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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웰다잉’과 가족의 ‘웰빙’을 위한 ‘상속’ 추천도서
- 제대로 상속을 준비한다는 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즉 웰다잉과도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남은 가족의 삶에 힘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소중한 행위다. 상속에 관한 지식을 채우고 지혜를 일깨워줄 도서들을 소개한다. 상속·증여 A to Z, 2018 신간 1) 2018 아버지는 몰랐던 상속분쟁 (최세영 외 공저, 삼일인포마인) 상속분쟁을 피하기 위한 과정, 상속세를 합법적으로 줄여나가는 방법, 신탁과 보험을 이용해 의도대로 재산승계를 이루는 노하우 등을 담았다.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받아들이고, 유종의 미 차원에서 ‘상속’을 이야기한다. 남은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로서 재산을 남기는 방법을 사례로 풀어간다. 주요 목차 △똑같이 나눠준 재산, 과연 정답일까? △치매가 두려울 때, 나의 현명한 선택은? △아들에게 바로 증여하지 마라! 며느리가 나설 때다! △증여세 부담 없이 자녀의 창업자금 마련할 수 있다 2) 재산, 자식에게 절대로 물려주지 마라 (노영희 저, 둥구나무) 제목은 말 그대로 자녀에게 재산을 주지 말라는 뜻이 아닌, 어떻게 잘 물려줄 것인지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저자는 “진정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상속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늦지 않게, 정신이 멀쩡할 때, 가족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상속에 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요 목차 △재산상속, 이렇게 황당한 케이스도 있나? △새로운 선택 ‘상속보다 기부를’ △물려준 재산 되찾기 △5070세대가 꼭 알아둬야 할 상속증여의 기술 3) 2018 기업경영과 증여·상속 (김창영 저, 영화조세통람) 증여세 관련 기본사항과 상속에 대한 민법 규정을 포함한 상속세 기본사항을 순차적으로 풀어냈다. 거래유형별로 증여문제를 상세하게 구분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증여세 과세특례 부분은 별도로 구성했다. 상속이 개시된 이후의 주요 절차, 업무처리기관, 신고 시 필요서류 등 실무사항을 알려주며, 활용도 높은 상속세 및 증여세의 절세전략을 소개한다. 주요 목차 △거래유형에 따른 증여의 이해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공과금, 장례비, 채무액을 빠짐없이 챙겨라! △상속 개시 후 절세방법은 이렇다! 사례로 풀어본 상속·증여 1) 상속전쟁 (구상수 외 공저, 길벗) 남편이 생전에 내연녀에게 준 재산에 대한 상속세 고지를 본처가 내야 하는 황당한 경우,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지극정성으로 병수발까지 한 새어머니의 재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 등 황당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상속 관련 사례들을 담았다. 책을 읽고 나면 상속법은 때론 야속하지만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요 목차 △분쟁을 피하라! 올바른 유언의 방법 △엇갈린 부부, 억울한 자식… 상속에서 일어나는 뜻밖의 스캔들 △남다른 스케일, 기업&가업 상속 2) 최신 사례로 꼼꼼히 설명한 상속 증여 (홍원표 저, 인벤션) 최대한 절세하면서 재산을 남겨줄 수 있는 안전한 길을 제시한다. 아울러 법에 저촉되는 방법을 선택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성도 함께 지적한다. ‘Q&A 코너’를 마련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일반인이 굳이 알 필요 없는 어려운 상속 이론은 덜어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사례 중심으로 쉽게 설명한다. 주요 목차 △상속vs증여vs양도 무엇이 유리할까? △개인 기업을 미리 물려주고 싶다면 법인전환 후 승계하라 △보험은 정말 상속세를 절세할 수 있을까? 3) 세금은 아끼고 분쟁은 예방하는 상속의 기술 (전오영 외 공저, 매일경제신문사)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상속 분쟁을 어떻게 준비하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상속 전문 세무사들이 제시하는 상속 가이드라인과 상속세 기본 계산 구조, 상속공제, 세액공제, 올바른 납부방법 등을 통해 상속세를 아끼는 방법을 소개한다. 상속 이후 상속인들이 상속 재산을 운용할 때 발생하는 세금을 최소화하는 방법까지 담았다. 주요 목차 △그래도 챙겨주고 싶은 자식, 더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재산을 주는데 부모 노후를 책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상속, ‘돈’이 전부는 아니다 1) 한 권으로 끝내는 상속의 모든 것 (서건석 저, 라온북)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상속의 다른 측면, 돈이 아닌 인생의 지혜와 가족정신을 물려주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가족이 돈에 대한 경제관념을 공유하고, 함께 봉사·기부 등을 하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자녀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의 정신적 유산을 잘 상속하는 법을 통해 3대가 부유해지는 상속 전략을 상세하게 안내한다. 주요 목차 △3대가 부유해지는 철학과 가치관 상속 △위대한 상속을 위해 당신이 오늘부터 시작할 것 △나의 상속 계획을 가족과 공유하라: 상속노트 2) ‘최고의 유산’ 상속받기 (짐 스토벌 저, 예지) 세계적인 대부호 레드는 유언장을 통해 그의 손자에게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최고의 유산’을 상속한다. 손자는 매달 1개씩 12개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는 레드가 유산상속을 빌미로 돈보다 소중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손자는 ‘최고의 유산’을 거머쥐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제를 수행하지만, 결국 12가지 인생의 지혜를 터득해나간다. 주요 목차 △‘일’이란 유산 △‘고난’이란 유산 △‘나눔’이란 유산 △‘하루’란 유산 3) 유대인의 상속 이야기 (랍비 조셉 텔루슈킨 저, 북스넛) 유대인이 상속받아온 정신적 유산 40가지를 정리했다. 그들의 유산에 담긴 지혜와 번영에 관한 조언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까지 아우른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켜야 할 유대의 전통과 관습을 담았다. 말미에는 유대인들이 상속받는 특별한 7권의 도서를 소개한다. 주요 목차 △자녀를 현명하게 사랑하라 △보화보다 지혜를 물려주어라 △유대인이 물려받은 책들
- 2018-10-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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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보다 나은 삶 향해” 너싱홈그린힐
- 모든 분야에는 기존의 길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보통 이들을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르는데 국내의 요양시설에도 이런 개척자는 존재한다. 너싱홈그린힐도 그중 하나. 국내에서 간호사가 설립한 노인의료복지시설 중 1세대다. 정책에 따라 움직여왔다기보다 제도를 이끌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느껴질 정도. 너싱홈그린힐을 찾아 노인요양시설의 덕목은 무엇이고, 소비자들이 요양원을 선택할 때 어떤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소비자들에겐 너싱홈이란 단어가 생소할 수 있다. 너싱홈(nursing home)은 치매나 중풍 등의 만성질환을 앓아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노인을 돌보는 장기요양기관 중 간호사에 의해 설립되거나 운영되는 기관을 말한다. 국내에선 낯선 개념일 수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외에선 가정집을 개조해 ‘집에서 어른을 모시듯’ 운영되는 소규모 시설도 흔하다. 영국의 너싱홈에서 영감 얻어 너싱홈그린힐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요양원으로 건물을 둘러싼 정원이 인상적이다. 원래는 인근의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규모였지만 이곳으로 옮겨와 증축을 거듭하면서 지금은 65병상 규모가 됐다. 일하는 직원만 130여 명. 너싱홈그린힐의 조혜숙 원장은 1992년 영국 여행 중 현지의 너싱홈을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해보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1992년 영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작고 아름다운 소도시 사이사이에 너싱홈들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생각도 못했던 시설이라 기웃거리기만 했는데, 정원에서 쉬고 계시는 어르신들 표정이 너무나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그 무렵 국내 요양시설은 ‘고려장’이라는 모욕까지 받고 있었으니 완전히 대비되는 광경이었죠. 