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큰 그릇을 알아보고 발탁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혜안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라도 이순신이 그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슨 쓰임새가 있었겠는가. 서애는 이순신을 발탁하기 위해 온갖 지략을 다 썼다. 종6품 정읍(井邑) 현감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등용해 남해바다를 맡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정만은 상상하기도 싫다.
전라좌수사는 지금으로 치면 전라도 동쪽 해역을 책임지는 해군 함대 사령관이다. 해역이 넓은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우 수사를 두었다. 충청, 경기 같은 곳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겼다. 남해는 그만큼 중요한 바다였다.
지금도 낙하산 인사라는 게 있어 종종 물의가 일어나지만, 생각보다 합리적인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일곱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인사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위관장교가 일거에 별 둘의 장군이 된 벼락출세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의 이순신 발탁인사 안이 올라가자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물리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임금의 신임이 깊었던 류성룡이 있어 인사는 성사되었다. 육군에서 뼈가 굵은 장수를 해군제독에 발탁한 것도 신묘한 인사였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이었다. 다른 수군 장수들이 무사안일로 날밤을 보낼 때 그는 왜적과 싸워 이길 궁리에 골몰했다. 좌수영 관할 지역인 오관(순천·보성·광양·흥양·낙안) 오포(방답·여도·사도·녹도·발포)를 순회하면서 전쟁 대비 태세를 점검하고, 전선 건조와 수리를 서둘렀다. 서류상의 명단뿐인 수군 병력을 실 전력으로 만들고, 전술 개발과 군기 확립을 위한 훈련을 서둘렀다.
그 가운데 거북선을 건조한 일은 장비가 적토마를 얻은 일에 비유될 일이었다. 거북선이 왜군에게 얼마나 무서운 배였는지 증명하는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윽고 적선(거북선)은 어립선(御立船)을 향하여 쳐들어와 활을 마구 쏘아 우군을 죽였으며, 웅수(熊手)로 우리 배를 끌어당기고 연초호(煙礁壺)를 발사해 우리 배를 불태웠다. 이리하여 적에게 배를 빼앗긴 자도 있었으며 바다에 뛰어든 자도 있었다. 적이 이런 사람들을 창으로 찌르고 긴 칼로 쳐 죽이고 활을 쏘아 우군 전사자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라는 일본 문헌에 전해져 오는 사천해전 상황이다. 어립선이란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기함을 말하며, 웅수란 자루가 긴 낫, 연초호란 폭탄 비격진천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함의 피해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다른 배의 사정은 볼 것도 없는 일이다. 거북선은 적진에 돌진해 부딪쳐 깨트리는 돌격전함이었다. 조총 위주의 단병접전((單兵接戰)을 주 전술로 삼는 왜 수군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좌우 양현에 열둘, 이물(선수)에 둘, 고물(선미)에 하나씩 화포구를 두어 포나 활을 쏠 때만 창을 열고, 볼일이 끝나면 닫아버렸다. 사격 목표를 찾을 수 없는 적선의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두껍고 단단한 선재를 사용해 웬만한 포화에도 끄떡없었다. 이라는 일본 문헌에는 “적의 배 가운데 전체를 철판으로 싼 것이 있는데, 우리 대포가 그 배를 부술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무서운 용머리와 좌우 양현에서 불을 뿜고, 지붕이 쇠 송곳으로 된 철갑선”이라고 표현되었을 만큼 거북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 거북선을 출동시켜 시마즈 군을 깨트린 사천해전 후 임금에게 보고한 장계 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의 성능을 이렇게 자랑했다. “신은 섬 오랑캐 왜놈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았습니다. 등판에는 쇠못을 박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왜적선이 수백 척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로 쳐들어가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왔는데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전선 가운데로 돌진시켜 천(天)·지(地)·현(玄)·황자(黃字) 등 여러 총통을 쏘았습니다.”
수백 척의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해 대오를 흩트리며 좌충우돌 적선을 깨트리고 불 지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 거북선은 용머리가 두 개나 달린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위의 것은 화포구로 쓰였고, 아래 것은 적선을 당파(撞破)하는 데 쓰였다. 크고 단단한 용머리로 적선을 들이받아 옆구리에 구멍을 내는 용도였다.
