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시대도 변하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진 베테랑.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직업들을 꼽아봤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테랑들을 만나보자.
활동사진 변사 1910년대에는 영화를 ‘활동사진’이라고 불렀다. 1903년쯤부터 대중에게 공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상설관도 생겼다. 상설관에는 변사가 있었다. 외국 영화인 데다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변사가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장면을 해설하는 역할을 맡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설명을 담당했지만, 구수한 입담으로 감정을 담아 해설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변사의 입담에 따라 활동사진의 재미가 결정될 만큼 큰 역할을 했지만,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버스 안내양 버스 안내양은 1920년대 후반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여차장이라 불리며 양장 차림의 유니폼을 입고 매표를 했던 것에서 시작한다. 48명의 버스 안내양은 광복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남차장이 등장한다. 하지만 서비스가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1961년 버스 안내양 제도가 다시 도입되며 서울 시내 600여 대의 시내버스 차장은 여자로 바뀌었다. 초반과는 달리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온 여성들이 주로 안내양을 했다. 버스에 사람들을 밀어 넣고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매달려 가곤 했다고. 1984년부터 버스에서 하차 지점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오고 정차하고 싶은 역이 가까워지면 벨을 누르는 정차 벨이 도입되면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도 사라졌다.
전차 운전사 서울에 전차가 등장하면서 전차 운전사라는 직업이 생겼다. 전차가 호황을 누린 1930년대에는 전차의 하루 이용 승객이 48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자동차와 버스가 늘어나면서 속도가 느린 전차가 교통체증의 원인이 됐다. 결국 1968년에 전차를 철거하면서 전차 운전사, 전차 수리공 등 관련 직업이 사라졌다.
전화 교환원 1970년대에는 수동식 전화기를 주로 썼다.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면 교환원에게 연결됐다. 전화번호를 말하면 교환원이 상대 가입자의 회선에 플러그를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전화기를 두려고 가입신청을 해도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1960년 전화 가입자는 9만여 명이었다고. 이제는 집마다 전화기를 두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씩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다. 통신망이 깔리고 자동으로 전화를 연결할 수 있게 되면서 전화 교환원은 사라졌다.
영화 간판 제작원 영화가 개봉하면 멋진 포스터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라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1970~80년대에는 영화 간판을 직접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다. 극장 간판에 상영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직접 그리는 것이다. 이후 1990년대 프린트 기술이 발달하면서 손 그림 대신 플렉스 간판으로 대체됐고, 이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활자주조공, 문선공, 식자공 지금은 클릭 한 번이면 프린터에서 인쇄된 종이가 나오지만, 과거에는 잉크를 묻힐 활자와 판이 필요했다. 특히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원고지에 작성한 취재 원고를 보며 활자를 찾는 문선공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선은 원고에만 둔 채 활자를 뽑아내는 손놀림으로 인쇄 마감을 맞추는 사람이었기 때문. 직업훈련소에서는 활자조판수 훈련을 따로 하기도 했다. 이후 컴퓨터가 개발되면서 활자를 주조하는 활자주조공, 활자를 골라내는 문선공, 원고를 보며 판을 짜는 식자공 등의 역할을 대체하게 됐다.
정사원 지금은 기계에 돈을 넣으면 ‘촤라라락’ 소리를 내며 몇 장인지 세어주지만, 과거에는 사람이 일일이 세어야 했다. 1950년대 은행에는 돈을 세는 사람 ‘정사원’이 있었다. 지폐를 종류별로 나누고, 유통할 수 없는 손상된 지폐도 골라냈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 수천 명의 정사원이 있었지만 지폐 계수기로 대체됐다. 숙련된 정사원의 경우 1시간에 6000장의 지폐를 셀 수 있었다고.
근래 들어 사라지는 말이 더러 있다. ‘환갑잔치’라는 말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없어진 전화교환원, 버스안내원, 물장수, 은행에서 돈을 세던 정사원, 굴뚝 청소부 등의 직업 이름처럼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최근에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조금씩 쌓으면 나중에 큰 덩어리가 된다. 돈이나 재산을 불리는 지혜로 삼았던 말이다. 적은 금액의 돈을 귀중히 여겼다. 비슷한 말로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도 있다.
필자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아파트를 살 때 주택채권을 사야 했고 대체로 채권은 보관하지 않고 바로 되팔아 아파트를 사는데 보탰다. 필자 역시 채권을 팔았다. 채권을 사려던 할머니 한 분은 한 주당 5백 원을 더 주겠다 했다. 5백 원 정도에 시큰둥했는데 그 할머니는 “5백 원이면 얼마나 큰 데”라 하였다. 재산을 많이 키운 할머니였다. 적은 돈을 귀중하게 여기는 모습이다. 주위엔 큰돈을 번 사람들이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부유하게 살기도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도 많다. 그들은 적은 금액의 돈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힘들여 돈을 모았기에 신중하게 사용한다. 남다른 고생을 하면서 이룬 재산이어서 헛되게 쓰지 않는다. 공돈처럼 쉽게 얻은 재물은 그 쓰임새도 헤퍼져 오래가지 않는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대부분 사람의 생활이 결국 더 궁핍해지는 것을 본다. 같은 이유다.
손주에게 쥐여주던 돈도 1,000원 한 장이면 환영받았으나 지금은 최저 5,000원에서 1만 원짜리를 주어야 한다. 특히 아파트 가격이 높아져 신입 직장인이 월급을 모아서는 아파트 구매를 엄두 내지 못한다. 그런 환경에 놓이다 보니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환경이 됐다. 이런 현상이 또 다른 삶의 피폐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보면 물가 오름의 요인으로 작용해 인건비를 끌어 올렸지 싶다. 일확천금, 한탕주의를 부추겼다. 정상적 방법보다는 비정상적 방법을 동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 공직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쟁점으로 반복되는 일도 같다. 사회지도층이라 자처하는 그들도 태연하게 위장전입, 매매가격 낮춰 적기(속칭 ‘다운계약서’ 작성), 세금 안 내기, 논문 표절 등을 예사롭게 생각했다. 사회 전반에서 또 필자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같은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부동산 투자로 웃돈을 챙기기 위해 위장전입은 물론이고 위장 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밝혀진 건수도 엄청나다. 반면에 자녀의 대학등록금 마련이 되지 않아 모녀가 동반자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이다. 기업체 회장뿐만 아니라 대학재단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뉴스거리로 불거져 나오는 “갑질 논란”의 바탕에도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려는 생활 태도가 다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아주 작은 일지만, 사회를 정상으로 돌리는 소중한 대책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