간호사 입장에서 국내에도 내 부모님을 모실 만한 이런 시설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2년 말 노인의료복지시설장 자격에 대한 법률이 완화되면서 국내에서도 너싱홈 설립의 문호가 개방됐고, 이미 실무를 익히며 창업을 준비 중이었던 조 원장은 다음 해 너싱홈그린힐을 설립한다. 그리고 1세대로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다른 시설과 함께 활약을 시작한다. 너싱홈그린힐이 국내 의료계에서 하나의 모델로 자리 잡은 데에는 조 원장의 논문이 단초가 됐다. 2000년 창업과 함께 진학한 고려대학교 간호대학 박사과정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 노인간호요양시설의 질 관리 지표 개발’이 그것.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제도 시행을 준비하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 논문을 주목하고 평가지표 도구개발 위원으로 조 원장을 위촉했다. 조 원장이 국내 요양시설의 모델 개발 과정에서 투영한 이상향이 너싱홈그린힐이라는 결과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너싱홈그린힐은 장기요양시설 평가가 시작된 이래 5회 연속 A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너싱홈그린힐의 특징 중 하나는 시설 곳곳에 가득한 꽃과 나무다. 정원만 7가지 종류가 있다. 한 관계자는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어르신 대부분이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 함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하면서 “소파나 식탁, 침대를 가능한 한 가정에서 많이 쓰는 목재 제품으로 구성하고, 화초를 많이 키우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배려와 애정 때문인지 이곳의 최장수 어르신은 104세이고, 18년 동안 이 시설을 떠나지 않고 지내는 있는 이도 있다. 용도에 따른 정원이 시설 곳곳에 시설의 내실이나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외형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들이 부모를 시설에 모셨다는 괜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 중 하나다. 물론 너싱홈그린힐의 공간 구성에는 외적인 요소만 고려된 것은 아니다. 입소자와 가족의 동선, 안전 등을 생각해 공간을 구성했다. 정원만 해도 면회를 위한 정원과 치료정원, 산책을 위한 정원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내부 시설은 이제는 표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유니트 케어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 일정 공간 안에서 입소자의 생활이나 치료, 활동이 가능한 구조다. 정원이 65명인 너싱홈그린힐에는 다섯 곳의 거실과 식당이 침실 사이에 존재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식구들이 보통 생활하는 공간이 각자의 방보다 거실이 되는 것처럼, 일정 인원마다 거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어 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 식사도 치료 과정의 일환 대규모 프로그램실 역시 입소자의 동적인 활동을 유도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학교 강당 같은 이곳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수업이나 놀이는 인지장애 개선 효과뿐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재미까지 부여한다. 오전에 나와 오후 프로그램을 마칠 때까지 침실 밖에서 지내고, 하루 세끼를 침실 밖에서 먹는다. ‘눕혀놓는’ 열악한 시설들과는 삶의 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너싱홈그린힐이 갖는 또 하나의 경쟁력에 대해서 직원들은 바로 자신들이라고 평가한다. 한 관계자는 “일했던 다른 시설에 비교하면 입소자당 근무자 수가 월등히 많아 어르신들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큰 경쟁력”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환경이 어르신들의 다양한 요구에 모두 응대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고 결국 서비스 수준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너싱홈그린힐의 인력 구성에는 조 원장의 철학이 녹아 있다. “인력이 부족하면 식사도 침상에서 하게 하고, 제공하는 서비스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침상에서 내려와 거실에서 생활하는 것도 재활입니다. 경영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하지만 어르신들의 재활과 서비스를 위해 인력을 충분히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력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전문간호사와 호스피스전문간호사 등 숙련된 인력들이 함께 움직인다. 요양보호사와 입소자들 사이에서 젊은 직원들도 눈에 띄는데, 바로 간호대학 실습생들. 너싱홈그린힐이 전국 주요 간호대학의 실습기관으로 지정돼 입소자들이 어떻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실습생들이 직접 경험하면서 눈으로 확인한다.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요양원에 비해 비용은 높은 편. 장기요양등급과 관계없이 부담하게 되는 자기부담비용이 4인실은 월 105만 원, 2인실은 135만 원 수준이다 .
- 2018-10-1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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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물려줄지 고민하며 상속과 증여에 대비하자
-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 김미나 동년기자 ‘내 몫은 얼마나 될까’, ‘언제쯤 주실까?’ 그러나 짜다는 소리 들으며 부를 축적하신 부모님께 성화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투잡을 뛰고 하얀 밤 지새우며 일했지만, 누구는 연봉 3억이란 말에 손을 떨궜다. 언젠가는 주시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도 아이들이 자라고 사교육에 등골이 휠 때마다 절심함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가던 사촌 언니의 넋두리에 드디어 종지부가 찍혔다. 부모 도움 없이 성공하는 일이 정말 힘든 세상이라며, 내 자식 뒤처질까 증여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환한 목소리로 곧 이사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 언니는, 가뿐하게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꽃밭으로 들어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들 유학도 보냈다. 만만치 않은 등록금 폭탄에도 한숨이 터지지 않았다. 중년 이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노후자금 끌어다 자녀 유학비 대는 것이라지만 언니 마음은 늘 아들에게로 향했다. 남편과 부딪혀도 위로를 해주는 건 아들이고, 엄마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먹기 좋은 쪽에 놓아주는 사람도 아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녀들은 나만큼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니 더 안쓰러웠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자조가 씁쓸해도, 받은 것이 있으니 주기가 한결 수월했다. 인생에서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고 그 맛을 봤으니 어쩌랴. 유학을 마치고 모두들 어렵다는 취업 허들도 가뿐히 넘은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둘이 결혼 말이 오간 모양인데 외동딸인 여자 친구 앞으로 번듯한 아파트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하기로 했다니 돌아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신혼살림을 하려던 그 집이 살고 있는 세입자와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입주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쌉싸래한 기분을 내색할 수도 없어 아들 가진 쪽에서 적잖은 전세금을 내줬다. 얼마 후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그간의 속상함은 어디론가 내빼고 애정이 솟았다. 연이은 한파가 휘몰아쳐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마음까지 곤두박질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짧은 추위에도 내의를 챙겨주던 아들이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장장한 대화 중에 엄마의 단락은 없었다. 장모님께서, 매서운 추위에 사위 감기라도 걸릴까 두툼한 패딩 사 입으라 50만 원을 보내셨다는 감동 소감만이 물결쳤다. 