이순신은 마치 전쟁이 터질 날을 알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때맞추어 거북선을 건조하고 포격실험을 마친 것이 왜적 침입 하루 전날이었다. 에는 거북선 건조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임진년(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는 게 처음이었다. 4월 11일 일기에는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도의 목록을 순찰사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이날 비로소 돛베를 만들었다”라고 썼다. 거북선 제작에 상부의 지원이 일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라고 씌어 있었고, 4월 12일에는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 쏘는 것을 순찰사 군관이 살펴보고 갔다”라고 썼다. 상급관 인사의 임석으로 보아 공식 사격훈련으로 볼 수 있다.
거북선 제작 총책은 조선기술이 뛰어난 군관 나대용(羅大用)이었다. 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전선(戰船)부터 살펴본 이순신은 크게 낙담했다. 장부에는 분명 30여 척의 전선이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실전에 쓸 수 있는 것은 5척을 넘지 않았다. 180년 전 태종 때 있었다는 귀선(龜船) 만들기로 작심한 계기일 것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심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좌수영 산하에는 선소(船所)가 셋 있었다. 좌수영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 이 세 곳에서 각각 한 척씩 거북선을 만들기로 하고, 그 책임을 나 군관에게 맡긴 것이다. 물론 판옥선도 같이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년 5월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고 24척을 거느리고 출전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목질이 단단하고 두꺼운 목재를 사용해 돌격선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거북선의 바닥재는 소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졸참나무, 느티나무 등 목질이 단단한 목재였다. 충격에 강한 설계와 나무못을 쓴 것도 배를 한층 견고하게 했다.
전문가들의 비교연구에 따르면 목재의 두께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우리 판옥선 두께는 4치[寸]였다. 왜선 아타케부네(安宅船·3치)보다 한 치가 두꺼웠다. 골조를 요철(凹凸)로 짜 맞춘 목공기술도 한몫했다. 배 바닥이 회전에 용이한 평저선이어서 첨저선인 왜선에 비해 속도는 다소 느려도 방향 회전이 빨랐다. 왜선들은 속도가 빠른 대신 배를 돌리려면 회전 반경이 커 행동이 둔했다. 돛의 성능도 달랐다. 외돛배인 왜선은 순풍에만 쓸 수 있었지만, 거북선과 판옥선은 쌍돛배여서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 문헌 는 “조선 사람의 해전은 육전과는 크게 다르다. 또 배가 크고 빠를 뿐 아니라 누각과 뱃전까지도 튼튼하고 두꺼워 우리 배가 부딪치면 모두 부서진다”라고 기록했다. 는 “조선수군의 배가 쇠로 포장되어 포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들이 무서워한 또 다른 무기는 조선의 화포였다. 특히 구경이 13cm나 되는 천자총통이 발사하는 대장군전, 대완구가 쏟아내는 비격진천뢰의 살상력은 엄청났다. 직경이 30cm 가까운 비격진천뢰는 철구 안에 화약과 쇠 파편이 들어 있어, 왜선 갑판에 떨어져 폭발하면 수많은 적병이 죽어나갔다. 조선 판옥선과 거북선은 그런 총통과 천뢰를 사방에서 발사해 적선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선소 유적은 순천부 선소와 방답진 선소뿐이다. 본영 선소는 좌수영 본영이었던 진남관(鎭南館) 바로 아래 있었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이순신 광장’이 되었다. 순천부 선소는 여수시청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거리의 해안, 가막만이 북쪽으로 깊숙이 파고든 만(灣)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는 여수가 순천부 관할이어서 그렇게 불렸는데,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어서 지금도 ‘선소마을’로 통한다. 방답진 선소는 돌산도 군내리 방답진 터에 아직 유허가 있다.
선소마을은 참으로 오묘한 지리를 가진 곳이었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와 택시를 타고 10여 분 달렸을 뿐인데 운전기사가 “다 왔소” 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선소가 있으랴 했더니, 바로 길 건너 숲속에 선소 유적이 숨어 있었다. 바다가 마치 호수 같았다.
