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믿으세요.” 배우 이한위(61)가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그는 답이 정해져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을 날카롭게 알아봤다. 특히 이한위가 지양한 것은 어떠한 단어 혹은 수식어에 갇히고 규정되는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명품 조연’, ‘잉꼬 부부’ 같은. 그는 꾸며지고 포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한위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1983년 KBS 공채 탤런트 10기로 데뷔, 연기자로 산 지 약 40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한위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배우의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는 중후하고 단단한 사람이 됐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한위. 그가 털어놓은 인생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우 이한위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성격 개조하다, 어느새 배우
학창 시절 이한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조잘조잘 떠들면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과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한위는 중학생 때까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한위. 그의 어머니조차 “가장 통제가 쉬웠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속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던 것.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두근두근거렸죠. 크면서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점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내는 일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는 반장까지 해봤어요. 응원 같은 것도 하고, 노래도 부를 기회가 있으면 하고요.”
그렇게 성격을 개조해나간 이한위는 조선대학교 정밀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당시 인기였던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았고, 때마침 기적적으로 연극반 공고를 보게 됐다. 성격 개조의 방점을 찍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간 이한위. 그와 함께 ‘성실 한위’의 서막이 올랐다.
“연극을 하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겠구나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서 매달리다시피 한 거죠. 절대 잘할 수 없었고 잘하지 못했지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지더라고요. 주연의 기회도 찾아오고, 연출도 하고, 선배들이 만장일치로 회장도 시켜주셨죠.”
그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다는 이한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가 되어서는 때마침 KBS 공채 탤런트 공고를 보게 됐다. ‘저게 나한테 취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한위는 시험에 응시했고, 단번에 1983년 KBS 10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그렇게 연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 우연이 이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제 평생 배우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나는 KBS가 공인한, KBS에 의해 발탁된, 직업이 배우구나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철부지 생각이죠.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는 배우를 지속할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았던 때죠.”
39년 차 배우로 사는 법
이한위는 1985년 방영된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첫 영화는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다. 이후 그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학교’ 시리즈, ‘태조 왕건’, ‘가을동화’, ‘왕꽃선녀님’, ‘불멸의 이순신’, ‘쾌걸춘향’,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제빵왕 김탁구’ 등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미녀는 괴로워’, ‘울학교 이티’, ‘국가대표’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도 다양했다. 이한위는 맡는 역할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됐다. 깡패, 사채업자 같은 특색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도 있고, 직업이 의사, 교사, 시장이어도 어딘가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들면서는 점점 누군가의 아빠가 됐고, 서민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악역을 해도 사람들이 웃는다. 장점이자 단점이다”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이한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자평했다. KBS 공채 탤런트가 된 후 매일 KBS로 출근하면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열심히 하고 한결같고 건강하게 하니까 감독들이 저를 많이 써줬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라 공채 탤런트가 되면 기용해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트레이닝해주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시대에 배우가 됐다면, 4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오디션 제도가 있었다면 배우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적응이 된 거지, 내성적이에요. 근본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죠.”
이한위의 말대로 그와 작업해본 감독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위는 계절드라마 시리즈 ‘윤석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고 있고, ‘또 오해영’의 송현욱 감독하고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위는 이를 두고 자신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배우는 운이 좋아야 해요. 감독이 봤을 때 이 배우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모르듯이, 배우가 봤을 때도 이 감독이 어떤 감독이 될지 모르잖아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저를 써주신 분들도 꾸준하게 감독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저를 꾸준히 기용해주고, 낯선 감독들이 저를 또 캐스팅해줘서 계속 일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이한위는 사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2006년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엽기 성형외과 의사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무명 시절은 누구나 다 힘들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무명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로 생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맷집이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맷집과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안심이 안 되고, 시켜주는 사람도 불안하죠. 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비극 중에 소년출세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유약하기 때문에 어려서 출세하면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제가 무명 기간이 길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계를 잘 밟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가 하면 이한위는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인생작을 뽑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연기를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 그는 지난해 KBS 2TV 드라마스페셜 ‘그곳에 두고 온 라일락’을 통해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그의 인생작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해야 인생작인가? 스코어가 좋다고 인생작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드라마가 트로트 모창 가수 이야기예요. 작년에 ‘보이스트롯’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할 즈음 감독님이 단막극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저를 방송에서 보고 ‘저분이다’ 생각해서 캐스팅한 거죠. 그동안 했던 서민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인데 그것이 길게 나온 단막극이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고, 1인 2역 연기도 하고, 단막극상 수상도 하고. 좋은 경험이었고 고마운 기억인 거죠.”
