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는 애잔해도 때로 설렘을 던진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선 상상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扮)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울림이 남는 종소리처럼 여운이 길다. 때론 소리나 냄새로 또는 순간의 풍경으로 기억하는 여행이 있다. 군산은 영화 한 편만으로도 가능하다.
기억 속의 나만의 풍경이나 대사 몇 줄로도 군산을 떠올리게 하는 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 사진관은 군산 월명동의 어느 골목에 찰떡처럼 잘 어울리게 자리 잡았다. 그곳이 영화 속 정원과 다림(심은하 扮)이 정말 일상생활을 했던 곳인 양 착각하게 한다.
1998년의 영화였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제는 고전 명작이라 할 때가 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감정선을 조용히 담아낸 세련됨이 보는 이에겐 그저 잔잔하다. 어느 TV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어쩜 20년 전인데도 촌스러움이 1도 없어요” 란 말을 했던 이가 있었다. 드라마틱했을 사랑과 죽음을 다루었음에도 아릿하지만 도무지 신파스럽지 않다. 군산엘 가면 나만의 보폭으로 나만의 영화적 감성으로 그 골목을 산책하듯 정원과 다림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일 수 있다.
초원사진관은 여전히 소박하다. 영화 속에서도 수수해 보이지만 그 모습이 푸근하고 친근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진은 기획 당시 세트 촬영을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가 군산의 한 카페에 쉬러 들어갔다가 창 밖으로 내려다본 곳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것이다. 주인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개조하여 초원사진관이 되었고 영화 대부분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다시 영화 배경 속 모습으로 복원하는 탁월한 선택 덕분에 영화로운 군산을 찾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IMG::CENTER]
영화 속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환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다. 일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듯 주춤주춤 다가가게 된다. 스튜디오에는 8월의 더위에 지친 심은하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던 선풍기, 문틈으로 끼우던 편지, 영화 속의 스틸컷이 스토리 섹션별로 벽면에 그대로 붙어있고 심은하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 심은하처럼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잇는다.
사진관 주변으로 정원이 타던 스쿠터와 주차요원이던 다림의 근무용 소형차 티코, 심은하가 한석규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통과했던 해망굴,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을 하곤 했다.” 망연히 앉아 독백하던 초등학교 운동장, 삶이 다해 가는 정원이 창문 넘어 어렴풋이 다림을 바라보는 텅 빈 감성의 섬세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이 초원사진관 주변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자취를 따라 걸어볼 만하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이후 군산이 배경이 된 영화나 드라마가 늘어났다.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 말죽거리 잔혹사, 마더, 화려한 휴가, 마파도, 변호인, 남자가 사랑할 때. 시네마 투어를 떠나도 좋을 군산이다.
군산을 걷다
볼거리가 대부분 가까운 근처에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는 여행이 가능한 군산이다. SNS 명소인 경암동 철길마을은 조금 멀리 있으니 택시 이용이 좋겠다.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오감 만족의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지방 도시에서 보내는 하루는 여유롭다.
초원사진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 강점기에 유명한 포목상이던 일본인 히로쓰가 살던 목조 주택이다. 당시 호남지역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여서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빨간 담장 안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단정하다. 일본식 고급 주택 양식의 전통 가옥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와 같은 영화가 촬영되었다. 쭉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시는 분이 뒤편 뜰의 복(福)이라는 글자를 알려준다. 안으로 들고나는 뜰 바닥에 복(福) 자가 쓰였는데 복이라는 글자를 밟고 들어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신흥동 일본식 주택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있다. 그리고 부근에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금융시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금고 속 조선은행 이야기를 읽으며 분노가 치민다. 수탈의 잔혹사가 전해진다.
군산 근대건축관,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내항의 일명 뜬 다리 부잔교, 다다미룸 미즈 커피, 장미갤러리 근대미술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왼쪽으로 구 군산세관에서 거두어들이던 세금은 또 어땠을까. 지금 보아도 우리 민족의 고통이 피부로 느껴지는데 그 시절엔 얼마나 치를 떨었을지 짐작해 본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1908년에 지어진 옛 군산세관 창고가 정담(情談)이라는 인문학 창고로 재탄생되었다. 꽉 찬 서고의 든든함과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놀이문화가 명물이 된 오래된 창고에서 기다린다. 정담 앞의 잔디밭과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곳에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다는 커피 한잔의 휴식을 누려볼 일.
