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주 4·3 아픔 담은 미스터리 단편소설 ‘해녀의 아들’ 황금펜상 수상
-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2023년 제39회 한국추리문학상 시상식에서 박소해 작가의 ‘해녀의 아들’이 제17회 황금펜상을 수상했다. 한국추리문학상은 최우수 미스터리 장편에 수여하는 대상, 등단 5년 미만의 신인에게 수여하는 신예상, 2007년 제정된 단편 대상의 황금펜상으로 이뤄져 있다. 대상은 수상작이 없으며, 신예상은 한새마 작가의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홍선주 작가의 ‘심심포차 심심 사건’이 받았다. 황금펜상으로는 박소해 작가의 ‘해녀의 아들’이 선정됐다. ‘해녀의 아들’은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응시한 단편 미스터리 소설이다. 노쇠한 해녀의 죽음을 통해 4·3사건이 여전히 제주 사람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음을 사회파 미스터리 시각으로 보여줬다. 박소해 작가는 외지인으로서 이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시간이 없다. 더 미루면 생존자와 유족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만다. 목격자들이, 증언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추리 소설가로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억울한 원혼들이 어떻게 허망하게 죽어갔는지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미스터리를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들은 황금펜상 선정 이유에 대해 “역사에서 잊혀가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존재를 복원하려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장르로서 미스터리의 기능과 존재 의미에 값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면서 “소재나 배경에 휩쓸리지 않고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의미를 확장하는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다른 후보작들과 선명한 차별성을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박소해 작가는 2021년 ‘계간미스터리’ 가을호에 ‘꽃산담’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겨울이 없는 나라’, ‘네메시스’, ‘만월’ 등을 발표했으며, 시각화에 강한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받는다. 한국의 셜리 잭슨을 꿈꾸며,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번 황금펜상 후보작과 수상작은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 작품집 2023’으로 출간되며, 주요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 2023-12-21 08:27
-
- 신문팔이 소년, 스포츠신문의 미다스 손 되다
-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 2021-08-12 18:35
-
- ‘5무(無) 흙수저’로 꽉 찬 운을 뜨다
- 눈을 감고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손끝으로 더듬어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정 이사장의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가 명함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일생은 동반성장이란 궤적을 따라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관악구 신림동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를 만나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본다. 운이 꽉 찬 아이, 그래서 운찬이지 ‘정운찬’, 이름을 짓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녀석 운이 꽉 찬 놈이구먼. 사주가 이렇게 좋은데 이름이 뭐 그리 대수라고 식전 걸음을 하셨나? 세상 나올 때부터 운을 가득 차고 나온 놈이니 이름은 운찬이지.” 충남 공주가 고향이지만 7식구가 상경, 도시빈민으로 동숭동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살았다. 식구마다 칼잠에, 한 사람은 앉아서 자야 할 만큼 방은 비좁았다. 11남매 중 살아남은 5남매의 막내,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대박 운과는 애초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그는 태아 적 자궁이란 방마저 허락되지 않을 뻔했으니 세상 빛을 본 자체가 운이 좋았다고 할지. 당장 밥 한 숟가락이 절실했던 곤궁한 살림에 입 하나 더 느는 것이 무서워 어머니는 독한 약초를 진하게 달여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게 시궁창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익모초(益母草)였으니, 이름 그대로 산모와 태아를 ‘이롭게’ 하여 노산임에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로서는 기가 막힌 첫 운이었다. 그러나 27세 결혼 때까지 운찬은 여전히 ‘5무(無)의 흙수저’로 ‘운 찬’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크나, 인물이 좋나, 부모가 있나, 돈이 있나, 장래가 있나.” 예비 장인 장모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러나 타고난 운은 그를 저버리지 않아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KBO 총재 등 올해 74세에 이를 때까지 그의 운은 숨 가쁘게 펼쳐졌다. 물론 그에게 운이란 성실성, 정직성과 같은 뜻, 다른 말이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가르치든 대학에 맡겨야 ▶서울대 총장 시절 / 2002. 7 ~ 2006. 7 서울대를 없애려던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학교를 지킨 것을 비롯, 학원자율화 및 지역균형선발제, 소수정예화 정책을 폈다. “대학에는 자율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선발하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전적으로 대학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역 균형을 위해서는 전국 1700개 고교에서 최대 3명씩 추천받아 그중 1200명을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정원을 4000명에서 3000명으로 줄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도쿄대나 베이징대학이 3000명대, 하버드대는 1600명대, 프린스턴대·예일대·컬럼비아대는 1300명대인 것을 감안하면 대학 수준이 양질의 교육과 비례하는 것은 자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밖에 기초교육 강화를 위해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재학생들이 여유 있게 진로를 모색토록 했고, 대학 내 건물 증설보다 연구비 후원에 중점을 두었다. 삼성, 웅진 등에서 현금으로 1600억 원을 지원받아 그 가운데 100억 원을 자연과학대에 투입, 생명과학부에서 탁월한 인재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삼성의 도움이 커서 현금으로만 500억 원을 지원받았다. 한편 총장 공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교수 아파트를 증설하여 250여 세대에 삶의 터전을 보급했다. 그 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칭찬을 받았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세종시 총리 “한 나라에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다” ▶국무총리 시절 / 2009. 9 ~ 2010. 8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 서울대 관계자들은 실망했다. 옛말로 하자면 총장은 대제학이고 총리는 영의정인데 자고로 대제학이 더 품위 있는 자리가 아니냐며. 