기세를 몰아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어휴~ 없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곡을 부를 기회가 오면 부르고 싶단다. 즉 좋은 기회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수가 될 생각은 없는 것.
예능감이 뛰어난 그는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예능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회가 생겨 나가면 열심히 할 뿐이라고. “저는 연극, 영화, TV 다 해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넘나드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능 출연이 곤욕스러운데 나갈 필요는 없죠. 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갔으면 뭔가 하고. 나가기만 할 거면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그리고 끝까지 배우
이한위는 배우로서 연기 말고도 화제가 된 부분이 있다. 바로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다. 그는 2008년 49세의 나이에 19세 연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와 스타일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에는 우려의 반응도 많았지만, 현재 부부는 누구보다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한위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저를 따진다든지, 뒤진다든지, 캐묻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순종적이에요. 제가 뭔가를 번복하더라도 아내는 이해하는 편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면 참 좋지만 이해가 안 될 때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오해가 없고 갈등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불규칙한 것이 루틴이잖아요. 제 연기 생활 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해할 필요 없이 잘 받아준다는 거죠. 제 아내는 방송인의 아내로 베스트예요. 항상 고맙죠.”
올해는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한위.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둥이 아빠이기도 하다. 슬하에 열네 살 딸, 열두 살 딸, 열 살 아들이 있다. 한 방송에서 이한위는 2년마다 애를 낳았다면서 ‘비엔날레 스타일’이라고 농을 쳤다.
“제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애가 서른 살이 넘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늙은 아버지에 속하죠. 아이들하고 잘 살려면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대로 재밌더라고요. 올해는 식구들하고 여행도 몇 번 했는데 의미 있고 재밌었어요. 우리 애들은, 특히 열 살짜리 막내는 지나치게 건강해서 가끔 등산을 같이 가죠. 제가 부암동 쪽에 사니까 가까이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으니까 능력껏, 형편껏 가죠. ‘무조건 정상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아주 좋아해요. 늙은 아버지로서 노력하는 거죠. 고맙게도 애들은 아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루틴이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한위. 그래서 그는 당장 2022년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정해져 있는 스케줄은 이달부터 광주방송 라디오 ‘이한위의 그리운가요’의 DJ를 맡게 됐다는 점이다. 이한위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온 것처럼 뭔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한위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길어지는 촬영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약속을 잘 지키려고 한다. 배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였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한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저는 그냥 수식어가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수식어를 굳이 단다고 하면, ‘재밌는 배우’, ‘신뢰받는 배우’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명품 조연 배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품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명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만약 저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하죠. 저는 단지 배우로서 끝까지 소용되는 것, 그것이 제 바람이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정할 수 없지만, 배우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신 것처럼요.”
처음에는 귀촌 목적이 아니었다. 꽃향기, 흙냄새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텃밭 하나 장만할 생각이었다. 부부는 사랑에 빠지듯 덜컥 첫눈에 반해버린 땅과 마주했다. 부부는 신이 나서 매일 밤낮없이 찾아가 땅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응답이라도 하듯 땅은 씨앗을 감싸 안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온몸으로 품었다. 텃밭은 꽤 큰 대지가 됐고, 이후 정자와 살 만한 집도 마련됐다. 나무와 숲을 가꾸는 것이 평생 직업이던 조연환 前 산림청장의 귀촌 인생은 그렇게 준비됐다.