사람이 가랑이를 벌리고 선 형상의 여수반도 한가운데, 국소에 해당하는 입지가 참으로 절묘했다. 남쪽으로 돌산도, 백야도, 개도 같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어 가막만 전체가 호수 같은 바다였다. 국소에서 또 하나의 작은 반도(망미산 돌출부)가 뻗어나가 선소 바다를 완전히 가려준다. 바다에서 보면 뭍이고, 뭍에서 보면 호수 같은 바다를 끼고 있다.
해발 100m도 채 못 되는 망미산은 이순신이 기마병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장군은 산 정상에 동백말채를 꽂아두고 “이 말채가 살아나면 내 영혼도 살고, 죽으면 내 영혼도 죽은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지금도 살아 있으니 민족의 태양이 된 까닭을 알겠다.
선소마을 방문자를 처음 맞아준 것은 거북선을 만들던 굴강(掘江)이었다. 오목한 항아리 안처럼, 둘레에 석축을 쌓고 입구만 열어놓은 장난감 같은 항구 수면이 아침 해에 반짝이고 있었다. 강당 서너 개 넓이로 보아 거북선과 판옥선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규모로 보였다.
굴강 왼편으로는 근래에 복원했다는 대장간, 그 옆으로 세검정과 군기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장간은 선재를 자르고 깎고 다듬는 연장을 만들던 곳이고, 세검정은 선소 지휘부, 군기고는 무기창고로 쓰였다 한다. 특이한 것은 세검정과 군기고의 기둥과 서까래, 마루, 문짝 등이 모두 검정색이라는 사실이다. 선소 위치가 쉽게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세검정 앞 해변에는 계선주라는 돌기둥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배를 매던 용도라고도 하고, 벅수 역할까지 겸하던 것이라고도 한다. 돌장승 벅수는 선소마을 입구 도로변과 마을 안길에도 여러 기가 서 있다.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적과 잡귀의 근접을 퇴치하려는 민간신앙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여수는 이순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출셋길에 들어 국난의 전쟁을 맞은 곳이고, 가장 오래 머문 곳이었다. 소문난 효자였던 그가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 가까이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애쓴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여수 버스터미널에서 진남관이 있는 도심부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이름이 ‘좌수영로’다.
국보 304호인 진남관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성종 시대 수군절도영을 둔 이래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400년 넘게 여수는 남해 방비의 중심지였다. 그 본영이 진남관이다. 1599년에 지어진 좌수영 객사 건물로, 현존 관아 건물로는 가장 크다. 이순신 시대에는 그 아래 망해루가 좌수영 본영이었다.
진남관 길 건너에는 고소대(姑蘇臺)가 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은 좌수사의 장대로도 쓰였다는데, 지금은 유명한 타루비(墮淚碑)와 좌수영대첩비가 있는 곳이다, 보물 1288호로 지정된 타루비는 글자 그대로 눈물을 흘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좌수영 수졸들이 장군의 붉은 마음을 잊지 말자고 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그 뜻이 비문에 선명하다. “영하(營下)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 공을 위하여 짧은 비석 하나를 세우고 타루(墮淚)라 이름 하나니….” 졸병들이 사령관의 충절을 기려 불망비를 세운 일이 우리 역사에 있었던가!
타루비 옆에는 보물 571호로 유명한 좌수영대첩비가 서 있다. 광해군 시대에 세워진 이 비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로 이름났다. 높이 3.6m에 폭이 1.3m다.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써서 더욱 돋보였던 이 비석과 타루비는 명량대첩비와 함께 1942년 철거되어 행방을 모르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파묻힌 것이 발견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남관 뒷산은 종고산(鍾鼓山)이다. 여러 전설을 품은 여수의 진산인데, 특히 이순신과 관련한 전설로 유명하다. 무음산이란 별명을 가졌던 이 산은 난리 때 3일간 울었다 한다. 그 까닭은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알린 낭보였다는 설도 있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비보를 전한 울음이었다고도 한다.
진남관에서 200여 m 바다 쪽으로 내려서면 바로 이순신 광장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북채를 든 거대한 동상에 ‘민족의 태양’이라는 후세인의 헌사가 적혀 있다. 로터리 건너 바다에 면한 실물대의 거북선 모형은 방문자들의 촬영 욕구를 자극한다.