엄마도 거기에 공감하라는 메시지를 폭풍 전송하고 있는 남자가 아들이었다. 사돈댁 지원에 제스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상응하는 임신 축하금을 보냈다. 아들은 오래된 집이라 아기 키우기에 춥고 불편해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흘렸다. 찌르르하면서 멍함이 파고들었다. 아들은 잊고 있나보다. 막대한 유학비와 조건 없는 억대의 전세자금이 흘러 들어간 벅찬 사정을. 그때 감사 표현을 지금 감동의 조각만큼이라도 했던가. 제 돈 가져가는 것처럼 당당했지. 크고 작은 결제를 할 때도 머뭇거림 없었지. 주저 없이 카드를 썼지. 손 벌려 받은 것이니 그렇게 써도 되는 돈이라 생각했겠지. 부모가 영원한 봉이냐고 말하려다 사촌 언니 스스로 말문을 닫았다. 마치 자기가 들어야 할 말처럼 뜨끔해했다. 애써 모은 내 돈 쓸 때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부모님이 고생하며 번 돈 쓸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뚝 떨어진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고 잘 먹고 잘 사니 어깨가 가벼웠다. 울적한 마음 달래보려 남편 앞세워 여행을 기획했다. 그런 사촌 언니에게 아들은 말했다. 3~4년 후에 아이 크면 그때 함께 가자고. “어이쿠, 이게 바로 친구들이 뜯어말렸던 ‘육아 도우미’ 패키지 여행이로구나.” 손주와 가는 여행에 따라나섰다가는, 독박 육아에 여행 경비 떠맡을 돈줄로 내몰려 여행은커녕 스트레스만 뒤집어쓰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사촌 언니는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여행을 떠났다. 답 없는 질문을 변명으로 툭 던지면서. 애초에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자연으로 돌려주고 싶은 유산 백외섭 동년기자 지난 여름휴가 때 지인으로부터 제주도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산관리사인 내가 이번 그의 여행에 동행해 상속재산 ‘제주 땅’을 찾고 그 활용 방안 자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휴가를 겸해서 떠난 상속재산 찾기 여행. 이른 아침 거북바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그 땅이 있을 것이라 했다. 모친에게 상속등기를 해놓은 땅인데, 성산일출봉에서 가깝다는 ‘제주 땅’을 아직 본 일은 없다 했다. 아직 젊은 그는 재능기부 창업상담 활동을 하면서 나와 만났고 가끔 산행을 같이하면서 교류하는 사이다. 상속은 멀리 그의 외조부로부터 시작됐다. 옛날에는 상속지분이 지금처럼 ‘남녀평등’하지 않았다. 아들과 딸, 호주상속자 차별이 심했다.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는 듬뿍 주고, 출가한 딸의 몫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처럼 상속분쟁으로 패가망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외조부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집과 선산, 문전옥답은 아들 몫이 될 터였다. 외조부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세 딸도 생각했다. 농토의 일부를 정리한 뒤 현금을 마련해 딸들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다. 이는 상속과 구분하기 어려운 증여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고 생활 여건에 따라 긴요하게 사용했다. 어렸을 때 그가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큰 회사 제주지사에 근무했던 그의 부친은 장인에게서 받은 돈이므로 땅에 묻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장래에 집 지을 생각으로 적당한 곳의 임야를 샀다. 개발전망이나 투자가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 후로는 제주도에서 살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족은 그 땅을 보지도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곳인데도 누구 하나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땅에 있었다. 우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분석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는 창작예술 사업가였는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차를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창작소재를 찾고 싶은 눈치였다. 얼마 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던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소대로 안내를 받은 곳은 해안의 반듯한 도로와는 전혀 다른 비포장도로였다. 한참 더 들어가서야 차가 멈췄다. 우리가 찾는 ‘임야’였다. 하지만 도로보다 조금 낮게 야트막한 늪이 펼쳐져 있었다. 물오리 몇 마리가 수영을 즐길 정도로 물이 있었다. 상당한 넓이의 임야 중 절반이 그랬다. 경사진 땅으로 가려면 늪에 배를 띄워야 할 형편이었다. 이른바 맹지였다. “허허! 이게 뭐야?” 그의 헛웃음이 주변으로 메아리쳤다. 가까운 곳에 몇 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마침 ‘토박이 부동산’ 어르신을 만났다. “옛날에는 모두 땅이었는데, 웬일인지 지반이 점점 내려앉아 물이 고였다”고 설명해줬다. 토지로 활용하려면 늪을 메워야 하는데 지반이 약한 제주에서는 장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일출봉 앞 백사장에서 우린 맥주를 들고 마주 앉았다. 낮에 봤던 물오리 몇 마리가 눈에 어른거렸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풍경, 물오리가 사는 늪이 좋았다. 그러니 그 ‘제주 땅’을 자연으로 돌려주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공평한 나눔에 대한 생각 박종섭 동년기자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집이든 이런 물음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크든 작든 돈과 연관이 되면 하나의 답을 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상속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걸려 있다. 핏줄을 나눈 형제도 있고 배우자도 있다. 아무리 우애가 좋은 형제라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6남매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히 일해 돈이 생길 때마다 근처의 땅을 사들이셨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논마지기깨나 있는 집안이 된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부모님이 땅을 살 때마다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하나둘 해놓으셨다는 걸 알게 됐다. 집 앞 논은 큰아들, 고개 넘어 서 마지기는 작은아들, 그리고 주산골 밭 한 뙈기는 막내아들, 이런 식이었다. 그때는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았고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유산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부모님 제사를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이 땅은 팔지 않고 네게 물려줄 거다. 그러니 너도 팔지 말고 훗날 네 아들에게 물려줘라. 저 건너 밭은 네 사촌형 밭이니 사촌끼리도 잘 지내도록 하라.” 내 처가도 형제간 우애가 정말 좋다.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은 시골에 자주 모여 즐겁게 지냈다. 가을이면 텃밭의 배추를 뽑아 온 가족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맛있는 보쌈김치도 만들어 두툼한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곁들이며 축제를 열었다. 남은 텃밭에는 형제들이 나눠 먹자고 건강에 좋다는 ‘아로니아’ 나무를 심었다. 형제들이 모여 거름 주고 김매고,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함께 수확을 하곤 했다. 어느 가족 못지않게 형제들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작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옛날 어른이라 그런지 덩치가 가장 큰 뒷산은 장남에게 벌써 명의이전을 해놓으셨다. 나머지 논밭 그리고 집이 있는 대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있다. 분배 과정에서 서운함이 있었고 결국 형제들은 옛날 같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물론 법이 있기는 하지만 형제간 문제는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살아 계실 때 어느 정도 정리하시고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특별수익’을 챙긴 손윗사람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품어야 한다.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나눠놓고 선택 우선권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상황은 거의 없다.