군산은 거리 곳곳의 표지판이 온통 근대 역사와 관련된 흔적과 문화들로 새겨진 도시다. 마침 이런 발자취를 따라 맘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가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는 걷기에 따라 약 2~3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니다 보면 스탬프 투어를 코스대로 관람하는 여행자들을 자주 본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스탬프 도장을 찍어가며 생기발랄한 촬영을 하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풋풋하다. 혹시 도보로만 다니기에 심심하다면 군산시에서 마련한 공용자전거 대여가 있다. 바람을 맞으며 달려보는 군산 거리도 즐거운 일이다.
이 밖에도 볼거리는 지천이지만 군산 여행도 식후경이다. 단팥빵 사러 이성당 빵집을 들러야 하고 짬뽕도 먹어야 한다. 탁류 길의 군산 짬뽕 특화 거리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인 빈해원이 있다. 실내는 흡사 홍콩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다. 요즘 멋지게 꾸며놓은 ‘신상’ 명소와 달리 오래된 집이 주는 깊이는 확실히 다르다. 이 또한 근대문화 거리 근처에 있으니 금방 찾아갈 수 있다.
귀갓길엔 금강 변에 정박한 배의 모양을 한 채만식 문학관에 들러볼 일. 풍자적 글쓰기로 근대문학을 일군 탁류(濁流)의 채만식 문학관은 작가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 코너에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나열되어 있고 '풍자적 작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료도 볼 수 있었다. 친일 활동에 참여한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철저히 반성하는 자의식은 의미 있다. 금강 들판이 내다보이는 문학관 광장을 나와 금강 갑문을 지나며 영화로운 군산 여행의 마무리를 한다.
군산 당일 여행
자동차: 서울 시준 약 두 시간 반 내외
기차: 군산역이 외곽에 있으므로 기차를 탈 경우 KTX 익산역 하차 후 군산행 시외버스가 용이함. 약 두 시간
강남고속터미널: 군산 약 2시간 30분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2길 12-1 초원사진관
최근 대한민국 가요계는 그야말로 ‘트로트가 대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년 주류에서 벗어나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젊은 세대도 대폭 늘었다. 이러한 열풍 속, 트로트의 지난 100년을 더듬어보고, 앞으로의 100년을 그리는 이가 있다. 바로 가수 주현미다. 올해로 데뷔 35년 차, 그녀는 현재의 명성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트의 명맥을 다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일환으로 일궈낸 첫 에세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의 저자로 대중 앞에 선 주현미를 만나봤다.
“트로트 붐의 과실만을 노리며 몰려드는 사람들과 달리,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조용히 묵묵하게 해내고 있는 가수.” ‘추억으로 가는 당신’ 서두 추천사에서 김영식 KBS 가요무대 PD가 쓴 표현이다. 그의 말대로 주현미는 눈앞의 이익이 아닌, 사명감을 안고 이번 책을 엮었다.
“책이 나오니 기분이 참 묘해요. 첫 음반이 나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많이 설레고 신기하네요.(웃음) 그런데 에세이를 냈다고 하니 흔히 가수로서 제 삶에 대해 썼으리라 생각하더군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닌데 말이죠. 개인사보다는 우리가 사랑했던 가요들의 역사에 대해 담고자 했어요. 유행가는 그 시대의 상황과 서민들의 애환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죠. 그 뒷이야기를 알면 노래에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물론 곡마다 얽힌 제 경험과 추억도 곁들였지만, 그것이 주는 아니었죠.”
이렇게 책이 나오기까지는 2018년부터 운영해온 유튜브 채널 ‘주현미TV’가 밑거름이 됐다. 사실 ‘주현미TV’가 탄생하게 된 배경 역시 책 출간 계기와 다르지 않았다. 대중을 비롯한 가요계 후배들이 노랫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부르길 바라는 마음, 또 시대를 거치며 변형된 가요의 원곡들을 복원해 자료로 남기고자 하는 뜻이 컸다.
