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를 꺼내보는 페이지입니다. 가수 남궁옥분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넘겨보는 마당입니다. 글 사진 남궁옥분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이 저를 사과 궤짝 위에 올려놓고 노래를 시키면 곧잘 불러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증언!
시작은 미미하고 초라했으나 유년 시절의 그런 일들이 밑거름이 되었던지, 데뷔 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만나 방송국과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했지요. 하루에 12군데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달리던 1981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초’라는 기록들도 세우며 운 좋게 아직 현역으로 남아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40년의 세월 속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웠던 기억 몇 가지를 꺼내봅니다.
1983년 봄! ‘귀국서약서’를 비롯한 수십 장의 서류를 작성해 통과해야만 출국이 가능하던 시절,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 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한항공이 주최하는 미주 공연이었기에 생애 첫 국제선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였습니다. 지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수준의 식사와 서비스는 지금 생각해도 황홀합니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에 처음 밟아보는 미국 땅은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기쁨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설렘 가득했습니다.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던 시절이라, 쌀쌀한 초봄에 서울을 떠나 날짜변경선을 경험하고 만난 사계절 여름인 하와이는 가히 충격적이었지요.
당시 교포들도 고국의 소식조차 여러 날을 두고 시간차로 접하던 미국에서 고국의 많은 가수들을 만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한민국 당대 최고의 연예인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워싱턴DC의 ‘케네디센터’,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을 순회 공연하는 일정이었지요. 첫 도착지 하와이에서 동부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수 최초의 대형 공연장에서의 공연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답니다.
이미자, 김상국, 조영남, 하춘화, 바니걸스, 국악인 조상현, 이춘희 등 대중가요와 국악계를 빛낸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밴드까지 이끌고 미국 최고의 공연장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현지 교민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할 정도였으니, 그때 막내였던 저로서도 꿈에 그리던 큰 무대에서의 공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당시 국내엔 큰 공연장이 없었던지라 무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참을 달려야 도달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명성만큼이나 저를 주눅 들게 했는데, 훗날 다시 서보니 그때보다는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케네디센터’는 주변의 모든 시설들까지 대리석으로 완성돼 눈에 띄는 아무 곳에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그냥 작품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는 자부심은 이 글을 쓰면서 되살려본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뿌듯한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감동도 ‘카네기홀’을 넘어설 수는 없을 듯합니다.
1989년인가? ‘조영남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함께하자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던 일이 제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영광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메인홀 최초 공연자는 조영남이 아닌 패티김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메인홀 공연자는 패티김, 조영남, 남궁옥분뿐이었습니다.
콘서트홀이 아닌 메인홀!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며 서고 싶어 하는 가장 영광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전 충분히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의 예술인 의전이 최악이던 시절, 미니 칵테일바까지 있는 하얀 리무진이 뉴욕 시내를 돌아 카네기홀에 내려놓을 땐 이곳을 다녀간 예술가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영혼들이 지켜준다는 전설 덕분인지, 리허설 때의 긴장감은 아랑곳없이 정말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주 편히 노래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국 스태프들이 공연 중 카메라 촬영도 불허하는 바람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점이 정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에 별로 관심 없던 조영남 선배의 성향 때문에 결국 허접한 사진 두 장만이 카네기홀의 그 영광스런 순간을 이야기해주네요. “이게 정말 카네기홀이야?”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범한 사진이기에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많은 예술 거장들이 실황음반을 남기며 사랑했던 역사적인 문화 현장,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한 귀퉁이를 지키는 남궁옥분에게도 그곳에 설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사진을 찾다가 카네기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옷에 붙이는 백스테이지 스티커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렇듯 살아가면서 ‘최고’, ‘최초’를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가수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참 많은 특혜를 누리고 참 많은 곳에서 대우를 받은 지난 시절이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엔 호주로 가봅니다.
1987년 호주 공연은 연예인 공식 초청 1호였고, 우리 연예인단은 모두 이민 비자를 받아 입국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민을 꿈꾸던 그 시절! 그곳에 그냥 눌러앉아도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도 외국을 동경했다면 합법적인 호주 이민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정말 모든 게 지금에 비해 허술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입니다.
호주에서의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 하나는, 교민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어마어마한 선물들 때문에 공연단 일행 모두가 당시 100달러 남짓 추가 운임을 지불해야 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났지요.
공연 마지막에는 언제나 태극기를 흔들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 무대를 향해 눈물을 훔치며 한없이 손을 저어주시는 모습은 어디서든 똑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년 시절을 함께 지켜준 사람들! 평범하게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고 가끔 풍금 치며 노래하던 남궁옥분이 이렇게 최고의 경험을 하며 최초의 역사를 간직하고 살 거라는 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저도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그렇게 준비 없이 등 떠밀려 뛰어들었던 가요계에서 이렇듯 좋은 추억이 많다는 건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언제나 제 삶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날 것이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퇴직하고 나서도 유유자적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늙어야 한다.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내가 없는 제2인생이 싫어서 큰마음 먹고 평생 생각하지 못한 길을 택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 이발사 조상현(68) 씨. 지금 생각해도 이 길을 택하길 참 잘했다.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마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너와나 이용원’. 대부분의 이발소가 7시에서 8시 사이에 문을 연다는데 이곳은 오전 10시에 연다. 게다가 월, 수, 금은 오전 봉사 일정이 있기 때문에 1시에 영업을 시작한다. 너와나 이용원의 주인장인 조상현 씨는 5년 전 40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고심 끝에 이발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올해로 3년째. 분필이 아닌 흰 가운에 가위를 잡은 모습이 이제 제법 잘 어울린다.