- 2018-10-1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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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의 저자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
-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지만, 죽음과 관련해 늘 최초란 수식어가 붙는 사내가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품정리인으로 활동했고,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를 창업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의 정보 중 상당수는 그의 입과 글을 통해 나왔다. 김석중(金石中·49) 키퍼스코리아 대표의 이야기다. 그가 창업 8년 만에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책을 펴냈다.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유품정리 개념이 도입된 이후 우리 사회 문화는 많이 달라졌는지 김석중 대표에게 물었다. “멍밖에 안 들었어요.” 기대 밖의 대답. 유품정리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는 누구나 아는 그 인물이 아닌가? 관련 기사만 검색해도 방송과 신문, 잡지를 막론하고 그와 회사 이름이 오르내린다. “국내의 유품정리 분야는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유품정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유품정리인은 보았다’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을 때였어요. 당시 이 책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요. 하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고독사 같은 자극적인 주제에만 집중됐어요. 왜 우리가 유품정리를 해야 하는지, 죽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없더라고요. 그 후 국내 유품정리 산업은 ‘청소’의 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어요. 유품정리를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제일 좋은 것은 직접 하는 것 유품정리는 고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김 대표는 정의한다. 유품은 망자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타인이 정리할 수 없고, 사망 후에는 상속 권한을 가진 유족만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법적 배경을 갖고 있다. 아울러 유품은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기념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는 고인의 유품을 추억이 담긴 기념품으로 소중히 여기고, 이를 친척이나 친지에게 나눠주는 카타미와케(かたみわけ)라는 문화가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 유품정리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유품정리는 결국 유족들이 고인의 물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보니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인 종활(終活)의 하나로 생전정리를 일상화하고 있어요. 이에 반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접하는 것을 너무나 금기시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들 찜찜해 하잖아요. 빨리 치워버리려 하고요. 그러면서도 유명인의 유품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죠.” 실제로 국내의 유품정리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상당수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업자가 많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평당 단가를 매겨 고인의 짐을 쓸어간다. 이후 값나가는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를 거친 후 돈 안 되는 것은 모두 버린다. 환가(換價)할 수 없는 것들은 거기 담겨 있는 것이 추억이든, 학술·예술적 가치이든, 중요한 정보이든 상관없이 처분한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직접 해보라”며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나 생전정리는 필요해요.평소엔 관심조차 없었던 생전정리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버릴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알게 되죠. 유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물건을 남기고 버릴지 직접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깨닫게 되지요. 남은 가족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되고요.” 일본에선 스스로 조금씩 정리를 하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느끼면 유품정리 회사에 예약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이 있어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 키퍼스코리아에서도 이런 예약을 받는다. 김 대표는 “때가 되면 와 달라는 약속의 의미이지 구체적인 계약의 개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할수록 돈 까먹는 일 김 대표가 유품정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회사 직원이 사고로 세상을 떠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유품정리회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일본인 지인을 통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회사 키퍼스를 설립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만나 의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김 대표의 진심을 알게 된 요시다 사장은 지금까지 후견인을 자처하며, 한국 직원의 일본 연수, 소모품 지원과 같은 사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2010년 시작한 김 대표의 유품정리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현실은 냉정했다. “제대로 유품정리를 하려면 현장에 직접 가서 견적을 내야 해요. 하지만 현장에 가서 견적을 내면 비싸고 번거롭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한 상조회사와 MOU를 맺고 유족의 의뢰를 받았는데, 6년간 실제로 성사된 건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사업을 할수록 손해만 봤어요. 결국 견적을 내기 위해 교통비만 허공에 날린 셈이 됐죠.”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유품정리 과정은 매우 철저하다. 유족에게 의뢰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는 시간이 걸린다. 유언장이나 권리관계 계약서, 귀중품 등뿐만 아니라 후대에 남길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추억이 담긴 물건까지 골라낸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상담이 이뤄지고 필요할 경우 법적 절차나 세무 처리가 진행되도록 돕는다. 이러다 보니 비용도 올라간다.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정도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아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신속하게 처분하길 원하는 유족이라면 이러한 과정이 맘에 들 리 없다. 그의 유품정리 사업이 국내에서 번창하지 못한 이유다. 그나마 일이 들어와도 현장에서 천대받기 일쑤다. 자살한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가 건물주에게 “죽어 나간 집이라고 소문내는 거냐”며 손가락질에 야유까지 받는 상황은 예사다. 관련 사업 중 그가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치매 등으로 인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떠난 부모의 짐을 치워 달라는 의뢰다. “집을 팔아 상속세를 아껴보려는 분들이 연락을 합니다. 이런 경우 성년 후견인 지정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작정 맡기려는 분들이 있죠. 법적 절차 없이 물품을 처분하면 불법입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유품정리 알리는 일, 계속할 것 결국 2010년 창업 후 키퍼스코리아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용 차량도 있었고 일본에서 연수까지 마친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익 창출이 잘되지 않았다. 차량은 매각됐고,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가슴에 멍만 들었다. 김 대표는 키퍼스코리아를 창립하기 전부터 해왔던 항공사용 기내 서비스 물품이나 기업체 식·소모품 등을 납품하는 회사를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입은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10년 전쯤엔 사업을 꽤 크게 벌였지만, 유품정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이 사업마저도 상당히 축소된 실정이다. “키퍼스코리아는 1인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의뢰가 들어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 과거에 함께 일본 연수를 받았던 경험자를 불러 함께 처리하는 방식이죠. 이제는 견적 의뢰가 오면 먼저 설문 문항을 보내드려요. 직접 가지 않고 비용을 산정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항목이 24개나 되다 보니 설문만 보고 포기하는 유족도 있답니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유품정리에 대해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10년 이상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잖아요. 누군가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밟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생전정리에 대한 마음도 바꿨어요. 업계에 회사들 많은데 꼭 내가 직접 생전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나? 다른 회사들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유품정리인이자 전문유족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서 책도 썼고 앞으로는 죽음 연계 교육도 해보려고 해요. 몇 분이라도 모아놓고 자서전 쓰기 활동과 더불어 자기성찰을 돕는 키퍼스 노트의 국내 소개도 계획하고 있어요.”
- 2018-09-1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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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확인
- 퇴직 후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조촐한 사업단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최근 하반기 예산 부족으로 인원을 줄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원을 줄일 수 밖에 없으니 혹 사정이 나은 사람이 있으면 몇 개월 쉬었다 다시 만나자고 전체 회의에서 부탁했으나 자원자가 없었다. 넉넉한 연금을 받는 퇴직 교원도 있고 공무원 부인도 있으나 밥그릇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러시안룰렛, 제비뽑기로 선택을 했다. 재수 없게 선택된 사람은 40대 미혼남이었다. 그는 홀아버지를 부양하고 있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구구절절 눈물까지 보이며 애원했으나 서울시 핑계만 대며 냉정하게 이별을 고했다. 20여 년 전, 중소기업에 근무할 당시 해외 공장 이전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다니던 회사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러나 현지 공장이 안정화되기도 전에 IMF의 쓰나미를 만났다. 회사의 구조 조정 칼춤에 간부 사원들부터 적절한 보장과 대안 없이 그냥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해고 통보를 받는 날, 너무 당황하고 낙담하여 수십 번 드나들어 익숙한 대표이사실의 출입문 손잡이를 찾지 못해 허둥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구토가 나기까지 했었다. 천지가 무너진 느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은 평상시와 똑같이 정장을 입고 집을 나왔다. 갈 곳이 없어 2호선 전철로 도심을 순환하고 남는 시간을 사우나 수면실에서 잠으로 보내다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생활을 1주일 했다. 가장(假裝)직장인인 생활은 1주일이 한계였다. 너무나 많이 남는 시간과 무기력한 일상을 감당할 수 없어 가족에게 고해성사하고 긴 절망과 어둠의 터널을 함께 건널 수 있었다. 2000년 초 회사를 창업하여 월급을 받는 처지에서 월급을 주는 처지가 된 적이 있었다. 초창기는 회사가 잘 굴러가 직원도 많이 뽑고 사업장도 늘리고 배포 크게 다른 회사도 인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인수 회사의 심각한 부채가 발목을 잡았다. 승자의 저주,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마음이 급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직원정리부터 시작했다. 연봉을 많이 받는 힘 좋은 간부 사원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가장 힘없고 연약한 직원부터 칼을 대기 시작했다. 모두 험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눈치라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직원을 불러 상황을 에둘러 설명하고 해고 통보를 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담긴 얼굴로 인사를 한 뒤 휘청거리며 출입구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20여 년 전 내 모습이 보였다. 한때는 해고자, 실업자라는 주흥 글씨 때문에 참담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을 가슴 시리게 느껴 본 적이 있었음에도 타인에게 그 살인을 죄책감 없이 너무 쉽게 자행했다. 참으로 못난 경영자임을 자책하며 그날 몰래 서럽게 많이 울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은 개인의 장구한 서사를 만들고 생존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음을 요즘에서야 조금 알 수 있다. 한때는 노동이 개인의 시간과 영혼을 구속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은 비전과 가치를 실현하는 가슴 저린 화학적 변화의 실천은 아니더라도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 생존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임을 철들어 알게 되었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이가 되었다.