“가령 ‘사의 찬미’를 찾아서 들어보면, 수많은 가수가 불렀지만 윤심덕의 원곡을 그대로 따라 부른 이는 없어요. 무엇이 원곡인지, 어디가 어떻게 바뀐 건지 알기 어려워졌죠. 문제는 대부분 우리 가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불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정리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미래 세대가 원형을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너무나 힘들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그 중간 역할을 해야겠다 싶었죠. 재작년부터 저희 밴드마스터인 이반석 음악감독의 도움으로 유튜브를 통해 매주 한 곡씩 옛 노래를 기록해나가고 있어요.”
취미까지 되어버린 트로트 사랑
현재 ‘주현미TV’가 선보인 곡은 130여 곡. 그중 50곡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책에 담겼다. 책에는 주현미의 목소리로 녹음한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곡마다 QR코드가 첨부됐다. 애당초 작업을 결심하고 추려낸 옛 노래는 1000여 곡에 달했단다. 목표량을 채우려면 앞으로 근 10년은 바라봐야 하는 오랜 작업이지만, 이만큼 해온 것도 다행이라며 뿌듯해하는 그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한 곡에 5분 남짓한 영상이지만 이를 위한 노력은 시공을 넘나들고 있다.
“대부분의 자료가 ‘~라고 전해진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식으로 돼 있고, 서로 다른 내용인 경우가 많아 정확한 근거를 파악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기록물로 남기는 자료라 팩트 체크를 하는 데 가장 공을 들이고 있죠. 수십 년 전 이야기부터 책이나 음반 등 온갖 자료를 총동원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과거 ‘SP’라 했던 돌판 음반을 갖고 계신 일본 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게 정리한 곡은 제 스타일로 부르지 않고 최대한 담백하고 깔끔하게 불러 원곡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죠.”
얼마 전 10만 구독자(실버버튼)를 돌파한 ‘주현미TV’. 혹자는 수익이나 홍보 목적으로 개설된 소속사 유튜브 채널이라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현미TV’는 현재 그녀의 사비를 통해 제작할뿐더러, 오히려 수익은 마이너스나 다름없다고. 혹여 영상이 인기를 끌더라도 저작권이 있는 곡들이기에 이윤으로 이어지긴 어려운 구조란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건 트로트를 향한 진심, 그리고 후배와 팬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힘든 작업인 줄 몰랐기 때문에 겁 없이 시작했던 것 같아요.(웃음) 물론 힘들고 수익이 안 난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술도 안 마시고, 특별히 사치도 안 하니까, 이걸 내 용돈으로 하는 취미라 여기려고요. 또 35년간 팬들 사랑 덕분에 행복했고 돈도 벌 수 있었는데, 이 일이 그에 보답하는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결코 가벼운 무대와 노래는 없다
다른 세대보다 특히 중장년층이라면 이번 책을 통해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주현미는 책에서 “옛 노래가 많은 공감을 얻는 것은 그 시절을 직접 겪었거나 그 아픔을 간직한 채 노래를 부르시던 우리 부모님이 기억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녀에게도 그런 옛 노래가 있는지 묻자 최희준의 ‘하숙생’이라 답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줄곧 하숙생을 흥얼거리셨는데, 그때는 그 가사가 무슨 얘긴가 했어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지금 와서 불러보니 참 위안이 되고 삶의 내공이 느껴지는 가사더군요.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이 노래를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도 지금의 내가 느끼는 허무함과 슬픔을 경험하셨을까 싶었죠. 시간을 뛰어넘어 노래가 이어준 감정 덕분에 그 시절의 아버지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어요.”
아마 이러한 감정 또한 나이를 먹고 삶이 숙성되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산물일 테다. 어느덧 예순, 그녀는 현재의 시점을 자신의 노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빗대 표현했다. 그리고 인생의 봄이었던 시절에 불렀던 ‘비 내리는 영동교’, ‘짝사랑’ 등도 인생이 무르익으니 노랫말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예전의 낭랑한 목소리도 듣기 좋지만, 깊이가 더해진 주현미의 노래에 더 큰 위로를 받고,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리 작은 무대에 서도 여전히 긴장이 되고 떨려요. 노래를 부를 때, 나에겐 아무런 추억거리가 없는 가사라 해도, 듣는 이는 어떤 깊은 사연을 떠올릴 수 있잖아요. 때문에 곡 하나하나를 절대 가볍게 해석할 수 없고 편하게 부를 수 없는 거죠. 대중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는 친구 같은 가수로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찔레꽃’을 부른 백난아 선생님은 타계하시기 직전 앨범에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아직도 사랑이 많고 아직도 열정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으로 오늘도 노래하겠습니다.”