13년 차 귀촌인 조연환 전 산림청장 이야기
충남 금산군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귀촌 하우스에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와 압력밥솥으로 갓 지은 밥 냄새가 진동했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살짝 출출했던 탓에 당장 밥상 앞에 앉아 한 숟가락 뜨고 싶었다. 밥상 위는 말 그대로 시골밥상. 비름나물 무침, 엄나무 장아찌. 깻잎볶음, 호박 무침, 김치, 전날에 담갔다는 오이소박이, 굴비 구이가 상 한가득이었다. 완두콩을 넣어 지은 밥과 반찬으로 식사를 뚝딱 끝내고 숭늉을 마신 뒤, 조 전 청장이 손수 탄 봉지커피까지 들이키면 점심코스가 마무리된다. 녹우정(조 전 청장 집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정자 이름. 나무와 숲을 가꾸는 사람들의 우정이 깃든 정자라는 뜻이다) 정식이라 불러도 될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진 찍기를 부부에게 권했다. 귀촌생활에 있어 텃밭은 기본 아닌가. 텃밭이라기에 따라 내려간 곳은 그냥 큰 밭이었다. 고구마, 팥, 깻잎 없는 거 없이 다 있었다. 이 큰 밭의 고랑을 만들고 구획을 나눠 정리 정돈하는 일은 이 집 머슴인 조 전 청장의 몫이다. 총 관리감독은 마님인 정점순 여사가 한다. 텃밭이 아니라 농번기 농사꾼 부부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귀촌 13년 차란 말에는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지 13년 됐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금산에 땅을 장만하고 귀촌을 준비한 것은 18년 전이다. 산림청이 발족된 1967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최말단 9급 산림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조 전 청장. 2004년 제25대 산림청장으로 취임해 파란만장한 1년 6개월을 보내고 2006년 자리에서 물러나 귀촌했다. 산림청장직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농협경제연구소장과 생명의숲국민운동 상임공동대표, 천리포수목원장 등을 잇달아 역임하며 산림 전문가로서 끊임없이 일해왔다. 2011년부터는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을 맡아 귀·산촌 희망자에게 실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모색하며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퇴임을 언제 했나 싶을 정도로 늘 바쁜 현역 산림 운동가가 바로 조 전 청장이다.
“처음에 이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싶었는데 90명 정원에 120명이 몰렸습니다. 프로그램을 10기까지 진행했는데 졸업생을 980명이나 배출했습니다. 500명은 임업인이고 나머지는 아카데미에 와서 산을 알게 된 사람들이죠. 정확하게 통계를 낸 건 아니지만 제가 알기로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귀촌했습니다. 굉장히 성공한 것이죠.”
올해 6월 출간한 ‘산림청장의 귀촌일기’도 조 전 청장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요구에 부합해 서두르게 됐다. 책에는 조 전 청장이 SNS에 꼼꼼하게 적어 올렸던 개인 경험과 함께 똑똑한 귀촌 설계, 귀·산촌 사례자 이야기 등을 실었다.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다.
“아내 나이가 칠십이 넘으면서 무릎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더 이상 농사 못 짓고 서울로 가면 책을 못 낼 것 같더라고요.(웃음) 우리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동안 책이 나오면 좋잖아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산림청 공무원이었던 조 전 정창은 어리다고 무시당할까봐 나이를 두 살 높여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괜찮은 동갑내기(?) 처자가 있다면서 소개시켜준 이가 바로 정점순 여사다. 첫눈에 반해 연애하다 1년 반 만에 결혼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연상 연하 커플이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일하지 말라고 의사가 말합니다. 이 사람을 살살 꾀어 2년 전인가 여길 팔자고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 사람한테 우울증 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밭일 못한다고 포기할 때까지 그냥 살려고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조 전 청장이 산림 전문가로 알려졌지만 알고 보면 정점순 여사도 고수 중에 고수다. 조 전 청장이 천리포수목원장을 할 때 숲해설가로 활약할 만큼 식물 생태에 관심이 많다. 남들 못 키워내는 나무며 화초며 정 여사 손에 들어오면 죽어가던 것들도 되살아났다. 너른 텃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고왔던 손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만 나면 밭에 앉아 풀 뽑고, 복숭아 봉지를 싸고 식물을 바라보고 보살피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조 전 청장이 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이 되기까지 정 여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조가 한몫했다는 것을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농촌에 은퇴자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귀농이 아닙니다. 귀산이나 귀농은 아카데미 교육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조금 생기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골이 좋다고 하시는 분은 대환영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한국산림아카데미 최고경영자과정을 듣기 위해 모이는 대부분이 도시에서 성공한 시니어 혹은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조 전 청장은 산에 관심을 갖고 터를 잡고 들어가 길을 내고 가꾸기에 관심을 갖는 인구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을 가꾸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야 합니다. 상추 심어봤더니 또 싹이 나고 그거 뜯어서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 나눠도 줘보고 말이죠. 골프장 가는 거보다 훨씬 재밌다며 골프 끊은 분도 주위에 있습니다. 산을 알아가는 삶이 생긴 것이죠.”