- 2018-09-0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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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귀촌이 아니라 ‘이도(離都)’
-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7-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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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의 서점’ 옹골찬 귀촌 프로젝트
- 산과 산 사이 도로를 줄기차게 달려도 산 첩첩. 깊고 후미진 산간이다. 도로를 버리고 접어든 비좁은 산길 끝자락 산 중턱, 후련하게 탁 트인 거기에 나무선(57) 씨의 거처가 있다. 풍경의 절반은 산, 절반은 하늘. 또는 절반은 청풍, 절반은 구름. 절집 자리처럼 개활하니 명당이렷다. 나무선 씨는 서점을 운영한다. 외진 산골짝 서점을 누가 찾아들까 싶지만 드나드는 발길이 허다하단다. 해서, 그는 느긋하다. 살뜰히 정붙이고 산다. 여기가 낙원이거니, 그리 자족한다. 서점 이름은 ‘터득골 북샵’이다. ‘자연주의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다.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그리다 마침내 이루었다. 이 산중으로 귀촌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나무들 울창한 숲속에 차린 서점이란 필시 이색이다. 게다가 장사가 된다 하니 거의 이변이다. 책 또는 독서는 긴 세월 동안 매력적인 향을 뿜었다. 지식 축적과 소통의 유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인터넷, 휴대폰, SNS 등속의 강력한 적들에 밀려 변방으로 밀려났다. 출판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온라인 서점의 파죽지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나가떨어졌다. 정황이 이러하지만 나무선 씨의 숲속 서점은 순항 중. 귀촌생활 방식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중. 귀촌 이전, 그는 서울에서 출판업자로 뛰었다. 말하자면 책을 만드는 사람에서 책을 파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쯤 전에 ‘터득골 북샵’을 오픈했다. 나는 언젠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던 사람 하나가 시골에 내려가 1인 출판사를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출간한다 했다. 당시 퇴고를 마친 원고의 출간을 위해 출판사를 물색 중이었던 나는 그 산골 출판사 사장에게 구미가 동해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두세 차례 전화통화만으로 상황 끝. 당시 그 사장은 재정난을 내세우며, 더 유능한 출판사를 찾으소서! 라는 요지의 기별을 해왔었다. 전화기에서 울려온 그의 언사가 어찌나 정중하고 수굿하던지 스타일 구기고 사기 저하됐던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그 산골 출판사 사장이 바로 나무선 씨다.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창업, 이후 3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책들을 냈어요. 1년에 한두 권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죠. 그러나 출판이라는 게 남의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 아닌가, 내 마음은 늘 시골로 향하는데 어쩌자고 서울에 눌러 사는가, 그런 회의가 밀려들더라고요. 그게 귀촌의 단초였어요.” “황대권 작 ‘야생초 편지’도 기획하셨죠? 몇 부나 찍었죠?” “100만 부 정도 나갔습니다. 그 밀리언셀러의 파장으로 야생초 바람이 일었죠. 저 개인에게도 큰 행운이었어요. 덕분에 수입을 올려 이곳 산중턱에 너른 터를 장만하고 이주할 수 있었으니까. 출판을 해서 땅을 산다는 게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빈번한 헛발질 뒤에 용케 운이 따랐던 거죠.” “아까 마음은 늘 시골로 향했다 했어요.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은둔자 성향, 제겐 그런 게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철학이나 자연, 명상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어요. 니어링 부부가 실현한 ‘조화로운 삶’에, 존재지향적인 사유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죠. 그들의 삶이 부러웠고 그리웠고 꿈꾸었어요. 그렇다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당연하다 봤어요.” “사는 일의 희로애락은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마찬가지 아녜요?” “필생의 프로젝트로 귀촌을 했으나 막상 실현은 어려웠어요. 터를 잡아 집을 짓는 일에서부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 등등 상처받기 쉬운 난항이 많았어요. 한동안 너무도 힘들었죠. 먹고살아야지, 무아(無我)도 해야지, 벅찼어요.” “무아? 자아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죠? 불로 태우고 도끼로 찍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자아라 하고.” “자칫 제멋에 취해 가족이나 생활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기에 그치기 쉬운 게 무아 공부죠. 저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지 모르지만, 산중에 살며, 야생의 자연을 경험하며, 리얼하게 몸으로 생태와 부닥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어요.” 나무선이라는 이름에 그의 지향이 이미 완연하다. 고요한 ‘나무[木]’를 닮은 ‘선(禪)’으로 날뛰는 마음을 단속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단다. 호랑이를 봤다! 마음을 돌보면 눈도 밝아지는가. 나무선 씨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본 눈이다. 호랑이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귀촌 직후, 계곡 물가에서였단다. “폭우가 쏟아진 이튿날 아침이었어요. 천둥처럼 요란한 물소리 들리는 계곡 저편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떠억 앉아 있더라고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척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햐! 들고양이를 호랑이로 오인한 거 아녜요? 국내의 야생 호랑이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졌어요.” “남들은 영양 부실로 헛것을 본 거 아니냐고들 하지만 분명히 호랑이였어요. 황소처럼 커다란 호랑이. 냅다 달아났지만 반갑더라고요. 야생 호랑이가 생존하는 생태계에 외경을 느꼈어요.” “토속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간주되죠. 귀촌 환영 사절단으로 신령이 납시었군요.(웃음)” “나의 삶은 이제 모험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저는 그렇게 호랑이 출몰의 의미를 해석했어요.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라는 통첩으로 여겼어요.” 호랑이라는 전설과의 기묘한 해후를, 그는 삶을 일깨우는 자연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 같다. 호랑이뿐일까. 들풀에 얹힌 아침 이슬도, 말매미의 그악스런 사이렌도, 듣고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상의 선물이자 위안이자 기적일 수 있다. 나무선 씨는 한때 ‘조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내 이효담 씨와 동행, 미국의 인디언 촌락이나 인도의 오르빌 같은 생태마을을 답사하기도 했다. 공동체 운동의 비전을 탐색하기 위해. “국내외의 공동체를 나름 둘러본 뒤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장단점을 고루 확인하고서였죠. 특히나 저 같은 인물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교만이거나 무익한 도전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어요. 제가 보기보다는 엄청나게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마음공부라는 걸 해왔지만 때로 문제가 불거져요. 공동체를 꾸렸다가는 자칫 생태근본주의에 매몰된 독불장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해서, 새로운 걸 만드는 대신, 기존 우리네 마을에 서린 미덕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는 게 더 소중하다고 봤어요. 마을 노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서린 내공을 배우는 건 더욱 소중한 학습이라 봤고요.” “쇠약한 노인들을 무시하는 게 현실이죠. 과거 전통사회에선 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하기조차 했어요. 오늘날에도 노인에 대한 푸대접은 비일비재해요. 이는 어쩌면 인간사의 숙명일지도. 노화란 쓸쓸해요.” “비록 고달픈 인생을 살았더라도 시골 노인들의 기본 태도는 매우 정중합니다. 상대의 성정까지를 헤아려 존중해줘요. 이게 엄청난 내공이죠.” “마을과 관련해선 어떤 일들을 했죠?” “예컨대, 이곳 산간 지구 일대에 산재하는 100여 가구 주민들이 동참하는 마을신문을 만들었어요. 계간 신문을 8년째 발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며 저 자신부터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귀촌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유대도 강화됐어요.” 여한 없는 삶이란? 초여름 산야의 풍광이 싱그럽다. 바람에 설레어 부푸는 숲, 나무 우듬지를 비집고 은빛 비늘처럼 쏟아지는 햇살, 저마다 가창력을 뽐내는 새들의 노래…. ‘터득골 북샵’의 명품은 어쩌면 자연 풍경이다. 나무선 씨 부부가 10년 이상을 공들여 가꾼 집과 정원과 텃밭 역시 빼어나기는 마찬가지. 이 근사한 공간에 무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 수시로 공연과 이벤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무선 씨가 이 산골에 들어와 첫 번째로 한 일은 집짓기였다. 8평짜리 흙집을 손수 지었던 것. 이후 증축을 통해 맵시 있게 규모를 늘렸다. 부부 살림채로 쓰이는 이 집엔 ‘다명헌(多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쓴 글,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빛이 밝아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뜻)에서 빌려 쓴 이름이다. 예순 살을 코앞에 두었으니 부질없는 욕망이 잦아들 시절이다. 삶을 한층 진솔하고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이이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나무선 씨는 귀촌으로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그가 추구하는 무아와 무욕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일구고 있으니. “흙집을 지을 때 다산 초당을 염두에 뒀었죠. 