트로트의 여제 주현미가 데뷔 35주년을 맞아 새 앨범을 발표한다. 통산 20번째 주현미 정규앨범으로, 총 12곡의 '인생 이야기'가 담겼다.
올해 데뷔 35주년을 맞아 전국 투어 일정에 발맞춰 지난 봄 발표될 예정이었던 이번 앨범은, 최근 코로나19의 여파로 공연이 연기되면서 발매 시점을 늦추게 됐다.
이에 총 12트랙의 수록곡을 6월부터 월 2곡씩 디지털 싱글의 형태로 선공개한 뒤 11월 모든 곡의 발표가 끝난 뒤 아날로그 방식으로 리마스터링 된 LP 음반을 발매할 예정이다. 첫 음원 공개는 6월 15일 월요일 오후 6시에 이뤄진다.
6월에 선보이는 두 곡은 '여인의 눈물'과 '꽃 피는 청계산'이다. 첫 번째 곡인 '여인의 눈물'은 6/8박자의 리듬에 오케스트라 편곡이 빛을 발하는 노래로 주현미의 파워풀한 보컬이 돋보인다.
두 번째 트랙은 '꽃 피는 청계산'으로 가수 주현미의 인생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곡이다. 요즘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정통 트로트 곡으로, 유난히 산을 제목으로 하는 노래를 많이 불러온 주현미의 개인적인 추억을 표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친근한 명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수 주현미는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들께 가장 '주현미'다운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며 ”시대를 역행할지라도 트롯의 원류(源流)를 찾아가는 것이 이 앨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주현미의 트로트를 향한 진심은 최근 보여준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2018년 11월부터 시작된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130여곡에 달하는 우리 전통가요를 직접 불러 업로드하고 있다. 최근 각각 노래의 사연을 고증해 기록한 노래 이야기를 엮어 에세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을 펴내기도 했다.
‘미스터트롯’ 선(善) 영탁이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연애하고 싶습니다!”라는 솔직 발언으로 주목 받고 있다. 또한 함께 출연한 임영웅, 이찬원, 장민호의 현재 연애 상태도 공개돼 관심이 집중된다.
다음달 1일 방송되는 MBC ‘라디오스타’는 ‘오늘은 미스터트롯’ 특집으로 꾸며진다. 영탁은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해 ‘막걸리 한 잔’, ‘추억으로 가는 당신’, ‘찐이야’ 등 엄청난 가창력과 리듬 감각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탁걸리’, ‘리듬탁’ 등 다양한 별명으로 인기를 얻었고 최종 선(善) 자리까지 올랐다.
방송에서 영탁은 ‘미스터트롯’의 인기 때문에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이 커지는 가운데, 김구라가 “시건방진 꿈이네!”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줬다는 후문.
영탁은 ‘미스터트롯’ 대박의 숨은 공신이 자신이라고 밝혀 궁금증을 더한다. 과거 ‘스타킹’, ‘히든싱어’에 출연한 경험으로 시청률이 잘 나오는 비법을 터득했다는 그는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특별한 행동을 실천했다고 말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영탁은 “연애하고 싶습니다!”라는 솔직한 발언으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영탁을 포함해 임영웅, 이찬원, 장민호가 출연하는 ‘라디오스타’는 다음달 1일 밤 11시 5분 방송되는 ‘라디오스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55년생, 베이비붐 세대로서 1978년에 데뷔해 올해로 예순다섯 살. 그러나 이치현의 모습에서 그 세월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1980년대를 휘어잡던 순간의 ‘이치현과 벗님들’ 리더 이치현이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한 젊음과 변치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더 성숙하고 테크니컬해진 그의 라이브를 보면 시간을 거꾸로 먹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심지어 신곡을 준비하면서 내년부터는 ‘전투를 치르듯’ 전국 라이브 투어를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 그의 음악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밴드로 올해로 벌써 41년째 롱런 중인 이치현과 벗님들은 흔히 ‘한국의 비지스’라 불린다. ‘당신만이’, ‘사랑의 슬픔’, ‘다 가기 전에’, ‘집시여인’ 등의 히트곡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밴드 사운드의 진가를 보여주는 곡들이며 여전히 애청되고 애창되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이다. 이치현과 벗님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치현에게는 여전한 젊음과 특유의 우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수에 젖었다기보다 ‘이 일이 내가 맞는 건가,(웃음)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며 생각이 많아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거죠.”