“‘너와나’는 ‘우리’를 뜻합니다. 우리보다는 너와나 그렇게 쓰면 어떻겠냐고 친구가 지어준 상호입니다. 정감이 가는 말이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개업 초기에는 손님이 빠져나가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단골이 꽤 된다고 했다.
“이발소 문을 처음 열었을 때 손님이 들어오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고요. ‘저분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노’ 하는 걱정밖에 없었습니다. 6개월 후쯤 보니 그 무렵에 방문했던 손님 중 3분의 2는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내 첫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단골도 생겼고, 내 솜씨가 마음에 차지 않아 오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웃음) 이번 여름휴가를 2박 3일을 생각하고 갔는데 너무 좋아서 하루 더 연장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몇 통씩 오더라고요. 이발소 문 언제 여냐고요. 기다려주는 손님들에게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전원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퇴직 후 바로 이용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은퇴하면 전원생활을 해볼 생각으로 경남 진주시 진성면에 텃밭을 장만하고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마산역에서 진성역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출퇴근했습니다. 진성역에서 내린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몰라요. 시골길을 한 10분쯤 타고 가면 농장이 눈에 보였습니다.”
산행도 하고 약초도 좀 캐고, 고구마에 콩 등 각종 채소를 키웠다. 혼자 밥도 먹고 나름 재미있었다. 진성에서의 전원생활.퇴직 후의 삶으로 꽤 괜찮은 시작이었다.
“텃밭이 300평이었어요. 처음에는 옆집에서 고구마 모종을 받아다가 키우면서 신이 났지요. 그런데 6개월 정도 되니까 짜증이 나는기라!(웃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밭에서 있는 시간이 많으니 도통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나마 말동무하던 이웃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이발소와 관련해 지인들과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실행에 옮기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발사를 노후 일자리로 만나다
우연히 찾게 된 이발소에서 80세가 넘어 보이는 이발사를 만나게 된 것. 벌초하듯 머리카락을 자르고 염색을 대강대강 해주고는 1만 원을 받았다.
“이 양반이 팔십은 돼 보이는데 일을 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그때까지 일할 수 있겠다! 손이 안 떨리면 되고 나이가 들면 값을 싸게 받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용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가족회의를 했어요.”
두 아들은 적극 찬성, 함께 교직생활을 했던 아내는 반대했지만 아들들의 호응 속에 이용학원에 등록했다. 만류한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을 학원 등록 후에나 알게 됐다.
“학원에서 교육 이수만 하면 누구나 이용원 문을 열 수 있는지 알았어요. 알고 보니 국가자격증을 따야 한다더군요. 그래도 명색이 교장 출신인데 기능시험에는 합격을 못해도 자존심상 필기시험에서는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안 떨어지려고 공부 정말 열심히 했어요.(웃음) 필기시험은 한 번에 붙었고 기능시험은 세 번 도전한 끝에 자격증을 땄습니다. 합격하기까지 경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했기에 자격증 취득이 쉽지는 않았다. 2016년 12월에 그 관문을 모두 뚫은 그는 이듬해 3월 개업했다. 하루에 5명에서 6명, 그러다 10명 정도 손님을 받는 날이면 혼자 두발을 깎고 감기느라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봉사와 함께 실력도 쌓다
이용 면허증을 받고 개업 준비를 하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용 봉사였다. 하지만 이때는 실력 배양에 더 신경 쓰면서 봉사 대상을 취사선택했다고 조상현 씨는 고백했다.
“초반에 제 솜씨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봉사를 다녔습니다.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두발을 잘라드리면 좋다 안 좋다 말을 하지 않으시니 실력이 늘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상이군경회, 육군종합정비창,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여기 다시 잘라 달라, 둥글게 좀 해 달라’ 요구를 하시니까 실력이 좀 연마가 됐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서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녀요. 물론 제가 안 간다고 하면 다른 분을 부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봉사를 다닐 생각입니다.”
금년 들어서 줄곧 반대하던 아내가 생각을 조금 바꿔 이용 일을 하는 자신을 인정해줬다고 한다. 큰아들은 처음부터 조상현 씨에게 이발을 맡겼으나 작은아들은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의 이발소 문을 두드렸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는지 직접 봐야 알겠지요. 이제야 둘째가 저를 인정하는 거라고 봅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 도전하기 힘든 직종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발사라는 직업을 낮게 보는 경향도 있었고 말이죠. 이용원을 하고 싶다면 서비스마인드도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성향에 맞아야 해요. 이 나이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 도전하고 실행에 옮기려니 만만치 않더군요.”