삼간 초막이면 산중 살림에 족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이젠 살림 규모가 크게 늘었어요. 소박한 귀촌생활을 작정했으면서도 서점을 차린 건 어쩌면 모순이죠. 색다른 방향으로 삶이 풀려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궁리해왔던 지역문화의 거점 하나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보람과 만족이 커요.” “산골에서 돈도 벌고, 지역문화에도 이바지하고, 일거양득의 신선한 모델이에요. 극히 내성적이고 조심성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선생에겐 복주머니나 꾀주머니가 장기처럼 붙어 있는 건 아녜요?(웃음)” “어떤 이들은 가급적 일판을 벌이지 말고 조용히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도 하지만,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일 없이 사노라면 괴팍해지고 피곤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할 게 빤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삶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 좋아하는 곳에서 적당한 수입이 가능한 일을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것, 그게 여한 없을 삶이라 봅니다.” 일로부터의 은퇴란 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해방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감옥이다. 귀촌을 하더라도 공을 쏟을 일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한다! 나무선 씨의 생각은 그렇다. 나무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에 대한 피상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자. ❷ 귀촌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버킷리스트를 준비하자. ❸ 수입 창출을 위한 일을 갖고자 한다면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하자. 가령 산골 북샵도 유망하다. 500평 정도의 부지에 크지 않은 집을 지어도 무방하다. 서책 구입과 가구 장만에 소요될 비용 조달 여력은 필수다. 책에 관한 안목을 기르고, 도서 유통 구조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객들은 책만을 사기 위해 산골 북샵을 찾지 않는다. 주변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❹ 귀촌 현장과 귀촌인들을 사전에 충분히 접하라.
- 2018-07-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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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소자에게 새로운 삶을 이어주는 브릿지 역할
- 법무부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일반 교도소에서 출소한 6만 2624명 중 3년 이내에 24.7%가 재복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법무부 교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출소 후 창업, 취업에 성공한 출소자 1670명의 재범률은 일반 출소자와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대부분 출소자들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생계 문제를 꼽는 만큼 출소자의 취업이 재범을 방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일반 비영리법인 사회적기업에서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일반기업으로는 최초로 법무부 인가를 받은 한울배터리 사회적협동조합 이명원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출소자들에게 취업은 사회와 출소자를 잇는 가장 효과적인 가교(架橋) 역할이 되고 있다. 이 업체는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취약계층 채용에 중점을 두고 사회 공익을 실천하는 비영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이며 예비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명원 대표는 “전문기술 습득을 위한 직업훈련이 출소자 취업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재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배터리를 판매하거나 출장 교체 서비스 및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을 고용해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갱생보호대상자 및 사회 취약계층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정본부의 구인·구직 만남의 행사에 참여하고, 직업 훈련을 통한 창업을 지원하고, 매출 수익금을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사회 진출과 복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명원 대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 절실함에 절망을 딛고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였고,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유통 분야 10여 년, 배터리 분야 9년 등 20여 년에 걸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서울시에서 3000만 원을 지원받고 무담보대출은행에서 1000만 원을 빌려 그 당시 받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업자 20여 명을 모아 힘을 합쳤다. 이로 인해 배터리업체를 열어 전국 30여 곳에 지점을 내면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명원 대표는 “나 자신이 전과자였기에 재소자 내면에 엄습하는 현실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재소자들의 성공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갱생보호대상자들은 출소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방황하며 결국 재범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고, 당장 먹고살 걱정 때문에, 사회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수감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재소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으로 재범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취약계층과 출소자들의 주요사업 특징과 그중 배터리사업을 대표사업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출소자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창출, 창업지원, 기술교육 등은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환으로 자동차정비 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운영 리스크가 적고, 기술습득이 용이한 차량 및 배터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차량용 배터리, 산업용 배터리, 정류기반 배터리, UPS 배터리 설치 및 유지보수로, 조합원 모두가 다년간의 차량 및 배터리 분야의 사업 노하우를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차량에 관한 모든 상담과 업무가 가능하다. 한울배터리 서울 본점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합원 모두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어 분류상 사업자 협동조합인 것이 특징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에 환원되고, 갱생보호대상자 및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고용 인원 증대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배터리사업을 위주로 하는 시스템분야에서 2017년에 법무부 고용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또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법무부, 교정본부,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연대하여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교정본부와 법무보호복지공단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많은 공공단체들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를 최초로 받은 취지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인물대상(사회공헌부문)’ ‘2018 이노베이션 기업 &브랜드대상’ ‘2018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인물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원 대표는 “회사 운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 하는 것은 업무 시 직원들의 안전”이라며 “안전한 작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적 적응 능력 배양과 더불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들어주며 소통의 시간을 갖는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향후 출소자들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올해부터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하여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비소 개설, 여성 출소자를 위한 크리닝사업부 신설 등을 계획하고 있고, 조합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해 출소자들의 경제 자립 프로세스 마련을 위한 방안도 꾸준히 마련할 계획이다. 향후 갱생보호대상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일자리, 기업 외면의 본질적 문제점을 분석·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술교육을 병행·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서 나아가 창업을 위한 단계적인 서비스를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마음으로 ‘함께 나눔, 함께 행복, 함께 발전’을 위한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는 이명원 대표는 “갱생보호대상자의 창업교육과 기술교육, 각 구치소 및 교도소 교정본부 산하기관의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에 지속적으로 적극 노력할 예정”이라 밝혔다.