반쯤은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는 사실 가수가 될 꿈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명곡들과 그의 감미로운 음색을 생각하면 의외의 얘기였다.
어쩌다 가수가 된 기타리스트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산타나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연주자가 활동하기가 어렵잖아요? 더구나 유명하지도 않았으니 누구에게 곡을 줄 수도 없었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불러야지.(웃음)”
산타나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라틴 록 기타리스트의 전설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이치현이 그에게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탁월한 기타리스트로서 여전한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 대표 히트곡 ‘집시여인’, 그리고 그의 최근 라이브에서 들려주는 노래들이 라틴 스타일로 더욱 세련되게 편곡됐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라틴 록과 밴드 사운드에 기반을 뒀지만 그가 한 가지 장르만 했던 것은 아니다. 팝 발라드에서부터 신스 팝, 로큰롤까지 다양한 음악적 접근을 해왔다. 그룹사운드를 하면 한 장르를 계속 파야 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적 변화를 시대에 따라 맞춰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음악 그만둘까’ 싶었던 순간들
그렇게 대중가요 가수이지만 밴드 사운드에 기반하고 있는 그가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밴드를 뚝심 있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외국처럼 장수하는 밴드가 없다는 점을 봐서도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위기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와요. 경제적인 위기는 능숙해요. 워낙 바닥을 치며 올라갔고 무명생활도 오래해서.(웃음) 가장 힘든 게 ‘내 스타일의 음악을 계속해야 하나? 그만둘까?’ 하면서 내 음악에 한계를 느낄 때죠.”
그가 자신의 음악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시대적인 문제와도 결부된다. 라이브 밴드를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설 자리가 많이 사라졌고 가요계의 주류도 밴드 사운드를 유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얼마 전 7080세대에게 논란이 됐던 KBS의 ‘콘서트 7080’ 폐지 건이 그렇다.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콘서트 7080’이 폐지된 데는 물론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죠. 7080시절 음악했던 사람들을 막상 찾아보면 지금 음악을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 새 앨범을 내지 않고 ‘추억팔기’만을 하는 가수들이 출연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떨어지게 됐고요. 음악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뮤지션은 신곡 활동도 꾸준히 병행해야 하잖아요.”
지나친 쏠림 현상 안타까워
요즘 사회나 기업체들을 보면 7080세대가 주류가 됐다. 이치현과 같은 시대의 가수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의 성공으로 트로트가 7080세대의 음악적 대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 물결이 너무 거세다 보니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라이브 밴드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 그는 더욱 힘들어하고 있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차원, 음악적 현실에 대한 고통이었다.
“시대의 변화이겠지만, 요즘 가수들은 거의 탤런트가 돼야 해요.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하고. 난 그러고 싶진 않거든요. 내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하고 싶은 거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다 보니 이 모양이지.(웃음)”
변화된 음악 현실에 방황도 깊어졌다. 그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간 계속 방황했다.
“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 미국을 네 번 왔다 갔다 했어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에서 공연하려고요. 환경이 안 변하면 내가 못 살겠기에. 곡은 안 써지니 밤마다 괴롭고…. 내가 해야 할 음악의 장르를 못 잡는 거예요. 안 그랬거든요.”
소극장 투어로 팬 저변을 넓히다
그래도 그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좋은 경치를 봤다고 좋은 곡이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2016년에 내놓은 정규 앨범 14집 이후 오랜만에 싱글 앨범을 제대로 준비해 선보일 계획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바로 소극장 공연 투어다.