그깟 총리가 뭐라고, 그것도 시시하게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를 하냐며. “당시 광우병 사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제가 발탁된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신도 서민 출신이고 나도 서민 출신이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마음을 움직였죠. 경제, 사회 양극화 완화 기회가 아닌가. 어려운 사람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싶었던 거죠.” 양극화 완화, 경색된 남북관계 유연화라는 나름의 청사진을 품었지만 취임 6개월 만인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설상가상 세종시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임기 시작도 전에 ‘세종시 총리’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쪽 행정수도 세종시는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한 나라의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대신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과학도시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수도의 꿈에 부풀었던 지역민의 반대는 거셌다. 공주 출신인 총리가 되레 고향 발전을 저지한다며 ‘매향노’란 소리마저 들었다. “그 당시 매 주말마다 15차례 이상 방문하여 지역 대표들을 설득하고, 삼성·롯데·한화·웅진 등에서 기업도시 투자 명목으로 4조5000억 원을 약속받았어요. 그런데 그 안 자체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세종시 구상은 끝내 무산됐죠. 반대파한테서 차기 대권 노림수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총리를 그만두게 된 거죠. 제 성정이 모질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파적 언어를 이해 못 했던 데다 정치적 센스도 부족했다고 봅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10년 5월, 한 중견기업인이 찾아왔다. 연 매출이 7000억~8000억 원 되는데, 대뜸 이민을 가겠단다. 납품가 후려치기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사유였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대통령을 만났다. “중견기업인이 이민 가겠다고 하니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오죽하겠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 나라 파탄난다”고 직언했다. 그해 9월 경제인들이 청와대에 모였고, 같은 해 12월에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 발족했다. 총리직을 물러난 뒤라 그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코로나 무풍지대 한국 야구, 110개국에 중계방송 ▶KBO 총재 시절 / 2018. 1 ~ 2020. 12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이래 매년 20여 회 야구장을 찾았고, 2008년에는 야구 해설도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된 후엔 야구계의 동반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대호의 연봉이 25억 원인 것에 반해 무명 선수는 2700만 원에 불과해요. 연 수입이 100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죠.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애쓴 결과 3000만 원으로 타결되어 미약하나마 선수 간 연봉 격차를 좁힐 수 있었지요.” 각 팀 간의 원활한 선수 교류를 위해 자유계약제를 개선하는 등 구단과 구단 간의 동반성장에도 주력했다. 세계야구연맹 총재와 미국, 일본, 대만, 호주의 커미셔너(총재)를 자주 만나 국제화에도 기여했다. 코로나 시대 최대 성과는 720회 전 게임을 다 치렀다는 것과 게임 기간 중 1군 선수 가운데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한 경우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자국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자 미국의 스포츠 전문 방송 ESPN이 전 세계 110여 개국에 한국 야구를 중계한 것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임기 동안 2018년 아시아야구대회 우승, 2019년 세계야구대회 준우승을 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6월 스코필드 박사 동상 제막식 참석차 토론토를 방문해,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한 이후, 2018년 미국 올스타 게임 때 뉴욕양키스와 뉴욕메츠 경기에서 또 한 차례 시구한 것이 큰 추억이 되었죠. 메이저리그에서 한 팀의 시구자는 연 10명 정도라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여담이지만 역대 KBO 총재 중 경비원, 미화원들과 함께 식사한 유일한 총재이기도 했습니다.” 약자에겐 비둘기, 강자에겐 호랑이 ▶멘토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교수 캐나다인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와의 만남은 그에게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1970년 국립현충원에 묻히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제게는 아버지 그 이상인 분이셨죠. 중학교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해주셨고 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면서 약자에겐 비둘기처럼 자애롭고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기개를 보여주신 박사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제가 평생 추구해온 동반성장의 모본이 되신 거지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멘토는 조순 교수. 조 교수는 한국 대학이 반정부 데모로 어수선했던 1960년대 후반에 경제학에 대한 그의 흥미를 북돋웠고, 미국 유학길도 열어줬다. 모교 강단에 섰을 때도 그의 옆에는 조 교수가 있었고, 반대가 극심했던 결혼도 조 교수가 중간에서 부드럽게 풀어준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동반성장이 해법이다 ▶48년 해로한 캠퍼스 커플 아내와 가족 간 동반성장도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9년째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76차례 현장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동반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뿐 아니라 빈부 간, 도농 간, 지역 간, 남녀 간, 세대 간 등 사회 전반에 적용돼야 하는 희망의 가치입니다. 코로나 이후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테죠. 지금도 재택근무자들은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 반면 일용직이나 자영업자들은 고통에 내몰리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동반성장으로 가야 합니다.” 한편 가족은 어떤 동반성장을 해왔을까. “아버지는 어린 제게도 반말을 안 하셨어요. ‘~ 하게, ~는 아니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핥으실 정도로 아껴주셨죠. 가난했지만 사랑을 흠뻑 받고 자라서 저도 제 아이들을 민주적으로 대합니다. 48년째 ‘동반성장’을 하고 있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존중하며 키웠습니다. ‘아빠찬스’를 쓴 적도 물론 없고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가정 내 동반성장도 이룬 것 아닌가요?” ‘신아연 작가와 나누는 참 좋은 시절’ 다음 호에는 서울신문사 발행인, 한국일보사 일간스포츠 사장, 국민일보 대표이사, 경향미디어그룹 회장 등을 거치고,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내며 400여 편의 장편 및 중단편소설을 낸 베테랑 신문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를 만납니다.
- 2021-07-05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