- 2018-06-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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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기업에 도전하는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 김영철(59) 바인그룹 대표는 가방에 MP3를 네댓 개씩 갖고 다닌다. MP3마다 영역별로 다운받은 강의 파일이 담겨 있다. 산책할 때도, 러닝머신에서도, 심지어 출장 갈 때도 늘 강의를 듣는다. “리더의 에너지는 공부에서 나온다. 공부는 가장 확실한 자기충전 방법이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나눠줄 것은 에너지다. 내가 매일 공부하는 이유다.”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유도선수 출신. 무릎 연골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동화책과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1995년 교육전문기업 ‘동화세상 에듀코’를 창업한다. 동화세상 에듀코는 유아에서 성인까지 온·오프라인 교육을 망라, 티칭과 코칭을 아우르는 교육전문기업이다. 2017년 에듀코를 모체로 교육·유학·여행·외식·무역·건설 등을 계열사로 아우르는 바인(vine)그룹으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포도송이처럼 선한 열매를 알차게 맺자는 의미에서의 새 출발 선포다. 신설동에 소재한 바인그룹 사옥은 마치 자기계발 실행의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대표 집무실엔 실행 플랜 게시판과 2095년까지의 미래비전 백년달력이 걸려 있다. 직원 화장실엔 벽마다 눈 돌릴 틈 없이 명언이 빼곡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가 건네는 명함엔 ‘나 김영철은 한평생 끊임없이 수양해 자신을 누리며 남들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명선언이 담겨 있다. 명함 타이틀도 바인그룹이 아니라 바인벤처다. 스타트업 벤처의 유연하면서도 맹렬한 야생정신을 배우겠다는 자기다짐의 의미다. 사옥 분위기뿐 아니라 김영철 대표도 마치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제 저자들보다도 실행을 더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그 덕을 실제 체험했고요. 자꾸 드러내서 가시화해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솔선하고 직원에게도 권합니다. 유도선수인 제가 사회에 나와 영업의 고수가 되고, 또 경영자로 변신할 때 사회에서 받은 강의, 교육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교수, 강사란 말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90도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 교육에는 예산의 한도를 정해놓지 않고 좋은 프로그램은 아낌없이 받도록 한다. 권장을 넘어 아예 의무화해 놓았다. 아이디어 창조, 마인드, 스피치, 리더십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교육, 지닉스 교육을 받는다. 지닉스는 Genie(잠재력)+Explore(탐험·여행)의 합성어로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기존 교육에 매번 새로운 교육이 더해지니 교육비 예산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직원의 성장판을 열려면 회사 예산의 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직원을 이용해 회사 성과를 올리기보다, 회사를 이용해 직원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에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게 학력, 경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인재철학이다. 그는 “사과 씨 안엔 사과가 없지만 사과가 되지 않느냐”며 잠재력을 읽고 육성하는 게 바로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잠재력이야말로 학력, 경력보다 확실한 인생 전공이기에 그것을 읽어주고 그것을 살펴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계발을 잘하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서 학교 다니는 것도 사치였어요. 유도를 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책 공부 말고 사람 공부도 큰 것 같아요. 동네 어른들께 어깨너머로 배운 예의범절, 더불어정신 등이 인생의 큰 공부더라고요. 남들은 흘려듣는 이야기도 저는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귀담아들었어요. 유도하면 장학생 된다고 해서 유도 시작하고, 유도 국가대표 선수되려면 술, 여자,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실천했고요. 그것도 자기계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가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 늘 책, 이론 공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정신 자세, 세상 공부, 즉 더불어정신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더 큰 성과는 옆 사람,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계발이 성공 처세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라고 말한다. 박수 받는 것 못지않게 박수 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직원들과 비인기종목 외국선수팀 응원을 굳이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계발이고 참교육이다. 유도와 경영,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게 서로 통하는지요. “유도를 하며 몸으로 익힌 정신력,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 후배를 챙기고 선배와 스승님을 모시는 진심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통하더군요. 그 외에 두려우면 피하기보다 부딪친다는 실행력,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성 등 몸으로 배운 것이 영업,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도를 하다 다치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출판사 영업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성과를 내서 시쳇말로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뭐였습니까. “운동선수가 가진 승부근성과 체력이 도움이 됐어요. 좌절되니까 영업을 통해서라도 승부를 내겠다.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렸지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유도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라서 제 잠재능력을 잘 몰랐는데,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영업뿐 아니라 조직관리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됐어요.” 선수를 그만둘 무렵 90kg에 육박했던 몸무게가 60kg대로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체력과 승부근성으로 넘길 수 있었다는 회고다. 영업사원 초기엔 거절당하면 상처도 많이 받았단다. 그냥 안 사면 되는데 모욕을 주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영업사원의 근성이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없지 않은가. 때로는 덩치 좋아 보이는 그에게 시비조로 싸움을 거는 남자 고객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한판 붙더라도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 흠씬 두드려 맞고… 분한 눈물을 삼켰지만 그때 성질이 많이 순화됐다는 회고다. 그는 늘 현장정신을 강조한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두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 아버지의 궤도를 그대로 밟아 유도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큰아들 김광섭 상무 역시 현장 경험을 거쳤다. 작은아들은 대학 때 아프리카에서 6개월 봉사를 하도록 했단다. 현장에서의 쓴맛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위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서다. 35세의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요. 23년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위기의 격랑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몸을 다쳐 유도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위기도, 역경도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상황이든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제 평생 취미는 결심입니다. 창업을 하면서 결심했어요. ‘정상에 도전할 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겠다,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문제 삼지 않겠다, 나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 안 한다’라고요. 내 안의 잠재력을 작동시키려면 강렬한 의식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해요. 나는 매일매일 결심해요. 고민하면 걱정이 생기지만 결심하면 꿈이 커집니다. 문제는 작아지고요.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초긍정으로 하면 그것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습관이 운명이라고 하는데요. 운을 부르는 좋은 습관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운동과 신문 스크랩입니다. 사람은 배신당할 때 제일 상처가 깊다고 하는데요. 정작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신해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이런 증세가 올 리가 없는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후회하지요.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해 배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습관을 생활 1순위로 놓고 있습니다. 평일 아침에는 달리기나 수영, 주말엔 가족과 등산 등을 규칙적으로 하려 해요. 그 외에 조간신문 6개 정도를 통독하고 직접 스크랩합니다. 한 달이면 얼추 스크랩 한 권이 채워집니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읽어보라 권하지요.” 정말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이시네요. ‘하면 된다’ 산업화 세대의 구호이지만 요즘 신세대는 ‘되면 한다’ 주의 아닙니까.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 학력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믿어주면 서로 통하게 돼 있어요. 그들도 신임한다는 것 다 알더군요. 다만 7대 3의 법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7은 잘해주고 3은 요구하고 지적해야 해요.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자만심을 갖게 돼요. 반면에 지적만 해대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고요. 인재 육성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자애보다는 신념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녀교육에도 적용됩니다.” 