광장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사당으로 유명한 충민사(忠愍祠) 입구다. 1601년 이항복이 선조에게 품신해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세운 최초의 이순신 사당이다. 그의 부장 이억기(李億祺), 안홍국(安弘國)까지 함께 모셔져 있다. 장군이 가장 신뢰했던 이억기는 장군이 영어의 몸이 된 사이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했다. 선조 어가를 호종해 의주까지 갔던 안홍국 역시 안골포 해전에서 산화한 충신이다.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1995), 매염방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 남긴 선물과 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허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는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허안화의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등을 받았고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만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 체하는 작품도 아니다. , , 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 역할을 맡아도 빠져들 만큼 늙은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수리기사로 오인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으로 나오는 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할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는 시리즈와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 (류더화 분)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예더셴 분)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와의 이심전심.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춰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 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제자리에 있는 가스레인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에서 기인했던 것일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는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로저에게 보여준다.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 등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조건 베풀기만 했던 타오지에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위였다. 즉 로저에게 타오지에라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줘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줬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서 살 집은 물론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해 그녀에게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 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분).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뒤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요양병원 스케치는 에서 여주인공 손 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는 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와 묘사의 연관이 많아 보이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생인 예더센은 (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웠고 각종 연기상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1992년 공리가 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예더한은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이야깃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 시리즈의 서극 감독, , 등의 제작자 시남생, ,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인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은평구 서울혁신센터에 자리한 ‘금자동이’라는 장난감 재활용 기업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금자동이라는 단어가 참 정겨운데 금자동이는 어린아이가 금처럼 귀하고 보배롭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필자에게도 금자동이 손녀, 손자가 있어 이곳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관심이 갔다. 버려지는 장난감과 폐목재를 활용해 창의 예술교육과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기업 금자동이입구에서부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폐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설치물이 많았다.
장난감은 재활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고무와 플라스틱, 전자기기판 등이 복합되어 있어 분해하는 비용이 원료비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는데 장난감이 버려지면 재활용하기도 어렵고, 없앨 수밖에 없는 골칫덩이 폐기물이 된다.
2013년 자원순환사회연대 통계에 따르면 선별장에 반입되는 플라스틱의 3.8%가 완구오락용품으로 약 3만 톤 정도였다고 한다.
안내해 주신 대표는 올해 장난감 학교의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장난감 재활용 문화를 확산시킬 계획이며 더불어 금자동이의 장난감과 '쓸모'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해주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장난감 및 유아용품을 처리할 장난감 재활용 센터를 기반으로 한 장난감단지(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지자체의 남는 건물이나 부지를 활용해 장난감 재활용 단지를 만들고 체계적인 수거시스템을 확립해, 단지로 수거한 후 판매와 교육, 전시 등의 카테고리로 나눠 테마파크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장난감단지가 조성된다면 전 세계에서 장난감 재활용 시스템을 보러 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고, 장난감 재활용 문화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그냥 버리면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가 큰 문제이다. 이곳에선 안 쓰는 장난감을 가져오면 사기도 하고 기부를 받기도 한다. 기부받은 장난감을 수리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도 하고 시리아 난민학교나 다람살라 티베트 마을, 인도 등 어려운 나라에 기증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손 본 많은 장난감이 주인을 기다리듯 진열되어 있었다. 장난감 앞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설레고 순수해진다. 많은 사람이 대부분 장난감과의 놀이과정을 통해 자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에선 버려진 장난감을 분해해 놓고 아이들이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체험도 할 수 있었는데, 장난감 학교 ‘쓸모’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버려진 장난감 부속으로 자신들만의 새 장난감을 만들어 보는 체험 공간이 있었다. 버려진 장난감이 새로운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질 때 성취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으니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 체험단도 장난감 부속으로 작은 소품을 만들어보았다. 필자는 접착제를 이용해 이것저것 붙여 핸드폰 세워놓는 소품을 만들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쓸모없어진 장난감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말고 이곳에 기부하거나 판매하면 자원절약과 환경오염도 막는 일에 조금의 보탬이 될 것이다.
시간을 내어 손자 손녀 손을 잡고 이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버려진 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조형물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장난감도 골라볼 수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다. ‘금자동이’는 장난감이 작품이 되어서 멋지게 전시관을 채우고 중고 장난감도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니 환경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멋진 사회적 기업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