조 전 청장이 정말 퇴임한 산림청장이 맞나 싶을 정도다. 여전히 사회 전반에서 이뤄지는 일에 관여를 하며 쉬지 않고 귀·산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산림청장’이라는 문구를 치면 유독 조 전 청장의 행보가 눈에 띈다. 1년 6개월 짧고 굵었던 임기와 퇴임 후 여섯 번 바뀐 산림청장 자리이지만 여전히 조 전 청장이 회자된다. 그는 끝까지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퇴직한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촌의 인적 네트워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2005년 8월 21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 부부와 조연환 전 산림청장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 입성 이후 딱히 산책할 곳이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이 산길 정비가 되지 않은 북악산을 자주 오르내렸다. 이후 산림청에 기별이 와서 청와대 뒤 숲을 가꾸고 꽃을 심었다고. 그것이 고마워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부른 것이다.
“‘청장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 제가 뒷산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다음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도, 그다음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도 농촌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들에게 내가 멱 감고 고기 잡고 놀던 시냇물을 복원해주고 싶다, 나는 퇴임하면 시골로 내려가겠다’며 계속 그 말씀을 하셨어요.”
도시에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농촌에 사람이 없으니 도시에서 성공한 은퇴자들이 자리를 잡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미래 그림이 될 것이라고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다. 그리고 퇴임 후 시골로 내려가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조 전 청장에게 길고 긴 시간을 들여 했던 말들을 이행하고자 대통령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했다.
“책에도 썼지만 대통령이 나한테 지시를 한 거잖아요. 내가 시골에 내려와 살아야 하는 이유, 가장 큰 명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어 귀촌을 택했던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을 역임하시고도 봉하마을에 내려가 주민들과 밤새 토론하고 행정 관계자를 설득해가며 마을을 가꾸셨는데, 저는 산림청장을 했다고 해서 귀촌해 편하게 살고 있는 거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함께 만나러 갔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퇴임 후 부여로 내려가 휴휴정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지었다. 조 전 청장이 금산에 갈 때 같이 입주했을지도 모를 좋은 친구 중 하나가 유홍준 전 청장이다. 하지만 각자 맡은 바 소임이 달라 한 명은 산이 가까운 금산에, 한 명은 역사가 가까운 부여에 둥지를 틀었다.
“유 전 청장도 부여에 땅을 잘 마련했습니다. 저도 한 번 가봤는데 잘 꾸며놓았더라고요.”
이 두 사람은 재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제안해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를 150년 후 문화재용으로 쓰자고 협약했다. 살면서 봤던 아름다운 협약으로 두고두고 기억돼 뜬금없지만 적어본다. 나무건 문화재건 한 세기는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 미래 세대를 위한 든든한 보험(?)을 어른들이 들어준 것 아닌가.
공직자 퇴임 이후 정계에 입문해 지금까지 쌓아온 명망을 순식간에 까먹는 이도 있고,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을 보이는 이도 종종 보곤 했다. 푸른 산새에서 만난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의미 있는 사명과 서슴없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가 귀감이 됐다.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마음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점점 더 푸르러지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