김 대표는 “한국 사람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정해줄 때 능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 직원 4500명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이 번호로 하루에 200통의 문자가 온단다. 그중 제일 기쁜 내용은 “내 꿈을 이룰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바뀌었다”며 ‘비포 앤 애프터’의 성장기다. 직원들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다시 읽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도 기업이 매년 성장했습니다. 또 영역을 확장, 바인그룹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어떤 포부를 갖고 계십니까. “창업할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한 맺힌 성공, 돈 많이 벌어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습니다. 이후 기업의 가치관을 생각하게 됐어요. 성장을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직원성장, 고객성장을 통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백년기업으로요.” 김영철 대표는 앞으로 바인그룹은 엄청난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며 3년 후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직원들의 잠재력을 믿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리더가 팔로워를, 어른이 젊은이를 어마어마한 만남으로 서로 생각해 환대하고 대우할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1960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부상으로 유도의 꿈을 접고 출판사 영업사원을 했다. 1995년 교육전문기업 ㈜ 동화세상에듀코를 설립했고 2017년 10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바인그룹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성장을 핵심가치로 둔 인재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중앙회 선정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상’ 수상,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 2018-06-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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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는 성장해 엄마의 미싱 소리에 반응했다-연희데코2050
- 도희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미싱을 돌렸다고 말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심장 소리에 맞춰 미싱은 잘도 돌아갔고, 도희의 심장도 함께 박자를 맞췄을 것이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 도희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함께 미싱 페달을 밟는다. 할머니 대에서부터 시작한 수예점 가업은 50년이 돼간다. 가업을 잇는 것만으로 계승할 수 있을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특별한 계승 유전자를 바탕으로 가업을 이어받았다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 가업을 엮어가다 각자 다른 듯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행복한 가업 승계를 하는 수예 전문업체 연희데코2050(이하 연희데코)의 모녀 대표 고백연(57), 김도희(24) 씨를 만났다.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연희데코의 작업실은 재래시장 현대화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성남중앙시장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연희데코는 원래 재래시장 가업 승계의 바른 사례로 성남중앙시장을 대표하는 업체이기도 하다. 재개발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가을까지 지금의 작업실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임시 거처라지만 방문객을 고려한 상품 진열은 물론 가업 승계의 향수를 느낄 만한 전시물을 마련해 놨다. 고백연 씨의 어머니가 사용했다던 50년 된 가위와 자, 미싱 그리고 가족의 모습을 그린 캐리커처와 사진들이 작업실 입구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 정신에 창의력을 더한 엄마 고백연 씨 “옛날 재래시장 좌판에다 원단 놓고 이불 팔던 것이 시작이었어요.” 1970년 무렵 초등학교 2, 3학년이던 고백연 씨는 인천에서 성남으로 이사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 김순남(85) 씨가 성남중앙시장 좌판에서 이불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뭐든 꿰매고 기워 쓰던 시절, 이불만 팔아치우면 될 법도 한데 어머니는 좌판 한쪽에 미싱을 들여놓았다. 베개며 이불이며 떨어진 것을 수선해주는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 모습을 보던 고백연 씨는 그것뿐만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새롭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임신하고 난 뒤 엄마가 계신 중앙시장으로 들어왔어요. 5평 남짓 가게에 들어와 미싱 앞에 앉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남들의 시선이 좀 의식됐다. 없는 살림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에 고백연 씨는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경희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와 간호사 생활도 10년 정도 했다. 산부인과 간호사 생활을 하고 나니 힘도 들고 미래가 없어 보였다. 고백연 씨 머리에 첫 번째로 스친 것이 원단 제작이었다. “신생아를 받는 조산원에서 일했어요. 힘들기도 하고 제2직업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했는데 딱 첫 번째로 생각났어요. 저는 그때 10년, 20년이 지나면 직접 만든 제품에 대한 수요가 반드시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한 분, 한 분 일을 해드리고 나면 손님이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엄마보다 제 장사가 더 잘됐어요. 원단을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일할 때도 있었고요. 도희가 저랑 일한 게 7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장사한 거예요. 손님들이 이 아이 친구죠. 이렇게 오랜 시간 일했지만 저는 지금도 원단을 보면 설레요. 제품을 보면 죽은 애들 같아요. 창작한다는 거는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가업 승계에 대한 인식이 바뀐 딸 김도희 씨 엄마와 딸 ‘덜그럭’,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의 이끌림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애초에 두 사람 다 엄마가 가는 길을 따라갈 거란 생각은 없었다. 고백연 씨는 간호학과에, 딸 김도희 씨는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니 말이다. 원단 사업은 꿈에도 없었다. “남들 다 똑같이 하는 거처럼 인서울을 목표로 수능점수 맞춰서 대학에 갔는데 학교가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자퇴는 자신이 없어서 1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엄마 가게에 매일 나갔어요. 그때 상인회 회장님이 중소기업청에서 전통시장 살리기 프로젝트로 상인들을 교육하는 대학을 만들었는데 엄마 대신 저더러 한번 가보라고 권하셨어요.” 한 달 코스로 진행된 그곳에서 김도희 씨는 생각에도 없었던 일에 눈을 뜨게 됐다. 가업 승계였다. “전통시장의 역사를 이어나가려면 가업 승계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엄마와 함께 일을 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교육을 통해 인식이 바뀌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 어머니와 할머니요. 이건 정말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차별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까지 별다른 꿈이 없었는데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이 끝나자마자 수예점을 홍보하고 판매까지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해 겨울에는 온라인 판매를 위해 독자적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내 어엿한 업체 대표가 됐다. 영문학과에서 경영학과로 전과해 사업가로서의 수업도 병행 중이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 사업에 적용하면서 공부하니 학교 성적도 좋아졌다. 엄마와 딸이 따로 또 같이 성장해가다 “어머니는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어린 저를 독립적인 주체로 대해주셨어요. 대개는 자식이 부모 밑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잖아요. 어머니는 처음부터 제가 버는 것과 당신이 버는 것을 구분하셨어요.” 충분히 펼치고 성취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식이 성장한다는 것을 고백연 씨는 알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 김순남 씨가 그랬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저희 엄마랑 일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 있잖아요. 다른 집들을 봐도 가족이 같이 사업을 해서 좋은 게 있는 반면에 의견 차이도 심해요. 엄마의 기존 틀이 있다면 딸이 생각하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 엄마 고마운 것이 뭐냐면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어요. 잘하든 못하든 간에 하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로부터 이어지는 모녀의 가업 승계 개념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조상이 물려준다는 의미보다는 하나의 독립체로 성장하다가 어떤 시점에서 엮이듯 오묘하게 닮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제 스타일과 딸의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개성과 장점이 다르니 서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꾸준히 각자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조화롭게 멋진 모습으로 어울리게 되는 겁니다. 원색보다는 섞여서 나오는 창조적인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 색깔을 지키고 찾아가는 것, 그게 가업 승계라고 봐요.” 지금의 연희데코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백연 씨가 우리 집 셋째 ‘도순’이라고 부르는 연희데코 전시실이 있다. 오래된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1층은 작업실과 구제 및 원단 전시실, 2층에는 손님맞이 테이블과 전시실이 있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이 아니기에 문의를 해오는 고객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이 또한 미래를 내다본 고백연 씨 모녀의 장기 프로젝트 중 하나다. “제 꿈은 도순이 집을 중심으로 연희거리를 만드는 거예요. ‘한국에 성남이라는 곳에 가면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거리가 있다’라고요. 외국 사람들도 방문하는 거리를 꿈꿉니다. 이곳이 활성화되면 수선하는 사람, 원단 파는 사람, 커피 파는 사람 등이 모이게 될 거고, 간단하게 음식도 만들어서 팔고요. 여기라고 북촌마을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요?”
- 2018-05-11 09:18