“한 해가 끝날 때 되면 ‘올해 잘 보냈나?’ 싶죠. 나이가 드니 비보도 많이 듣게 되고, 시간도 확 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버킷리스트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있는 걸 실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게 내년 3월부터 시작할 전국 소극장 공연이죠. 깨질 때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부딪쳐볼 거예요.”
그는 이미 1984년부터 5~6년간 무려 1000회가 넘는 소극장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즉, 소극장 무대의 맛과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실 그래서 작년에는 그런 소극장 무대를 다시 한 번 부활시킨 적도 있다.
“관객들이 예전에는 학생들이었는데 이젠 다들 어른이 되어 주차장이 없어서 힘들어했는데(웃음) 공연은 꽉 차서 끝났어요. 그분들이 말하길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소극장에서 얼굴 표정을 다 읽고 땀 흘리고 그러는 걸 보면서 함께 공연하는 거니까요.”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본 그의 성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그는 앞으로 나와서 ‘나대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성향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너무 싫어하는 쪽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성향이 남아 있기에, 그의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더했을 수밖에 없다.
“가수는 꿈에도 없었는데, 운명이란 게 있는 듯해요. 제게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어요. 원래 남 앞에 못 서는 성격인데도 한 거니까요. 그래서 1984년에 4집 앨범 녹음하며 방송을 접고 대학로에 들어갔죠.”
그의 소극장 공연은 대박이 났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인간적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여대생들 앞에서 1000회를 공연한다는 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때 성격이 변했어요. 대화하는 법을 억지로 힘들게 익힌 거예요. 지금도 저는 제가 봐도 어색해요. 그래서 방송 녹화한 게 있으면 가족들하고 안 보죠. 나 혼자만 보면서 반성할 게 뭐 있나, 왜 저랬을까 합니다. 그게 본 성격인 거 같아요.”
무대와 객석은 구분되는 게 품격
그는 프로답게 자신이 대중음악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터뷰 내내 계속해서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관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자신을 대중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노정이 어쩌면 이치현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좀 까다로워서 무대 같지 않으면 안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후배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공연하기도 했죠. 당연히 환경이 열악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좋아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잘되는 걸 보니 거기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대중과 마주하되 자신의 격만 안 떨어뜨리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물론 무대와 객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게 품격이니까요.”
칠순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그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역시 팬들이다. 그의 팬클럽은 회원 수 1500여 명이 가입한 ‘늘벗회’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그를 지지해준, 역사가 깊은 탄탄한 팬들로 그의 공연에 항상 힘이 되어주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자 위안 아닐까.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될 것
음악이 운명이라는 말처럼, 그의 딸 둘도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딸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지 목소리가 바뀌었다.
“첫째 딸은 플루트를 해요.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와서 올해 동창하고 결혼했죠. 결혼 안 시키려 했어요. 들어간 돈이 얼만데.(웃음) 사실 재밌게 살고 있어요. 둘째도 원래는 음악하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음악심리학으로 바꿨어요. 작은애는 지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과 가족들 모두가 음악과 관련이 있지만, 정작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음악은 본인과의 싸움이 너무 심해요.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건축가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는 중학교에서 미술 관련 상을 휩쓴 기대주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예고에 진학하지 못해 미술인으로서의 꿈은 접혔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건물의 건축 재료를 살펴보고 두들겨본다고 한다.
“음악은 사람을 너무 좁게 만들어요. 물론 음악의 세계는 굉장히 넓죠. 그러나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좁아요. 음악 대신 빌딩 하나 지어보고 싶고 그렇죠.(웃음)”
아름다운 황혼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치현의 가족들 중 음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교육학과를 나온 아내는 도서관에서 살며 자녀들 교육에 평생 매달렸다. 요즘 그는 부쩍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내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요. 젊었을 때는 같이 못 놀아줬고 ‘여보, 여보’ 하며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고…. 우리나라 부부들이 나이를 먹으면 각자 놀잖아요?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서로 목도리를 해주며 손잡고 다니면서 카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흰머리의 노부부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칠십부터는 같이 손잡고 다니면서 외롭지 않게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은 같은 감성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그는 감성과 추억으로 버무리고 채워질 소극장 라이브를 준비하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거듭 아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그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우선 그가 도달해야 할 음악적 성공의 지지자로 응원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가 아내와 함께 만들게 될 아름다운 황혼을 기대한다. 그 희망이 오늘 이치현을 또 설레게 할 것이다.