조상현 씨가 이용원을 운영하는 이유는 나이 들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일념이 크다. 돈을 벌겠다거나 가족을 부양할 생각보다는 노후 생활을 일과 더불어 즐기며 누리고 싶었다.
명예보다 노후 일자리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저희 부부는 교장으로 있다가 퇴직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아들자식들도 다 안정적으로 직상생활을 하니 도울 일이 없죠. 명예보다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상현 씨는 손님이 오면 더 좋고 손님이 안 와도 좋다고 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여유롭게 글도 쓰고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는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면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낙이다.
“지금은 내가 참 잘했구나. 오늘 어디 가서 놀까 하는 걱정도 없고 말입니다. 그리고 10시에 문을 열고 6시 반이 되면 문을 닫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 위주로 합니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서비스직이기 때문에 손님들과 약속한 시간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제 나름의 영업 방침이죠.”
교직이 있을 때와 다른 점은 걱정거리가 없어진 일상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매번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판단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야 상대가 잘 받아들일지 고민이 많았어요. 늘 걱정의 연속이었죠. 지금 하는 일은 몸이 좀 고단하다는 것 말고는 마음이 정말 편안합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만약에 눈이 나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다행히 두 눈이 정상입니다. 손떨림 없고 눈만 건강하다면 쉬지 않고 일할 생각입니다.(웃음)”
대한한방 골병학회 회장 김산, 수석부회장 조상현 공저의 책이다. 건강 서적은 많이 읽었지만, 뼈에 대해 쓴 책은 전문 서적이 아니고 일반인을 위해 쓴 책으로는 처음이다.
“골병(骨病) 들었다”라는 말은 자주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골병들었다!”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크게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을 동반하는 아주 아픈 병에 ‘골병’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저 참기 힘든 고통에 붙이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방에 골병이라고 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멀쩡한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아픈 데가 없다며 병원을 찾지만 검사를 해봐도 특별한 이상이 없는 경우는 골병이라는 것이다.
모든 병의 시작과 끝은 뼈라고 한다. 더 전문적으로는 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뼈나 뇌 속의 유동 물질 즉, 정(精)의 문제라는 것이다. 정이 채워져야 인간 활동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며 그 속에서 건강과 수명의 함수 관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정이 빨리 소모되면 빨리 늙는 것이고 정을 소모시키면서도 빨리 보충하여 잘 유지하면 노화도 늦출 수 있고 건강하다는 것이다. 정은 뇌 속에 있는 물질적 기초로서 뇌 기능은 물론 온갖 기능을 활발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뼈에도 미세한 구멍으로 피가 흐른다고 한다. 거기 피가 멈춰 있거나 덩어리 형태로 남게 되면 어혈과 담이 되는데 그런 것들이 혈액의 흐름을 방해 한다고 한다. 나쁜 것을 빨리 빼 내고 좋은 것을 채워줘야 정이 보관된다고 한다.
정(精)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힘의 원천인 것 같다. 정력도 정(精)의 일종이다. 정액도 정의 일종이므로 한방에서는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성생활을 너무 지나치게 하다 보면 정이 소진되어 골병이 든다고 한다. 한 번의 성행위 후에도 남성들은 피로를 느끼고 곧바로 잠이 드는데 그것은 그만큼 정력의 소진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양방에서 정액은 곧 바로 채워지는 무진장의 것이고 용불용설처럼 자주 사용해야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 다 일리가 있으므로 적당하지 않고 무리하면 좋을 것은 없을 것 같다.
키가 큰 사람, 백옥같은 피부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대체로 키가 큰 사람은 뼈가 단단하지 못해 부실하다는 것이다. 백옥같은 피부의 사람보다 황옥이 더 좋다고 한다. 병원에 오래 누워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피부가 흰 사람들이고 황옥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건강해서 병원 갈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이 많은 식품은 무엇일까? 마늘 양파 솔잎 등인데 이들은 유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유황이 뼈에 정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평소 냄새 나고 속을 따갑게 한다고 해서 마늘을 피했었는데 생마늘이 아니더라도 염두에 두고 먹어둘 일이다. 소금도 포함한다. 소금이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은 소금의 나트륨 때문인데 조미료 소금이 그렇다는 얘기이지 천연소금에는 나트륨이 그리 많지 않고 뼈의 영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분이라고 한다.
유황온천도 있고 시중에 ‘유황오리’를 파는 음식점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유황의 효능을 몰랐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황의 중요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요즘 오리는 대량 사육되어 유황을 제대로 섭취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정을 보충해주는 방법으로는 잠도 있다. 잠을 자는 동안 정이 보충되는데 잠을 잘 못 잔다면 정을 보충할 수도 없고 정을 오히려 소모시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수면 부족은 여러 가지로 건강에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강신영 동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