한 의사의 말이 기억난다. 수술은 의사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환자에게는 평생 한 번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그 수술이 만약 내 혈육에게 장기를 받는 이식수술이라면 어떨까. 아마 더욱 잊을 수 없는 아픔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술이 두 번 반복된다면? 더욱이 그 대상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이라면. 마치 통속적인 비극 드라마 같아 보이지만 현실이고, 비극도 아니다. 바로 경희의료원에서 만난 변은옥(邊銀玉·53)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경희의료원 신장내과 임천규(任天奎·63) 교수는 처음 변은옥씨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당시 그는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때는 눈앞의 환자가 어떤 일들을 겪을지, 30년간 자신이 계속 돌봐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변은옥씨가 처음 왔을 때는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였죠. 젊은 미혼 여성인데도 비정상적으로 혈압이 높았던 것이 기억나요. 악성 고혈압이었어요. 검진을 해보니 이미 신장기능이 약 15%정도밖에 기능하지 않았어요. 신장염에 의한 만성콩팥병이었어요. 사구체신염으로 부르는 이 병은 젊은이들이 잘 걸리는 병이죠. 보통은 급성으로 나타났다가 낫는데, 만성으로 진행되면 골치 아파지죠.”
변씨가 경희대를 찾은 것은 1984년 9월이다. 사실 그녀는 다른 병원을 먼저 들렀다 왔다고 했다.
“서대문구청에 취업한 지 얼마 안 돼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혈압이 너무 높다고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큰 병원을 갔는데 신장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얼마 못 살 것 같다고 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는 것이 낫겠다 싶어 생각한 곳이 삼촌이 수술받았던 이곳이었어요. 임천규 교수님을 그때 처음 뵈었는데, 마음이 편안하도록 말씀도 잘해주시고, 용기를 낼 수 있게 응원해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요.”
처음 병원을 다닐 때만 해도 변씨는 몸의 이상을 크게 자각하진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점점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이명이 들리는 등 상태가 나빠지면서 실감이 났다고. 당시에는 잘 알려진 병이 아니어서, 주위에선 어차피 살 가망이 적지 않겠냐며 수술을 말리는 사람도 있었단다.
꽃다운 처녀에게는 힘든 수술
이식수술이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다. 사실 효과로 따지면 신장이식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수술을 주저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임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수술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었어요. 몸에 칼을 대버리면 흉터도 남고, 혼삿길도 영영 막혀버린다는 인식이 있었죠. 게다가 기증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어요. 요즘은 그래도 뇌사자 장기기증이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인식도 좋아져서 기증자를 찾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남에게 신장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약물치료를 시작했고, 그것이 큰 효과를 내지 못하자 투석을 시작했다. 하지만 투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변씨는 이야기했다.
“결핵이 있어서 그것을 치료해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핵이 나을 때까지 6개월을 투석했는데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었어요. 투석을 하고 나면 몸이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어요.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리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어요.”
혈액 투석에 대해 임천규 교수는 “사실 혈액 투석은 정상적인 신장기능의 10~15% 정도만 대신할 수 있어요. 일주일에 세 번, 네 시간씩 꼬박꼬박 투석을 받는다 해도, 혈액 속 노폐물은 늘 80% 이상 쌓여 있다는 얘기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독만 제거하는 셈이에요. 신장이식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어 투석을 평생을 해야 하니 환자 입장에선 무척 번거롭고 힘들죠. 특히 젊은 여성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내 딸 살리겠다는 어머니의 결심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너 죽는 꼴은 못 본다.”
변씨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건강한 신장이 두 개나 있는데, 당신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선언한 것. 그렇게 이식수술은 결정됐다. 1986년 6월 9일이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수선하던 시기. 그녀도 그녀 나름의 치열한 투쟁의 시기를 수술대 위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모두의 기대대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변씨는 당시를 “수술을 마치고 나서 눈이 떠지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어요. 엄마의 것이 내 몸속에 있다는 느낌,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복잡한 감정이었죠”라고 회고했다.
사실 변씨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병을 심하게 앓았고, 몸에는 커다란 생채기까지 있었다.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감히 남편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하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엔 예외가 없는 것인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제 상태가 이 모양이니까 데릴사위라도 들일 생각까지 하셨어요. 그러다 남편을 만나 1년 연애를 했는데, 제 사정에 대해 모두 이해해줬어요. 애가 생기지 않아도 좋다고까지 얘기해줘서 결혼을 결심했죠.”
그리고 그 결실로 아들 김영수(金泳洙·26)씨를 얻는다.
30년 만에 다가온 또 다른 시련
평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볕이 좋은 날엔 빨래를 해서 널고, 점심 설거지를 끝내면 저녁 메뉴를 걱정했다. 모임에 나가 수다도 떨고, 특별히 기분 좋은 날엔 술도 약간 입에 댔다. 아들은 경찰을 꿈꿀 정도로 바르고 강직했으며 가족이 의지할 수 있는 집안의 기둥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또다시 탈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궁이 말썽이었다. 결국 5년 전 자궁을 적출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 출혈이 많았던 탓일까. 신장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임 교수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투석이었다.
“또다시 투석을 받아야 한다니 끔찍했죠. 하지만 다시 이식수술을 할 순 없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1월에 투석을 위한 동정맥류수술을 하고 나서, 4월부터 투석을 시작했어요. 그래도 30년 전보다는 장비가 좋아져서 좀 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반대로 저혈압이 오고 몸이 빠르게 무너져버리더라고요.”
이 과정을 편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한 사람이 있다. 이젠 성인이 된 아들 영수씨다. 그는 어머니의 간호를 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의 인터뷰를 곁에서 말없이 바라만 보던 그에게 질문을 하자 다소 상기된다. 젊은 혈기와는 다른 뜨거운 무엇이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환자인 어머니의 모습이 익숙했어요. 계속 봐왔으니까요. 그때부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처럼 나도 어머니에게 신장을 드려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요. 다만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죠. 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다짐이라 문제가 생기고 나서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전혀 고민도 없었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신장이식 기증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수술 후기도 보고, 이식수술에 대해 직접 공부하면서 전혀 겁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랑 함께 찍은 사진이 별로 없더라고요. 어머니 건강이 회복되시면 봄에 제주도에 같이 다녀오려고요.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요.”
네 개의 신장이 준 꿈과 희망
신장이식은 고장 난 오일필터를 교체하는 자동차 정비와는 다르다. 수명을 다한 부품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지만, 신장이식은 원래의 신장을 떼어버리지 않는다. 기증받은 신장을 몸에 더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임천규 교수는 변씨의 경우 어머니의 것을 받았다가 다시 아들의 신장을 받았으니 4개의 신장을 몸에 지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장이식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변씨의 경우는 이식 환자들 중에서도 오래 사용한 편이에요. 게다가 나이든 어머니의 신장을 이식받은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죠. 두 번 신장이식을 받는 케이스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식을 받고 싶어도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신장이식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부분은 이식의 거부반응을 줄이는 면역억제제가 좋아져서 꼭 기증자가 가족일 필요도 없고 혈액형이 같을 필요도 없어요. 심지어 수혈이 불가능한 혈액형끼리도 신장이식은 가능해요.”
현재 대한고혈압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임 교수는 고혈압 환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고혈압은 신장질환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고혈압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신장의 소금배설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혈압이 높은 편이라면 신장을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식 환자들은 늘 불안하게 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무조건 재미있게 살고, 걱정하지 말고, 약만 제때 드신다면 몸은 나아질 겁니다.”
처음 신장이식을 받은 지 딱 30년이 되는 해인 2016년 9월 21일, 변씨는 두 번째 신장이식을 위해 수술대에 누웠다.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였다. 결국 아들의 성화에 그리고 투석의 고단함이라는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결정을 내린 뒤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변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이 질문을 던지러 왔는데, 꺼내기가 쉽지 않다. 아들의 신장을 받은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 가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어요. 가족이라고 모두 신장을 선뜻 내어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투석실에 앉아 있으면 자식을 원망하는 부모들을 심심치 않게 보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먼저 수술을 하자고 적극적으로 권해줘서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어요. 수술을 여러 번 했는데도 별 탈 없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느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분을 위해서 좋을 일 많이 하고 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